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이신 KEBO님께서 사이트 복구 기념으로 단편 소설을 보내주셨습니다.
제목은 OARL 플랜트 <시운전 편>.
(참고로 OARL은 '오피스 오토메이티드 로봇 레이디'의 약자예요.)
이 이야기는 KEBO님이 실제로 겪으신 경험담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하네요(^^;
자세한 건 감상평 남기면서 슬쩍 한번 물어보세요(^^)
(덧붙여서, 이 시리즈는 KEBO님이 직접 이미지를 넣어서 꾸민 html 파일 형태로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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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다음 주 중으로는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플랜트 쪽은?”
“가동 가능한 상태입니다. 다만, 아직 시운전을 해보지 않아서….”
“시운전이라….”
사장이라 불린 남자가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소재 쪽은?”
“지난번처럼 하면 금방 준비할 수 있습니다만, 너무 자주 그러면 좀….”
“알았어. 이번엔 구인 잡지로 가자고. 프리터 환영, 뭐 이런 거 있잖아. 당연히 회사 이름은 신경 써서 올리고. 음, 적당히 수상해 보이는… 건강식품 제조사 정도면 어때?”
“알겠습니다. 바로 수배하겠습니다. 그리고….”
안경을 쓴 왜소한 남자가 말을 꺼내기 힘든 듯 머뭇거렸다.
“뭔데?”
“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어제 총무부 여직원 중 한 명한테 들켰을 가능성이 있어서요….”
사장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왜소한 남자가 자료를 꺼냈다. 그 총무부 여직원의 이력서와 데이터였다. 사장은 그걸 잠시 훑어보더니 책상 위에 툭 던졌다.
“눈치챈 건가?”
“하아,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 동료들한테도 말을 흘리고 다니는 모양이라… 지금 어떻게 처리할지 가늠이 안 됩니다.”
“그 동료라는 건?”
남자가 자료를 하나 더 꺼냈다. 사장은 책상 위에 두 사람분의 자료를 나란히 놓았다.
“어쩔 수 없지. 소문 다 퍼진 뒤엔 늦어. 이 둘도 같이 처리해버려.”
“하지만 사장님.”
“총무부 OL(Office Lady) 정도야 금방 충원되겠지. 아니, 잠깐.”
“네?”
“차라리 우리 회사에 도입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좋아, 총무부 여직원들을 써먹자고. 새로 뽑을 필요 없이 그냥 직장에 복귀시키면 돼. 그리고 전 직원 대상으로 순차적으로 처치할 계획, 최대한 빨리 짜와.”
“……알겠습니다.”
왜소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사장’은 책상 위에 놓인 여직원의 자료를 다시 한번 집어 들더니,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야, 유미는?”
“아까 부장님이 부르시던데.”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야요이와 사토코. 아담한 체구에 쇼트커트인 야요이는 기술개발부 소속이고, 반대로 키가 크고 머리를 기른 사토코는 유미와 같은 총무부 소속이다. 그녀들이 다니는 회사 ‘오피스 테크노 공업’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새로 개발한 안내용 로봇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전 세계에서 주문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 안내 데스크에서 접수원 대신 정보를 제공하는 로봇인데, 당연히 예쁘장한 여성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걷지는 못하지만 완전한 인간형이라, 마치 안내원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 인건비를 줄이려는 준대기업들을 중심으로 히트 상품이 되었다.
“오늘 데이트 있어?” 야요이가 사토코에게 물었다. 사토코는 기술개발부, 즉 야요이의 동료인 니이노와 사귀는 중이다.
“아니. 맨날 바쁘다니까… 일요일뿐이야. 그런 건 야요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니이노 씨는 지금 제일 잘나가는 3과 소속이지만, 난 2과니까….”
야요이가 대답했다. 이번 로봇은 ‘좀 이상한 놈들’이 모였다는 3과의 성과였다. 3과 멤버들은 전부 남자뿐이고 경리조차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성과를 냈지만 예전에는 3과에서 만든 것들이 죄다 돈이 안 되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괴상망측한 것들뿐이라 예산도 맨날 깎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히트 상품이 여성형 로봇이다 보니, 아무래도 음란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야요이 입장에서는 그런 3과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인 사토코가 그 3과의 니이노와 사귀고 있다는 건—니이노가 3과에서 유일하게 멀쩡해 ‘보이는’ 편이긴 해도—야요이에게는 참 신기한 일이었다.
“유미, 혹시 그 일 때문인가?” 갑자기 사토코가 화제를 돌렸다.
“그 일?”
“응. 어제 말이야, 3과 안쪽 실험실에서 또 로봇 개조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또…?” 야요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에게 3과는 워낙 수상한 곳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어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야요이는 전에도 묘하게 기분 나쁜 색깔의 개구리가 든 수조를 소중하게 안고 가는 3과 직원을 본 적이 있었다.
“음, 그러니까… 로봇 검사대 같은 게 아니라 무슨 수술대 같은 곳 위에 그 안내 로봇이 올려져 있었다나 봐.” 사토코가 잠시 생각하며 대답했다.
“푸흡!” 야요이가 참지 못하고 뿜었다.
“와, 진짜 개수상해.”
“그치?” 사토코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네…. 이번엔 진짜 풍속 로봇이라도 만드는 거 아냐?” 야요이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사실 요즘 상품 개량 같은 건실한 노선을 걷는 2과에 비해, 기상천외한 노선으로 회사에 큰 이익을 안겨준 3과가 사장에게 예쁨받고 있다 보니, 지금까지 묵묵히 일해온 2과의 야요이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고 거울을 보는 두 사람. 그때 사토코의 휴대폰이 울렸다. 사토코가 버튼을 눌러 메일을 확인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미안, 나 먼저 갈게….”
“네, 네. 그러시겠죠.” 사토코의 말을 예상했다는 듯 야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사토코에게 갑자기 데이트 약속이 잡힌 것이다. 그것도 그 니이노와.
“나 간다, 안녕!”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토코를 뒤로하고 야요이는 라커룸을 나섰다.
다음 날….
“어라, 오늘 사토코랑 유미는?”
구내식당에서 야요이가 총무부의 후유미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안 보인다 싶더니 식당에도 없었다.
“둘 다 오늘 연차야.”
“흐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야요이는 정식을 깨끗이 비웠다. 식후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데 시야 끝에 꽤 괜찮게 생긴 가운 차림의 남직원이 들어왔다. 니이노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야요이는 어제 일이 떠올랐다. 사토코의 태도로 봐서 어제 데이트를 한 건 99.99% 확실하다. 야요이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니이노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아, 네. 수고하세요.” 니이노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 사토코는요?” 야요이가 니이노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어… 그게….” 니이노는 애매하게 대답하며 밥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게라니요, 어제 별일 없었어요?”
“컥, 켁!” 니이노가 순간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 그 꼴을 보니 야요이는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런 남자와 사귀는 사토코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어제 사토코랑 데이트했잖아요. 증거 다 있거든요!”
야요이가 웃음을 띠며 놀리듯 몰아붙였다.
“그거야 뭐… 어제는… 멀쩡했는데….” 니이노가 횡설수설 대답했다.
“근데 오늘은요? 감기라도 걸렸대요?”
“그건… 그게….” 야요이의 추궁이 쉴 새 없이 니이노를 파고들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게 야요이에게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연락 없어요? 설마 울린 건 아니겠죠?”
“그, 그럴 리가요….”
“문자 한 통 정도는 왔을 거 아냐?”
“아니, 뭐….”
“확실히 좀 말해봐요!” 재미있어하던 야요이도 니이노의 애매한 태도에 슬슬 짜증이 났다. 그녀는 니이노를 괴롭히려고 앉은 게 아니라 사토코의 안부를 물으려고 앉은 거니까.
“남의 사생활에 너무 참견하지 마세요….” 니이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허를 찔린 듯 야요이가 입을 다물었다. 니이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사토코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하지만?”
“사토코, 어제 뭐 별말 없었나요?”
“네?”
야요이는 당황했다. 묻고 있던 건 자신이었는데, 이번엔 자기가 질문을 받고 있다.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어제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 말을 끊었다.
“3과, 지금 대체 뭐 하고 있어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어제 사토코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건 기업 비밀입니다.” 니이노가 단호하게 말했다.
“기업 비밀이라니, 참 나.” 야요이가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으며 말을 이었다. “안내 로봇 개량형이라도 만들어요?”
“……역시.” 니이노가 중얼거렸다.
“역시라니요?”
“사토코가 어제 끈질기게 묻더라고요. 대체 뭘 만들고 있냐고 말이죠. 오쿠무라 씨도 아시겠지만, 기술개발부는 보안이 생명이잖아요. 그녀한테도 그렇게 말하면서 묻지 말라고 엄하게 말했거든요.”
“그럼 그것 때문에 충격받아서 쉰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니이노가 아까와 달리 술술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쨌든 저한테도 연락이 없어요.”
“그렇구나.”
드디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낸 야요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오쿠무라 씨.” 그런 야요이를 니이노가 불러 세웠다.
“네?” 야요이가 뒤를 돌아봤다.
“저기, 그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해주실 거죠? 일단 아직은 비밀이라서요.”
“그러죠 뭐….” 그때 야요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이참에 그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쓸만한 정보일지 아니면 그냥 웃음거리일지는 모르겠지만, 봐둬서 손해 볼 건 없을 테니까.
“조건이 있어요.” 야요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 조건이라니요, 오쿠무라 씨….” 니이노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별거 아녜요. 나한테도 그거 보여줘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여주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약속.”
“곤란한데…. 과장님한테 혼날 텐데….” 니이노가 정말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일단 말이나 해봐요. 그 과장님 변태라면서요? 내가 보러 간다고 하면 침 흘리면서 기다릴지도 모르지.”
