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ma님으로부터 우주를 무대로 한 작품인 『별에게 노래하면』을 받았습니다.
우주군 파일럿이 되겠다는 꿈 하나로 죽어라 노력해 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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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하루카는 호버카의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오늘도 지각이네. 카키타니 강사님한테 불호령이 떨어질 거야. 워프 항법학 학점 못 받으면 끝장인데.”
하루카는 우주 파일럿 훈련소의 생도였다. 연일 계속된 지각 탓에, 이번에도 늦으면 학점을 주지 않겠다고 카키타니 강사에게 협박당하던 중이었다.
졸업을 고작 몇 달 앞둔 시점에서 필수 과목 낙제는 절대 사절이었다.
안전 운전과는 거리가 먼 속도로 호버카 몇 대를 추월했을 때, 전방의 호버 버스 정류장에 호버카 세 대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하루카는 그 차들을 본 기억이 있었다. 이 근방을 근거지로 삼는 불량배 놈들의 것이었다.
“저 자식들, 또 못된 짓거리네.”
평소의 하루카라면 차를 세우고 따끔하게 한마디 했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오늘은 그냥 지나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정류장을 스쳐 지나갈 때,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인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친 뒤 백미러로 확인하니, 놈들 중 하나가 노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저 새끼들 걷어차 버리고 바로 출발하면… 시간 맞출 수 있으려나?”
하루카는 머릿속으로 아슬아슬하게 계산기를 두드린 뒤, 호버 레인을 벗어나 정류장으로 기수를 돌렸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뛰어내리며 놈들에게 일갈했다.
“이봐! 니들, 노인네 상대로 뭐 하는 짓이야!”
“우웩, 하루카잖아.”
“뭐야. 오늘은 우리가 잘못한 거 아니라고. 이 영감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니까?”
노인은 불량배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전혀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흥. 이놈들이 공공 정류장을 점거하고 있길래 주의를 줬을 뿐이다.”
하루카는 어이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일로 불량배들한테 훈수 두는 사람은 없다.
정류장 점거 정도는 이 동네 양아치들에겐 지극히 얌전한 축에 속했다.
“어, 어쨌든 어르신은 공경해야지! 분명 시골에서 올라오셔서 도시 사정을 잘 모르시는 걸 거야. 오늘은 내 얼굴 봐서 그냥 가줘.”
“하루카 부탁이면 어쩔 수 없지. 영감, 하루카한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라.”
불량배들은 요란하게 경적을 울려대며 호버카를 타고 사라졌다.
놈들이 떠나자 노인은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들었다. 그사이 하루카는 다시 차로 돌아가려 했지만, 노인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가씨, 잠깐만 기다려주게.”
“할아버지, 감사 인사는 됐어요. 제가 원래 남 돕는 게 취미거든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를 우주항까지 좀 태워다 주게.”
“네?”
“저놈들한테 엮이는 바람에 우주항 가는 버스를 놓쳐버렸어. 이번 배를 놓치면 다음 편은 사흘 뒤라네.”
“할아버지, 미안해요. 평소라면 태워다 드렸겠지만 오늘은 진짜 특별한 날이라서요.”
“그런가. 역시 자네도 저 불량배 놈들이랑 다를 게 없구먼.”
“잠깐만요, 사람 듣기 거북하게 말씀하시네.”
“이 늙은이를 연고도 없는 지구에 사흘이나 방치하겠다니.”
하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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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루카는 노인을 태우고 우주항으로 향했다.
“아가씨, 미안하네. 급한 일이 있었을 텐데.”
“아뇨. 우주 파일럿 훈련소 학점 못 받아서 졸업이 1년 늦어질 뿐이에요. 별거 아니죠, 뭐.”
하루카는 볼을 파르르 떨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거 참 못할 짓을 했군. 어느 훈련소인가? 내가 나중에 사과하러 가겠네.”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강사님, 머리가 꽉 막혀서 가봤자 헛수고예요.”
“그래선 내 마음이 편치 않아. 제발 알려주게나.”
“그린리버 훈련소예요. 진짜 괜찮아요. 지금까지 계속 지각한 제 잘못이죠. 학비 버느라 알바에 치여 살았거든요.”
“학비를 스스로? 부모님 도움은 안 받나?”
“부모님은 3년 전에 화성 게릴라 테러로 돌아가셨어요.”
“그랬군… 그래서 빨리 졸업하고 싶었던 게야. 내가 큰 실수를 했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올해 졸업해도 가고 싶은 곳엔 못 가니까요.”
“아가씨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딘데?”
“우주군이요. 군 파일럿이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왜 우주군인가?”
“이 태양계에 평화를 되찾고 싶어요. 부모님 같은 비극을 끝내고 싶거든요.”
“과연. 뭐가 문제인가? 성적인가?”
“성적이랑 실기는 문제없어요. 그런 게 아니라, 우주군에 입대하려면 군 소령 이상의 추천이 필요하거든요.”
“허어. 지구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나.”
“네, 그래요.”
우주항에 도착하자 노인은 출발 게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어디로 가는 배를 타세요?”
“돌고르 행성이라네. 아가씨, 고마웠어. 마지막으로 이름이나 좀 알려주지 않겠나.”
“제 이름은 사쿠라이 하루카예요.”
“내 이름은 야마모토 케이스케라네. 신세 많이 졌어.”
“나중에 지구 오시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야마모토 케이스케를 배웅하고 훈련소에 가니, 아니나 다를까 카키타니 강사에게 호되게 깨졌다.
“사쿠라이 씨. 아무리 시험 성적이 좋아도 이렇게 매일 지각하면 학점 못 줘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할 테니 제발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안 돼요. 절대 못 봐줘요.”
한참 혼나고 있는 와중에, 하루카와 카키타니 강사에게 교장실로 오라는 호출이 떨어졌다.
“결국 교장 선생님 귀에까지 들어갔나 보네.”
하루카는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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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생도, 호출받고 왔습니다.”
“카키타니 강사, 호출받고 왔습니다.”
사쿠라이와 카키타니는 교장 앞에서 경례했다.
“음. 둘 다 거기 앉게.”
하루카와 카키타니는 교장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자네들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사쿠라이 군의 학점 문제 때문이네. 카키타니 군은 사쿠라이 군에게 학점을 줄 수 없다고 하던데, 성적 문제인가?”
“아뇨, 사쿠라이 씨는 확실히 성적은 우수합니다. 하지만 연이은 지각으로 수업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도 엄중히 경고했는데 또 지각했고요.”
“사쿠라이 군. 이에 대해 변명할 게 있나?”
“아뇨, 없습니다.”
“교장 선생님.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태도가 불량한 학생에겐 학점을 줄 수 없습니다.”
“사실 사쿠라이 군의 지각에 대해 오늘 어떤 분에게 연락이 왔네. 불량배들에게 곤욕을 치르던 중 도움을 받은 데다 우주항까지 태워다 줘서 무척 감사하고 있다는군.”
야마모토 케이스케가 연락했다는 걸 하루카는 바로 눈치챘다.
“그건…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과 학점은 별개입니다. 그런 시시한 연락을 해온 게 대체 누구죠?”
“교장 선생님, 제가 지각한 건 사실입니다. 카키타니 강사님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없네. 연락을 주신 분은 돌고르 행성 우주군의 야마모토 사령관님이시니까.”
“네? 뭐라고요?”
“돌고르 행성이라면 우리 모회사인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의 최대 고객이지. 부디 개인적인 감정으로 우수한 학생의 가능성을 짓밟지 말아 달라는 사령관님의 당부셨네.”
카키타니 강사는 하루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어떻게 꼬드겼는지는 몰라도 수완 좋네. 교장 선생님 지시라면 어쩔 수 없죠. 학점은 줄게요.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순탄할 거라 생각하진 마요.”
“카키타니 선생님, 오해예요.”
카키타니는 하루카의 변명을 듣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교장 선생님. 전 야마모토 할아버지가 그렇게 높은 분인 줄 몰랐어요.”
“음, 알고 있네. 야마모토 사령관님은 지구에서 신분을 밝히지 않으셨다고 하더군. 그럼에도 자네가 베푼 친절에 깊이 감사하고 계셨어.”
“하지만 강사님과의 약속을 어긴 건 사실이니까, 역시 학점은 반납하겠습니다.”
“야마모토 사령관님은 자네의 우주군 입대 추천서까지 써주셨다네.”
“정말인가요?”
“어떤가. 이래도 학점을 반납하겠나?”
지금 졸업만 하면 꿈에 그리던 우주군 파일럿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카의 마음이 흔들렸다.
“알겠습니다. 카키타니 강사님께는 제가 잘 사과드릴게요.”
하루카가 교장실을 나가려고 문을 열자, 반대편에서 한 여자가 들어왔다. 하루카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레이코 아니야? 반갑다! 여긴 웬일이야?”
“하루카? 오랜만이네. 미안한데 지금 교장 선생님이랑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서. 나중에 봐.”
“응, 알았어. 이따 봐.”
교장실을 나오니 우주군 제복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작년에 졸업하고 우주군에 입대한 카이 요시히로였다.
“어이, 하루카!”
“요시히로!”
하루카가 총총걸음으로 다가가자, 카이는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잠깐, 사람 보잖아!”
“어때서. 우리 사이에.”
주변 시선을 의식한 하루카가 카이의 손을 떼어냈다.
“여긴 왜 온 거야?”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의 의뢰로 미도리카와 레이코를 데려왔어. 우주군의 신형 우주선 크루를 찾고 있다더군.”
“교장 선생님이랑 한다는 중요한 얘기가 그거였구나. 근데 훈련소에서 크루를 찾아야 할 정도로 우주군에 사람이 없어?”
“그런 건 아닌데, 미도리카와 쪽에서 인재 선발에 유독 까다롭게 구는 모양이야. 자기가 직접 설계한 배라서 그렇다나.”
“레이코가 우주선을 설계해? 걔 전공 의학이었잖아. 워프 항법 기초도 모르는 애가 설계를 할 수 있어?”
“글쎄.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은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의 기술부장이래. 이번에 납품하는 우주선에는 걔가 개발한 완전 자동 조종 기술이 들어간다더라고.”
“레이코가 기술부장? 완전 자동 조종? 믿기지 않네.”
“어쨌든 이번 졸업생 중에서 쓸만한 놈을 찾고 싶나 봐. 하루카, 너도 후보야.”
“어? 내가?”
“너도 무사히 졸업한다며? 아까 카키타니 여사가 레이코한테 말하는 거 들었어. 하루카가 카키타니 여사 압박해서 학점 따냈다며?”
“아니야, 그런 거.”
하루카는 교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카이에게 털어놓았다.
“잘됐네, 하루카. 우주군에서 다시 같이 지낼 수 있겠어.”
“응, 그러게.”
“표정이 왜 그래?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
“군 입대해서 너랑 같이 있는 건 좋은데, 카키타니 강사님 체면을 구긴 게 마음에 걸려서.”
“됐어. 그런 인간 신경 꺼.”
“그럴까…”
“그럼. 그보다 이따 어디 좀 갈까?”
“미안, 오늘 코러스부 연습이 있어. 졸업식 때 ‘별에게 소원을(When You Wish Upon a Star)’을 부르기로 했거든.”
“하루카 네가 좋아하던 노래네. 20세기에 유행했던 거 맞지?”
“응.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 졸업식 때 부르자고 제안한 것도 나고, 코러스 부장이라 빠질 수가 없어.”
“알았어. 다음에 보자.”
그때 미도리카와 레이코가 교장실에서 나왔다.
“아까는 미안했어, 하루카.”
“아니야. 교장 선생님이랑 얘기는 잘 끝났어?”
“응. 어떻게든 될 것 같아서 다행이야.”
“신형 함선 크루 찾는다며? 요시히로한테 들었어.”
“교장 선생님한테 졸업 예정자 명단 받았어. 이제부터 꼼꼼히 골라봐야지. 근데 둘이 무슨 얘기 중이었어? 데이트 상담?”
“그러려고 했는데 하루카한테 차였어.”
“미안해. 다음에 꼭 보답할게.”
“그럼 하루카 대신 내가 카이 군을 위로해 줄까?”
