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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의 영애(深窓の令嬢)'라고 하면, 보통 만화 같은 데서 떠올리는 게 조신한 아가씨 이미지잖아. 다들 비슷할 거야. 여기에 병약해서 몸이 좀 약하다는 옵션까지 붙으면, 세상 남학생들 마음을 아주 꽉 움켜쥐곤 하지.
근데 사실, 그렇게 조신한 아가씨라는 게 현실엔 잘 없단 말이지.
조신하긴커녕 고자세로 깔보거나, 웃을 때도 "오호호호!" 하고 웃는 아가씨들이 만화 같은 데선 훨씬 더 자주 보이니까.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하냐고?
그야 뭐, 지금 내 눈앞에 그 '심창의 영애'께서 직접 강림해 계시니까 그렇지….
"하루히토 님. 왜 그러시나요?"
내 눈앞에 있는 흑발 미소녀. 아마 남자라면 누구라도 '미소녀'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거다.
긴 생머리에 이목구비는 아이돌이라기보다 딱 귀한 집 아가씨 느낌.
하지만 이 그녀… 보통 아가씨가 아니다.
"하루히토 님. 이런 몸이 되어버렸어도, 사랑을 하면 마음이 뜨거워지는 법이군요."
그녀는 목 아래가 기계로 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사이보그라는 녀석이다.
그녀의 이름은 쿠죠인 스즈(九条院 鈴).
쿠죠인 재벌의 영애이자 일본을 쥐락펴락하는 재벌가의 후계자다. 그렇다고 사람을 깔보는 법도 없고, 뼛속까지 일반 서민인 나한테도 꼬박꼬박 '님' 자를 붙여가며 경어를 쓴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초절정 미소녀다.
하지만 목 아래는 기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로봇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자, 그럼 그런 엄청난 부자에 사이보그인 미소녀가 대체 왜 나한테 달라붙어 있느냐?
그건 한 일주일 전쯤의 일인데…….
학교 과제를 끝내려고 나 혼자 교실에 남아 있었다. 시간은 이미 저녁 6시를 넘겼고 해는 져버린 상태.
교내엔 거의 아무도 없었다. 나는 컴컴한 복도를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비추며 걷고 있었다.
밤의 학교라는 건 참 으스스하단 말이지.
사이보그나 로봇이 돌아다니는 과학 만능 시대에 귀신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 따질 수 없는 그 기분 나쁜 공기. 그게 밤의 학교였다.
난 얼른 학교를 나가서 집에 가 저녁이나 먹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1층 출구로 나가기만 하면 끝이다. 계단을 다 내려왔고, 이제 현관으로 향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때였다.
"누구… 없나요……."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다 큰 놈이 "히익!" 하고 비명을 지르다니, 참 한심하기도 하지.
"도와… 주세요……."
가느다란 목소리는 지하에서 들려왔다.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유령 목소리인가? 아니, 이런 과학 시대에 유령이 어딨어.
그럼 누가 진짜로 도움을 청하고 있는 건가?
공포와 당혹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
"가보자."
초자연적인 현상 따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공포를 억누르며 한 걸음씩 천천히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엔 창고밖에 없다. 보통은 아무도 없을 텐데.
지하 창고 문은 유난히 낡았고, 캄캄한 학교 건물이 그 기괴함을 더 부추겼다.
땀이 밴 오른손으로 낡은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끼이이익,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문을 열면서 휴대폰 라이트로 창고 안을 비췄다.
휴대폰 불빛 따위가 방 전체를 비춰줄 리 없으니, 마치 호러 게임 주인공처럼 휴대폰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방 안을 훑었다.
그때였다.
"누구… 계신가요……."
"히에에엑!!"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한 쌍의 눈. 그리고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
난 남자치고는 정말 한심한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도망치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누군가 와주셨군요."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붉게 빛나는 정체불명의 물체(?)였다.
기분 나쁜 그 물체(?)는 방 안의 공기를 정화하는 듯한 맑은 목소리를 가졌다.
귀신 같은 게 아니라, 청초하고 투명한 여자의 목소리.
조금 맥이 풀리면서도 휴대폰 라이트를 비춰 방 안의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처음부터 불을 켰으면 됐을걸… 내 멍청함에 화가 났다.
"거기 누구 있어요?"
불을 켜자 선반이 쓰러져 있고 골판지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인 곳이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저 비품 더미에 파묻혀 있는 모양이다.
"도와주세요오… 상자에 파묻혀서 움직일 수가 없게 돼버려서……."
상자 더미 속에서 들려오는 간절한 목소리.
