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심야 0시. 긴장이라는 이름의 정적이 감돌던 박물관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놓치지 마!”
“저쪽이다!”
수십 명의 경찰이 내뱉는 고함이 뒤섞이고, 무수한 서치라이트가 나를 찾아 미친 듯이 춤을 춘다.
나는 ‘사냥감’을 품에 안은 채, 그 빛의 그물을 빠져나가며 달린다.
지붕 위, 벽면, 정원에 우거진 나무 사이, 그리고 감시 중인 경찰의 바로 등 뒤까지.
방금 그 경찰은 그저 등 뒤로 바람이 한 줄기 스쳤다고만 생각했겠지.
소음기가 내장된 내 두 발은 단 한 점의 발소리도 내지 않으니까.
“왜 눈치채 주지 않는 거야….”
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차라리 그냥 잡혀버리면, 더는 이런… 도둑질 같은 거 안 해도 될 텐데.”
이런 양심의 가책, 도대체 몇백 번째일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여자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만약 목표 탈취에 실패하거나, 하물며 경찰 손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알지? 난 네 자폭 스위치를 누를 거야. 망설임 없이.』
나를 이런 몸으로 만든 여자. 나에게 도둑질을 강요하는 악마 같은 대사.
“역시 싫어.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죽음의 공포에서 도망치듯 담장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착지한 그곳엔 ‘그 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괴도 가젯’. 내 예상대로야.”
나와 비슷한 또래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경찰 부대를 거느린 소녀.
아즈마 하츠미 경부. 나를 잡겠다는 집념에 불타서 가는 곳마다 앞길을 가로막는 아이다.
“지금이야, 포획망 투하!”
머리 위에서 거대한 투망이 내 몸을 덮친다.
“큭, 이런 그물 따위….”
간단히 찢어발길 수 있을 터였다. 분명히 그랬는데….
“소용없어. 네 완력이 아무리 상상을 초월해도, 특수 강화 강철선으로 짠 그물을 찢는 건 불가능하니까.”
경찰들의 손전등이 일제히 나를 비춘다.
밤의 어둠이라는 베일이 벗겨지고, 나의 칠흑 같은 바디가 드러났다.
소녀의 윤곽을 한 기계. 그 여자에게 개조당한, 끔찍한 내 몸.
“이제 포기해. 순순히 포박당하시지!”
경찰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온다.
(잡혀… 잡히면 죽어….)
“싫어, 오지 마아아!!”
그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물을 쥐고 있던 양손에서 청백색 불꽃이 튀었다. 직접 닿기만 해도 거대 코끼리조차 쓰러뜨릴 스턴건.
“윽! 아직… 이런… 장비가…!”
아비규환. 전격은 강철 그물을 타고 흘러 경찰 부대를 모조리 기절시켰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 죽고 싶지 않으니까.”
‘사냥감’을 안고 그물에서 기어 나온다. 그때, 등 뒤에서 쉰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기, 기다려주게!”
돌아보니 백발의 노인이 쫓아오고 있었다. 이 박물관의 관장, 이번 사건의 피해자다.
“자네 목적이 뭔가!?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네, 그러니 그 석판만은 가져가지 말아주게!”
이 ‘사냥감’… 낡아빠진 석판을 훔치는 목적? 그딴 거 내가 알 리가 없다.
그 여자에게 물어본들 가르쳐줄 리도 만무하고.
나는 그 여자에게 피킹 툴과 다름없는, 훔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니까.
“부탁이네, 제발 가져가지 말게! 그건 인류사를 밝혀낼 귀중한….”
노인이 매달리듯 손을 내민다.
“가까이 오지 마!”
“히익…!”
가련한 노인이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망자로 보였다.
도둑질에 실패하면 나는 그 여자에게 죽는다. 그러니까 난 잘못 없어.
그런데도 욱신하고, 있을 리 없는 심장이 아파 왔다.
끝
그 아이에게 전격을 퍼붓고, 아무 죄 없는 노인을 밀쳐내면서까지 나는 무사히 '사냥감'을 아지트로 끌고 왔다.
인적 끊긴 숲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연구소. 그 가장 안쪽 방에 그 여자가 있다.
"다녀왔습니다."
고토릭, 하고 석판을 받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호오,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왔네? 슬슬 잡힐 때가 됐나 싶었는데 말이야."
잔혹한 미소를 띠며 그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껏해야 스무 살 남짓해 보이는 여자. 하지만 그 요염한 자태는 오히려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늙은 여우를 떠올리게 했다.
"이걸로 열 장째…."
석판이 진짜라는 걸 확인하자, 여자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 너는 다음 일까지 잠이나 자고 있어."
여자가 방구석에 놓인 커다란 캡슐을 가리켰다.
이 몸이 된 이후로 나는 명령받은 대로 훔치고, 일이 끝나면 다음 작업 전까지 캡슐 안의 액체 속에서 잠드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식사도, 즐거운 대화도, 오락도, 희망도 없다. 나는 그저 기계이자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뿐이다.
문을 열고 캡슐 안에 들어섰다.
수십 개의 코드가 전신에 박힌 단자로 파고들고, 동시에 발치에서부터 초록색 액체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도둑질에 대한 혐오감도, 개조된 몸뚱이에 대한 생각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이 잠드는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안식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안식을 내 입방정으로 박살 내버리고 말았다.
"그 석판, 대체 어디에 쓰는 거죠? 당신은 왜 그런 걸 모으는…."
그 노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노인이 알고 싶어 했던 의문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흐응, 도구 주제에 내가 하는 일에 참견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여자의 시선이 나를 꿰뚫었다. 순간 등줄기가 오싹하게 얼어붙었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호기심이 대단하네. 상으로 아주 좋은 꿈을 꾸게 해줄게."
여자가 캡슐 옆의 스위치를 눌렀다. 순식간에 초록색이었던 액체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제발, 그것만은…!"
여자는 캡슐 유리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며 비열하게 웃었다. 마치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즐기는 것처럼.
"아, 아아…."
악몽을 꾸게 만드는 붉은 액체 속에서, 내 의식은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 여자가 나를 길들일 때 사용하는 붉은 액체.
그것은 내 안에 기록된 끔찍한 기억… 내가 사이보그로 개조되던 당시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나는 내 살점 돋은 육체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잃어간다.
"윽… 여긴 어디야!?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딱딱한 작업대 같은 곳에 대자로 눕혀져 있었다.
몸 구석구석을 차가운 금속 고정 장치가 짓누르며 나를 꼼짝달싹 못 하게 결박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 그래, 체육 수업 중이었을 텐데.)
목이 고정되어 볼 수는 없었지만, 상체를 부드럽게 감싸는 면 소재 체육복의 감촉과 하체에 딱 붙는 블루머의 느낌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맞아, 갑자기 배가 아파서 운동장 구석 화장실에 갔고, 그러고 나서….)
그 뒤의 기억이 뚝 끊겨 있었다.
"어머, 깨어버렸네. 운이 좋은 아가씨야."
난데없이 오른쪽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그리고 여긴… 병원인가요?"
어쩌면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 온 걸지도 모른다.
"후후, 네가 묶여 있는 게 수술대인 건 맞지만, 내가 의사로 보이니?"
구두 굽 소리를 또각거리며 목소리의 주인이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도저히 사람 목숨을 구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목구비는 반듯했지만, 그 미소는 마치 타락천사 같았다.
"설마, 나를…."
가장 먼저 '능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여자가 웃으며 내뱉은 말은 그보다 훨씬 잔혹한 사실이었다.
"이제부터 넌 새로 태어날 거야. 사이보그로 말이지."
"사, 사이보그…?"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그 젊고 유연한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딱딱한 금속 기계를 박아 넣을 거야. 그리고 그 싱싱한 피부를 벗겨내고 차가운 금속 외골격을 씌우는 거지."
"엣……?"
그런 짓을 당하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넌 이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니게 돼. 즉, 먹기 위한 위장도, 창자도, 숨쉬기 위한 폐도, 생물의 증거인 심장조차 필요 없다는 소리야."
"시… 싫어, 그런 거 되기 싫어! 난 사람이라고!"
"안심해, 뇌는 그대로 남겨둘 테니까. 그러니 자기가 인간이라고 계속 착각하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말이야, 네 몸의 90%가 금속으로 바뀌어도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싫어어어어!"
나는 발버둥 쳤다. 구속된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온몸에 힘을 꽉 주고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머릿속은 공포로 가득 찼다. 눈에는 눈물이 넘쳐흐르고, 귀에는 내가 흐느끼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발버둥 칠 기력도 체력도 바닥나 축 늘어진 순간,
"헛수고하느라 고생했어. 네 그 추태, 아주 잘 감상했단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동시에 목덜미에 따끔한 통증이 달렸다.
"아…."
그게 마취 주사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 했던 팔에는 이미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끝
당했다. 또 그놈을 놓쳤다.
전기충격기에 데인 자국에 반창고를 붙이며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서로 돌아와 집어 든 조간신문에는 ‘괴도 가젯, 10번째 범행’이라는 문구가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결국… 열 번째인가.”
전부터 결심했었다. 열 번째 범행 전에는 반드시 그놈을 잡겠노라고.
동시에, 만약 그러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경감님, 하츠미 경감님?”
“아, 응?”
어느샌가 부하 형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또 그놈을 놓쳤잖아. 심각해지는 게 당연하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사고 칠 것 같은 표정이라서요. 경감님, 혼자 끙끙 앓는 버릇 좀 고치세요. 저희가 언제든 힘이 되어 드릴 테니까.”
“아, 응. 고마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부하의 호의는 솔직히 고맙다. 하지만 이건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하들에게 가면을 좀 취하라고 이른 뒤, 수사본부를 빠져나왔다.
발길이 향한 곳은 기술수사부. 그곳엔 내가 명령한 ‘물건’이 완성되어 있을 터였다.
“카즈히로 기술관. 예의 그 물건, 다 됐겠지?”
“네, 네, 경감님. 여기 있습니다.”
타니 카즈히로.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부하가 모니터에 설계도를 띄웠다.
포획 및 구속용 각종 무장, 목표를 놓치지 않는 다중 레이더, 그리고 적의 도주를 허용하지 않는 기동성.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인간형 기계… 아니, 사이보그의 설계도다.
“역시 젊은 천재 기술관답네. (뭐, ‘젊다’고 해도 나보다는 연상이지만.) 이 정도면 그놈과 대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몰아붙일 수 있겠어.”
“네… 하지만 경감님, 정말 이걸 실용화하실 생각입니까?”
그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당연하지. 다음 범행 전까지 실전 투입할 거야. 당장 지원자부터 모집해야겠네.”
“지원자가 있을 리 없잖아요. 실험체 신세가 되는 데다, 결국 사람의 몸이 아니게 되어버리는 건데.”
“걱정 마, 내가 있잖아. 내가 지원자 1호야.”
담담하게, 가슴속에 품고 있던 결의를 밝혔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셨군요.”
“눈치채고 있었어?”
“경감님은 늘 그러시니까요. 대체 왜 그렇게 쉽게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육체까지 내던질 수 있는 겁니까?”
“난 천애고독이니까.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겨도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내 가족, 부모님과 여동생은 내가 세 살 때 집에 들이닥친 강도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강도범의 자백에 따르면 우리 집이 타깃이 된 이유는 ‘그냥 눈에 띄어서’였다고 한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아무리 깨끗하고 바르게 살아도, 운이 나쁘면 순식간에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인생은 불공평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경찰관이 되어 범죄와 싸움으로써 그 불공평함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겠다고.
이것은 맹세이자, 가족을 잃은 내가 살아가는 버팀목이다.
그러니 이를 위해 몸을 기계로 바꾸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다시 한번 모니터 속 도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며칠 뒤, 예상대로 나 말고는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수술대인지 작업대인지 모를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카즈히로 기술관. 내 몸, 잘 부탁해.”
“하아… 네.”
그는 아까부터 한숨만 내쉬고 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상관없지만, 그에게 있어 살아있는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울 터였다.
“기술관.”
“네, 네. 말씀하세요.”
“구상부터 설계까지 내 요구사항을 다 들어줬잖아. 게다가 이 힘든 수술까지 맡아줬고. 그러니까 보답으로 뭐든 딱 한 가지만 소원을 들어줄게.”
“어… 그, 정말 뭐든지요?”
“미리 말해두는데, 불법적인 건 안 돼. 비리 묵인이나 예산 뻥튀기 같은 거.”
“그, 그렇죠… 경찰관이 불법을 저지르면 안 되죠.”
그가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쓴웃음을 지으며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수술 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시간이네. 소원은 이게 무사히 끝나면 들어줄게.”
옆에 놓인 컵으로 손을 뻗었다.
(후회 따윈 안 해. 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범죄와 싸우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컵에 비친 내 얼굴에 한 점 망설임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는 물과 함께 수면제와 마취제가 섞인 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경감님. 들리십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게 카즈히로 기술관의 목소리라는 걸 깨닫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아, 응. 들려.”
위에서 내리쬐는 조명이 눈부시다. 아무래도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혹시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해서… 아, 안심하긴 아직 일러요. 몸은 제대로 움직입니까? 손발이라든가.”
“손…?”
누운 채로 오른손을 얼굴 쪽으로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수술실 조명을 받아 번쩍이며 빛났다.
“윽…!”
시트를 걷어차고 상체를 일으켰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곳에는 순백색으로 빛나는 금속 신체가 있었다.
“아…”
그제야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사이보그가 된 것이다.
“그, 그래, 손발은…”
문제없이 움직인다.
모터의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지는 것 말고는 인간이었을 때와 다를 바 없다.
개조는 성공적으로 끝난 듯했다.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럼 각 장비와 파츠 체크를 해보세요.”
“…그래, 알았어.”
가볍게 눈을 감고, 미리 설명 들은 대로 디바이스 매니저를 실행했다.
머릿속에 내 전신의 정보가 한꺼번에 나열되었다.
“…어라?”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기술관. 내 몸, 설계도랑 한 군데가 다르잖아.”
“네? 그, 그런가요?”
“내 기억력을 우습게 보지 마. 그 도면에는 없던 파츠가 하나 박혀 있어. 하복부에.”
“그, 그건 결코 불법적인 게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 설명은 한 2년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기술관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뭐?”
“아니, 2년만 지나면 합법이 되니까… 이 파츠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 주시는 걸로 아까 그 소원을 대신하면 안 될까요…?”
“? 뭐, 널 믿으니까 상관없긴 한데…”
그런 것보다 빨리 이 몸에 익숙해져야 한다. 소녀의 실루엣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화기를 탑재한 이 몸에.
그리고 다음번에야말로, 반드시 그놈을 잡을 것이다.
이틀 뒤, 놈의 예고장이 도착했다.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아.”
양팔로 자신의 새로운 몸을 감싸 안으며, 나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끝
박물관 5층, 대전시실. 중앙에는 겹겹이 둘러쳐진 강화유리 너머로 석판 하나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벽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잠복해 있던 경찰들의 살기가 일제히 곤두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 오는데요.”
부하 형사 하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경찰들 사이로 서서히 동요가 퍼져 나갔다.
(설마 예고를 씹겠다는 거야? 아니, 그 자식이 그럴 리가 없는데…….)
나조차 의구심에 휩싸이려던 그 찰나,
“바, 반장님! 저거 보세요!”
부하가 가리킨 손가락 끝, 석판을 보호하던 유리 케이스 안쪽에서 한 줄기 빛이 솟구쳐 올랐다.
“플라스마…… 레이저?! 말도 안 돼, 아래층에서라고?!”
대형 레이저 메스나 다름없었다. 그 빛줄기가 바로 아래층 방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종잇장처럼 뚫고 올라온 것이다.
우리가 숨을 삼킨 찰나의 순간, 빛의 궤적이 석판 주위를 매끄럽게 한 바퀴 돌았다.
마치 쿠키 틀로 반죽을 찍어내듯, 석판이 놓인 바닥이 완벽한 원형으로 잘려 나갔다.
(당했다!)
