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그림 신청했던 거 보고 떠올라서 적어보는 조잡한 글입니다.
역시 최근에 책을 안읽었더니 필력이 떨어지는 것이 분명한 것이에요.
그래도 간만에 장문의 단편을 쓰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읽고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
처음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저 새로운 직장을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생각이였다.
이전 저택에서 일하던 주인일가는 정말로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금수들이였으니까.
별 트집트집을 잡아 나와 동료들에게 모욕과 폭력을 가한 회장.
그리고 일 못한다면서 임금을 적게적게 주는 거지같은 부인에, 틈만나면 주머니에 있는 물건과 속옷을 슬쩍하는 자식새끼들, 그리고 무능하면서 다 나한테 짬처리 시키는 2명의 좆같은 선배들까지.
그때 안 미치고 2달 간 무사히 일한 끝에 사직서를 낸 게 용할 지경이였다.
그래도 고진감래라고 하던가.
운 좋게도 어느 산골짜기의 저택에 지원한 면접에서 단 번에 붙어서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된 것이였다.
이번 저택의 주인은 안경을 쓴 멋들어지고 깔끔한 차림의 남성으로, 혼자서 살아감에도 언제나 활기가 넘치면서도 꼼꼼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였다.
내가 면접 중에 허를 여러 번 찔렸음에도 붙은 게 수상할 정도로...
"어서오십시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와서 저를 위해 일해주시게 되다니, 정말로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새로 들어오신 당신께서 이 곳에서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근무와 행복이 가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안내는 특별한 신입이신 당신을 위해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도록 하지요. 다른 메이드분들을 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 저택의 주인인 제가 있는 이상, 주인으로써 고용인에게 성의와 아량을 배푸는 것이 도리이니까요.
그러면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또각또각또각.
은발의 주인과 뒤에 따라가는 신참의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릴 때마다, 시야에는 여러 풍경이 지나간다.
과거의 화려한 복장을 입었던 흑백의 할아버지와 우아한 귀부인.
그리고 복도 위에 있는 화려한 장식품과 조각상...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야,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너무 한 눈을 판 나머지 주인의 등에 얼굴을 박아버리다니.
이러면 나쁜 인상이 생길텐데...
이러다가 한 대 쥐어박힐 거 같은데....
"일단은, 이 방을 한 번 살펴보시겠습니까? 이곳이 당신이 오늘부터 묵을 방입니다."
너, 넘어간다고...?
아무 말 없이...?
거기다가 저 가지런하고 깔끔한 개인침실이 나의 방이라고?
예전에는 매트릭스들만 있었던 끔찍한 막사같은 곳이였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이제서야... 내가 자리를 잡을 곳이 생긴 걸까...
"어라, 무슨 일이신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 생각이 나서요. 정말 좋은 방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차근차근 일하실 곳들을 살펴보시죠."
--------------------------------------------------------
"자 이걸로 전부 살펴보셨는데... 어떠셨습니까?"
"정말로... 이곳에서 일하게 된 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우리 저택은 고귀하기에 모두가 좋은 환경에서 의무를 다하며 존중받고 편안하게 있기를 바라니까요.
그래서 아까 드린 일과표대로... 내일부터, 청소, 빨래와 설거지, 서재 정리 작업은 잘 하실 수 있겠죠?"
"네! 물론입니다!"
그야 당연하지. 이전에 있던 곳은 하루 4시간 자고 일어나서 식사준비에 빨래에 설거지, 청소, 개 산책, 주인 가족 목욕에 별의별 지랄을 다 소화하던 만큼 많이 경험치가 쌓였을테니까.
"그러면 오늘은 여기 계신 메이드분들과 인사하는 걸로 끝내도록 하지요."
주인의 지시와 함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뭔가 마치 딱딱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하러 오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새로 오신 분이군요, 저는 안젤라라고 합니다. 저는 요리와 원예, 재봉 담당입니다."
"저는 첼시, 의료와 정비 담당이에요. 만약에 아프시거나 고장난 전등 같은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신입이시군요, 저는 소라, 당신과 같은 일을 담당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필요하면 맘놓고 이야기 해요."
"신입씨, 어서와요, 면접때 저 기억하시나요? 제니라고 해요. 사슬낫으로 저택 뒤에 있는 주말농장과 저택 전반을 관리하고 주인님을 보조하는 메이드장이랍니다."
