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질 쉬는 동안 아카 망했을 때 대비해서 백업은 해 놔야 할 것 같아서 올림.
일단 여기까지만 우려먹고 3화부터는 폐관수련하면서 글싸개 실력 늘리고 올리려고
○○○
"... 내 실수였다고, 말씀드렸었죠."
"...?"
"선생님, 지금은 모두 잊으셨겠지만... 아니,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선생님께서는 기억하고 있으시겠네요.
어찌되었든, 저는 염치를 무릅쓰고... 당신께 한 가지를 부탁드렸습니다.
당신만이 가능한 선택들.
어른으로써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당신의 선택.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하는 바.
그렇기에, 내가 믿을 수 있는 어른인 당신만이, 뒤틀리고 일그러진 종착지가 아닌 다른 결과를⋯⋯ 그곳으로 이어지는 선택지를⋯⋯ 찾아내달라고 말이예요."
"...?"
"선생님. 죄송하지만 질문은 나중에. 지금은 듣기만 해 주세요."
"....."
"다시 말씀드리죠. 선생님. 저는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어른으로서 제 실수를 바로잡아 주실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들어맞아, 당신은 학생들을 이용하려는 어른들과 색채로부터 키보토스를 지켜냈습니다."
...
"... 하지만, 그건 '게임 속의' 당신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었습니다. 그렇죠?"
"..."
"네, 화면 바깥에 계신 당신은 어른이 아니죠.
그저 저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훨씬 더 힘없는 '학생'일 뿐입니다.
바깥편의 당신에게는 보호해야 할 학생도, 어른으로써의 책임감과 의무를 지켜 나갈 능력도, 어른의 카드나 싯딤의 상자도,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에도 벅찬 '학생'일 뿐입니다."
"...."
"아, 속상하게 들리셨다면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꼭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 전에 먼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당신께서는 지금 이 화면 너머의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시나요?
...네. 아까 말씀 드린 그대로이기 때문에, 분명히 좋게 여길 리가 없겠죠.
그렇지만 선생님...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주시길.
분명 지금 저와 마주한 '바깥 세계'의 선생님. 그러니까 당신은 '저희 세계'의 선생님과는 다르게 교감할 학생도, 어른으로써의 책임감과 리더십도, 통솔 능력은 물론 어른의 카드나 싯딤의 상자조차 없습니다.
당신은 아직 어릴 뿐더러, 모두에게 철저한 무관심과 불호를 받고, 힘든 일이 있다면 맞서기보다는 게임 속으로 도피하고 싶어하며,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정말로 싫어합니다.
카드나 상자도 없기 때문에 총탄이 날아드는 상황은 커녕. 불량 학생의 금품 갈취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조차 없죠.
... 하지만 선생님.
저희들의, 선생님.
그런 당신에게 존재하는, 화면 안의 당신과 유일한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
"... 예.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아뇨, 아주 많이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굳이 이것을 말로써 표현하자면...
그것은...
......
그것은, '상냥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땡— 땡— 땡— 땡—
"...?"
"벌써 시간이....!
선생님. 이제 저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말씀드릴게요.
선생님, 지금은 아직 이른 새벽입니다. 당신은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일어나시게 되겠지만, 머지않아 선생님께서는 키보토스의 수많은 학생 중 한 명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마음 속에 간직한 '상냥함'이,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몸과 마음으로 오직 단 한 명의 학생에, 리더십도, 통솔력도, 어른의 카드조차 없는. 화면의 안쪽에서보다도 수많은 악조건을 끌어안은 채로 어른의 책임을 지고, 다가오는 시련에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비록 제 말을 모두 잊게 될 지라도... 이 점 하나만은 부디 기억해주시면 좋겠네요.
아직 여린 당신의 마음 속에 어른의 상냥함을 잃지 않는다면
당신이 '이 게임' 안에서 그래왔듯
그 어떤 학생과 만나도.
그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극복해내실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
예 그럼 여기서 다시 작별이네요.
덧붙이자면, 아무리 뒷처리가 힘드셨어도 바지는 입고 주무시길.
그럼. 부디... 어른으로써의 책임을 끝까지 다해 주세요..."
.
.
.
◇◇◇
삐비비빅-
...
삐비비빅-
벌써 아침인가,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소리다.
".... 음."
몽롱한 기분이 든다.
뭔 꿈을 꾸긴 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삐그덕...
일단은, 알림 소리에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제보니 바지를 안 입고 있었다.
휴지로 대충 닦기만 하고 바지를 안 올려입었다니.
쪽팔림을 억누르고 바지를 입은 뒤에, 내가 향한 곳은 거실이었다.
"아침밥...."
웅얼거리던 나는 으레 그래왔듯이 냉장고에서 달걀과 대파, 다진 마늘하고 얼려둔 밥을, 찬장에서는 올리브유와 진간장을 차례로 꺼냈다.
지글- 지글-
밥을 레인지로 대충 녹인 다음, 기름을 두르고 갖은 재료들을 때려박은 다음 볶기 시작했다.
헌데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도 계란 볶음밥이었다.
"... 에이씨. 질렸는데 말이야."
투덜거리면서도 밥을 볶다가, 간장을 부은 다음 접시에 담아 식탁으로 가져갔다.
"...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나는 숟가락으로 계란볶음밥을 떠서 입에 넣었다.
...
짰다.
정말이지, 토가 나올 정도로.
"...에라이."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망쳐버린 계란볶음밥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쳐박은 다음 접시를 씻었다.
양치까지 끝내고보니, 시간은 어느새 7시 30분. 그래도 어제 미리 가방을 챙긴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그렇게 교복을 입고 교통카드를 챙긴 다음 집을 나서려는 순간,
"아 맞다 출첵!"
잊고 있었다. 아침에 해야 하는 제일 중요한 거. 그걸 빼먹어 버리다니.
부리나케 핸드폰을 찾아내 집어 들고 현관을 나선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가 1층을 누른 다음, 게임 아이콘을 터치한다.
늘 그랬듯이 '블루 아카이브'.
기나긴 로딩은 언제나 지겨웠지만 그래도 게임 속의 '학생'들을 만나는 일은, 현실에서 마음 터놓을 친구 하나 없는 중학교 1학년생에게는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접속에 성공하자, 늘 그랬듯이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맞이해주고 심지어 출석 선물까지 주는 아로나.
그리고, 오늘의 당번으로 내가 선택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학생.
"준비라면 되어 있어.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하도록 해, 선생."
'... 헤헤헤... 고마워, 사오리.'
대부분 누나 뻘 되는 아름다운 여고생들이 말을 걸어 주는 일은 현실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지.
흐린 날씨에 공기조차 후텁지근한 날 등굣길의 스트레스까지 서서히 잊게 해준다.
그렇게 출석 보상을 전부 챙기고, 정공전을 돌리며 떨어진 순위를 복구하는 와중에도,
게임 안에서라면 어디서 무얼 하든지... 학생들 모두가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고개를 수그린 채 걸어가며 게임을 돌리다가 생각해보니, 오늘 카페의 수급을 받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가보니 오늘 카페에 온 손님은, 아츠코, 히요리, 미사키. 공교롭게도, 아리우스 스쿼드 출신의 세 명이었다.
'어... 나 그러고보니까 초대권 쓸 수 있었지?'
나는 망설임 없이 초대권으로 사오리를 불렀다.
'드디어 다 모았다!'
카페에 스쿼드 출신 네 명이 동시에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되다니.
아즈사까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게 어디인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이 진귀한 장면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스크린샷을 찍는 순간...
띵동~
재수없게도 도착한 메세지가 같이 찍혀 버렸다.
"....."
나는 묘한 불쾌감을 억누르며 게임을 잠시 종료시킨 다음, 메세지를 두 번 눌러 읽어내려갔다.
—우리 삼촌
• Hola! 2주씩이나 연락 못 줘서 미안해, 조카.
멕시코에서도 워낙 바쁜 일이 산더미여서 말야.
슬슬 용돈하고 차비가 바닥났을 것 같아서 돈을 보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사흘 전 부터 이쪽 나라의 대통령 아저씨가 외국으로 돈을 보낼 때 세금을 더 내라고 그러지 뭐냐.
그런 이유에서... 아마 당분간 용돈을 평소대로 두둑하게 주면, 삼촌 지갑이 버티기엔 힘들 것 같아.
그래도 버스랑 전철 정도는 타고 다니게 해 줄 거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차 조심하고, 뭔 일 있으면 꼭 말해줘.
그럼 좋은 하루 보내라!
—송금 도착—
• 우리 삼촌님이 용돈을 보내줬어요.
삼촌인 줄도 모르고 짜증만 내버리다니.
나도 참 퍽이나 성격 좋은 조카인 것 같다.
대충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삼촌에게 짧게 고맙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우리 삼촌은 여전히 용돈을 너무 많이 건네주셔서 탈인 것 같다.
"이 정도면... 그 책은 사고도 남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묵묵히 현금을 받는 찰나.
덥썩-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은 다음, 길목의 외진 구석으로 나를 낚아채왔다.
"우왓?!"
"얌마! 뭘 그리 호들갑이냐? 나야 이 새꺄."
깜짝 놀란 나는 뒤를 바라보았다.
나와는 다르게 고등학생같이 비대한 체구, 몸싸움의 흔적이 가득한 너덜너덜한 교복에 걸맞는 너저분한 고동색 머리와 꺼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친한 척 하며 건내는 거친 말투.
