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이신 KEBO 님께서 단편 작품을 보내주셨습니다.
치열한 사투 끝에 연인을 쟁취한 신부,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참고로 이 작품에는 ‘보너스 트랙’?(웃음)이 숨겨져 있답니다. 다 읽고 나서 한 번 찾아보세요♪
↑ 이 보너스 트랙이라는 놈은 찾아서 소설 본편 중간에 넣어놨음
(덧붙여, 이 작품은 KEBO 님께서 html 파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2003년 1월 15일』
***
“미사키 씨, 택배 왔습니다.”
“네~!”
미사키 고로의 새신부, 키요미가 수령 확인 사인을 한다. 신혼여행이 끝나고 남편 고로는 오늘부터 다시 출근. 사내 연애 끝에 결혼하며 회사를 그만둔 키요미는 오늘부터 본격적인 전업주부 생활 시작이다.
“하나, 둘!”
배달원 두 명이 낑낑대며 커다란 짐을 옮겨온다.
“사모님, 이거 어디다 설치해 드릴까요?”
“음, 다이닝 룸 냉장고 옆에 놔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포장 뜯을게요.”
키요미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박스 안에서 냉장고를 둥글게 깎아놓은 듯한 원통형 물체가 나타났다. 그 안에는 로봇 한 대가 들어있을 터였다.
고로와 약속한 대로, 키요미는 가사 로봇을 선물 받기로 했다. 남편 회사의 거래처 중에 특주 제작으로 이런 로봇을 만드는 곳이 있었다. 고로와 키요미 모두 그쪽 영업사원과 안면이 있었기에, 보통 대기업 중역이나 정치인 정도나 가질 수 있다는 그 로봇을 ‘결혼 축하가’라는 명목으로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들여올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네…….”
설치 작업을 보며 키요미가 중얼거렸다. 이 로봇에는 유지보수용 캡슐이 딸려 있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로봇을 그 안에 수납해 충전이나 점검을 진행한다. 그런데 그 캡슐 크기가 웬만한 대형 냉장고만 했다.
‘결국 넓은 집 사는 사람들용이구나…….’ 키요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혼부부용 2DK(방 2개, 거실 겸 주방) 아파트에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덩치였다. 하지만 이걸 사달라고 조른 건 본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치가 끝났다.
“작동 확인은 오후에 기술팀 직원이 따로 방문할 겁니다.”
“어, 같이 해주시는 게 아니고요?” 배달원의 뜻밖의 말에 키요미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배송만 담당이라서요…….”
“아, 네…….”
키요미는 시큰둥한 얼굴로 배달원들을 보냈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마치 간식을 앞에 두고 ‘기다려’를 당한 강아지처럼 캡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야…… 심심하게.”
시간은 이제 막 오전 10시를 넘겼을 뿐이다. ‘기술팀’이 오려면 최소 두 시간은 더 남았다. 오늘 배달 시간에 맞춰 청소며 빨래며 다 끝내놓은 터라, 할 일 없이 시간만 때우게 생겼다.
그때 같이 딸려 온 취급 설명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일단 그걸 읽어보기로 했다.
“어디 보자…… 이게 메인 스위치고…….”
설명서를 손에 든 그녀가 직접 기계를 만지기 시작하는 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설명서에 적힌 대로 스위치를 하나씩 올렸다. 그리고 기동 스위치를 누르자, 캡슐 액정 화면에 부팅 프로세스가 뜨기 시작했다.
“나이스!” 키요미가 환호했다. 곧이어 캡슐이 열리고, 안에서 ‘가사 로봇’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하지만 로봇을 본 순간, 키요미는 제 눈을 의심했다.
(완전 사치코잖아…… 고로 씨도 참 취향 독특하네.)
사치코는 말하자면 키요미의 전 직장 동료이자 연적이었다. 그런데 이 로봇, 그 사치코와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이 얼굴을 또 보게 될 줄이야……. 그쪽 회사로 옮겨서 모델이라도 한 건가?) 키요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로에게는 차마 말 못 할 처절한 진흙탕 싸움(!) 끝에 고로를 쟁취해 낸 키요미. 패배한 사치코는 둘의 결혼이 결정되자마자 회사를 그만뒀고, 그 뒤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이번 로봇 제조사 영업사원과 사치코도 아는 사이였으니, 그쪽 회사로 이직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걸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뭐, 상관없어. 이년 부려 먹으면서 내 행복한 꼴을 실컷 보여주면 되니까.)
키요미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로봇은 인간으로 치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 상태였다. 몸매는 꽤나 잘 빠졌다. 표면 처리가 매끄러워서 만져보면 진짜 사람 피부 같은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체모까지 심어져 있지는 않았고 가랑이 부분도 매끈하게 마감되어 있었지만, 가슴의 돌기 같은 건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어서 속옷만 입혀놓으면 영락없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년 벗겨놓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사치코의 알몸을 본 적은 없으니 알 턱이 없지만, 가슴이나 엉덩이 라인은 제법 예뻤다. 이게 사치코 특유의 비꼬는 식의 괴롭힘일 수도 있었지만, 키요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사치코를 발가벗겨서 전시해 놓은 것 같은 우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토 셋업을 시작합니다.” 로봇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목소리까지 그년이랑 똑같아.)
