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공주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신 신게츠사이 님의 첫 투고작입니다.
'기계로 타락해가는 과정'과 '타락하는 쪽의 저항(새디스틱한 느낌의)'을 중시하고 있으며, (그게 모에 포인트라고 하네요) 과연 소녀가 어떤 식으로 기계 인형으로 변해갈지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됩니다.
연재는 총 4화 예정이라고 합니다.
***
극히 일부의 인간들만 아는 사실이지만, 인체 가공 기술은 혁명적인 진보를 이뤘다.
의수나 의족의 효율화, 경량화, 혹은 뇌에 시각 정보를 투영하는 실험 단계의 성공 따위에 기뻐하는 '양지'의 연구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거다. 그 정도로 우리 기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아니, '우리'라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겠네. 그 기술은 전부 형, 펠류가 가져온 것이니까.
"무슨 일이야, 규. 피곤하면 좀 쉬어도 괜찮아."
지금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어온 사람이 내 형, 펠류다.
별건 아니고 그냥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인데, 형 눈에는 내가 피곤해 보였나 보다.
"아무것도 아니야, 형."
"그래?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하고."
나와 펠류 형은 열 살이나 차이 나는 형제다. 형은 줄이 달린 안경을 쓰고,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지만, 올백으로 넘긴 백발 때문에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걸 신경 쓰고 있다. 참고로 서른 살. 외모는 꽤 괜찮은 편인데 여자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형은 이것저것 나를 잘 챙겨준다. 나로서는 그게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다.
내가 형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건 아니다. 형은 그냥,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다. 조만간 알게 되겠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하듯, 형의 진료소는 북쪽의 외딴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에서 차로 몇 시간은 달려야 나오는 작은 부락, 이른바 인구 소멸 지역이다.
그런 곳이지만, 몇 안 되는 의료 기관이라 주변 노인분들은 다 우리 진료소로 오신다. 덕분에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다.
내 업무는 주로 접수와 수납.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기서 돕기 시작한 지 벌써 1년. 이제야 겨우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부업'에 관해서는 아직 초보나 다름없지만.
"다녀왔어! 아~ 오빠다! 저기, 일 벌써 끝났어?"
짧은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방한복 때문에 몽글몽글하게 부풀어 오른 작은 소녀가 신이 나서 진료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접수처로 달려오더니 카운터 너머로 내 소매를 붙잡고 해맑게 웃는다.
"있지, 밖에 나가자!"
"피나, 왔니. 미안하지만 아직 일하는 중이야. 같이 못 놀아줘."
거절당하자마자 방금까지의 밝은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항의하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치~ 모처럼 눈도 오는데…."
밖은 어젯밤부터 계속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작년 겨울에 질리도록 눈을 본 나에게 이 광경은 우울할 뿐이다.
반면 피나에게는 한 명이라도 더 놀 상대를 찾아 뛰어다녀야 하는 일생일대의 이벤트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이벤트를 열기는 쉽지 않다. 이 근처에는 피나 또래가 아예 없으니까. 학교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나 걸리고 길도 험해서, 눈이라도 오면 외출은 꿈도 못 꾼다.
그래서 곁에서 놀아줄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일을 팽개치고 눈싸움을 하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도 오고 하니까 일찍 닫을 것 같아. 그때 놀아줄게."
"약속이야? 그럼 나 먼저 간다~!"
"아, 잠깐만. 몸은 괜찮아? 어디 이상한 데 없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피나는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아, 그게… 눈 때문에 몸이 차가워지진 않았나 해서."
"응? 완전 멀쩡해!"
"그래, 그럼 됐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구. 다녀오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나는 들고 있던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은빛 세계를 뚫고 나갈 기세로 튀어 나갔다. 그 활기찬 모습에 내가 품고 있던 걱정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후우."
"규, 방금 피나였니?"
소란을 들었는지, 형이 진료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응, 피나야. 너무 평소랑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
"그런 모양이구나. 나도 기쁘네."
그 말만 남기고 형은 다시 진료실로 들어가 버렸다. 형은 진료가 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대개 진료실에 틀어박혀 '부업'에 매진하곤 한다.
마지막 환자까지 다 보고 나서, 나는 피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
"아, 코타츠다! 히히, 신난다!"
밖에서 꽁꽁 언 몸을 녹이려는지, 피나가 코타츠 속으로 쏙 뛰어들었다. 이 집에는 파묻힌 형태의 코타츠가 있어서 피나 정도의 체구라면 통째로 들어갈 수 있다. 눈 속에서 떨다 온 아이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겠지.
하지만 코타츠의 선객은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얘, 피나. 버릇없게 그게 뭐야. 제대로 발부터 넣어야지."
"치, 추워서 그런 건데 어떡해. 어쩔 수 없잖아."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무라자 피나가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주인공은 발밑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익숙한 듯 훈계를 이어갔다.
"그런 게 안 된다는 거야. 피나는 맨날 애처럼 굴더라."
"흥, 어차피 애 맞거든요~!"
피나가 코타츠에서 얼굴을 쏙 내밀자, 똑같이 생긴 소녀가 불쾌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정말, 얼굴만 내밀지 마."
"꺄악! 도플갱어다! 나 죽어~!"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쌍둥이잖아…."
'정말 이 애는 못 말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쌍둥이 언니, 세라피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던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무 말도 안 하는 나한테도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그 시선을 피하려고 나는 변명하듯 피나를 꾸짖었다.
"아, 아… 그래. 피나, 예의 없게 굴면 안 되지."
"흥! 언니랑 다르게 오빠는 하나도 안 무섭거든~!"
"나를 무서워해 주다니 영광이네. 무서우면 예의 바르게 행동해!"
"네에…. 으으…."
그 후 형까지 합류해서 우리들의 시끌벅적한 식사가 시작됐다.
"피나, 채소도 먹어야지."
"에이…."
젓가락질 같은 사소한 것까지 지적하는 피타와, 그걸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피나의 소란스러운 전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 둘이 집에 온 뒤로 조용한 식탁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혼자 지내던 학생 시절이 가끔 그리워질 정도다.
"채소를 안 먹으면 키 안 커. 머릿속까지 애로 남으면 피나도 나도 곤란하단 말이야."
"하지만 언니는 수프밖에 안 마시잖아. 언니도 키 안 크겠네."
"나는 몸이 아프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피나는 안 아프니까 쑥쑥 컸으면 좋겠어…."
"으… 미안해."
병 이야기가 나오면 피타는 항상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이런 말다툼의 대부분은 그런 피타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피나가 져주면서 끝이 난다.
사이가 좋은 자매지만, 피타가 유독 어른스럽게 굴려고 해서 그런지 속을 터놓고 대화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아니야,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
밤 8시. 잠들기엔 꽤 이른 시간이지만, 이 쌍둥이는 이 시간이면 잠자리에 든다. 이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우리의 '부업'을 수월하게 하려고 그렇게 만든 거다.
"규, 옮기자. 도와줘."
형의 재촉에 나는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진 피나를 진료소 뒤편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차고가 있고, 수많은 잡동사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 차고 아래에 우리의 작업장이 숨겨져 있다.
작업장은 몇 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실험실, 연구실, 작업실, 수술실로 쓰인다.
이렇게 피나를 데려올 때는 항상 수술실을 사용한다.
"오늘은 조정만 하면 끝날 테니까 어제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지."
나는 평소처럼 컴퓨터를 켰다. 화면에는 피나의 전신상과 내부 구조가 나타났다. 일부를 제외하면 깨끗한 인간의 그것이다.
"다행이다, 에어(Air)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어. 성공했네."
에어라는 건 형이 발견한, 인격을 결정짓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고 한다. 이게 많으면 인간에 가깝고, 적으면 기계에 가깝다.
"이걸로 안 됐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기술이 다 쓰레기가 될 뻔했어."