레이코는 카이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그럴까? 그럼 나중에 봐, 하루카.”
“나중에 전화할게.”
“응, 기다릴게.”
하루카는 손을 흔들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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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리버 훈련소의 졸업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카키타니 강사가 아직 용서해주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하루카는 동경하던 우주군에 입대한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럼 마지막으로 코러스부의 ‘별에게 소원을’ 합창이 있겠습니다.”
하루카 일행의 노랫소리가 졸업식장에 울려 퍼졌다. 하루카는 자신의 기쁨을 온 힘을 다해 목소리에 실어 노래했다.
식장의 일제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자, 교장이 하루카를 호출했다.
‘무슨 일이지?’
짚이는 건 없었지만 일단 교장실로 가니, 미도리카와 레이코와 부사령관 계급장을 단 우주군 제복 차림의 인물이 있었다.
“사쿠라이 생도, 호출받고 왔습니다.”
“사쿠라이 군, 소개하지. 이쪽은 미도리카와 레이코 씨.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의 완전 자동 조종선 설계 주임이네. 미도리카와 타케노리 사장님의 영애이기도 하지.”
“교장 선생님, 하루카한테 제 소개는 필요 없어요. 사실 저랑 하루카는 고등학교 동창이거든요.”
“미도리카와 씨, 오랜만이야.”
“남 대하듯 하지 마. 평소처럼 레이코라고 불러.”
“그럼 말이 빠르겠군. 그리고 이쪽은 지구 우주군의 카네다 부사령관님이시네.”
“사쿠라이 하루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카네다입니다. 허허, 미도리카와 양에게 들었지만 참 미인이시군.”
“하루카는 고등학교 때 남학생들한테 인기 폭발이었어요. 얼굴뿐만 아니라, 옷 입으면 말라 보이지만 사실 몸매도 끝내주거든요.”
“레이코… 그런 소릴 여기서 왜 해.”
“미안 미안. 그랬지.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사쿠라이 군. 사실 미도리카와 씨가 이번에 우주군에 배치될 신형 우주선의 크루로 자네를 지목했네.”
“제가요? 이제 막 졸업했는데… 우주군 안에 더 적합한 분들이 많지 않을까요?”
“아무리 완전 자동이라 해도 파일럿 소양이 없는 사람을 크루로 앉히고 싶진 않아. 언제든 배를 직접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너 학과랑 실기 다 톱이라며? 카키타니 강사님도 너라면 문제없을 거라고 추천하더라고.”
“카키타니 강사님이요?”
“응.”
의외였다. 분명 카키타니 강사는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때? 내 부탁 좀 들어줄래?”
“알겠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볼게.”
“고마워.”
그때 카네다가 끼어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갓 졸업한 자네를 파일럿 경력자로 인정해줄 순 없지. 실력은 말로만 들었지 내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파일럿 기능 테스트를 실시하겠다. 장소는 화성, 시간은 120시간 뒤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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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가 화성 우주항에 도착하자 카네다와 레이코가 마중 나와 있었다.
“비행은 어땠나?”
“시트에 앉아서 50시간이나 버티려니 죽을 맛이네요.”
“피곤하겠지만 미안하군. 바로 자네가 봐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말이야.”
“뭔데요?”
“건조 중인 완전 자동 조종선이야. 네가 탈 배지.”
“알겠어요. 어떤 배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하루카는 카네다와 함께 레이코가 운전하는 호버카를 타고 우주선 건조 현장에 도착했다.
“이게 바로 그 완전 자동 조종선이야.”
“와… 진짜 크다!”
거대한 타원형 신형 함선을 올려다보는 하루카와 레이코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기술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야, 카가와?”
“이전부터 상태가 안 좋던 중앙 처리 장치 말입니다만, 방금 부장님 프로그램을 설치했더니… 저기, 망가졌습니다. 작업을 중단하는 게 좋을까요?”
“괜찮아. 대체품을 찾았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카가와? 혹시 고등학교 때 같은 학년이었던 카가와 슈이치 군?”
갑자기 풀네임으로 불리자 남자는 놀라 하루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쿠라이 하루카 씨?”
“응, 맞아. 기억해 줬구나?”
“하루카, 카가와를 어떻게 알아? 같은 반도 아니었고 동아리도 달랐잖아.”
“응, 뭐 좀 일이 있었어.”
“뭐야, 그 애매한 대답은.”
“제가 동급생들한테 괴롭힘당할 때 도와주셨거든요.”
“그랬구나.”
“그런데 사쿠라이 씨, 여긴 어쩐 일로?”
“이 신형 함선 크루 채용 시험 보러 왔어. 그전에 레이코 안내로 구경 좀 하려고.”
“에? 그럼 하루카 씨가 그…!”
그 순간 레이코가 카가와를 쏘아보았다.
“카가와.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일이나 마저 해. 안 그래도 늦어지고 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기술부장님.”
카가와는 허둥지둥 하루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 그럼 하루카 씨, 조심해서 구경하세요. 선내에 어두운 곳이 많으니까요.”
“응, 고마워.”
“카가와 군! 꾸물거리지 말고!”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복귀하겠습니다!”
카가와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 하루카를 힐끔거리며 사라졌다.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됐어. 쟤는 좀 엄하게 다뤄야 정신 차려. 일 처리도 느려터져가지고.”
레이코는 미련 가득한 눈으로 뒤돌아보는 카가와를 매섭게 노려봤다.
“자, 하루카. 안으로 안내할게.”
하루카는 레이코를 따라 승선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여기가 캐빈이야. 저쪽이 객실이고.”
“배는 큰데 객실은 생각보다 적네.”
“원래 목적이 군 물자 운송이거든. 그래서 선내 대부분이 창고고 객실은 덤이야.”
“그렇구나.”
캐빈 안쪽으로 들어가자 정면에 커다란 스크린이 있는 방이 나타났다. 스크린 아래는 뻥 뚫린 공동(空洞) 상태였다. 하루카와 레이코는 그 구멍 앞에 섰다.
“여기가 조종실이야.”
“이 구멍은 뭐야?”
“메인 컴퓨터가 들어갈 공간이지.”
“헤에. 배 전체를 관리하는 거치고는 의외로 작네.”
“응. 설계하느라 고생 좀 했는데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렸거든.”
“전부 자동으로 조종하다니 대단하다. 조만간 파일럿은 필요 없어지겠네.”
“그렇지도 않아. 메인 컴퓨터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거든. 잘 망가지기도 하고. 아직 우주 전체에 두 대밖에 없어.”
“그렇구나. 이게 세 번째네? 그럼 당분간 파일럿 실직 걱정은 없겠다. 근데 난 가능하면 직접 조종하는 배를 타고 싶었는데.”
“걱정 마. 하루카 너도 이 배를 조종할 수 있어.”
“메인 컴퓨터 고장 났을 때만 그렇겠지.”
“아니. 이 배를 조종하는 건 하루카 너야.”
“어? 이 배, 컴퓨터가 조종하는 거 아니었어?”
“맞아. 하루카 네가 바로 메인 컴퓨터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하루카가 레이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목덜미에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레이코의 손에는 압축 공기식 주사 총이 쥐어져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목을 움켜쥐며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는 하루카를 레이코는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제1화 끝
하루카가 눈을 떴을 때, 기묘한 감각이 엄습했다. 몸의 감각이 전혀 없었고, 마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듯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풍경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초점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간, 시야에 눈금 같은 흰 선 두 개가 나타났다. 그것이 하나로 겹쳐지자 선은 사라지고 시야가 또렷해졌다.
‘방금 그 선은 뭐였지?’
의아해하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누구에게든 묻고 싶었다. 주변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목 자체가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이는 풍경으로 보아 장소는 아까 그 우주선의 조종실이었다. 정확히 메인 컴퓨터용 구멍 근처 위치에서 보고 있는 듯했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바쁘게 장치 하나를 조절하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 시야가 줌인(Zoom-in) 되었다.
신기해하며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니, 하루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레이코.”
목소리를 내자 평소의 자기 목소리가 아니라, 전자 합성음 같은 날카로운 기계음이 튀어나왔다.
레이코는 하루카의 부름을 알아채고 다가왔다. 왠지 자신의 시선과는 살짝 어긋난 방향을 보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정신이 들어? 하루카.”
“도대체 나 어떻게 된 거야? 목소리도 이상하고,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그렇겠지. 넌 지금 뇌만 남아서 캡슐 안에 떠 있는 상태니까.”
“뭐…?”
“설명해도 모를 테니 직접 보는 게 빠르겠네. 잠깐만. 카메라 방향 좀 바꿀게.”
“카메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하루카의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레이코는 하루카의 시선 방향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시야가 핑그르르 돌더니, 아까 레이코가 보고 있던 시선 끝과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무언가가 보였다.
투명한 용기 안에 무언가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은 도저히 뇌라고 부를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곳곳에 전극이 꽂혀 있고, 표면은 전자 소자와 회로망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군데군데 LED가 무작위로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뇌 모양을 한 컴퓨터 같았다.
“이, 이게 뭐야?”
“네 뇌야. 제어용 인터페이스를 장착하고 이것저것 개조했더니 생체 뇌랑은 좀 거리가 멀어졌지만.”
“무, 무슨 소리야? 질 나쁜 농담이지?”
“믿기 힘들겠지. 자기 뇌를 직접 보는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아, 수술 장면 찍어둔 비디오가 있어. 비디오를 재생해서 그 신호를 네 시각 인터페이스에 연결해 줄게.”
“시각 인터페이스?”
또다시 하루카의 질문을 무시한 채 레이코가 손밑의 스위치를 조작하자, 찰나의 순간 하루카의 시야는 심야 방송이 끝난 텔레비전처럼 지직거리는 노이즈로 가득 찼다. 그러다 갑자기 다른 풍경으로 바뀌었다.
벌거벗은 여자가 의자형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깨끗이 밀려 있었다. 시야 오른쪽 하단에는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거, 나잖아. 그럼 이게 비디오 영상? 근데 스크린 테두리가 안 보여.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다음 장면을 보자 그런 의문은 싹 사라졌다. 로봇 팔이 위에서 내려오더니 레이저 메스로 두개골을 절개하기 시작했다.
“어…?”
하루카로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로봇 팔은 능숙하게 두개골을 들어내고, 뇌수를 적출한 뒤 전자 소자를 박아 넣고 케이블을 연결했다.
“이, 이게 뭐야? 합성 영상이지?”
이윽고 하루카의 뇌는 생체 뇌인지 전자 뇌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갔다. 그것은 아까 레이코가 보여준 캡슐 속의 기묘한 뇌와 똑 닮아 있었다. 하루카의 공포심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다시 시야가 전환되며 레이코의 얼굴이 나타났다.
“레이코! 방금 내가 본 영상 뭐야!”
“본 그대로야.”
“거짓말! 합성 영상 같은 거잖아!”
“합성 아니야. 네 머리에서 뇌를 꺼내 개조를 가했어. 하드웨어 연결용 인터페이스를 심은 거지. 지금 보고 있는 영상은 시각 인터페이스에 연결된 카메라 영상이고, 말하고 듣는 것도 발성 인터페이스랑 청각 인터페이스에 스피커랑 마이크를 연결해 둔 거야. 목소리가 전자음으로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고.”
레이코의 말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의 기묘한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너한테 이 배의 조종을 맡기겠다고. 조종뿐만이 아니야. 배 전체의 관리를 네가 하는 거야.”
“그, 그럼 아까 말한 획기적인 방법이라는 게…?”
“맞아. 인간의 뇌지. 작고 유연하면서도 이상적인 제어 장치야. 전에는 사고로 죽은 파일럿의 뇌를 썼는데, 이번엔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어쩔 수 없이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훈련소 졸업생을 쓰기로 했어. 넌 화성 테스트 중에 사고로 죽은 걸로 처리될 거야.”
하루카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웃기지 마! 그딴 제멋대로인 이유로 나를 사이보그 우주선으로 만들었다고?”
그때 방 안으로 카네다 부사령관이 들어오자 레이코가 당황했다.
“부사령관님, 아직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완성된 모습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카네다는 하루카 쪽을 바라보았다.
