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백업본임
우려먹기여서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네 미안...
○○○
"으으음..."
어두컴컴한 모래사장 위에, 한 남자가 신음하며 힘없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하... 하하하... 이거 좀 무리했나."
남자의 힘이 쇠약해진 것을 눈치챈 듯이, 남자의 옆에 있던 테블릿에 알아서 전원이 들어왔다.
치지지직- 치직...
"선생님...!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아로나... 그럭저럭... 괜찮기는 한데. 그나저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니...?"
"... 죄송해요.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바깥으로 날려져버리는 건 막지 못했어요."
"사과할... 필요는 없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니까."
"...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음...?"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바깥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믿으시나요?"
"....."
긴 침묵이 이어진 후에야, 남자가 간신히 대답했다.
"...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믿는다고 볼 순 없었어. 아무래도 어렸을 적에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 많았으니까."
"그런가요...."
"맞아... 하지만, 학생을 믿어 주는 것도 어른이 해야 할 일이잖아?
... 그렇다면. 과거의 나 역시 학생이니까, 똑같이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도 하니까."
"..."
남자의 말에, 하늘빛 머리의 여자아이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저기, 아로나. 프라나는 지금쯤..."
"아아... 예, 지금 말씀드린 대로... 최대한 바깥 세계에 신호를 보내보고 있기는 하지만... 잘 잡히지 않는 것 같아요.
여기서 선생님이 고열로 쓰러지신 게, 바깥에서는 다른 사건으로 발생한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말을 마친 남자는 찬찬히 눈을 감고, 그에 맞춰 여자아의 표정이 서서히 침울해져간다.
"아로나. 그, 마지막으로 물어 볼 게 있는데..."
"... 예."
"그... 사오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랬지?"
"0.0045, 0.00452%요."
"....."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 문장만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
'... 과연... 정말로 또 다시 기적이 일어난 걸까.'
.....
'바깥의 나도... 똑같은 기적을... 일으켜 주면... 정말 좋을 텐... 데.....'
이 속말을 끝으로, 남자는 의식을 잃었다.
.
.
.
◆◆◆
끼익-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선생의 조카가 내게 손짓했다.
"네... 어, 어서 들어오세요."
"알겠다. 그럼, 다시 실례하지."
철커덕...
"어음... 그러니까... 어... 그 몸은 좀 어떠... 세요?"
"음? 아아, 어제 부상당한 것 말인가... 조금 전에 말한 대로야. 지금은 괜찮다."
"우... 다행... 이네요. 번개에 정통으로 맞은 줄 알았거든요."
"그런가... 역시 강제 전이 폭탄 때문이었나보군."
"예? 강제... 뭐라고요?"
"별 거 아니다. 네가 굳이 알 필요는 없어."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 전이 폭탄... 설마 시험용도 제대로 안 나온 제품을 그 녀석들이 썼을 줄은 몰랐다.
선생의 조카가 말한 대로라면, 그건 확실히 강제 전이 폭탄이었다.
도착 지점을 제대로 정할 수도 없고, 과도한 에너지로 인해 목표물의 도착점에 낙뢰가 치기 때문에 아직 보완중인 무기였는데...
지금 내가 겪은 상황과 녀석의 말을 종합하면 키보토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곳에 낙뢰와 함께 내가 나타났다는 소리니까.
현재로써 그런 두 개의 현상을 모두 일으키는 폭탄은, 그것밖에는 아직 없으니—
"저기."
"흠?"
그제서야 나는 녀석이 날 여러 번 불렀다는 걸 눈치챘다.
"... 실례했군. 낙뢰라는 말을 듣고 무얼 조금 생각하느라 그랬어."
이렇게 말하자, 녀석이 다급하게 사과하며 말했다.
"아뇨아뇨...! 그렇다고 사과 하실 필요까진... 그냥, 그 어제 비가 많이 내려서 오, 옷이 젖었으니, 춥지는 않을까... 하셔서 그랬어요."
"아아, 그거라면 문제없다. 많이 겪은 일이라서 추위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기도 한 편이야."
"그치만... 최소한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아냐, 그럴 필요까진 없… 콜록-콜록! 아... 으흠."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 입에서 요란한 기침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역시 감기인가봐요."
"... 아니다, 단순히 목이 가려운 것 뿐이야."
"아으... 그래도 그런 옷 계속 이, 입고 계시면... 몸에 안 좋아요. 차라리 제 옷 중에 맞는 게 있는 걸 찾아 볼까요?"
"난 정말로 괜찮다. 그리고 우리 둘의 체격 차이를 생각하면 아마 네 옷을 입으면 늘어날 게 뻔하니까 굳이 찾을 필요는 없어."
