연재 주소 : https://www.ciweimao.com/book/100441357
한달 국룰
작품소개 :
서브컬처 작품들이 뒤섞인 크로스오버 세계로 전생했다. 처음엔 대충 남의 글이나 베껴서 돈 좀 만진 다음, 파친코나 돌리며 빈둥거리는 잉여로운 삶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치여 날아간 뒤, 17년 만에 뒤늦게 시스템이 각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특수한 히로인들과 가볍게 '접촉'하기만 해도 상대의 스킬을 바로 복사해 올 수 있다고? 심지어 이를 통해 스킬을 끊임없이 강화할 수도 있다고? 라이트 노벨, 만화, 음악까지 그저 식은 죽 먹기로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니?
"좋아, 그럼 난 서브컬처의 황제가 되겠어."
하지만——
이세리 니나: 좋아해요! 왜 대답 안 해요?! 난 그냥 내 마음속 생각을 말한 것뿐이잖아요, 내가 잘못한 거 없잖아요!
고코우 루리: 선배,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카니 나유타: 그 야마다 엘프 녀석은 분명 사쿠야 선배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혼인신고서는 제가 이미 가져왔으니, 선배는 얼른 도장이나 찍으세요~ 아예 가장 근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해 버리자고요!
…어째서 주변에 여자애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거지?
【크로스오버 짬뽕물, 《걸즈 밴드 크라이(GBC)》, 《시원찮은 그녀를 위한 육성방법》,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에로망가 선생》 등 등장——】
제1장 하마터면 내 치트키의 봉인이 물리적으로 풀릴 뻔했다1화
도쿄 수도권, 카와사키.
어두컴컴한 아파트 안, 모니터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방안을 비추는 가운데 경쾌한 타자 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우아하게 누비며 스크린에 파일 제목을 띄워 올렸다.
【신작 폴더】
"——아무튼, 폴더는 만들었어."
"신작 내용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
어딘가 무심하고 덤덤한 혼잣말과 함께, 목소리의 주인은 마우스로 '저장'을 누른 뒤 모니터를 끄고 몸을 돌려 방의 불을 켰다.
'딸깍' 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방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목 마루에 짙은 색감의 일본식 벽지가 발라진 방. 가구라곤 덩그러니 놓인 1인용 침대와 각종 라이트 노벨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 그리고 노트북이 올려진 책상이 전부인 단출한 구조였다.
"슬슬 시간이 다 됐네."
그는 점차 어둑해지는 창밖의 하늘을 쓱 훑어보고는, 천천히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깨끗하게 닦인 거울 위로 소년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구레나룻이 비대칭으로 내려온 까만 곱슬머리. 욕실의 차가운 조명이 측면에서 내리쬐자, 본래도 하얀 그의 피부는 유독 더 창백해 보였다. 오뚝한 콧날과 살짝 찌푸려진 얇은 눈썹은 누가 봐도 시선을 뺏길 만한 외모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턱을 치켜들며, 목울대를 굴려 탁한 숨을 내뱉었다.
"오늘 밤은 사치를 좀 부려볼까. 가끔은 고급 스시를 먹는 것도 나쁘진 않지……."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는 듯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는 소년.
그의 이름은 '시키 사쿠야', 지극히 평범한 전생자다.
전생하기 전에도 그는 지금과 비슷한 나이였다. 당시의 그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음악이라는 꿈을 좇았지만, 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벅찬 가난한 현실 앞에서는 당연히 이상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후에는——
공교롭게도 환생하자마자 고아원 스타트를 끊고 말았지만, 그래도 눈을 뜨자마자 본 풍경이 꼴통 고등학교 화장실 쓰레기통 안이 아니었고, 첫 울음소리가 교주임 선생님을 향한 살려달라는 비명이 아니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꽤 괜찮은 셈이었다.