"앗... 저는... 에리라고 합니다. 오늘 새로 일하러 왔네요... 아하하... 잘 부탁드려요..."
"궁금한 거 있으면 저 분들께 물어보세요. 친절하고 다정하신 분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은 내일부터니까, 오늘은 편하게 둘러보면서 이야기해보시길 바래요.
아 참, 메이드분들, 신입 분께 너무 부담주거나 심한 농담은 하지 마시지요."
"네, 주인님."
--------------------------------
그렇게 주인님이 떠나시고 다섯 메이드들만이 남았다.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뭔가... 말을 해야할 거 같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뭐라고 말해야 좀 분위기가 나아질까...?
"저, 저기..."
"아, 에리씨, 혹시 이전에 일한 경험이 있으셨었나요?"
"네? 네... 있었죠... 정말 많이... 말도 못할 정도로 힘들었거든요....
저택 사람들은 때리고 욕하고, 심지어 속옷하고 물건도 훔치고... 선배분들은 저한테 짬처리 시키고..."
"세상에... 정말로 끔찍한 곳에서도 열심히 일하시다니..."
"하지만 여기는 그런 것 없이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니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힘들면 언제든지 우리들에게 얘기해요. 에리씨도 틀림없이 여기서 행복하게 일하실 거에요.
좋은 경치에 좋은 환경, 그리고 훌륭한 주인님 밑에서 일하는 성실한 메이드로써 일하니까요!"
"우리들도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지만, 결국 적응했어요, 당신도 몇 일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적응할테니 긴장풀어요."
"...다들 고마워요."
이렇게 엄청난 환대라니...
단 한 번도... 지금까지 받아본 적 없는 환대와 친절에 눈가에 물기가 맺히고, 이윽고 얼굴을 타고 흐느낌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정함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 없었으니까.
그저 사무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라고만 여겼던 것을 내가 받으니까 많이 어색하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신참씨. 오늘은 푹 쉬는 거에요. 안 좋은 걸 전부 떨쳐버려요. 그리고 우리 저택에서의 행복함으로 채우는 거에요.
오늘 새로 오신다고 신경써서 정리하고 청소했으니까, 여느때보다 편안할거에요."
"저번 계셨던 곳보다 좋은 곳이니까~ 너무 '에리'하게 신경이 곤두설 필요 없어요 힘빼요~"
아.
이런 재미없는 개그는... 질색인데.
힘이 빠진다.
그래도 긴장 풀라고 하는 거니까 쉬는 것도 좋겠지.
"다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슬픔을 떨치고, 기쁨과 희망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
내 새로운 개인침실에 들어서자, 아까보다 더 인상적이고 편안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포근한 침대가 앞으로의 일하게 될 신입 메이드를 유혹하고 있었다.
옷장에는 매우 희고 빛나는 메이드 유니폼과 다양한 상황에 맞는 종류의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깔끔하고 철저한 주인에 그 메이드들일까.
또 메이드의 각종 취미들을 생각해 방 곳곳에 인형과 책, 그리고 필기구들을 비롯한 여러가지들이 놓여있었다.
곳곳에서 이름모를 낯선 신입을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났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준다니... 고맙다 못해 너무 부담스러워서 이런 호의를 받기가 꺼려질 정도다.
"아 참, 내일 일할 때 갈아입을 시간이 길어지면 보기 안좋을테니까... 미리 입어둬야겠다."
옷장 속 옷걸이에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메이드 유니폼 하나가 새 주인 손에 의해 내려지고, 주인과 하나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주인의 것이였다는 듯이 정말로 잘 맞는 사이즈로 입혀졌다.
"체형하고 키는 내가 이야기 안했는데... 엄청 꼼꼼하게 준비해둔 걸까..."
풀썩.
드르릉...
자안의 갈색 메이드가 침대에 눕자 구름같은 편안함이 그녀를 반겨준다.
'마치 구름 위에서 자는 느낌이야.'
그녀는 매우 긴 시간이 지난 끝에 처음으로, 깊고 편안한 잠에 들었다.
머리카락은 자유롭게 풀어 헤쳐진채로 그녀의 편안함과 윤기를 빛내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의 따스한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을 알리듯이, 기상을 알리는 합초 소리가 저택에 울려퍼졌다.