내 담당일진 노릇을 하는 녀석이었다.
"어..... 응."
나는 떨떠름한 눈치를 보이며 녀석에게 대답했다.
"음, 근데. 오늘이 금요일 맞지? 너, 금요일이면... 느그 삼촌한테 용돈 먹는 요일 아니냐?"
"어?! 어... 으아, 아... 니...?"
나는 애써 손사래를 치며 뒤로 한 발자국 씩 걸어갔지만 부질없는 짓일 뿐.
텁...!
"...구라치네 쫄보 자식이."
"우웃...!"
녀석이 내 어깨를 거칠게 붙잡자, 나는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금요일마다 하던 짓인데, 내가 그걸 잊어먹겠냐?"
"....."
아무 말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 수 밖에 없던 내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아무튼간에, 용돈 중에서 절반만 줘 봐."
"뭣?"
"제대로 못 들었냐? 용돈에서 반 떼어서 입금하라고."
이럴 리가 없다.
"저번에는 3분의 1이라고 했으면서...."
"뭐 임마?"
"힉! 으.... 아, 알...았어."
피식-
얼굴에 비웃음을 내건 너셕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그래, 일케 고분고분 말 들으니까 얼마나 좋냐."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녀석의 계좌번호를 입력했다.
—송금이 완료되었습니다.—
곱상한 모습에 숫기도 거의 없었던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이 담당일진 녀석에게 찍혀 매주 금요일마다 돈을 뜯기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키. 이제 너한텐 볼 일 없으니까 가 봐라."
녀석이 손짓하는 모습을 슥 본 다음, 나는 가방을 고쳐들었다.
"얌마! 짭새 아재들한테 꼰지르면 알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려는 내 뒤통수에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담당일진.
"....."
"... 왜 씹냐? 대답."
"..... 응."
"웅얼거리지만 말고, 더 크게 씨부려."
녀석이 던진 볼멘소리에, 나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 경찰한테 말하면 출, 출소하자마자 쫓아와서 죽어... 라 패버릴니까, 신고하면 안 된다고."
"잘 아네. 가 봐."
"...."
저벅-
"...근데, 너 남은 돈으로 '그 게임 야한 잡지' 사려는 거지?"
"!!!"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뭔데? 뭘 그리 꼬라보냐?"
"아니, 그... 그게 말야. '가 봐.'라고 말한 다음에 뭐라고 말한...."
"뭐래. 귀는 장식이냐? 니가 헛들어먹었겠지."
"아... 응... 그런, 것 같아. 가, 가 볼게."
나는 실실 비웃는 표정을 한 녀석을 뒤로하고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다.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놓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털썩-
나는 버스의 남아있던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심장을 추스리며 녀석의 말을 서서히 떠올렸다.
...
'근데, 너 잔돈으로 그 게임 야한 잡지 사려는 거지?'
잘못 들었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눈치챈 거야.
이번에도 소문나면, 진짜로 인생 종치는건데.
.
.
.
◇◇◇
초등학교 5학년 때 있었던 일이었나.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발표하는 시간이에요~"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8월의 무더위로 죽어가던 아이들이 환호했다.
그 날은 학교에서 사흘에 걸쳐 진행하는 게임 중독 예방을 위한 특별시간 중 1일차였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게임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음습한 녀석 취급을 받는 나도, 이 때까지는 곱상하고 말수가 적어 친한 친구가 없었을 뿐. 다른 아이들처럼 그저 게임을 즐기는 멀쩡한 아이였다.
나는 그 때에도 '블루 아카이브'를 즐기며 게임 속의 학생들에게 큰 애착을 지녔던 만큼 내가 발표하려는 게임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아마 이 기회를 통해, 남자애 치곤 귀엽다는 소리를 들은 적을 빼면 친구들에게 한 번도 이목을 끈 적이 없는 내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나는 밤새 열심히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이 들어있는 USB를 만지작거리며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제 인생 게임은.... 네 아주 .... 정.말.갓.겜.입.니.다!"
.....
수 차례가 흐른 다음, 드디어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저의 최애 게임은, '블루 아카이브'입니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내가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발표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히트를 쳤다.
남자애든 여자애든, 하나같이 내 멋들어진 PPT를 통해 접근한 블아의 깊이 있는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성에 반한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은 나에게 블루 아카이브에 대해 좀 더 소개해 달라고 몰려들었다.
그 일이 어찌나 신이 났는지, 나는 저녁 때에 퇴근중이었던 삼촌과 통화를 하며 이 일을 자랑했다.
"삼촌! 나 학교에서 내가 하는 게임 소개를 기가 막히게 잘 해서 인싸가 됐어!"
"오?! 우리 조카가 얼마나 잘했을지 기대되네. 낼 모레에 출국하기 전 어디 한 번 볼까?"
말은 이렇게 한 삼촌은 교통 체증 때문에 귀가가 늦어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쓰러지듯 주무셨지만, 나에게는 아무렴 좋았다.
반 친구들에게 이렇게 좋은 게임을 널리 퍼트렸다는 점에서 이미 내 만족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푸른 빛깔의 청춘을 간직한 키보토스의 여고생들!
그런 그녀들의 올바른 지도자가 되어
함께 달콤쌉쌀한 추억을 쌓으며,
힘들어 하면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면 찾아와주는
믿음직스러운 어른으로 다가가는 이야기.
그녀들의 '선생'이 되어준다는 블루 아카이브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로망 가득한 서사였다.
그걸 우리 반이 다 같이 누린다니!
어린 나에게는 정말 환상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지.
... 허나 불행히도 그러한 꿈은 죄다 허상에 그쳤다.
아니, 차라리 허상에 그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속보] 디지털 게임물 관리부, 18개 게임의 연령 등급 상승을 발표.
"엥...?"
어느 날 아침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웹사이트에서 마주한 기사에, 나는 마음 속에서 스며나오는 불길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다음, 서둘러 그 기사를 재빠르게 읽어내려갔다.
거기에는 내 불길한 예감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 마냥, 보란 듯이 '블루 아카이브'가 가장 먼저 나왔다.
"... 말도 안 돼....."
나는 절망했지만, 이건 겨우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학교에서까지 내가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것이다.
"야! 이거 19금 게임이라잖아! 어떻게 된 거야?"
"19금 이유가 선... 정성? 야시꾸리해서 그렇다는 거네."
"뭐?! 아, 미친! 변태들이나 한다는 거잖아!"
교실 밖까지 울려퍼지는 소리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교실 안으로 내가 쭈뼛쭈뼛 발을 들이자마자...
"어? 야, 쟤 왔다!"
"야! 이거 갑자기 19금 먹었는데, 사유가 선정성? 그거 때문이라고?"
"어떻게 된 거야?! 이상한 게임같은 거 아니라며!"
"아 더러워!"
"꺼져버려 이 변태야!"
"아.... 아으... 저기... 그러니까-"
"핑계대지마!"
"얌마, 뭐라고 말이나 좀 해봐!"
“그냥 죽어!”
"아....... 아아..... 아...."
수도 없이 쇄도하던 비난은 12살 짜리 꼬맹이가 삼키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날카로운 것이었고,
"아으... 으우... 우우웁-!!!"
"어? 야..! 쟤 왜저래?"
"우...우웨에에엑-!!!!"
"으아악-!"
결국 나는, 그것들을 참지 못하고 토해내다 못해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내 더럽고 걸쭉한 주황색에 시야가 파묻히며 의식을 잃었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 보건실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즘에는 삼촌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카...! 정신이 좀 들어?!"
"아... 삼촌.....?"
삼촌은 그 때 나를 위해 출국까지 미뤄가며, 학교까지 찾아와 내 곁을 지켜주셨다고 한다.
그 후, 나는 위장약을 먹고 조퇴했다. 집에서 샤워를 하며 혼자서 흐느끼던 그 때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날 밤, 선생님께 전화통화로 상담을 주고받으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다행히도 선생님은 내 말을 믿어주셨고, 다음 날 조회시간에 바로 아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여러분 나이에는 성에 대한 호기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도 그 게임이 성인 게임이 될 줄 몰랐다고 했으니, 이건 게임이 나쁜 겁니다. 친구가 이제 그 게임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이 사실로 더 이상 놀리면 안 돼요?"
'... 게임이 나쁜 게 아닌데...'
.
.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야 삼촌은 출국했다.
"... 조카, 삼촌이 못 미더운 어른이라서 미안하다."
공항에서 배웅할 때 들은 삼촌의 말이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한들, 조카가 입은 상처를 제대로 보듬어주지도 못하고 떠나야 하는 삼촌의 마음이 좋았을 리가 없겠지.
억지로 떠맡아 키우게 된 아이였지만, 삼촌은 지금도 나를 혼자 둔 게 맘에 걸린다고 말했다.
아무튼, 선생님이 엄하게 한 마디 하자 아이들이 더 이상 나를 대놓고 변태 취급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고, 아이들이 선생님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면... 정말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한 대로 행동했을까?
"야, 야.... 쟤 19금 게임 했대."
"진짜?! 에이씨.. 더러워!"
"앞으로 쟤랑 놀면 또 변태같은 게임을 들고 올 지 몰라..."
"야, 저기 나오는 주인공이 선생님 일 한다고 하는데, 그럼 쟤는 '변태꼬맹이 선생님' 아냐?"