검사는 계속됐고, 어제 수술이 성공적이었다는 걸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 작업이라 서툰 탓도 있었지만, 어제 수술이 잘 됐는지 너무 불안했으니까.
●
"좋아, 아직 잠들어 있어. 규, 뇌파계는?"
"불안정하긴 한데, 한계치를 넘지는 않았어. 와, 뇌 활동이 한 번도 안 멈추다니… 대단하다."
"나도 놀랐어. 혼수상태에서 이렇게 잘 된 건 처음이거든."
유리창 너머 방에서 형이 누워 있는 피나의 드러난 뇌를 만지고 있다.
애용하는 책 모양 수술 키트에서 꺼낸 케이블들이 여기저기 연결되어 있고, 핀셋으로 전극을 정교하게 심고 있다.
몇 달에 걸쳐 서서히 세포를 변질시킨 뇌는 원래의 색을 잃고, 석유처럼 탁한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탄소 소재의 인공 뇌세포로 교체하면 이런 색이 된다. 심어진 수많은 제어 장치와는 또 다른, 기묘한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도 모른 채 잠든 듯 평온한 얼굴을 보니 현기증이 났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깨워보자."
"어, 깨운다고?"
나는 당황했다. 처음 듣는 소리이기도 했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수술을 한다는 게 거부감이 들었다.
"당연하지. 뇌를 '멈춘 채로' 사고나 기억 처리가 가능할 줄 알았어?"
"……."
"나 혼자 할 테니까 넌 거기서 지켜보기나 해."
그 말만 하고 형은 피나의 뇌에서 기구들을 떼어냈다. 길게 뻗어 있던 수많은 케이블이 백과사전 크기의 박스 안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들어갔다.
그리고 유독 굵은 케이블 하나를 꺼내 방금 설치한 커다란 잭에 연결했다.
"너는 처음이지? 잘 봐둬라, 볼만할 거다."
소름이 돋았다. 작업을 완수했다는 고양감과 형의 그지없이 즐거워 보이는 웃음소리 때문에.
"자, 일어나라. PX07."
PX07은 피나에게 부여된 형식 번호로, 일곱 번째 퍼소네이터(P) 시작형(X)이라는 뜻이다. 나는 '제로 세븐'이라고 부른다.
"음, 아… 어?"
피나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초점 없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 느슨했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인다.
잠이 덜 깬 피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녀석은 아침잠이 많아서, 환자인데도 일찍 일어나는 피타한테 맨날 혼나곤 했지.
"어라, 여기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피나는 주변을 살피려 하지만, 목 아래로는 움직이지 않아서 눈동자만 허망하게 좌우로 굴러다녔다.
이 방에 거울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있었다면, 검은 뇌가 훤히 드러난 자기 모습을 본 피나의 고통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컸을 거다.
어차피 지워질 기억, 적어도 고통스럽지 않게 상황도 모른 채 끝났으면 좋겠다.
"…어라, 오빠?"
유리 너머로 지켜보는 나를 발견했는지, 잠이 덜 깬 눈으로 나를 부른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PX07, 기분은 어떠냐?"
"아, 펠류 아저씨. 저기, 여기는 어디예요?"
"작은 아틀리에란다. 자, 이제 새로 태어날 시간이야."
"네? 그게 무슨… 아… 아아아아악!"
피나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 몸이 떨려왔다. 당연하겠지, 산 채로 의식이 있는데 뇌를 헤집어놓는데 안 아플 리가 없다.
몸을 묶어두지 않았다면 피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었을 거다.
"부하가 심하군. PX07, 커맨드 우선, 사고 처리 레벨 다운."
"아아아악… 으으, 아에에에에!"
형이 조작을 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아직 뇌가 제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일 거다.
눈물을 흘리며 피나는 이가 부러질 정도로 세게 악물고 있었다. 마취도 없이 뇌의 구조와 내용물이 재조합되면서,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필사적으로 견디고 있었다.
나는 몸을 움츠린 채, 몇 배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크후우우우… 이이이이이, 아아아!"
"다시 한번, 사고 처리 레벨 다운."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는지 피나는 가볍게 몸을 젖혔고, 날카로운 비명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부에우으으… 아… 오… 빠…."
피나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 빠… 살려줘… 오… 빠…."
나는 피나와 눈을 맞춘 채, 제어가 안정될 때까지 계속 서로를 바라봤다. 그 작업은 한 시간이나 이어졌고, 그동안 나는 피나의 고통을 이해하려 할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의 두근거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
"안정됐군. 규, 뇌파계는 어때?"
넋을 놓고 있던 나는 형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바늘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가끔 한계치를 뚫었지만, 뇌사 라인은 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피나는 산 채로 모든 과정을 마쳤다…. 산 채로 뇌를 난도질당하고 신경이 교체되어,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거다.
형이 일어나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방금 데이터를 보고하자 형은 기쁜 듯 피나의 검은 뇌를 쓰다듬었다.
"좋아, 성공이야! PX07, 장하다."
"아… 아우… 우…."
제어율 수십 퍼센트라고 표시된 화면보다 나는 피나를 보는 데 열중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데, 이상하게도 이 기분 좋은 감각에 젖어 들고 싶었으니까.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 형이 말했다.
"이 상쾌함, 끝내주지 않냐?"
지금껏 본 적 없는 해맑은 미소였지만, 나에게는 악마의 웃음, 짐승의 포효처럼 들렸다.
○
"축하한다, 처치는 성공적이야."
눈동자가 풀린 제로 세븐에게 형이 정말 기쁜 듯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는 건 재미없지. 애라고 해도 인사를 안 하는 건 용납 못 해."
콘솔을 꺼내 형이 무언가를 입력했다.
"고, 고마… 워요."
"말 잘 듣네."
기계에게 형은 참 다정하다. 하지만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웠다.
"이걸로 뇌는 일단락됐어. 다음은 몸을 바꿀 건데, 괜찮겠지?"
아까와 마찬가지로 형이 콘솔을 두드렸다.
"네. 부탁… 드려요."
"역시 미조정 상태라 목소리에 감정이 없군. 뭐 좋아, 다음 수술을 기대하고 있으렴."
정말로, 정말로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형은 제로 세븐의 작은 입술에 키스했다.
●
어제 일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 후 제로 세븐의 기억은 조정되었고, 그 수술과 관련된 것들은 전부 지워졌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는 제로 세븐을 보며,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 이해했다는 듯, 형은 낮쯤에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실험이 끝나면 PX07은 너 줄게."
귀중한 시작기인 제로 세븐… 피나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후로 '어떻게 하면 즐겁게 놀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꽤 잘했다고 생각한다.
조정을 마친 제로 세븐이 형의 손에 이끌려 내 앞에 섰을 때, 그 무기질적인 모습에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거 줄게."
형은 슬쩍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건네받은 건 케이블과 형이 가진 것과 똑같은 콘솔이었다.
"감정 제어 정도라면 콘솔로 충분해. 기억까지 조작하고 싶으면 그 케이블로 평소 쓰던 컴퓨터에 연결하면 되고."
말없이 받아 든 나는 "뒷정리는 내가 할게"라며 형을 먼저 보내고, 한동안 벽에 기대어 있는 제로 세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언젠가 이게 내 것이 된다.
살며시 제로 세븐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지금은 아직 심장 소리가 들리지만, 조만간 이 소리는 사라질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로 세븐을 껴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몸은 부드러웠고, 작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따뜻하네…. 곧 차가워질 텐데, 그치?"
눈을 크게 뜬 채인 제로 세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감정을 제어할 수 있다고 형이 말했다. 나는 아주 살짝 손을 본 뒤, 제로 세븐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피나 편 1 끝
퍼소네이터(Personator). 사람의 손으로 만든 사람, 사람을 연기하는 존재라는 뜻의 조어다.
사람이 사람에게 손을 대는 것이 윤리에 어긋난다는 소리를 종종 듣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생물은 긴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쌓아온 결과물 위에 서 있다.