내가 다시 거절하자, 녀석은 잠깐 뭔가 눈치챘다는 표정을 짓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으... 생각해보니까, 누나가 저보다 훨씬 컸죠... 지금 집에는 제 옷 말곤 거의 아무런 옷도 없으니까. 어쩌면, 맞는 옷이 없는 게 당연하겠네요. 진짜 바, 바보같이 이런 것도 모르고."
"굳이 자책할 필요까진 없다. 이것보다 훨씬 많이 젖은 채로 오래 지냈던 적도 많았으니까. 만약 감기에 걸렸다고 해도 이것보다 심한 병도 많이 걸려봤으니 말야."
여름에만 자주 걸리는 지독한 전염성 위장병에 비하면, 여름 감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녀석도 포기할 줄 알았지만 녀석은 달랐다.
"아으, 아무리 그래도 안 걸리는 게 낫죠…! 컨디션 안 좋으면 감추지 마시고, 삼촌이 남기고 간 옷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찾아볼게요. 누나는 그동안에 저기 들어가서 샤워라도 하고 계세요. 옷은 화장실등 버튼 밑에 빨래바구니에다가…"
녀석은 답답하다는 듯이 이번엔 내가 괜찮다고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온갖 잔소리를 하며 내가 깨어났던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
"아냐... 너무 작은데... 이거는 구멍이 났고...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냥 심약한 어린애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화도 낼 줄 아는 녀석인가.
괜히 안 씻는다면 녀석이 또 무어라 하게 만들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이 옷을 찾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욕실이 있다고 일러준 방향으로 향했다.
차박...
물기가 맺힌 타일 바닥을 밟고 욕실에 들어가자, 조그마한 욕조가 보였다.
그러고보니... 샬레에서 당번 일을 할 때 욕조라는 걸 처음으로 써 봤지.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다는 선생의 말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비록 샬레에 있던 것보다는 작지만, 평소처럼 자정 즈음에 급수대에서 몰래 씻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그렇게 옷을 모두 걸어둔 다음, 샤워기를 틀어봤다.
쏴아–
미지근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상하군. 샬레에서 쓰던 건 따뜻한 물이 나왔는데.
아, 이제서야 기억났다. 수도꼭지를 한 쪽 방향으로 틀면 따뜻한 물이 나왔었지.
... 잠깐, 그런데 따뜻한 물이 나오는 방향이 어디였지?
나는 수도꼭지를 오른쪽 끝까지 틀어봤다.
쏴아아악‐
불쾌할 정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고, 나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조금 틀었다.
'... 그래도 이번에는 따뜻한 물이군.'
혹시나 해서 끝까지 비틀지는 않았는데,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아으, 아무리 그래도 안 걸리는 게 낫죠! 컨디션 안 좋으면 감추려고 하지 마시고...'
... '컨디션이 나쁘면... 숨기지 않아도 된다', 라고...
'사오리, 선생님한테는 아플 때 숨기지 않아도 돼. 비상약이 있으니까... 이거 먹고 잠깐 쉬다 가자.'
공주를 되찾으러 갈 때, 선생님도 비슷하게 말했지.
다시 생각해봐도, 선생에게는 신세를 너무 많이 지는 것 같다. 설마 선생의 가족에게까지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다.
물론 아직 의심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이 곳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라도… 저 녀석을 좀 더 캐묻기는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머릿속은 저 녀석이 선생의 혈육이라고 멋대로 단정짓고 있었다.
저 아이는 선생을 많이 닮기도 했고… 무엇보다…
… 그래, 저렇게 마음이 넓은 것도 선생과 비슷한 것 같아.
…
하지만, 저 녀석이 정말 선생의 혈육이든 아니든간에… 언제까지나 마음 놓고 여기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파업이 뭔지는 여전히 헷갈려도, 그런 건 중요치 않아.
이 집에서는 잠시 머물 뿐이다. 그게 저 녀석에게도 좋을 것 같고, 무엇보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아츠코, 히요리, 미사키… 그리고 선생도.
... 잠깐, 선생?
이런, 완전히 잊고 있었다...!
선생이 지금 위독하다는 걸 저 녀석은 모르고 있다.
갑자기 전달하면 분명 놀라겠지만, 그래도 감추고만 있을 순 없다.
최대한 빨리 씻고 나와서 말해야겠어.
쏴아아악—
.
.
.
◇◇◇
이마에 맺히는 땀을 닦으며 옷장을 뒤적인 끝에, 나는 겨우 사오리에게 맞을 법한 옷을 찾았다.
와이셔츠 한 벌이랑, 삼촌이 내 모친 되는 인간한테 공물이라며 바치려 했던 검은 여성용 면바지로.
이 두 개가 사오리에게 맞을지는 내 눈대중으로 본 것 밖엔 없지만, 별 수 없다. 엄연히 여자인 사오리의 몸을 내가 일일히 잴 수도 없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니, 그동안 사오리를 반찬 삼던 나 스스로가 민망해졌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생각지도 못한 점이 있었는데… 어리다고는 해도, 애초에 집에 남자 하나밖에 없는데 여자한테 씻으라고 하면 좀 변태같지 않나?