“설마요….”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야요이가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오쿠무라 씨!”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필사적으로 불러 세우는 니이노를 무시하고 야요이는 잽싸게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쏙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어라, 야요이 씨 퇴근 안 해?”
“응, 잔업 좀 하려고.”
“그럼 먼저 갈게!” 동료인 미사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요이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결국 니이노는 과장에게 허락을 받아냈고, 야요이는 퇴근 후에 3과에 들르기로 했다. 시계를 확인하고 가운을 걸친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야요이. 3과에는 뭐가 떨어져 있을지 모른다. 유니폼이 더러워지면 세탁하기 귀찮으니까.
“저 3과 좀 다녀올게요.”
“그래.” 과장이 대답했다. 야요이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과장의 눈에 공포의 빛이 서려 있는 것을….
“수고하십니다.” 야요이가 3과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퇴근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애초에 3과 놈들은 언제 집에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족속들이라 야요이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때 안쪽 실험실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니이노의 얼굴이 보였다.
“수고하십니다.” 야요이가 다시 한번 인사했다. 니이노는 야요이를 확인하고는 안쪽 실험실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야요이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흔해 빠진 실험 기구와 컴퓨터들뿐인 방을 보고 야요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는지 니이노가 반응했다.
“응. 좁아져서 옆 창고로 옮겼어.”
“옮겼다니, 뭘요?”
“네가 보고 싶어 하던 거.” 니이노는 낮의 어리버리하던 태도와는 딴판으로 아주 차분했다. 야요이는 그런 니이노의 태도에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말없이 걷는 두 사람. 야요이에게는 10미터 남짓한 복도가 유난히 길고 숨 막히게 느껴졌다. 그리고 낮에 니이노를 골려준 것을 조금 후회했다.
“잠깐 기다려.” 창고 문 옆에 있는 전자 키를 두드리는 니이노. 키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자, 복도 뒤쪽의 방화셔터가 내려갔다. 당연히 문이 열릴 줄 알았던 야요이는 조금 당황했다.
“왜 방화셔터를 내려요?” 야요이가 물었다.
“필요하니까.” 니이노는 대답하며 다시 키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엔터를 누르자 잠금이 풀렸다.
“만약을 위해서야. 확실하게 소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소재를 확보한다고요?”
“보면 알아.” 니이노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야요이는 머뭇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에?! 이게 뭐야?”
방 안을 둘러보는 야요이. 방 안에는 가운을 입은 남자들, 즉 3과 멤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크기만 한 대가 여러 개 연결된 벨트 컨베이어 같은 설비가 있었고, 곳곳에 여러 개의 로봇 팔이 달린 기계들이 그 위를 덮치듯 놓여 있었다.
“OARL 제조, 아니 개조 플랜트야. 다음 주부터 본격 가동할 건데 아직 시운전 전이라서 말이지. 그래서 너 같은 사람은 여기서 대환영이야.”
야요이는 니이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나보고 뭘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리고 OARL은 또 뭐고.”
“오피스 오토메이티드 로봇 레이디(Office Automated Robot Lady)의 약자야…. 뭐, 일단 마음껏 구경해둬. 너랑 더 할 말은 별로 없으니까. 봐두는 건 지금뿐일 거다.”
비웃는 듯한 니이노의 말에 의구심을 느끼며 야요이는 3과 사람들 사이를 지나 ‘제조 플랜트’로 다가갔다.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 기계에 여러 부품이 박히고 있는 로봇이, 야요이에게는 아까 식당에서 본 후유미와 너무나 닮아 보였다.
“이게 대체…?”
야요이는 그 너머로 옆방을 볼 수 있는 창문을 발견하고 들여다보았다. 그 너머 방에는 마치 시신을 안치하듯 ‘알몸’인 채로 눕혀져 나란히 놓인 여러 대의 로봇이 있었다.
“자세히 봐봐.” 니이노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요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리창 너머의 로봇들을 훑어보았다.
“유미…? 사토코…?”
창문에 손을 찰싹 붙이고 들여다보며 확인한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녀들은 시운전 테스트용 소체가 되어줬어. 이번 제품은 반응이 아주 뜨겁거든. 아예 사무직 여직원들을 전부 로봇화할 수 없겠냐는 고객들의 요청이 있었거든. 하지만 안내 로봇처럼 전부 똑같은 얼굴일 수는 없잖아. 어느 정도 일도 할 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지금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그대로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지. 그런데 한 명 한 명 개조하는 건 시간도 걸리고 번거로우니까, 한꺼번에 개조해서 작동을 통합 제어하는 시스템을 고안한 거야.”
“말도 안 돼….”
방금 움직이던 플랜트 작업대 위에서 ‘후유미’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일어났다. 그 표정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후유미를 남자들이 옆방으로 끌고 갔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내일이면 직장에 복귀할 거야. 그리고 근처에 휴대폰 기지국만 있으면 어디서든 제어 장치가 그녀들의 생체 뇌에서 데이터를 로드해서 마치 인간인 것처럼 작동하게 만들지.”
야요이는 경악하며 다시 창밖을 보았다. 초점 없는 눈을 한 유미가 후유미와 똑같이 상체를 일으키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 상황을 체크하는 남자들….
“여어, 오쿠무라 양.”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야요이가 뒤를 돌아봤다.
“이나무라 과장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3과 과장 이나무라였다.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다 빠진 머리 때문에 ‘바코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3과 소속이라는 이유로 무능한 아저씨 취급을 받던 인물이다.
“어떤가? 이 시스템은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네. 그뿐만 아니라 회사에 있는 동안은 업무 외의 짓은 절대 안 하고, 복리후생도 필요 없지. 조금 아쉽지만, 자네도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이 플랜트를 통한 개조를 경험해줘야겠어.”
야요이가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무서워할 것 없네. 2과의 야마무라 과장한테는 이미 말해뒀으니까. 내일부터 자네는 이 3과로 발령이야.”
두 사람이 다가왔다. 야요이는 필사적으로 그곳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포함한 3과 멤버들은 웃으면서 야요이를 천천히 뒤쫓았다. 발치에 널브러진 케이블 따위를 샌들 신은 발로 뛰어넘으며, 야요이는 한시라도 빨리 이 창고를 빠져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확실하게 소재를 확보하기 위해 방화셔터를 내린다고.”
니이노를 비롯해 이나무라와 3과 멤버들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필사적인 표정으로 방화셔터를 두드렸지만,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팔을 니이노가 낚아챘다.
“걱정할 거 없어. 회사에는 이미 부서 이동한 걸로 처리됐고, 생체 뇌는 남겨둘 거니까 밖으로 나가도 제어 장치가 네 행동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해줄 거야.”
“싫어! 이거 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야요이. 하지만 여자 혼자서 남자 여럿을 상대하는 건 절망적이었다. 가운 단추가 튕겨 나가고 소매가 찢어졌다. 이윽고 그녀는 양어깨와 양다리를 붙잡힌 채 창고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마취 준비해.”
“싫어어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야요이. 하지만 네 명에게 짓눌린 그녀에게 주사기를 든 니이노가 다가왔다. 그리고 3과 멤버들은 그 작업을 마치 물건을 다루듯 덤덤하게 진행했다. 그녀의 옷이 걷혀 맨살이 드러나도 남자들은 흥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야요이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3과 놈들은 그녀를 ‘소재’로밖에 보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남자들이 야요이의 목덜미를 노출시켰다. 그녀는 이제 공포밖에 느낄 수 없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야요이의 목덜미에 니이노가 천천히 바늘을 밀어 넣었다. 따끔한 통증이 야요이의 전신을 경직시켰다.
“제어 설정은?” 이나무라가 확인했다.
“오케이입니다.” 니이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싫어….”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야요이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쥐어짜 마지막 저항을 해보았지만, 들어줄 리 만무했다. 힘이 빠져나가는 몸에서 옷이 벗겨지고, 손발이 차례차례 작업대에 고정되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개조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억양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순간 야요이의 의식을 번쩍 깨웠다. 어느새 회사 유니폼을 입은 사토코가 멍한 표정으로 플랜트를 제어하는 단말기 앞에 앉아 있었다.
“사토코…….”
“그녀도 너처럼 3과로 이동했어. 그리고 너도 곧 그녀처럼 될 거야.”
사토코가 무표정하게 단말기를 조작하자 야요이가 누운 작업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일상적인 업무를 하듯 기계를 조작하는 3과 멤버들. 이제 야요이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요이는 몸이 이동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첫 번째 기계 앞에서 작업대가 멈췄다. 위에서 기계 팔이 내려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은 끊어졌다.
야요이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작업은 계속되었다. 입이 벌려지고, 구강을 통해 침입한 가느다란 로봇 팔이 야요이의 뇌에 제어 장치를 장착해 나갔다. 팔과 다리는 절개되었고, 인간의 골격은 기계 골격으로 대체되었다. 동시에 등 쪽에서 장기들이 적출되고 그 자리에 기계 장치들이 매립되었다. 기계의 정밀함은 야요이의 바디라인을 전혀 망가뜨리지 않은 채 작업을 수행했다. 이윽고 귓볼 부분에 피어싱 형태의 수신기가 장착되었고, 마지막 장치 안에서 전신 코팅이 이루어졌다.
방 중앙에 있는 슈퍼컴퓨터, 즉 메인 제어 장치에서 작동 체크 명령이 발신되었고, 정상적으로 수신되었다. 오쿠무라 야요이. 이제 이 이름은 알파벳 나열로 된 기호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크할 테니 저쪽 방으로 이동해.” 니이노가 지시했다.
“네.”
무표정하게 순종적으로 대답하며 ‘OkumuraYayoi’는 알몸인 채로 검사실을 향해 걸어갔다.