강화유리로 사방이 막힌 공간 안에서, ‘즈즈즈’ 하는 콘크리트 마찰음과 함께 석판은 바닥 통째로 아래층으로 쑥 꺼져 버렸다.
박물관에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전시실을 박차고 나가, 색적 장비를 풀가동하며 복도를 질주했다.
(진짜,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건물 도면을 머릿속에 넣고 있다 해도, 단번에 석판 위치를 정확히 짚어내다니 보통 성능이 아니다.
그 녀석은 매번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친다.
(하지만 이번 승부, 아직 끝난 거 아냐.)
그 녀석은 타깃을 손에 넣는 순간 은밀함이 확 떨어진다.
훔친 물건까지 광학 미채를 씌울 순 없거나, 레이더 교란용 채프를 다 써버렸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놈은 무조건 단숨에 도망치는 전략을 택한다. 당연히 배열량도 치솟고, 열 감지 레이더에도 딱 걸릴 수밖에 없다.
“찾았다!”
엄청난 속도로 바로 아래, 4층 복도를 이동하는 물체. 틀림없다, 그 녀석이다.
『시험 운용기, 아즈마 하츠미. 지금부터 추적 및 구속 모드로 전환합니다.』
동력로의 출력 게이지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그 가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는 정면의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창유리가 박살 나는 소리가 연달아 두 번 울렸다.
눈 아래로 석판을 껴안고 허공을 가르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대체 저게 뭐냐고?!)
이미 박물관에서 10km(10킬로미터)는 떨어졌다.
경비망은 진작에 뚫었는데, 정체 모를 추격자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잡히면 끝장이다. 저 여자 손에 넘어가서 폭파 처분당하는 건 죽어도 싫다.
(제발, 따라오지 마!)
등 뒤의 부스터를 풀 파워로 가동하는데도 저 하얀 기체와의 거리는 좁혀지면 좁혀졌지, 멀어질 기미가 없다.
마치 사신 같았다. 밤의 어둠 속에서 내 목숨을 거두러 뒤쫓아오는 하얀 사신.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추격자의 기척을 느낄 때마다 깎여 나가던 내 멘탈은 이미 한계였다.
더는 쫓기는 걸 견딜 수 없다. 그러니까, 저것한테 잡히기 전에 내가 먼저 박살 내버리겠어……!
아스팔트 도로 위로 발바닥을 짓이기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석판을 내려놓고, 오른손등에 장착된 플라스마 레이저 발진기를 가동했다.
내 공격 의사를 알아챘는지 하얀 인간형 기체도 브레이크를 걸며 멈춰 섰다.
10미터(10m) 정도 거리를 두고 나는 추격자와 대치했다.
“어……?”
서로 멈춰 서자 비로소 그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거짓말, 설마, 당신이 왜…….”
잘못 볼 리가 없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내 앞을 가로막았던 그 계집애의 얼굴이다.
“자칭 ‘괴도 가젯’, 절도 현행범으로 체포하겠어.”
“당신, 하츠미 경부야?”
“그래.”
“그 몸은…… 설마.”
“짐작하는 대로야. 널 잡기 위해서, 나도 너랑 똑같이 변했어.”
“왜, 왜, 도대체 왜……!”
나를 잡겠다고…… 나 때문에 그 애가 기계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내 책임이야? 그 애한테서 인간의 몸을 뺏은 게 나라고?)
제멋대로 사이보그가 되어 나타난 그 애가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의 몸까지 뺏었다는 죄책감까지 떠넘겨서 날 더 괴롭히겠다는 거야?!)
“왜 그랬어?! 왜 나 같은 것 때문에 몸까지 버린 거냐고?!”
(나 같은 시시한 존재…… 그냥 도구일 뿐인 나 때문에 몸을 버리다니.)
“‘나 같은 것’이라고……?! 너, 네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나 해?!
생각해 봐. ‘네가 노리는 석판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 우연 하나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을!”
“닥쳐어어어!!”
지면을 박차고 나가며 오른팔을 휘둘렀다. 두꺼운 바닥도 단숨에 베어버리는 레이저 칼날이 그 애의 목을 겨냥해 쏟아졌다.
그래, 난 잘못 없어. 난 그냥 ‘그 여자 눈에 띄었다’는 우연 때문에 고통받는 피해자일 뿐이니까.
그 애가 기계 몸이 됐든, 여기서 죽든, 그건 내 책임이 아냐!
휘두른 레이저 칼날이 목을 갈라버리기 직전, 하얀 잔상만 남긴 채 그 애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느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난 너랑 똑같은 스펙이라고.”
“으…… 아아아악!”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정면에서 베어버릴 듯 달려들다 직전에 재상승, 머리 위를 넘어가며 몸을 뒤틀어 후두부를……!
“그런 움직임, 뻔히 다 보여.”
“뭐?!”
그 애의 손바닥이 나를 향했다. 직후, 손바닥 중앙에서 폭발하듯 그물망이 펼쳐졌다.
“꺄아아악!”
공중에서 그물에 칭칭 감긴 내 몸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지난번과 같은 강화 강철선 포획망이다.
하지만 강철선에 절연 코팅이라도 되어 있는지, 전기 충격은 통하지 않았다.
“스러스트를 얻은 인간이 어떤 움직임을 떠올릴지, 난 내 몸으로 직접 겪어서 다 알고 있어.
네 심리 따위 손바닥 안이라고.”
그 애가 승리감에 도취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내…… 마음을?)
“웃기지 마!! 당신이…… 당신 따위가 내 마음을 알 리가 없잖아!”
“……?”
“당신이랑 난 달라. 내…… 도구로밖에 살 수 없는 존재의 고통을 당신이 알 턱이 없다고……!”
레이저로 그물을 찢어발겼다.
그 기세 그대로 그 애에게 달려들어, 단숨에 오른쪽 팔꿈치를 절단하고,
“뭐?!”
그 단면에 직접 전격을 때려 박았다.
“꺄아아아악!!”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멈춰버린 그 애의 몸을 외면한 채, 나는 석판을 껴안고 일어섰다.
그 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냐……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고…….”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며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 애나 경찰이 아닌,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도망치듯이.
끝
배, 등, 다리, 팔, 그리고 뒷통수까지.
전신 곳곳에 박힌 정비용 해치가 일제히 열리며, 기계 덩어리와 회로가 빽빽하게 들어찬 내 내부를 훤히 드러냈다.
시험 운용기인 나는 매일 한 번씩, 점검을 겸한 메인터넌스를 받아야만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일과가 정말 싫다.
수사에 몰두할 때만큼은 잊고 지낼 수 있는 이 몸뚱아리의 실체를, 싫어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니까.
그놈과의 '첫 대결'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결과는 참패. 게다가 내 몸은 오른팔이 완전히 박살 났고, 어깨부터 가슴팍까지 전자 기기들이 죄다 시커멓게 타버린 꼴이었다.
다행히 뇌에는 별 이상이 없어서 부품 교체만으로 몸은 원래대로 수복됐지만.
하지만 범인 체포에 실패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놈이 남긴 말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
『내 고통을… 도구에 불과한 존재인 당신이 알 리가…!』
그건 진심이었다. 형사로서의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즉, 흑막은 따로 있다는 소리다. 그놈 또한 피해자였던 거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잔인한 말을….”
“저, 저기, 경부님.”
기능 체크를 마치고 수사 본부로 돌아가려는데, 카즈히로 기술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왜?”
“아니, 경부님이 정비받는 내내 너무 고민이 많아 보이셔서요. 그게, 혹시 후회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어서….”
“후회라니, 이 몸이 된 거?”
나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했다.
“의미 없는 질문은 하지 마. 후회한다고 하면 뭐 어쩔 건데? 내 몸을 원래대로 되돌려주기라도 할 거야?”
물론, 원래의 육체로 돌아가는 것 따위 불가능하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아, 아뇨… 죄송합니다.”
입을 다물어버린 부하를 뒤로하고, 나는 정비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걘 걱정돼서 한 말인데.)
역시, 그가 말한 대로 나는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나 후회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아, 경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도로 나서자마자 부하 형사 하나가 웬일인지 흥분한 기색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뭐 좀 알아냈어?”
“네, 중요한 보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그 일련의 석판에 대해서인데요.”
내밀어진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놈이 모으고 있는 석판은 초고대 문명의 유물이라고 합니다.”
“초고대 문명…?”
“선사 시대에 현대 기술을 능가하는 테크놀로지로 전 세계를 지배했다나 봐요. 그리고 말이죠… 그 석판에는 그 문명이 탄생해서 번영의 정점을 찍기까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는 ‘사냥하는 자’, 두 번째는 ‘경작하는 자’, 그리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장사하는 자’….”
“스톱. 요점만 말해줄래?”
“아, 넵.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석판 시리즈는 전부 열두 장이라고 합니다.”
“열두 장?! 그럼 지난번이 열한 번째 범행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남은 한 장, ‘패왕’의 석판이 마지막입니다.”
즉, 아마도 다음이 그놈의 마지막 범행이 될 거다.
그놈은 스스로를 ‘도구’라고 불렀다. 쓸모가 다한 도구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경부님, 또 다른 보고입니다만….”
부하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놈한테서 예고장이 도착했습니다. 타깃은 패왕의 석판입니다.”
끝
“일어나, 일할 시간이야.”
그 여자의 목소리가 달콤한 잠의 끝을 알렸다.
또다시 죽음의 공포와 죄책감에 짓눌리는 현실이 시작된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라…?”
뭔가 평소랑 달랐다.
양팔이 묵직하다. 시야도 평소보다 높은 것 같고.
“어때? 그 팔다리, 마음에 들어?”
“팔다리라니…… 힉, 이게 뭐야!?”
소녀의 형상을 한 내 몸에서,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팔다리가 돋아나 있었다.
굵고, 길고, 울퉁불퉁한 사지를 가진 내 모습은 마치 악귀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보는 대로야. 은밀함이랑 기동성을 좀 버리는 대신, 파괴력을 끌어올렸지.”
“말도 안 돼, 왜 나를 이런 모습으로…!?”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점점 더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는 내 몸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 경찰 계집년한테 대항하려면 어쩔 수 없잖아. 지난번에 숨통을 끊어놨으면 이런 번거로운 일도 없었을 텐데.”
“엣, 그 애가 살아있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향해, 여자는 그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죽네.”
“앗… 그건, 그러니까…”
“역시, 조교가 더 필요하겠어. 길들이기의 기본은 ‘당근과 채찍’이지… 자폭 장치라는 채찍에 더해서, 아주 끝내주는 당근을 선물해 줄게.”
카칵, 뒷덜미 단자에 플러그가 꽂혔다.
“머, 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몸속으로 충격 같은 무언가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윽… 아앗!”
머릿속이 하얘진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윽…… 하아…… 아아… 아.”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꿰뚫고 지나간 충격은 뜨거운 여운을 남겼고, 그것은 이내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는 쾌락으로 변했다.
“후후, 꽤 마음에 드나 보네. 예전의 너도 그런 꼴로 몸을 섞곤 했을까?”
“에…?”
두 배는 커진 내 손은 어느샌가 무의식적으로 가슴과 아랫도리를 더듬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지금은 그저 딱딱한 금속 껍데기뿐인 부위에, 그 부끄러운 기관들이 되살아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목덜미 단자는 네 뇌랑 연결되어 있어. 성감을 뇌에 직접 때려 박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여자가 즐겁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성감…… 이게…?”
믿을 수 없다.
예전에, 껍질을 까고 여린 살점을 직접 만져봤을 때도, 안쪽 입구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밀어 넣어봤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너무나도 격렬한 충격이 성감이라니…
“흐응, 그럼 좀 더 맛보면서 확인해 봐. 몇 번이고 말이야.”
“……윽!?”
“아아아아악!!”
충격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 몸을 유린한다.
더는 생각조차 이어지지 않는다. 비명인지 환희인지 모를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살아있는 몸이었다면 고통에 몸부림치다 숨도 못 쉬고 질식했을 게 뻔했다.
“좋지? 모든 걸 잊고 마음껏 느낄 수 있다니, 사이보그만의 특권이야.”
“아… 아……”
“이대로 계속해 줬으면 좋겠어?”
여자가 미소를 띤 채 나를 애태운다.
“으… 윽…”
믿기지 않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솔직하네. 좋아, 마음껏 즐겨보렴.”
다시 한번 내 몸이 경련한다.
숨도 차지 않고, 몸부림치는 육체는 지칠 줄을 모른다.
제어 불능이 된 나는 그저 탐욕스럽게 쾌락을 집어삼킬 뿐이었다.
“여기까지.”
갑자기 쾌감이 뚝 끊겼다.
“어…?”
“더 원해? 그렇게 즐겨놓고도 아직 부족한 거야?”
“더, 더… 더 줘…!”
“그래. 그럼 조건이 하나 있어. 아주 간단한 거야.”
“…?”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석판을 가져올 것. 설령 그 경찰을 죽이게 되더라도 말이야.”
끝
‘고대 석판 연쇄 도난 사건’의 마지막 밤. 자정이 되기도 전, 이변이 터졌다.
“전원 대피! 벽이랑 석판에서 떨어져!”
콘크리트 벽이 박살 나며 비산한다. 휘어진 철근 너머로, 놈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괴, 괴물…!?”
부하들의 비명 섞인 소리가 터져 나온다.
“물러나 있어! 나조차 저놈을 막을 수 있을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이런 게 어디 있어!?)
혼자서 석판 앞을 가로막아 섰다.
“자칭 ‘괴도 가제트’, 투항을 권고한다. 당신, 대체 누구한테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방… 해…!!”
검은 거구가 팔을 치켜든다.
“헉!?”
간발의 차였다.
철퇴 같은 주먹이 내가 서 있던 바닥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설득이, 아니, 말 자체가 안 통하는 거야!?)
“석… 판…… 이걸로… 더, 더… 기분 좋게….”
놈은 길을 비킨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언가에 홀린 채 석판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황홀경이라도 느낀 듯한 표정이 기괴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이게 진짜… 제발, 멈춰!!”
열 번째 포획망을 발사했다.
예전 같으면 확실히 놈을 묶어두었을 강화 강선이, 거인 같은 팔에 너무나도 쉽게 툭툭 끊겨 나갔다.
(대체 어떻게 해야….)
놈이 석판을 강탈해 포위망을 힘으로 뚫고 나간 지도 벌써 10km(10킬로미터)가 넘게 지나 있었다.
“당신도 알잖아!? 석판은 이게 마지막이야. 이걸 가져가면 당신은 이제 쓸모없어진다고!”
나는 필사적으로 놈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난 당신이 죽는 걸 원치 않아! 그러니까 멈춰, 제발!”
“………너… 끈질겨.”
돌아온 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어?”
놈이 급제동하며 멈춰 서더니 석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위산 같은 어깨에 장착된 전투 도끼를 뽑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 그럴 수가….”
놈은 조종당하고 있을 뿐인 피해자다. 그걸 아는 이상,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아… 아아아!”
도끼가 울부짖는다. 가드레일이 토막 나고, 노면이 박살 나며, 전신주가 힘없이 나자빠진다.
그저 무식하게 휘둘러대는 도끼질을 피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하지만 포획·구속용 무장이 전혀 먹히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수고했어. 석판은 확실히 받았으니까.”
갑자기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우리를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아….”
우리의 움직임이 멎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샌가 헬기 한 대가 우리를 내려다보듯 떠 있었다.
“젠장, 언제 저기까지!?”
싸우기 직전, 놈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석판이 사라져 있었다.
헬기에서 내려온 크레인이 석판을 하늘 높이 낚아챈 상태였다.
“아아…… 포, 포상을… 줘….”
“그래, 너한테는 포상을 주기로 약속했었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놈의 악의가 소름 끼치게 전해졌다.
“기다려! 대체 무슨 짓을….”
『자폭 장치 가동. 폭발까지 남은 시간, 30초.』
놈의 몸에서 최악의 결말을 알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신은 차리게 해줬어.