"....."
다시 생각해봐도 마음이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블루 아카이브라는 한 게임 캐릭터가,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오리가 현실로 넘어오다니.
여전히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내 눈으로 똑똑히 본 만큼 이제는 조금이나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오리가 의식을 차렸고, 바깥에 지내지 않도록 당분간 동거하기로 했으니 일단 급한 불은 다 꺼진 것 같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다.
가장 큰 문제는 사오리에게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 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선생의 조카라니, 항공사가 파업 중이라니 하는 건 모두 거짓말이다. 게다가 키보토스가 마치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것 마냥 말하기도 했고.
백 번 양보해서 사오리가 키보토스로 돌아가는 걸 포기한다고 쳐도, 문제는 여전히 산더미다.
게임에서 나온 대로라면 스쿼드의 아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 배운 탓에, 요리나 빨래같은 집안일을 잘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오리는 내가 책임져야 하지만... 그럼 학교는 어쩌고?
나는 선생도, 어른도 아니잖아.
학생 하나는 커녕, 자기 하나조차 책임도 못 지는... 무능할 뿐인 갓 중학교에 올라간 어린애인데?
늘 그랬듯이,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순 없으니... 나라도 책임을 저야 하는 걸까?
"... 이봐."
"힉!"
여러 생각을 하다가 거실 쪽에서 난 목소리에,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금 말하는 거... 혹시 들리나?"
"아... 네, 듣고 있어요... 혹시 비누나 수건이 없어서 그래요?"
"그건 아니고, 지금 너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렇다."
"그, 그런 거라면 다 씻은 다음에 전해 주셔도 괜찮은데요..."
"어짜피 다 씻었으니 문제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옷을 입어도 괜찮나?"
"당연하죠... 그런데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긴팔이라서 더울지도..."
"상관없다. 입지도 못 할 정도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아니니까.
"다행이네요... 그럼 곧바로 준비해서 드릴게요. 문 밖으로 손만 내밀어 주시면 바로 드릴테니까요."
나는 할 수 있는 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끝까지 돌린 채 옷가지를 내밀며 ‘나 변태 아니에요’를 어필했다.
어차피 사오리는 문 뒤쪽에 있어서 이런 내 뻘짓을 보지도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스으윽- 슥-
문이 닫히고 수건으로 몸을 닦는 소리가 조금 들리자, 나는 내 방 침대에 엎어져 다시 곰곰히 학교 생활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 당장 학교 생활이랑 동거를 같이 할 순 없으니, 꾀병을 부려 한 달 동안 학교를 쉬어 볼 생각이다.
사실 가장 좋은 건 해외여행을 빌미로 학교를 길게 빠지는 거였지만, 오늘부터 갑자기 해외 여행을 갈 수도 없으니까-
삐리릭…
이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제 겨우 7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 이 시간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메시지도 확인하고 담임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려고 휴대전화를 켰다.
어, 눈에 보이는 건 담임 선생님의 문자.
‘아그들아, 오늘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학교 뒷산에서 돌 몇 개가 굴러왔거든? 그래서 보수 작업을 해야 해서 짧아도 3주는 인강이다잉. 몸조심들 하고 수행평가는 전자메일로 보내라구. 인강이랍시고 영상 보는 거 계속 빼먹은거 들키부리면 혼쭐나는거다잉!'
‘나이스...!!’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마 집에 나 혼자였다면 공중제비를 돌며 소리를 치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면 일진 녀석이든 반 아이들의 시선이든 다 피할 수 있고, 해외여행 핑계도 어렵지 않게 댈 수 있으니 일석이조나 마찬가지지.
이렇게 잔뜩 신이 난 와중에,
꼬륵…
갑자기 배꼽시계가 울렸다.
뭐, 누구 들은 사람도 없어서 쪽팔리다는 생각은 없었고… 사오리도 어짜피 슬슬 나올 테니까, 옷이 맞는지만 보고 밥이라도 해서 먹을까.
벌컥-
아, 마침 사오리도 나왔네.
“누나, 옷은 좀 맞아요?”
거실로 가면서 환한 미소를 띄우던 내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으음… 좀 크긴 해도, 못 입을 정도는 아니다.”
“아니, 아니…!”
“...?”
사오리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만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모르는거야…
셔츠가 젖어서 지금 속이 반쯤 비쳐 보이는데!
심지어 저기 가슴팍에 작게 튀어 나온 분홍…
… 분홍…?
“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당황한 나는 자기도 모르게 삑사리를 내버렸다.
“아니, 갑자기 왜 화를…”
“잘 안 닦고 셔츠를 입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지금 그! 어우, 아, 아무튼! 이리 오세요!”