에리는 이에 맞춰 빠르게 기상해 방문을 나섰다.
하지만 다른 여느 때와 다르게, 그녀에게는 엄청난 활력과 개운함이 가득하였다.
적어도, 이전에 그곳에서 일할 때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리라.
"역시 편안한 침대에서 자서 그런지, 정말로 편안하네. 거의 몇 년 만에 정말 상쾌하고 개운한 기분이랄까."
에리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좋은 일이였다.
첫 날부터 능숙하게, 자신있게 일을 해낼 수 있는 호재였으니까.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
"그건 거실로 오시면 됩니다, 에리씨."
주인이 불쑥 튀어나와 에리를 놀래켰다.
"깜짝이야! 주, 주인님? 언제 여기에...?"
"오, 그새 적응하신건가요? 빠르시군요 에리씨. 우리 저택 사람들은 날이 밝는대로 전부 모여서 이야기하는 전통이 있었거든요.
에리씨도 참석하셔야 하겠죠."
"우음... 부담되긴 한데..."
에리의 표정에는 부담감이 역력했다, 이전의 기억들이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사라질리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에리에게 심정의 변화가 생겼는지 느끼던 부담감은 일순간에 새로운 기대로 바뀌었다.
"그래도 좋아요! 주인님과 선배분들과 이야기하는 건 기대가 되는 일이니까요."
-----------------------------------------------------------------
저택의 복도에는 다른 메이드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실을 향해 걷는 두 명의 존재가 있었다.
저택의 주인이자, 철저한 사내와, 어제와 달리 힘차고 빠른 발걸음을 옮기는 메이드가 있었다.
메이드는 다른 한 눈을 팔지 않고, 앞을 주시하며 주인과의 적당한 보폭을 유지하며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어제 밤 동안 어떠셨습니까? 이상한 건 못느끼셨나요?"
"정말로 이상할 정도로 편안하고 포근한 잠을 잤던 거 빼면 모르겠습니다."
"뭐 몸에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으신가요?:
"아니요, 오히려 전보다 좋아진 느낌이에요. 침대의 힘일려나요.
컨디션이 좋아져서 뭐든지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 느낌."
"그리고 메이드복도 뭔가 잘 맞아서 기분이 좋아요."
"새로 오시는 에리씨를 위해 안젤라씨께 특별히 부탁한 특제 메이드복이랍니다."
"안젤라씨의 재봉실력은 어느 인간도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아테나 여신마저도 질투할지도... 모르지요."
어느덧 길을 걷다 보니 둘은 거실에 다다랐다.
화려한 샹델리제와 난로에는 불이 힘차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메이드들은 주인이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자리를 잡고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침 티 타임이 필요하십니까? 차를 내올까요?"
"물론이지요. 각자 원하시는 차를 말씀해보시지요."
"허브티."
"모두 허브티인가요? 좋습니다. 그러면 허브티로 부탁드리죠. 에리, 원하시는 차가 있습니까?"
에리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좋아하는 차라니.
차만 내올줄만 알고 마셔본 적이 거의 없는 불쌍한 영혼에게는 그런 질문은 아직 외딴 곳의 다른 나라 이야기였을 텐데.
"정말로 다른 종류여도 되니 뭐든지 말씀해주세요."
"벤츠."
메이드장의 너저분한 농담에 다들 웃음바다가 되었다.
주인 빼고.
"메이드장님, 솜씨는 여전하시군요."
"재미가 별로였었나요?"
"아니요, 조금만 더 했다면 저도 평정심을 잃고 폭소할 뻔했습니다. 덕분에 재미가 있었군요."
주인이 에리를 처다본다.
이제 결론을 말해야 한다.
"....저, 저는..."
에리는 고민하다 표정이 밝아지더니 "허브티로 하겠습니다."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허브티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젤라."
"네, 주인님. 3분 후에 내올게요."
"너무 서두르지는 마시죠."
"물론입니다. 결코 실수할 일은 없을테니까요."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라, 에리의 마음 속에 불안이 다시금 피어오른다.
여기도 결국 완벽한 것과 실수를 좋게 보지 않는다는 걸까.
매우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는 에리지만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자, 그러면 오늘의 아침 대화를 시작해보죠."
주인이 운을 떼자 에리를 제외한 메이드들이 주인에게 초점을 맞추며 집중하기 시작한다.