나카야마 미사토는 과장이 부르자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였던 야요이가 갑자기 옆 부서인 3과로 발령 난 것도 모자라, 자기까지 면담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고개를 갸우뚱할 일들뿐이었다. 지금까지 친하게 수다를 떨던 총무부 여직원들이 묘하게 쌀쌀맞다. 아니, 쌀쌀맞다기보다 마치 무표정하게 묵묵히 일만 하고 있었다. 미사토로서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제일 수다쟁이였던 유미가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무표정하게 유니폼으로 갈아입던 모습은 믿기 힘든 수준을 넘어 기괴하기까지 했다.
“미안하네, 기다리게 해서.” 인사부의 히가시야가 부르자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기술개발부 제3과 이나무라 과장이 서 있었다.
“이나무라 군이랑 같이 창고로 좀 가주게.” 히가시야가 명령했다.
‘나도 3과로 가는 건가….’
“네….”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는 이나무라를 따라 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이 열렸다. 눈앞에 거대한 플랜트가 있었고, 그걸 조작하는 단말기 앞에 야요이와 미하라 사토코가 앉아 있었다.
“야요이 씨, 괜찮아?!”
야요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안심했는지 미사토가 무심코 소리쳤다. 하지만 야요이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었다. 미사토의 눈에는 그 모습이 유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유미는 그렇다 쳐도 야요이가 반응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요이 씨, 무슨 일 있었어?”
미사토가 야요이 쪽으로 다가갔다. 야요이는 미사토 쪽을 돌아보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단말기로 시선을 돌렸다. 그걸 본 미사토는 자신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총무부 애들이랑 똑같아….’
그녀를 향했던 야요이의 얼굴은 완전히 무표정했다. 그러고 있는 사이, 그녀는 갑자기 팔을 붙잡혔다.
“뭐예요!” 뿌리치려는 미사토. 하지만 그녀는 양팔을 붙잡힌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주사기를 든 니이노가 다가왔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미사토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니이노에게 물었다.
“너도 그녀들처럼 OARL 시스템의 일원이 되어줘야겠어.”
옆에 서 있던 이나무라가 대답했다.
“그녀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래. 저건 그녀들이 새로 태어난 모습이지. 신체 일부를 기계로 바꾸고, 뇌에 제어 장치를 장착한 뒤 메인 서버와 링크시켰어. 사무실 업무 효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인건비도 극적으로 절감할 수 있지.”
미사토는 방에 들어와서야 플랜트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 작업대 위에 눕혀진, 로봇인 줄 알았던 여성에게 기계가 차례차례 무언가 처치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분명 방금 전까지 그녀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었다.
“왜 내가….”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사무직 여직원 전원을 개조해서 OARL 시스템에 통합하기로 했거든.”
“말도 안 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이윽고 의식을 잃었다. 3과 멤버들이 능숙하게 그녀의 옷을 벗겨 나갔다. 그리고 곧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플랜트 작업대 위에 눕혀졌고, 그 작업대는 개조 장치 쪽으로 나아갔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겠군요.” 이나무라가 말했다.
“아아, 오늘은 기술개발부, 내일은 영업부, 그다음은 자재부다. 일주일 정도면 여직원들은 전부 리뉴얼되겠지.” 어느새 창고로 온 히가시야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주문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 계약서 도장만 찍으면 돼. 클라이언트 쪽 인원이 꽤 많아서 일주일 이상은 풀가동해야 할 거다.”
“그거 참 잘됐군요. 뭐, 당분간 회사도 우리도 안태하겠네요.”
“그러길 바라야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 입은 남자들 옆에서, 미사토의 육체에는 끊임없이 기계가 박히고 있었다….
<끝>
※ 이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며, 등장인물 및 기타 모든 사항은 실제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작가의 후기>
오랜만에 한 편 올리는 거라, 슥슥 이쪽 취향으로 휘둘러봤습니다. 스스로도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는 욕심은 더 있었지만, 이번에는 과감히 생략했습니다.
완전 기계화도 아니고 너무 노골적인 모에 키워드도 넣지 않아서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여러분 각자 뇌내 보완 부탁드립니다 (^^;;;; 여기에서만큼은 딱히 까다롭게 굴지 않을 테니, 혹시 ‘써보고 싶은데 좀…’ 하시는 분이 있다면 소재로 써서 덧붙이거나 다시 쓰는 등 연습용으로 쓰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연락 한 번만 부탁드려요). 다 같이 즐겁게 놉시다 (폭소).
그럼 이번에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2002. 11. 16.
<월초 5일 오후 · 오성물산 응접실>
“어떠십니까? 이번엔 상업적 베이스를 고려해서 아주 파격적인 가격으로 맞춰 드렸습니다.”
소파에 앉은 깡마른 남자가 테이블 위에 자료를 펼치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 서버 2대라는 건 뭡니까?”
맞은편에 앉은, 전형적인 중년 체형의 남자가 되물었다. 이쪽이 구매 측 담당자인 모양이다.
“네, 귀사에서 요청하신 견적 내용이 130구 기준이라서요. 서버 1대당 최대 제어 수가 128구거든요. 그래서 130구면 2대가 필요합니다. 정확히는 서버를 2대 이상 연결할 경우 각 서버의 제어 가능 수가 1구씩 줄어들어 127구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귀사의 경우엔 서버 2대로, 배치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60구와 70구 정도로 나누어 운용하시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겁니다.”
영업직으로 보이는 마른 남자가 능청스럽게 권했다. 날카로운 인상과는 딴판으로 경쾌한 목소리의 세일즈 토크였다. 담당자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음, 만약 128구로 맞추면요?”
“당연히 서버 1대 가격으로 진행해 드립니다. 하지만 사후 관리나 주변 대책을 생각하면 전수 처리를 권장합니다만…….”
“그렇군. 그럼 납기는?”
담당자가 메모를 확인하며 물었다. 사실 그에게 결정권은 없었다. 하지만 위에서 지시받은 질문 사항만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가계약 체결 후 귀사 담당자분과 세부 조율을 거쳐 공정을 확정하게 됩니다. 저희 쪽도 작업은 가급적 신속하게 진행할 생각이라서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운송비 별도라는 건?”
“아, 납품은 저희가 직접 해드립니다만, 그전에 귀사에서 저희 쪽으로 운송해 주시는 비용입니다. 저희 담당자가 미팅 때 상세히 상담해 드릴 텐데, 케이스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식이죠?”
담당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글쎄요, 여러 방법을 검토 중입니다만…… 귀사에서 확실하게 인도해 주신다면 문제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일반 기업에선 불가능하죠. 그래서 별도 계약을 통해 저희가 준비한 플랜을 제안드리는 겁니다. 가장 간편한 게 ‘연수 투어형’인데, 저희 소유 빌딩에—뭐, 이 플랜을 위한 장치들이 좀 되어 있습니다만—거기에 사원 연수 명목으로 집합시키는 방식입니다. 그 외에도 손쉬운 것부터 정교한 것까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방금 말씀드린 연수 투어형이 가장 깔끔할 것 같네요. 공정 담당자가 상세히 설명해 드릴 테니 그때 결정하시죠.”
“알겠습니다. 음, 일단 내부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부디 긍정적인 검토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른 영업 사원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는 아마 하루 이틀 내로 가계약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월 중순 13일 해질녘 · 오성물산 여자 락커룸>
“근데 진짜 너무하지 않아? 갑자기 잘리다니.”
“그러게…….”
오성물산 제1영업부의 쿠리타 사토미와 자재부의 하마모토 카오리가 퇴근 후 락커룸에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최근 일주일 사이, 동료 여직원 두 명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혀 해고당했다. 회사 전체로 따지면 벌써 다섯 명 정도 되는 모양이다. 듣기로는 장기 유급 휴가를 신청하거나 몸이 안 좋아 결근했다는 이유만으로 권고사직을 강요받았다고 했다.
“회사 사정이 많이 어렵나 봐.”
“그럴 거면 저 대머리나 뻐드렁니 같은 인간들부터 자를 것이지.”
“쉿, 누가 들으면 우리까지 잘려.”
사토미가 주의를 주자 카오리는 입을 삐죽 내밀며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사토미가 화제를 돌렸다.
“응?”
“들었어? 다음 주쯤에 여직원들만 따로 연수 간다던데.”
“연수?”
“응, 총무과 애가 그러더라. 하루 동안 외부 연수인데, 스무 명 정도씩 부서별로 나눠서 하는 것 같아.”
“뭐야 그게…… 다들 자를 생각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암튼 나 먼저 갈게.”
투덜대면서도 카오리의 손길은 느릿했다.
“잠깐만 기다려!”
서둘러 겉옷을 걸치고 거울을 확인하는 카오리. 사토미는 미소 지으며 문가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월 중순 13일 밤 · 오성물산 회의실>
“그럼 다음 주 18일 월요일부터 일주일 일정으로, 18일 24명, 19일 28명, 20일 22명, 21일 20명, 22일 금요일 31명으로 완료. 총 125명입니다. 장소는 북가(北街) 제3빌딩 지하 1층 회의실, 운용 개시는 19일 화요일부터이며 운송 플랜은 A타입입니다. 서버 설치는 17일 일요일에 진행하는 것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이대로 본계약 체결하시죠.”
영업 사원이 서류를 내밀었다. 담당자는 오늘 전무를 대동하고 나왔다.
각자 도장을 찍고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럼 바로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월 중순 18일 오전 · 북가 제3빌딩 지하 1층 회의실>
북가 제3빌딩 지하 1층 회의실에는 오성물산 총무부를 중심으로 여직원 24명이 모여 있었다.
“그럼 오늘 연수 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키타가와 요코는 입사 후 첫 외부 연수였지만, 설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반쯤 졸고 있었다. 회사 업무에 진저리가 나 있던 그녀에게 하루 종일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건 더 고역이었다. 하지만 잘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는 길에 몇 번이나 감기 핑계를 대고 도망칠까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떤 키워드 하나가 그녀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무려 와인 테이스팅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요코는 서둘러 자료를 넘겼다. 자료에는 그녀가 동경하던 교양 넘치는 연수 메뉴들이 적혀 있었다. 비록 맛보기 수준이겠지만, 평소 배우고 싶어도 돈과 시간이 아까워 망설였던 것들이라 그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도 제법 센스 있잖아!’