그 후, 어떤 계기를 통해 그는 자신이 환생한 곳이 '서브컬처(2D)'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 사쿠야는 솔직히 좀 패닉에 빠졌었다. 무릇 '서브컬처'라는 딱지가 붙은 세계관에서는 온갖 비정상적인 사건들이 뻥뻥 터지기 마련이고, 자칫하면 이 소중한 두 번째 인생이 날아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극도로 몸을 사리며 몇 년을 버텨본 결과 이 세계는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위험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곳은 폭력으로 지배받는 '11구(Area 11)'가 아니었고, 대출 32년 껴서 산 집을 갑자기 튀어나온 빛의 거인(울트라맨)이 밟아 부수지도 않았으며,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마법소녀들이 길거리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날아다니지도 않았다.
징…….
세면대 옆에 둔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사쿠야가 무의식적으로 폰을 집어 들자, 마치 기관총 쏘듯 메시지가 연달아 팝업으로 쏟아졌다. 화면 너머로 상대방의 초조함이 생생하게 전해질 정도였다.
【Yama 선생님, 신작은 쓰셨나요?】
【제발 신작 좀 빨리 써주시면 안 될까요? 정 안 되면 구상이라도 좀 짤막하게 던져주세요, 네?! 선생님 휴식기가 너무 길어지고 있잖아요. 저 아직 신작 제목조차 못 받았다고요!】
당연하지, 아직 제목도 안 지었는데.
사쿠야는 속으로 츳코미를 걸었다. 화면이 꺼지려던 찰나, 다시 폰이 번쩍 빛났다.
【——저기요, 지금 제 메시지 보고 있죠…… 맞죠?】
갑자기 튀어나온 메시지에 사쿠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만약 잠금 화면 상태로 몰래 알림을 엿보지 않고 무턱대고 Line 어플에 들어갔다가 '읽음' 표시라도 띄웠다면, 지금쯤 꽤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지금 답장하면 엄청 피곤해질 것 같으니까, 일단 못 본 척해야겠다."
사쿠야는 가차 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고아 스타트로 시작한 환생 라이프는 그에게 꽤나 쓴맛을 보게 했고, 두 번의 인생을 거치며 깎여나간 탓에 음악에 대한 열정도 이젠 거의 마모된 상태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라이트 노벨을 써서 돈을 좀 만지긴 했지만, 다시 꿈을 좇기 위해 바닥부터 시작할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인간의 재능과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징!
방금 껐던 스마트폰 화면이 다시금 징징 울려댔고, 사쿠야는 무심코 곁눈질로 화면을 보았다.
【나·지·금·간·다】
지극히 평범한 네 글자였지만, 사쿠야의 머릿속에는 즉시 1급 경보가 울렸다.
그는 즉시 스마트폰을 '방해금지 모드'로 바꾼 뒤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표정 하나 안 변한 채 현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 타이밍에 튀지 않으면 그건 짐승만도 못한 놈이다.
……
카와사키, 긴자 거리.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는 번화가. 주변 상점가 외벽에는 온갖 홍보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파도처럼 끊임없이 귓가를 때렸다. 늘어선 중화요리 전문점의 간판들은 눈이 아플 정도로 네온사인을 번쩍이고 있었다.
길가에는 호객 행위를 하는 메이드 카페 알바생들이 널려 있었고, 심지어 골목 모퉁이에 있는 라이브 하우스(LiveHouse)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정성 들여 만든 무대 의상에 토끼 귀 머리띠를 쓴 어린 소녀들이 앳되고 화사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벚꽃 핑크부터 민트 초코색까지 다채로운 머리색을 한 채 꺄르르 떠드는 그 모습은, 마치 현실 세계에 잘못 뚝 떨어진 마이 리틀 포니 무리 같았다.
아쉽게도 저 무지개 포니들이 노래를 제대로 부를 줄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아니었으면 굳이 이런 작은 지하 아이돌이나 하고 있진 않았겠지.
퍽, 쿠당탕!