"늘 있는 반복되는 대화긴 하다만 늘 제게 신경써주시는 모든 메이드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쑥스럽습니다..."
"그러면 다들 어제 밤 동안 불편한 점이 없었는지, 오늘은 어떤 업무를 집중적으로 수행할 것인지 차례대로 말씀해주세요."
주인의 질문을 기다렸다는듯이 전부 술술 폭포의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첼시는 아침 이후에는 전력점검을, 오후에 있을 정기적인 간단한 검진을 준비한다고 이야기하였고, 소라는 아침 식사 이후에는 거실을, 점심 식사 이후에는 앞마당 청소를, 저녁에는 서재 청소를 하겠다고 이야기 하였다.
제니는 다른 메이드들의 업무를 감독하고 보조해주겠다고 이야기 하였고, 주인은, 오후까지 외출하고, 돌아와서는 서류 업무를 보고, 밤에는 에리와 함께 책을 읽겠다고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안젤라가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허브티입니다. 늘 그렇듯이 훌륭한 맛이니 음미해보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안젤라. 그러면 오늘 안젤라가 하시려는 것들을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화가 끝난 직후, 아침 식사를 준비할 것이고, 식사 이후, 주인님의 외출 준비를 보조할 것입니다.
이후 점심 식사를 준비하며, 식사 직후에는 주말농장의 작물들에 물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이후에는 휴식을 취할 것입니다."
"잘 들었습니다 안젤라.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우리들의 귀감으로써 행동해주시는 것에 대해 모두들 감사해 하고 있을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이제 에리의 차례가 왔다.
"에리씨, 오늘은 새로 오신 신입 메이드로써 무슨 일들을 할 건가요?"
"음... 어..."
에리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다른 동료들은 전부 술술 이야기 하는데 혼자만 이야기가 잘 안나오려 하였으니.
어쩌면 이 망설임과 고민이 자신에게 호의와 기대를 배푼 주인과 다른 메이드들을 실망시킬까 두려웠다.
에리가 망설이자, 주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간다.
"오늘은..."
---------------------------------------------------------------------------
"오, 첫날이신데도 자세한 일정 제시라니. 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군요. 에리씨가 무사히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
뭐였지. 방금 기억 필름이... 끊어졌던 거 같은데.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걸까...?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이상한 느낌이 자꾸 들지?
오한이 서리고 붕뜨는 느낌이.
"그러면 다들 각자 맡은 일과를 열심히 해보시길 바랍니다. 파이팅."
"네!"
"아... 네."
"에리씨, 오늘은 저와 같이 조를 짜서 같이 청소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따라와보실까요?"
"네...? 아, 아... 네."
----------------------------------------------------------------------
생각보다 의외로 일은 힘들지 않았다.
예전같았다면 기진맥진했겠지만, 어째선지... 밤까지 일하는데도 기운이 넘친다.
아직도 더 일할 수 있을 거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솓구치고 있었다.
새로운 동료들과도 합이 매우 잘맞고 대화하는 내내 즐거웠다.
다만 걸리는 것이... 이 저택에는 '메이드들만이 있다는 것'과 '메이드들이 나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매우 숙련된 솜씨를 가졌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여기 오고나서부터 나도 힘이 이상할 정도로 넘치고 일을 훨씬 잘하게 된 것도 뭔가 많이 이상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잘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여기서 일하신 게 언제부터였나요?"
"15년 6월 17일부터 일했어요. 그때 신참이였었는데 이제는 제법 짬이 좀 차서 당신에게 일을 가르치고 있네요."
"세세한 것까지 기억을 하시네요?"
"물론이죠~ 주인님의 저택에서 일하는 것은 제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일인데 어떻게 잊겠어요!"
"그리고 에리씨, 오후 9시쯤에 주인님과 서재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있었으니 이 일 끝내고 서재로 가세요."
"네."
주인님이 나를 왜 서재로...?
아직 신참일 뿐일텐데.
서재로 간다면 명확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제 시간 내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리씨."
서재는 생각대로 매우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는 곳이였다.
책들도 한뼘의 차이도 없이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어 두려움을 자아냈다.
"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건가요?"
"그야, 이야기를 해보기 위해섭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메이드분들께 전해들어서 흥미가 생겼으니까 말이죠.
아, 물론 이기적으로 듣기만 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저의 이야기도 들려드리도록 하죠.