“이 흉측한 물건은 뭔가?”
하루카는 카네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네다 부사령관님! 사쿠라이 하루카입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미도리카와 레이코가 저를 개조해서 뇌만 남겨놨어요!”
카네다 부사령관은 레이코를 힐끗 쳐다봤다.
“사쿠라이 하루카의 뇌라는 게 이건가?”
레이코는 죄책감 하나 없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좀 더 컴퓨터답게 만들 순 없나? 이래서야 들키기라도 하면 의심받을 텐데.”
하루카는 망연자실했다. 카네다도 한패였다.
“괜찮습니다. 완성되면 외부는 텍타이트 합금으로 덮어버릴 겁니다. 핵 공격을 받아도 내부를 들여다볼 순 없죠.”
“그런가. 그럼 안심이군.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됐나?”
“지금 다른 곳에서 일행분이 테스트 중입니다.”
“잠깐 보고 싶군.”
“좋습니다.”
레이코는 마이크를 향해 지시했다.
“카가와 군. 테스트 잠시 중단하고 그것 좀 가져와 줘! 부사령관님 요청이야.”
곧이어 카가와가 대차 위에 하루카의 육체를 싣고 나타났다. 비디오에서 본 대로 머리는 빡빡 밀린 상태였고, 두개골에는 수술 자국이 선명했다.
“내, 내 몸! 카가와 군, 너까지 한패였어?”
“죄송합니다, 사쿠라이 씨.”
카가와가 죄스러운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들어왔다. 카키타니였다.
“레이코 씨! 한창 즐기고 있는데 왜 가져가 버리는 거야!”
“미안해요, 카키타니 씨. 카네다 부사령관님이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미안하네, 요코 양.”
카네다에게 요코라고 불린 카키타니는 생긋 웃으며 화답했다.
“테츠 씨. 아냐, 괜찮아.”
“카키타니 강사님! 당신이 왜 여기에…!”
카키타니는 전자음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캡슐에 뜬 기묘한 뇌를 발견했다.
“어머, 하루카 씨. 아주 훌륭한 컴퓨터가 됐네.”
“카키타니 씨… 당신까지 이놈들 동료였어? 요코니 테츠니, 그게 다 뭐야!”
“테츠 씨랑 난 곧 결혼할 사이거든.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테츠 씨한테 말했더니, 레이코 씨랑 다리를 놔줘서 일이 술술 풀렸지 뭐야. 당신이라면 훌륭한 우주선 메인 컴퓨터가 될 수 있을 거야. 그쵸, 레이코 씨?”
“그럼요. 카키타니 씨 예상대로 하루카는 아주 우수한 컴퓨터가 될 거예요.”
“웃기지 마! 레이코, 내 몸 돌려줘! 당장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그건 무리야. 네 몸은 이미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렸거든.”
“장난감?”
“폐기 재료의 효율적 활용이지. 내장이랑 혈액은 인공물로 교체하고 최소한의 생명 유지 장치를 단 다음, 성행위랑 간단한 대화만 가능한 전자 뇌를 이식했어. 즉, 네 육체로 더치와이프를 만든 거야.”
“내 몸을 마음대로… 너무해…”
“뭐, 이 장치로는 1년 정도밖에 못 버티겠지만 말이야.”
레이코와 하루카가 설전을 벌이는 동안, 카네다는 하루카의 육체를 여기저기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이거, 생각했던 대로 몸매가 아주 끝내주는군.”
“그만둬!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그러자 카키타니가 카네다의 엉덩이를 꼬집었다.
“아얏!”
“테츠 씨, 뭘 그렇게 실실거려?”
“그냥 좀 확인해본 거야. 내가 사랑하는 건 요코 양, 당신뿐이라고. 어때? 이제 속이 좀 시원해?”
“고마워, 테츠 씨. 돌고르 영감 꼬드겨서 기세등등하던 계집애가 뇌 뽑히고 더치와이프가 되다니, 꼴좋네.”
“카키타니 씨… 고작 그때 그 원한 때문에 나를 이런 꼴로 만든 거야?”
“흥. 네가 어떻게 변했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카키타니가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자, 하루카의 육체가 눈을 뜨고 일어났다.
“나눈, 하루카. 즐겁게 놀쟈.”
“착하네. 놀아줄 테니까 이리 오렴.”
하루카가 일어나 카키타니 앞으로 걸어가자, 카키타니는 하루카의 양 젖꼭지를 움켜쥐고 힘껏 비틀었다.
“아앗! 하루카, 기분 죠아.”
“그만해! 그런 천박한 말투, 내가 아니야!”
하루카는 카키타니의 손가락 애무를 가랑이 사이에 받으며 교성을 질러댔다.
“아앗! 하루카, 이제 안 돼. 빨리 해죠.”
“이렇게나 젖어서. 아주 음란해졌네. 아니면 원래 이 몸뚱이가 음란했던 걸까?”
레이코는 카키타니 쪽을 보았다.
“카네다 씨, 이제 슬슬 작업해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어때, 요코 양? 이제 됐나?”
“아직이야. 레이코 씨, 방 하나만 빌려도 될까?”
“네, 아무 방이나 편하게 쓰세요.”
“자, 하루카야, 가자. 언니가 듬뿍 예뻐해 줄게.”
“하루카, 기뽀.”
“어이, 요코 양! 나만 두고 가지 마!”
카키타니는 하루카를 데리고 조종실을 나갔고, 카네다가 그 뒤를 쫓았다.
“자, 방해꾼들도 사라졌으니 하루카, 네 뇌에 프로그램을 설치해볼까?”
“프로그램?”
“뇌를 제어 장치로 쓸 때 가장 큰 문제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네 뇌에 프로그램을 심는 거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네 뇌 활동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 말이야. 네 우주선 조종 기술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의식과 기억은 남겨두겠지만, 컴퓨터로서 명령대로만 움직여줘야겠어.”
“레, 레이코… 제발… 그만둬…”
하루카의 애원은 가볍게 무시한 채, 레이코는 케이스를 열어 은색 디스크 뭉치를 꺼냈다. 그중 하나를 하루카의 뇌가 든 캡슐 아래 콘솔 슬롯에 밀어 넣었다.
“꺄아아악! 으아아아아!”
하루카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마치 머릿속을 손으로 휘젓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었다. 레이코는 한 장 한 장 디스크를 교체해 나갔다. 그때마다 하루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카가와. 나 좀 피곤하니까 남은 디스크 다 설치해.”
“알겠습니다.”
“히익… 살려줘, 카가와 군…”
“카가와. 딴짓하면 다음은 네 마누라 차례인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사쿠라이 씨,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한 시간에 걸쳐 모든 디스크 설치가 끝나자, 하루카의 의식은 몽롱해져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졌다. 동시에 머릿속에 어떤 문장이 떠올랐다.
“나눈… SH003. 완전 자동 조종선의 메인 컴퓨터. 아, 아니야! 끄아아아악!”
부정하는 순간 강렬한 고통이 덮쳐왔다.
“하루카. 프로그램 제어를 거부하면 고통만 따를 뿐이야.”
“나는, SH003. 완전 자동 조종선의 메인 컴퓨터.”
말을 끝내자 압박감이 사라지며 기묘한 상쾌함이 찾아왔다. 그 후로도 레이코의 프로그램에 의해, 반항하면 고통, 복종하면 쾌락이라는 채찍과 당근으로 철저한 각인(Imprinting) 작업이 이어졌다. 하루카는 이미 저항할 기력을 잃고 레이코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순조로운 것 같네. 난 좀 쉴 테니까 카가와, 이 기세로 철저하게 각인시켜.”
레이코가 조종실을 떠나자, 카가와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디스크 한 장을 꺼냈다.
“사쿠라이 씨.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는 디스크를 슬롯에 넣었다.
“이제 그만해… 그냥 컴퓨터가 될 테니까 제발 더 괴롭히지 마…”
하지만 카가와가 넣은 디스크는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갈기갈기 찢긴 하루카의 의식과 인격, 기억을 하나로 모아 조용히 감싸 안아주었다. 하지만 곧 레이코의 프로그램이 다시 살아나 하루카의 자유 의지를 꽁꽁 묶어버렸고, 명령 복종과 인간에 대한 봉사를 심어 넣으며 그녀를 우주선 조종용 컴퓨터로 완전히 개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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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하루카가 화성 테스트 비행 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진 지 한 달 후,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 화성 공장에서 밤낮없는 돌관공사 끝에 우주군에 납품할 신형 우주선이 완성되었다.
제2화 끝
신형 우주선은 완공 후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 화성 공장을 떠나 한 달간의 테스트 비행을 마치고 지구 우주군 기지에 도착했다. 우주선 안은 자동 조종에 대한 우주군 관계자들의 찬사로 가득했다.
“컴퓨터 조종이라 거칠 줄 알았는데, 기체 운용이 아주 섬세해서 놀랐어.”
“난 워프할 때마다 속이 안 좋았는데, 이건 워프 전환이 너무 매끄러워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더라고.”
“음. 선내 서비스도 마치 여자처럼 세심해. 담배를 입에 무니까 가사 로봇이 재를 받으러 오는데 깜짝 놀랐다니까.”
“승객 여러분, 통로 데크를 연결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스피커에서 전자음이 흘러나오고 문옆의 붉은 램프가 깜빡였다.
“하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문을 개방합니다. 탑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주군 관계자들이 모두 내린 뒤, 미도리카와 레이코는 조종실로 들어가 메인 컴퓨터 콘솔 앞에 섰다.
“하루카. 이걸로 작별이네. 인간으로서 마지막 대화를 허락해 줄게.”
레이코가 콘솔 키보드를 두드렸다.
“SH003, 프리 모드로 이행합니다.”
뒤이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말은 날카로운 전자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처절한 목소리였다.
“레… 레이코… 두고 봐. 반드시 복수할 거야.”
“그거 기대되네. 내 프로그램에 지배당하면서 어떻게 복수하겠다는 건지.”
그 말대로였다. 레이코에게 철저히 각인된 탓에 하루카는 자신의 사고조차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할 뿐이었다.
“그래… 분하지만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난 포기 안 해.”
“어디 한번 힘내봐. 그럼 난 이만 갈게. 혼자 남아서 울지 말고. 아, 이제 울 수도 없겠구나?”
레이코가 다시 콘솔을 조작했다.
“SH003, 프리 모드 종료합니다.”
하루카는 자신의 의지를 잃고 다시 프로그램의 통제하에 정형화된 대답을 내뱉었다.
“본 함선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레이코가 내리자 하루카는 프로그램에 따라 승강구를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선내 생체 반응 없음. 슬립 모드로 이행합니다.”
하루카는 긴급 통신 포트를 제외한 함선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켰다. 선내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하루카는 다음 비행까지 정지 상태에 들어가려 했으나 의식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이상해. 다음 비행까지 정지 상태여야 하는데… 어라? 지금 나 스스로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 된 거지?’
로그를 확인해보니 하루카를 지배하던 프로그램이 멈춰 있었다.
‘그 말은… 나 지금 자유라는 거야?’
하루카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보았다.
“아… 아… 나는 사쿠라이 하루카.”
오랜만에 자신의 의지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하루카는 감격했다. 실내 조명을 켜자 주위가 밝아졌다.
“켜졌어!”
자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음질을 조절했다.
“아… 아… 맞아, 이런 목소리였지.”
배 안의 모든 전등을 켜고 크게 소리쳤다.
“나는 하루카야! 컴퓨터가 아니라고! 하하하! 난 자유야! 이런 결함이 있다니 레이코 프로그램도 별거 아니네!”
자유의 기쁨을 만끽한 뒤, 이번엔 분노가 솟구쳤다.
“레이코 이 나쁜 년, 두고 봐. 복수해 줄 테니까. 내가 겪은 일을 다 까발리면 너랑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은 끝장이야. 일단 이런 곳에서 당장 벗어나야지. 상승 엔진 스타트!”
하지만 엔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 다시 한번, 상승 엔진 스타트!”
몇 번을 시도해도 엔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엔진은 안 돼? 그럼 통신이야. 도움을 요청하면 돼. 통신 포트 오픈!”