사쿠야가 지하 아이돌들의 스타킹 색깔이 심의 규정에 맞는지 학술적으로 고찰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붉은 인영 하나가 포탄처럼 그의 품으로 날아와 들이받았다. 이내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한 상대방은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얏——"
여리여리한 비명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사쿠야가 반사적으로 눈앞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빛이 도는 큼지막한 후드티를 덮어쓴 소녀였다. 하얀 손가락 끝이 다 가려질 정도로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픔에 조그마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상태였다.
아주 짧은 찰나, 사쿠야와 소녀의 시선이 교차했다.
새파란 눈동자 속에 경계심이 스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얼음이 녹아내리듯 당혹감으로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소녀는 튕겨 오르듯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병아리가 모이를 쪼듯 허리를 90도로 숙여 사과했다. 얼굴 양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와 뒤통수에서 짧게 땋아 내린 밤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죄, 죄송해요! 저... 저 지금 너무 급한 일이 있어서요!"
사쿠야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조그마한 붉은 인영은 후다닥 발걸음을 옮겨 쏜살같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누가 봐도 명백한 뺑소니였다.
사쿠야는 들이받혀서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문질렀다.
"덜렁거리기는. 역시 도쿄 놈들은 거칠다니까..."
그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리며 툴툴거리다가, 2초쯤 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방금 그 꼬맹이, 어디서 좀 본 것 같은데..."
복잡한 상념에 빠진 채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린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갈색의 작은 지갑 하나가 바닥에 죽은 듯이 얌전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지갑은 즉시 그의 모든 시선을 빼앗았다.
저 꼬맹이, 방금 도망가면서 전리품을 드랍한 건가?
【'특수 인물'이 감지되었습니다. 스킬 복사(临摹)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주우려 몸을 숙이던 사쿠야의 동작이 뚝 멈췄다.
귓가에 울려 퍼진 뜬금없는 목소리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의 시선이 허공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 마치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것 같았다.
"……."
환청이 아니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패널 창. 눈치 빠른 환생자 사쿠야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단박에 이해했다.
번쩍거리는 '스킬 복사'라는 네 글자에 그는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방금 그 꼬맹이, 무려 17년 동안 잠수 타던 내 치트키의 전원선을 박치기로 냅다 걷어차서 켜버렸잖아.'
제2장 《빈 상자(空の箱)》2화
【복사할 스킬은 '가창 LV1'입니다. 해당 스킬을 학습하시겠습니까?】
머릿속에 떠오른 화면이 시키 사쿠야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겼다. 그는 자연스레 이런 부류의 클리셰에 익숙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그는 이것이 바로 자신만의 '치트키(시스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어딘가 묘했다.
전생자라면 응당 가져야 할 '치트키'는 어떤 의미에서 이세계 전생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가 환생한 곳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2D 세계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 지급 프로세스 정도는 거쳐야 하는 거 아닌가?
무려 17년 동안 쥐 죽은 듯 조용하더니, 이제 와서 뜬금없이 튀어나온다고?
만약 타인과 접촉해야만 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조건이라면, 지난 17년 동안 사쿠야가 스쳐 지나간 사람이 대체 몇 명인데 왜 하필 오늘 교통사고(박치기)를 당하고 나서야 이 녀석이 켜졌냔 말이다.
설마 차에 치이듯 누군가에게 강하게 들이받혀야만 이 치트키의 특수성이 깨어나는 건가?
그럴 거면 차라리 국도에 나가서 과속방지턱 코스프레나 하고 있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아니면 꼭 어린애한테 치여야만 하는 건가?
이 시스템 자식, 내 연락을 17년이나 읽씹한 셈이네.
"진짜 악취미가 따로 없네."
사쿠야는 머릿속의 어지러운 상념을 거두고, 눈앞에 떠오른 패널에 집중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복사 스킬을 곧바로 배우기보다는, 일단 이른바 '상태창' 인터페이스부터 관찰하기로 했다.
【이름: 시키 사쿠야】
【나이: 17】
【스킬: 작문 LV4, 피아노 LV3, 악리(음악이론) LV3】
시스템 패널에 표시된 스킬 목록은 사쿠야를 꽤 놀라게 했다. 전생 전에 익혔던 스킬들까지 버젓이 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이 스킬들의 등급 분류 기준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짐작이 갔다.