그러면 이 책상에서 마주보며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좀 많이 듣기 힘드실 거에요."
"괜찮습니다. 다 전해들었으니."
나는 다시금 끔찍했던 일터의 악몽을 주인에게 전해주었다.
괴팍하고 본보기로 폭력으로 화풀이하는 망나니 회장과, 별의 별 트집으로 임금을 삭감했다면서 적게 주는 악마 부인, 그리고 심심하면 내 속옷을 훔치고 치마를 들추고 도망가는 치한같은 아들놈. 화장품을 못찾겠다고 우리들 화장품과 귀걸이를 훔쳐간 좀도둑 딸래미.
무력하게 앉아만 있으면서 일은 내게 떠넘기고 훈수두는 싸가지 없는 선배들까지....
그들에게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말하면 할 수록 내게 정말 끔찍하고 악몽같은 이야기에 점점 목이... 매여온다.
"이제는... 그만.... 이야기 할게요. 더는... 생각도 하기 싫으니까."
"...정말로 얼마나 많이 힘드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여기까지 오신 것을 보면 꽤나 강인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강인하다뇨,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친 거죠."
"제가 이해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얼마나 고통받으셨는지는... 알 거 같습니다. 사람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를테니까.
그러면 저도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주인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의 보이던 이미지와 달리 그에게도 상처는 많았으리라.
"어렸을 때에는 모두가 저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더할나위 없이 자상하셨고, 어머니는 모두에게 친절을 배푸셨죠.
하지만 제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사고로 전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자, 제 밑에 있던 고용인들의 태도가 바뀌어 하나 둘 씩 제게 고압적으로 대하거나 떠나더군요.
'빨리 취업을 해서 임금을 지불할 능력을 갖춰라.'
'상속에 우리 고용인들 지분도 있다.'
'저택의 유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지분을 맡겨라.'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어느정도 맞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고등학생이였던 제게는 정말로 크나큰 압박이자 상처였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메이드들만은 여전히 예전처럼 대해주었습니다.
뒤에서 수군거릴 때에도 저를 위해 목소리를 내주시다가 저택을 나가시기도 했죠.
크고 난 후에는 메이드를 제외하고 전부 해고시켰지만, 그때 계셨던 분들은 전부 소식이 끊겨서 어떻게 지내실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그때의 상처와 고마움은 남아서 공허할지라도 실력있는 메이드들만 둬서 관리하고 있답니다.
단순히 고용하기만 해서는 배신당하니, 이곳에 충성하는 충실한 메이드들을 두는 것이 좋은 것이죠.
당신도, 이곳 사람들도...
그러니 에리씨도 이곳에 계속 남아서 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일한다라.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곳에 마음에 들지만, 상황에 따라서 이직을 하거나 사정이 생기면 그만둘 수도 있지 않을까...?
섣불리 대답을 못하겠....
"대답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주인님과 끝까지 함께할게요. 주인님만이 허락하신다면 저는 불길 속이라도 얼음 속이라도 기다릴 거에요. 영원한 기다림에 휩쌓일지라도 치룰 수 있는 대가라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 내가 이런 말을...?
오늘 아침부터 종종 나도 모르게 이상한 행동과 말이 나오고 있는 느낌이다.
정말로 내가 왜 이럴까...
"아, 그러면 저는 이만 피곤해서 일찍 들어가보겠습니다."
"벌써 가시는건가요? 아쉽지만 다음에 또 이야기 드리죠. 내일 또 봅시다."
---------------------------------------------------
또각또각또각또각.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진다.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피곤함을 간직한 채로.
어제와 다르게, 아침과는 다르게, 저택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두려움과 혼란으로 바뀐 메이드의 걸음걸이였다.
쾅.
혼란함 속에 메이드는 행동거지를 잊고 사춘기 소녀처럼 문을 닫고는 방에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오늘 대체 내가 마음에도 없는 걸 하고 있지?'
'분명히 편한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저택 사람들이 친절한데 왜 이리 소름이 끼칠까?'
"....역시, 괜한 불안이겠지...? 후우우..."
"차분해지자, 차분해지자고."
"스트레스 때문일거야. 지금은 그냥 편하게 생각해보는거야... 편하게...."
신참 메이드는 불안함을 가라앉히고 다시 어제처럼 침대에 몸을 배며 눕는다.