나는 사오리의 손을 잡아 안방으로 향했다. 화가 나서였는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였는지는 몰라도 내 얼굴은 잔뜩 붉어진 상태였다.
.
.
.
위이잉-
“...이렇게 머리까지 제대로 말려야지, 옷이 다 젖으면 안이 다 비칠 뿐더러 또 감기든다고요."
“이봐, 머리 말려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 중요하게 전할 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수건을 건네며 사오리에게 말했다.
“그런 건 물기 다 닦아내고 말씀하세요. 이번에야말로, 안방에서 좀 제대로 닦으셔야 해요!’
"아니, 잠깐만! 선생이 지금 위독—"
사오리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잠궜다.
“으휴…”
다리 사이의 그것에 피가 쏠린 것을 사오리가 제발 눈치채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남자에게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노출을 보이는 게 문제인지를 모르나?
… 아냐. 생각해보면 잘 모르는 게 당연한가. 어쩌면, 아까 파업이 뭔지도 자세히 모르던 것과 비슷한 이유로.
이러면서 기다리자, 머지않아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이번에는 잘 말리고 나왔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 이봐.”
“힉...!”
말을 꺼내려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오리가 서늘하게 나를 째려보고 있었으니까.
사오리는 무뚝뚝한 말투로 계속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나를 걱정해 줘서 이러는 건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 삼촌의 상태조차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네…?”
“네 삼촌이… 선생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제발 알아보려고는 해달란 말이다.”
“.....”
사오리의 호통에,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죄송해요. 제가 또 쓸데없는 짓을..."
".... 나도, 얹혀 사는 주제에 갑자기 화를 내버린 건 미안하다. 하지만... 그래도 선생이 어떤지는 좀 알아봐 줬으면 할 뿐이다."
그래. 사오리에겐 선생이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지...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먼저 공격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사오리의 눈에서 본 선생님일 텐데 말이다.
.
.
.
탁탁-
어느 정도 마음이 추스러지고 나자, 나는 일단 밥을 준비했다.
또 다시 간장계란볶음밥이긴 했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먹어야 기분이 더 풀릴 것 같았다.
“다 됐어요. 식사하세요.”
“... 알았다. 실례가 되지만 않는다면야. 그런데, 기분은 조금 풀렸는지...”
나는 말없이 붉어진 눈시울을 비비면서 볶음밥을 나와 사오리의 앞에 두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물거리며 밥을 삼키기 시작했다.
일단은, 밥을 먹으면서 기분도 더 풀고… 선생에 관해 사오리에게 좀 묻고 싶었다.
사오리가 선생의 위독한 상태를 직면하는 내용은… 메인스에서도, 인연스에서도 없었다.
끽해봐야 에덴조약 3장에서 사오리한테 도넛이 된 게 있긴 하지만… 사오리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리 봐도 최종장 뒤의 상황처럼 보이는걸.
최소한 선생이 내 삼촌이라는 점이 거짓말인 것만 안 들키면 된다. 사람이랑 대화를 나눠 본 적도 별로 없었으니까 정신 똑바로 붙잡고 말해야 해.
“...이제, 그 저희 삼촌이 어떤 상황인지 좀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러니까... 얼마나, 위독해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사오리가 대답했다.
“그래. 우선… 놀라지 말고 들어줬으면 한다. 선생은… 지금 의식을 잃었어.”
“어… 네?”
순간 사오리의 말이 와닿지가 않았다.
“네 삼촌이 지금 쓰러져서 못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아… 아아… 네…”
움츠러드는 듯이 대답하자, 사오리가 난처한 기색을 조금 내비쳤다.
“아니… 이봐. 내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걱정된다는 느낌이 잘...”
“예? 아, 아뇨…! 조금 놀랐어요. 당연히 걱정도 되고요. 그치만 그 뭐랄까… 삼촌이랑 계속 떨어져서 지내다보니… 안부 전화를 많이 못 받아 사이도 조금 멀어져서…”
내 대답에 사오리가 작게 한숨을 포옥 내쉬고 중얼거렸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생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예?”
“아냐, 그냥 혼잣말이었다.”
“아아… 네.”
역시… 거짓말로 지어낸 혈육관계여서 그런지, 하마터면 오해를 살 뻔한 것 같다.
“저기 근데… 그, 삼촌은… 도대체 언제… 어쩌다가 그러신 거에요…?”
“... 어제 3시 반쯤부터... 조금 힘겨워 하다가… 4시쯤에 정신을 잃었다. 예로니무스 토벌 직후 복귀하는 도중에 그렇게 된 거라 빠르게 조치를 받기 힘들었다고 하더군…”
“어… 예로… 니무스라고요?”
"그래. 설명하자면 좀 길지만... 아무튼 일종의 괴물... 같은 거다."