그런 '진화'와, 사람이 직접 사람을 변화시키는 게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다녀왔어, 마스터…가 아니라, 오빠."
학교에서 막 돌아와 방한복으로 몽글몽글해진 피나가 왔다. '손보기 전'과는 다르게 목소리도 동작도 조심스럽다. 그런 조작을 하면 이런 변화가 생기는구나.
"어라, 오늘로 학교 끝이지? 별로 기운이 없네."
"그런 거 아니야…."
오랫동안 눈에 갇히는 북쪽 땅에서는 겨울방학이 제일 길다. 게다가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끊기기 때문에 부업 하기엔 딱 좋은 시기다.
꽤 오래전부터 나는 이 시간을 기다려왔다.
"아, 그것보다 이거 봐. 나 시험 점수 진짜 잘 나왔어!"
"오~."
피나가 꺼낸 건 학기말 학력 진단 테스트 답안지였다. 평소 시험보다 수준이 높아서 나도 꽤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내민 것은 수학 답안지였는데, 무려 만점이었다.
"와, 이거 대단한데! 수학 잘하는 줄은 몰랐어."
"에헤헤…."
"그런데 다른 과목은 어땠어?"
"아, 그건… 그게…."
금세 말문이 막힌다. 당연하겠지. 다른 과목은 평소랑 비슷한 성적일 테고,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닐 거다.
수학에 강한 건 그 작은 머릿속 내용물이 고성능 연산 장치이기 때문일 뿐이니까.
"아하하, 안 물어본 걸로 할게. 오늘도 일찍 끝나는데, 또 눈싸움이나 할까?"
"으응… 오늘은 됐어."
그렇게 말하면서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핀다. 무언가 망설이는 모양이다.
"응? 왜 그래?"
물어봐도 대답 없이 피나는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하고만 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트를 정리하던 내 소매를 붙잡는다. 얼굴을 붉히며 조른다.
"저기, 안아줘…."
"안아달라고? 이제 졸업한 거 아니었어? 애 취급하지 말라고 맨날 그랬잖아."
"…안 돼?"
나는 대답 대신 살며시 피나를 안아 올렸다. 두꺼운 옷을 입었다지만, 소녀치고는 꽤 묵직하다.
"음, 피나. 왜 그래?"
"……."
안아 올린 피나는 멍한 상태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말을 못 하게 된 거다. 그렇게 프로그램했으니까.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지금 피나는 내 생각밖에 못 할 거다.
이번에 손본 기능 중 하나. 내 생각을 하면 나랑 상관없는 사고는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인형처럼 얌전해진 피나를 안은 채 남은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
"피나, 괜찮아? 되게 멍해 보이는데."
피나의 상태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그대로였고, 피타가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어, 그게… 좀 피곤한가 봐. 밥도 별로 안 먹고 싶고…."
그렇게 말하면서 피나는 다시 내 눈치를 살핀다.
"식욕이 없다니, 감기라도 걸린 거야?"
"아니, 괜찮아. 잘 먹었습니다~!"
언니의 추궁을 피하려는 듯 피나는 밥을 남긴 채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 기다려 피나!"
피나를 쫓아가려 일어서는데, 그걸 제지하듯 형이 불러 세웠다.
"피타."
형이 부르자마자 피타가 내뿜는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았다.
피타는 미세하게 몸을 떨며, 두려워하는 듯, 증오하는 듯 형을 쳐다봤다.
"내일부터 검사 입원이다. 당분간 처치실에 들어가 있어야겠어."
"…네, 펠류 아저씨."
피타는 눈을 내리깔았고, 형은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어조였다. 마치 포로와 간수의 대화 같다.
보시다시피 형과 피타의 사이는 좋지 않다. 하지만 그건 형의 문제고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그게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다. 처치실에서 형과 피타가 뭘 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
평소처럼 형과 나는 피나… 제로 세븐을 아틀리에로 옮겼다.
이제 시작할 신체 개조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뇌를 바꿔놓긴 했지만, 생체일 때와 마찬가지로 섬세한 디바이스다. 목만 기계로 갈아 끼우는 식의 수술은 거부 반응이 심하게 일어나서 망가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개조는 한 부위씩 진행한다. 기계를 심고 근육이나 뼈, 내장을 떼어내는 번거로운 방식으로.
교체할 때마다 뇌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규, 이번엔 장기 작업이 될 거야. 기분 안 좋아지면 말해."
"알고 있어."
가장 먼저 시작할 건 심장 교체다. 최종적으로는 필요 없어질 기관이지만, 다른 장기 교체가 끝날 때까지는 살려둘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영양분이나 혈액이 아니라 전력으로 작동하는 생명 유지 장치가 필요하다.
제로 세븐을 벌거벗긴 채 눕혀놓고 이미 가슴을 절개해두었다. 뼈 주변 등 여기저기에 형이 깔아둔 케이블이 보이지만, 아직은 인간다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철의 심장을 심고 혈관을 연결한 뒤, 아직 맥박이 뛰는 심장을 적출한다. 여기서 뇌가 거부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진정 신호를 보내고 적응하기를 기다린다.
○
이런 지루한 작업을 계속해서 전부 끝내는 데 무려 2주나 걸렸다.
가슴이 열린 채 누워 있는 제로 세븐의 안에는 이제 예전의 싱싱한 장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곳에 있는 건 금속제 골격, 전력을 저장하는 배터리, 인간의 움직임을 재현하는 특수 모터, 탈부착 가능한 사지, 인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서만 달아놓은 위장 역할의 탱크, '놀기 위한' 인공 질과 자궁 등등.
얼굴과 모습은 어린 소녀 그대로인 피나와, 걸작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구를 가진 제로 세븐의 대비가 눈부시다.
"…이걸로 드디어 끝이다. 어때 규, PX07의 마지막 마무리, 직접 해보고 싶지 않아?"
형이 말하는 마지막 마무리란, 인간의 장기를 살리기 위해 심어두었다가 이제 역할을 다한 심장을 처리하는 것이다. 인공이라 해도 생명을 잇는 마지막 부품이다. 이걸 떼어내면 인간 세라피나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질 거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잘 가, 피나."
나는 심장을 살며시 떼어냈고, 기계가 훤히 드러난 채 누워 잠든 피나를 한 번 쳐다본 뒤,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피나의 생명은 마치 파열하듯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피나를 깨우기 위해 방을 찾았다. 쌕쌕 잠든 피나에게 다가가 살짝 흔들었다.
"피나, 아침 다 됐어."
"아… 마스터, 좋은 아침입니다."
잠이 덜 깬 피나가 나를 마스터라고 불렀다. 내 호칭 라이브러리에 마스터라는 단어를 추가해둬서 그런 걸까.
"자, 일어나."
"네, 마스터."
피나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움직임이 너무 뻣뻣해서 기름칠 안 한 공업용 기계 같았다.
뇌에 적응은 시켰지만 움직이는 요령까지는 터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목소리도 동요 때문인지, 인간의 성대를 모방했는데도 전자음처럼 들렸다.
원인까지는 모르겠지만 기계로서의 성질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콰당!
비틀거리면서도 발을 딛고 일어서려던 피나가 결국 균형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마스터, 마스… 오… 빠. 밸런서가… 왠지 어질어질해."
"하하, 잠이 덜 깨서 그래. 먼저 부엌에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네, 마스… 응, 오빠."
○
부엌에 가니 형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형, 피나 상태 말이야. 좀 너무 변했다고 해야 하나, 기계 같다고 해야 하나…. 2주나 혼수상태였으니 저런 것도 어쩔 수 없는 건가?"
"…혼수상태가 길어서 에어가 쇠약해진 거겠지. 어쩔 수 없어, 마음은 살아있는 거니까."
쿵!
큰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복도의 작은 턱에서 크게 넘어져 옆으로 쓰러져 있는 피나가 있었다.