"푸하하하하-!!!"
'다 들린다고.
나라면 몰라도 블아는 나쁜 게임이 아니라고.
학생들과 선생님의 아름다운 사제애가 만드는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희들이 알기나 해?'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수많은 말들을 그저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설령 용기를 내서 말했더라도... 나는 이미 자연스럽게 반 아이들에게서 '변태꼬맹이 선생'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린 만큼 오히려 욕만 바가지로 퍼먹지 않았을까.
뭐, 지금 되돌아보면 역시 유치찬란하고 오글거리기 짝이 없는 멘트였던 만큼. 역시 그냥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인 것 같다.
결국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든 아이들의 경멸을 받는 녀석으로 남았고, 나는 그 길로 대인기피증까지 얻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일 하나가지고 그렇게 상처를 받을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때는 상처받기 쉬운 나이였으니까.
다른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가거가 신나게 놀았겠지만, 나는 그저 커튼을 치고 블루 아카이브에 열중할 뿐이었다.
바깥에는 아로나처럼 나를 도와주는 다정한 조력자 같은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날 놀리거나 무관심할 뿐이었다.
시로코, 호시노, 미카, 히후미, 아리스, 아스나, 히나... 그 밖의 게임 속의 학생들 덕분에 나는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이런 애들 조차 없었으면 그냥 죽어버렸지 않았을까.
그렇게 게임에만 몰두하는 동안, 내 맘속에는 점점 더 현실에 환멸감만 생겼다.
모범적인 어른으로서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선생'인 게임 속의 나는, 보잘것 없고 추했던 게임 밖의 나와 모든 것이 달랐다.
음탕한 녀석으로 찍힌 이후 책임감도, 강인한 마음도, 친절함도,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도…
모든 것을 잃은 나는 학교에서 미움만 받았다.
하지만 게임 속의 선생은 달랐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책임지는 마음.
학생들을 이용하려는 어른들에게 맞설 강인함.
학생들을 상냥하게 이끌어주는 친절함.
학생들을 최대한 신경쓰며 돌보는 관심.
게임 밖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이 모든 마음을, 게임 속의 선생이 되면 가질 수 있었다.
마음 뿐이었을까,
내 소중한 학생들이 건네주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맛을 볼 수 없었던 관심과 사랑.
무능한 어린아이와는 반대되는, 어른이 가진 능력.
그 밖에도 게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
이 모든 것을 게임 속에서 누릴 수 있었던 만큼.
게임을 끈다는 것은 내게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게임 밖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는 내가 싫었기에,
게임 밖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게임 밖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기에...
결국 밖에 나가는 시간보다 집에서 홀로 게임만 하는 날이 점점 많아지며, 가뜩이나 나빴던 인간관계는 더욱 더 나락을 달렸다.
한번쯤은 삼촌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생각도 했지만 역시 그만두었다.
맥시코에서 남의 자식을 자기 아들처럼 여기며 열심히 돈을 버는데, 내가 이런 꼴로 지낸다는 사실을 알면 당연히 일 따윈 그만두시고 귀국하실 게 뻔했으니까.
출장을 다니면서 벌어온 돈으로 이제야 겨우 안정된 집안 사정을, 나 때문에 망친다고?
그건 말도 안된다.
그냥 민폐일 뿐이다.
삼촌의 회사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 이 이야기를 꺼내면 더욱 심각한 민폐이지 않겠는가.
어쩌면 청불 판정이 나기 전에도 15세 이용가였던 게임이었고, 삼촌의 출국을 나흘 씩이나 미뤄 피해를 끼친 내가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변태 소리를 듣는 것도 할 말이 없었는데, 방금 전에 살짝 언급한 대로 내 취미가 소위 '블아 떡인지'라고 불리는 야한 잡지를 모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에, 성인용 블아 커뮤니티에 접속한 게 원인이었다.
아마 거기서 우연히 블아 관련 에로 동인지를 보아 성에 이상한 호기심을 품지만 않았어도,
그 호기심에 이끌려 성인지를 구입하는 어둠의 경로를 찾아내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 때 그 애들의 말대로 진짜 변태가 되어버리는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결국 음욕에 눈을 떠버린 나는 게임 속의 학생들에게 품었던 순수한 애착마저 잃은지 오래되었다.
그 자리에는 욕정만이 남았을 뿐이지.
.
.
.
◇◇◇
슬픈 추억회상은 여기까지.
다시 생각해보니까, 내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 게임에 정을 붙여 아직까지도 그걸 붙잡고 있는 나 스스로도 참 웃기다.
문제는 이걸 일진 녀석이 어떻게 알고 있냐는 거다.
쓰고 남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 겨우 알아낸 어둠의 경로를 통해 블루 아카이브 떡인지를 사려는 걸 어떻게 눈치 챈 거지?
물론 지금의 나는 반에서 존재감도 없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19세 게임을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즐긴다는 사실이 또 교실에 퍼져버리면...
"..... 아이, 젠장."
복잡한 생각만 하니까 괜히 기분만 나빠졌다.
나는 남은 돈을 보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 차 조심하고, 뭔 일 있으면 꼭 말해 줘.
삼촌의 메세지가 눈에 들어왔다.
'까짓 거. 한 번 말씀드려 볼까.'
탁탁–
• 삼촌.
......
• 음? 무슨 일?
....
• ....아니야. 아무것도. 좋은 하루 보내시라고요
'.... 난 진짜 겁쟁이야.'
나는 메세지를 보낼 용기조차 없는 스스로를 욕했다.
그 뒤로 그 녀석이 내가 변태라는 것을 소문내지 않을까 하는 등의 여러 복잡한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버스에서 내려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삐리릭-삐릭!
"아차...!"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야 겨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나는 서둘러 전철에 올라탔고, 앉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에이씨.... 없잖아."
뭐, 별 수 없다. 선 채로 가야지.
전철 덕택에 교통이 편하다는 점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거의 유일한 장점이다.
높으신 분들이 조폭들과 결탁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치안도 나쁜데다가, 바닷가를 빼면 볼거리나 맛집도 거의 없는 이 도시.
'차라리, 우리 동네가 키보토스 같으면 어땠을까?'
나는 이런 얼척없는 망상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철 바깥의 풍경은 곯아있던 내 속마음과 다르게 어느새 먹구름이 개인 푸른 하늘이 바다와 함께 펼쳐져 있었다.
'뭐, 그래도 오늘은 하늘이 좀 멋있네.'
이건 이것대로, 그나마 위로가 좀 되었다.
.
.
.
◇◇◇
오전 8시 29분.
더운 날씨 때문에 땀을 좀 흘리긴 했지만, 학교에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자, 이제 여기서 생태계라는 건 말이지... 지형이나 공기의 질 같은 주변환경이랑 거기에 사는 동식물들이 이루는 걸 통틀어서 말한다고 생각하면...."
수업은 열심히 들었지만 내용은 늘 그랬듯이 지루한 편이었다.
띠리링 띵-동!
"아잇... 쉬는시간이네. 오늘 그냥 진도 확 빼려고 했는데 말야."
선생님의 아쉬워하는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아이들은 환호했다.
다른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모여서 잡담이나 놀이를 하던가, 아니면 남은 숙제를 하는 게 보통이지만... 친구들과 섞이지를 못하는 나는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블아를 한다.
화장실의 변기 칸은 은밀한 행동을 하기에는 정말 알맞는 곳이지.
찔걱....
새벽에 실컷 저지른 주제에, 가뜩이나 더운 학교 화장실에서까지 이런 짓을 한다니.
"헉... 헉..."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화장실 안에 나만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참아왔던 가쁜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 화면의 그녀를 바라보며 더러운 짓을 저질렀다.
또다시 이뤄진 한바탕의 거사를 끝냈을 때 즈음, 나는 휴대폰 액정을 골똘히 들여보다가 내가 스쿼드 맴버들의 스샷을 다시 한 번 찍어주는 일을 잊고 있었다는 게 기억났다.
그렇게 다시 카페로 들어간 나는 사오리와 히요리를 한 번씩 터치해 호감도를 올리고, 최대한 아리우스 스쿼드 맴버 전원이 잘 보이도록 정성스레 스크린샷을 찍었다.
철컥-
잘 찍힌 스샷을 보며 내가 음침한 미소를 짓는 순간...
딩- 디리링 띵동~
'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나는 바지춤을 재빠르게 올린 다음 대충 손을 씻은 채로 교실로 달려갔다.
꼭 게임만 하면,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 같다.
.
.
.
◇◇◇
지금까지 내가 보인 행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학생들 중 내가 가장 많이 애착을 가진 캐릭터는 '조마에 사오리'였다.
대부분의 등장인물과 그 서사가 입체적인 것으로 유명한 블아에서도, 특히 사오리와 관련된 스토리에 나는 거의 과몰입에 가까울 정도로 감정 이입을 했다.
사오리와의 첫 만남은, 선생의 목숨을 노리는 소녀의 총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으로만 보였던 그녀가, 그동안 처리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선생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아츠코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며
그녀 역시, 아이들을 도구 내지 강화재료 취급하는 '베아트리체'의 농간에 놀아난 피해자였다는 게 서서히 드러나며 본격적으로 내가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를 품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선생의 도움을 통해, 스쿼드 맴버들은 다시 한 군데 뭉친다.