요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첫 강의에 집중했다. 휴식 시간을 거쳐 드디어 기다리던 와인 테이스팅 시간이 왔다.
강사가 설명을 곁들이며 방 중앙 테이블에 놓인 잔마다 와인을 따랐다. 미리 술을 전혀 못 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 하나씩 맛보시고 소감을 적어주세요.”
강사의 말에 요코를 비롯한 여직원들이 화기애애하게 일어나 잔을 들었다. 강사의 매너 덕분에 분위기는 아주 부드러웠다. 그런데 요코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총무과 동료 한 명이 제자리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요코와 친한, 이름이 같은 타카하마 요코였다.
“요코, 왜 그래…….”
그녀의 어깨를 흔들던 그때였다. 뒤쪽에서 ‘챙그랑’ 하고 잔이 카펫 위로 구르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다른 직원이 쓰러져 있었다.
“어머, 왜 이래…….”
당황한 요코가 일어서려 했지만, 웬일인지 발끝이 휘청거렸다. 시야가 일렁였다. 그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동료들이 하나둘씩 힘없이 고꾸라졌다. 요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마치 누군가 억지로 누르는 것처럼 눈꺼풀이 감겼다.
‘어…… 나…… 왜 이러지…….’
무너져 내리는 요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월 중순 18일 오전 · 북가 제3빌딩 지하 1층 모니터실>
지하 1층 회의실 옆 모니터실. 이곳에는 회의실 음향 장비 외에도 감시용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 단말기는 중앙 OARL 시스템 본체와 직결되어 있었다.
“허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전무가 몸을 내밀어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저 와인에는 지효성이지만 강력한 마취제가 섞여 있습니다. 약한 사람은 금방 반응하지만, 대개 와인이 모두에게 돌아간 뒤 10분 정도면 효과가 나타나도록 조절해 뒀죠.”
“그렇군.”
남자의 설명에 전무가 감탄했다. 이어 남자가 단말기에 키를 입력했다.
“이번엔 뭐지?”
전무의 질문마다 남자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운송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녀들이 다시 눈을 뜰 때는 완전히 OARL화된 이후일 겁니다.”
회의실 입구 반대편 벽이 슬라이드식으로 열리며 문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자 여덟 명 정도의 여성이 나타났다. 동시에 전동 대차에 실린, 사람 한 명이 누울 만한 크기의 납작하고 긴 케이스들이 무더기로 운반되어 왔다.
“문 너머는 특별 주차장입니다. 운송용 트럭이 대기 중이죠.”
“저건 뭔가?”
“아, 운송용 케이스입니다. 소체(素體)는 여기서 의복과 액세서리를 제거한 뒤 케이스에 넣어 운송합니다. 내부를 보시겠습니까?”
모니터 각도가 바뀌며, 방금 나타난 여성들이 ‘의복 제거’ 작업을 하는 모습이 줌업되었다. 잠든 채 알몸이 된 총무과 여직원 한 명이 케이스 안에 눕혀졌다. 동시에 작업 중인 여성들이 케이스 내부의 구속구로 그녀를 고정했다. ‘제거된’ 옷가지들이 아래쪽 서랍 같은 곳에 수납되자 케이스 뚜껑이 닫혔다. 뚜껑이 닫힘과 동시에 케이스 내부가 뿌옇게 흐려졌다.
“케이스를 잠그면 미리 세팅된 마취 가스가 기화되어 봉입됩니다.”
남자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저 여성들은 누구지?” 전무가 뒤늦게 물었다.
“저희 회사 여직원들입니다. 물론 전원 처리가 끝난 상태죠.”
“허어…….”
전무는 OARL화된 여성들의 움직임에 눈을 뗐다. 이런 힘든 작업에도 불평 한마디, 잡담 한마디 없이 손놀림이 매끄럽다 못해 기계적이었다. 마치 자동화된 공장의 생산 라인을 보는 듯했다. 전무는 깨달았다. 그 연상은 정확했다. 그녀들은 서버에 통제되는 자동 기계의 일종이었다. 이제 곧 자신의 회사 여직원들도 그녀들처럼 OARL이 될 것이고, 그것은 회사의 작업 효율을 비약적으로 높이고 경비를 절감해 이익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잠든 여직원들이 차례차례 케이스에 담겨 운반되었다. 모니터 화면이 바뀌었다. 문밖에는 평범한 10톤 트럭이 대기 중이었고, 역시 여성이 운전하는 소형 지게차가 케이스를 트럭에 싣고 있었다.
이윽고 회의실은 말끔히 정리되었다. 다른 여성 몇 명이 나타나 남은 와인을 치우고 바닥을 청소했다. 전무는 그녀들의 움직임을 보고 즉시 OARL임을 알아차렸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감정 없는 표정. 개성이나 습관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다른 개체와 교체되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전무님,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음, 앞으로의 일정은?”
전무가 되묻자 남자는 아침에 설명했던 일정을 다시 읊었다.
“지금 운반해서 공장까지 30분도 안 걸립니다. 플랜트로 옮겨서 1시간 이내에 가동할 수 있습니다.”
“1시간이라…… 그럼 자네는?”
“저는 바로 공장으로 갑니다. 괜찮으시다면 공장 쪽에 식사를 준비해 뒀습니다만.”
“그거 고맙군.”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터 속 10톤 트럭이 멀어져 갔다. 트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빌딩의 반입 전용 통로를 빠져나갔다.
<18일 낮 · 오피스 테크노 공업 M공장>
“어서 오십시오.”
남자를 따라 문을 들어서자 안내 데스크의 여성이 상냥하게 인사했다. 말투나 미소 모두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전무는 이것 역시 흔한 접수용 로봇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중견 기업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미소와 어조는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고, 성능 좋은 합성 음성으로 응대한다. 웬만한 안내원보다 낫다는 평판도 자자하다. 걷지는 못하지만 경계 모드 옵션이 있어 침입자가 발생하면 즉시 경찰에 신고하는 기능도 있다. 얼굴 형태도 몇 종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M물산 전무님을 모셔 왔다. 식사 준비는 어디에?”
남자가 묻자, 전무의 예상대로 여성은 찰나의 순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임원용 식당에 테이블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난 부장님께 보고하고 갈 테니, 먼저 전무님을 안내해 드려.”
“알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함과 동시에 옆문이 열리며 또 다른 여성이 나타났다.
“안내하겠습니다.”
전무는 깜짝 놀랐다. 문에서 나타난 여성은 마치 방금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접수 로봇이라도 이 타이밍에 안내원을 부르는 건 불가능할 텐데. 게다가 합성 음성치고는 목소리에 생동감이 넘쳤다.
“그녀들은 접수 로봇이 아닙니다. 뭐, 로봇의 노하우를 활용하긴 했습니다만. 그녀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인간으로서 저 자리에 앉아 있었죠.”
“그럼, 이 여자도?”
“네. 원래 유능했지만, 이제는 훨씬 더 유능하고 효율적인 안내원이 됐죠. OARL은 소체의 생체 뇌에서 데이터를 추출할 수 있어 잠재력이나 경험을 그대로 살릴 수 있습니다. 그게 로봇과의 차이점이죠. 그리고 이 쿠마하라 미사토(KumaharaMisato)가 바로 대기할 수 있었던 건 콘노 마사미(KonnoMasami), 즉 접수원의 눈과 귀로 들어온 정보가 생체 뇌를 통해 처리되어 서버로 즉시 전송됐기 때문입니다. 서버가 찰나의 순간 미사토에게 명령을 내려 그녀가 나타난 거죠. 이처럼 OARL은 서버를 통해 전체를 시스템적으로 운용할 수 있습니다.”
“과연…… 대단하군.” 전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미사토가 손짓했다. 표정은 마사미와 똑같이 화사했고, 전무가 걷기 시작하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남자가 사라지자 전무는 시험 삼아 말을 걸어보았다.
“자네, 입사한 지 몇 년 됐나?”
“그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습니다.”
미사토가 걸음을 멈추고 즉각 대답했다. 표정은 아까와 다름없이 상냥했지만, 어조에는 억양이 전혀 없었다. 일방적으로 대답을 마친 그녀는 다시 “이쪽으로 오십시오”라며 마치 비디오를 재생하듯 안내를 재개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전무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집은 어디인가?”
“그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습니다.”
아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억양 없는 목소리와 상냥한 미소. 전무는 그 변화 없는 표정이 점점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름은?”
전무가 끈질기게 물었지만, 이번 반응은 달랐다.
“그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습니다. 대화를 등록합니다…… 오성물산 전무님, 질문 종별 P, 개인 프라이버시에 관한 질문, 보안 레벨 4, 처리, 속행.”
전무는 당황했다.
“어, 어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미사토가 대답했다.
“고객님의 질문 내용을 메인 서버에 등록했습니다. 이후 고객님의 질문에 관한 보안 레벨 상한이 하향 조정되어, 일정 레벨 이상의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습니다. 계속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사토는 다시 상냥한 표정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전무는 마치 체념한 죄수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곳입니다.”
복도 끝 문이 열렸다. 임원용 식당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담당 남자가 다른 두 남자와 함께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명함을 내밀며 인사하는 두 사람.
“사장님과 개발 담당 이나무라입니다.” 남자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전무도 서둘러 명함을 건넸다.
“어떻습니까, 저희 OARL 시스템이?” 이나무라가 만족스럽게 물었다.