"마스터, 각 부위 체크… 우엑, 기분 나빠요… 조정해, 주세요."
그 모습을 보던 형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분명 예상했던 것보다 피나의 인간성이 많이 상실됐기 때문일 거다.
"형, 뇌가 아직 안 깨어나서 그럴지도 모르니까 하루 정도 지켜보자."
○
밤이 되자 잠이 깼는지 아니면 익숙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피나의 목소리와 움직임은 꽤 매끄러워졌다.
"오빠, 따뜻해~ 헤헤헤헤~."
그래도 멍한 건 여전해서, '나에게 호감을 품는다'는 프로그램이 앞서버린 건지 딱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저기 피나, 좀 떨어져 줄래?"
"네, 마스더더더더… 싫어, 떨어지기 싫어어어어… 가, 피…."
내 말에 혼란을 겪고 있다. '규의 명령에는 따른다'는 프로그램과 인격이 충돌하고 있는 거겠지.
기억 자체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을 텐데 되게 위태로워 보인다…. 에어가 쇠약해진다는 게 이런 건가?
"규, 그 기능 한번 써볼래?"
"어?"
그런 모습을 아쉽다는 듯 보던 형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당황했다.
"그 기능이라니, 왜 갑자기? 테스트도 아직인데."
"충격 요법이라는 거지. 자기 이상조차 인식 못 할 정도면 PX07은 실패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충격 정도라면 단말기로도…."
"아쉽지만 단말기로는 그 아날로그 신호를 만들기가 힘들어. 애초에 데이터가 없거든. 아니면 너는 어린 소녀는 싫은 거야?"
나는 오늘 밤에라도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하지만 역시 부끄럽다고 할까… 내가 아틀리에에서 할 테니까 형은 여기서 기다려줄래? 끝나면 부르러 올게."
"그거야 상관없지. 천천히 즐기다 와."
○
좁고 어두컴컴한 수술실 불을 켠다. 기기들은 정리되어 있고 널찍한 처치대는 테스트하기에 딱 좋다.
피나의 몸에는 인간의 신경을 모방한 전달 조직이 심어져 있어서, 닿는 감촉, 온도, 자극 같은 것들을 아날로그 소스 그대로 뇌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말단 부품을 구성하는 금속도 미세한 전하를 분산시키는 게 아니라 한곳으로 통하게 하는 특수한 것을 썼다. 이 때문에 포인트에 전달 조직을 배치하면 센서 없이도 내부 마모, 단선이나 손발의 탈부착부터 나사 하나까지 자기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원래는 몸의 이상 부위를 민감하게 감지함과 동시에 인간과 똑같은 '통증'을 느끼기 위한 시스템이지만, 이번처럼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다.
"피나, 스스로 옷 벗어."
"어, 목욕은 여기서 안… 양해했습니다… 어, 라?"
피나는 당황하면서도 내 앞에서 옷을 벗어 내려갔다.
다 벗은 걸 확인하고 형이 준 선물, 휴대용 콘솔로 지시를 입력한다.
"시그널을 라우팅하지 말고 다이렉트로 감각 중추 E에 보내도록 세팅."
"어, 이게 뭐… 설정 변경을 수행합니다. 잠시… 아우, 어라라?"
작업대 위에 앉혀놓고 준비가 될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이걸로 컨버터에서 신호를 디지털로 변환하지 않고 그대로 뇌에 전달되어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다.
참고로 감각 중추 E라는 건 주로 쾌락을 느끼는 부분이다.
역시 이 작업에는 의구심을 느끼는지 피나의 반응도 달라졌다. 아날로그 신호라는 건 뇌를 깨우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안녕 피나, 되게 멍해 있었는데 괜찮아?"
"네, 마… 응, 오빠. 뭐지, 오늘 왠지 엄청 멍했는데 이제야 좀 개운해진 것 같아."
정신을 차려보니 본 적 없는 방이라 당황스러운지, 입을 벌린 채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어라, 왜 나 벗고 있어? 저기, 여기 어디야?"
"피나 전용 진료소야. 여기서 둘이서만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어, 그게… 하우으."
피나의 볼이 붉게 물든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형의 솜씨에 감탄하며 나는 살며시 입을 맞췄다.
"하우, 야, 응!… 음음…?"
약간의 저항은 있었지만 쾌락의 도움 때문인지 피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입술은 달지도 시지도 않다. 겉모습은 인간의 것이라도 촉감은 감촉 좋은 연질 고무, 딱 그 정도다.
이런 곳에까지 감각 신경을 통하게 할 수 있다니, 형의 기술력에 경외심마저 든다.
"아…? 뭐지, 관절 쪽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느끼고 있는 거야. 피나 나이에는 잘 모르겠지만."
"?"
고개를 갸웃하며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몸짓이 귀엽다.
관절 쪽이 간지러운 건 당연하겠지. 어려운 얘기는 제쳐두고, 관절 신경은 구조상 과민해져 있어서 느끼기 쉽다.
그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양다리 사이를 살며시 자극했다.
"야, 왜 그런 데를… 아니, 간지러워…."
피나의 접합부는 특별 제작품이다. 모양은 어린 소녀의 그것이지만 내용은 '즐기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느낄 수 있는 소질은 충분할 거다.
"기분 좋을 거야. 아날로그 데이터에 의한 영향을 보고해."
"데이터 해당 없음, 신호가… 저릿저릿하고 기분 좋… 아니, 머리가 이상해, 싫어…."
쾌락과 공포가 동시에 찾아와서 그런지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개조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적응시킬 필요가 있겠다.
나는 합성 섬유로 만들어진 인형의 일부분을 부드럽게, 정말 부드럽게 자극했다.
"허용량을… 아우우, 으햐아!"
천천히, 천천히 감각을 익히게 하는 작업은 즐겁다. 미지의 쾌락에 당황하는 모습, 프로그램과 마음의 싸움, 하나하나 지켜보는 게 기분 좋다.
"하아아, 아히이… 가, 가가…."
그것도 이제 끝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제로 세븐이 절정에 도달할 수 있는지 형한테 물어보는 걸 깜빡했다. 폭주나 고장의 위험은 없을까?
나는 곧 걱정을 떨쳐버렸다. 치명적인 위험이 있다면 형이 경고했을 테고, 나 스스로도 어떻게 될지 궁금하니까.
피나는 아까부터 계속되는 괴롭힘에 이제 못 참겠다는 기색이다. 내 팔을 뿌리치지는 않지만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나는 합성 섬유로 만들어진 질 깊숙한 곳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오… 빠… 뜨거워, 이제 그만… 삐이이!"
파직! 슈우우….
눈에서 불꽃이 튀는가 싶더니 제로 세븐의 모든 접합부와 해치가 열리고 금속 부분이 드러났다.
여기저기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고, 특히 머리 부분은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 불꽃을 내뿜던 눈은 빛을 잃었고, 자세히 보니 안쪽이 타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눈을 교체해야 할 것 같다.
"강제 냉각 모드로 이행했습니다. 냉각 장치 작동 중."
제로 세븐이 아니라 제어 장치에서 안내 방송이 나온다. 그렇군, 절정은 열폭주이고 회피 수단으로 냉각하는 거구나.
자, 이제 형에게 감정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자. 힘없이 수술대 위에 쓰러진 제로 세븐을 남겨두고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
"이상하네, 형 어디 갔지…."
집에 돌아오니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도 밖에도 없다.
평소에는 들어가지 않는 '피타의' 처치실이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봐도 케이블이나 개조할 때 쓰는 기계들만 널브러져 있을 뿐 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피타도 없잖아."
분명 형은 피타를 데리고 나갔거나, 도망친 피타를 쫓아간 거겠지.
하지만 곤란하게 됐다. 나는 아직 간단한 유지보수밖에 못 하는데, 만약 이대로 형이 돌아오지 않으면 제로… 피나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형, 대체 어디로…."