동료에게 품은 죄책감과 절박한 상황에서 방황하던 리더 사오리를 시작으로
나 못지않게 기가 약한 히요리,
삶의 의지를 거의 완전히 잃은 미사키,
이 셋은 선생과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며, 계속 떠돌고, 쫓기고 다녀야 함에도 자신들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배우고...
이곳 저곳에서 배척당하며 입은 상처를 이겨낸 디음,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고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트리니티의 공주님의 마음을 돌리고
끝끝내 세뇌와 폭력에서 벗어나 어른의 의무인 '아이들을 지키고 올바르게 이끄는 것'을 저버리고, 오히려 보란 듯이 아이들을 착취하는 괴물 베아트리체를
아이들과 선생님이 힘을 합쳐 두드려 패주고, 아츠코를 죽음의 손아귀에서 꺼내주는 이야기.
그렇게 학대의 굴레를 끊어낸 이후에도...여전히 쫓기고 굶주리는 신세는 바뀌지 않았으나
그래도 계속 꿋꿋이 살아갈 '스쿼드'의 이야기.
이렇게 유난히 사오리의 이야기에 정말 큰 매력과 공감을 느끼며... 마치 선생과 사오리 사이의 일이 현실 속의 내 일인 것 마냥 감정이입을 했다.
아무리 스토리가 어짜피 게임이라는 허구의, 여고생 캐릭터였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그리 몰입했을까.
예전에는 동병상련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요즘에는 그냥 게임중독이 문제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오리의 서사를 음미하는 것도, 이제는 그만두게 된 것 같다.
이제 와서는 그저 ‘꼴린다’는 이유로 사오리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으니…
.
.
.
◇◇◇
슬슬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집으로 가는 내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담당일진 녀석이 내 은밀한 취향을 눈치챈 일은 사라져 있었다.
계속해서 말해왔지만, 나에게 있어서 블아는 단순히 게임이 아닌 우중충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피신처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무튼... 다른 아이들이 대부분 2~3명씩 무리지어 귀가하는 와중에도, 나는 혼자서 길을 걷고 있었다.
앞서 말한 5학년 때 그 사건으로 옛 친구들이 죄다 떠나간 이후로 나는 친구를 못 사귀었으니.
아마 그 때에 내가 그 사건으로 대인기피증이 생긴 건 둘째치더라도, 내가 성인 게임인 블아를 한다는 걸 남한테 들키는 게 병적으로 싫어져서 일부러 또래 친구들을 피했던 것 같다.
그렇게 혼자서 돌아가는 길에, 내가 핸드폰으로 열심히 돌리던 것은 총력전. 그리고 이번 총력전에서 등장하는 적은 '예로니무스'다.
이 녀석들이 나오는 이번 시즌은 사오리가 유용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활약을 내심 기대하였다.
선생으로써 학생을 편애하는 건 안 되는 일이지만, 이건 어짜피 게임이니까.
그렇게 전철 역에 다다라 목적지까지 반쯤 되는 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총력전을 돌렸다.
문제는 오후 4시 쯤 부터 게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내 머리에서 미열이 나고 있었지만 그건 내 관심 밖이었다.
아까부터 블루 아카이브에 접속이 잘 안 되었으니까.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탈 때 즈음에, 총력전을 마치고 일일 미션 보상을 전부 수령한 뒤 얼마 안 가 게임에서 튕겨버린 게 시작이었고, 그 이후로 재접을 시도하는 족족 게임이 강제로 꺼져버렸다.
처음에는 으레 게임이 그렇듯이 그냥 버그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뒤늦게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튕긴 횟수가 10번을 넘어갈 때 부터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인터넷에서 이 현상이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나고 있는건지 찾아보았다.
–블루 아카이브 버그
촥-
내가 검색어를 입력하자 그 밑으로 연관 검색어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연관검색어
–블루 아카이브 접속 안 됨
–블루아카 서버 폭발
–몰루겜 버그
–블아 DB 폭발
–넥슨 화재
연관 검색어를 내려보던 나는 끄트머리에 나타난 두 개의 글귀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불길함을 느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의 떨림을 애써 억누른 다음 검색어를 눌렀다.
–블아 DB 폭발에 대한 검색 결과:
• 뉴스 카테고리
"넥슨 본사 데이터베이스 컴퓨터에 화재 발생, 과부하가 원인으로 추정..."
"[속보] 넥슨 데이터 베이스 컴퓨터 과부하로 불타... 내부 관계자, '소화기를 들고 뛰어들어간 인턴이 피해 줄여...' "
'아니, 이게 도대체 뭐야?'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로 기사를 눌렀다.
"금일 오후 4시 10분경, 게임 계발 회사로 국내에서 명성이 높은 '넥슨' 본사의 데이터 베이스 컴퓨터실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 목격자인 사원 B씨는 "화재가 나자마자 동료 직원인 인턴 A씨가 소화기를 들고 홀로 뛰어들어갔다" 라고 진술하였으며...
... 덕분에 화재는 빠르게 진압되었으나, 넥슨의 대표작 중 하나인 '블루 아카이브'의 데이터 베이스용 컴퓨터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 경찰 및 소방당국은 현재 화재의 원인을 컴퓨터 과부하로 인한 과열로 추정하고 있으며...
... A씨는 젖은 옷깃으로 기관지를 막아 생명에 지장은 없었으나, 종아리 부근에 약 1~2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달칵-
나는 뉴스 기사를 닫아버렸다.
손발이 미친 듯이 떨렸다.
속에 돌덩이를 집어넣은 것 마냥 불편했다.
이 느낌은, 그래. 내가 예전에도 느꼈던 그 느낌이었다.
집을 잃어버렸을 때.
지금은 도피가 아닌 화재 때문이지만, 내가 그나마 머물 곳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 특유의 느낌.
혹시 잘못 나온 기사는 아닐까 싶어서, 나는 내가 에로 동인지를 구하기 위해 자주 눈팅하던 성인용 블아 커뮤니티를 방문했다.
• 커뮤니티 카테고리
○잡담 테이블
제목: 아니 시발 내 블아가!!!
(오열하는 키리츠구의 사진)
18시 접속 보상만 받으면 오늘 일퀘 완료였다고 시발!!!
• 댓글
• (눈물을 글썽이며 울부짖는 히후미 콘)
• 일퀘도 일퀘인데, 나는 계정 날아가진 않을까 무섭다...
ㄴ 계정 관련 정보는 타버린 컴퓨터에 보관한 게 아니어서 괜찮을거래.
제목: 시발 블붕이들 단체로 ㅈ됐네
(넥X에서 올라온 공지 사진)
블붕이들도 대충 보면 알겠지만 완전 복구하는 데 거의 2주일은 걸린대 ㅅㅂ....
• 댓글
• 개씨발 히마리 뽑으려고 청수석 뭉쳐놓았는데 하필 픽업 타이밍에 이 지랄이 터지냐
ㄴ 이번 가챠 한정해서 2주일 동안은 가챠 안 바뀔거래
ㄴㄴ ㄹㅇ? 그나마 다행이노
• (울먹이는 이부키 콘)
• 애미...
• 응애라서 그런데 히마리 뽑는 거 2주 미뤄졌으니 다음 픽업캐 뽑는 것도 미뤄지는 거임?
ㄴ 아뇨 1주일 뒤에 고쳐지면 이번주 픽업캐였을 히마리+원래 다음주 픽업캐까지 픽업 받는 거래요
ㄴㄴ (유우카가 90도 인사를 하는 콘)
• 근데 1주면 불에 탄 것 치곤 짧은 거 아님?
ㄴ 신입 사원 한 명이 초기 진압을 잘 했다는데? 화상 입고도 알빠노 치고 소화기를 갈겼대
ㄴㄴ 개멋있네...
ㄴㄴ 감사해야겠노
– 네 놈들 게임은 망했어!
(모욕적인 손짓을 하고 있는 세리카 이미지)
이제부터 여긴 캬루가 지배한다!
• 댓글
• 캬루 아니잔아...
• ('키보토스에서 꺼져라!' 라고 외치는 미도리 콘)
.....
"..... 으하아..."
나는 길게 탄식했다.
아비규환인 커뮤니티를 보아하니, 아마 가짜 뉴스는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불이 빠르게 꺼져서 다행이려나...
하지만 중증의 게임중독이고, 블아에 단단히 미쳐있을 뿐더러... 블아를 현실도피처로 삼는 나에게는 2주일조차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게 온갖 번민에 휩싸여 정처없이 길을 걷다가 그만 어느 아주머니와 부딪히고 말았다.
"학생, 길 좀 똑바로 보고 다녀!"
유난히 꽥 소리를 지른 아주머니에게 나는 대강 사과를 하고 지나쳤다.
그 와중에 아주머니의 시선이 뭔가 신경쓰였지만 내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을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나는 아파트 정문 앞에서 몇 십 분 째 멍을 때리고 있었다.
"...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거지..."
나는 허탈함을 추스르며 집에 들어갔다.
아까 그 일을 생각할 수록, 기분이 확 나빠졌고 입맛도 없어졌다.
그래서 저녁은 인스턴트 라면을 대충 끓여봤지만, 재수없게도 라면조차 맛이 없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평소 보지도 않던 TV를 틀어보니, 뉴스에서는 그 화재 사건이 다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또 다른 내용이 있을까 싶어서 주의깊게 봤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들은 안 좋은 이야기를 계속 들어봤자 정신건강만 해칠 뿐이었다.