말투는 마치 녹음된 테이프를 트는 것 같았다. 억양 없는, 지하철 안내 방송 같은 기계음. 하지만 그 음색만큼은 틀림없는 사치코의 것이었다.
(역시 모델이 맞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며 설명서를 넘겼다. 목차 다음 페이지에 오토 셋업 항목이 있었다.
“어디 보자, ‘HKR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해 주십시오’라고?”
키요미는 무심코 설명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HKR, ‘하우스 키핑 로봇’이라 적힌 페이지에는, HKR이 가정 내의 모든 가사 노동과 관련된 어떤 니즈에도 대응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어떤 니즈라니, 성욕 해소 같은 거라도 되나……?)
자기 상상에 픽 웃음이 터졌다. 그런 키요미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로봇이 질문을 던졌다.
“사용자 등록을 진행합니다. 얼굴을 HKR의 눈앞으로 가까이 대 주십시오.”
알몸(?)인 채로, 몸이 캡슐에 고정된 상태에서 로봇이 말했다. 지시에 따라 서로 눈을 맞추듯 로봇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로봇의 눈동자 속에서 기계 렌즈가 오토포커스 카메라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키요미는 로봇과 ‘눈이 마주친’ 것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미사키 키요미.”
‘미사키’라는 성을 내뱉으며 그녀는 승리감에 젖었다.
(어때, 난 이제 사사가와 키요미가 아니라고. 고로 씨랑 같은 미·사·키. 알겠어, 사치코? 우후후.)
“미사키 키요미 님을 사용자로 등록합니다. 맞으면 고개를 위아래로, 다시 하려면 좌우로 흔들어 주십시오. 셋업을 중단하려면 ‘중단’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키요미는 지시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미사키 키요미 님을 사용자로 등록했습니다…….”
그 순간, 로봇이 갑자기 ‘비쿤’ 하고 경련하듯 반응했다.
“어?”
삐삐, 하는 미세한 소리가 로봇 내부에서 들려왔다.
“뭐야, 벌써 고장인가?” 키요미가 중얼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로봇은 곧바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사키 키요미 확인. 프로그램을 실행합니다.”
“어!?”
갑자기 로봇을 캡슐 안에 고정하고 있던 밴드가 풀리더니, 로봇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로봇의 손이 키요미를 향해 뻗어왔다.
“뭐야!? 윽……!”
로봇의 손가락이 키요미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손끝에서 전류가 흘러나왔고 키요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뭐야, 벌써 준비 다 끝났잖아.”
미야하라가 거실 풍경을 보며 말했다. 캡슐 뚜껑은 열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까 HKR이 고정되어 있던 것처럼 정신을 잃은 키요미가 묶여 있었다.
“좋아. 뚜껑 닫아서 옮겨.”
“예.”
아침에 왔던 배달원들이 키요미가 든 캡슐을 들고 나가자, 미야하라는 아직 ‘알몸’으로 서 있는 로봇을 향해 품 안에서 카드 같은 물건을 꺼내 겨눴다.
삐삐……. 다시 로봇 안에서 소리가 남과 동시에, HKR 4형 가사 로봇 ‘Sachiko’는 프로그램된 대로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너도 원하던 바겠지. 저 여자의 개조가 끝날 때까지 미사키 씨한테 예쁨 듬뿍 받으라고.”
미야하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드형 리모컨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방을 나섰다.
<Kiyomi: Mechanization processing>
눈이 부셔 잠에서 깼다. 눈앞에는 수많은 전구가 달린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수술실 같은데…… 어?)
문득 키요미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양팔과 다리가 벌려진 ‘大’자 모양으로.
“뭐야, 이거!”
“뭐긴요, 수술대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선 백의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수술이라니…… 왜!?”
“당신은 이제부터 로봇으로 다시 태어날 거거든.”
“로봇……?”
“그래. 집안일이라면 뭐든 척척 해내는 이상적인 가사 로봇 말이야.”
“말도 안 돼……. 설마, 사치코도?” 그제야 키요미는 깨달았다. 사치코는 모델이 아니라…….
“아, Sachiko? 미야하라가 데려온 애지. 술에 떡이 된 걸 미야하라가 업어 왔거든. 죽네 사네 시끄럽게 굴길래, 그냥 두기 아까워서 ‘소체 포획용 모델’의 소체로 썼지.”
“소체라니…… 로봇의 몸뚱이로 썼단 말이야?”
“당연한 거 아냐? 이런 복잡한 조형을 조각가도 아닌데 어떻게 만들겠어. HKR이 왜 일반 판매용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사람 한 명 실종시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당신도 짐작은 가겠지?”
“실종…… 그럼 설마.”
“맞아. HKR이라는 건, 오너가 지정한 인간을 로봇으로 개조한 물건이야.”
“말도 안 돼……. 왜 내가…….”
“당신은 신혼여행지에서 실종된 신부야. 실의에 빠진 신랑이 신부와 똑 닮은 로봇을 곁에 둔다…… 뭐, 이런 시나리오 어때?”