피나 편 2 끝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이 딱 맞다.
이미 저지른 일을 나중에 후회해봤자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인데, 지금 내 상황이 바로 그렇다.
형이 있을 때는 피나 조작법 익히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내부 구조나 메인터넌스 같은 관리 기술 배우는 걸 뒷전으로 미뤘다.
그게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형이 없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걸 이제야 후회하고 있다.
"오… 빠… 가가가."
재생 중인 라디오를 바닥에 떨어뜨린 것 같은 소리와, 철이랑 플라스틱을 태운 듯한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난다.
요즘 제로 세븐의 이상 증세는 모니터를 볼 필요도 없을 만큼 확실하다.
"젠장, 이것도 안 되는 거야!"
작업대에 놓여 있던 건 실링(권총형 주사기)을 집어 들고 이미 비어버린 카트리지를 낚아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약을 채워두는 건데. 그렇게 생각해도 이미 늦었다.
약품 선반에 달라붙어 목표 카트리지를 찾아낸다. 빨간 라벨에 긴 경고문과 'DANGER'라는 글자가 적힌 병이다.
"이걸로 안 되면 끝이야!"
얼른 실링에 끼워 넣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경련하는 제로 세븐… 피나에게 달려든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듀랄루민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소녀를 보니 등골이 서늘해지지만, 이 정도로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머리를 움켜쥐고 뒤통수 쪽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면 외피가 슬라이드 되면서 인젝션 포트(주입구)가 노출된다.
거기에 건 실링 끝을 밀어 넣자 찰칵 소리가 났다.
"피각, 피가가."
"피나, 미안해!"
눈을 감고 나는 실링의 트리거를 끝까지 당겼다.
가슈욱!
"가부우! ……."
유기 소재를 사용한 컴퓨터를 초기 상태로 되돌릴 수 있지만, 인간의 뇌에는 전혀 배려가 없는 약품. 초기화액이라고 부른다.
어떤 전기적 에러도, 몽롱함도, 생각도, 어쩌면 기억까지 호텔 시트처럼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독한 약이다. 이 녀석 앞에서는 어떤 마약도 명함을 못 내민다.
원래는 바이오 컴퓨터의 에러를 강제로 진정시키는 용도라는데, 퍼소네이터가 감당 안 될 때를 대비해 형이 준비해둔 거다.
인격이 사라질지 아닐지는 반반, 가능한 한 사용을 피할 것. 이런 주의사항과 함께.
이런 걸 써서 마음이 유지될까? 애초에 이런 상태라면 제로 세븐 본체도 오래 못 버티는 거 아닐까?
…나는 '피나와 제로 세븐' 둘 다 원했는데, 둘 다 가질 수 없는 건가?
"젠장!"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실링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먼지 쌓인 의자에 주저앉았다.
좀 쉬어야겠다.
눈앞의 인형은 옆으로 밀어두고 작업대에 엎드려 눈을 감는다.
그 후로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한테도 물어봤지만 차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형의 신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기술을 가지고 몇 년이나 자취를 감췄고, 최근에도 이런 시골에 숨어 살았으니까 "누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다.
그 뒤로 몇 주 동안 나는 이런 식으로 피나 정비를 계속하고 있다.
한동안은 괜찮았다. 대단한 메인터넌스를 안 해도 동작이 안정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날이 갈수록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결국 인격 기동까지 에러가 나기 시작했다. 오작동을 일으켜서 날뛰거나 팔다리가 빠져버리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 피나를 고치려고 매일 분투하는 나는 지쳐 있다. 이렇게 차갑고 딱딱한 책상 위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잠들 수 있을 정도로.
그래도 같은 자세로 있는 건 힘든 일이다.
뺨이 아파서 고개를 돌리니 피나에게 박힌 유리구슬이 이쪽을 향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전원이 꺼져 있어서 멍하니 내 얼굴을 비추고 있다.
왠지 비난받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 매일 이랬으니까 조금은 쉬게 해줘."
눈을 피하고 팔에 얼굴을 묻어 숨겼다.
걱정거리는 산더미지만 졸린 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변명하며 잠들기로 했다.
○◆○
재기동 시작.
로 레벨 컨트롤 시스템 기동.
제너레이팅 파워… 안정.
메인 프로세서 & 램(RAM)… OK.
어시스트 시스템… OK.
하드 메모리… OK.
오토메이션 시스템 기동… 에뮬레이션 개시.
…
시각야 오픈. 에뮬레이터 기동….
파직!
PX07 기동. 음, 음아….
어라, 나 뭐 하고 있었지…. 이력 참조, 최종 기동 로그 58시간 24분 17초 전부터 자고 있었네. 너무 많이 자면… 슬립 모드 유지에 의한 기동 장애는 없습니다, 라고 하니까 신경 안 써도 되는 건가.
'영차…? 어라, 으쌰, 으쌰…??'
일어나려고 했는데 뭔가가 걸려서 못 일어나겠다.
이상해서 몇 번이나 몸을 끌어당겨… 삐비비빅! 디바이스 접촉 불량 확인. 원인을 제거하십시오.
'삑, 보호를 우선하여 원인 제거를 시작합니다.'
불량 디바이스는 복부 전원 공급 파이프, 확인하…겠습니다. 배에 있는 케이블을 내 팔이 건드려서 제너레이터에서 빠질 뻔했다.
손을 치워야지….
'…어?'
내 배가 없어졌다. 아니, 그게 아니… 외장이 벗겨져 있습니다. 기구 손상 우려 있음, 외장을 장착하고 해치를 닫…아?
'저기, 이거….'
내 배 속을 들여다보고 손을 넣어 안쪽에 있는 기계를 만져본다. 차갑고 딱딱… 가피잇!
"음, 뭐야… 피나!"
'으으으으으….'
이상을 눈치챈 규는 절연 장갑을 끼고 쇼트가 난 PX07의 팔과 내부 배선을 떼어냈다.
'비비… 삑, 심각한 에러로부터 회복되었습니다.'
기능 회복을 확인하고 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후~ 깜짝 놀랐네. 정신 차려보니 배에 손을 쑤셔 넣고 있질 않나. 왜 그랬지…."
규는 PX07의 머리와 연결된 컴퓨터 화면을 전환해 행동 로그를 불러왔다.
PX07 내에서 처리된 정보가 말이 아니라 디스플레이 위에 글자로 표시된다.
【에뮬레이터 기동 후, 스탠드얼론 프로그램의 제어를 받아 매니퓰레이터(손 역할을 하는 장치)를 복부로 이동. 그 후 로그 소실되었습니다.】
규는 스탠드얼론 프로그램, 즉 피나의 의지가 작동해서 자기 몸을 만지려 했다는 걸 이해했다.
"후우, 타이밍 안 좋게 깨어났네. 어디 보자…."
콘솔을 조작해 규는 다시 피나의 의지를 깨울 수 없는지 시도한다.
'삐빅삑, 에뮬레이터 재기동… 기동했…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마스터가 있었다. 잘 보기 위해 파인더를 조정한다… 파인더가 뭐지?
잘 보이게 된 마스… 오빠는 기쁜 표정을 짓고 있다.
"다행이다, 다시 깨어나서 기뻐."
'오빠… 나 어떻게 된 거야?'
"응? 아, 조금 쇼트가 났었나 봐. 이제부터는 조정 중에 몸 움직이면 안 돼?"
'네, 마스터… 그게 아니라 배. 왜 안 아파? 그리고 이건….'
내 질문에 마스터는 싫은 기색 없이 바로 대답해줬다.
"그건 피나가 퍼소네이터라서 그래. 외장이 벗겨지거나 몸이 기계로 되어 있는 건 당연한 거야."
'퍼소네이터… 네, 저는 퍼소네이터 시작형 7호기, PX07입니다.'
"후후, 착하네."