“그게…….” 전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방금 겪은 일 때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짐작하시겠지만, 저희 시스템은 업무 효율을 높일 뿐만 아니라 여직원의 부주의한 발언으로 중요한 일을 망치는 일도 없습니다. 방금 겪으신 보안 경보가 바로 그 예죠.”
“그건, 그저 시험 삼아…….” 전무가 말을 더듬었다.
“네, 세상엔 남의 정보를 캐내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특히 타사 영업직들이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대항하는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영업 기밀이나 개발 정보가 새 나가지 않도록 말이죠.”
“그렇군요.” 이나무라의 설명에 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안도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자신을 비난하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자, 실례했습니다. 앉으시죠. 즐거움은 식사 후에 나누기로 하고.”
사장이 신호를 보내자, 역시 멍한 눈을 한 여직원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으로 접시를 날라 왔다.
“이들도 역시?” 전무가 놀라 물었다.
“물론이죠. 저희 회사에 생생한 여직원 따위는 이제 없습니다.” 사장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전무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18일 오후 · 오피스 테크노 공업 M공장 플랜트 제어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네, 그러시죠.”
전무의 대답에 남자가 신호를 보내자 제어실 안의 가운 입은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움직이는 건 남자들뿐이었고, 몇몇 가운 입은 여성들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목만 움직여 단말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이것들도 역시…….’
전무는 그녀들이 OARL임을 직감했다. 무표정한 얼굴들이 그에게는 모두 똑같은 얼굴처럼 보였다.
‘우리 직원들도 이제…….’
전무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이쪽 창문으로 보시는 게 더 잘 보일 겁니다.”
남자의 안내에 따라 창가로 이동했다. 발아래로 알몸의 여직원들이 담긴 케이스가 운반되어 벨트 컨베이어 위에 머리부터 놓이고 있었다. 첫 번째 기계 장치에서 케이스 속 그녀들이 고정된 판만 쏙 빠져나와 앞으로 나아갔다.
터널 같은 곳을 지나자, 컨베이어 위의 다음 장치 아래에서 첫 번째 여직원을 태운 판이 멈췄다.
‘드디어…….’
전무가 생각할 틈도 없이 프레임 형태의 기계가 머리 위로 내려와 고정했다. 이어 다른 암(Arm)이 장치에서 무심하게 뻗어 나와 그녀의 입 주변을 감싸듯 달라붙었다.
“구강을 통해 더 가느다란 로봇 암이 뇌 속으로 침투해 제어 장치 설치와 뇌 개조를 진행합니다. 이 시점에서 그녀들의 의식은 소멸하죠. 동시에 머리를 고정하던 장치가 귓불에 피어싱 형태의 수신기를 장착합니다.”
불과 수십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암이 입에서 떨어지자 컨베이어가 작동했고, 터널에서 나온 다음 여자가 제자리에 세팅되었다. 그 과정의 반복이었다. 말 그대로 그녀들은 자동차 공장처럼 ‘처리’되고 있었다.
“개조까지는 완전 자동입니다. 검품은 저희가 직접 합니다만. 저 터널이 고성능 스캐너거든요. 스캐너가 모든 데이터를 수집해 개인 설정을 자동으로 진행합니다. 그 설정에 맞춰 개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라도 대응 가능하죠.”
이번엔 이나무라가 설명했다. 첫 번째 여자를 눈으로 쫓는 전무. 팔과 다리, 하반신, 상반신 순으로 그녀들의 몸속에 기계가 심어졌다. 컨베이어가 진행됨에 따라 신체 부위마다 기계 상자 같은 것이 덮였다. 그 위로 암이 뻗어 나와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 때와 마찬가지로 수십 초 뒤 암이 떨어지면 다음 장치로 이동했다. 그 모습은 장치마다 가운 입은 여자들이 앉은 단말기 모니터에 표시되었다. 겉보기엔 어디가 변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니터의 정보는 그녀들의 체내에 기계가 매립되고 대체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각 페이즈를 거의 동일한 초 단위로 진행하도록 설계했습니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개체에 맞췄죠.”
“처리 하나에 얼마나 걸립니까?” 전무가 의례적으로 물었다.
“저희 시뮬레이션상 최대 120초입니다. 체지방률이 높은, 손이 많이 갈 법한 체형을 기준으로 계산했거든요.”
“그렇군.”
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여자가 마지막 장치에 도달했다.
“전신 코팅 머신입니다. 특수 약제로 전신을 코팅해 부패 등을 방지하죠. 인체에는 무해하니 원하신다면 호스트 입력값에 따라 밤의 유흥도 즐기실 수 있습니다. 다만 행동이나 반응이 시뮬레이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 좀 지루하실 수도 있겠지만요. 저 같은 경우는 좀…….”
이나무라가 웃었지만 전무는 웃지 않았다. 이 플랜트에서는 어떤 살아있는 인형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첫 번째 인원이 ‘코팅 머신’에서 나오자 컨베이어가 그녀를 옆방으로 운반했다.
“네 명 정도 완료될 때까지는 위험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검품대는 20개 준비되어 있고, 거기까지는 자동으로 완성품을 운반합니다. 거기서 15분 일정으로 첫 검품을 시작할 텐데, 저희도 이렇게 대규모로 돌리는 건 처음이라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나무라가 혼자 떠들어댔다. 그의 말대로 검품대에는 OARL화된 여직원들이 차례로 나열되었다. 잠시 후 이나무라의 안내를 받아 검품실로 내려갔다.
검품실에서는 가운 입은 남자가 소형 단말기를 조작하며 검품을 진행하고 있었다. 남자가 키를 누르자 대 위의 여자가 전원이 들어온 듯 눈을 떴다. 전무도 아는 얼굴이었다. 모로즈미 아키노라는 2년 차 직원이다. 혀 짧은 소리를 내는 쾌활한 아이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이름을 말해라.” 남자가 마이크로 지시했다.
“MorozumiAkino입니다.”
그녀는 억양 없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듯 대답했다.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전무가 알던 그 혀 짧은 말투는 흔적도 없었다.
남자가 키를 입력할 때마다 아키노는 몸을 움직여 명령대로 어떤 포즈든 취했다.
“마키타 군, 전무님께 서비스 좀 해드리지.”
그 모습을 보던 이나무라가 지시하자 남자가 키를 조작했다.
“아, 아아앙…….”
갑자기 아키노가 대 위에 앉은 채 다리를 크게 벌리고, 그 가랑이 사이에 손을 대며 요염한 신음 소리를 냈다.
“어, 어이…….” 전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지금 그녀는 귀에 달린 수신기를 통해 단말기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검품이 끝나면—뭐, 이미 합격입니다만—귀사에 설치된 호스트에 등록하는 즉시 가동됩니다.”
“등록은 언제 합니까?”
“전 개체 검품이 끝나는 대로입니다.”
“그렇군…….”
이윽고 마지막 인원이 검품대에 올랐다. 겉보기엔 평범한 여성의 알몸이었지만, 그 속엔 기계가 가득 차 있고 컴퓨터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전무는 그것이 믿기지 않았다.
검품이 끝나자 그녀들은 벽을 따라 알몸으로 일렬로 세워졌다. 벽에서 뻗어 나온 케이블을 가운 입은 남자가 그녀들의 귀 피어싱에 연결했다. 피어싱 디자인이 워낙 정교해 그것이 케이블 소켓일 줄은 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프로그램 체크와 미세 조정, 그리고 호스트 등록을 진행 중입니다. 배치 계획은 이미 전달받았으니 그대로…….”
전무는 이나무라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며 벽에 늘어선 알몸의 여성들을 바라봤다. 마치 상품을 진열해 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기업용 패키지도 매력적이지만, 이 기술은 그 이상의 수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이나무라가 묻자 전무는 짧게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19일 아침 · 오성물산 여자 락커룸>
하마모토 카오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원래 시간에 철저한 편은 아니다. 오늘은 당번도 아니었지만 나름 일찍 출근했다고 생각했는데, 늘 마주치던 총무과 동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타임카드는 모두 출근으로 찍혀 있는 것 같았다. 연수가 어땠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만날 수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친한 사토미마저 연수 때문에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제복으로 갈아입고 락커룸을 나섰다.
<19일 낮 · 오성물산 사원 식당>
“야, 봤어?”
“봤지! 진짜 이상해, 걔네들.”
“무슨 얘기야?” 카오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비서실의 아키모토 에미가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총무과 애들 말이야, 좀 이상하지 않아?”
“응?”
오전 내내 탕비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카오리는 몰랐지만,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아침부터 총무과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정작 당사자인 총무과 여성들은 누구 하나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카오리를 포함한 몇몇 여직원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꼭 로봇 같아.”
“로봇!?”
“응. 무표정하게 있다가 ‘안녕’ 하고 인사하면 영업용 미소로 ‘안녕하십니까’ 이러는데…….”
“맞아 맞아, 그 말투가 진짜 소름 돋아. 뭐랄까, 그……”
“자동응답기 테이프 같아.”
“그래, 그거! 감정이 하나도 안 실려 있다고 해야 하나. 전화 응대도 그것보단 낫겠다 싶더라니까.”
카오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한 명이 장난스럽게 외치자 카오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연수라는 거, 대체 어떤 연수였을까…….”
“그러니까 말이야.” 에미가 맞장구쳤다. “총무과 애들이 저러니까 도무지 정보가 안 들어와.”
“음…….”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거 아냐?” 한 명이 입을 뗐다.
“그거라니?”
“자기계발 세미나 같은 거.”
“에이, 설마.”
“근데 딱 그런 느낌이잖아. ‘당신은 오늘부터 새로운 자아로 태어납니다’ 뭐 이런 거.”
꺄르르 웃음소리가 터졌다. 흉내 낸 말투가 웃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카오리는 웃지 못했다.
“메일 보내면 안 되려나?”
“누구한테?”
“사토미. 오늘 연수 갔거든.”