사오리의 말을 잘 들어보니, 어제 블아 서버가 터져 버린 시간이랑 선생이 쓰러진 시간이 겹친다.
혹시 이 둘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게임 속 캐릭터가 현실로 넘어온 것부터 판타지 범위인데, 그 정도의 연결고리는 있을 수 있겠지.
그래. 혹시 모르니까… 이거 하나 더 물어보자.
“저기 근데요… 누나는 어쩌다가 이 근처에 쓰러진 거예요?”
“음…?”
“누나 말을 들어보니까, 그 키보토스라는 곳은 여기서 엄청 멀리 떨어진 곳 같은데… 그럼 누나는 어쩌다가 여기로 온 거예요?”
“아아… 그건 말이지… 그러니까, 일종의 함정에 빠져서 그랬다고 보면 된다.”
“함정… 이라뇨?”
“... 너에겐 말해줘도 이해하기 힘들 거다. 그런 일은 키보토스 바깥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니까.”
“그치만…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알려주세요. 뭐라고 말씀하시든 간에 믿어 드릴게요."
"... 정말이냐?"
"... 예."
"... 그러니까.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곤란하지만, 나에게는 나와 내 가족같은 사람들을 괴롭히던 어떤 녀석이 있었다. 너도 내 동료들에 대해서는 선생을 통해 들었다고 했었나?”
“아아, 네. 뭐 미사키, 히요리, 아츠코… 이렇게 누나 셋 된다고요…”
“맞아. 선생도 참… 이 정도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아도, 키보토스에 대해 너무 바깥으로 많이 말해주지는 말아달라 했는데…”
“네?”
“...? 아아, 이번에도 그냥 혼잣말이다.”
“어… 네. 굳이 여쭤보진 않을게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확실히 들었다.
어쩌면, 키보토스 내의 상황을 외부에 퍼뜨리는 걸 제한하는 암묵의 룰이라도 있는 건가?
그 괴롭히던 녀석도 베아트리체를 돌려말한 것 같은데… 어쩌면 뭔가 비밀로 해야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일단 계속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나는 그 녀석의 잔당에게 당해서 여기에 오게 된 거다. 원래대로라면 그 녀석은 지금… 어떠한 이유로 키보토스에 없다.
하지만 그 잔당들이 우리를 다시 습격했고, 거기에서 공간 이동을 일으키는 폭탄이 터져서… 거기에 휘말리는 바람에 여기까지 와 버린 거다.”
“아아… 그, 그래서 급하게 그 키보토스… 라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거였구나… 그 누나 셋이랑 저희 삼촌이…”
“... 맞아. 너에게 괜히 사적인 인간관계를 말해서 좀 뭣하긴 하지만… 난 내 가족들과 선생을 위해서라도 키보토스에 빨리 돌아가야만 해.”
“그렇군요… 키보토스… 거기로 가는 뭐 다른 수단이 있는지 저도 검색해볼게요. 빨리 가서 삼촌을 보살피셔야 하니까요.”
“... 그렇게 해 준다면 정말 고맙겠군.”
일단 정리를 해보자면… 확실히 사오리에게 일어난 일은 정상이 아니다. 블아에 저런 스토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선 사오리는... 베아트리체의 잔당이 터뜨린 이상한 폭탄에 휩쓸려서 현실로 넘어오게 된 것 같다.
어제 휴대전화에서 나온 이상한 빛이… 그 폭탄의 영향으로 생긴 거였을까? 그치만 베줌마는 분명 색채한테 먹혔고… 그 잔당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을텐데.
그리고 선생은… 도대체 뭐 때문에 고열로 쓰러진 걸까.
… 정말이지, 도대체 저 휴대폰 액정 너머에는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건지 짐작할 수도 없는 것 같다.
또 물어보고 싶은 게 많기는 한데…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애초에 게임에선 이런 내용도 없었고...
그러다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조금 환기시켜 보기 위해서, 나는 다른 질문 하나를 생각해냈다.
“저기… 누나.”
“음? 또 뭔가.”
“그, 그러니까… 어, 그 키보토스에서의 저희 삼촌은… 어떤 분이셨어요?”
“음?”
“아아… 그게. 저 삼촌이 그 곳에서는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못 들어봐서… 많아봐야 다른 누나들을 가르쳤다 정도밖에는…”
“.....”
사오리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
“... 굳이 말한다면… 나에게는 평생의 은인 같은 사람이다.”
잠깐의 침묵을 깬 사오리의 대답은 이랬다.
“... 왜요?”
나는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사오리에게 물었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자세히는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선생은 나와 내 가족들을 구해줬다.”
“아아…”
“아까, 나를 괴롭히던 녀석에 대해 말한 걸 기억하는가? 그 자가 우리에게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는 것도… 다 선생 덕분이야... 우리는 그 녀석에게 협박당해서 네 삼촌을 공격했는데도..."