"잠시만요. 금방 꺼내 드릴게요."
나는 더미로 다가가 상자를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상자를 치우고 나타난 건 역시 여자였다. 다리를 옆으로 모으고 앉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았어요… 서류 정리하다가 그만 이렇게 돼버려서…."
조신하고 청초한 외모의 그녀였지만, 보통 여자애와는 다르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죄송해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근처 콘센트에 충전기 좀 꽂아주실 수 있을까요?"
목 아래가 기계로 되어 있었다.
난 그녀를 알고 있다.
진학반에 재학 중인 한 학년 선배, 쿠죠인 선배다. 이 학교 다니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집안은 쿠죠인 재벌이라 엄청난 부자. 머리도 좋아서 성적은 늘 전교 상위권. 그런데도 거드름 피우지 않고 청초해서 남학생들 사이에선 독보적인 인기인, 그야말로 학원의 마돈나다.
다만 몸이 약해서 체육 시간엔 거의 쉰다고 들었는데… 사이보그 수술을 한 건가?
"알겠습니다. 충전 케이블 좀 주시겠어요?"
"미안해요. 부탁드릴게요."
그녀가 교복 아래에서 케이블을 내밀었고, 난 그걸 받아 근처 콘센트에 꽂았다.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방금 전까지 울 것 같던 불안한 표정이 풀리며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쿠죠인 선배 맞으시죠?"
"앗! 죄송해요. 소개가 늦었네요… 쿠죠인 스즈라고 합니다. 이번엔 폐를 끼쳐서 정말 면목이 없어요."
"아뇨 아뇨. 그리고 저 2학년이니까 굳이 경어 안 쓰셔도…."
우리 학교 교복은 남자는 넥타이, 여자는 리본 색깔로 학년을 알 수 있을 텐데, 선배는 계속 나한테 경어를 쓴다. 이런 게 집안 교육의 힘인가 싶었다.
"그런데 선배, 그 몸은……."
"앗! 이거요?"
몸 상태를 물어보려 하자 선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옛날부터 몸이 약해서… 게다가 병 때문에 1년 쉬어서 유급까지 했거든요. 그래서 2주 전에 기계화 수술을 받았어요."
그녀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아직 몸에 익숙해지질 않아서요. 게다가 어젯밤에 충전하려고 했는데, 깜빡하고 케이블을 안 꽂고 자버리는 바람에…."
과연. 그래서 상자 더미에 깔렸을 때 괴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거구나.
사이보그인 그녀가 왜 상자 따위에 갇혀 있었는지 이제야 납득이 갔다.
"근데 구조 신호 같은 건 못 보내셨나요?"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라면 긴급 상황 시 보안 업체에 신호를 보내는 기능이 있을 텐데. 그걸 쓰면 배터리가 부족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었다.
"여기 지하실, 서비스 불능 지역(圏外)이거든요."
"앗! 진짜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안테나가 하나도 안 뜨고 '서비스 없음'이라는 글자만 떠 있었다.
"정말 살았어요. 당신 덕분이에요."
"아니 뭐… 별거 아닙니다…."
쑥스러워졌다. 아무리 사이보그가 됐다지만, 학교 마돈나한테 감사를 받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성함을 여쭤보지 못했네요. 정말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청초하다기보다 지나치게 저자세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쿠로가네 하루히토(黒鉄 晴人)입니다. 2학년이에요."
"어머, 하루히토 님이라고 하시는군요. 멋진 이름이에요."
빈말인지는 몰라도, 이름 칭찬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이게 재벌가 영애의 인사법인가 싶어, 다시 한번 그녀와 내가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어라?"
"왜 그러세요?"
"아니… 충전 경고는 사라졌는데, 다리가 안 움직여요."
그녀는 일어나려고 상체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다리 부분이 꿈쩍도 하지 않는 걸 깨달았다.
"저기… 혹시 선반이 무너질 때 재수가 없어서 배선이 끊어진 거 아닐까요?"
"네?"
"서포트 컴퓨터 열어서 에러 메시지 뜨는지 봐주실 수 있어요?"
나는 그녀에게 서포트 컴퓨터를 띄워달라고 부탁했다.
"으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워요……."
그녀는 눈을 감고 끙끙거렸다.
"앗! 정말이에요! 허리 쪽에 에러가 떠 있어요."
"혹시 에러 종류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단선'이라고 적혀 있네요."
그렇군. 선반이 덮치면서 넘어질 때 충격으로 배선이 끊어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하루히토 님은 뭐든 다 꿰뚫어 보시는군요. 존경스러워요."
역시나 그녀는 나를 치켜세워준다.