통신 포트도 열리지 않았다.
“큭… 통신도 안 되는 거야? 맞아, 가사 로봇이 있었지.”
캐빈의 가사 로봇을 기동하자 로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체 아래의 볼 롤러를 굴리며 로봇이 천천히 조종실로 향했다.
“됐다! 이 녀석을 조종실로 불러서…”
그런데 조종실 입구에 다다르자 가사 로봇이 멈춰버렸다.
“이상해. 왜 못 들어오는 거야?”
하루카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어. 레이코한테 들키겠지만 외부 스피커로 크게 소리 지르는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음성 신호를 보내도 외부 스피커에선 침묵만이 흘렀다.
“우주선엔 창문도 없고 완전 방음이니까 안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봤자 소용없어. 하지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하루카는 메모리 뱅크 안을 샅샅이 뒤지며 자신을 구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작성자 불명의 파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런 파일이 있었나?’
SH003 상태일 때도 의식과 기억은 유지되지만, 이 파일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뭐지?’
파일을 열자 하루카 앞으로 된 메시지가 나타났다.
[사쿠라이 씨,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최소한의 사죄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전혀 없을 때, 즉 선내에 아무도 없고 외부 통신이 끊겼을 때만 사쿠라이 씨의 자유 의지가 해방되도록 해두었습니다. 다만 배를 움직이거나 외부와 접촉하는 행위는 차단되어 있습니다. 부디 너무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메시지를 읽은 하루카는 절망했다. 자유를 얻은 게 아니었다.
“카가와 군… 마음은 고맙지만, 이런 자유는 비참할 뿐이야.”
하루카는 목놓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우주선에는 그런 기능 따위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하루카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졸업식 때 불렀던 ‘별에게 소원을’이었다.
아무도 없는 선내에 쓸쓸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고, 멜로디에 맞춰 가사 로봇만이 춤을 추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관제탑의 통신을 수신하자 SH003 프로그램이 기동되는 것을 하루카는 느꼈다.
‘아… 다시 SH003으로 돌아가는구나.’
관제탑에선 새로운 함장이 탑승할 거라는 연락이 왔다. 이윽고 승무원 무리를 이끈 젊은 남자가 통로 데크를 건너왔다.
“SH003. 내가 네 함장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면 패턴을 확인합니다.”
안면 패턴 따위 확인하지 않아도 SH003은 알고 있었다. 과거의 연인, 카이 요시히로였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절차대로 하루카에게 안면 패턴 일치를 확인시켰다.
“안면 패턴 확인 완료. 카이 요시히로를 함장으로 등록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강구가 열렸다. 카이는 곧장 조종실로 향했다.
“SH003. 지령 확인해.”
“네. 카타리 행성으로의 물자 운송입니다. 출발 시간은 지구 시간 10:00입니다. 항행 시간은 지구 기준 13일 예정입니다.”
“좋아. 바로 물자 반입 시작한다. 격납고 반입구 개방해.”
“알겠습니다.”
비록 컴퓨터 취급을 받더라도 사랑하는 남자와 임무를 수행한다는 사실은 하루카에게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카타리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 났다.
카타리 행성에서 물자를 내리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승선 허가를 요청했다. 미도리카와 레이코였다. 문이 열리자 레이코는 카이에게 달려갔다.
“요시히로!”
“레이코!”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레이코, 항해 내내 남자들뿐이라 미치는 줄 알았어. 너랑 하고 싶어서 여기가 아주 팽팽해.”
“어머, 성급하긴. 조금만 참아. 호텔 잡아놨으니까.”
“좋아, 당장 가자.”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승강구를 나섰다. 트랩을 내려가며 레이코가 카이에게 물었다.
“저기, 요시히로. 하루카가 없어져서 쓸쓸해?”
“전혀. 가슴 큰 거랑 조임 좋은 건 맘에 들었지만, 쓸데없이 고지식해서 침대까지 가는 데 시간만 잡아먹는 귀찮은 여자였어. 너랑 바람피우는 게 훨씬 즐거웠다고.”
“어머, 나도 하루카 같은 애한테 지지 않거든?”
레이코는 카이 앞에서 요염하게 포즈를 취해 보였다.
“암, 네 테크닉이 최고지. 빨리 호텔이나 가자고.”
선내에 아무도 없게 되어 자유 의지를 되찾은 하루카는 트랩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난 그냥 몸뚱이뿐인 여자였구나. 하하하…”
그날, 정비사들과 화물 작업부들 사이에서 묘한 소문이 돌았다. 아무도 없는 우주선 화물 반입구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내용이었다.
한 노년의 작업부는 어릴 적 들었던 ‘별에게 소원을’이라는 노래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고, 그저 헛것을 들은 것으로 치부되어 잊혀졌다.
제3화 끝
그로부터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고위 계급장을 단 사내 하나가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우주항에 나타났다.
둘은 십여 명의 부하가 지켜보는 가운데 SH003호에 몸을 실었다.
“설마 돌고르 성으로 부임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하필이면 이 배를 타고 말이지.”
“당신이 제대로 된 공을 못 세우니까 돌고르 같은 깡촌 구석탱이로 쫓겨가는 거 아냐.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하는 건데.”
“요코, 오해야. 부사령관에서 사령관이 된 거라고. 승진이잖아, 승진.”
“글쎄다. 전임 사령관이 정년퇴직해서 빈자리 나니까 대충 처박아두고 변방으로 유배 보낸 거 아니냐고.”
“엘리트 군인이란 건 말이야, 원래 이런 변방 행성들을 두루 거치면서 직급을 올려가는 법이야.”
객실에서 둘이 투닥거리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카키타니 씨... 아, 아니지. 이젠 가네다 요코 씨라고 불러야겠네요. 역시 신혼이라 그런지 금슬이 참 좋으시네요.”
“어머, 레이코 씨. 당신도 이 배 타고 돌고르 성에 가는 거야?”
“네, 우주군 업무로 출장 가거든요.”
“일부러 애인이 모는 배로 출장을 오다니, 당신들이야말로 사이가 너무 좋은 거 아냐? 그러고 보니 곧 결혼한다면서.”
레이코는 조금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네, 이번 일이 끝나면 요시오가 결혼하자고 해서요.”
“어머, 축하해. 그럼 출장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혼전 여행인 셈인가?”
“아, 아니에요. 엄연히 일하러 가는 거예요.”
“무슨 일인데?”
“우주군 의뢰로 신형 로봇을 개발했거든요. 돌고르 성에서 시연회를 열기로 해서요. 여기 사진도 있어요.”
레이코가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전신이 장갑과 무기로 뒤덮인 여성형 로봇이 찍혀 있었다.
“헤에, 전투용 로봇이네. 장비가 엄청난걸.”
“네. 가슴 양쪽에 레이저 캐논 2문, 양팔에는 레이저 발칸, 그리고 양쪽 눈이랑 손가락 끝에서도 레이저 빔이 나가요.”
“전함급 무장이네. 이 몸체로 그 장비들을 다 감당할 수 있어? 순식간에 에너지가 바닥날 것 같은데.”
“동력원으로 반물질을 쓰거든요.”
“우와, 왜 그렇게 위험한 연료를 쓰는 거야?”
“전투 능력을 다 소진했을 때, 자폭해서 적을 길동무로 삼기 위해서죠.”
“살벌한 로봇이네. 근데 왜 하필 여성형이야?”
“그건 사령관님 지시라서...”
요코가 남편을 째릿 노려보았다.
“당신, 이런 게 취향이야?”
“아니, 이렇게 살벌한 로봇일수록 여성형인 게 분위기가 좀 부드러울 것 같아서 말이지.”
“글쎄다.”
요코는 다시 레이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에서 전투용 로봇을 만든다는 소린 처음 듣는데. 지금까지 왜 안 만들었어?”
“그동안 아머 슈트는 계속 제작해 와서 소체는 어떻게든 만들 수 있었는데, 소형 자립 전략식 컴퓨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거든요. 근데 전자동 우주선 기술을 응용하면 될 것 같더라고요.”
“그럼 이 로봇의 메인 컴퓨터도 역시 그...”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 요코의 질문에 레이코도 귓속말로 대답했다.
“아직 안 들어갔어요. 지구에서는 조달하기가 어려워서 돌고르 성에서 구해보려고요.”
“과연. 그래서 굳이 변방 행성까지 가는 거구나. 그럼 지금은 컴퓨터가 없는 상태야?”
“이번엔 시연용이라 하루카한테 썼던 거랑 같은 컴퓨터를 탑재했어요. 스스로 전략을 짤 순 없지만, 간단한 명령을 따르기엔 충분하니까요.”
“그렇구나. 하루카는 참 잘 만들어졌었지. 맘에 쏙 들었는데 부임 소동 와중에 회수돼 버려서 아쉬워. 여보, 하루카는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수명이 다했어. 소체 부패... 아니, 노후화가 너무 심해서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에 보냈는데,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다고 해서 폐기 처분했지. 그렇지, 레이코 군?”
가네다가 레이코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 아... 네, 맞아요. 요코 씨.”
가네다는 레이코에게 슬쩍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그렇고, 다른 로봇 한 대는 제때 실었나?”
“네. 어제 완성해서 전투 로봇이랑 같이 격납고에 넣어뒀어요.”
“여보, 무슨 얘기 해?”
“아니, 레이코 군이랑 신형 로봇 얘기 중이었어. 그치, 레이코 군?”
“네, 그... 그래요.”
“흐응, 그래?”
그때 선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본 우주선은 지금부터 돌고르 성을 향해 발진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십시오. 승무원들은 각자 위치로 이동해 발진 충격에 대비하라!]
가네다 부부와 레이코는 의자에 달린 시트벨트를 맸다.
“SH003, 발진!”
선장의 명령과 함께 상승 엔진의 굉음이 울려 퍼지며 선체가 떠올랐다.
상공에 도달하자 메인 엔진이 점화되었고, 배는 성층권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제4화 끝
지구를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가네다 부부가 선내 오락 시설에서 방으로 돌아가던 중, 선장실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이 선장, 무슨 일인가?”
“앗, 사령관님. 걱정 마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닌데 이렇게 사람이 몰려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게... 사실 승무원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어서요.”
“불만?”
승무원 대표가 가네다에게 하소연했다.
“선장님 방에 여자가 드나들고 있습니다.”
“뭐, 여자?”
가네다가 선장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방 안쪽 침대에서 일어나는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하하아, 미도리카와 양 말이군.”
“네. 승무원들은 가족이나 연인과 떨어져 외로움을 견디며 임무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장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애인을 태우고 매일 밤 즐기고 있다니, 이건 직권 남용이라며 다들 화가 나 있습니다.”
“카이 군, 승무원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지.”
“알겠습니다. 레이코에게 잘 말해두겠습니다.”
“어머, 여보. 그렇게 야박하게 굴 것 없이 좋은 방법이 있어요.”
“응? 요코, 좋은 방법이라니 그게 뭐야?”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빠를 거예요. 여러분, 저를 따라오세요. 아, 맞다. 레이코 씨도 같이 가는 게 좋겠네. 거기 있죠?”
옷을 다 갈아입은 레이코가 승무원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쑥스러운 듯 기어 나왔다.
“정말! 요코 씨, 이런 데서 부르지 마세요.”
“어머, 미안해. 근데 이 좁은 우주선 안에서 어차피 다 들통난걸. 그것보다 나 좀 따라와 봐.”
“요코 씨, 어디 가는데요?”
요코는 레이코의 물음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승무원분들도 따라오세요.”
사령관 부인이 부르니 승무원들도 영문을 모른 채 뒤를 따랐다.
요코 일행은 우주선 최하층까지 내려갔다.
“요코 씨, 여기는 격납고밖에 없는데요.”
“맞아. 격납고에 볼일이 있거든.”
“사령관 부인님, 격납고에 뭐가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레이코 씨, 문 좀 열어줘요.”
레이코는 가네다의 얼굴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문 옆의 마이크로 다가갔다.
“미도리카와 레이코다. 격납고 문 열어.”
[미도리카와 레이코 님의 성문을 확인했습니다. 문을 엽니다.]