멍청하게 있는 상태로는 평생 한 번뿐인 순간을 제대로 만끽할 수 없을 테니까, 안 그래?”
헬기가 멀어져 간다.
전투 도끼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 거짓말이지…?”
놈의 얼굴에 감정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공포라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시, 싫어… 나,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죽고 싶지 않아…!!”
나는 결단을 내렸다.
놈의 발치에 떨어진 도끼를 양손으로 집어 들었다.
“미안해! 나를 믿어!!”
“어……!?”
설명할 시간 따위는 없다.
온 힘을 다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도끼를 쥔 양팔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 놈의 목을 향해 내리찍었다.
끝
다행히 그 녀석 몸뚱이에 장치된 자폭 장치는 몸통 쪽에 있었고, 배틀액스로 무식하게 찍어 눌러 떼어낸 머리통은 무사했다.
하지만 생체 뇌 유지 장치가 멈춘 상태 그대로라면, 결국 그 녀석은… 그 녀석의 뇌는 죽고 만다.
그걸 막을 방법은 지금 단계에선 딱 하나뿐이었다.
그 녀석은 지금, 내 안에 있다.
내 뇌와 유지 장치를 공유하며 내 가슴 속에 들어앉아 있는 거다.
“고마워요, 카즈히로 기술관. 덕분에 그녈 구할 수 있었어.”
“아뇨. 하지만 경부님이 용의자 머리를 들고 오셨을 땐, 진짜 간이 콩알만 해졌다고요….”
서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 애랑 ‘대화’가 가능해지는 건 언제쯤이지?”
“네. 지금 용의자의 뇌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혼수상태니까요…. 깨어나기만 하면 언제든 심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빨리 깨어나야 할 텐데….”
자신의 가슴으로 시선을 떨궜다.
이미 온갖 기계 장치로 꽉 들어차 있던 내 몸속에 급하게 그 녀석의 뇌를 쑤셔 넣은 탓에, 내 가슴팍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의도치 않게 몸매가 좋아지긴 했는데, 왠지 뽕이라도 넣은 것 같아 오히려 낯부끄럽다.
그렇다고 배 같은 데다 뇌를 넣었다간 진짜 임산부처럼 보였을 테니까….
“일단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 주세요. 만에 하나라도 용의자에게 무리가 가면 안 되니까요.”
(…어쩐지, 진짜 임신이라도 한 기분이네.)
타이밍 좋게 들려오는 기술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있다. 이 감각은 그야말로 임산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임신할 거란 상상은 해본 적도 없는데, 기계 몸이 되어서 이런 기분을 맛보게 될 줄이야….)
뭐랄까, 참 우스꽝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떤 놈일까요, 용의자를 이 지경으로 만든 여자는.”
중얼거리는 카즈히로 기술관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역시 용서가 안 돼? 같은 기술자로서.”
“저희 집안이 대대로 기술자 집안입니다만,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지 마라’고 배워왔거든요. …도리에 어긋난 친척이 의절 당하는 것도 봐왔고요.”
“그거, 꽤 엄격하네.”
“네. 스스로를 경계하는 의미로 가보를 대대로 소중히 이어받고 있을 정도니까요.”
“가보?”
“고대 석판입니다. 뭐랄까, 초고대 문명이 자신들의 기술력에 취해 멸망해가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고….”
“잠깐, 석판이라고!?”
“에, 예….”
(설마, 석판이 열두 장으로 끝이 아니었어!?)
“보여줘! 그거 어디 있어!?”
“저희 집에 있긴 합니다만, 아직 동트기 전이라….”
“미안, 지금 당장 보고 싶어. 안내해!”
그의 몸을 휙 들어 올렸다.
“우와앗, 와!? 잠시만요 경부님…!?”
가볍게 패닉에 빠진 그를 옆구리에 끼고, 창밖 새벽녘의 어두운 하늘로 뛰어올랐다.
열세 번째 석판은 일본식 방의 도코노마(床の間)에 장식되어 있었다.
“확실해… 이 고대 문자, 그 석판 시리즈랑 똑같아. 큰 공 세웠어, 카즈히로 기술….”
뒤를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어깨를 들썩이며 다다미 위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 미안해. 그렇게 무서웠어?”
그의 얼굴은 꽤 상기되어 보였다.
하기야 지붕에서 지붕으로 부스터를 풀가동하며 날아왔으니 좀 심했나 싶기도 하다.
“아뇨… 그것도 그렇지만… 그게, 경부님한테 안긴다는 건 역시 뭐랄까….”
“응? 업어주는 건 등 뒤 부스터 때문에 화상 입으니까 안 되잖아. 떨어지는 게 무서우면 돌아갈 땐 더 꽉 안아줄게.”
“윽!! ……됐거든요! ……그렇죠 뭐, 수사에 미쳐서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건 경부님 고질병이니까요.”
“…?”
“…어, 어쨌든 경부님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용의자 뇌를 품고 계시니까요.”
“알고 있어. 알지만, 빨리 이 석판을 고고학자한테 분석 맡기지 않으면….”
카즈히로 기술관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끝
이틀간의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내게 들려온 소식은, 그 아이가 내 목숨을 구했다는 것과... '육체'에 이어 '신체'마저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내가 대체 무슨 죽을죄를 지었길래 신께서 이런 벌을 내리시는 걸까.
『이쪽 맞지? 그 여자의 아지트.』
내부 회선을 타고 그 아이의 목소리가 뇌리에 직접 울려 퍼졌다.
『네. 여기서 2, 3킬로미터(km) 정도 더 가면 나오는 낡은 연구소예요.』
열한 번 하고도 반이나 오갔던 숲길의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발이 땅을 짓밟으며 그 여자의 소굴을 향해 나아간다.
『저, 무서워요...』
『괜찮아. 네 몸에 설치됐던 폭발물은 이제 없고,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 거니까.』
『응, 하지만...』
이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수많은 고문을 당했던 장소,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보이네. 저기지?』
『.........』
얼마 지나지 않아, 공포의 상징 그 자체인 건물이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싫어... 무서워...)
몸이 멋대로 복도 안쪽, 그 여자의 방으로 기어 들어간다. 감각은 생생한데 내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내가 그 아이 안에 있다기보다, 그 아이에게 빙의되어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정확했다.
문이 열렸다.
"어서 오렴. 기계 여경님?"
무기질적인 방 안에 그 목소리가 울렸다. 벽에는 열두 장의 석판이 사각형 모양으로 걸려 있었다.
"여길 용케도 찾아냈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서 취조실에 가서 물어볼 게 산더미 같으니까."
"어머, 절도 용의자치고는 적개심이 대단한걸?"
"닥쳐! 네가 육체를 뺏고 노예처럼 부려 먹은 그 애를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
"그래... 기계가 된 그 계집애가 불쌍하다 이거지? 그럼 난? 난 안 불쌍해?"
『어...?』
여자가 걸치고 있던 하얀 가운을 스르르 벗어 던졌다.
"아..."
그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요염한 얼굴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살결 따위가 아니었다.
『나랑, 똑같아...?!』
괴도 가젯이라 불리던 나와 완전히 똑같은, 금속 외골격이었다.
"자기 의지로 이런 몸이 되고 싶어 하는 미친년이 있을 리 없잖아?"
".........그럼 대체 누가."
"우리 아빠가."
"뭐...? 그럼 그 아버지는?!"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였어. 정말 허무할 정도로 쉽게 죽더라."
"........."
"그때 깨달았지. 내가 강하다는 걸. 그리고 그게 내 삶의 이유가 됐어."
"어떻게 그런..."
"몸의 대부분이 금속이 되어버린 난, 나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어. 그러니 인간으로서의 보람 따위 느낄 리 없지. 내 삶을 지탱하는 건 기계로서 강함을 추구하는 것뿐이야!"
크레인이 여자의 양어깨를 붙잡아 공중에 매달았다.
어깨 접속부에서 양팔이, 허리 접속부에서 하반신이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다.
"!? 무슨 짓을..."
공중에 붕 뜬 흉상. 그 목덜미의 단자에 소형 장치가 연결되었다.
『저, 저 단자는 분명 뇌에...』
"드디어 손에 넣었어. 한때 전 세계를 지배했던 고대의 힘을!"
갑자기 굉음과 함께 연구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연구소를 뒤로하고 돌아보았다.
간발의 차로 탈출한 건물은 지하에서 솟구쳐 나오는 무수한 파이프들에 짓눌려 으스러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은빛 금속 광택을 내며 뱀처럼 꿈틀거리는 그것들은 끝도 없이 흘러나와 산과 숲의 지형을 집어삼켰다.
"어때? 이게 바로 고대에 세계를 다스렸던 패왕, '은수(銀樹)'의 모습이야."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파이프 더미의 중앙에 그 여자가 있었다.
(히익...!)
수천, 수만 개의 은빛 뿌리가 한데 모여 굵은 줄기처럼 솟아오른 곳.
그 꼭대기에서 여자의 몸은 나무와 동화되어 있었다.
"이런 괴물이 석판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거야...?!"
"그래. 그리고 이 기계와 하나가 된 난 고대 기술 그 자체...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된 거야!"
우리 주변의 은빛 뿌리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도... 도망쳐요! 빨리!!』
"말 안 해도 알아!!"
사방팔방에서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뿌리, 작살처럼 내꽂히는 뿌리들.
그 틈새를 뚫고 화살처럼 도약했다.
끝
굴욕적이다. 그 여자를 반드시 내 손으로 잡아넣겠다고 다짐했건만,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범인을 잡기 위해 다시 태어난 몸인데, 손도 발도 못 써보고 당하다니….)
수사 본부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경감님, 13번째 석판 해독이 끝났습니다! 지금 당장 기술수사부로 와주십시오!”
애타게 기다리던 카즈히로 기술관의 내선 전화가 걸려 왔다.
“13번째 ‘멸망하는 자’의 석판에 따르면, 사이보그인 패왕이 죽음에 이른 원인은 대규모 자기 폭풍이었다고 합니다.”
“스톱. 결론부터 말해줘.”
“아, 네…. 이 전자기파 폭탄을 터뜨리면, 뿌리를 포함한 용의자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뿌리들이 멈춘 사이에 단숨에 중앙 본체로 접근해서 해치우면 된다는 거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건 고작 10초뿐입니다. 즉, 미리 본체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런 위험한 짓을….”
“그거야 뻔하잖아….”
내가 하겠다고 입을 떼려던 직전이었다.
『잠깐만! 설마… 또 그곳에 가려는 거야?』
몸 안에서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건 이 몸밖에 없어.』
『싫어!! 절대로 싫어! 나 이제 더 이상 무서운 일 겪고 싶지 않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나는… 내 뇌는 빼놓고 가. 몸 같은 건 없어도 되니까, 유리병 속 배양액에 처박혀 있어도 좋으니까, 제발 나를 그 여자한테 데려가지 마!』
그 녀석의 공포가 아플 정도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말해야만 했다.
『…부탁이야. 이 작전에는 네 힘이 필요해.』
『어째서… 왜, 도대체 왜!?』
『잔인한 요구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 여자를 잡을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지금 일어서지 않으면, 넌 평생 그 여자의 존재에 벌벌 떨며 살게 될 거야.』
『싫어, 싫단 말이야!!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이미 충분히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왜 여기서 더 괴로워져야 하는 건데!?』
그저 인생을 저주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그 녀석이, 예전의 내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어리광 부리지 마!!』
『어…?』
『그래, 네 잘못 아니야. 하지만 말이지, 인생은 그런 사정 따위 봐주지 않아. 아무리 신한테 내 불행을 하소연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나도 모르게 가장 잔혹한 사실을 내뱉고 말았다.
『………』
『미안해… 경찰관이 할 소리는 아니었네….』
『아니요, 딱히…』
내 안에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장소를 옮기자.』
『에?』
창문을 열고 알루미늄 섀시에 한쪽 발을 걸쳤다.
“카즈히로 기술관, 잠깐 나갔다 올게.”
“예? 경감님, 저기, 갑자기 어디를….”
멍하니 넋이 나간 그를 뒤로하고, 창문을 통해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경감님이 내려앉은 곳은 교외에 있는 어느 한적한 휴경지였다.
『여기라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네.』
그렇게 말하며 경감님은 풀밭 위에 주저앉더니,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시야 가득 들어오는 건,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계속 밤하늘밖에 못 봤지?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어.』
그랬다. 저녁에 눈을 뜨고, 밤에 훔치고, 새벽에 다시 잠드는… 그 굴레 속에서 나는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고, 고마워.』
같은 하늘 아래 그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고 맑았다.
『저기, 경감님… 당신은 ‘인간’이야?』
『인간이지. 법적으로는 말이야. 여기 들어있는 뇌가 아즈마 하츠미 경감이고, 이 몸은 지급된 장비품. 수갑이나 권총이랑 똑같은 취급이야. 그래서 이 몸인 이상, 난 평생 24시간 연중무휴 근무 중인 셈이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은 경감님을 제대로 인간으로 대해주냐는 거야.』
『당연하지. 가끔 외부인들이 로봇으로 착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형사과 동료들도, 카즈히로 기술관도 다 좋은 사람들이야.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거든.』
『그렇구나…….』
인간이 아니라 도구로 취급받았던 나와는 참 많이 다르다. 솔직히, 조금 부러웠다.
『하지만 말이야, 나를 제일 걱정해 준 건 너였어.』
『에?』
『이 몸이 되고 나서 처음 맞붙었을 때, 말해줬잖아. “왜 나 같은 것 때문에”라면서,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그, 그건 경황이 없어서…』
『고마워. 네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을 때, 정말 기뻤어.』
『말도 안 돼! 경감님은 나 때문에 사이보그가 된 건데… 내가 고맙다는 소리를 듣다니.』
방금까지 처지를 비관하며 질투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괜찮아. 난 이 몸이 된 걸 후회하지 않아.』
『후회 안 한다고? …왜?』
『마지막 사건 때, 넌 쓸모없어졌다며 죽을 뻔했잖아. 그때 너를 구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사이보그가 되어서 생체 뇌 유지 장치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아…』
『경감님, 결심했어. 그 여자를 잡는 거, 도울게.』
『아, 방금 건 딱히 생색내려고 한 소리는 아닌데….』
『알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니까.』
『은혜나 의리 때문이… 아니라는 거야?』
『응.』
나도 경감님처럼, 한탄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눈앞의 시련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고마워. 사건 해결되면 꼭 보답할게….』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나저나, 네 이름은 기억났어?』
『으응, 아직… 기억이 안 나.』
그 여자가 지워버린 건지, 아니면 고문의 결과인지, 개조되기 전의 기억은 지독하게 흐릿했다.
『그래… 이대로면 부르기 불편하니까, 일단 내가 마음대로 정해도 될까?』
『응.』
『그럼, “사치”라고 불러도 될까? 내 죽은 여동생 이름인데… 재수 없으려나.』
『아니. 전혀 안 그래.』
경감님의 마음이 왜 그렇게 강한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과거에 나와 비슷한 고통을 맛보았고, 그것을 이겨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랑 싸우기 위해서 이제 또 개조를 받아야 하는데, 사치는 혹시 원하는 기능 있어?』
『원하는 기능…… 아, 있긴 있는데…』
『부담 갖지 말고 말해봐.』
『우… 그게… 이 몸은, 자위 같은 거… 안 되나요?』
순간, 경감님의 뇌가 프리즈 되는 게 느껴졌다.
『어… 음, 잘은 모르겠는데, 역시 우리 또래 여자애들은… 보통, 하는 거야?』
『아… 그게, 아마도…』
『그렇구나… 난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아, 근데 내가 소수파인 걸지도 모르고…』
우물쭈물 말을 주고받는다.
나라고 딱히 자주 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 조교당한 후유증으로 몸이 달아오른다는 사실은, 창피해서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끝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치가 원하던 기능은 이미 내 몸에 갖춰져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사건이 다 해결되고 나면 카즈히로 기술관을 문초해서 엄히 다스리겠노라 다짐해 두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화장실 칸 안에 틀어박혀 변기 위에 앉아 있다.