오빠는 다시 기쁘게 웃는다. 하지만 나는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퍼소네이터라는 건 로봇이야?'
"음, 비슷하려나. 피나, 퍼소네이터가 뭔지 대답해봐."
'삑, 퍼소네이터는 인간의 몸을 소재로 사용한 차세대형 로봇입니다.'
"그런 거야."
'로그 참조… 나는 인간, 로봇… 왜? 왜 로봇이 된 거야?'
"왜냐니, 나랑 형이 개조했으니까 그렇지. 몰래 한 거라 피나는 모르겠지만."
…
'왜…?'
"이유? 그런 건 딱히 없어. 굳이 말하자면 형이 하던 일이고, 나도 흥미가 있었으니까… 정도?"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응? 뭐라고 했어?"
'싫어어어어어어!'
피나인 PX07은 복부에서 케이블을 뜯어내고 그대로 작업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바람에 대량의 전기가 기계화된 뇌로 흘러 들어갔고, PX07의 사고를 혼란에 빠뜨렸다.
가기기기… 지, 지시가, 로그… 싫, 어. 도망, 쳐… 실, 행.
'메m e 명령을 실행합니다.'
PX07은 일어나더니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일어나 움직일 때마다 나사와 금속 조각을 흩뿌리며 규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
"어, 야 피나! 기다려! 명령 들어!"
'메, 실… 대기 모드….'
미쳐버린 피나에게 규는 문 너머로 소리친다.
"왜 도망친 거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로, 그… 소, 실. 불명… 입니다.'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당장 문 열고 나와!"
"명령… 실…."
하지만 복부를 다친 PX07에게 지시를 수행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대답이라도 하듯 끊어진 배선이 파직파직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 스터….'
○◆○
"…?"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 뭔가 미지근한 액체가 닿았다.
따뜻하고 냄새는 없는데 옅은 녹색을 띠는 액체… 피나의 냉각수다. 설마….
"야 피나, 대답해!"
흔들듯이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피나가 망가져 버린 건가?
"에잇!"
문고리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발길질을 했다. 싼 합판으로 만든 문은 쉽게 부서졌고, 불꽃을 튀기는 피나의 모습이 틈새로 보였다.
안에는 버려진 인형처럼 누워 있는 피나. 복부의 알람 램프가 깜빡이고 있다.
얼른 처치실로 옮기려고 피나를 들어 올리자 접합부 유압 장치에서 기름이 샜고, 툭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뿌리째 뽑혀버린 사지가 화장실 바닥 위에 떨어져 있었다.
"이상 발… 마스, 터… 마, 스터…."
나는 처치실로 달렸다.
○
그 후 피나는 도무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약품을 주입하고 부하를 줄이려고 필수 부품 말고는 다 떼어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전원을 끌 수는 없다.
이건 내 해석이지만, 에어라는 건 컴퓨터 입장에서 보면 전기적 에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형은 인간으로서의 기능도 기계로서의 기능도 멈추지 않았고, 가급적 깨어 있는 상태로 두는 걸 선호했을 거다. 의지 제어를 최대한 피한 것도 분명 그래서겠지.
그걸 내가 뇌를 제외한 인간 쪽 기능을 전부 멈춰버렸다. 그래서 뇌 이외의 기계에 인계되어 있던 에어—전기적 에러가 전부 소실되어 버린 셈이다.
이제 피나는 기계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인간인 피나와 기계인 피나, 둘 다 갖고 싶다.
더 이상 피나의 기능을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
뇌로 전기를 공급하는 기계를 감시하고, 계속해서 결함을 호소하는 부품들을 신속하게 교체했다.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작업에 매달려 피나의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일주일 뒤.
온몸은 쑤시고 의식은 몽롱하고 눈은 침침하고 손은 떨린다.
사다 놓은 드링크제는 바닥났고 약품 선반에 있던 정력제로 겨우 작업을 이어가는 상황이다.
체력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
"기가가가가."
제로 세븐은 입을 열기는커녕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겨우 액체를 순환시키는 펌프 소리와 보조 하드 메모리의 읽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안정은 되어 있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런 처치를 계속하면 감정은커녕 컴퓨터로서의 기능까지 손상될 거다.
어떡할까.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버틸까, 아니면 기계라도 보존하기 위해 전원을 꺼버릴까.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오빠.)
"……."
(오빠.)
"으으… 음, 피나? 피나?!"
뇌가 손상된 듯한 하얀 세계 속에, 누더기 같긴 하지만 낯익은 피나의 모습이 있었다.
주변 풍경은커녕 내 모습조차 인식할 수 없는 불완전한 시야. 분명 꿈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내 신경이 괴사 직전이라는 뜻이니까.
(나, 오빠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러니까 나 기계가 될래! 오빠의 소유물이 되고 싶어!)
"기다려, 왜…."
(나, 기계가 될 수 있어서 기… 뻐… 오… 빠….)
"야 피나, 피나!"
○
"…아."
이미 환상은 사라지고 작업대 위에 놓인 머리와 몸통뿐인 피나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그건 그냥 꿈일까?
분명 그렇겠지.
내 편한 대로 현실을 왜곡하고 도망치기 위한 허망한 눈속임임이 틀림없다.
"…후후, 나 참 나 좋을 대로만 꾸는 꿈이네."
피나의 에어 유지 기능 스위치를 끄고 컴퓨터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 꿈속의 말에 따르는 게 아니라 내 책임으로서 인간 피나를 잘라낸다.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키스하고 동력을 전달하던 케이블을 뭉텅이로 뽑아버렸다.
이걸로 이제 나에게는 기계로서의 피나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기계는 기계. 그건 인간이었던 것이라도 분명….
피나 편 3 끝
구름이 끼고 바람도 없는 평온한 서리 내린 아침(실제로는 눈에 덮여 서리 따위 보이지도 않지만), 키보키언 교수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아, 아니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여기 춥거든요."
장작 난로는 켜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석유 난로에 불을 붙이고 그 앞으로 교수를 안내했다.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생색내듯 내밀었다.
교수는 받아서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그대로 마셨다.
"이런 시간에 오실 줄 몰라서 방이 아직 안 따뜻한데…."
"신경 쓰지 마라. 이런 환경엔 익숙하니까."
"…뭐, 극지 캠프에 비하면 그렇겠죠."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고고학자 키보키언 교수. 형의 연구를 지원해주던 사람이다.
대학 연구실에만 박혀 있는 타입은 아닌지 비경이나 극지 활동이 많다는 얘기를 형한테 들은 적이 있다.
한눈에 봐도 건장한 체격이 그 생활을 상징하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얘기지만.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교수의 본론은 향후 지원에 관한 것이었다. 형의 실종 소식을 듣고 지원을 재검토하고 싶다는 거다.
나는 어제 그 검토 재료로 기술을 보고 싶다는 요청을 전화로 받았다.
그래, 어제다. 나한테는 프레젠테이션 준비 같은 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교수의 태도에는 그런 변명을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위압감이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인계받은 자료, 설비 상태, 보유 자재 등에 대해 나는 한바탕 설명을 시작했다.
군데군데 말을 더듬는 내 얘기에 맞장구도 안 치고 교수는 커피를 마시며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다.
너무 반응이 없어서 교수의 기분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상이 제 현황입니다…. 노력할 테니까 출자 지속은 해주실 수 없을까요. 불행히도 저에겐 기댈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여주지 않겠나."
입을 열자마자 교수는 내 말을 끊고 뭔가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에, 그게… 뭘 말씀이신지?"
"내가 모를 줄 아는 모양이군. 자네가 퍼소네이터 시작형을 한 대 인계받았다는 걸."
챙그랑!
놀란 바람에 컵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을 냈다. (나 참, 뻔한 리액션이네.)
형의 실종 건도 그렇고 여기서 몰래 개조한 피나 정보까지, 나랑 형밖에 모를 사실을 어디서 알아낸 걸까.