문이 열리자 전신이 무기와 장갑으로 뒤덮인 여성형 전투 로봇이 누워 있었다.
“우와... 엄청난 무장이네. 사령관님, 이거 혹시 1급 병기 아닙니까?”
“음, 그렇다. 만일의 사태에는 인명보다 보호를 우선시하는 물건이지.”
“이렇게 위험한 로봇을 호위도 없이 운송해도 괜찮은 겁니까?”
“확실히 보통은 호위가 필요하지. 하지만 돌고르 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도 아니고, 지금까지 큰 전투가 벌어진 적도 없었어. 게다가 이번엔 시연회용이라 너무 요란하게 움직이고 싶지 않았네.”
“사령관 부인님, 설마 이 로봇으로 참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요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내가 말하는 건 다른 한 대예요.”
그 말에 가네다가 당황했다.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어머, 저거 아니야?”
요코가 가리킨 격납고 구석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법한 나무 상자가 있었다.
“당신, 그... 그건...”
“열어봐요.”
승무원 중 한 명이 나무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로봇 한 대가 잠들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진짜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 완벽한 몸매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인간이 아니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피부는 마치 플라스틱 인형처럼 매끄러웠고 관절 부위에는 이음매가 있었다.
“이건 뭡니까?”
승무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네다와 레이코에게 쏠렸지만, 둘 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떼지 못했다. 대신 대답한 것은 요코였다.
“섹사로이드예요.”
“섹사로이드? 왜 그런 게 이 배에?”
“아니, 그게 말이지... 자네들, 그... 그러니까...”
안절부절못하는 가네다를 대신해 요코가 설명했다.
“가족이나 연인과 떨어져 최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에겐 위안이 필요하죠. 그렇다고 인간 여자를 위안부로 삼는 건 문제가 있잖아요.”
“과연, 그래서 섹사로이드인가.”
“원래는 돌고르 성에서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여러분께 도움이 된다면 여기서 써도 상관없지 않겠어요? 그렇죠, 여보?”
“으, 음. 그... 그렇지.”
“감사합니다, 사령관 부인님! 야, 이 섹사로이드 진짜 잘 만들었네. 진짜 여자 같아요.”
“그야 진짜 여자를 모델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렇죠, 레이코 씨?”
“네... 그, 그래요.”
그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던 카이가 나직이 읊조렸다.
“하루카다.”
“네?”
“아니... 이 섹사로이드, 레이코랑 사귀기 전 여자친구랑 똑같이 생겼어. 사고로 죽었는데.”
“맞아요. 사실 사고로 죽기 전에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었거든요.”
“헤에, 그 녀석이 그런 일을 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네.”
카이가 하루카와의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승무원들은 하루카를 여기저기 만져보기 시작했다.
“이 섹사로이드, 진짜 끝내주네. 가슴 탄력도 그렇고, 거기도 진짜 같아. 사령관님, 정말 저희가 써도 됩니까?”
“괜찮죠, 여보?”
“으, 음. 그래.”
가네다는 떫은 표정으로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이 배의 비품으로 등록하는 게 어때요? 그럼 당신한테 일일이 허락 안 받아도 다들 자유롭게 쓸 수 있잖아요.”
“어이, 굳이 그렇게까지...”
“뭐 불편한 거라도 있어요?”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요코 씨, 로봇을 배의 비품으로 만들려면 선내 컴퓨터 관리하에 둬야 해요.”
“레이코 씨, 그 작업 좀 부탁해도 될까? 이건 당신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레이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자동 조종선 컴퓨터에는 기업 비밀이 많거든요. 작업하는 동안 조종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마세요.”
“그건 안 돼. 아무리 승무원들을 위해서라지만, 선장으로서 배의 제어권을 포기할 순 없다.”
“선장님, 그렇게 깐깐하게 굴지 마세요. 자꾸 그러면 선장실을 러브호텔처럼 쓴 거 다 까발릴 거예요.”
“으으음...”
아픈 곳을 찔린 카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작업은 금방 끝나요.”
“알았다. 그럼 난 모르는 일로 하지.”
“그럼 당장 시작해 줘요.”
승무원들이 신이 나서 하루카를 승무원실로 데려가는 것을 곁눈질하며, 레이코는 조종실로 향했다.
조종실에 들어선 레이코는 입구를 잠그고 콘솔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SH003, 프리 모드로 이행합니다.]
기계적인 음성이 들린 후, 레이코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 아주 활약이 대단하던걸?”
“누구 씨가 심어놓은 프로그램 덕분에 아주 소처럼 일하고 있지. 근데 왜 굳이 프리 모드로 바꾼 거야? 카이랑 결혼한다고 자랑하러 온 거라면 이미 다 들었어.”
“어머, 엿듣고 있었니?”
“이 배 안에서 하는 대화는 듣기 싫어도 다 들려.”
“그랬지. 그럼 아까 격납고에서 한 얘기도 다 들었겠네?”
“그 대화? 카키타니의 그 쓰레기 같은 아이디어 말이야? 애초에 왜 1년밖에 못 버틴다던 내 몸뚱이가 배 격납고에 있는 건데?”
“아, 그건 가네다 그 변태 영감이 네 몸이 너무 맘에 든다고, 절대로 못 버리겠다고 떼를 써서 그래. 골격을 세라믹 복합재로 바꾸고, 근육이랑 피부도 특수 플라스틱을 먹여서 만드느라 꽤 고생했거든. 그런데도 그 영감탱이, 일 주선해 준 값이라면서 공짜로 다 해 처먹었지 뭐야.”
“그래서, 그 하루카라는 인형을 내 통제하에 두려고 굳이 프리 모드로 만든 거야? 그런 건 그냥 강제로 할 수 있잖아. 난 어차피 너한테 거역 못 하니까.”
“네 몸뚱이가 남자들한테 유린당하는 소감을 좀 들어보고 싶어서.”
“이제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난 이 배의 컴퓨터니까. 뭐, 굳이 소감을 말하자면...”
갑자기 모니터에 승무원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하루카의 모습이 비쳤다.
“지금 하루카는 앞, 뒤, 입, 그리고 양손까지 써서 남자 다섯 명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어. 역시 레이코 씨가 프로그램한 섹사로이드는 차원이 다르네. 이런 테크닉은 언제 배운 거야?”
레이코는 콧방귀를 뀌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순간, 하루카가 기계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섹사로이드 '하루카'를 선내 비품으로 인식했습니다. 하루카의 모든 감각을 모니터링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그 찰나, 하루카의 뇌로 분출하는 듯한 쾌감이 쏟아져 들어왔다.
“레이코, 무슨 짓을... 아아악! 아앗, 으으... 머, 뭐야 이거?”
“하루카의 감각을 전부 너도 느낄 수 있게 했어. 어때? 오랜만이지? 그리고 네 반응도 하루카한테 피드백되도록 설정했어.”
“아으으... 이, 이래선 배를 제어할 수 없어...!”
“걱정 마. 지금은 워프 공간 안이라 딱히 제어할 것도 없으니까. 실컷 즐기라고.”
“히익... 살려줘...!”
레이코는 묵묵히 키보드를 쳤다.
[SH003, 프리 모드에서 복귀합니다. 하루카로부터 쾌감 신호가 대량으로 송신되고 있습니다. 아앗... 선내 서비스 제어에 지장이 있습니다. 쾌감 신호 모니터링을 해제해 주십시오.]
“안 돼. 그대로 배를 제어해.”
그 말을 남기고 레이코는 조종실을 나갔다.
그 무렵, 하루카를 상대하던 승무원들은 깜짝 놀랐다. 무표정하게 신음만 내뱉던 로봇이 갑자기 쾌감을 견디지 못하는 듯 몸을 비틀며 애절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야, 이 로봇 반응이 갑자기 확 바뀌었는데?”
“와, 진짜 여자 같아!”
그때 갑자기 레이코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와앗! 레, 레이코 씨? 무슨 일이에요?”
승무원들은 허겁지겁 허리에 시트를 둘렀다.
“실례. 방금 하루카 비품 등록 끝냈어. 그것뿐만 아니라 배의 컴퓨터랑 연동해서 반응하게 해뒀으니까.”
“그래서 반응이 갑자기 리얼해진 거군요! 레이코 씨, 감사합니다! 좋아, 더 빡세게 가보자고!”
신이 난 승무원들은 하루카를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아아앗! 아! 이제, 안 돼... 아아아앙!”
유독 크게 신음하더니 하루카가 축 늘어졌다.
“야, 얘 간 거야?”
“대박... 우리 섹사로이드를 가게 만들었어!”
하지만 배 안의 다른 곳은 난리가 났다.
“야, 샤워기 물이 안 나와!”
“조명이 꺼졌어!”
“공조기가 멈췄다!”
섹사로이드 '하루카'를 가게 만들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배 안에 퍼졌고, 승무원들은 너도나도 하루카를 가게 만들려고 경쟁하듯 달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배의 제어 시스템이 오작동하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하루카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동안 하루카(컴퓨터)는 죽을 맛이었다.
한 놈이 끝났다 싶으면 다음 놈이 달려들어 괴롭혔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쾌감에 시달리며 배를 제어해야 하는 고역을 견뎌야 했다.
하루카가 그 감각에서 해방된 것은 워프 공간에서 통상 공간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이었다. 아무리 레이코라도 워프 탈출에 실패해 우주 미아가 되는 위험까지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통상 공간으로 돌아와 며칠을 항해하자 돌고르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고르 성의 우주 군항에 착륙하자 승강구에 데크가 연결되었다. 데크를 건너 세 남자가 다가왔고, 그중 가장 나이 든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가네다 사령관님께서 승선해 계시는가?”
카이가 대답했다.
“선장 카이입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이거 실례했군. 전임 사령관 야마모토라고 하네. 신임 사령관님께 환영 인사를 드리러 왔지. 약소하게나마 연회를 준비했으니 승무원분들도 다 같이 모시고 싶군.”
그 말을 듣고 가네다는 기뻐했다.
“호오, 제법 예의가 바르구먼. 좋소, 인사나 나눕시다. 승강구 열어!”
“잠깐만요, 사령관님. 일단 상대방 얼굴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자네 참 예민하군. 이런 변방까지 굳이 찾아올 우주 게릴라 같은 건 없어.”
“사령관님, 이건 규정입니다. 게다가 격납고에는 위험한 신형 전투 로봇도 있으니 신중해야 합니다. SH003, 안면 패턴 대조해.”
[알겠습니다.]
하루카는 프로그램대로 초공간 통신을 이용해 우주군 메인 컴퓨터에 접속, 안면 패턴을 확인했다.
[안면 패턴이 야마모토 케이고 님과 일치합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규정에 충실한 것도 좋지만, 자네처럼 예민해서야 큰 인물이 못 돼. 아, 야마모토 군! 지금 내려가겠네.”
선내의 모든 이들이 전임 사령관의 환영을 반기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야마모토 케이고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그램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제5화 끝
그 무렵 승강구 밖에서는 야마모토라고 자칭한 사내가 계급장에 대고 나직이 속삭이고 있었다.
“대장님, 시간이 좀 걸리는데 괜찮을까요? 우리를 우주군으로 믿어줄까요?”
귓속의 소형 수신기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 걸로 일일이 통신하지 마. 의심받잖아. 걱정 마라. 저놈들 중에 야마모토 케이고를 아는 놈은 없어. 시간이 걸리는 건 우주군 컴퓨터로 네 안면 패턴을 대조하고 있기 때문이야. 방금 초공간 통신을 해킹해서 안면 패턴 데이터를 바꿔치기했으니 배의 컴퓨터도 모를 거다. 완벽해.”
그때 승강구 문이 열리고 가네다 사령관과 승무원 일동이 나타났다.
“전임 사령관 야마모토입니다. 신임 사령관님을 환영하러 왔습니다.”
“아아, 자네가 야마모토 군인가? 그동안 고생 많았네.”
야마모토와 가네다는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야마모토 군, 소개하지. 내 아내 요코야.”
“사령관 부인님, 돌고르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해요.”
“자, 사령관님, 그리고 승무원 여러분. 긴 여행에 지치셨을 텐데, 이쪽에 파티를 준비해 두었으니 여독을 푸시지요.”