시각은 심야. 방해받을 걱정은 없다.
하복부의 해치를 열었다.
“우와…….”
『아…….』
그곳에는 정말이지 정교하게 재현된 ‘그것’이 있었다.
“…….”
『……』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역시 주저하게 된다.
이 몸은 각종 레이더나 감각기에서 오는 정보가 우리 두 뇌에 똑같이 입력되는 구조다.
즉, 사치를 만족시킨다는 건 나 또한 동시에 쾌락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나의 부끄러운 자세나 손가락 놀림을 사치에게 적나라하게 생중계한다는 덤까지 붙어서.
『……』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시작하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치의 기척이 절절하게 전해져 온다.
『어쩔 수 없네……. 사치, 이 몸 잠시 빌려줄 테니까 네 마음대로 해 볼래?』
『엣?』
『어느 쪽 뇌가 몸을 움직일지 전환할 수 있거든. 당분간 네가 움직일 수 있게 해 줄게.』
『저…… 정말 그래도 돼?』
자위하는 모습을 사치에게 보여주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아마도.
철컥, 체내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신경 회로가 전환되는 소리다.
방금 이 몸을 움직일 권한이 사치에게 넘어갔다.
『잠깐, 사치! 기다려!』
정신을 차려보니 손가락이 굶주린 듯 가장 민감한 곳을 향해……
『아아아악!!』
“으응!”
망설임 없이 살덩이의 싹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다른 한 손이 갈라진 틈을 벌렸다.
『으앗! ……안 돼…… 좀 더, 천천히…… 앗!』
“미안…… 못 참겠어…… 윽!”
입술 안쪽이 격렬하게 휘저어진다.
『안 돼, 그건, ……앙! ……너무 빨라……』
“그치만…… 그치만……!”
자극으로부터 음핵을 보호하던 것이 벗겨졌다.
무방비해진 신경 덩어리를 갈구하듯 손가락이 뻗어오고……
『“으아아아악!!”』
의식이 날아갈 뻔했다.
나와 동시에 쾌락을 맛보는 사치.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치에게 쾌락을 강요당하는 나.
나는 사치에게 범해지고 있었다.
“으아아, 더, 더, 더어……!”
『아, 안 돼……! 자, 잠깐, 멈춰 줘……!』
『엣…… 잠깐, 그건……』
접힌 것은 엄지와 새끼손가락. 그리고 나란히 뻗은 검지, 중지, 약지.
손가락 세 개가 내 입구를 조준하고 있다.
『안 돼…… 안 돼! 그건 너무 많아…… 히익!』
“안 돼, 부족해…… 아직…… 더!”
『아!!?』
하복부에 거대한 말뚝이 박혔다.
“크윽…… 아, 직…… 더.”
사치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안으로, 더 깊은 곳으로 침입하는 손가락.
『히아…… 아……』
찢어지는 듯한 감각에 내 몸은 마비되고, 뇌는 언어를 잃었다.
“……아니야…… 더, 더!”
사치가 손목을 비틀었다.
세로로 나란히 삽입된 손가락들이 뒤틀리며 질을 말도 안 되는 형태로 밀어 넓히고……
『……!!!』
“으으아아아아아!!”
내 의식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 후로는 사치의 신음과 뱃속을 휘젓는 손가락의 질량만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
『…………』
일이 끝난 뒤, 우리는 그저 멍하니 화장실 칸 안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의 파렴치한 목소리를 들켜버린 수치심과 사치의 음란한 일면을 알아버린 어색함 때문에 도저히 말을 걸기가 힘들다.
하지만 분명 피차일반일 것이다. 둘 다 똑같은 양의 쾌감을 받았을 텐데 나만 먼저 가버리다니…… 분명 느끼기 쉬운 몸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저, 저기…….』
『어…… 음, 사치?』
『죄, 죄송해요! 저…… 좀 더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멈춰지지가 않아서…….』
『별로, 그게…… 내가 너무 민감했던 걸지도 모르고.』
『아니에요! 그…… 이상한 건 저니까요!』
『이상하다니……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진…….』
『아니에요, 이상해요, 저…… 경부님 사정도 생각 안 하고.』
『괜찮아,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하지만 전 경부님을 괴롭힌 거나 다름없고…….』
(확실히 이건 좀 고문 같긴 했지만.)
『괜찮다니까. 사치 부탁이라면 다음에 또…… 같이 해 줄 테니까.』
빈말도 배려도 아닌,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엣……?』
『한 번쯤은 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정말로 이상한 건 나인 것 같다…….
끝
다시 찾은 산은 은색 나무의 침식으로 한층 더 처참해져 있었다.
은빛 뿌리들이 나무들을 닥치는 대로 밀어 쓰러뜨린 탓에, 그 여자가 있는 산 정상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준비됐어, 사치?”
『응, 괜찮아.』
전투에 특화된 새로운 몸의 상태를 확인하듯 팔다리를 휘저어 본다.
“근데 이 꼬락서니가 좀…… 이건 뭐 완전 강아지잖아.”
머리통에서 축 처진 두 개의 추가 레이더에, 엉덩이에서 툭 튀어나온 방전용 안테나까지.
솔직히 말해서 쪽팔려 죽겠다.
『그래? 거인으로 변했을 때보다는 훨씬 귀엽고 좋은 것 같은데.』
“……미안, 확실히 배부른 소리 할 때가 아니지.”
나는 다시 산 정상을 노려보았다.
“좋아, 간다!”
등 뒤의 부스터에 불을 뿜으며, 그 추진력에 몸을 맡긴 채 비탈길을 날듯이 치고 올라갔다.
우리의 기척을 눈치챈 은빛 뿌리의 끝단이 코브라처럼 대가리를 쳐들었다.
뿌리의 움직임을 비유하자면, ‘생물처럼’이 아니라 ‘군대처럼’이 맞다.
견제, 차단, 몰아넣기. 모든 움직임이 그 여자의 의지 아래 일사불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이걸 뚫고 나가기 위해 우리가 택한 방법은,
“사치, 부탁해!”
『맡겨줘!』
이 몸을 움직이는 신경 회로를 우리 둘의 뇌 모두에 동기화시키는 것뿐이다.
뻗어 나오는 뿌리를 뛰어넘고, 내리찍는 뿌리를 쳐내고, 옆으로 휘두르는 뿌리 밑을 파고들며 정상을 향해 도약한다.
할 수 있다. 전에는 도망치기 급급했지만, 지금은 뿌리들을 받아치면서 전진하고 있으니까.
사치가 레이더로 뿌리의 움직임을 포착해 의도를 읽고, 최적의 루트를 잡아낸다.
그러면 내가 덮쳐오는 뿌리를 간발의 차로 피하며 자세를 유지한다.
수천 개의 뿌리를 수족처럼 부리기 위해 그 여자가 뇌를 강제로 가속시키는 게 CPU 오버클럭이라면, 우리는 두 개의 처리를 병렬로 수행하는 듀얼 CPU 머신이다.
성능은 현재까진 호각.
하지만 방사형으로 뻗은 뿌리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밀도는 급격히 높아졌다.
『경부님, 슬슬 한계야!』
“알았어, 과전류 방전용 안테나 기동해!”
자기 몸을 전자기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꼬리가 빳빳하게 섰다.
“이거나 처먹어라!”
백팩에서 전자기 폭탄이 공중으로 사출됐다. 그리고 일대에 고막을 찢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끄, 끄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산 정상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든 뿌리가 힘을 잃고 처참하게 시들어갔다.
타임 리미트는 10초.
“제시간에 갈 수 있을까…….”
『가야만 해!』
산 정상의 은색 나무 본체가 눈에 들어올 거리까지 육박했다.
“……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여자가 악마 같은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기기 쇼트로 인한 극심한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그 살의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오른손에 장착된 대형 레이저 메스를 가동했다.
박물관 바닥을 도려낼 때 썼던 레이저 메스를 복제한 물건이다.
남은 시간 5초. 됐다, 싶은 순간 그 여자가 믿기지 않는 행동을 했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전자기파에 가장 취약했던 시스템이자 고통의 근원인 뇌내 처리 가속 장치.
목덜미 단자에 꽂혀 있던 그걸 여자가 직접 뽑아버린 것이다.
“『뭐!?』”
여자의 주변에 있던 뿌리들이 다시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너 따위를 숨통 끊는 데 뿌리를 전부 다 쓸 필요도 없지! 이 열 개면 충분해……!”
기회는 단 한 번. 일격에 여자의 동력로를 꿰뚫으면 승리, 실패하면 죽음이다.
이건 나나 경부님뿐만 아니라, 저 여자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터였다.
『경부님, 부탁이야! 나한테 맡겨줘!』
“사치……?”
『난 알 수 있어, 동력로 위치가 어딘지!』
줄기와 동화되어 있어도 여자의 본체는 예전의 내 모습과 판박이다.
내부 구조까지 같다면, 나는 분명히 동력로의 위치를 알고 있다.
“……알았어. 사치, 너를 믿을게.”
그 말을 끝으로 경부님은 몸의 주도권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자, 어서 와라…… 이 뿌리로 옭아매서, 꽉 조여버리고, 사지를 비틀어 끊어서…… 내 장난감으로 만들어주마.”
이제 여자의 협박 따위에 쫄지 않는다. 실패 따위 두렵지 않다.
위치를 알고 있으니, 석판 바닥을 도려낼 때보다 훨씬 쉽다.
뿌리가 힘을 되찾는 것과 내가 여자의 몸을 사정권에 넣는 것은 동시였다.
몸을 휘감는 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하아아아아아아!”
그저 일직선으로 가슴의 한 점을 꿰뚫었다.
“어……째서……”
겨우 들릴 듯 말 듯 한 가냘픈 목소리는 동력을 잃은 여자의 것이었다.
힘이 빠진 뿌리들이 내 몸에서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어떻게…… 위치를…… 안 거지……?”
“그거야 당신이 가르쳐줬잖아.”
가슴을 꿰뚫은 순간, 서로 닿을 듯이 얼굴을 맞댄 자세 그대로 내가 말했다.
“당신 몸속이 어떻게 생겨 처먹었는지, 수십 번, 수백 번도 넘게 보여줬잖아. 그 붉은 물속에서…….”
“너, 너는……!?”
“그래, 내 몸을 써서 직접 실습까지 시켜주면서 말이야!!”
끝
사건의 재판은 피고인이 몸뚱이도 없이 출두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되었다.
그 여자의 의체가 제때 준비되지 않은 탓에, 유리병 속에 든 뇌에 스피커와 마이크만 연결된 꼴로 심리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피고인의 몰골은 재판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애초에 그 여자는 완전히 기억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뇌 가속 장치를 강제로 절단한 여파인지, 아니면 동력로가 꿰뚫린 충격 때문인지 원인은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로 말하자면, 카즈히로 씨가 새로 만들어 준 의체로 뇌를 옮겨 타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가족과의 기억도, 친구들과의 추억도 전부 잃어버린 나.
법적으로는 무죄라 해도, '괴도 가젯'으로서 수많은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딱딱하고 차가운 이 몸이, 나의 현재와 과거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 무엇 하나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몇 년 후…
"저기, 경부님은요!?"
형사과 취조실로 뛰어들자마자 근처에 있던 동료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어라, 사치 씨. 경부님이랑 같이 나간 거 아니었어?"
"난 들은 적 없다고요! 어디 갔는지 몰라요?"
"그 무기 밀수 현장 정찰하러 간다던데."
"뭐라고요! …잠입하는 건 내 담당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동료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나는 창문을 통해 경찰서를 박차고 나갔다.
"경부님이 가면 정찰은커녕 대놓고 검문이나 하려 들 게 뻔하잖아… 정말이지, 맨날 혼자서만 앞서 나간다니까…."
거래 현장으로 지목된 부두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경부님이 창고 지붕 위에서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컨테이너 뒤에 숨어 살피니, 창고 주변에는 경부님에게 총구를 겨눈 밀수범들이 수십 명이나 깔려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미 일촉즉발의 상황. 예상했던 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어깨가 축 처졌다.
(일단 놈들의 시선부터 돌려야 해.)
예전에 익힌 솜씨는 어디 안 간다. 재빨리 발연탄을 장전하고, 직감적으로 탄도와 작렬 지점을 계산했다.
팔에서 튀어나온 포신을 밀수범들의 풍상(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향하고 트리거를 당겼다.
콰앙! 폭음과 함께 창고 일대가 순식간에 연기에 휩싸였다.
당황한 밀수범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나는 잽싸게 창고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경부님!"
"사치,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건 내가 할 소리거든요! …그 얘긴 나중에 하고요."
"응, 마침 잘됐어. 사치, 힘 좀 빌려줘!"
내 뇌와 몸을 잇는 신경 회로를 외부 접속 모드로 전환한다.
『경찰용 의체 2호기, 아즈마 사치. 지금부터 1호기와 접속합니다.』
경부님과 배면 해치를 맞추고, 내 뇌를 이 가슴 안에서 경부님의 가슴 안으로 전송한다.
『마찬가지로 1호기, 아즈마 하츠미. 아즈마 사치의 신경 회로 접속 확인.』
빈 껍데기가 된 내 몸이 여러 파츠로 분해되며 경부님의 몸을 무장시켜 나간다.
『『합체 완료 확인. 1호기, 2호기, 병행 제어 모드로 이행합니다!』』
창고 아래에는 겨우 연막에서 벗어난 밀수범 수십 명이 깔려 있었다.
'천 개의 은근(千本の銀根)'에 비하면 아주 껌이나 다름없는 상대들이다.
『전의를 되찾은 놈들부터 차례대로 뭉개버릴 거야. 사치, 내비게이트 부탁해.』
『알고 있어요. 맡겨만 줘요!』
『간다! 한 놈도 남김없이 싹 다 잡아 처넣어 줄 테니까!』
30분 후. 밀수범 전원을 제압하고 구속까지 끝낸 지 벌써 27분이 지나서야 겨우 경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범인들을 호송하는 차들이 줄지어 경찰서를 향해 부두를 떠나갔다.
『그나저나 경부님. 이런 위험한 일을 할 때는 나한테 꼭 상의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건, 저기…… 나도 모르게 그만.』
『정말이지… 내가 도와주러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툭하면 혼자서 돌진해 버리는 경부님의 버릇은 몇 년이 지나도 고쳐질 기미가 안 보인다.
역시 내가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줘야 한다니까.
『그런데 사치? 이제 합체 해제해도 될 것 같은데….』
『안 돼요. 경부님이 약속 어겼으니까 오늘 밤까지는 분리 안 해줄 거예요.』
『오늘 밤이라니… 설마.』
『맞아요. 벌로 나랑 같이 기분 좋아져야 할 테니까요.』
『으…… 또 이 몸으로 야한 짓 하려고?』
『네. 왜요, 경부님은 기분 좋은 거 싫어하세요?』
신이 나서 조금 짓궂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사치가 하는 건 너무 격렬하달까….』
큰일이다… 쭈뼛거리며 수줍어하는 경부님의 목소리가 너무 귀엽잖아….
그 여자의 가학증이 나한테 옮기라도 한 걸까.
『경부님, 몸 좀 빌릴게요.』
실랑이를 벌이는 틈을 타 경부님으로부터 신체 제어권을 뺏어왔다.
『잠깐, 사치! 뭐 하는 거야!?』
『사람 안 올 만한 곳으로 가려고요…… 밤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서.』
『에엣!? 설마, 거짓말이지!?』
『안타깝게도 진심입니다.』
패닉에 빠진 경부님을 내 안에 가둬버린 채, 나는 창고 뒤편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나갔다.
END
제2부
“자, 일어나……. 어때, 정신이 좀 들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조종이라도 당하듯,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멍한 정신으로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순간,
“아……!”
그곳엔 둔탁한 금속 광택을 내뿜는 칠흑빛 바디가 있었다.
“아…… 아…….”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남과 동시에 비명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
“괜찮아.”
느닷없이 뒤에서 누군가 나를 꽉 껴안았다.