“.....”
“선생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남을지만 바라보던 우리에게… 내일을 선물해줬다. 헛되다는 굴레를 벗어나게 해 준 사람이야.”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선생은, 너의 삼촌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다. 단지, 보안상의 이유로 아마 너와 연락을 많이 못하는 것일 뿐이다.
… 선생은… 아이들을 향해 언제나 힘을 들이지만,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의 능력, 자기의 업적같은 건 함부로 말씀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나는 여전히 침묵할 뿐이었다.
"이런 점은… 아마 너라고 다르지는 않을 거다. 다만… 선생은 너에게 그걸 표현할 기회가 너무 적을 뿐인 거다. 그러니… 연락이 자주 안 된다고, 선생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줬으면 할 뿐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솔직히 연락이 뜸해져 관계가 서먹해 진 것은 현실의 진짜 내 삼촌 이야기다.
어쩌면… 진짜 내 삼촌도… 그냥 기회가 없어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걸까?
삼촌을 멕시코로 보낸 건 내가 동의를 한 것인데도, 연락이 줄었다는 이유로 삼촌에 대한 애정을 식혀버린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오리가 새로 얻게 된 희망이 부서지지 않도록… 계속 이런 거짓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오리의 마음 속 선생은, 약해 빠지고 무책임한 어린애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강한 어른으로 남아야 하니까.
◆◆◆
내가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쯤이었다.
"... 배 많이 고프셨나봐요. 조금 남아있을텐데 그거 드릴까요?"
녀석의 말에, 나는 그제서야 녀석이 절반 가까이 먹은 와중에 나만 밥을 다 해치웠다는 걸 알았다.
"아... 실례했다. 나만 너무 급하게 먹었나?"
"아뇨,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니까요... 그냥 더 드시고 싶으면 더 드세요."
이러고 난 뒤에 녀석은 프라이팬을 들고 와 내 그릇에 볶음밥을 더 얹어주었다.
그러고보니 선생이 자주 해 줬던 음식도, 간장 계란 볶음밥이었지...
아니, 지금은 이런 감성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은,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순 없다. 저 녀석을 위해서라도, 선생과 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어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녀석의 말대로라면, 아무리 줄여잡아도 2주일은 지나야 돌아갈 수 있는 모양이다.
우선은 일이 이렇게 된다면 아마 얼마 전에 블랙 마켓에서 구한 직장은 잘리게 되겠지.
뭐 어쩔 수 없다. 지금껏 블랙 마켓에서 구한 직장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안정적이어서 아쉽긴 해도 말이다.
그렇지만 히요리와 미사키, 그리고 공주는?
설마 '그 여자'의 잔당에게 붙잡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리고 선생은...
... 어쩔 수 없다. 이제 와서 걱정해봐야 소용은 없을 테니. 최대한 빨리 그 파업이라는 것이 끝나길 비는 수 밖에.
끝나는 날 즈음에... 저 선생의 조카라는 남자애가 알려주지 않을까.
비리릭- 비릭-
이렇게 가만히 생각하던 와중에, 갑자기 어딘가에서 처음 듣는 전화 소리가 울렸다.
"아, 저기 누나... 전화 와가지고요.... 받고 올게요."
"알겠다. 급한 일 없으니 천천히 하고 와라."
짤깍.
곧이어 녀석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조용히 닫았다.
가만, 그러고보니... 키보토스 바깥이라도 네트워크는 되지 않는가?
그래, 이걸 잊고 있었다. 어쩌면 휴대전화를 통해 선생과 공주, 히요리가 무사한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저 녀석이 통화를 마치면 물어봐야겠어.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녀석의 통화소리가 어쩐지 조금 이상했다.
"......."
"....! 저번에도...."
"?!.....?.....!!!"
"으... 그래..."
".... ....!!....?"
녀석에게 전화를 건 쪽은 어쩐지 화를 내는 것 같았고, 그쪽의 역정에 녀석은 발발 기는 것 처럼 들렸다.
끼익...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 녀석이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외출복 차림으로 방을 나왔다.
"음? 이봐, 어디로 가려는 건가?"
"우으... 별 건 아니고요... 그냥 뭘, 조. 조금 사려고요. 최대한 빨리 갖다 올 테니까 여기에 기다려 주세요."
녀석은 말을 마치고 순식간에 신발을 신은 다음 바깥으로 달아나듯이 향했다.
"......"
주머니에는 꽤 많은 양의 지폐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저런 녀석을 많이 본 적이 있었기에, 표정과 하는 짓을 봐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 불량학생에게 찍힌 것 같다고 말이다.
"... 흐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겉옷을 챙긴 다음 몰래 녀석의 뒤를 밟아보기로 했다.
◇◇◇
"야, 지금 기어나와서 돈 내놔."