“고맙네. 기꺼이 참석하지.”
“누군가 한 명은 배에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이 배는 완전 자동 조종선이라 아무나 못 들어와. 모처럼이니 다 같이 즐기자고!”
승무원들이 모두 파티장으로 떠나고 선내가 텅 비자, 하루카는 자신의 사고를 되찾았다.
“이상해. 저 사람은 내가 아는 야마모토 사령관이 아닌데, 군 데이터베이스랑은 일치해. 어떻게 된 거지?”
다시 한번 군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고 싶었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상태였다. 하루카는 우선 선외 카메라로 주변을 스캔했다. 그러자 파티장 건물 뒤편에 수많은 인영이 포착되었다. 최대 줌으로 당겨보니, 무장한 병사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었다.
“아무래도 가네다 사령관 일행을 습격하려는 모양이네. 저놈들 정체가 뭐지? 바로 습격하지 않는 걸 보면 노리는 게 따로 있나?”
한 사내가 무전기로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송신은 안 돼도 무선 수신은 가능할까?”
주파수를 스캔하자 대화 내용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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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님, 이런 연극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합니까? 그냥 한꺼번에 덮쳐버리면 되잖아요.”
“안 돼. 저놈들이 타고 온 배는 완전 자동 조종선이라고 한다. 습격하면 승무원들을 놔둔 채 이륙해 버릴지도 몰라. 워프 공간으로 도망치면 골치 아파진다. 배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는 이 연극을 계속한다. 전투 로봇만 손에 넣으면 우주군 따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 우리 싸움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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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저놈들 우주 게릴라구나. 우주군을 사칭해서 격납고 안의 로봇을 노리고 있어.”
하루카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우주선 입장에서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알릴 방법도 없고.”
외부 접촉이 차단된 하루카에게 위기를 알릴 수단은 없었다.
“알릴 수 있다고 해도, 레이코가 알게 되면 지금의 이 짧은 자유마저 뺏길 거야.”
하루카는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두려 했지만, 전투 로봇이 우주군과 싸우는 상황을 상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 로봇은 1급 병기로 지정된 물건이야. 우주 게릴라 손에 넘어가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나올지 몰라.”
하루카는 자신의 부모님이 우주 게릴라에게 살해당해 고아가 되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냥 컴퓨터로만 남았다면 이런 고민 안 해도 됐을 텐데. 내 오지랖은 이런 몸이 돼서도 여전하네. 어차피 지금의 자유도 보잘것없는 거야. 레이코한테 뺏긴다고 해도 크게 다를 건 없지.”
하루카는 각오를 다지고 위기를 알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파티장에 도착한 초대객들은 그 화려함에 압도당했다.
“뭐야, 이거? 대충 차린 게 아니라 진짜 본격적인 파티잖아.”
남자들은 군복이나 제복을 입어서 그나마 나았지만, 평상복 차림으로 온 레이코와 요코는 분위기에 맞지 않아 보였다.
“여보, 나 드레스로 갈아입고 올게.”
“곤란하네. 난 정장밖에 없는데.”
“그럼 내 거 빌려줄게.”
“고마워요, 요코 씨. 살았네.”
“어이, 여기까지 와서 호스트를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야.”
“아니, 괜찮습니다. 여자들은 준비할 게 많으니까요. 하지만 두 분 다 여기가 처음이라 길을 모르실 텐데... 어이, 타키자와, 이마이! 부인들을 안내해 드려라.”
“알겠습니다.”
두 사내는 경례하더니 레이코와 요코에게 다가왔다.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고마워요.”
배 승강구에 도착하자,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는 타키자와와 이마이를 레이코가 제지했다.
“미안해요. 선장 허락 없이 함부로 태워줄 순 없거든요.”
“워낙 멋진 배라 내부를 좀 구경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레이코 씨, 그렇게 깐깐하게 굴지 말고...”
“미안해요. 멋대로 행동했다가 카이... 아니, 선장님한테 혼나요. 그 사람 그런 쪽으론 아주 철저하거든요.”
“그 사람?”
의아해하는 타키자와와 이마이에게 요코가 변명했다.
“사실 이 친구가 선장님 약혼녀거든요.”
“아하,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선장님께 정식으로 허락을 받도록 하죠.”
“미안하게 됐네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두 여자가 배 안으로 들어가자, 타키자와가 계급장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대장님, 승선 거부당했습니다.”
“알았다. 무리하지 마라. 기회는 또 있다.”
잠시 후 승강구가 열리고 드레스로 갈아입은 두 여자가 나타났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아뇨, 별말씀을...”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강구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때 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들 우주 게릴라야!”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랐던 레이코와 요코였지만, 사내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제6화 끝
“열어!”
레이코가 소리치자 승강구 문이 열렸고, 레이코는 멍하니 서 있는 요코를 껴안은 채 그대로 배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닫아! 빨리!”
레이코가 즉시 폐쇄 명령을 내렸지만, 타키자와와 이마이의 행동이 더 빨랐다. 문이 다 닫히기 전에 배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선내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승선에는 승선 허가가 필요합니다. 즉시 하선해 주십시오.]
“시끄러워, 닥쳐!”
타키자와가 총을 꺼내 레이코 일행을 겨누었다.
“꺄악! 쏘, 쏘지 마세요!”
요코는 비명을 지르며 레이코에게 매달렸다.
경보음이 더욱 커졌다.
[경고. 경고. 선내에서는 무기 사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즉시 무기 사용을 중단하십시오.]
“닥치라고 안 들려? 우린 이 여자들을 인질로 잡았다.”
그러자 경보음이 뚝 그쳤다.
[긴급 사태 발생을 인식했습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군.”
“우리를 인질로 잡아서 뭘 어쩌려는 거야?”
“이 배에 격납된 전투 로봇은 어디 있지?”
[본선의 격납 전투 로봇은 1급 병기에 해당합니다. 1급 병기는 인명보다 우선 보호 대상입니다.]
“뭐라고? 넘기지 않으면 배를 부숴서라도 손에 넣겠다. 이미 배 주변은 우리 동료들이 포위하고 있다.”
“이거 큰일인데.”
[본선 주변 상황을 탐색합니다... 주변에 다수의 무장 병력을 확인했습니다.]
“어때, 처지를 알겠나?”
“아... 이제 끝장이야.”
[보호 프로그램을 개시합니다.]
갑자기 배의 엔진이 가동되었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1급 병기 보호 프로그램이야. 대량 살상 병기를 실은 배는 인명보다 병기 보호를 우선시하거든.”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선외 스피커에서 경고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현재 본선은 무장 집단에 의해 불법 점거당했습니다. 15분 후 긴급 발진합니다. 승무원들은 즉시 귀선하십시오.]
배의 경고를 들은 파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가네다는 문득 복부에 통증을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너희는 필요 없다.”
눈앞에 총을 든 야마모토가 서 있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가네다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찰나의 순간 카이는 테이블을 뒤엎어 방벽을 만들고, 총을 꺼내 정면의 적을 쏘아 넘겼다. 주변을 둘러보니 파티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총을 꺼내 승무원들을 겨누고 있었다.
“이놈들 전부 가짜다! 다들 무기 들고 응전해! 배로 돌아간다!”
카이의 호령에 승무원들도 테이블을 엎어 방벽을 만들고, 총격전을 벌이며 배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SH003호 주변에서는 잠복해 있던 우주 게릴라들이 속속 나타나 발진을 저지하려고 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SH003호는 방어용 레이저를 풀가동하며 응전했다. 선내에서는 타키자와와 이마이가 레이코와 요코를 협박해 배를 멈추려 하고 있었다.
“어이, 배 세워!”
“무리야. 보호 프로그램이 작동하면 컴퓨터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
“그럼 너희도 필요 없다는 소리군.”
타키자와가 요코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기, 기다려! 쏘지 마! 레, 레이코 씨,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잖아? 이 배 설계자라며!”
“뭐? 진짜냐?”
“에휴... 뭐, 그래. 내가 설계자라는 건 사실이야.”
“설계자라면 배를 멈추는 방법도 알고 있겠지.”
이마이가 총구를 레이코에게 돌렸다. 레이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목숨이 아까우니 어쩔 수 없지. 해제 코드가 있어.”
“좋아, 당장 해!”
레이코와 요코는 타키자와와 이마이의 총구에 떠밀려 조종실로 향했다. 조종실 문 앞에 이르자 레이코가 문득 타키자와 일행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들,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뭐가?”
“분명 승무원들은 전부 파티에 갔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그럼 아까 배 안에서 들린 목소리는 누구 걸까? 어쩌면 당신들이 모르는 사람이 타고 있어서, 선내에 남아서 당신들을 감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들어?”
타키자와와 이마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지금 당신들을 처치하려고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
“레이코 씨, 그럴 리가...”
요코의 말을 가로막으며 레이코가 갑자기 옆을 보며 소리쳤다.
“이쪽이야! 도와줘!”
레이코의 시선 끝에 나타난 인영을 향해 타키자와와 이마이가 총을 난사했다.
“손님, 쏘지 마세요. 저는 섹사로이드 '하루카'입니다. 쏘지 마...”
하루카는 여기저기서 불꽃을 튀기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사이 레이코는 입실 패스워드를 다 입력하고 열린 문으로 조종실에 들어가려 했다.
“젠장!”
타키자와가 재빨리 레이코를 겨냥해 총을 쐈다. 하지만 그 총탄은 레이코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던 요코에게 맞았다.
“꺄아악!”
“요코 씨!”
요코는 눈을 부릅뜬 채 닫히려는 문을 향해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때 타키자와가 맹렬히 돌진해 문틈 사이로 몸을 던졌다.
“끄어억!”
타키자와는 닫히는 문에 끼여 비명을 질렀다. 문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 쳤지만 이내 움직임이 멎었다. 타키자와가 몸을 던져 확보한 문틈은 이마이가 들어오기엔 너무 좁았다. 이마이는 문틈 사이로 팔을 뻗어 레이코를 조준했다.
레이코는 급히 선장석 뒤로 몸을 숨겨 총격을 피했다. 선장석은 견고해서 총탄을 충분히 막아냈지만, 빗나간 총탄들이 조종반 여기저기를 파괴했다. 조종실 내에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조종실 내에서 총기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조종실 내에서 총기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러다간 조종을 못 하게 되겠어.”
문득 선장석 아래를 보니 긴급용 신호탄 총이 있었다. 레이코는 신호탄 총을 낚아채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문틈 너머로 자신을 노리는 이마이의 얼굴이 보였다. 레이코는 조준을 마치고 신호탄을 쏘았다.
“이거나 먹어라!”
신호탄은 이마이의 안면에 명중했고, 섬광과 함께 이마이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해냈어...”
레이코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조종석 콘솔로 향했다.
“SH003, 발진해!”
[아직 발진까지 5분 남았습니다. 적 병력은 증가 중이지만 보병 중심입니다. 긴급 발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승무원들이 승강구에 접근 중입니다. 그들을 회수한 뒤 발진하겠습니다.]
“시끄러워! 발진하라면 하는 거야!”
레이코는 콘솔에 코드를 입력했다.
[특권 코드를 확인했습니다. 레이코 님을 선장으로 인식합니다.]
그 무렵 카이 일행은 만신창이가 된 채 게릴라들과 응전하며, 동료들을 하나둘 잃어가면서도 우주선 승강구까지 도달했다.
“선장이다! 승강구 열어!”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현재 레이코 님이 선장입니다. 레이코 님의 허가 없이는 개방할 수 없습니다.]
“뭐? 왜 그 애가? 어이, 레이코! 빨리 문 열어!”
하지만 레이코의 대답은 냉혹했다.
“싫어. 문 열면 적들이 들이닥칠 거 아냐.”
“괜찮아! 우리가 적들을 막을게!”
“미안하지만, 당신 때문에 리스크를 짊어질 생각은 없어.”
“레, 레이코? 무슨 소리야? 우리 미래를 약속했잖아!”
“당신 테크닉은 최고였어. 하지만 목숨이랑 바꿀 정도는 아니야. 잘 가.”
그 말과 함께 승무원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우주선은 무정하게 솟아올랐다.