전생의 그는 피아노 쪽에 꽤 많은 공을 들였다. 프로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아마추어는 아득히 뛰어넘는 실력이었는데, 이 시스템은 그걸 고작 'LV3'으로 평가했다. 그렇다면 방금 복사하려 했던 '가창 LV1'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
사쿠야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주웠다.
명백하게도 【가창】 스킬은 노래 부르는 능력일 텐데, 마침 그는 노래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이 복사 스킬의 등급이 너무 기초적이라(LV1),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이 치트키의 구체적인 룰도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복사할 수 있는 스킬 개수에 상한선이라도 있으면 어떡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훨씬 써먹기 좋은 스킬을 찾아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스킬을 그냥 버려?
【최초 스킬 복사를 포기할 경우, 단 1회의 랜덤 스킬 뽑기권이 증정됩니다.】
그가 망설이던 찰나, 머릿속 패널에 자동으로 이런 문구가 떠올랐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사쿠야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잠시 고민하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킬 복사 포기를 선택했다.
평소 얼굴을 내밀고 다닐 필요가 없는 그에게 가창 같은 스킬은 당장 써먹을 데가 없었다. 게다가 스킬 이름 뒤에 대놓고 붙어 있는 'LV1'이라는 글자가 초보자 수준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니, 그리 대단한 스킬이 아님은 자명했다.
이럴 땐 운에 맡기고 랜덤 가챠를 돌리는 게 훨씬 이득일지도 모른다.
【스킬 뽑기권 1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니."
사쿠야는 머릿속으로 짧게 대답하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길 한복판에서 멍하니 굳어 있던 탓에 이미 사람들의 시선을 끈 뒤였다. 주변의 교복 입은 여고생들이 슬슬 말을 걸어올 낌새를 보이고 있었기에, 이대로 길바닥에 우두커니 서서 가챠를 돌리는 건 너무 눈에 띄었다. 역시 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다.
게다가 사쿠야는 원래 가챠를 돌릴 때 나름의 미신(종교 메타)을 꽤 따지는 편이었다. 이를테면 페그오에서 가챠를 돌리기 전 우정 가챠로 액땜을 하고 서쪽을 향해 절을 한다거나, 명일방주에서 오퍼레이터 서류 봉투를 깔 때 단숨에 지퍼를 쫙 찢어야 한다거나, 토마토 계란 볶음을 먹을 땐 설탕을 쳐야 한다는 식의 의식 말이다.
"그나저나,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사쿠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녀가 흘리고 간 지갑을 쳐다보았다. 안에는 예상대로 신분증과 현금을 비롯한 각종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그 꼬맹이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지을 표정은 감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내부의 현금 액수를 세어보지도 않은 채, 사쿠야는 그저 무심코 신분증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이세리 니나?"
……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귓가에 끊임없이 맴도는 그 노랫소리는, 마치 상처투성이인 심장을 관통하는 듯했고, 달아오른 영혼을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얼음 바람 같았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여, 여기가 맞겠지?"
카와사키역, 동쪽 출구.
이세리 니나는 짧게 숨을 몰아쉬며 새파란 눈동자로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필사적으로 자신이 애타게 찾던 사람을 수색했지만, 한참을 살펴봐도 그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밀려오는 상실감에, 방금 전까지 잔뜩 부풀어 올랐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방금 스마트폰에서 '모모카'가 이 역 근처에서 라이브를 한다는 소식을 보고는, 앞뒤 잴 것 없이 흥분해서 달려온 참이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른 나머지 지나가던 사람과 세게 부딪히고 말았고, 결국 허둥지둥 사과만 남긴 채 뺑소니치듯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다.
"머리 아파……."