"으휴..."
나는 채널을 돌렸지만 볼 만한 게 도통 나오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어릴 때 보던 아동용 만화에 흥미를 잃은 뒤에 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관심이 사라졌으니까.
나는 티비를 끈 다음 리모콘을 던지듯이 바닥에 두었다.
그리고 반찬통을 잘 닫아 냉장고에 넣고 라면을 먹은 그릇을 설거지했다.
문득 생각해보니, 확실히 혼자 사는 것도 익숙해 진 것 같다.
이러니까 삼촌이 용돈이랑 여러 세금만 내 줘도 잘 버티는 거겠지.
그런 점은, 그나마의 위안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
.
.
◇◇◇
목욕까지 하고 나오니, 시계는 어느새 9시 반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수학 문제를 집에서 푼 다음에 학교 단톡방에 찍어 인증을 하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 같다.
솔직히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어요?' 하고 반발심이 들었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할까.
찰칵-
그렇게 다 풀은 수학 문제집 사진을 찍어 채팅방에 올린 나는, 혹시나 하는 맘에 블아에 재접속을 시도해 봤다.
'에러: 잠시 후에 다시 시도해 주십시오.'
역시나. 그 사이에 복구가 될 리 없잖아.
나는 내일 학교 준비물을 가방에 넣은 다음 이를 닦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성인지를 보며 거사를 치르기에는 너무 지쳤고, 게임도 못하게 되었으니 늦게까지 깨어있을 이유가 없지.
미열도 내렸겠다 싶었으니 불을 끈 다음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
...그렇게 서서히 잠든지 얼추 2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나.
투두둑- 투두두둑-
"음...."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깨 버렸다.
'... 에이씨, 기분좋게 자고 있었는데.'
이럴 때는 게임 속의 캐릭터라곤 해도, 주변의 방해따윈 상관없이 잠들 수 있는 츠바키같은 애들이 참 부럽다.
후둑! 후두둑!
'....엥?'
그러다 갑자기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커지더니,
쏴아—
이내 꽤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물폭탄마냥 쏟아졌다.
나는 '혹시나 내가 빨래를 바깥에 널어놓았었나' 하는 마음에 창가로 갔다.
다행히도 그런 건 없었다.
상황을 대충 둘러 본 내가 안도하면서 내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번쩍-
"앗."
꽈르르릉!!!!!
"힉....!"
천둥이 쳐 버렸다.
"에이씨...."
이 나이 먹고서도 천둥이 무섭다니,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오는 밤은 언제나 기분이 더럽다.
아무튼, 나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꿈을 꿨다.
나는 어떤 밝은 방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참 희한하게도, 한 번도 와 본 적도 없지만 굉장히 익숙한 방이었다.
아마 이 곳에 오지는 않았지만 여기를 눈으로 본 적은 아주 많았던 것 같이 느껴졌다.
'.....'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창밖은 흰 페인트를 칠한건가 싶을 정도로 하얗게 빚났던 탓에, 나는 바깥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다시 방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에는 온갖 책들과 파일, 전자기기들이 있던 것을 보아, 누군가의 사무실인 것 같았는데 나는 방에 있는 이 모든 것들도 처음 만져보지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마치 유튜브에서 가끔 보던 리미널 스페이스나 드림코어 영상에 내가 직접 들어온 것 같은 기분.
꿈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평온함과 불안감의 공존.
그 특유의 감각이, 바로 이 방의 공기에 천천히 감돌고 있었다.
툭툭-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던 내 어깨에 뭔가 닿았고
'.....?'
나는 뒤를 돌아봤다.
'.....'
뒤에 있던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한, 빛나는 사람의 형체였다.
"...."
형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의 나였다면. 나보다 키도 더 크고, 빛나는 형체를 보면 귀신이라고 생각하며 놀랄 것이 뻔했겠지만...
꿈 속이기 때문인지, 나는 이 실루엣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 형상을 바라볼 때의 그 특유의 느낌은 뭐랄까.
희한하게도, 마치 거울처럼 투명한 호수나 미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 누구?"
나는 잠깐의 침묵을 깨고, 그 형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형체는 내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거기에 뭔가를 쥐여줄 뿐이었다.
"...?"
나는 궁금증을 뒤로하고, 손바닥을 펼쳐봤더니 거기에는 누군가의 학생증 비슷한 것이 있었다.
뭐지?
뜬금없이, 도대체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걸까.
내가 영문을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들자, 형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 꼬마야, 내 ...들을 잘 부탁하마."
"...???"
뭐야? 뭘 부탁한다는 거야?
내 의문이 사라지기도 전에 형상이 발하는 빛이 이상하리만치 강해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주위가 밝아졌다.
나는 너무나 눈부셔서 눈을 옷소매로 가려버렸다.
그래도, 빛은 계속 눈을 찔렀다.
아무리 꿈속이어도 이건 너무 눈부셨다.
너무나도...
.
.
.
....
......
.....?
... 아니야.
지금 이건, 꿈 같은 게 아냐.
이건 확실히, 내 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대체 누가 이 밤중에...!
나는 왠지 모를 섬뜩함에 손을 치우고 눈을 떴다.
"....!"
빛은 충격적이게도 내 핸드폰 액정에서 나오고 있었다.
핸드폰은 플래시 모드를 켰을 때 보다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한밤중에 불이 다 꺼진 와중에도, 불을 킨 것 마냥 내 방을 환히 빛낼 정도로.
"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중얼거리자마자,
샤악-!
"!!!"
핸드폰의 빛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을 뚫고 나간 다음, 폭풍우가 오는 밤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 내가 도대체 뭘 본 거야...?!"
너무 피곤해서 내가 헛것을 본 걸까.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은 벌써 자정이었다.
... 그래. 이건 그냥 게임 중독 때문에 헛것을 본 거야.
밤을 며칠씩이나 새가며 게임에 몰두한 중증의 게임중독자가 환상을 본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으휴...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게임을 덜 했어야—'
번쩍- 콰과과과광-!!!!!
"으아악!?"
갑자기, 번쩍임과 굉음이 거의 동시에 터져버렸다.
아무래도 벼락이 거의 이 근처에 떨어진 모양이다.
"...."
망할 벼락때문에, 잠도 전부 달아나 버렸다...
그렇지만... 어쨌든 내일 등교는 해야 하니까 비가 얼만큼 오는지는 봐야겠지.
도대체 얼마나 창가로 향한 다음,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붙여 바깥을 내다보자, 아까 그 벼락 때문인지. 아파트 주차장 한 가운데가 유난히 검은색을 띄고 있었다.
설마 벼락이 아파트 주차장 앞에서 떨어진 걸까?
만약 맞다면, 내가 살다 살다 눈 앞에 벼락이 떨어져 타 버린 자국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바라보니, 그 바싹 타버린 자국 위에 그림자 같은 것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닌가.
"엥...?"
...
터벅.
터벅.
"!!!"
그 형상이 걷기 시작한 걸 본 나는, 뒤늦게 그것이 번개에 얻어맞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명 번개에 직격당했으면 거의 빈사지경이 되는 게 정상일텐데,
그렇게 나는 숨을 죽이고 형상을 지켜보았다.
이내 그림자는 몇 걸음을 힘없이 내딛는가 싶더니...
철푸덕-
하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힘없이 쓰러져버렸다.
'죽은 거야...?'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저 창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야, 그래도 잘만 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문뜩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고, 나는 곧장 우산을 꺼낸 다음 슬리퍼를 대충 신고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급박한 맘에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닫힘버튼을 마구 연타하는 짓도 했다.
타박-타박-타박
나는 그렇게 우산을 쓴 채로, 재빨리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윽?!"
가는 도중에 슬리퍼 차림으로 미끄러운 길목을 뛰어가는 바람에 두어 번 구르고 말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그게 대수였을까.
"헉, 허억... 허윽."
벼락을 얻어맞은 형체있는 곳에 겨우 도착한 나는 숨을 몇 번 고른 다음, 형체를 똑바로 확인했다.
내 예상대로, 틀림없이 사람이었다. 그것도 고등학생쯤의 내 누나뻘쯤 되어 보이는, 긴 머리의 여자.
".... 저기요-?!"
"....."
"괜찮으세요-!?"
나는 의식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소리쳤지만, 여성분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벼락에 맞고 다친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여성분을 어떻게든 뒤집어서 눕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주변도 어둑어둑하고 눈에는 빗물이 잔뜩 들이쳐서 시야 확보가 힘들긴 했어도, 번개에 맞으면 분명 몸에 그을린 상처가 생기는 게 보통이라고 배웠지만...
이 사람의 몸에는 그런 게 없었다.
흰 외투에 가려져서 그렇지, 노출이 있어 상처 부위를 훨씬 더 확인하기 쉬운 탱크탑 복장이었는데도.
굳이 따지자면 흉터로 보이는 흔적이 몇 군데 있었지만, 이마저도 최근에 생긴 것 같지도 않았다.
"하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늦여름이라고 해도 그렇지.
밤만 되면 치안도 나빠지는 이 동네에서, 뭣하러 이런 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시던 걸까.
그리고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사람 한 명이 생채기도 없이 쓰러져 있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머리가 너무나도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쓰러진 사람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다.