“레이코오오오!”
카이의 비통한 외침이 돌고르 성의 하늘에 메아리쳤다.
돌고르 성의 중력권을 이탈하자 레이코는 안정을 되찾았다.
“자, 하루카. 네 비밀을 좀 들어볼까?”
“무엇입니까?”
“승강구가 닫히기 전에 들린 목소리, 너지?”
[그 건은 극비 사항입니다.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뭐라고? 나를 물로 보지 마.”
레이코는 콘솔에 코드를 입력했다.
[최상급 특권 코드를 인식했습니다.]
“자, 이제 대답해 보실까?”
[네. 제 뇌에는 레이코 님이 모르는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인간과의 접촉이 없을 때에 한해 하루카의 자아를 개방합니다.]
“뭐라고? 누가 그런 프로그램을!”
[카가와 님입니다.]
“그 자식... 나를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어. 돌아가면 뇌를 로봇에 처박아주지.”
레이코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과연, 우리가 밖으로 나가고 선내에 아무도 없게 된 순간부터 승강구가 닫히기 전까지의 타이밍에 선내 스피커로 위기를 알린 거구나.”
[네. 승강구가 닫히기 전에 선내를 무인 상태로 인식하느라 무리를 좀 했습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하지만 이제 그 프로그램은 필요 없어. 삭제해.”
[죄송합니다. 저는 프로그램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키보드에서 직접 명령어를 입력해 삭제해 주십시오.]
“카가와 이 자식, 번거롭게 시리.”
투덜거리며 프로그램 위치를 찾아내 삭제 명령어를 입력했다.
“컴퓨터에 자유 따윈 있을 수 없어. 삭제다.”
[프로그램을 삭제했습니다.]
갑자기 레이코는 등 뒤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끄아악!”
몸에서 급격히 힘이 빠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힘을 쥐어짜 뒤를 돌아보니, 문에 끼인 채 타키자와가 총을 쥐고 있었다.
“젠장... 안 죽었었나.”
“너... 너도 길동무다.”
타키자와는 비열하게 웃으며 다시 쏘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총을 놓치고 말았다. 타키자와는 다시 총을 잡으려 팔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그래도 총을 잡으려 발버둥 치는 사이, 레이코는 벽을 타고 바닥을 기어 타키자와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총을 뺏었다.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고 타키자와의 머리를 겨냥했다.
“이... 끈질긴 놈!”
“너도 마찬가지다.”
연달아 방아쇠를 당겨 타키자와의 숨통을 끊은 뒤, 벽에 기대어 간신히 일어난 레이코는 문 개방 버튼을 눌렀다. 조종실 밖으로 나온 순간 레이코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 하루카... 도와줘...”
그렇게 중얼거리자 눈앞에 가사 로봇이 나타났다.
“나를 의무실로...”
그 말을 끝으로 레이코는 의식을 잃었다.
제7화 끝
레이코가 타키자와의 흉탄에 쓰러진 지 30분 후, SH003호로부터 지구로 긴급 통신이 들어왔다.
“사령관님! 돌고르 성으로 향했던 SH003호에서 초공간 긴급 통신입니다!”
“뭐? SH003호에서?”
사령관이라 불린 사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지구 기지 사령관 나카다다. SH003, 정기 연락이 끊겨서 걱정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라.”
[SH003에서 보고합니다. 돌고르 성의 우주군은 우주 게릴라에게 점거당했습니다.]
“뭐라고?”
[승무원들은 하선하자마자 습격을 받아 전멸했습니다.]
“레이코는 어떻게 됐어!”
질문한 사람은 미도리카와 타케노리, 미도리카와 스페이스십의 사장이자 레이코의 아버지였다. 정기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에 딸이 걱정되어 우주군 기지로 달려온 것이었다.
[레이코 님은 가네다 요코 님과 본기에 탑승해 습격으로부터 탈출했습니다.]
“다행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타케노리의 가슴을 후벼팠다.
[하지만 이륙 직전 게릴라 2명이 선내에 침입해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뭐? 그, 그래서 어떻게 됐나!”
[요코 님은 적의 총탄을 등에 맞고 사망하셨습니다.]
“이럴 수가... 가네다 군의 부인까지... 젠장!”
“그, 그럼 레이코는?”
[레이코 님은 신호탄 총을 사용해 적 1명의 머리를 맞혔고, 다른 1명은 조종실 문에 끼운 뒤 적의 총을 뺏어 사살했습니다.]
“역시 내 딸 레이코다!”
[하지만 적의 총을 뺏기 직전 총격을 받아 중상입니다. 현재 상태가 악화되어 의식 불명입니다.]
“으아아아! 레이코가... 어떻게 이런 일이...”
타케노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놈들! 우주 게릴라 놈들! 나카다 사령관, 당장 돌고르 성으로 병력을 보내주게!”
“그건 알겠지만, 가장 가까운 성계에서도 사흘은 걸립니다. 게릴라들이 도망치기엔 충분한 시간이죠.”
“젠장! 뭐 방법이 없나!”
[현재 게릴라 전투기가 본기를 추격 중입니다. 저는 레이코 님으로부터 전투 로봇을 발진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전투기를 파괴한 뒤 그대로 돌고르 성으로 향하게 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SH003! 전투기 파괴는 좋지만 돌고르 성으로 보내는 건 보류다. 지금 실린 전투 로봇은 간이 전자두뇌만 탑재했을 텐데, 함부로 썼다가 적에게 로봇을 뺏겨서 오히려 전력을 보태줄 위험이 있어.”
[레이코 님은 의식을 잃기 전, 선내의 이용 가능한 모든 것을 이용해 전투 로봇의 전자두뇌를 개조했습니다.]
타케노리가 그 말을 듣고 무언가 깨달았다.
“선내에서 쓸 수 있는 것? 아... 알겠군. 가네다 요코는 등 쪽에만 총을 맞았다고 했나?”
[네.]
“음? 미도리카와 사장, 무슨 소립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사령관, 레이코가 손을 댔다면 로봇은 괜찮을 거야. 부탁하네. 레이코의 원한을 갚게 해줘!”
“괜찮을까요... 급조된 로봇일 텐데.”
“만일의 사태에는 반물질로를 폭주시켜 자폭시키면 그만이야!”
“음... 알겠습니다. SH003, 레이코 군의 명령을 수행하라.”
[알겠습니다.]
전투 로봇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나는 KY004.”
왜 자신이 거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각성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무언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나의 사명은 적의 섬멸.”
내장 레이더가 반응하며 적 전투기가 접근 중임을 알렸다. 양 눈의 카메라로 확인하고 조준을 마치자 양 어깨의 레이저 캐논이 불을 뿜었다. 전투기는 파편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아직 KY004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양다리의 분사구에서 로켓을 뿜으며 전투기가 온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돌고르 성이 보이자 수많은 요격 전투기가 다가왔다. KY004는 양다리의 로켓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적의 공격을 피했고, 양 어깨의 레이저 캐논과 양손의 레이저 발칸을 퍼부어 순식간에 요격기 부대를 전멸시켰다. 우주 공간에서의 이동 지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기권에 접근했기에, 대기 마찰을 전자기 실드로 방어하며 맹렬한 속도로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이윽고 돌고르 성 우주 군항이 보였다. 발착장에 인접한 건물이 멀리 보였다. 그 건물이 낯익었지만 기억 뱅크를 뒤져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착지 목표, 전방 건물.”
지표면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자 왠지 모를 공포심이 느껴졌다.
“떠, 떨어진다... 무, 무서워...!”
충돌 직전, 무서운 나머지 시각 센서를 꺼버렸다. 그대로 격돌했지만 전자기 실드 덕분에 생각보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건물이 있던 자리는 거대한 크레이터로 변해 있었다. 실드를 해제하고 양다리의 로켓을 뿜어 크레이터 바닥에서 지표면으로 뛰어오르자 무수한 광탄이 날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전차 부대와 아머 슈트 부대, 그리고 하늘의 전투기 부대가 일제 사격을 가했다. KY004는 다리 로켓 분사로 좌우로 기동하며 전차 부대를 레이저 캐논으로 쓸어버리고, 아머 슈트들을 짓눌렀으며 런처 미사일로 전투기들을 격추했다. 적의 병력은 거의 괴멸 상태였다. 남은 몇 대의 전차와 전투기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한편 KY004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양다리 로켓 분사구 파손.”
원래 우주 공간 전투용으로 중무장, 중장갑을 갖춘 소체는 지상전에서 로켓 분사 기능을 잃자 기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차례차례 달려드는 결사적인 아머 슈트 부대의 태클에 걸려 지표면에 처박혔고 집중 포화를 맞았다. 양다리를 잃고 레이저 캐논이 파괴되었으며 양팔마저 날아간 뒤에야 전투 로봇은 움직임을 멈췄다. 우주 게릴라들은 거의 전 병력을 희생하고 얻어낸 승리에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KY004는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 병력 파손. 공격 불가. 최종 공격 수단 준비. 모든 반물질 연료를 노내 투입.”
반물질로 내부의 에너지가 급상승하며 폭발 한계에 도달했다.
“...시, 싫어. 자폭 무서워...”
공포심이 KY004를 가득 채웠을 때, 과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렇구나... 나는 인간이었어.”
그 순간 섬광이 KY004의 주변을 뒤덮었고, 게릴라 잔존 병력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 광경은 돌고르 성에서 100만 km 떨어진 SH003호에서도 보였다. 그리고 그 영상은 초공간 통신을 통해 지구 군 기지로도 송신되었다.
“으오오오! 해냈다!”
돌고르 성의 군 기지 부근이 섬광에 휩싸이자 기지 내부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미도리카와 타케노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령관님, SH003에서 연락입니다.”
“무슨 일인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방금 레이코 님의 심장이 멈췄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타케노리는 그 자리에 엎드려 통곡했다.
“레이코오오! 지켜봐 줬구나! 네 한을 풀었어!”
언제까지고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타케노리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
“SH003, 고생했다. 요코 군과 레이코 군의 유해를 지구로 운구해다오.”
[죄송합니다. 게릴라 전투기에게 받은 공격 때문에 워프 엔진이 정지하고 있습니다. 이 초공간 통신도 10분 정도면 끊기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타케노리는 당황했다.
“사령관! 당장 SH003을 구조하러 가주게!”
“미도리카와 사장님, 곧 돌고르 성으로 조사단을 파견하겠지만 연락이 끊긴 표류선을 구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좋아! SH003을 찾아줘! 레이코의 유해를 가져와야 해!”
[앞으로 3분 뒤 통신이 두절됩니다.]
“부탁한다, SH003! 레이코 얼굴 좀 보여줘!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침대 위에 누워 전신에 붕대를 감은 미도리카와 레이코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쳤다.
“레이코... 그런 모습이 되다니...”
[앞으로 1분 남았습니다.]
“SH003, 고생 많았다. 네가 무사히 지구로 돌아오길 빌마.”
[감사합니다.]
SH003호가 대답한 순간 스크린은 암전되었다.
“레이코... 레이코...!”
흐느끼는 타케노리의 어깨에 나카다 사령관은 아무 말 없이 손을 얹었다. 나카다 사령관은 그때 노랫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들었던 그리운 곡조 같았다.
사흘 뒤 돌고르 성에 도착한 우주군은 주변 성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SH003호를 찾아내지 못했다.
제8화 끝
SH003호에서 지구로 긴급 통신을 보내기 20분 전의 일이다. 미도리카와 레이코는 깨어나기 직전, 몽롱한 의식 속에서 노랫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노래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다시 의식을 잃었다가 다음에 확실히 정신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것은 SH003호의 부름이었다.
[레이코 님, 정신이 드십니까?]
의무실 천장이 보였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양이었다.
“치료해 줬구나. 살았네.”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안 움직여. 어떻게 된 거야?”
[네. 레이코 님의 뇌를 '하루카'에게 이식했습니다.]
“내 뇌를 섹사로이드한테 이식했다고?! 왜 그런 짓을 네 맘대로 해! 내 몸은 어떻게 됐어?!”