"어, 어떻게 거기까지?"
"내 장사는 정보가 생명이거든. 생명 그 자체인 정보원은 묻지 말아주게."
당황하는 나를 보며 교수는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생각해보면 교수는 실종 직전의 형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피나의 현 상태를 교수는 다 알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여기서 어설프게 거절했다간 출자도 끊길 게 뻔하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져올게요."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나와 나는 피나가 있는 지하실로 향했다.
○
안에는 전기가 완전히 빠져 멍해진 피나가 훅에 매달려 있다.
이 인간다움을 크게 잃고 누더기가 된 피나가 원래 용도와는 거리가 멀다고 혹평받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노출된 기판이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바닥으로 내린다.
마치 인형 뽑기 게임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충전이라도 해두는 건데…."
케이블을 연결한다 해도 응접실까지 거리가 너무 멀다. 어쩔 수 없이 책가방만 한 예비 배터리 팩을 장착하고 전원을 켰다.
'시스템 체크….'
오늘 올 줄 알았으면 최소한 노출된 방열판에 커버라도 씌웠을 텐데.
전원이 들어오자 피나는 등 쪽 기계를 끼익 소리 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웜업 할 시간 없어. 가자, 따라와."
'…명령대로.'
피나는 걷기 힘든 듯 비틀비틀 나를 따라왔다.
○
준비를 마친 나는 피나를 복도에 두고 교수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저는 형의…."
"서론은 나중에 듣지."
"……."
불길한 예감이 든다. 코로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나는 피나를 불렀다.
"피나, 들어와."
'마스터의 명령대로.'
탁 하고 열린 문으로 망가진 인형 같은 피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거다.
교수는 얼굴을 찌푸리며 곁눈질로 내 얼굴을 본다.
"내가 아는 사양과 다른 것 같은데?"
"…고장이 나서 제가 개수한 겁니다."
"자세히 설명해주겠나? 변경된 점만 말이야."
"네. 대체품으로 사용한 서보 모터와 제너레이터는 크기, 발열량 모두 형이 만든 것보다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고성능 오리지널 프레임을 안 쓰면 퍼소네이터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고요.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온 채로 고정해서 쓰고 있습니다. 금속 조각이 피부를 뚫고 돋아난 것처럼 보이는 건 열원 직결 방열 핀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능은 오리지널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인가?"
"…출력은 65%, 반응 속도는 40%, 가동 시간은 15%, 이해 능력은 약 10%, 에어 잔류치… 인간으로서의 마음은 1% 미만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메인터넌스 프리 부품을 많이 써서 유지는 쉬워졌습니다."
길가에 버려진 빈 깡통을 보듯 교수는 피나를 훑어봤다.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게 노골적으로 전해진다.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저에게도 형의 실종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요…. 계속해도 될까요?"
"뭐, 좋겠지. 시작하게."
느릿한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 미동도 하지 않는 피나 쪽으로 돌아섰다.
"피나, 이쪽은 키보키언 교수님이야. 인사드려."
리모컨을 조작하자 아까까지 정지해 있던 피나의 가슴에 달린 램프가 켜지며 천천히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삑… 처엄 뱁게씀니다 키보키언 님. 아타시는 퍼소네이터….'
혀 짧은 소리로 말하는 피나를 조정하기 위해 나는 리모컨으로 설정을 변경했다.
'삑삐빅… 퍼소네이터 시작형 7호기입니다. 고객님의 요청에는 가능한 한 응답해 드리겠습니다.'
"부끄럽게도 조정이 완벽하지 않아서 말투도 보시다시피 불안정합니다."
"중간에 전환한 것 같은데, 저건 뇌 독자 처리를 프로그램 처리로 바꾼 건가?"
놀랍게도 교수는 내 조작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정말 이 사람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맞습니다. 처음 것은 독자 사고에 의한 발음인데 저렇게 알아듣기 힘들어서 발음용 프로그램을 따로 넣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간다움이 손상되는 것 아닌가?"
일부러 피나를 훑어보고 교수 쪽으로 돌아선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라 기능 회복을 중시했을 뿐입니다."
"알겠네. 계속하게."
"피나, 우리 주변을 걸어봐."
'삐빅… 네, 마스터.'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쓸리는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피나는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내 옆을 지나가자 균형을 잃지 않게 천천히 90도 방향을 틀어 이번에는 키보키언 교수를 향해 걷는다.
이런 동작을 반복하고 피나는 다시 내 앞까지 와서 부동자세로 동작을 마쳤다. 그 표정에서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
"손상이 심해서 거의 모션 프로그램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고장 전에는 저한테서 뛰어 도망칠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그런가…."
동작을 마치고 그 자리에 멈춰 있던 피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램프가 켜진 걸 보니 주의나 경고 같은 거겠지.
'백팩 에너지 잔량 20% 미만으로 떨어져저저졌습니다. 보호를 위위위… 위해 기능을 제한하시겠습니까?'
경고는 에너지 잔량에 관한 것이었다. 잠깐, 이 상황을 핑계로 검증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더 이상 추태를 안 보여도 된다.
"교수님, 더 이상의 검증은 그…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해석을 마친 뒤에 다시 방문해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은 예비 배터리로만 움직이고 있어서 이제 얼마 못 움직이거든요."
"전원이 꺼질 때까지 그대로 두지."
"네?"
"저전압에서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보고 싶군. 문제없겠지?"
전원 부족 램프가 조용히 깜빡이고 있지만 동작 자체는 안정적인 것 같다. 할 수 있을까?
교수의 말에서 위압감을 느낀 나는 마지못해 따르기로 했다. 점수 따려고 한 짓이 역효과 나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검증을 계속하죠. 피나, 에너지 잔량 리미터를 해제하고 잔량 5% 미만이 되어도 슬립하지 않도록 설정해."
'삑… 명령 이해, 처리 실행.'
"우리 주변을 걸어. 명령 취소할 때까지 계속해."
'마스터의 명령대로….'
다시 몸을 삐걱거리며 피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완전히 똑같은 걸음 수와 동작이지만 에너지 부족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졌다.
두 바퀴 정도 돌자 피나가 갑자기 멈춰 섰다.
'가픽… 여여열량이 이이이… 삑, 일정치를 초과했습니다. 보호를 위해 운동을 정지합니다.'
"아, 열폭주인가. 어쩔 수 없네, 정지…."
"계속하게 해."
"…피나, 모든 보호 기능을 정지하고 내 명령을 최우선 항목으로 변경."
'삑삐빅삑… 처리 완료. 명령 계속합니다.'
열폭주를 일으켜 출력이 떨어졌는데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피나는 계속 걸었다. 걷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삐빅, 가가, 피가가… 삐이이이—"
콰당!
열 바퀴 정도 돌고 피나는 엎드려 쓰러졌다.
기판이 드러난 상태에서 저렇게 넘어져서 망가지진 않았을까? 당장 고장 여부를 체크하고 싶었지만 교수의 눈치를 보느라 참았다.
"피나, 보고해."
'에에에너지지 잔랴랴량… 메메메명려려려 실해해….'
에너지가 연산 장치까지 안 가서 처리에도 지장이 생긴 모양이다.
그래도 명령을 수행하려고 손가락 끝 모터를 돌리려 애쓰고 있다. 뻗어버리지 않는 그 성능에는 만족하지만, 남은 에너지가 너무 적어서 모터가 가리가리 헛돌고만 있다.
밤새워서 수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교수는 일어나 피나 곁으로 다가가 굽어보더니, 열폭주를 일으킨 허리 관절을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만지면 경고 메시지를 내보내게 해뒀는데, 에너지 부족 때문인지 피나는 저항 없이 교수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다.
문득 밤에 쓰던 용도가 생각나서 숨을 들이켰다.