뭐, 큰 상처도 없는데 쓰러져 있다는 건 역시 이상했지만 안 다쳤으면 아무렴 다행이지 않은가.
이렇게 여러 잡생각을 하던 나는 여성분의 컨디션을 확인하기 위해, 책에서 대충 배운대로 의식이 있는지 확인했다.
손목을 짚어 맥박을 잰다거나, 호흡이 있는지 코 밑에 손을 대는 등으로 말이다.
'의식은 있는데.'
(어디까지나 내 어쭙잖은 의학지식대로였지만)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여성분이 직접 번개를 맞은 건 아니고 그냥 충격을 받아 기절했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번 더 확인할 게 있어서 이마를 짚어봤더니 꽤나 따뜻했다.
음, 솔직히 꽤나 수준도 아니었다. 아주 많이, 따뜻했다.
..... 아냐.
이건, 극심한 열이다!
나는 그제서야 이 여성분이 엄청난 고열을 앓고 있는 걸 눈치채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했다.
헌데, 아무리 주머니를 뒤적여봐도 핸드폰이 없었다.
'아이 젠장.... 두고 나왔나보다.'
처음에는 여성분을 여기에 두고 핸드폰만 빠르게 챙겨오려고 했지만, 잠시라도 여기에 두는 것 조차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업어 집에 들여보내려고 했지만...
"끄으-으그그윽!!!"
내가 낑낑대며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맞다.... 생각해보니까... 나 체육도 엄청 못했지....'
게다가 여성분의 겉옷 안에 뭔가 묵직한 쇠막대 같은 것이 있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었다.
결국 주변에서 아파트 청소부 아주머니가 쓰시던 청소용구 카트 하나를 끌고 와 거기에 여성분을 들어놓았다.
그리고 난 다음, 재빠르게 카트를 밀며 집으로 올라갔다.
...
"허억.... 허억.... 헉."
집에 올라왔을 때, 나는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카트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해도, 약해 빠진 내 힘으로 사람을 데려가니 몸에 부담이 간 것 같다.
아무래도 카트는 내일 돌려드리는 게 좋겠어.
몸이 비와 땀에 젖어 거의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집에 들어가서 여성분을 거의 굴리다시피 거실로 옮긴 다음 삼촌이 계실 적에 쓰던 방에 들어갔다.
그 다음 잡동사니를 겨우 정리해서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요를 깐 다음 다시 여성분을 굴려서 요에 눕혔다.
뭔가 묵직한 쇠막대 같은 게 들어있던 겉옷도 대충 접어 놓았다.
그런데 졸린 채로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을까.
눈꺼풀과 손발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게다가 번개가 쳐서 두꺼비집도 잠깐 먹통이 된 건지, 전등이 계속 깜빡거리는 탓에 아무리 눈을 벅벅 비벼 빗물을 닦아내도 시야 확보가 되질 않았다.
이 사람이 누군지라도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뜩이나 앞도 잘 안 보이는데 얼굴에 무언가 마스크 같은 것까지 쓰고 있어서 힘들었다.
아무튼, 이대로 가다간 나까지 지쳐 스러질 게 뻔하다.
때문에 나는 여성분의 열이라도 내려가도록 이마에 물수건이라도 올리려고 화장실에 걸어들어갔다.
"으우우... 정신이 안 들어..."
비틀거리며 여성분의 앞으로 걸어간 나는, 차게 적신 물수건으로 열이 내리도록 팔과 얼굴 부분을 닦아 드린 다음 이마에 물수건을 올렸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배가 차가워질까봐 이불까지 덮었는데...
바보같이 가장 중요한 걸 빼먹고 있었다.
구급차.
난 전문의도 아니잖아. 차라리 제일 먼저 구급차를 불렀어야 했는데...!
그렇게 나는 서둘러서 휴대폰을 찾아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배터리 0%'
배터리 충전을 빼먹다니...
"아, 안돼. 하필 이런 때에..."
털석-
결국 나는 힘을 너무 많이 쓴 반동으로 기절하다시피 거실 바닥에 엎어졌다.
그렇게 잠에 빠지기 직전, 문득 저 여성분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왜인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
.
◆◆◆
...
.....
....윽
뭐지.
.....
... 아아, 그렇구나.
나, 죽은 게 아니었구나.
그렇지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 아니, 괜찮다.
고통은 언제나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의식이 돌아오질 않는 것 같다.
눈을 못 뜨겠어.
...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떠올려야한다.
기억을, 되찾아야 해.
... 그래,
아주 조금씩...
서서히, 기억난다.
.
.
.
"히요리! 공주! 위험해!"
이 한마디를 외치면서 히요리와 공주를 떠밀었던 기억이.
그리고 그 다음 기억나는 것은,
엄청난 빛과 함께 터져나온 폭발음.
또 다시 그 다음은...
"안 돼——!!!!!!!!"
무언가 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들린, 공주의 절규.
그리고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진 이후로는... 확실히 기억이 없었다.
... 그 폭발. 아마 그 오토마타들이 가지고 있던 폭탄이 일으킨 것이었지.
...
또다시, 조금씩 기억이 돌아온다.
아마 그 오토마타, 누군가의 잔당이라고 말했었는데.
그래, '그 여자'의 잔당이라고.
그리고, 그 녀석들 중 하나가 들고 있었던 폭탄.
미처 완벽히 부수지 못한 오토마타 중 하나가
'강화 헤일로 파괴 폭탄'이라며
이번에야말로 헤일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며 우리에게 내던진 폭탄이었다.
그래서, 설마하는 마음에,
급하게 공주하고 히요리를 멀리 떨어트리려고 하다가...
... 내 실책이었어.
뒷마무리가 허술하지만 않았어도...
다 내 책임이다.
그렇잖아도 그 날.
그 여자의 잔당이라는 소리에.
내가 너무 흥분해버린 게 화근이었다.
... 공주랑 히요리는...
미사키는...?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오전에, 카페에서 우연히 재회했을 때에는, 모두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밀쳐낸 덕분에 폭발에 휘말리진 않았겠지만... 틀림없이 나 때문에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다.
선생도 나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 모두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어서 의식을 되찾아야 하는데.
...
잠깐만.
선생?
선생님은...
어떻게 됐었지?
'찌릿-'
윽!
또인가...
또다시...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온다.
머리 뿐 만이 아니라, 마치 괴로움에 온 몸이 서서히 잠기는 것 같다.
그렇게 천천히, 심연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또다시 기억해내기 시작한다.
그 때의 괴로운 그 기억을...
....
◆◆◆
오늘 오후 4시쯤,
선생이 쓰러졌다.
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나를 반겨주던 선생.
그랬던 선생이 예로니무스 토벌 직후 샬레로 복귀 도중 급작스럽게 고열을 앓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선생, 선생! 제발... 들리면 대답이라도 해 다오!"
선생님을 들쳐 업고, 황급히 병원으로 내달렸을 때의 감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 불덩이 같은 몸, 괴로움이 서린 숨결.
헛되다는 소리의 굴레를 벗어 던지게 해 준 사람.
평생을 보답해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내게 배푼 사람.
그 사람이 괴로워하던 모습.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더 끔찍했던 것은, 지명수배자인 나는 선생님의 곁을 계속 지켜 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의심을 받기 쉬운 위치였으니만큼, 샬레에 수 시간 동안 붙잡혀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 해가 다 저물어서야 조사가 끝나고, 방황하다가 우연히 공주와 히요리를 카페 밖에서 다시 만나 몇 마디 나누고 있었다.
둘 다 선생님을, 나처럼 많이 걱정하고 있었었지...
그 오토마톤 녀석들을 보고 흥분한 것도, 사실 '그 여자'의 잔당이라는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생...
가뜩이나 선생님 일로 불안한 와중에 그런 녀석들까지 신경을 긁으며 덤벼드니, 평소와는 다르게 충동적으로 맞섰던 거였어.
선생은, 지금도 의식이 없을까.
...
으...
나라도 어떻게든 의식을 차려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의식이 천천히 물에 잠기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렇게 서서히...
잠기는 듯 하다가,
급격히. 현실로 의식이 돌아온다.
.
.
.
"...."
툭... 투둑...
"으...."
...툭...
...
".....흐읏?!"
나는 놀란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봤다.
나는 머지않아 이 곳이 생전 처음 와 본 공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 여긴 어디지?'
누군가의 집… 인건가.
뭔가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방이다.
"으음..."
내가 왜 병원이나 길바닥도 아닌 이런 곳에서 의식을 차린 걸까.
그럼 도대체 누가?
누가 나를,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옮겼단 말인가.
속으로 의문을 품으며 몸을 일으키자
스륵.
이마에서 무엇인가 떨어졌다.
"...?"
자세히 바라보니, 분홍색 손수건이었다.
물기가 조금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내 머리를 식히려고 머리에 놓아둔 모양이다.
쓰려져있던 동안 고열이라도 앓았던 걸까.
나는 그렇게 힘이 풀린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우선 나를 여기에 옮긴 자를 찾아 낸 다음 이것저것 캐물어 볼 생각이었다.
병원이 아닌 누군가의 은거지에서 눈을 뜬 것 부터 수상했으니 말이다.
그러기 위해, 머리맡에 놓여 있었던 젖은 겉옷을 살펴 AR을 찾아냈다.