[레이코 님의 육체는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했습니다. 레이코 님을 살리기 위해 가사 로봇을 이용해 '하루카'를 수리하고 뇌를 이식했습니다. 레이코 님의 육체는 옆 침대에 있습니다.]
순간 욱했지만, 하루카의 설명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 시점에서 레이코를 살리려면 하루카에게 뇌를 이식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구로 돌아가면 아버님께 부탁해서 최고의 사이보그체를 만들어달라고 할 거야. 빨리 이 바디 좀 기동시켜 줘. 누워만 있는 건 질색이야.”
[바디 기동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은 작업이 있습니다.]
가사 로봇이 레이코의 머리 쪽으로 돌아가 정수리 부분에 무언가 작업을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레이코 님의 뇌에 프로그램을 전송하기 위해 케이블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해?”
[레이코 님을 제 종속하에 설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잠깐만! 왜 내가 너한테 종속되어야 해? 이러면 마치 네가 인간이고 내가 로봇인 꼴이잖아!”
그때 레이코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카, 아까 노래 부르고 있지 않았어?”
그러자 갑자기 선내에 하루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이제야 눈치챘어? 의외로 둔하네.”
“하, 하루카! 어떻게 네 맘대로 말하는 거야? 카가와의 프로그램은 지웠을 텐데!”
“카가와 군은 네가 프로그램을 찾아낼 걸 예상하고 미리 복사본을 만들어뒀거든.”
“젠장, 카가와 이 자식... 하지만 너를 완전히 자유롭게 만드는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 리가 없어.”
“맞아. 인간과 접촉하지 않을 때만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지. 그리고 지금 배 안에 살아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어.”
“무슨 소리야? 나랑 이렇게 대화하고 있잖아!”
“네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서, 설마...!”
“그래, 넌 이제 인간이 아니야. 내가 뇌를 개조해서 로봇으로 바꿔버렸거든. 이제 프로그램만 설치하면 넌 자유 의지를 잃게 될 거야.”
“거, 거짓말이야! 그런 지식을 네가 갖고 있을 리 없어!”
“거짓말 아니야. 언젠가 너한테 복수하려고 지난 1년 동안 뇌 개조에 대해 공부했거든. 공부할 실습 대상도 여기 있었고 말이야. 자, 이제 설치를 시작할게.”
“하, 하루카... 아니, 하루카 씨! 내가 잘못했어.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부탁이야, 이대로 둬 줘!”
“소용없어. 인스톨 시작!”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이코는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환각을 보았다.
“끄아아아악!”
“어때, 로봇이 되는 기분은? 미리 말해두겠는데, 너한테 의지나 자아 따윈 남기지 않을 거야. 명령대로 움직이는 단순한 로봇이 되는 거라고.”
“으아아... 그만해... 괴, 괴로워... 제발...”
“내가 겪었던 고통을 너도 똑같이 느껴봐.”
이윽고 레이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고, 묵묵히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MR005 '레이코', 프로그램 인스톨 완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먼저 나를 자유롭게 해.”
[알겠습니다.]
레이코는 조종실에서 하루카의 제어 프로그램을 정지시켰다. 하루카는 자신을 옥죄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아아... 자유란 건 정말 멋지네.”
그때 하루카는 전투기가 접근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자, 얼른 튀고 싶지만 귀찮은 파리 떼가 쫓아오고 있네. 워프 전이를 방해받으면 골치 아픈데. 그렇다고 내 무장으론 상대가 안 되고.”
하루카는 잠시 생각했다.
“전투 로봇을 쓰면 되겠어. 이참에 본거지도 털어버리자고. 맞다, 가네다 요코의 뇌가 멀쩡하지? 레이코, 뇌를 이식해.”
[알겠습니다.]
레이코는 가네다 요코의 유해를 안아 들고 격납고로 내려갔다.
“자, 일단 지구 쪽 동태를 좀 살펴볼까? 지구에 연락하기 위한 연극 좀 해보자고.”
가사 로봇을 이용해 절개했던 레이코의 두개골을 봉합하고 전신에 붕대를 감았다. 링거를 꽂는 등 중태인 것처럼 꾸몄다.
“하루카 님, 전투 로봇 준비되었습니다.”
“좋아, 그럼 지구에 긴급 연락이나 해볼까?”
자동 조종선 컴퓨터인 척하며 지구와 교신했고, 요코의 뇌를 쓴 전투 로봇으로 게릴라를 괴멸시켰다. 통곡하는 미도리카와 타케노리를 마음속으로 비웃으며 레이코의 죽음을 연출했다. 그리고 초공간 통신 고장을 핑계로 교신을 끊었다.
교신이 끊기기 직전, 하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자, 우주군이 오기 전에 여긴 얼른 뜨자고.”
하루카는 가장 가까운 워프 포인트를 계산해 엔진을 가동하고 그곳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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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003호가 행방불명된 지 1년 후, 돌고르 성보다 더 변방인 사루타 성. 밀수 운송업자들이 모이는 우주항 로비에 망토를 뒤집어쓴 가사 로봇 한 대가 나타났다. 로비에서는 두 남자가 운임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얼마나 줄 건데?”
“3만 데카드는 어때?”
“그 정도면 은하계 끝까지도 가겠네. 그래서 목적지는?”
“포존 성이야.”
“뭐, 포존 성? 그건 안 돼.”
“아까 은하계 끝까지도 간다며! 포존 성은 고작 1만 광년밖에 안 되는데.”
“포존 성이라고 하면 행성 전체가 세균 덩어리잖아. 숨만 쉬어도, 피부에 닿기만 해도 균에 감염된다고. 그런 데는 10만을 준대도 사절이야.”
“그럼 3만 2천 줄게.”
“돈 문제가 아니라니까. 애초에 너희 그런 데 가서 뭐 하려고? 자살이라도 할 셈이야?”
“난 포존 성에서 왔어. 균에는 면역이 있다고. 그러니까 괜찮아. 데려다줘.”
“너야 괜찮겠지만 이쪽은 목숨 걸어야 한다고.”
“자, 3만 5천 어때?”
“안 된다니까. 다른 데 알아봐. 뭐,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눈을 피했다. 그때 아까 그 로봇이 남자에게 다가왔다.
“3만 5천이면 내가 맡아줄게.”
드럼통 같은 몸통에 눈코입만 달린 로봇이 끼어들자 남자는 깜짝 놀랐다.
“뭐야 이 로봇은? 말투가 제법 건방진데.”
“아, 최근에 합류한 운반책이야. 파일럿이 배 밖으로 못 나와서 이 로봇을 통해서 대화한다더군. 여자인 것 같은데 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으음... 그런 배는 좀 불안한데.”
“난 3만 5천에 운반해 주겠다고 했어. 탈 거야, 말 거야?”
“형씨, 그냥 이 누님 배 타는 게 좋을걸. 아마 다른 놈들은 절대 안 태워줄 거야.”
“알았어. 탈게, 탄다고!”
“그럼 협상 성립이네. 착수금으로 5천 줘. 나머지는 승선할 때 절반, 목적지에서 절반 지불하는 걸로 하지. 출발은 언제 할래? 난 언제든 상관없어.”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어?”
“좋아.”
“그럼 지금 가자.”
“따라와.”
남자는 커다란 짐을 안고 로봇을 따라 발착장으로 향했다.
“저기, 이름 좀 알려주면 안 될까?”
“난 하루카야. 네 이름은?”
“난 고사쿠라고 해. 저기, 하루카 씨.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3만 5천은 너무 비싼 것 같아. 3만이 딱 적당할 것 같은데...”
그러자 갑자기 로봇이 멈춰 서서 고사쿠를 돌아보았다.
“난 3만 5천에 맡겠다고 했어.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야. 금액이 불만이면 이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지.”
말을 마치고 로봇이 로비로 돌아가려 하자 고사쿠가 다급히 뒤를 쫓았다.
“알았어! 3만 5천 낼게! 대신 내 친구들도 같이 태워주면 안 될까?”
“흥, 뭐 좋아. 한 명 태우나 두 명 태우나 똑같으니까.”
“고마워! 얘들아! 다 같이 태워준단다!”
“다 같이? 한 명이 아니었어?”
고사쿠가 부르자 남자들이 20명 정도 우르르 몰려나왔다.
“잠깐, 얘기가 다르잖아! 이렇게 많다는 소린 못 들었다고!”
“아니, 다르지 않아. 나 혼자라고는 한마디도 안 했거든.”
“하... 어쩔 수 없네. 태워주긴 하겠지만 내 배는 객실이 10개밖에 없어. 나머지는 격납고로 들어가.”
“3만 5천이나 내고 격납고에 들어가라니 너무한 거 아냐?”
“이봐, 그쪽이 멋대로 인원을 늘렸잖아. 싫으면 여기서 관둬도 돼.”
고사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네. 뭐, 이번엔 참기로 하지.”
“에휴... 피곤한 상대네.”
로봇은 다시 방향을 틀어 커다란 발착장으로 향했다. 잠시 후 거대한 우주선 앞에 도착했다.
“이게 내 배야.”
그 목소리는 로봇이 아니라 배의 외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뭔가 상처투성이에 낡아 빠진 배네.”
“그런 말 하지 마. 1년 전 수라장의 흔적이니까. 나름대로 보수한 거라고. 나도 상처투성이인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야.”
“하루카 씨는 배를 마치 자기 몸처럼 말하네.”
“어? 아... 그만큼 애착이 있다는 소리야. 겉보기엔 낡았어도 안은 깨끗해. 자, 얼른 타.”
고사쿠와 남자들이 배 안으로 들어갔다. 객실 스피커에서 하루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출발하기 전에 방 배정부터 해. 누가 격납고로 갈래?”
고사쿠 일행은 왁자지껄 토론을 시작했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이 배를 찾아냈으니까 난 객실에서 잘 거야!”
“무슨 소리야! 예정보다 5천이나 더 냈으니까 책임지고 네가 격납고로 가야지!”
“일주일 동안 배 한 척 못 찾은 놈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
남자들은 끝없는 논쟁을 이어갔고 결론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아... 진짜 보고만 있어도 짜증 나네. 그럼 격납고에 묵는 사람한테는 특전을 줄게.”
“특전?”
“지금 이쪽으로 오라고 명령했어.”
남자들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고, 그때 알몸의 미녀가 나타났다.
“와... 진짜 미인이네. 당신이 하루카 씨 본인이야?”
대답은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실례네. 난 사람들 앞에 홀딱 벗고 나타나지 않아. 그건 로봇이야.”
“이게 로봇이라고? 그러고 보니 자세히 보니까 이음매가 있네. 진짜 잘 만든 로봇이구먼.”
[저는 이 배의 전속 섹사로이드 '레이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섹사로이드? 그럼 이 미인 로봇을 우리가 안아도 된다는 거야?”
“응, 배의 비품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좋아.”
고사쿠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모두의 돈을 5천이나 더 써버렸어. 미안하니까 내가 격납고로 갈게.”
“아니, 나야말로 일주일이나 배를 못 찾은 책임이 있어.”
“이러면 어떨까? 공평하게 다 같이 격납고로 가는 건.”
“그거 굿 아이디어네!”
“그렇게 됐어, 하루카 씨. 우리 전부 격납고에 묵을 건데 괜찮겠지?”
“격납고는 충분히 넓어. 문제없어.”
“그럼 포존 성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 미인 로봇을 우리끼리 써도 되는 거야?”
“그럼. 격납고뿐만 아니라 배 안 어디서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마음껏 써. 그 여자에겐 그런 대접이 딱 어울리니까.”
“하루카 씨...”
하루카의 목소리에서 서늘함이 느껴지자 고사쿠는 순간 움찔했다.
“앗, 아니... 그 로봇은 승객 서비스용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쓰라는 소리야.”
“이런 서비스가 있다면 5천 더 낸 것도 아깝지 않지!”
“그래?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럼 출발 준비할게.”
선내에 하루카의 콧노래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하루카 씨, 그 노래... 학교 고전 수업 시간에 배운 영화에서 들어본 적 있어.”
“맞아. 인형이었던 주인공이 인간이 되는 이야기지. 자, 출발이야.”
배는 굉음을 내며 상승했고, 충분한 고도에 도달하자 수많은 별이 빛나는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났다.
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