"뭐라고...? 그치만, 저번에 가져갔잖아! 이번 주 돈 내는 건 이게 끝이라고."
"뭐 임마?! 이놈 자식이 꿇으라면 꿇는 거지 뭔 말이 많냐. 니가 나보다 강해? 너 임마 변태라는 거 소문내줘?"
"안돼... 그러지 마... 으... 얌전히 돈 줄테니까."
"으이그, 그러게 왜 기어오르냐 짜샤? 냉큼 뛰어와라. 평소 금액의 반토막이면 많이 봐준 거니까."
짤깍....
"으으윽..."
.
.
.
나는 돈을 쥐고 평소에 돈을 뜯기던 버스 정류장 뒷골목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역시 그 녀석. 어제는 아닌 척 하더니만. 내가 블루 아카이브 에로 동인지를 모은다는 걸 알고 있었어.
뒷골목에 거의 도착했을 때 즈음, 그 근처에서 무어라고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야,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다니면 더 쎄지는 거라니깐!"
"아니 씨, 됐다고! 난 혼자 다닐 거니까 뭉칠거면 너희끼리 좀 뭉쳐."
아무래도 일진 녀석이 어느 패거리랑 말싸움을 하는 것 같은데...
... 물론 내 알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약속시간에 늦으면 녀석이 나를 피떡으로 만들 게 뻔해.
그렇게 제 시간에 맞춰, 나는 뒷골목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거기에는 녀석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제일 좆밥인 놈들이 뭉쳐서 쎄보이려고 별 지랄을 해요, 아주!"
"저... 저기."
"오우 씨발!"
나를 본 녀석이 깜짝 놀라며 욕을 했다.
"으휴... 너새끼였냐? 좀 빠릿빠릿 와. 다리 없는 것도 아니면서."
"야... 약속시간 지킨 거 맞거든...? 지금 8시니까..."
"허 참, 웃겨 뒤지겠네. 지갑이... 말대꾸?"
일진 녀석이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놀라 몸을 움츠렸다.
"이... 이러지마! 돈은 제대로 가지고 왔잖아."
"흥, 그래 뭐. 오늘 너 하나 족쳐봐야 동전하나 떨어지지도 않을 테니까."
"... 그.. 근데 아까는 뭐 때문에... 싸우던 거였어?"
"... 야, 그걸 니가 왜 쳐 물어보냐. 닥치고 돈이나 줘."
괜히 담당일진 녀석에게 오지랖을 부린 걸 후회하며 나는 대충 주머니를 뒤졌다.
.... 바지주머니에 없다. 설마 뒷주머니인가?
어, 뒤에도 없는데...
...
맙소사.
망했다!
이대로 가다간 분명 두들겨 맞을 텐데...!
"... 뭐냐?"
"으... 아냐아냐! 지금 막 찾았어. 근데... 근데..."
"근데 뭐?"
"너 말야... 늘 궁금했는데 나한데 돈 뜯어서 어디에 쓰려는 거야?"
대충 시간을 끌려고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다.
"... 아니 이 새끼 봐라. 왜 자꾸 별것도 아닌 걸 궁금해 하는데?"
"으... 뭐 물어 볼 순 있는 거 아냐...?"
"참 내... 오냐. 그리 궁금하면 까발려주마. 별 거 있겠냐? 뭐... PC방 아님 당구장이지."
PC방...?
"우리 동네엔 PC방 없지 않아?"
"아... 아니 뭔 개쌉소리야! 니가 모르는 PC방이 있을 수도 있는거지."
일진 녀석이 뭔가 뜨끔한 듯이 화를 냈다.
"하지만, 진짜 우리 동네에는 PC방 따윈..."
"아니 그러니까 좀...! 잠만.
야, 설마 너 돈 없냐?"
"!!!"
이번에는 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푸하하하하!! 맞지, 맞지 씨발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이제 녀석의 얼굴에는 분노 대신 잔인한 미소만이 걸려있었다.
"거짓부렁이를 치다니, 좆밥치곤 머리 좀 썼구나? 그래도 걸린 이상 퍼니시멘트를 내려야겠지?"
이 말을 마친 녀석이 내 어깨를 강하게 붇잡았다.
"와앗?!"
"야, 세 대만 팰 거니까. 끝나고 니놈 집으로 안내해.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담부턴 아예 수급날에 맞춰서 내가 오든지 해야겠다."
"뭐? 그치만 집까지는-"
"아가리 닥쳐. 세 대로는 모자라지? 아예 반병신으로 만들어 줄까?"
"으으윽..."
담당일진 녀석의 으름장에 나는 말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야, 뭘 개새끼마냥 쫄아붙고 그래? 안 뒤져. 그냥 뒤질 정도로 아프다도르 뿐이지."
'끝장이다...'
"자, 이 악물라고. 우선 한-"
콰악-!!!!!