"저기… 저 공업과라서 이런 건 조금 알거든요."
내 전공은 그녀의 진학반과 달리 로봇이나 전기, 메카닉 등을 배우는 공업과다.
수업 시간에 로봇이나 사이보그의 기초 같은 건 배우니까.
그래서 에러 같은 것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저기… 혹시 괜찮으시다면……."
갑자기 그녀가 수줍게 말을 꺼냈다.
"이 에러… 고쳐주실 수 있을까요?"
"…네?"
너무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했다.
"저, 이 몸이 된 지 며칠 안 돼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하루히토 님. 저를 수리해 주시지 않겠어요?"
"으으…."
청초한 면도 있지만, 가끔씩 보여주는 이 밀어붙이는 기세에 깜짝 놀라게 된다.
"정비팀 사람들한테 부탁하면 될 텐데……."
"저, 정비팀 사람들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아요."
"네…?"
"서류 정리하다가 덜렁대서 상자에 파묻히고, 그 충격으로 몸이 고장 났다는 걸 아버님이 아시면 분명 화내실 거예요. 정비팀은 아버님 회사 사람들이거든요. 쿠죠인 가문은 항상 빈틈을 보여선 안 돼요. 그러니까 하루히토 님,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입장도 참 고달프구나. 아버지한테 항상 완벽함을 요구받으니 실수를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갔다.
그래도 좀 너무 엄격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알겠습니다. 하지만 응급처치 정도밖에 못 할 수도 있고, 증상에 따라선 저도 손을 못 댈 수도 있어요. 그건 알아두셔야 해요."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교실에서 도구 좀 챙겨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일단 창고를 나와 인두기 같은 공구들을 챙기러 교실로 향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기다리고 있었어요."
공구함을 들고 온 나를 반겨주는 그녀.
"저기, 기체 모델명 좀 알 수 있을까요?"
지식이 좀 있다고는 해도 메이커나 모델에 따라 매뉴얼이 다르니까, 그녀의 기체 모델명을 확인해야 했다.
"음… 죄송해요. 모델명은 기억이 안 나네요. 메이커는 쿠죠인 중공이에요."
세상에… 모델명을 모르면 일이 좀 복잡해지는데.
"저기… 모델명은 등 쪽에 적혀 있을 텐데…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교복을 좀 벗어주셔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우물쭈물하며 미안한 기색으로 그녀에게 부탁했다.
"어머! 그 정도라면 식은 죽 먹기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거침없이 교복을 벗었고, 상체는 속옷만 남은 상태가 됐다.
이런 부분에선 수치심이 없는 거냐고! 속으로 태클을 걸었다.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녀의 뒤로 돌아가 모델명을 확인했다.
역시나 검게 빛나는 그녀의 외골격은 여성의 곡선을 살리면서도 강인해 보였고, 로봇을 좋아하는 남자라면 '멋지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투박한 외골격과는 대조적으로, 앳되고 청초한 그녀의 얼굴은 언밸런스하면서도 묘한 페티시즘을 자극했다.
안 돼, 안 돼. 딴생각 품으면 안 된다….
모델명부터 확인하자.
"KJ2158-00인가… 쿠죠인 중공 최신형이네."
그녀의 등에 적힌 모델명을 확인했다. 역시 아가씨답게 최신형 기체인 건 당연한가.
나는 쿠죠인 중공 홈페이지에서 기체 매뉴얼 페이지를 열어 해치 위치와 에러 대응 Q&A를 확인했다.
"그럼 지금부터 허리 쪽 해치를 열게요."
"네, 네에."
실습 때 로봇 수리는 여러 번 해봤지만, 사이보그 수리는 처음이다.
게다가 상대는 재벌가 영애.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에서 오는 엉큼한 마음을 억눌러야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하으으…."
등 부품에 박힌 나사를 드라이버로 하나씩 풀고 장갑을 벗겨내자, 선배는 간지러운지 묘한 소리를 냈다. 진짜 집중하기 힘들다.
"이제 내부의 끊어진 케이블을 교체할게요."
"네에…."
외부 장갑을 떼어내자 실린더와 정밀한 기계 부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에 붉은색의 끊어진 케이블이 보였다.
하반신 신호 케이블이다.
이 케이블을 빼내기 위해 뿌리 쪽을 더듬었다.
"으으으… 아아…."
선배는 입을 꾹 다물고 참고 있었지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거… 너무 야하잖아.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접속 부위를 찾아 끊어진 케이블을 제거하려 했다.
"하아아!!"
선배의 목소리가 교성으로 변했다.
역시 신경계 신호 케이블이라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는 모양이다.