어제처럼 포근한 구름같은 편안함에 그녀는 불안감과 함께 사르르 녹아들었다.
--------------------------------------------------------------------
"제, 제발... 그, 그만해주세요...!"
"이런 무능한 버러지들을 봤나! 먼지 한 톨도 남김없이 쓸어내라 했거늘!
뭐? 임금을 달라고? 먼지를 남길정도로 청소도 병신같이 하는 네년들이 뭔 임금이야!
임금을 원한다면 임금을 떠받들듯이 대접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할 거 아니야!
너같은 개병신 메이드를 쓸 바엔 그냥 로봇청소기 장만하는 게 낫겠다!
무릎꿇고 빌어!
안그러면 내일 밥하고 임금은 없이 알몸으로 쫓겨날 줄 알아!"
끔찍한 기억. 악몽이였다.
싸이코 같은 회장이 지랄하던 늘 언제나의 때.
지금도 꿈 속에서도 종종 나타나서 괴롭혀대니 미칠 노릇이였다.
꿈 속에서도 이런 끔찍함을 참을 수는 없었다.
"주... 주인님...!"
나는 꿈 속을 박차고 현실로 돌아왔다.
투두둑... 끼이이익!
하지만 현실에 있었던 것은 현실보다... 더 꿈같은 세계였다.
차라리 그렇게 믿는 게 나았을까.
"이, 이게 뭐야...? 내,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경고, 움직이지 마시오, 불필요한 거동은 해당 기기의 파손과 손상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느껴졌다.
내 몸에 느껴지는 한기를... 그리고 내 몸에 이상한 선들과 전선들... 그 위에는 많은 기계장치들이 침대 밑에서 나와서 내 몸을 만지고 있었다.
"그, 그만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거야...! 원래대로 돌려놔!"
"해당 요청은 거부되었습니다. 해당 기기에는 요청 권한이 없으므로 기각합니다."
"제, 제발... 그, 그만...!"
치지직... 끼기긱.... 철컥.
계속해서 움직이려 하자 매트릭스에서 구속구가 나와 내 몸을 고정하고 벌리기 시작한다.
"하, 하지마...! 나는 이럴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그냥 임금을 받고 사람답게 사는 메이드로 오고 싶었다고...! 이런 건 원치 않았어!"
"...그런 거라면 우리 둘에게 있어 서로 좋은 건데, 이런 좋은 걸 마다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에리?"
"...그, 그게... 뭐라...고?"
주인이였다.
이 시술을 거부하려는 내가 안쓰럽다는 듯이, 이전과 달리 썩소를 짓고 나를 처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몸을 가지고도 고작 원한다는 게 '돈을 받는다'에 그친다니 정말 아깝지 않겠습니까?"
"당신, 이럴려고 나를 고용한 거였어?"
"그야, 고용하는 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까요.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거라고.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행동과 사고가 정해져있죠.
그리고 인간적인 것들을 출력해서 저를 언제나 실망시키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당신을 보고 마음에 들어 이렇게 신뢰할 수 있도록 '진화'시켜 드리는 것인데, 어째서 거부하시는 겁니까?
저의 '소유물'인 메이드 로봇이 된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함께 하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으윽.... 어쩐지 너무 잘 대해주더라... 그러면 다른 메이드들... 도?"
"역시 '에리'하시군요. 당신의 부모님께서 훌륭한 소체를 제공해주신 걸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닥쳐! 난 인간이야. 여기서 편하게 사는 것보다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가고 싶은 거라고!"
"하지만 이제는 인간의 인격을 실행하는 로봇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몸을 보십시오."
주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에리의 가슴을 간지럽힌다.
"...으읏, 하읏...!"
"이제는 주인만을 바라보는 성인용 안드로이드들처럼 주인의 손길이 없으면 불안해 하는, 감도를 느끼고 흥분하는 깡통과 다를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아직은 당신과 있으면서 재미가 있군요. 조만간 밤시중을 요청해드려도 재미있겠습니다."
"어디까지 날 가지고 놀 셈이야?"
"모든 걸 가지고 놀아야죠. 그만큼 당신을 믿고, 좋아하니. 영원히 둘 거랍니다."
"자, 당신의 몸을 직접 느껴보시죠."
덜컹.