“겨, 경부님…….”
“좋은 아침이야, 사치.”
고개를 돌리자 경부님이 생긋 미소 짓고 있었다.
이날, ‘아즈마 사치’로 개명한 나는 경찰관으로 채용되어 아즈마 하츠미 경부님 밑으로 배속되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일상생활용 의체에서 경찰용 의체로 개조를 받아야 한다는 것.
물론 내가 원했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를 빼앗겼을 때의 트라우마까지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던 모양이다.
“카즈히로 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개조를 담당해 준 기술수사부의 천재 기술관, 카즈히로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기, 기분은 좀 어떠세요? 이제 괜찮나요?”
카즈히로 씨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제 괜찮아요. 애초에 가젯이랑 똑같은 몸으로 해달라고 부탁한 건 저니까요.”
대 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음을 떼 보았다.
(아, 그리운 감각이야…….)
몸이 가볍다. 여러 개의 센서로부터 주변 정보가 뇌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 정도라면 예전처럼 지붕 사이를 뛰어넘거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잠입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있다.
“그건 그렇고 카즈히로 씨, ‘그’ 파츠는 달아주셨나요?”
“……윽! 그, 그건…… 네,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즈히로 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침 잘 됐네, 카즈히로 기술관.”
경부님이 내 곁을 떠나 카즈히로 씨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섰다.
“네, 넵!”
“방금 말한 ‘그’ 파츠 말인데. 그걸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장착한 건에 대해서, 아직 설명 안 들었거든?”
“아니, 그게, 저기…….”
“그동안 바빠서 대충 넘어갔지만, 오늘은 확실히 설명을 들어야겠어.”
카즈히로 씨가 벽 쪽으로 야금야금 몰린다.
연상의 남자를 뒷걸음질 치게 만들다니, 역시 경부님의 박력은 차원이 다르다. 아니, 그냥 카즈히로 씨가 심하게 소심한 걸지도.
“그래서, 뭐야? 이유랑 목적이.”
(경부님, 다 알면서 물어보시긴…….)
수사에 몰두하면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성격으로 유명하지만, 일단 추궁 대상으로 삼으면 경부님의 통찰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설령 그게 남녀 간의 치정 문제라 할지라도.
사실 누가 봐도 뻔하다. 그런 짓을 할 이유는 딱 하나뿐이니까.
그때,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도 듣지 않고 뛰어 들어온 사람은, 예전에 경부님과 콤비를 이뤄 나를 쫓던 형사님이었다.
“경부님, 큰일입니다! 그, 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고대 석판 연쇄 도난 사건’의 범인이 납치됐습니다!”
“!?”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방 안을 지배했다.
그 여자가…… 나한테서 인간의 몸을 앗아간 그 여자가 납치됐다고?
“그게 정말이야!? 탈옥이 아니라 납치라고?”
“네. 외부에서 침입한 것으로 보이는 괴한들이 수감자를 결박해서 끌고 가는 게 목격되었습니다.”
나와 경부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쨌든 바로 현장으로 간다. 사치, 따라와!”
그 말을 남기고 경부님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쫓아 창틀에 발을 올렸을 때, 카즈히로 씨가 나지막이 읊조린 말을 내 청각 센서는 놓치지 않았다.
“누나…….”
분명히, 카즈히로 씨는 그렇게 말했다.
끝
그날, 낮부터 배가 좀 이상하다 싶었다. 밤이 돼도 가라앉기는커녕 식욕까지 뚝 떨어졌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나잇대 여자애들이 '그날' 즈음해서 몸 상태가 들쑥날쑥한 건 워낙 흔한 일이니까.
"유카리, 제발. 다음 주 지구 예선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나가주면 안 돼?"
수화기 너머로 수영부 친구가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야, 너 수영 진짜 빠르잖아. 평소에도 물속이 제일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면서."
"그,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건 그냥 물에 잠겨 있거나 둥둥 떠서 느긋하게 헤엄치는 거지… 게다가 난 대회 같은 압박감은 질색이란 말이야…."
"부탁이야, 어떻게 안 될까? 응? 사람 하나 살린다 치고 제발…!"
안 봐도 뻔하다. 친구 녀석, 침대 위에서 핸드폰 한 손에 쥐고 석고대죄라도 하고 있겠지.
"…알았어, 알았다고. 딱 지구 예선까지만이야."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마지못해 승낙했다.
"나이스! 고마워! 이 은혜는 평생 안 잊을게!"
오버스럽게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한숨이 한 번 더 나왔다. 또 홀랑 넘어가 버린 것 같다. 가끔은 내 이놈의 거절 못 하는 성격이 정말 싫다.
"그럼 내일 방과 후부터 바로 연습 합류하는 거다? 알았지!"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쐐기를 박으려는 건지, 할 말만 후다닥 내뱉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쨌든, 이미 맡아버린 걸 어쩌겠나.
옷장 깊숙한 곳에서 실내 수영복을 끄집어냈다.
"작년에 입던 거, 맞으려나…."
나도 일단은 성장기니까.
그런데 막상 옷을 벗고 갈아입어 보니, 내 몸은 작은 폴리에스테르 천 조각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
뭔가 이상하다. 작년이랑 비교해서 하나도 안 자란 내 몸뚱이 얘기가 아니다.
낮부터 살살 아프던 복통이 갑자기 미친 듯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느껴졌다.
"아……윽!"
참지 못하고 옷장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오른쪽 아랫배에서부터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수영복 차림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 근처 대학병원으로 실려 가는 신세가 됐다.
진단명은 급성 충수염. 흔히 말하는 맹장염이었다.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맹장염은 워낙 흔한 병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렴."
응급실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며 진통제를 놓아주었다.
"맹장염이면… 역시 수술해야 하나요?"
"상태에 따라 약으로 다스릴 수도 있는데, 학생 같은 경우는 수술 안 하면 안 되겠네."
"그렇구나…."
"수술은 오늘 밤 바로 하기로 했으니까 마음의 준비 하고 있어."
"네? 오늘 밤에요?!"
마음의 준비고 뭐고, 도저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가 누운 침대는 수술실과 일반 병동 사이의 대기실로 옮겨졌다.
이 너머부터는 청결 구역이고, 복도 끝에 수술실이 여러 개 늘어서 있는 모양이다.
시간은 이미 깊은 밤. 이 방에서 나 말고 수술을 기다리는 사람은 나랑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 한 명뿐이었다.
(저 애도 응급 환자인가?)
슬쩍 옆 침대를 훔쳐보니, 그 애는 평온한 얼굴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붕대를 감은 것도 아니고 링거를 꽂은 것도 아니다. 안색도 나빠 보이지 않아서, 문외한인 내 눈에는 환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수술실 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사형수 기분이 이럴까.
(내 차례인가? 아니면 옆에 있는 저 애가 먼저인가?)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움직이기 시작한 건 내 침대였다.
긴장감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진정해… 괜찮아….)
눈을 꽉 감은 채, 나는 기도하듯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를 태운 침대 바퀴 소리만이 너무나도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끝
철컥,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수술실에 도착한 모양이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살며시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
뭔가 이상하다.
만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침대랑 수술등이 있는 걸 보면 여기가 수술실인 건 맞는 것 같은데, 방 안에는 젊은 여자 한 명이랑 나, 단둘뿐이었다.
수술이라는 건 원래 스태프들이 여럿이서 달라붙어 하는 거 아니었나….
“…네, 실험체는 이미 반입되었습니다.”
의사로 보이는 여자가 내선 전화로 뭔가를 말하고 있다.
“…연령대나 겉모습에 모순은 없습니다. 본인이 확실한 것 같군요.”
그 여의사는 옆모습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수화기에 대고 담담하게 대답할 뿐.
그래, 마치 기계처럼.
“…네, 잠들어 있습니다. 수면제가 아직 듣고 있는 모양이네요.”
수면제로 잠들었다니… 설마 내 얘긴가?
난 그냥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지 잠든 게 아니다. 수면제 같은 건 먹은 적도 없고.
혹시 뭔가 착오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럼, 지금부터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여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테이블에서 주사기를 집어 들고는, 그걸 손에 쥔 채 천천히 내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저, 저기, 잠깐만요!”
본능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깨어 있었나?”
여의사는 조금 의아한 듯 중얼거렸을 뿐,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저기, 혹시 저를 다른 환자분이랑 착각하신 게…… 꺄악!”
갑자기 여의사가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 나를 덮치더니, 내 어깨를 짓눌렀다.
“아, 아파요! 놓으세요! 대체 뭘…!?”
여의사는 한 손으로 나를 찍어 누른 채, 내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주사기를 내 목덜미에 콱 찔러 넣었다.
“아윽!?”
날카로운 통증이 달린다. 그와 동시에 전신의 감각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윽… 잠… 깐… 만….”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대체… 뭐가 어떻게….)
거기서 내 의식은 끊어졌다.
(아파, 너무 아파…!)
나를 다시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건 격통이었다.
그건 조금 전까지의 복통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온몸을 안쪽에서부터 갈가리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었다.
통증 때문에 몽롱해진 정신 속에서, 낯선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게 보였다.
“그 말은 즉, 이 실패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인가?”
“네.”
대답하는 무감각한 목소리. 아까 그 여의사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이리 된 이상, 이런 ‘물건’은 조속히 병원 밖으로 폐기하는 게 상책이겠군.”
“…….”
“현 북부에 산업폐기물 처리장이 있었지… 거기가 좋겠어. 악취와 쓰레기더미 속이라면 발견될 일도 없을 테니까. …나무를 숨기려면 숲속에, 고철을 버리려면 고물상에, 라는 격이지.”
그때까지도 나는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고철’에 비유된 물건이 바로 나라는 것만은 남자의 시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카트가 준비되고, 내 몸은 침대에서 카트 위로 난폭하게 내동댕이쳐졌다.
(꺄아아악!!)
콰당, 소리와 함께 전신을 덮치는 격통.
그 바람에 간신히 붙들고 있던 내 의식은 다시 한번 날아가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끝없이 펼쳐진 쓰레기 벌판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다. 굵은 빗줄기가 주변의 쓰레기들을 두들겨 대고 있었다.
(몸이… 안 움직여.)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 전신의 통증만은 간헐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이 폐기물 처리장을 가득 채운 ‘쏴아아’ 하는 빗소리는 마치 고장 난 텔레비전의 노이즈처럼 들렸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갑자기 배가 아파서 수술을 받게 된 줄 알았는데…
왜인지 온몸이 아프고, 움직이지도 않고… 이런 곳에 버려지고….
(꿈… 이겠지… 이런 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으니까.
빗소리가 멀어져 간다.
비가 그치려는 걸까, 아니면 내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까.
시야가 어두워서 이제는 구분조차 가지 않는다.
잠들 듯 내 의식이 꺼져 가기 직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끝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교도소에서 납치된 ‘그 여자’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 지 벌써 한 달.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지름길로 가려고 산업 폐기물 처리장을 가로지르던 중, 나는 쓰레기더미 속에 처박힌 나 자신을 본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이 정도로 잡동사니가 쌓여 있으면, 우연히 어느 한 구석쯤은 멀리서 보기에 전신 의체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비 때문에 시야까지 뿌옇게 흐려진 상태라면 더더욱.
하지만 나는 결국 못 본 척 지나치지 못하고 쓰레기더미를 돌아보았다.
쓰레기 숲을 훑던 내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
진흙과 폐유 범벅이 된 채, 폐기물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던 자그마한 소녀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저기! 이봐요, 당신 사람이지?!”
나는 아이에게 달려가 무거운 금속 몸체를 부축해 일으켰다.
“살아 있어?! 살아 있으면 대답 좀 해봐!”
아무리 불러도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어렴풋이 뜨인 의안은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일단 빨리 이 아이를 카즈히로 씨한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아이의 몸을 단단히 품에 안고, 나는 등 뒤의 부스터 출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사람을 사이보그로 개조하는 기술을 가진 자는 기술수사부의 카즈히로 씨를 제외하면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교도소에서 납치되어 우리가 쫓고 있는 ‘그 여자’.
형사로서 내 첫 공은, 너무나도 슬픈 단서의 발견이었다.
수사 회의가 끝난 뒤, 나와 경부님은 곧장 기술수사부로 향했다.
카즈히로 씨에게 그 아이의 응급처치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사치 씨가 발견한 소녀 말입니다만….”
설명하는 카즈히로 씨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사이보그로 개조한 인물은 역시… 교도소에서 납치된 ‘그 여자’인 것 같습니다.”
한 달 전, 카즈히로 씨가 그 여자를 향해 “누나”라고 중얼거리는 걸 나는 듣고 말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소녀를 저 꼴로 만들어 쓰레기처럼 내다 버린 건 카즈히로 씨의 친누나라는 소리가 된다. 물론, 내게서 인간의 몸을 앗아간 것도.
“카즈히로 기술관, 결론부터 말해줘요. 그 아이, 살아있나요? 살릴 수 있어?”
팔짱을 낀 경부님이 대답을 재촉했다.
“아, 죄송합니다….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 하지만 몸에 어떤 이상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그래서 버려졌다는 건가요. 써먹을 데가 없으니까… 마치 도구처럼.”
아이가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자마자, 가슴 밑바닥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강의 협의가 끝나고 수사로 복귀하려 자리를 일어설 때였다.
“아, 맞다. 카즈히로 기술관. 한 가지 말해둘 게 있어요.”
경부님이 아무렇지 않게 입을 뗐다.
“분명 그 여자는 기억상실 상태였죠. 그런데도 소녀를 기계로 개조해버렸어. 즉, 여자의 기억이 돌아왔다고 봐야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경부님은 카즈히로 씨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그게 무슨….”
“조만간 확실히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 여자의 이름이라든가, 가족 관계 같은 것들이 말이죠.”
카즈히로 씨가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몇 초간의 침묵.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즈히로 기술관.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갑자기 경부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네…?”
“난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앞으로 뭐가 밝혀지든, 난 변함없이 당신 편이 되어줄 거라는 소리예요.”
그 말만 남기고 경부님은 내 손을 이끌어 기술수사부를 빠져나왔다.
“사치, 너한테는 미리 말해둬야 할 것 같은데.”
“알고 있어요. 그 여자, 카즈히로 씨 누나죠? 본인이 혼잣말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래…? 그 친구도 참 덜렁대네. 자기가 만든 청각 센서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도 까먹고 말이야.”
경부님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어때? 이제 그와 예전처럼 가깝게 지내긴 힘들겠니?”
“아뇨, 전혀요. 그 가족이 누구든 카즈히로 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변함없으니까요.”
“다행이다…. 사치, 고마워.”
경부님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끝
“어, 어라…?”
여긴 대체 어디지.
병실이랑 비슷한 수수한 방인데, 바닥에는 스패너나 드라이버 같은 공구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 쪽 침대. 나는 그 위에 눕혀져 있었다.
“어… 몸이… 움직여.”
상체를 일으켜 방 안을 빙 둘러보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대체 왜 몸이 안 움직였던 거지…?)
그 답을 찾으려는 듯 내 몸으로 시선을 내린 순간,
“……어? 뭐야, 이거……?”
내 몸이 온통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가슴도, 손도, 발도, 손가락 끝까지 전부 푸른 금속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어… 어어…!?”
그 푸른 손가락으로 전신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건 무기질적인 금속의 감촉뿐이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던 가슴도, 수영으로 다져진 매끈한 다리도. 내 모든 것이 딱딱한 금속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된 거야…”
문득, 그 기사가 떠올랐다.
아무 죄 없는 소녀를 기계 몸으로 개조해 도둑질을 시켰던 여자가 교도소에서 사라졌다는 사건.
그래, 지금 내 이 몸은… 몇 년 전 ‘가제트’라는 이름으로 도둑질을 일삼던 그 소녀의 몸과 판박이였다.
“설마, 그럴 리가… 내가, 가제트가 됐다고…!?”
그때, 옆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문 너머에서 범인인 그 여자가 나타나, ‘넌 이제 내 도구다’라고 선언할 것만 같았다. 그 공포를 견디지 못한 나는 도망치려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찰나,
“!!”