곧이어 사람이 얻어맞는 소리가 났다.
"으아악?!"
하지만 비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담당일진 녀석이었다.
"...뭐 하는 짓이지?"
이 냉혹한 여자 목소리는...
사오리다.
마스크를 쓴 사오리가, 일진 녀석에게 발길질을 날린 것이었다.
"쿨럭-! 아오 씨발... 아파라..."
일진 녀석이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겨우 일으켰다.
"허억... 헉... 뭐하는 년이야..."
눈을 비비며 사오리를 똑바로 인식한 일진 녀석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후욱... 잠깐만... 설마, 고딩이야?"
"고딩...?"
"누님, 그니까. 고등학생이냐고요."
일진 녀석이 숨을 고르며 다시 묻자, 사오리가 차갑게 대답했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하... 뭐 그런 셔츠하고 이상한 마스크를 교복으로 입고 다니는 학생을 본 적은 없지만... 알겠슈."
"....."
사오리는 여전히 강하게 일진을 쏘아보며 압도하고 있었다.
"하 씨... 그... 머리에 이상한 고리 달린 누님... 그 쪽 스타일은 참말로 내 취향인데... 저 찐따새끼랑은 무슨 관계-"
덥썩-
"으허억?!"
사오리는 대답 대신 녀석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건 굳이 알 필요 없고, 잘 들어라."
일진 녀석이 겁에 질린 채로 요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오리는 녀석을 놓아주며 확실히 말했다.
"저 녀석에게 더 이상 손 대면, 두 번 다시 똑바로 못 걷게 만들어 줄 것이다."
"... 예."
키보토스인은 평범한 사람보다 강해서 그런가, 그야말로 사오리의 압승이었다.
사오리는 바닥에 엎어진 채 영혼없이 대답한 녀석을 뒤로하고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 다친 데 없나?"
"....."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여기, 아까 보니까 지폐를 떨어트렸더군."
"고. 고... 우웃... 고마워요."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사오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어쨌든 살았다는 사실에 겨우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게 일이 대충 정리되자, 나와 사오리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 씨발, 뭔 누님이 저렇게 강하대?"
일진 녀석이 뭐라 중얼거리긴 했지만 우리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첫 날 부터 이렇게 되어버리니, 도대체 내가 사오리를 책임지는건지, 사오리가 나를 책임지는건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
.
.
◆◆◆
"... 아까 그 녀석은, 뭐하는 놈이었나?"
"예?"
"그 짙은 갈색머리 놈 말이다. 아까 너한테 돈을 뜯으려 했던."
"아... 걔는 뭐, 일진... 같은거죠. 저같이 만만한 애 하나 붙잡아서 돈 뜯어가는..."
"... 정말이지. 그런 녀석은 어딜 가나 있는 것 같군."
"뭐... 어쩌겠어요. 그냥 제가 조심하는 수 밖에."
"... 경찰 같은 사람한테 찔러 볼 순 없는가?"
"그게... 여기, 치안도 안 좋고 경찰들도 대부분 돈 드리면 이 정도는 눈감아주는 경우가 많아서요. 그 밖에도 .... 이러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여기 경찰들 소문이 엄청 나빠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키보토스에서 나는 범죄자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순 없다. 그래서 범죄내역만 없었다면 경찰의 도움이라도 받으며 그나마 좀 더 안전히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곳의 경찰은 거의 없는 쪽이 더 나을 정도라니. 어딜 가나 그 여자처럼 어른들 중에서도 더러운 족속들은 존재하는 모양이다.
.....
잠시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갑자기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내 뭔가 느낀 나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 이봐."
"네?"
"다음부터, 또 누가 괴롭히면 내가 되었든, 주변의 어른이 되었든... 조금이라도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꼭 말해라."
"아아... 네."
"그리고 너, 내일부터 나랑 같이 새벽에 운동 좀 하자."
"네... 네?"
"운동을 좀 하던지 해야 근육이 붙어서 괴롭히는 애들도 떨어져 나갈 것 아닌가."
"아... 아, 네... 맞... 는 말씀이에요. 알았어요. 같이 운동할게요."
"... 약속한거다. 꼭 지켜라."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참 이상했다.
살아남기 위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내게도, 오늘 생판 처음 만난 남을 신경 쓸 정도의 오지랖이 남아있었던 걸까.
... 아니 생각해보면 남도 아니지. 그 선생의 혈육이니 말이다.
목숨을 빚진 선생의 소중한 가족이니까.
그래. 나에게 온정은 무슨 온정인가, 그저 받은 게 있으니 그에 맞는 걸 지불할 뿐이다.
.....
'사오리, 내가 봤을 땐 너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공주를 되찾고 난 뒤에 선생이 말한 이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제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어느새 녀석이 자기 집 문의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는 걸 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