철컥-
그렇게 내가 찬찬히 주위를 살피려고 밖으로 나가 보니,
"...!"
꽤나 놀랄 만한 것을 찾았다. 거실같은 방바닥에 어느 사람의 형체가 엎어져 있던 게 아닌가.
"..."
저 자가 혹시, 나를 이 곳에 들여놓은 녀석인 걸까.
나는 혹시 모를 위협이 생기면 바로 쏴버릴 생각으로, AR을 손에 꼭 쥔 다음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형체를 확인했다.
스륵-
'남자아이..?'
키보토스에서, 평범한 인간 남자애라고?
이런 일은... 거의 처음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이 건물 안에 있는 이유는 이 남자아이의 소행이었던 것 같다.
날 도우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깨워서 확인을 할 필요는 있겠지.
나는 남자아이의 몸을 흔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봐, 잠깐 일어나봐라."
"... 우으으—읏..."
부스스–
그러자 남자아이가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음?"
"일어났나?"
"으아악?!"
나를 본 녀석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 누구세요! 여, 여긴 어떻게, 아.... 아니 그 어, 아니 그... 그거 총이에요?! 아으…. 쏘, 쏘지 마세요!"
녀석이 지레 겁을 먹는 걸 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총을 도로 감추며 말했다.
"놀라지 마라. 해칠 생각은 없어. 그리고, 네가 날 이곳에 들인 것 아닌가?"
"엥...? 으음..."
녀석은 혼란스럽다는 듯이 쩔쩔매다가, 이내 기억이 돌아온 듯이 말했다.
"어. 아... 맞아요! 그 그때 그, 어음. 바닥에, 쓰러져 계시길레, 으음. 네."
이제보니까 이 녀석, 히요리보다도 심각한 말더듬이인가보다.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남자아이가 조금 똑바로 말하기 시작했다.
".... 네. 그, 아마, 어제 길. 길바닥에 쓰러지셨던 같길래 여기까지 옮겼어요. 아, 아직 목숨에 지장은 없었던 것 같아서... 원래는 구급차를 부를려다가... 음. 네."
"...."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에는 꽤나 미심쩍었다.
키보토스에서 흔치 않은 남자아이라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굳이 나를 이런 낮선 곳에 옮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 녀석이 나를 안 좋은 의도로 옮겨 온 것 같진 않아 일단 어느 정도 경계를 풀기로 했다.
만일 속은 거라면 나중에 제압해도 되니까.
"그건 그렇고, 여긴 키보토스의 어디쯤 되는거지?"
"어... 응?"
"키보토스의 어디쯤 되냐고 물어봤다."
폭발에 휩쓸려서 생각보다 멀리 날아간 것 같아 물어본 말이었는데, 녀석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키보.... 토스라니? 그건 그거잖아.... 그-"
이렇게 더듬거리던 남자아이의 시선이 잠시 나를 향하더니
"...."
곧이어 남자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
".... 말도 안돼...."
"... 뭔데 그러는거지?"
"... 사오리야?"
"뭐?"
잠시만,
내 이름을 안다고?
분명 나도, 이 꼬마도 일면식이 없지 않은가.
나는 조금 당황하면서 남자아이에게 되물었다.
"너, 내 이름을 도대체 어떻게 알..."
그런데, 그제서야 나도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믿을 수가 없었다.
"....."
"선생?"
내 눈앞의 이 녀석은, 너무나도 선생을 닮았다.
마치 선생의 어렸을 적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처럼...
"........."
◆◆◆
녀석이 내어 준 냉수 한 컵을 들이키고,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네 말을 요약하자면... 우선 너는 선생과 아주 많이 닮은, 선생의 조카라는 이야기군."
"어... 네."
"그리고 여긴 키보토스가 아니라, 선생이 원래 살던 도시라는 건가?"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너는 선생의 가족인 만큼 나와 내 동료들에 대해서는 선생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길바닥에 쓰러진 나를 여기까지 옮긴 거고?"
"마, 맞아요. 아까 말했는지는 몰라도, 원래는 구급차를 부르려 했는데, 배, 배터리 때문에...."
"..... 그런가."
녀석의 말을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일만 벌어졌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가 지금, 키보토스의 바깥에 있다고?
그렇다면... 그 폭탄 때문에라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분명 폭발이 크게 일어났다 쳐도 키보토스 바깥으로 날아가버릴 정도는 절대 아니였을 텐데.
지금으로써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그 폭탄이 어느 무기 회사에서 암암리에 개발 중인 공간이동을 일으키는 폭탄이었지만,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도움을 받아 놓고 이런 말 하기에는 뭣하지만, 이 녀석도 어딘가 수상했다.
선생에게 애초에 다른 가족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저 녀석은 선생을 많이 닮기는 했다.
갈색의 반곱슬 머리도 그렇고. 얼굴이라던가 하는 세세한 것까지, 조금 앳되보인다는 것 빼면, 선생의 쌍둥이나 자식이라고 봐도 문제없을 정도로 선생과 닮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녀석이 나와 내 가족들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수상할 정도로 잘 아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와 아츠코, 히요리, 미사키의 존재는 그렇다 치더라도, 선생과 계약서에 대해 여러 번 상담한 것과, 어제 아침에 우연히 다함께 카페에 모였던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선생에게 받은 선물까지.
심지어는 그 전에 받은 선물들까지 일일이 안다고?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그나마 우리가 키보토스 내에서 수배자 신세라는 것은 모르는 것 같지만,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선생님이 그런 것 까지 일려줬을까.
내심 이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나를 도와줬다고 하는 이 남자애의 말 밖에는 딱히 믿어 볼 만한 것도 없긴 하다.
생각해보니, 세세한 내용이라도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이라면 자주 연락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기도 했으니.
그나저나 의외였다. 선생이 키보토스의 바깥에서 온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 바깥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뭣보다 선생의 가족을 만나본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이 녀석은 정말로 선생의 혈육이 맞는 모양이다. 선생이 어려지면 정말로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 같으니.
그렇게 내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으....."
어째 앓는 소리가 난다 싶어서 봤더니, 녀석이 좀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봐, 괜찮나?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가?"
"아뇨! 아니. 음. 그니까... 어. 잠깐, 제 방에서 뭐 좀 하고 올게요!"
이렇게 말한 뒤에 녀석은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 어디가 아픈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다음, 나는 최대한 빨리 키보토스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흐윽... 허억...."
숨이 미친듯이 가빠진다.
팔다리에 힘이 풀린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은 무력하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연약하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볼을 꼬집어본다.
아프다.
현실이다.
그렇다고 코스어같은 사람도 아니다.
자신을 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정신병자도 아니다.
진짜로 조마에 사오리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먹은 거야.
납득이 되질 않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일단은. 그래, 일단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자.
"스으읍-"
크게 들이쉬고
"푸흐으...."
내쉰다.
"후욱.... 후...."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심호흡을 하니 불편했지만 머릿속은 정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어제 어느 여성분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기절하는 것을 봤다.
나는 그 사람을 옮긴 다음 힘이 부쳐 기절했고, 내가 옮긴 사람이 바로 지금 부엌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조마에 사오리'다.
생긴 것도 사오리고, 스스로의 입으로 사오리가 맞다고 했으니까.
조마에 사오리. 모바일 게임 블루 아카이브의 등장 단체인 아리우스 스쿼드의 리더.
동료는 미사키, 히요리, 아츠코...
...이건 내가 다 알고 있는거잖아!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는 내 머릿속이 원망스러웠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사오리는 블아에서 나오는 학생. 그러니까 게임 속의 등장인물이고 나에게는 최애 학생이다.
이 말대로라면 무려 게임 캐릭터가 현실에 나타났다는 정신나간 이야기가 된다!
게임중독이 얼마나 심하면 이런 헛것을 보는 거지?
...
아냐, 알잖아. 이건 절대로 게임중독의 증상 따위가 아냐.
분명 어제 저 여성분을 집으로 옮겼을 뿐더러 오늘은 분명 이야기까지 나눴잖아.
헤일로도 분명히 있었고, 총기랑 목소리며 복장에 외모까지 똑같은걸.
무엇보다도, 인연스토리 뿐만 아니라 카페에서 내가 사오리에게 줬던 선물 하나하나까지, 순서도, 뭘 줬는지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들어맞았고 말이야.
그럼 진짜로 게임 캐릭터가 현실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생각을 하면 할 수록 혼란스러워져만 간다.
어젯밤에 블아도 그렇고, 핸드폰도 좀 많이 이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런 허무맹랑한 일까지 일어날 줄은 몰랐다.
이 상황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짓을 반복하며, 삼촌이 말해줬던 대로. 앞으로 내가 무얼 해야 할 지 생각해봤다.
일단은 저 사람이 정말로, 게임에서 튀어나온 조마에 사오리라고 치면 나는 사오리에게 거짓말을 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선생의 조카라는 것도, 여기가 선생의 고향 내지 키보토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것도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다.
키보토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게임 속 도시일 뿐이며, 나는 선생의 조카같은 사람이 아니다.
분명 게임이라는 경계가 있긴 하지만, 내가 바로 선생이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내가 선생을 조작하는 유저고, 너는 사실 게임 속 캐릭터라고?
게임 바깥의 선생님은 애들을 지키기는 커녕, 자기 몸 하나 못 지켜서 맨날 삥이나 뜯긴다고?