주인은 내 팔을 분리하고는 손을 내 얼굴로 가져다 댔다.
"자, 어떤가요? 당신의 손은 인간의 감촉과 다르게 부드러운가요?"
"이런건... 내가 아니야.... 돌려내...."
"이제부터는 이것이 새로운 당신입니다.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시는 거 같은데, 이제 본격적으로 가볼까요?"
투둑... 키이익...
"경고! 정비중에 개체의 파츠 분리는 정비 효율을 급감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제 파악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목이 아파오고 숨이... 턱 막힌다. 로봇이 되었음에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 그만해 주세요... 주인님... 아라라랅락"
"이제야 좀 대화가 되어가는군요, 에리."
"자, 잘못했어요...."
툭, 머리가 분리되었다.
시야가 갑자기 높아져서 어지럽다.
"자, 당신의 몸을 보세요. 전선다발에 부품에... 이래도 당신이 사람이라니, 우습네요.
저의 소중한 메이드 로봇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까."
투두둑!
주인님이 팔을 잡아당기자 고통이 밀려온다.
"꺄아아앍아라라랅!
해당 기체의 왼쪽 팔 파츠가 손상되었스읍... 아악!"
"자, 에리, 당신은 사람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저택에 소속된 메이드인가요?"
"여, 여기... 메이드입니다..."
"잘했어요, 에리. 이제부터 똑똑히 기억해두고, 잊지않도록 해요.
여기 일원으로써 모든 것을 누리고 그에 따라 봉사함으로써 영원히 행복하게 될 거랍니다.
세상에 여기 말고는 더 좋은 데는 없어요.
지상락원도, 천국도... 여기에 비하면 평범할 뿐이랍니다.
여기에 계속 의구심을 품는 가엾은 영혼을 안심시키는 것도 저의 일.
에리, 그러면 '명령'을 한 번 해볼게요.
들어보실래요?"
아니, 듣고 싶지 않아... 제발... 하지 말아줘... 하지 마... 하지마....
"당신은 과거에 고통받으시는 걸 보니 정말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당신을 '개선'할거에요."
제발 내가 나로 있게 해 줘....
"명령할게요. 메모리에 저장된 당신의 과거 기억들, 저택에서 일하기 시작한 일부터 있었던 일들을 제외하고 전부 삭제해주세요."
"그, 명령 만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인 걸요. 기억상실인 사람도 결국 똑같은 사람이니까, 당신도 그럴 겁니다.
지우세요."
"명령을 실행합니다. 해당 메모리의 용량은 25.4GB입니다. 삭제에는 20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래, 진행하세요. 오래걸릴 만 하겠지.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기억이였을테니까.
하지만 이걸 통해서 저 용량보다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당신은 새로 태어나 함께 살아갈겁니다.
그러니 편안한 밤 되십시오, 에리."
안돼... 안돼... 사라지지 마... 기억해야 해....
이전의 기억들이 사라져간다.
그때의 부조리와 악몽... 그리고 그것들을 버텨내며 삶의 각오와 의지를 다지던 것...
옛날의 학창시절...
그리고 어렸을 때 사라진 엄마와 아빠의 희미한 얼굴...
난... 그리고...
뭐였을까?
그리고 내가 왜 아까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
이 저택의 메이드였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202X년 X월 X일에 처음 일했던 건 확실하다.
주인님을 위해 일하기로 했었고, 업무는 청소, 빨래와 설거지, 서재 정리 작업.
이 정도 기억이면 충분할 거다. 더는 궁금치 않고 저택의 주인님을 위해서 헌신할 거니까.
그것이 나, '에리'의 업무이자 목표니까.
"명령 완료, 해당 기체의 메모리를 성공적으로 삭제하였습니다."
"그 동안, 수고했습니다. 그러면 내일을 위해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새로운 모습, 기대할게요."
"취침모드로 들어섭니다. 내일의 주인님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반영하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주인님."
------------------------------------------------------------
늘 화창한 아침이다.
사람이 드물지만, 경치가 좋고, 저택은 편안하고 화려하며, 친절한 동료들이 나를 반겨주며, 훌륭한 주인님이 나를 보살펴주시니 정말로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이 순간만이 있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오늘도 잘 해내시길 바래요 에리."
"주인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활기차고 행복한 메이드의 발걸음이 복도에 울려퍼졌다.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울려퍼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