그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갈고리가 몸 안쪽에서부터 살점을 찢어발기는 듯한 감각.
나는 그대로 침대에 고꾸라졌다. 몸이 안 움직이는 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목소리의 주인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그건 나랑 똑같이 생긴, 온몸이 새까만 금속으로 된 소녀였다.
***
버려져 있던 소녀, 미즈사와 유카리 씨가 의식을 되찾으면서 사건은 단숨에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카리 씨는 전신을 덮치는 격통 때문에 제대로 된 증언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원인은 금속 부품과 생체 조직의 사이즈 불일치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카즈히로 씨가 화이트보드 앞에서 설명을 이어갔다.
“제 사이보그 기술은 뇌를 제외한 모든 부위를 기계로 대체하지만, 그 여자의 기술은 보조 동력원으로 인간의 근육을 전신 요소요소에 그대로 이용합니다.
즉, 몸 안쪽에는 주동력원과 기계 장치가 있고, 겉면은 금속 외골격이 덮고 있으며, 그 사이에 근육이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구조죠. 그런데… 이 사이즈들이 맞지 않는 탓에 전신의 근육이 금속 부품에 압박당하고 있고, 그게 통증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겁니다.”
“으… 와아…”
몸속에 박힌 기계 돌기가 안쪽에서 근육을 파고들고, 밖에서는 금속 껍데기가 그 근육을 안쪽으로 옥죄고 있다니.
(그 여자에게 개조당한 나도, 자칫 잘못했으면 저렇게 됐을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카즈히로 기술관, 왜 그런 착오가 생긴 건지 알겠나?”
경부님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질문했다.
“아마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 개조하려던 소녀의 체형에 맞춰 부품을 만들었는데, 수술할 때 실수로 유카리 씨에게 그 부품을 박아버린 거죠….”
“세상에…”
너무나 불합리하다. 사람을 착각했다니. 그런 건 납치당해 억지로 개조당한 나랑 다를 게 하나도 없잖아.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
경부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즈히로 씨 대신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서두르지 않으면, 그 착오 덕분에 화를 면한 소녀가 정말로 개조당하고 말 거야.”
“아… 확실히 그렇겠네요.”
“하지만 범인이나 그 소녀가 어디 있는지는….”
“짐작 가는 곳이 있어. 현 내에 있는 J대 부속 병원이야. 개조 수술을 할 만한 기술과 설비를 갖추고 있고, 최근 한 달 사이에 ‘미즈사와 유카리’라는 이름의 아이가 구급차로 이송된 기록이 있는 곳은 여기뿐이야. …물론 이 현 내로 한정했을 때 이야기지만.”
“자, 잠시만요! 그것만으론 수색 영장을 받을 수 없는데요…!”
“책임은 내가 진다. 소녀 한 명의 육신이 영영 사라진 뒤에는 늦어.”
당황하는 카즈히로 씨를 뒤로하고, 경부님은 혼자서라도 J대 부속 병원에 쳐들어갈 기세였다.
“경부님, 제가 가겠어요.”
“사치…?”
“저라면 경찰이 개입했다는 걸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수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 몸으로… 도둑인 가제트의 몸으로 돌아온 건, 바로 그러기 위해서니까요.”
끝
밤이 깊었는데도 낮 동안의 후끈한 열기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뭐, 기계 몸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땀이나 체취 때문에 불쾌할 일은 없지만 말이다.
“그럼 경부님, 다녀올게요.”
“사치, 조심해야 해.”
배웅하는 경부님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경부님을 따돌린 게 어디 한두 번인가요? 무려 열한 번이나 성공했다고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
살짝 분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 경부님.
“그럼, 무사히 성공하길 빌게.”
그러고는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경부님, 평소랑 좀 다르네.)
수사를 지휘할 때는 그렇게 서슬 퍼런 모습이면서, 나를 보낼 때는 왜 저러지?
(어딘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J대 부속병원을 향해 건물 옥상들을 가로질러 달렸다.
J대 부속병원은 현 내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병원이다. 한적한 전원 풍경 속에 우뚝 솟은 거대한 하얀 빌딩은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병실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환자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다.
담벼락을 가뿐히 뛰어넘어 정원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병동 벽에 바짝 달라붙었다.
(오랜만이네… 이 느낌.)
긴장과 흥분, 그리고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사람을 구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으니까.
지금의 나는 몸놀림뿐만 아니라 마음가짐에서도 빈틈 따윈 없다.
기계 몸인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쩍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광학 미채를 계속 쓰자니 에너지 낭비가 심하다.
그래서 탈의실에서 간호사복을 한 벌 슬쩍 빌리기로 했다.
“…자, 이 정도면 얼핏 봐선 모르겠지?”
라커 옆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치마 끝단과 니삭스 사이, 소매와 장갑 틈새로 검은 금속 피부가 언뜻언뜻 보였지만, 밤이라면 문제없을 거다. 머리의 카츄샤 형태 부품도 너스 캡으로 대충 가려졌고.
변장을 마치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원내 컴퓨터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장갑을 벗었다. 손목에서 플러그가 달린 코드를 뽑아 서버 머신에 꽂았다.
“관리자분한텐 미안하지만….”
체내 메모리에 저장해 둔 특제 바이러스를 서버에 심었다.
카즈히로 씨 말로는 이게 ‘트로이 목마’라는 종류인데, 감염된 PC는 아주 손쉽게 해킹할 수 있게 된단다.
『경부님, 들리세요? 임무 하나, 완료입니다.』
무선으로 성공 보고를 올렸다.
『전 계속해서 간호사로 변장하고 병원 안을 탐색할게요.』
『알았어. 이쪽은 바로 병원 컴퓨터에 침입해서 데이터를 뽑아낼게. 뭐든 알아내는 대로 연락할게.』
『네,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그럼 나중에 봐요.』
『사치, 괜찮겠어? 의심받거나 정체 들킨 건 아니지?』
『걱정 마세요. 좀 발칙한 걸 발견하긴 했지만요.』
임무 둘, 그건 바로 ‘새로운 개조 수술의 싹을 자르는 것’이다.
환자들이 이용하는 병원 시설을 때려 부술 수는 없으니, 납치된 ‘그 여자’를 구출하거나 아직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이보그 후보 소녀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하나 다 뒤져보는 수밖에 없겠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날이 밝기 전에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
나는 컴퓨터실을 나와 어둑한 병동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음은 정신과 병동인가….)
몇 시간째 이어진 탐색이 허탕으로 돌아가면서 슬슬 초조함이 밀려오던 그때였다.
(……!?)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져 발을 멈췄다.
이건 고성능 센서 따위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감각이다. 서글프지만, 도둑질로 다져진 제6감이라는 놈이다.
불 꺼진 병실 안에서 숨을 죽인 채 밖을 살피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다.
(501호에 한 명, 503호에 두 명, 506호에도 두 명 정도인가…….)
비정상적이다.
‘여기다’라는 흥분과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에 뇌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내 모습을 들켜선 안 되니까 작전이 한정적이네… 어떻게든 저놈들을 밖으로 꾀어낼 수만 있다면….)
그때, 505호실 문이 소리도 없이 천천히 열렸다.
끝
정신병동 505호실에서 나타난 건 소녀를 태운 침대, 그리고 그걸 밀고 있는 수상쩍은 남자 하나였다.
그러자 주변 병실에서도 남자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오더니, 소녀의 침대를 에워싸듯 모여들었다.
“가자.”
처음 나타난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나머지 다섯 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밤의 복도에는 낮은 발소리와 침대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침대 위에 눕혀진 소녀는 평온한 얼굴로 쌔근쌔근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자신이 정체 모를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다는 사실 따위, 알 턱이 없었다.
침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섰다. 남자들은 침대를 다른 층으로 옮길 생각인 모양이었다.
남자 중 한 명이 버튼을 눌렀다.
“어?”
“야, 왜 그래?”
“엘리베이터 스위치가 안 먹는데? 눌러도 반응이 없어.”
“뭐? 고장인가?”
우두머리 격인 남자가 혀를 찼다.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저쪽에도 엘리베이터 있어.”
“시간 괜찮겠습니까?”
“그러니까 서두르라는 거 아냐!”
소녀를 옮기는 남자들은 서둘러 엘리베이터 홀을 빠져나갔다.
남자들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타고 목적지인 1층에서 내린 뒤, 곧장 예정된 루트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 길목에는 산부인과 병실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떡하죠? 이 꼬맹이 깨기라도 하면….”
아기들의 밤울음 소리가 울려 퍼지는 복도를 지나가는 게 남자들은 망설여졌다.
“수면제를 먹였으니 그렇게 쉽게 깨진 않을 텐데….”
“하지만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밤인데도 잠들지 않는 사람들의 기척. 결국 남자들은 더 멀리 돌아가기로 했다.
“젠장, 빨리빨리 안 움직여! 지난번처럼 사람 잘못 잡는 실수 안 하려면 시간 엄수하라고 했단 말이다!”
침대 바퀴가 가라가락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미 남자들에게는 발소리를 죽일 여유 따위 없었다.
그런 그들이 발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느다란 강선을 눈치챌 리 만무했다.
병동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를 건너던 중이었다.
“좋아, 이제 곧 수술실이다. 어떻게든 시간 내에….”
남자들의 긴장이 풀린 바로 그 순간, 앞서 달리던 다섯 명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헉?!” “우악?!”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요란하게 나자빠지는 다섯 놈들.
“이, 이 바보 같은!”
전력으로 달리고 있던 침대는 멈추지 못하고 남자들의 몸 위로 올라타더니, 그대로 중심을 잃고….
남자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등 뒤로 내려앉아, 손바닥에 숨겨둔 스턴건을 제 목덜미에 찍어 눌렀다는 사실을 남자는 알지 못했다.
“아이고….” “윽….”
남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 꼬맹이가?!”
“뭐야?! 설마…!”
남자들 곁에는 뒤집힌 침대만 덩그러니 있을 뿐, 거기 누워 있어야 할 소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충격 때문에 깬 걸까요?”
“아니, 그럴 리가….”
“어떡하죠, 만약 도망이라도 친 거면….”
남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때, 파타파타 발소리를 내며 간호사 한 명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어디서 콰당탕하고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려서요.”
침대가 뒤집히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저기,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그, 그런 건 됐고! 너, 혹시 여자애 못 봤어?!”
남자가 필사적인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달려들 듯 물었다.
“아, 그 아이라면 방금 저랑 스쳐 지나서 뒷문으로 나갔는데요….”
“!”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들은 튕겨 나가듯 뒷문을 향해 내달렸다.
“…안됐네요.”
홀로 복도에 남겨진 간호사가 씨익 미소 지었다.
훌렁 벗어 던진 분홍색 간호사복 아래로, 달빛을 받아 검게 번뜩이는 슈트가 드러났다.
“자, 저 바보들 시선이 뒷문에 쏠려 있는 사이에 철수해 볼까.”
사라진 소녀는 바로 옆 청소 도구함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사치는 소녀를 안아 올리고는 창밖으로 몸을 날렸고, 순식간에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끝
내가 구출한 소녀의 증언과 병원 PC를 해킹해 빼낸 데이터 덕분에 사건의 전말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범인은 최면 요법의 권위자인 J대 의대 카도이데 교수. 십중팔구 틀림없다.
아마 기억 퇴행으로 그 여자의 기억을 되살려 놓음과 동시에, 암시를 걸어 제멋대로 부리는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 거겠지.
“하지만 결국 불법 수사로 얻은 정보잖아. 이걸론 영장을 딸 수 없어.”
경부님이 이를 갈며 분해했다.
결국 나랑 경부님, 그리고 카즈히로 씨 셋이서 머리를 맞댄 수사 회의의 결론은 하나였다.
“카도이데 교수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수밖에. 운 좋게 꼬리라도 밟기를 기대해 보자고.”
딱히 결정타가 없는, 미지근한 방법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카도이데 교수에 대한 혐의는 짙어만 가는데, 체포로 이어질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질 않는다.
심야, 탐문 수사를 마치고 서에 복귀한 나에게 경부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사치, 좀 쉬는 게 어때? 어제도 거의 못 잤잖아. 안색이 아주 안 좋아 보여.”
“네… 그럼 잠시만 실례할게요.”
경부님의 배려에 못 이기는 척 수사본부를 나왔다.
이 몸이 된 이후로 육체적인 피로는 못 느껴도, 정신적인 피로는 오히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기분이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 지독한 욱신거림이 또 시작되고 말았다.
(빨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예전 그 여자에게 조교당했을 때 뇌리에 깊게 박혀버린, 끝도 없는 절정의 쾌감.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으, 윽….)
복도를 걸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랑이 사이로 향한다. 금속 껍데기 안쪽이 액체로 가득 차오르는 걸 느끼며, 나는 여자 화장실 칸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경찰서 안에서 늘 내 성욕을 해소하던 그곳으로.
기계 몸인 나는 당연히 밥도 안 먹고 배설도 안 한다. 그러니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분명 이상하게 여길 거다.
깊은 밤이었지만 만약을 위해 크게 뱅 돌아 구석진 화장실로 향했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며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어?” “앗!”
거기엔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다.
“경부님…?”
“사치…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인데요.”
말할 것도 없이 경부님도 배설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경부님이 남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 와 있는 걸까.
“자, 그럼 경부님. 설명 좀 해 주실까요?”
뒤에서 경부님을 꽉 껴안아 끌고 들어온 곳은 서내 취조실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해 고른 장소였지만, 심문이 없는 취조실은 의외로 아무도 안 오는 명당이다.
“그건, 저기… 그러니까….”
“별로 부끄러워하실 거 없어요. 저도 그러려고 화장실 간 거니까.”
오른팔로 경부님을 붙잡은 채, 왼손을 슬그머니 그녀의 하복부로 미끄러뜨렸다.
“───읏.”
애를 태우듯 금속 껍데기 위로 경부님의 은밀한 곳을 문질렀다.
뒤에서 옆얼굴을 살피니, 경부님은 수치스러운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해요. 괜찮죠?”
경부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경부님의 하복부 해치를 열자, 손바닥만 한 인공 피부로 덮인 가랑이와 그 중앙의 분홍빛 틈새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뒤에서 경부님을 안은 자세 그대로 둘이서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M자로 벌어진 경부님의 허벅지 안쪽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가서….
“어, 잠깐, 사치?! 뭘 하려고…!”
해치 구석에 있는 이젝트 버튼을 눌렀다.
철컥, 하고 조인트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후후, 만져주길 기대하셨어요?”
“아, 그건….”
내 왼손에는 경부님의 가랑이에서 뽑아낸 인공 성기가 쥐어져 있었다.
인공 질과 그걸 꿈틀거리게 만드는 모터로 이루어진 원통형 기계.
육감적인 윗면과 기계가 그대로 노출된 옆면의 조합이 지독하게 외설적으로 보였다.
“보세요, 경부님 거, 젖어 있네요.”
인공 애액으로 젖어든 꽃잎을 경부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 그만해… 창피해.”
평소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냘픈 목소리.
(경부님도 이런 귀여운 표정을 짓는구나….)
문득 생각이 들었다. 더 괴롭히면 경부님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하고.
“경부님, 저 거울 쪽을 보고 앉아 주실래요?”
취조실의 거울이라고 하면, 그렇다. 매직 미러다.
“그, 그러긴 하겠는데, 뭘 하려고?”
“그건 즐거움으로 남겨둘게요. 아, 음성 출력은 저랑 연결된 무선 통신으로 돌려놓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옆방으로 향했다. 경부님이 마주 보고 있는 매직 미러의 뒷면으로.
매직 미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우리.
상대의 모습이 보이는 건 나뿐이다. 경부님에겐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때요, 경부님? 소중한 곳을 도둑맞은 기분은.』
『으으….』
인공 성기가 적출된 경부님의 가랑이는 뻥 뚫린 구멍처럼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뻗어 나온 몇 가닥의 연장 케이블이 내 손에 들린, 경부님에게서 뺏은 인공 성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 제대로 연결됐는지 체크해 볼게요.』
금속 손가락으로 살며시 가짜 살덩이를 만졌다.