“일단 보내봐. 안 되면 나중에 답장 오겠지.”
“그렇겠지…….”
카오리가 휴대폰을 꺼냈다. 몇 분 뒤,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19일 오후 · 오피스 테크노 공업 M공장 플랜트 제어실>
“오늘 28명 아니었나?”
“한 명 결석해서 27명이래.”
“그럼 남은 한 명은?”
“출근하는 날 바로 집어넣는다던데.”
가운 입은 남자 둘이 작업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눴다. 그 옆에서 똑같은 가운을 입은 여성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단말기를 조작했다. 그녀들의 작동은 안정적이었다. 도입 이후 지금까지 트러블은 거의 없었다.
그들 앞으로 젊은 여성을 태운 대가 약 1분 간격으로 통과했다. 한 시간 넘게 마취 가스 캡슐 안에서 ‘가스에 절여진’ 그녀들은 밖으로 나온 뒤에도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설령 의식이 있다 해도 몸을 비트는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녀들의 몸은 밴드 형태의 구속구로 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도망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스캐너 터널을 지나 뇌 개조 장치로 향하는 여성들. 잠든 사이 그녀들의 뇌에는 제어 장치가 심어지고 자유 의지는 박탈된다. 신체 내부가 기계로 대체되고, 다시 눈을 뜰—아니, 눈을 뜨게 될—때는 귓불의 수신기를 통해 호스트 컴퓨터의 명령을 따르는 인형 단말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틀이나 보니까 질리네.”
“그러게.”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곳에 배치된 OARL 역시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그들이 직접 움직일 일은 없었다. 어제도 스무 명 넘는 알몸의 여성을 봤지만, 이제 그들에게 그것은 소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 자기 회사 여직원들이 OARL화될 때는 나름 흥분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제품일 뿐이고 심지어 자기 소유도 아니다. 개인용으로 제품화해도 좋겠지만, 이 시스템은 다수를 효율적으로 굴리는 데 의미가 있어 개인 사용자가 관리하기엔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진다. 물론 이런 제품을 원하는 자들은 아무리 비싸도 사겠지만 말이다. 요청만 있다면 언제든 대응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아직 그런 고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옆방 검품대 위에 OARL화된 여성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슬슬 가볼까.”
두 사람이 옆방으로 향했다. 그 옆에서 여성들은 차례차례, 그리고 착착 OARL로 변해가고 있었다.
<19일 낮 · 쿠리타 사토미의 집>
사토미는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뭐야…… 카오리네…….”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어젯밤부터 심한 두통 때문에 앓아누워 있었다. 낮까지 푹 자서 그런지 컨디션은 좀 나아진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나 가지도 않았는데…….”
두통 때문에 연수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대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음…….” 역시 머리가 무거웠다.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온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19일 저녁 · 오성물산 여자 락커룸>
“사토미 오늘 쉬었대.”
카오리가 에미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총무과 애들은?”
에미가 카오리의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총무과 애들 말인데…….”
“왜 그래?” 카오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녀는 오후 내내 자리에서 일어날 틈이 없었다.
“아직 일하는 것 같던데…… 못 봤어?”
“못 보다니, 뭘?”
에미는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카오리가 그제야 눈치를 채고 에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 애들, 전부 똑같은 피어싱을 하고 있어…….”
카오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 근데 역시 이상해. 어제 연수, 대체 뭐였던 걸까?”
문이 열렸다. 총무과 직원들이 일제히 무표정한 얼굴로 락커룸에 들어왔다. 에미와 카오리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해 두 사람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화장도 고치는 둥 마는 둥 문으로 향했다.
“먼저 가볼게요.” 에미가 가볍게 목례하며 문을 나섰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답이 돌아왔다. 에미는 공포에 질려 문을 쾅 닫았다.
문밖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에미와 카오리.
“봤지?” 에미가 말했다.
“응.” 카오리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으면 안 돼. 빨리 나가자.”
“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걸음이 빨라졌다. 두 사람은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왔다.
“어떡해…….” 에미가 울먹였다. 총무과 애들은 피어싱만 똑같은 게 아니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가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아니,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그 억양 없는 목소리는 멍한 미소를 띤 소녀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 회사 그만둘래…….” 에미가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카오리가 뒤쫓았다.
“봤잖아, 걔들. 틀림없어. 연수에서 무슨 짓을 당한 거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내일 가면 걔들처럼 될 거야. 그러니까 그만둘래…….”
에미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말했다.
“에미 씨, 내일 연수야?”
“응. 그러니까 내일 연수 안 가고 사표만 내고 올 거야.”
“나는…….” 카오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에미의 얼굴은 공포를 넘어선 결연함으로 가득했다.
“카오리, 넌 연수 언제야?”
“금요일.”
“납득할 때까지 잘 생각해 봐.” 에미가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갔다.
“잠깐만…… 아, 그러고 보니 사토미 오늘 쉬었대.”
“다행이네. 걔한테도 말해줘. 빨리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그 연수, 정상이 아니야.”
에미는 카오리를 남겨둔 채 성큼성큼 멀어졌다. 카오리는 쫓아가는 걸 포기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홀로 밤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20일 아침 · 오성물산 비서실>
“허어, 이거 곤란하군…….”
“대체 저 두 사람은 누굽니까?”
아키모토 에미는 비서실 아키야마 과장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사표를 확인한 아키야마는 난감한 표정으로 사표를 훑어보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은 오늘부터 비서실로 발령 났네. 자네야말로 연수도 안 가고 이런 사표나…… 인원수 맞춰서 예약해 뒀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않나.”
아키야마는 정말 곤란하다는 듯 느릿하게 말했다. 그 와중에도 눈은 한 줄짜리 사표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쨌든 저 그만둡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에미가 나가려 하자 아키야마가 그녀를 불러세우며 전화를 걸었다. 오늘 연수 간 아키코와 마사에의 책상에는 다른 두 명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에미는 그 두 사람의 귀에 달린 피어싱을 발견했다.
‘이 애들도…….’
그때 아키야마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걸 직접 타카기 부장님께 가져다주겠나?”
“싫어요…… 전……” 에미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뭐, 뭐야…….”
옆 책상에서 ‘발령’ 받아 온 두 명이 일어나 문 앞을 가로막았다.
“자네가 말을 안 들으니 이 애들이 움직이게 되잖나…….” 아키야마가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미는 아키야마를 등진 채 뒷걸음질 쳤다.
“예정 변경을 확인했습니다.”
갑자기 한쪽 여자, 제1영업부에 있던 나카타 유미코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예정 변경을 확인했습니다.”
다른 한 명, 제2영업부였던 무라야마 이쿠코도 똑같은 말투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에미에게 다가왔다.
“뭐야…… 왜 이래…….” 에미가 뒷걸음질 쳤다. 아키야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어쩔 수 없군’이라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아키야마 과장에게 통달. 타카기 부장의 지시에 따라 아키모토 에미를 운송합니다. 투입 인원 나카타 유미코(NakataYumiko), 무라야마 이쿠코(MurayamaIkuko), 카와하라 케이코(KawaharaKeiko) 총 3명. 금일 예정 업무는 금일 및 내일 작업 시간 30분 연장으로 소화. 통달을 확인해 주십시오.”
유미코의 입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합성 음성 같은 말이 흘러나왔고, 아키야마는 “확인”이라고 짧게 답했다. 에미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만은 확실히 깨달았다.
“싫어!”
에미가 유미코와 이쿠코 사이를 빠져나가려 달렸지만, 간단히 저지당했다. 두 사람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고, 에미는 양어깨를 붙잡힌 채 제압당했다.
“놓으라고! 이게 뭐야!” 에미가 발버둥 쳤지만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운송을 개시합니다.”
이번엔 이쿠코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에미는 질질 끌려가듯 문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타카기 부장이 서 있었다.
“아키모토 양, 곤란하군. 멋대로 행동하면.”
“뭐예요!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별로 걱정할 것 없네. 자네도 이 애들처럼 OARL이 되면 그만이니까.”
“O, A, R, L?” 에미가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래. 오피스 오토메이티드 로봇 레이디(Office Automated Robot Lady)라고 하더군. 뭐, 조만간 더 나은 이름을 생각해보겠지만. 지금 전무님이 사장님과 우리 회사에서 취급해볼까 상담 중이시거든.”
“뭐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에미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신경 쓸 것 없다는 거야. 저녁이면 자네도 OARL이 되어 있을 테니까. 데려가.”
부장의 지시에 두 사람이 움직였다. 저항해도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에미는 기계에 실려 가듯 건물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때 그녀의 눈에 다른 여직원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와주세요! 제발!” 에미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아키모토 에미, 확인.”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전무의 벤츠가 나타났다. 운전석의 여자 역시 귀에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카와하라 케이코라는 이름이었던 그 여자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에미는 질질 끌려 뒷좌석에 태워졌다. 문이 닫히자 차가 출발했다. 창문에는 짙은 틴팅이 되어 있었다. 에미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20일 아침 · 오성물산 제1영업부>
쿠리타 사토미는 평소처럼 출근했다.
“안녕.” 영업부 사무실에서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성의 없는, 억양 없는 인사가 돌아왔다. 여직원들은 모두 똑같았다. 자리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고 있었다. 고개조차 까딱하지 않는 그녀들의 모습에 사토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무슨 일 있었어?” 옆자리의 이케하라 카나코에게 물었지만, 카나코는 아무런 반응 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다들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쿠리타 양, 잠깐.” 과장이 사토미를 불렀다.
“네?”
“부장님 전화인데…… 미안하지만 지금 바로 연수 장소로 합류하라고 하시네.”
“하지만…….”
“됐으니까. 장소는 알지? 가서 갈아입으면 되니까 얼른 가봐.”
사토미는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라면 누군가 한마디 거들었을 텐데, 오늘은 아무도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사토미는 마지못해 따랐다.