선생님은 사실 애들을 이끄는 멋있는 어른은 커녕 대인기피증이나 딸린 게임중독 꼬맹이라고?
안 된다.
이런 걸 믿어줄 리도 없고, 만일 믿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더 큰 문제다.
사오리가 어떤 캐릭터인지 내가 잘 알잖아.
모든 것이 헛되다는 세뇌에 갇혀 살던 아이였잖아.
가뜩이나 싫어도 온갖 더러운 일에 손을 대가면서 힘들게 살아온 사람인데, 선생 덕분에 구원받은 학생이잖아.
살아남는 것만을 바라보며 힘겹게 지내다가, 선생님 덕분에 겨우 미래를 꿈꾸게 되었잖아.
그런 이야기를 말했다간 완전히 절망할 거다.
어느 정도 판단이 선 나는 일단 방에 있던 블아 굿즈부터 벽장 안으로 치워버렸다.
페로로 피규어와 유우카 아크릴 키링, 여러 학생의 에로 동인지를 포함한 온갖 만화책까지.
그 밖의 온갖 블아 관련된 잡다한 물품들을 보이는 족족 잘 정리해서 벽장 속에 집어넣었다.
얼마 안 가 마지막으로 정리할 굿즈가 하나 남아 집어들고 보니, 스쿼드 단체 사진 그림이었다.
"....."
어째서인지 몰라도, 잠깐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머지않아 나는 그 위화감이 뭔지 알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와의 만났는데, 왜 기쁘지가 않은 거지?'
생각해보면, 누구든 자신의 최애캐를 현실에서 만나게 되면... 말이 되고 안되고는 뒷전으로 하고 신난다는 생각을 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막상 최애캐인 사오리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기쁘지가 않았다.
어째서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긴 하지만 사오리를 내 눈으로 직접 만났는데 왜 공허할 뿐일까…
…
‘에잇,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재빨리 마지막 굿즈까지 치워냈다.
그 순간.
똑똑-
“흐익?!”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서 놀랐다.
문을 열어보니, 사오리가 마스크를 쓴 채로 앞에 서 있었다.
“이봐, 그러니까 좀 괜찮아 졌나?”
“어? 으아… 그니까. 어음.”
“...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해도 된다.”
“아, 네…음. 이젠 좀 나아졌어요.”
“…. 그런가. 그러면 된 것 같군. 신세 많이 졌다.”
“….네?”
잠깐, 뭐 뭐라고?
“지금 나가시려는 거에요?”
“그래. 아무래도 지금 몸 상태에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선생의 가족이라지만 계속 남의 집에 있는 것도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공주도 그렇고, 스쿼드 맴버들이 날 걱정하고 있을 테니 급히 키보토스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생각이다.”
“아으, 그 그치만 여기에 대해서 잘 모르시잖아요! 그리고 돌아가려면 돈이라도 있어야 뭘 타든지–”
“상관없다. 이 지역이 처음이지만 길거리 생활은 익숙하니까. 그리고 돌아가는 것도 돈은 필요 없다. 적당한 이동수단만 찾으면 되니까.”
설마, 키보토스로 밀입국이라도 할 생각인 걸까.
내가 뭐라고 말려보기도 전에 사오리가 현관으로 걸어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 넌 정말. 선생을 많이 닮은 것 같군. 사정이 급해서 지금은 먼저 떠나지만, 이 일은 나중에라도 선생과 네게 꼭 보답하지.”
“아, 그 자, 잠깐만요!”
나는 그런 사오리를 어떻게든 말리기 위해 방에서 뛰쳐나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오리를 여기 붙잡아둬야 한다.
만약 밖에서 우연히 자기가 게임캐릭터라는 사실이라도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키보토스는 여기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분명 엉뚱한 곳에서 헤메기만 할 것이고, 사오리의 경우엔 심하면 인연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쁜 어른들에게 휘둘릴지도 모른다.
뭐라도 떠올려야 하는데, 꼭 이럴 때만 자주 하던 망상도 쓸모가 없다.
제발, 뭐든간에 떠올리라고!
뭐든간에...
잠깐만.
뭐든간에...
뭐든간에... 규탄한다...?
이거 그 미노리가...
....!
이런 어처구니없는 연결고리를 통해 적당히 둘러댈 만한 말이 드디어 떠올랐다.
"잠깐만요!"
나는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 겨우 사오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잠시만요, 기다려봐요 누나!"
"무슨 일이지?"
"그게 그-러니까 어음. 지금... 항공사고 철도사고 죄다 파업이라...네."
"... 파업?"
"맞아...요. 파업이에요."
"... 저기 실례하지만... 파업이, 도대체 뭔가?"
"?!?!?!?"
순간 벙쪘다.
파업이 뭔지 모른다고?
...
아냐, 사오리라면 모를 수 밖에 없겠다.
비즈니스적 상명하복이 원칙이라던 뒷세계에서 지낸지 오래되었다 그랬으니까.
"아... 그 파–업은. 그러니까 지금 상황으로 치자면 그 비행기 회사랑 기차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받는 월급이나 업무 환경등의 대우가 나, 나쁘다고 생각했을 때에 일을 안 하고 그걸 바꿔달라고 시위하는 거에요."
"... 이해가 조금 어려운데, 그러니까 일종의 항명같은 건가?"
"예? 아, 네... 뭐 어떻게 보면 그럴 수 있...지- 아니, 아니죠! 그 항명처럼 뭐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 그치만. 아마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걸 타고 돌아가시기엔.... 으음."
"그럼... 지금으로써는, 키보토스로 돌아가는 그 어떤 이동수단도 없다는 건가."
"네. 그, 거기가 삼촌이 일하는 곳이라는 것 빼곤 잘 모르는 곳이지만, 그거 하나만큼은... 화. 확실해요."
내 말에 사오리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잠시 우리 사이에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이봐, 그 파업이라는 것은 대체 언제쯤 끝나는 건가?"
"예? 아... 그, 사실 그건 저도 잘 몰라요. 협상이 완료되거나 하는 식으로 끝나는 구조라 아마 짧으면... 2주 정도... 걸릴텐데."
"... 잘 알았다. 또 한 번 신세를 졌군.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아니, 잠깐만요!"
나는 다시 사오리를 불러세웠다.
"지금 막 일어나셔서 몸 상태도 안 좋으실텐데, 왜 자꾸 나가려는 거에요?"
일이 뜻대로 안 풀려서 그런지 본의아니게 말투가 화난 듯이 나와버렸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사오리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모양인지 무덤덤히 말했다.
"... 말한 대로다. 아무리 선생의 가족이라고 한들, 역시 계속 남의 집에 있는 건 실례니까."
"저, 저는... 상관 없는데요."
"뭐, 그뿐만이 아니라. 어짜피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 보다는 길거리 생활 쪽이 더 편하기도 하다. 그럼..."
"아, 그렇다면 그냥 저, 절 위해서라도 남아 주시면... 안 돼요?"
"음?"
...
내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가뜩이나 어려운 사람한테 제 욕심을 위해서 남아달라고?
마음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은 이미 멋대로 움직여대고 있었다.
"그게, 원래는 저를 삼촌이 돌봐 주시고 있었는데... 삼촌은 아시다시피 지금 누나가 있었다는... 키보... 토스? 암튼 거기에 계시고 지금 부모님까지 출장을 가신 상태거든요.
그래서 좀 심심해서... 저랑 같이 있어 주셨으면 하는데, 치료해 준 값이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주시면 안 돼요? 아... 하하하..."
정말이지 스스로의 뺨을 한 방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다못해 삼촌 관련 거짓말이랑 심심해서 남아달란 소리는 사오리가 게임 캐릭터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다는 대의라도 있었지만, 이건 순전히 내 욕망 충족을 위한 짓 아닌가.
게다가 어떻게든 키보토스에 대해 잘 모르는 척을 하려고 한 것과 마지막에 헛웃음을 너무 멍청하게 흘려댄 게 너무 어색해서 민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사람들이랑 대화를 많이 나눠봤어야 했는데.
'분명 거절할거야 분명 거절할거야 분명 거절할거야 분명 거절할거야 분명 거절할거야 분명 거절할거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서 벌벌 떨었다.
그런데 사오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 알았다. 정 그렇게 부탁한다면야."
"네...?"
"결국 날 치료해 줬으니, 보수로 같이 지내주면 되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그럼 지금은 이쪽에서 지불할 차례이지 않은가."
"아으... 뭐, 꼭 보답...을 바란 게 아니라 그냥 걱정되어서 그런 거였는데. 어... 사, 상관없겠죠.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그러면서 나는 자기도 모르게, 멋쩍어하며 손을 내밀었다.
"...?"
"어... 그, 악수... 한 번만 해 주시면 안되나... 해서요."
...
아주 잠깐,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사오리는 이렇게 답했다.
"... 그러지. 어려울 것도 없으니까."
그 후 사오리는 내 손을 가볍게 잡고 조금 흔들었다.
14살 꼬맹이의 손보다 조금 더 큰, 고등학생 누나의 손.
그 손에서 나는 온기를,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간직했다.
.
.
.
여하튼, 그렇게 나와 내 최애 캐릭터인 사오리와의 우연으로 시작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말이 있듯이... 이 때는 나도, 사오리도 알지 못했다.
우리의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이 만남이, 우리의 미래에 어떠한 변화를 주게 되었는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