“싫어…… 살려줘요……. 고로 씨……!”
“소용없어. 이 건은 미사키 씨가 직접 의뢰한 거니까. 혼인신고도 모레가 길일이라면서 미뤄뒀다며?”
그 말이 맞았다. 고로가 혼인신고는 모레가 운수가 좋다며 미루는 바람에 아직 서류상으로는 남남이었다.
“거짓말…….”
“뒷이야기도 들려주지. 비탄에 잠긴 신랑을 보다 못한 회사 중역의 딸이 그를 위로해. 그러다 두 사람은 마음을 열고 행복하게 골인하는 거지.”
“거짓말이야……. 고로 씨가 그럴 리 없어!”
“거짓이든 진실이든, 당신이랑은 이제 상관없는 일이야. 작동 편의상 기억은 어느 정도 남겨두겠지만 감정은 지워버릴 테니까. 그나저나 미사키 씨를 두고 꽤나 지저분한 수라장이 있었다면서? 내가 그 중역이라면, 내 딸을 그런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진 않거든.”
“…….”
키요미는 마침내 깨달았다. 고로에게는 자신도, 사치코도 방해물일 뿐이었다. 중역의 딸과 자신들 중 누가 그에게 더 이득이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애초에 고로의 수입으로 가사 로봇을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중역이 이번 건의 오너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서워할 거 없어. 고통은 한순간이니까. 그리고 행복하게 생각하라고. 당신은 HKR로 개조되어서 언제까지나 젊고 예쁜 모습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헌신할 수 있잖아. 가끔 귀여움도 좀 받고 말이야. HKR에는 그런 기능도 있으니까. 중역 딸내미랑 신혼 생활 즐기는 걸 봐도 질투조차 안 나게 될 테니 얼마나 좋아?”
“그…… 으…….” 키요미는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떴다.
“좋아, 시작해.”
수술대 옆에서 마치 공장 기계 같은 암(arm)들이 뻗어 나왔다.
“시, 싫어어어……!”
비명을 질러봤자 소용없었다. 몸은 단단히 고정되어 비트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기계 팔 끝에 달린 바늘들이 온몸 구석구석을 찌르며 어떤 약물을 주입했다.
“아아…… 아아악!”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찰나의 통증 뒤에, 약이 퍼지는 부위부터 타오르는 듯하면서도 녹아내리는 듯한 쾌감이 치솟아 뇌를 직격했다. 그리고 그 쾌감에 마비된 사지 위로 레이저 메스가 파고들어 기계 부품들을 매설하기 시작했다.
(나…… 녹아버려…….) 키요미의 의식이 핑크빛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얼굴 위로 무언가 덮였다. 이어 입안과 콧구멍으로 가느다란 기계 팔들이 침입했다. 기계 팔은 두개골 안까지 파고들어 뇌세포와 세포 크기의 마이크로칩을 융합시키며 기판 같은 구조물을 생성해 나갔다. 키요미의 뇌는 순식간에 반생체 컴퓨터로 개조되어 갔다.
(나…… 는…… 나…… 는…… 싫어…… 시스…… 템…… 아아…… 유닛…… 살려…… 인…… 식……)
의식이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강제로 뒤바뀌는 것을 느끼며, 키요미의 사고는 소멸했다.
<After processing>
“미사키 고로 님을 사용자로 등록했습니다.”
키요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억양 없는, 합성 음성 같은 목소리가. ‘알몸’인 채로 캡슐에 고정되어 있던 사지를 미야하라가 리모컨으로 해제했다.
“근데 좀 아깝네. 이왕이면 하루 정도는 Kiyomi랑 Sachiko 둘 다 데리고 놀아보고 싶었는데…….”
미사키 고로는 Kiyomi를 배달하러 온 미야하라에게 그렇게 말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오오와다 전무님이 들으시면 또 무언의 압박이 들어올 텐데요.”
“그렇긴 하지.” 고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어차피 어젯밤에 Sachiko로 실컷 즐기셨으면서.”
“뭐, 그렇지. 살아있을 때보다 너무 고분고분해서 좀 심심하긴 하더라. 그 부분은 프로그램 조정해 줄 거지?”
“당연하죠…….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Sachiko는 어디까지나 소체 포획용 모델이라 그쪽은 부가 기능일 뿐이지만, Kiyomi 쪽은 그 기능을 대폭 강화해 놨으니까요.”
“어떻게 강화했을지 기대되는데.”
두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뭐, 적당히 하세요. 유미코 씨는 사람이니까요. 질투할 겁니다.”
“알지. 여자라는 생물은 참 무서우니까. 일단 오늘은 Kiyomi랑 즐겨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고로는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끝>
※ 이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며, 등장인물 및 기타 모든 사항은 실제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작가의 후기>
조금 장난을 쳐봤습니다. (귀축 같은 장난을……)
아주 간단한 장치를 해두었으니 한번 찾아보세요. 다만, 제 영어 실력이 부족한 건 너그럽게 봐주시길…….
그럼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3. 1.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