사무실을 나왔다. 엊그제와는 회사 분위기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연수라는 게 대체 뭐길래?’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일단 연수 장소로 향했다.
<20일 오전 · 북가 제3빌딩 지하 1층>
“저기…….”
“지금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쿠리타 사토미는 낯선 안내원에게 제지당했다. 그 여자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응대는 극히 사무적이었고, 사토미는 조금 짜증이 났다. 게다가 미소가 마치 고정된 것처럼 입가와 눈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말투도 억양 없는 기계음 같았다. 사토미는 짜증 너머의 기괴함을 느꼈다.
‘합류하라고 해서 왔더니만…….’
안내 데스크 옆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안쪽에서 ‘우당탕’ 하고 뭔가 정리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안내원이 그녀를 돌아보며 아까와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사토미는 대답도 않고 문을 열었다.
“이게 뭐야……?”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에 그녀는 넋을 잃었다.
레오타드나 웨트슈트처럼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은색 옷을 입은 여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여러 명의 여성이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중얼거린 순간, 은색 옷의 여자 두 명이 그녀 옆에 나타났다.
“뭐야? 싫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안 돼, 싫어!”
한 명에게 제압당하고, 다른 한 명에게 옷이 벗겨졌다.
“뭐 하는 짓이야!”
대답은 없었다. 대신 여자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시선 외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힘은 무지막지하게 세서 사토미가 저항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사토미는 저항을 포기하고 몸을 맡겼다. 자신의 힘으로는 무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붙잡힌 부위가 너무 아팠다. 그때 그녀는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은색 옷의 여자들이 바닥에 쓰러진 동료들을 알몸으로 만들어 기묘한 캡슐 속에 눕히고 있었다.
‘대체 뭐야?’ 사토미는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사토미도 알몸이 되어 여자들에게 들려 올라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 역시 동료들과 똑같은 캡슐에 갇혔다. 침대 같은 부분에 팔다리가 밴드로 고정되자 다시 저항하려 했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몸부림치는 그녀 위로 투명한 캡슐 뚜껑이 닫혔다.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뚜껑이 닫힘과 동시에 ‘슈우’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뿜어져 나왔다.
‘뭐야, 이거, 어…….’
그것이 가스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몸이 마비되고 사고가 멈췄다. 사토미는 의식을 잃었다.
<20일 오후 · 오피스 테크노 공업 M공장>
“아…… 아으…….”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떠는 에미.
“무서워할 것 없네. 순서상 마지막이긴 하지만 자네도 저들처럼 처리를 받을 테니까. 그러면 공포고 뭐고 느낄 수 없게 되지. 자네의 경우엔 실험적으로 마취 없이 처리를 진행하기로 했네. 상사의 허락도 받았지.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생생하게 맛볼 수 있을 거야.”
“그…… 그럴 수가…….”
“자네가 순순히 연수를 받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면 지금이라도 저 캡슐에 들어갈 텐가?”
에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가리킨 캡슐 안에는 동료 미시마 소노코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묶여 잠들어 있었다. 그 캡슐도 차례로 운반되어 컨베이어에 실렸다.
에미에게는 더 이상 저항할 기력이 없었다. 공장으로 끌려온 그녀는 동료들이 개조되어 피어싱을 단 ‘로봇’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상세한 해설과 함께 지켜봐야 했다. 게다가 이 공장의 여성들이 모두 그 ‘OARL’이라는 사실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금 남자의 옆에는 가운 입은 두 명, 아니 두 기의 OARL이 서 있었다. 도망치려 해도 순식간에 붙잡힐 게 뻔했다. 실제로 한 번 시도해봤지만 5초도 버티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였다. 스스로 캡슐에 들어가 잠든 채 기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의식이 있는 채로 기계가 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둘 다 싫다’고밖에 할 수 없었지만, 선택지는 그뿐이었다.
“자, 어떡할 건가? 나름 선택의 자유를 줬는데. 결정을 내려야지.” 남자가 즐겁다는 듯 말했다.
에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옆에서 캡슐 속 동료를 태운 대가 끌려 나갔다. 플랜트의 기계는 일정한 속도로 에미의 동료들을 착착 OARL화하고 있었다.
“보라고, 이제 시간이 없어.”
마지막 남은 캡슐이 컨베이어에 실렸다. 슬쩍 훔쳐보니 어제 쉬었던 쿠리타 사토미였다.
‘결국 쿠리타 씨도…….’
에미는 생각했다. 곧 자신에게도 같은 운명이 닥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남자가 차갑게 내뱉었다.
“시간 초과다.”
남자는 몸을 돌려 OARL들을 데리고 걸어갔다. 동시에 그녀의 팔이 강하게 붙잡혔다.
“아…… 아아아…….”
에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공포 때문에 허리가 빠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서지 않아도 양옆에서 단단히 지탱해 주었다. 그녀를 붙잡은 건 은색 전신 슈트를 입은 여자들이었다. 역시 피어싱을 한 채 에미를 물건 다루듯 취급했다. 무엇보다 에미를 두렵게 한 건, 그녀들이 아까 본 가운 입은 여성들과 똑같이 감정 한 조각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싫어…….”
공포에 질려 저항도 못한 채 옷이 벗겨졌다. 에미의 눈에 유리 너머의 광경이 비쳤다. 지금 자신의 옷을 벗기는 여자와 똑같은 허망한 표정으로 알몸으로 늘어선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에미의 눈이 커졌다.
‘나도 저렇게 되는구나…….’
에미는 멍한 정신으로 알몸이 된 채 대 위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 컨베이어에 실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상하게도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체념이 그녀를 지배했다. 전신 스캔 터널을 지나자 첫 번째 기계가 보였다. 기계의 일부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
그녀는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기계가 그녀의 머리를 블록처럼 덮었고, 다음 순간 귓불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몸이 서서히 마비되었다. 마비되는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빈혈 때처럼 머릿속이 저릿해지며 사고가 마비되었다. 기계가 자신에게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건 느껴졌지만, 그게 뭔지 생각할 수 없었다. 눈을 부릅뜬 채 그녀는 기계에 몸을 맡겼다. 뺨이 양쪽에서 압박되며 입이 벌어졌다. 이번엔 호흡기 같은 커버가 달린 튜브가 입을 향해 내려와 달라붙었다. 구강 내로 튜브가 침투하자 입안에 쓴맛이 퍼지며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튜브에서 뭔가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뿌리를 내리듯 그녀의 머릿속으로 퍼져 나갔다.
(…………!!!!)
에미의 눈이 뒤집혔다. 뇌 속에 그녀를 제어하기 위한 기계와 마이크로칩이 차례차례 매립되고 있었다. 에미는 머릿속을 휘젓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녀의 눈은 이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온갖 기억이 뒤섞이며 떠올랐다 사라졌다. 에미는 자신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고통이 옅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더 이상 에미가 아니게 되었다.
이윽고 구강에서 튜브가 빠지고 머리를 고정하던 기계가 올라갔다. 컨베이어가 전진했다. 그사이 약 1분 30초. 다음 장치에 도착하자 양팔이 기계에 덮였고, 다시 1분 30초 뒤 기계가 올라갔다. 이어 다리, 상반신, 하반신이 차례로 기계에 덮여 매립 작업이 진행되었다.
소체였던 아키모토 에미가 컨베이어에 실린 지 10분 만에, 아키모토 에미(AkimotoEmi)는 태어난—아니, 다시 태어난 모습으로 검품대에 올랐다. 초점 없는 눈에 무표정한 얼굴. 공장 직원이 단말기에 검사용 키를 입력하고 지시를 내리자 에미는 정해진 대로 검사 동작을 수행했다. 직원은 작동을 확인한 뒤 검사 종료 키를 눌렀다. 동시에 에미의 뇌에 심어진 제어 장치에는 피어싱을 통해 벽 쪽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에미는 벌떡 일어나 동료들이 늘어선 벽 끝 설정용 챔버에 섰다. 직원이 챔버 소켓에서 뻗어 나온 케이블을 귀 피어싱에 연결했다. 그렇게 에미는 호스트 컴퓨터에 의한 오성물산용 OARL로 설정되어 메인 서버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21일 오전 · 오성물산 자재부>
하마모토 카오리는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 평소처럼 출근했음에도 락커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사토미나 에미도 보지 못했다. 오늘 같은 날은 탕비실에서도 늘 보던 자재부나 관리부 직원들뿐이고, 다른 부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오늘 마주쳐 대화를 나눈 자재부와 관리부 직원들은 아직 ‘연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른 부서 직원들의 귓불에는 모두 그 피어싱이 빛나고 있었고, 얼굴에는 억지로 지어낸 듯한 허망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엊그제 락커룸 사건 이후 그녀는 동료들의 귓불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머리가 짧은 사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피어싱을 한 동료들은 모두 똑같은 움직임으로 싹싹함이 사라졌고, 지시받은 대로 묵묵히 일만 했다.
‘역시 세뇌 세미나 같은 걸까…….’ 그녀는 생각했다. ‘회사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세뇌당해서 동료들 챙길 여유도 없게 만든 건가…….’
하지만 그녀는 주변에 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에미의 이야기가 여전히 불안을 자극하고 있었고, 그 이야기가 동료들의 태도를 ‘수상하게’ 여기도록 부추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말 회사가 어려워서 압박을 준 것뿐일지도 몰라…….’
카오리에게 에미의 이야기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에미와는 오늘 만나지 못했다. 어쨌든 내일 연수를 받아보면 알게 될 일이지만, 그 연수 자체가 두려워진 건 에미의 말 때문이었다.
‘일단 에미 씨가 정말 그만뒀는지 확인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걷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기도 전에 어깨를 툭 쳤다.
“들었어?”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같은 자재부의 야마네 하루나였다.
“뭐를?”