"구체 관절인가. 유지와 강성을 생각하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군…. 그런데 이 기능은 설계 단계부터 갖춰져 있었나?"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벌리게 하고, 원래 피나의 질에 해당하는 부분에 손가락을 넣은 채 나를 쳐다봤다.
"그게, 그…."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건 틀림없이 설계 초기부터 있었던 거다. 그건 말해도 문제없겠지.
하지만 이유를 추궁당하면? "제가 로리 취향이라 형이 센스 있게 달아줬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 못 한다.
그 이전에 자금이 이런 데 쓰이고 있으니, 딱 봐도 엄격해 보이는 키보키언 교수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다.
하지만 교수는 겁에 질려 떠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됐군. 출자를 계속하겠네."
"네?"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니, 설마….
"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나. 기쁘지 않은가?"
"아, 아니, 그게…."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데이터 해석조차 서툰데도 퍼소네이터를 개조하고 독자적인 기구까지 만들어내는 기량은 가치가 있어. 새로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고 마음껏 주무를 정도의 광기도 갖춘 것 같고 말이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는 나에게 그 말만 남기고 교수는 "이만 가보겠다"며 푱 하고 가버렸다.
잠시 뒤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 아싸!"
'가….'
너무 기뻐서 피나를 껴안았다.
그 순간 온몸에 경련이 일고 통증이 달렸다. 피나가 쇼트 나 있는 걸 깜빡했다.
"아이고… 정말, 아프잖아!"
퍽!
발치에 굴러다니는 피나를 걷어차고 나는 조금 늦은 아침을 먹기로 했다.
○
교수가 돌아간 날 밤. 나는 피나 조정을 대충 마치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 양손을 쳐다본다.
이 팔에 거액의 자금을 내놓는 사람이 있다니. 그래, 바로 내 팔에.
"니헤헤."
오늘 작업은 끝났지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이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다.
그러다 조정 때문에 팔다리가 분리된 채 공중에 매달려 있는 피나가 눈에 들어왔다.
흥분도 됐겠다, 나는 오랜만에 피나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눈동자가 어두워진 피나에게 케이블을 연결하고 기동 스위치를 누른다.
'시스템 체크….'
동작을 나타내는 화면이 파랗게 물들어간다. 얼굴은 안 움직일 텐데 어딘가 깨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가각… 손발이 접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정지하시겠습니까?'
머리에 케이블을 꽂고 경고 정지를 키보드에서 직접 입력한다.
음성 인식 시스템은 개조된 뇌에 의존하기 때문에 깨어나는 중인 기동 직후에는 제어 시스템을 직접 조작하는 게 전달이 빠르다.
'가, 가가… 삐이이이—'
"좋아."
고장 난 이후로 이 기능을 안 썼는데 망가진 것 같지는 않으니 이걸로 쓸 수 있을 거다.
'가픽… 모모모드가 변경되었습니다. 마스터, 즐겨주세요.'
"아차~ 그러고 보니 밤용 언어 프로그램 같은 건 안 짰었지. 뭐, 오늘 정도는 괜찮으려나."
젖어 있는 걸 확인하고 바지를 내린 뒤 매달린 피나를 껴안듯 살며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메인터넌스 한 보람이 있는지 꽤 느낌이 좋다.
"피나, 신호 상황을 아나운스해."
피나는 무표정하게 담담히 대답한다.
'마스터의 움직임에 맞춰 해석 불능의 시그널이 발신되고 있습니다.'
"기분 좋지는 않아?"
"시크 중… 라이브러리에 기분 좋다고 느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 썼을 때의 라이브러리(기억) 얘기겠지.
그때 정말 기분 좋다고 느꼈었구나. 후후, 내 솜씨도 나쁘지 않네.
하지만 지금 피나는 아무리 세게 해도 "시그널이 강해졌습니다"라고만 한다.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이것도 귀여우니까 됐나."
결국 피나는 마지막까지 야릇한 소리 한 번 안 내고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약 10년 뒤, 규 사설 연구소, 소장실 책상 앞.
"네, 성공입니다. 이번에 드린 샘플은 사회에 내놓아도 쉽게 들키지 않을 수준입니다."
목조 건물의 작은 진료소를 허물고 2층짜리 연구소를 세운 지도 꽤 됐다. 겉으로 보기엔 무슨 연구소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출입은 잦은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일주일 뒤 납품하는 걸로 하죠… 그럼."
올해로 서른, 예전의 형과 같은 나이가 된 규 게이즈레드는 살며시 수화기를 내려놓고 책상에 설치된 디스플레이로 고개를 돌렸다.
"후우, 여전히 까다로운 사람이라니까. 나랑 직접 아니면 얘기도 안 하겠다고 하니. 일부러 접수원까지 마련해줬는데, 그치?"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규는 곁에 서 있는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나 '혼자서' 하고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야, 절대로."
'…….'
수년간의 해석 끝에 규는 형의 기술을 완벽하게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성공률은 5할 정도지만 본인도 모르게 개조할 수도 있다.
이 높은 기술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규가 처음 만진 퍼소네이터, PX07이다.
조수로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그녀였지만, 펠류가 규를 위해 준비해둔 툴을 사용함으로써 마음을 제외한 모든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우수하고 순종적인 조수 겸 컴퓨터를 얻은 규의 연구는 가속화됐고, 결과적으로 스폰서로부터 많은 자금을 끌어내 새로운 연구소를 건설했다.
'마, 스터… 비, 가리가리….'
하지만 최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PX07은 10년의 가동으로 사용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보행 등의 기능이 상실되어 지금은 반원을 파낸 듯한 형태의 크래들에 고정되어 컴퓨터로 사용되고 있다.
"슬슬 망가질 때가 됐네… 무리도 아니지. 올해로 20년, 생체랑 비슷한 시간을 기계로 있었으니 어쩔 수 없나."
방열을 위해 개폐부는 모두 열려 있고 그 대부분에 케이블이 연결된 그 모습은 바위를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리가리가리… 계, 산 결과… 의식 영역 잔존 86%….'
PX07이 계산 결과를 중얼거리고 있다. 같은 보고는 이미 디스플레이를 통해 출력됐지만, 요즘은 지시하지 않아도 말로 반복해버리는 오작동이 많은 모양이다.
그 트러블을 규가 신경 쓰는 기색은 없다.
"자, 작업은 이걸로 일단락. 아~ 배고파."
필요한 입력을 마치고 규는 방을 나갔다. 조명도 꺼지고 어두운 방 안에서 PX07의 LED 램프만 조용히 빛을 내뿜고 있다.
'가리가리가리… 마스, 터, 기분, 좋아….'
처리를 계속하던 PX07이 입을 열었다. 부하에 따라 쾌락을 느끼도록 만든 프로그램이 오작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직후 LED 램프가 격렬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결함을 나타내는 신호다.
'가가가… 이이이이상하하하하바앗….'
최근 이런 뇌의 폭주로 인한 결함이 많다. 그럴 때는 전뇌 진정액이 자동으로 주입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번 폭주 때 규는 보충하는 걸 깜빡했다.
기계가 삐걱거리고 여기저기서 불꽃이 튀고 있다.
'으으으으으….'
점차 삐걱거림은 잦아들었고 LED의 빨간 점등 램프가 서서히 꺼져갔다.
'마스, 터… 이상… 가츄우우….'
한 시간 뒤, 규는 망가진 PX07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사고 쳤네…. 백업이 완벽하지 않은 데이터를 꺼내는 건 그렇다 치고 대신할 애를 찾아야겠어…."
느릿하게 수화기를 들고 규는 스폰서인 키보키언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죄송하지만 10대 중에서 가급적 어린 소녀 한 명만 수소문해주시겠어요? 네, 여자가 고통에 더 강한 성질이 있으니까요…. 네, 조수가 드디어 망가져 버렸거든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더니 규는 즐겨 앉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에휴, 바빠지겠네."
피로가 몰려온 규는 옛 추억에 잠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쌍둥이 퍼소네이터 피나 편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