『히익!』
거울 너머에서 경부님의 몸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아, 연결은 잘 된 모양이네요.』
일단 손을 떼고 경부님의 몸에서 긴장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방심한 틈을 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경부님의 클리토리스를 꽉 짓눌렀다.
『아아아악?!』
한 박자 늦게 경부님이 비명을 질렀다.
『…경부님 얼굴, 진짜 귀엽다.』
그 얼굴을 더 보고 싶어서 나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음핵을 자극했다.
『잠깐… 기… 기다려… 기다려!』
경부님이 몸을 비튼다. 그곳을 보호하려는 듯 양손으로 가랑이를 가려보지만, 당연히 소용없다. 거기 있어야 할 성감대는 지금 내 손안에 있으니까.
(…경부님을 보고만 있는데도… 나도 또 젖어오네.)
내 가랑이를 내려다보니 닫힌 해치 틈새로 내 애액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껍데기 안쪽에 다 담기지 못한 액체는 내 금속 허벅지에 번들거리는 자국을 남기며 무릎을 꿇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한 손으로는 경부님을 애무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다급하게 하복부 해치를 열자 안쪽에 가득 고여 있던 액체가 걸쭉하게 쏟아져 내렸다.
질척, 질척거리는 젖은 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서 나와 경부님의 소리와 뒤섞였다.
『으앗… 아.』 『아아….』
우리 사이엔 신호화된 신음 소리가 공명했다.
『저기… 경부님… 뭔가 필요하지 않나요?』
『──윽…?』
주인의 몸에서 떨어져 있는데도 경부님의 거기는 추잡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갈구하듯이.
『제대로 된 장난감이 있으면 좋겠는데, 이 방엔 이런 것밖에 없어서….』
『…자, 잠깐, 뭐야?! 뭘 하려는 거야?!』
경부님에겐 내 손에 쥐어진 굵직한 매직 펜이 보이지 않는다.
겁에 질린 얼굴을 곁눈질하며, 나는 그걸 경부님의 분신에 찔러 넣었다.
『어, 뭐야?! 앗, 아아아아악?!』
뿌리 끝부분만 조금 남긴 채 굵은 펜을 쑥 밀어 넣었다.
『그만… 그만해…! 안 돼, 망가진단 말이야…!!』
『괜찮아요. 카즈히로 씨가 만든 부품이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
『그, 그게 아냐… 그런 게… 안 돼, 움직이지 마….』
(정말 귀여워…. 경부님의 이런 얼굴을 아는 건 나뿐이겠지?)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분명 카즈히로 씨가 경부님을 짝사랑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경부님은 카즈히로 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기… 지금 경부님 거기가 물고 있는 게 뭔지 아세요…?』
『……?』
『예를 들면, 그래요. 이 방에 미리 카즈히로 씨가 숨어 있다가….』
『에… 설마, 거짓말이지…?!』
『거울 너머로 경부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기 물건을 지금 막 경부님 질 안에 집어넣은 거라면요?』
『시, 싫어어…!』
경부님의 얼굴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만큼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그걸로 알 수 있었다. 결국 카즈히로 씨와 경부님은 서로 마음이 있었던 거다.
그다음부턴 그저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경부님에게 박힌 굵은 펜을 휘저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계속 몰아붙이다 보니 정말 머릿속이 하얘졌고, 절정에 달하는 순간.
『아아아아아아악!』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자, 일어나, 사치.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어, 어?”
아무래도 가버린 채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원래 피로가 쌓여 있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만.
“맞다, 바닥 더러워진 거….”
“버, 벌써 다 치워 놨어. 자, 얼른 가면실 가서 푹 자도록 해.”
역시 경부님이다. 벌써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조금 어색하긴 해도.
경부님의 배웅을 받으며 경찰서 가면실에 도착했다.
“그럼 잘 자. 내일부터 다시 수사하느라 뛰어다녀야 하니까 각오하고.”
내가 침대에 눕는 걸 확인하고 경부님은 수사본부로 돌아가려 했다.
그 뒷모습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저기, 아까 그거 끝나고 나서… 경부님 거기에 박혀 있던 매직 펜, 직접 뽑으셨어요?”
휘청, 하고. 경부님이 넘어질 뻔했다.
끝
산업폐기물 처리장에서 건져져 경찰서 침대 위에서 눈을 뜬 것도 잠시, 나는 다시금 꼼짝도 할 수 없는 몸뚱어리로 돌아가 버렸다.
아니, 움직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다. 몸의 감각 자체가 없다. 통증을 차단하려고 뇌와 신체를 잇는 회선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얀 가운을 입은 카즈히로라는 사람이 설명해 주었다.
나에게 남은 기능이라곤 간신히 수복된 시각과 청각뿐. 내 의사를 전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발성 기능 수복도 서두르고는 있습니다만… 여러모로, 문제가 발생해서….”
카즈히로 씨는 단어를 골라가며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골라 만들어진 실패작… 결함품이기 때문이다.
“유카리 씨, 들립니까?”
카즈히로 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예상보다 빠르게 신체 열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이제부터 약액 속에 들어가 계셔야 합니다. 괴롭겠지만, 부디 견뎌주세요.”
천장에서 내려온 여러 개의 암(arm)이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 내 몸을 들어 올려, 천천히 방구석으로 옮긴다.
암의 잠금이 해제되고, 떨어진다, 고 생각한 순간. 물소리와 함께 시야가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
수많은 거품이 위로 솟구쳐 올라간다.
(약액 속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내 몸은 초록색 약액으로 가득 찬 유리 수조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가라앉고 있어… 내 몸이.)
제일 좋아했던 수영 시간, 물속을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처럼 헤엄치던 내 몸은 결코 물에 뜰 수 없는 금속 덩어리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헤엄칠 수 없어. 두 번 다시는….)
과학실의 표본처럼 가로누운 채, 나는 마비되었던 슬픔이 실감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카도이데 교수의 혐의를 입증하는 작업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치가 실험체였던 소녀를 성공적으로 구출해냈다고는 해도, 마냥 느긋하게 있을 틈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교수 일당은 또 다른 소녀를 실험체로 납치할 테니까.
“요컨대, 개조 기술을 가진 그 여자만 구출해내면 되는 거죠?”
“사치는 참 쉽게 말하네… 그 넓은 병원 안 어디에 갇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해킹으로 입수한 데이터에서도 안 나오고. 놈들, 꽤나 조심스러운 모양인데….”
“그럼, 이렇게 하면 돼요.”
사치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안에는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오전 0시, 귀하의 비장의 기술자를 모셔가겠습니다. Gadget’…!? 이거, 예고장 아니야!”
“맞아요, 예고장. 이걸 받은 교수는 그 여자의 경비를 한층 더 강화하겠죠?”
“그러니까… 그 경비망의 중심에,”
“네, 그 여자가 있다는 소리죠.”
“하, 하지만 가젯이었던 소녀가 지금 경찰관이 됐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야. 불법 수사라는 게 알려지면….”
“괜찮아요.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냥 장난 같은 예고장이 도착했고, 마침 그날 그 여자가 자력으로 탈출한 게 될 테니까요.”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치.
“…사치, 의외로 대담하네.”
“무슨 말씀을요. 신중하기만 해서는 경부님을 열한 번이나 따돌릴 수 없다고요.”
“…정말이지, 두 번 다시 사치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네.”
개조되기 전 사치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어떤 아이였을지 왠지 상상이 가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사치를 점찍은 것도, 이런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고장 작전은 카즈히로 기술관에게도 전해두었다.
“사치라면 분명 구해낼 거야. 당신 누나잖아.”
“역시, 눈치채고 계셨군요… 제 누나라는 거.”
“나는… 당신 누나가 다시 기억상실 상태이길 바라고 있어. 범죄자와 남매 관계라는 게 밝혀지면, 경찰 안에서 당신 입지가 좁아질 테니까.”
“네, 시선이 따가워지긴 하겠죠. 하지만 저는 누나의 기억이 돌아온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사치 씨에게 사과하게 해야 하고….”
“아….”
“그리고, 누나와 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거든요.”
“당신의, 아버지?”
이미 반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을 했다.
그 여자의 정체를 밝혀내려던 결과였다고는 해도, 무단으로 가정사를 캐고 다녔다는 걸 카즈히로 기술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노동자와 도구의 일체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을 주장하셨지만, 그게 원인이 되어 할아버지께 의절당하셨어요. 누나는 유일한 아버지의 이해자로서, 저와 할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갔죠.”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 개조당해 버린 거네….”
“설마 자기 자신이 사이보그 기술의 실험대가 될 줄은, 누나도 생각지 못했겠죠.”
“그래서 격분한 카즈히로 씨의 누나가, 그 아버지를 목 졸라 죽였다…는 거구나.”
“네. 하지만 어쩌면, 누나는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속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누나가 노동자의 기계화에 찬성한 것도, 아버지를 따라간 것도, 전부 아버지가 꾸민 일이 아닐까 하고….”
“분명 알게 될 거야. 사치가 예고한 내일모레 밤에 말이지.”
하지만, 이 희대의 괴도가 보낸 예고장을 카도이데 교수가 받아보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 J대 부속 병원에서 110번 신고가 들어왔다.
“정신과 환자가 최면 요법 치료 중에 발광. 카도이데 의사 등을 교살하고 도주함.”
끝
해는 이미 뉘엿뉘엿 저물고, 환자들이 하나둘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무렵이었다. J대 부속 병원의 어느 병실, 두 남자가 은밀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이번 사건의 흑막 중 한 명인 카도이데 교수, 그리고 그의 심복이었다.
“하지만 교수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지금은 꼭두각시 상태라지만, 이 여자 정신 상태가 워낙 불안정해서요.”
“상관없네. 오히려 불안정하니까 더 밀어붙이라고 한 게야. 기억도 정신도 나간 계집을 기술자로 부려 먹느니, 차라리 이년 입에서 불게 만든 다른 적임자를 앉히는 게 계획을 앞당기는 데 훨씬 유리할 테니까.”
“하긴, 그렇군요.”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일 줄은 몰랐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기술수사부 놈들 중 하나를 끌고 오는 게 훨씬 다루기 쉬웠을 게야.”
“하아….”
“뭐, 이제 와서 씹어대 봐야 입만 아프지. 자, 그 여자 데려와. 기술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기억까지 싹 다 복구시킬 테니까.”
카도이데 교수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 결정이 제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될 줄은.
“자, 눈 감고. 편안하게.”
“…….”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건 젊은 여자였다. 교도소에서 납치된 카즈히로 기술관의 누나.
“자네 말고 사이보그 기술을 가진 사람, 또 누가 있지?”
“……?”
“음, 질문을 좀 바꿔보지. 자네가 배운 의학이랑 공학 지식, 그거 누구한테 배운 건가?”
“……아빠, 요.”
“그래? 그럼 그 아빠라는 분,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
“……?”
“기억이 안 나나 보군. 그럼 아빠랑 같이 있을 때를 떠올려 봐. 어때, 보여?”
“…….”
“지금 자네는 아빠랑 같이 사이보그 연구를 하고 있어. 거기가 어디지?”
“…산속에 있는, 연구소예요.”
“그래, 아빠가 자네한테 뭐라고 말을 거네. 뭐라고 하고 있지?”
나는 지금 산속 연구소에서 아빠와 대화하고 있다.
“드디어 내일이다, 미츠코. 세계 최초의 사이보그가 탄생하는 날이야.”
“정말 다행이야. 실험체로 자원해 준 사람이 있어서. 아빠, 한 명도 없으면 어쩌나 진짜 걱정했거든.”
“하하, 그래…. 하지만 머지않아 모든 노동자가 기계화되는 시대가 올 거다.”
아빠의 인자한 미소.
“더 이상 공장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걱정할 필요 없어. 사람이 기계가… 도구가 되면 그만이니까. 자,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이만 자거라.”
“응. 나, 아빠 조수로서 이번 개조 수술 꼭 성공시킬게.”
그날 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던 나는 수면제 기운을 빌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이미 절반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거… 꿈인가? 가위눌린 건가?)
아니, 아니다. 이건,
(!?)
내 몸이 수술대 위에 고정되어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어, 어!? 왜, 어째서!?)
이미 내 몸은 배부터 가슴팍까지 쩍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수많은 기계 팔들이 내 몸속을 헤집고 있었다.
장기들이 하나둘씩 끄집어내 지고, 그 자리에 기계 덩어리들이 박힌다.
묵직하게, 아주 묵직하게…. 나를 구성하던 기관들이 기계로 바뀔 때마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잠깐, 기다려! 내가 아니야! 실험체는 내가 아니었잖아!?)
비명을 지르려 해도 굵직한 튜브가 입안을 타고 목구멍 깊숙이 박혀 있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지금 나한테 폐라는 게 남아 있기는 한 걸까.
팔에도, 다리에도 여러 개의 기계 팔이 달라붙어, 프로그램된 대로 오차 없이 정교하게 나를 기계로 뜯어고치고 있었다.
온몸에 바글바글 매달린 가늘고 영악한 금속 팔들. 마치 먹잇감을 뜯어먹는 새끼 거미 떼 같다.
(싫어… 싫어… 이런 건 꿈이야. 그래… 분명 꿈일 거야.)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던 그때, 기계 팔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냈다.
(심… 장…… 내… 거…….)
가냘프게, 간신히 박동을 이어가던 생명의 증거가 지금 내 몸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내 몸은 일부 근육 조직만 남긴 채 전부 기계가 되었다.
“싫어, 왜… 왜 움직이는 거야….”
손발이 움직인다. 내 의지대로 움직여 버린다. 이 기계 덩어리가 이제 내 일부라고 소리치고 있다.
“해냈어! 완벽해, 대성공이다!”
“…날 속였구나. 처음부터 실험 자원자 같은 건 없었지?”
“응? 아, 설마 몰랐던 거냐?”
“…뭐라고!?”
“부품 만들 때 실험체 신체 데이터를 봤을 거 아냐. 그게 미츠코 네 거라는 걸 정말 몰랐단 말이냐?”
“어…!?”
“난 당연히 네가 다 알고서, 아빠 배려해서 모른 척해 주는 줄 알았지….”
“거짓말이야… 날 속인 거야… 당신이!”
“응, 왜 그러느냐?”
눈앞의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깔아뭉갰다.
“어… 뭐야?”
“교, 교수님!?”
양손으로 남자의 목을 힘껏 졸랐다.
“끄윽…… 윽.”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남자는 숨이 끊어졌다.
“히, 히익…! 큰일이다! 누구 없어요! 교수님이, 카도이데 교수님이!!”
나와 경부님이 J대 부속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여자가 병원에서 사라진 뒤였다.
“목이 졸려 질식한 건 물론이고, 아예 목뼈가 으스러졌습니다. 이건 인간의 완력이 아니에요.”
검시관의 보고는 범인이 그 여자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비상 경계령이 내려지고 나와 경부님도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그 여자는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
“미안해요…. 당신 누나를 놓쳐버렸어요.”
경부님이 카즈히로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경부님 잘못이 아니에요, 절대로. 오히려 누나가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도리어 카즈히로 씨가 연신 사과를 해댄다.
“저기… 그런데, 이제 누나만 잡으면 사건은 다 해결되는 건가요?”
“아니, 아직이에요. 카도이데 교수가 왜 그렇게 사이보그 기술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당신 누나랑 실험체 소녀를 납치했던 놈들의 정체가 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든요.”
“하긴 그렇네요. 요즘 세상에 그 정도 무력을 가진 집단이라면… 조폭 같은 걸까요?”
여기서 국제 테러 조직이나 공작원 같은 건 떠올리지 못하는 게 참 카즈히로 씨답다.
“글쎄요. 요즘 조폭들은 주로 사기나 불법 포르노 같은 걸로 돈을 번다던데….”
(불법… 포르노…?)