"방금 뺐어요."
"네에……."
척수 계통이라 뺄 때도 아주 신중하게 작업했다. 선배의 대답도 쾌감을 억누르는 건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새 케이블 연결할게요. 아프면 말씀하세요."
"네에…."
나는 서둘러 케이블을 그녀의 몸 안으로 밀어 넣어 접속 부위에 세팅했다.
"후아아아아!!!"
음, 정말 작업하기 힘들다. 선배의 몸이 걸려 있다는 압박감과 남자의 본능적인 에로스를 억누르는 게 진짜… 괜히 수락했나 싶어 후회가 밀려왔다.
"후우… 끝났다……."
이마의 땀을 닦고 외부 장갑을 장착한 뒤 마지막 나사를 조였다.
"이제 다 됐습니다."
선배에게 말하자 그녀도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선배는 벗어두었던 교복을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없는 것 같아요. 하루히토 님 덕분이에요."
"아뇨, 전 뭐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쑥스러워하면서도 속으로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진짜 피곤하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진이 다 빠졌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쉬는 게 천만다행이다.
그 후, 창고 정리를 선배와 같이 마치고 학교를 나왔다.
선배는 마중 나온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분명 시커먼 고급 세단에 실려 갈 텐데, 그럼 긴장해서 피로가 더 쌓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에 올라타며 조금 아쉬워하는 선배를 배웅하고 난 집으로 향했다.
뭐, 이런 재벌가 영애와의 인연도 오늘로 끝이겠지.
긴장해서 녹초가 되긴 했지만, 학교 최고의 마돈나와 잠시나마 엮였던 건 좀 기분 좋았을지도.
"야, 하루히토. 너 대체 뭔 사고를 친 거냐?"
"어?"
교실에서 나온 친구 놈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
교실 앞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설마 나 사고 친 건가? 선배 몸 수리가 잘못돼서 선배 부모님이나 보디가드들이 복수하러 온 건가? 어떡하지? 머릿속에서 주마등이 멈추질 않는다.
"일,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나는 친구를 붙잡고 다그쳤다.
"진학반 그 영애님이 너한테 할 말이 있다는데."
예감 적중. 자, 이제 어쩔 거냐. 설마 선배가 대폭발한 건가? 재벌가 영애의 몸에 상처라도 냈다면, 난 간이나 신장이라도 팔아서 돈을 만들어야 하는 건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교실로 향했다. 교실 문 앞에 서성거리던 구경꾼들은 내가 다가가자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주었다.
"하루히토 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 책상 앞에서 기다리던 선배는 전혀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선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는 안도하면서도 선배 앞으로 다가갔다.
"지난번 하루히토 님께 꼭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하는 영애님. 뒤에 있는 갤러리들은 "하루히토 님?"이라느니 "영애님한테 하루히토 따위가 감히"라느니 온갖 소리를 해댄다.
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아뇨, 보답이라니요……."
보답 같은 거 필요 없다고. 돈? 아니면 엄청난 대우? 주면 고맙긴 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넙죽 받았다간 끝장이다. 교실 안의 갤러리들한테 살해당할 거다. 여러 의미로.
"확실히 '보답'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겠네요."
"??"
무슨 소리지. 보답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의 목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와 사귀어주시지 않겠어요?"
인간이란 존재는, 솔직히 기쁜 감정이 든다 해도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갈등하게 되는 생물이라는 걸 이때 뼈저리게 느꼈다.
재벌가 아가씨에 얼굴 예쁘고 성격 좋고. 사이보그지만 여자다운 매력이 넘친다. 역대급 횡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남자라면 이보다 더 부러울 수 없는 제안이다.
나도 당연히 기쁘지.
하지만 온갖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우리 엄마 아빠한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면 바로 데릴사위 확정인가? 인생 설계는 또 어떡하고….
그리고 뒤에 있는 남학생들의 살벌한 질투가 장난이 아니다.
질투 어린 시선 때문에 등이 따가울 지경이다.
"저기…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게 아닐까요?"
나는 멍청한 목소리로 선배에게 물었다.
"아뇨. 이 쿠죠인 스즈, 도움받은 은혜는 사귀어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은혜 갚은 까치도 들어본 적 없을 법한 대사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 기쁘긴 한데….
"가, 감사합니다만… 여기서 바로 대답하기는 좀……."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머. 그럼 사귀는 것 자체는 괜찮다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하루히토 님!"
"앗! 에! 아니… 그게……."
생각이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닙니까, 아가씨!!
그렇게 해서, 나는 재벌가 사이보그 아가씨와 사귀게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눈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