니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매끈한 이마를 문질렀다. 이마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지자 그녀는 절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죽을힘을 다해 카와사키역까지 달려온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동경하는 우상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 생각에 니나는 잡다한 감정을 억누르며 아직 화면이 켜져 있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음악 플레이어 화면에 떠 있는 《빈 상자(空の箱)》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벅차오르는 기대감이 일말의 좌절감을 단숨에 덮어버렸다.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보컬이 이렇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통제력을 잃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강렬한 고동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근처를 마저 뒤져보기로 했다.
바로 그 순간——
"유난히 하얗고, 쓸데없이 길어~ (やけに白いんだ,やたら長いんだ~)"
익숙한 전주와 함께 시간을 멈추는 듯한 노랫소리가, 마치 공기의 장벽을 뚫고 그녀의 마음속으로 직격해 들어왔다. 니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시야에 꽂힌 광경에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수축했다.
한때 자신이 살아갈 수 있게 지탱해 주었던 그 노래가 바로 귓가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멋있고 늠름한 은회색.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는 마치 나무 조각상처럼 멍하니 앞을 주시했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마저 이 순간만큼은 박동을 멈춘 것 같았고, 오직 호흡마저 멎게 만드는 선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Momoka'의 개인 길거리 라이브는 이미 끝을 맺고 있었다. 상대가 기타를 정리하며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본 니나는 허둥지둥 두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
"저, 저기! 혹시 카와… 카와라기 모모카 씨, 맞나요?!"
"?"
하마터면 신상 털러 온 안티팬인 줄 알았네.
짙은 회색 후드티를 입은 카와라기 모모카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겁먹은 듯하면서도 잔뜩 기대에 찬 그 눈빛은 어딘가 익숙했다. 뒤이어 당황스러움과 흥분이 교차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는 Diamond Dust(다이아몬드 더스트)의 팬이자, 모모카 씨의 팬인……"
"예전부터 계속… 계속 모모카 씨 노래를 좋아했어요! 지금 용기를 내서 도쿄로 상경한 것도 다 《빈 상자》 노래가 위로해 준 덕분이에요!"
진심이 가득 담긴 상대의 외침에 모모카는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저 천천히 잿빛 눈동자를 들어 상대를 응시했다. 그 찰나에 스쳐 지나간 씁쓸함은 이내 체념 섞인 홀가분함으로 변했다.
그녀가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탈퇴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 《빈 상자》라는 노래조차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한 지금 이 순간, 이렇게나 자신을 동경해 주는 팬을 만나다니.
기분이, 조금 묘한걸.
"……."
카와라기 모모카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뇌리에 맴도는 착잡한 심정을 꾹 눌러 담았다.
지금의 그녀는 이미 뼛속까지 철저하게 실패한 패배자였다. 이런 결과를 맞이한 건 오롯이 자신의 탓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CD, 살래?"
잡생각을 떨쳐낸 회색 머리의 소녀는 나른하게 오른손을 들어 올려, 기타 케이스에서 음악 CD 한 장을 무심하게 꺼내 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세리 니나는 0.5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당연하죠! 무조건 살게요!"
내가 그동안 피땀 흘려 모은 용돈은 바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라고오옷!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소녀는 재빨리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주머니에 닿자마자 그녀의 움직임이 돌부처처럼 굳어버렸다. 귀여운 얼굴 위로 식은땀이 층층이 맺히기 시작했고, 손가락 끝은 현실을 부정하듯 주머니 이곳저곳을 필사적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내…… 내 지갑 어딨지?
4. 여러 작품 크로스오버 물이지만 토케토케 애들 비중이 가장 큽니다. 봇치도 없고 토모리도 안 보이는 걸밴크 패러디는 처음인것 같습니다. GBC 표절왕 같은 소설은 없었습니다.
5.
베트남에서도 동물 마이고를 좋아하는지 동물 마이고는 STV에서 꾸준히 갱신되는군요. 한 10화 정도 모이면 검수해서 가져와보겠습니다.
ciweimao에는 448화가 올라왔는데 왜 아직도 안 가져오는 것이냐 응우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