뭔가 걸리는 게 있다.
“아!”
“사치, 왜 그래 갑자기?”
“불법 포르노, 그게 단서가 될지도 몰라요. 경부님, 보안과 쪽에 협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그러긴 하겠는데… 대체 무슨 소리야?”
경부님과 카즈히로 씨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확실히 뜬금없는 소리긴 하지만, 나한테는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끝
그 여자가 교수를 목 졸라 죽이고 도주한 지 딱 일주일. 그날은 유카리 씨의 새로운 의체가 완성되어 뇌 이식 수술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이걸로 드디어 유카리 씨도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되겠네요. 상세한 증언도 얻을 수 있을 테니, 수사도 활기를 띠겠죠.”
“정말 고생 많았어.”
카즈히로 기술관에게 진심 어린 격려를 건넸다. 눈가의 한 다크서클이 그의 피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저, 경부님. 그 왼쪽 팔… 조금 파손된 거 아닌가요?”
“어?”
깜짝 놀랐다. 들키지 않으려고 나름 신경 썼는데.
“보면 알죠. 제가 만든 몸인걸요.”
그가 내 손을 잡아 손바닥을 뒤집었다. 왼손과 왼쪽 팔의 이음새, 손목 관절이 미세하게 어긋난 걸 그는 놓치지 않았다.
“여기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수리해 드릴 테니까.”
“별거 아냐, 아직은 괜찮아. 손목 움직일 때 살짝 걸리는 느낌이 드는 정도라….”
“그게 문제인 거잖아요. 기다리세요. 부품 교체만 하면 되니까 3분(3分)이면 끝나요.”
말하면서 그는 벌써 교체용 부품과 공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유카리 씨 쪽을… 이라고 말해야겠지만, 역시 부탁할게.”
나는 얌전히 왼쪽 손을 내밀었다.
“잠시만 움직이지 마세요.”
그는 내 손목을 한 손으로 받친 채, 다른 한 손만으로 능숙하게 내 손목을 분해해 나갔다. 받쳐진 손목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따스한 사람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경부님, 대체 고장 원인이 뭐예요? 설마 이 뒤틀린 모양새는….”
“그래, 총탄 자국이야.”
“…역시. 대체 누가 경부님을 쏜 거죠?”
나를 걱정하면서도 그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야말로 장인의 솜씨였다.
“어젯밤 당신이 밤샘 작업하고 있을 때, 서 안으로 침입하려던 수상한 남자들 몇 명이야.”
“경찰서에 침입을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 수리 끝났습니다.”
“고마워.”
손목이 아주 매끄럽게 움직였다. 총 맞기 전보다 더 잘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세한 노후화가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카즈히로 기술관, 침입자들의 목적에 짚이는 데라도 있어?”
“네? 아뇨, 전혀요….”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이야, 카즈히로 기술관. 노려지고 있는 건.”
“네…?”
“잘 들어. 이번 사건은 어떤 폭력 조직이 사이보그 기술을 탐내서 당신 누나를 납치하고, 기억 복원과 세뇌, 그리고 개조 시설 제공을 카도이데 교수에게 의뢰한 거야.”
“네, 네.”
“당신 누나가 행방불명된 지금, 그놈들이 사이보그 기술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다음에 노려질 사람은 누구겠어?”
“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이제야 자신이 태풍의 눈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어, 어떡하죠? 그럼 전 이제 어떻게….”
“예정대로 행동하면 돼. 당신은 당신 일, 유카리 씨를 돕는 작업에만 집중해.”
“하지만….”
“사치가 그러더군. 체포영장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그때까지는 내가 당신을 지킬 테니까.”
***
예상대로 그 남자는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J대 부속 병원에 잠입했을 때, 실험체 소녀를 수술실로 옮기려다 나한테 저지당했던 남자 중 하나. 폭력 조직 S파의 미나가와 용의자에게 나는 체포영장을 들이밀었다.
“어, 어떻게…!?”
“병원 관계자들이 전부 미쳐버린 그 여자한테 살해당했으니까, 꼬리가 안 밟힐 줄 알았어?”
미나가와는 수갑이 채워진 양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험체 소녀의 납치 감금책으로 병원에 잠복해 있을 때… 푼돈 좀 벌어보려던 게 네놈 운의 끝이었어.”
남자 앞에 사진 몇 장을 내던졌다.
“너, J대 부속 병원 간호사 탈의실에 몰래카메라 설치했지?”
“윽….”
그렇다. 내가 잠입했을 때 탈의실에서 발견한 ‘불미스러운 물건’. 그건 로커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간호사들을 노린 핀홀 카메라였다. 물론 나 자신이 찍히는 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이 몰카 영상의 출처를 추적했더니 네놈이 나오더라고.”
정말이지… 매일같이 지난 한 달 동안 유통된 불법 포르노를 샅샅이 뒤져서, 겨우 J대 부속 병원 탈의실 몰카 영상을 발견하기까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조교당한 후유증이 남은 내가 하루 종일 음란한 영상만 보고 있으니, 몸이 달아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인공 애액 탱크가 빌 때마다 카즈히로 씨에게 보충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얼마나 쪽팔렸는데….
S파 사무실에서 미나가와를 포함해 십여 명의 용의자를 연행해 서로 돌아오니, 경부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왔어? 그쪽은 일이 잘 풀린 모양이네.”
“네. 그건 그렇고 경부님, 유카리 씨의 새 몸은….”
어제 낮부터 시작된 뇌 이식 작업은 예정대로라면 오늘 아침쯤 끝났어야 했다.
“걱정 마, 이쪽도 성공이야. 뭐, 어젯밤에 또 방해꾼들이 꼬이긴 했지만….”
“네? 또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사치가 데려온 놈들보다 한발 앞서서 유치장에서 쉬게 해줬지. 꽤 거칠게 저항하더라고.”
자세히 보니 경부님의 바디에는 새로 생긴 무수한 총탄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우와… 이거 장난 아닌데요. 빨리 카즈히로 씨한테 수리받는 게….”
“그는 지금 곯아떨어졌어. 유카리 씨 때문에 며칠을 밤샜으니까 푹 자게 둬야지.”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겉 장갑이 좀 찌그러진 것뿐이니까.”
나를 안심시키듯 경부님이 가슴을 폈다.
“그보다 우리도 쉬고 있을 틈 없어. 놈들 심문하고 기소 절차 밟아야지. 그리고 유카리 씨 재활도 도와줘야 하고. 같은 몸을 가진 선배로서 말이야.”
“네, 넵!”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경부님의 뒤를 황급히 쫓아갔다.
끝
두 겹의 유리창 너머로 하얗게 흐려지기 시작한 봄 하늘이 보인다.
사람의 몸을 잃어버린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다. 숨 쉬지 않는 몸, 먹을 필요 없는 생활. 이제야 겨우 이런 일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툭, 뒤에서 뭔가가 내 어깨를 찔렀다.
유리창을 닦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선명한 빛깔의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내 어깨에 붙은 먹이 찌꺼기를 쪼아대고 있었다.
나는 지금 거대한 수조 바닥에 서 있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수족관. 무거운 금속 몸뚱이가 되어서도 헤엄치는 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수조 내부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다.
손바닥에 먹이를 얹어 높이 치켜들자, 알록달록한 열대어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하루에 몇 번씩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서비스다.
흩날리는 꽃잎 같은 물고기 떼,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이질적인 금속의 몸.
유리 너머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앗.)
인파 속에서 코트를 입은 소녀 둘이 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들의 소매 끝과 깃 사이로 흑백의 금속 피부가 살짝 엿보였다.
(하츠미 씨랑 사치 씨… 와줬구나.)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날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하츠미 씨와 사치 씨는 기다려 주었다.
서둘러 온몸의 비린내 나는 물기를 씻어내고 드라이어로 말렸다. 금속 피부 위에 코트를 걸치고는 허겁지겁 에너트런스 홀로 달려갔다.
“유카리 씨, 오랜만이야. 잘 지내는 것 같네.”
하츠미 씨가 웃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경찰 업무 쉬는 날인가요?”
“네 안부도 확인하고 이런저런 얘기도 좀 나누는 게 오늘의 업무야.”
“어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은 잘 지내?”
옆에서 사치 씨가 살갑게 몸을 붙여왔다.
“네, 네에. 처음보다는 훨씬… 저를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대해주기 시작했어요.”
“다행이네. 난 이 몸이 되고 나서 학교로 돌아갔을 때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치 씨의 얼굴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육체적인 성장이 멈춰버린 우리 셋은 겉보기엔 비슷한 또래의 소녀 같지만, 하츠미 씨와 사치 씨는 나보다 한참 연상이다. 역시 선배들은 정신적으로도 단단하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너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내가 굳이 꺼낼 말은 아닐지도 모르는데….”
하츠미 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알고 있어요. 관람객들이 물고기보다 저를 더 보고 있다는 거.”
세상천지에 드문 금속 몸을 가진 소녀가 잠수 장비도 없이 물속에 잠겨 있으니, 최고의 구경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유리 수조 안, 마치 쇼케이스에 갇혀버린 것 같은 공포를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물속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고요.”
“헤엄치고 싶다고?”
“네. 사실 그것 때문에 드릴 상담이 있어요.”
“지금 저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수중 쇼 기획이 나오고 있거든요. 만약 제가 그 주역을 맡기로 하면, 쇼 장비라는 명목으로 제 몸에 수중용 스러스트를 달아주겠대요.”
“스러스트라면 우리 등에 달린 그거 수중 버전 같은 거야?”
“네. 그것만 있으면 다시 물속을 누빌 수 있어요. 그것도 맨몸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자재로요. 하지만….”
“그걸 위해서 쇼의 주인공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선을 견뎌야 한다는 거네.”
하츠미 씨가 팔짱을 꼈다.
하지만 사치 씨의 반응은 달랐다.
“좋잖아. 해봐.”
“네?”
“구경거리라는 부정적인 생각 말고, 배우가 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제가… 배우요?”
“스러스트를 장착할 수 있는 유카리 씨만이 할 수 있는 연기가 있고, 그 연기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쇼가 있는 거야. 이거 완전 대박 아냐?”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설령 이런 몸이 된 게 슬프고 원치 않는 일이었다고 해도, 이 몸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러게. 불법 수사가 특기인 어느 경찰관 같은 예도 있으니까 말이야….”
어느샌가 하츠미 씨도 긍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배우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건 걱정 마. 아까 열대어들이랑 노는 유카리 씨, 진짜 예뻤거든.”
“그, 그런가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당연하지! 자, 그럼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주역 맡겠다고 말하러 가야겠네.”
사치 씨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그대로 기획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해치우려는 속셈인 게 분명했다.
끝
“네? 저희가 사건 담당에서 제외됐다고요……?”
“유감이지만 그렇게 됐어. 그렇다고 오해는 마, 우리한테 잘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무기 대량 밀수 사건 수사반에서 우리 힘이 필요하다나 봐.”
사이보그 기술을 노렸던 폭력 조직. 그 동기를 캐다 보니 조직 간의 항쟁이 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는 그 배후에서 암약하는 무기 밀수 조직 수사로 넘겨진 모양이었다.
“다만, 네 언니를 우리 손으로 직접 잡아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네…….”
“아뇨, 경부님께서 신경 쓰실 일 아닙니다.”
경부님이 고개를 숙이자 카즈히로 씨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 여자가 기억을 되찾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도망을 계속하는 한 카즈히로 씨와의 남매 관계가 밝혀질 일은 없겠지.
“네, 신체 기능 체크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우리 몸 구석구석에 꽂혀 있던 코드들이 하나둘 뽑혀 나갔다.
하복부 한 곳을 제외하고 전부 열려 있던 해치를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결과는 어때?”
“두 분 다 이상 없습니다. 모든 파츠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요.”
“모든 파츠, 라…….”
경부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 하셨나요?”
“내 하복부에 있는 그 파츠 말이야. 나한테 묻지도 않고 멋대로 달아놓은 이유, 계속 어물쩍 넘어가던데…….”
“아…… 그건, 그게,”
“오늘은 기어코 대답을 들어야겠어.”
경부님이 카즈히로 씨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섰다.
경부님이 기계 몸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카즈히로 씨가 경부님에게 인공 성기를 달아준 이유.
그런 건 하나밖에 없다. 남자라면 좋아하는 사람과 섞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본능이고, 경부님이 그걸 모를 리도 없었다.
잠시 흐르는 침묵.
두 사람 방해를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비켜주려는데, 경부님이 먼저 입을 뗐다.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어?”
‘좋아한다’고 말해버리면 그만인데. 경부님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저에겐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게 네 언니가 범죄자라서 그래?”
“그냥 범죄자가 아닙니다. 사치 씨한테서 사람의 몸을 뺏은 것도 모자라, 경부님이 스스로 몸을 버리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여자라고요!”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당연히 사치도 너한테 나쁜 감정 같은 거 전혀 없고.”
경부님의 말에 나도 카즈히로 씨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제 자신이 용납이 안 돼요.”
쥐어짜는 듯한 카즈히로 씨의 목소리.
“괜찮다고 하셔도 제가 멋대로 죄책감을 느껴버려서…… 경부님이랑, 그, 그런 관계가 될 자신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카즈히로 씨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래…… 어쩔 수 없네. 사실은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는데.”
“……?”
경부님의 얼굴에는 각오와 수줍음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 너 좋아해.”
그 말을 끝으로 경부님은 천천히 카즈히로 씨를 끌어안았다.
“어…… 어, 저기……!?”
카즈히로 씨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패닉에 빠졌다.
“나를 사이보그로 만들라고 명령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 소릴 하는 게 이기적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나, 가끔 무서워져…….”
평소의 경부님답지 않은 가느다란 목소리.
“사람 몸이었을 때는 다쳐도 가만히 두면 자연스럽게 나았어. 하지만 이 몸은 절대로 스스로 치유되지 않아. 오히려 방치하면 파츠는 점점 마모되고, 내 몸은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리겠지…….”
“…….”
“경부님…….”
그 강인한 경부님이 그런 고민을 안고 있었다니. 나한테조차 털어놓지 않았으면서. 카즈히로 씨가 부러워졌다.
“부탁이야. 네가 싫다면 연인이 아니어도 좋아. 정비사라도 좋으니까…… 계속 내 곁에 있어 줘.”
“네, 네…… 당연하죠.”
카즈히로 씨는 시뻘건 얼굴로 삐걱거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옹이 끝난 뒤 두 사람 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었지만,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역시 경부님 쪽이었다.
“그럼, 나랑 사치는 일하러 가볼게.”
“아, 네…….”
둘이서 방을 나서려던 찰나, 경부님이 생각났다는 듯 카즈히로 씨에게 덧붙였다.
“맞다, 깜빡했는데…… 혹시 나랑 인연을 맺게 되면, 그때는 사치도 세트로 잘 부탁해.”
“예……?”
카즈히로 씨는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눈치였다.
“그야 나랑 사치는 모녀 사이니까.”
“……네!?”
카즈히로 씨의 표정이 순식간에 멍청함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몰랐어? 사치가 개명했을 때 성도 나랑 똑같은 ‘아즈마’로 바꿨잖아. 나한테는 사치를 양자로 받아줄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잖아?”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요?”
“입양은 한 살이라도 나이 차이가 나면 가능해.”
“하, 하아…….”
아까부터 카즈히로 씨는 평정심을 되찾을 틈이 없다.
하지만 그 놀라움과 당혹감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표정 속에는 분명 기쁨의 색이 서려 있었다.
기술수사부를 떠나 복도를 걸으며 내가 물었다.
“경부님. 카즈히로 씨랑 진짜 연인이 돼도 저랑은 계속 지금처럼 지내주실 거죠?”
나는 한껏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경부님에게 착 달라붙었다.
“그…… 그게, 야한 짓도 한다는 뜻이야……?”
“남사스럽게 무슨 말씀을…… 모녀간의 스킨십이죠.”
나는 살짝 질투를 담아 경부님을 곤란하게 만들어 보았다.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