“내일 연수 있잖아. 그거 끝나면 다들 반강제적으로 새로운 여직원 기숙사에 들어간대.”
“뭐?” 카오리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조용히 해.” 하루나가 주의를 주었다.
하루나는 카오리를 탕비실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카오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러니까, 연수 끝나면 반강제적으로 새 기숙사로 옮겨야 된대.”
“왜?”
“나야 모르지. 근데 연수 끝난 애들은 벌써 들어갔나 봐.”
“말도 안 돼! 그런 소리 처음 들어…… 이사하려면 준비도 해야 하는데.”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지.”
“누가 그래?”
“우리 신입 사원 중에 유키코라고 있잖아. 걔가 아직 기숙사 사는데, 옆방 친구가 안 돌아오길래 걱정돼서 회사에서 물어봤나 봐. 그랬더니 새 기숙사로 이사 갔다고 하더래. 그것도 엄청 사무적으로.”
“그래서?”
“유키코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까, 너도 모레면 들어가게 되어 있다고 그랬대…….”
“그다음엔?”
“그게 다야. 근데 보통 급하게 이사하라고 해도 옆방 친구한테 말 한마디 없이 가겠어? 게다가 평소에 친했는데 태도가 너무 차가웠대.”
“근데 말이야.” 카오리가 물었다. “새 기숙사가 어디야?”
하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모른다니까…… 이런 게 말이 돼? 게다가 모레면 토요일이잖아.”
카오리도 의구심이 들었다. 확실히 이상한 일투성이지만, 이번 연수 자체가 이미 이상했다.
“저기, 우리 회사 괜찮은 걸까…… 지금 기숙사, 사실 이미 회사 소유가 아니게 된 거 아냐?”
카오리는 현실적인 추측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연수에서 회사의 궁핍한 사정을 주입하고 바로 이사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말이 됐다.
“그러게…… 꽤 위험할지도 모르겠네…….” 하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카오리는 여전히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21일 오후 · 오피스 테크노 공업 M공장>
오늘도 예정대로 오성물산 여직원들의 OARL화가 진행되었다. 나흘째가 되니 직원들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제 그들은 대상을 여성으로 보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검품이 진행되었다.
“아주 흥미로운 제안이군요.”
오피스 테크노 공업의 사장 오오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OARL 플랜트 작업을 지켜보며 오성물산 전무가 이 상품을 직접 취급하고 싶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도 접수 로봇이 안 팔렸으면 꽤 위험했습니다만…… 저것 덕분에 겨우 살아났죠. 타사 제품이 없는 틈새시장을 공략해왔으니까요.”
“하지만 소체 확보 방법과 판매 루트만 확실하다면, 이런 대형 패키지뿐만 아니라 개인용이나 더 작은 상품도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판매 루트를 저희가 돕겠다는 겁니다. 오피스 테크노의 기술력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이 패키지로만 썩히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생체 뇌 기능을 활용한 방식은 타사보다 훨씬 앞서 있을 테니, 기존 로봇에 만족하지 못하는 고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전무가 단숨에 몰아붙였다.
“예를 들면요?” 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를 들어, 성인 유흥 산업으로의 합법적이고 대규모적인 진출이 가능해지죠. 유흥 산업은 로봇의 등장으로 꽤 양지화됐습니다. 공영 사업 이야기까지 나오는 시대니까요. 예전엔 항상 젊고 인기 있을 법한 여성을 확보해야 했지만, 로봇의 등장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졌고 인권이나 질병 문제도 해결됐죠. 하지만 지금도 정말 인기 있는 건 생생한 아이돌급 여성을 갖춘 업소입니다. 가격이 서너 배 비싸도 남자들은 진짜 여자를 찾거든요.”
“………….”
“성욕 처리 전용기의 신체 질감이나 그곳의 감각, 프로그램된 테크닉은 이제 진짜 여자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세상 남자들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죠.”
“과연, 유사 연애 같은 감각 말이군요.”
“역시 사장님, 정확하십니다. 아무리 소프트웨어가 진화해도 그것만큼은 완벽할 수 없죠. 하지만 사장님네 상품은 신체가 완전히 기계인 건 아닙니다. 질감 구현에 공을 덜 들여도 된다는 뜻이죠. 그리고 생체 뇌 기능을 활용한다는 건, 기존 로봇이 해내지 못한 ‘감정이 담긴 서비스’에 한없이 가까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합법적이라고 해도 결국 인권을 무시한 배덕적인 상품 아닙니까?” 사장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전무에게 유도하는 것이었다.
“소체 공급과 판매 루트 확립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처음엔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인터넷 등을 통해 조용히 시작하죠. 그리고 어느 정도 샘플이 모이면 몇 명의 소체를 골라 저희와 협력 관계인 바이오 기업으로 보낼 겁니다.”
“허어, 그래서요?”
“사장님, 그런데 지금 이 제안, 받아들이실 생각은 있으신 겁니까?”
“패를 다 까기 전에 확인부터 하겠다는 건가…….” 사장이 옆의 비서를 쳐다봤다. 물론 비서도 OARL이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장이 말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다른 여성이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사장이 그 서류를 전무에게 보여주었다. 계약서 초안이었다.
“과연…….”
“전무님, 자네가 말하지 않았어도 이쪽에서 먼저 제안하려던 참이었네. 우리도 뒷배가 있어 어떻게든 버티지만, 양지든 음지든 더 안정적인 수익원이 필요했거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하시죠.”
“네. 사실 저희 회사는 그 바이오 기업의 클로닝(Cloning) 기술도 상품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술을 이쪽에 접목하려는 거죠.”
“그러니까 인기 유흥업소 여자의 클론을 대량 생산해서 OARL화해 공급하겠다는 거군.”
“정확하십니다. 인간 클론은 금지되어 있지만 로봇이라고 해버리면 문제없죠. 공급원도 확보되고요. 테크닉은 소프트웨어로 해결하고, 생체 뇌에 서비스 정신을 주입해두면…….”
“전무님, 내일 최종 납품 겸 귀사로 가겠네. 이 초안으로는 안 되겠어. 그쪽에서 새로 작성해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저희 사장님과 상의해서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때 협의하시죠.”
“좋네. 사장님께 내일 뵙는 걸 기대하고 있다고 전해주게.”
전무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정중히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이나무라 군, 그렇게 됐네. 이제 바빠질 거야.”
“네, 사장님!” 이나무라도 신이 났다. 그 옆에서 오성물산의 오늘 마지막 여직원이 스캐너 안으로 들어갔다.
<21일 밤 · 오성물산 여직원 기숙사 앞>
“꼭 공장 같아…….”
카오리가 중얼거렸다. 이곳에 오기까지 놀라움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퇴근 후 락커룸에서 마치 비디오를 재생하듯 똑같은 움직임, 똑같은 표정, 똑같은 몸짓으로 쏟아져 나오는 ‘피어싱 달린’ 동료들. 그녀들은 누구 하나 딴길로 새지 않고 개미 떼처럼 이 ‘새로운 기숙사’를 향해 걷고 있었다.
카오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며 동료들을 미행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움직였다.
차례차례 락커룸에서 나올 때와 똑같이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는 동료들. 하지만 그 기숙사는 그녀의 예상대로 공장이나 연구소 같았다. 외관은 평범한 빌딩과 그 옆의 창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어?’
안쪽을 살피려던 그때였다. 낯익은 얼굴들이 연달아 안으로 들어갔다.
‘사토미…… 에미 씨도.’
엊그제 쉬었던 사토미와 어제 회사를 그만둬야 했던 에미였다. 그녀들 역시 다른 여자들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기계를 보듯 일정한 속도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카오리는 확인했다. 두 사람의 귀에도 그 피어싱이 빛나고 있었다.
‘그 두 사람도 결국 연수에 갔구나…….’ 카오리는 생각했다. 연수에 간 동료들이 지금 눈앞의 모습처럼 일관된 표정과 몸짓으로 움직이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연수에 가면 자신도 저렇게 된다는 뜻이다. 찰나의 순간, 혹시 연수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돌리려고 연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곧 지워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대체…….
‘역시 세뇌 세미나…….’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묘한 비디오를 보거나 약을 먹고, 여러 과정을 거치다 보면 교주의 말에 복종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TV에서는 세뇌니 마인드 컨트롤이니 떠들어댔지만, 지금 사토미나 특히 에미를 보고 있자면 그런 설명 말고는 이 상황을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확실히 따돌림당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보다 세뇌당하거나 조종당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훨씬 컸다.
‘혹시 이 안에서도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 아냐?’ 카오리는 생각했다. 종교 단체들이 ‘수행’이라는 명목으로 세뇌 효과를 높이는 걸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무섭네’ 정도로 넘겼지만, 자신이 그런 상황에 직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좋아!’
들어가는 인영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기숙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건물 안은 병원 같았다. 넓은 복도가 이어졌다. 복도를 따라 쭉 가니 옆 창고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향했다. 종교 단체 이야기라면 대강당 같은 곳에서 ‘수행’이 이루어질 터였다.
이윽고 도착한 곳의 커다란 미닫이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 안을 살폈다.
‘?’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투명한 원통형 물체들이 늘어서 있었다. 인기척이 없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표본실 같았다. 약간 기울어진 대 위에 여성들이, 그것도 그녀가 잘 아는 얼굴들이 무표정하게 눈을 뜬 채 알몸으로 부동자세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위로 반원통형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녀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지만, 엉덩이 쪽에서는 튜브가 뻗어 나와 대 아래 기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떨리는 다리로 ‘표본’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우스꽝스럽게도 표본들 사이사이에는 평범한 락커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락커 하나를 열어보니 표본이 된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와 소지품이 정돈되어 있었다.
‘뭐야…… 대체…….’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하며 걸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도 카오리를 보고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사토미…… 에미 씨…….”
두 사람은 나란히 표본—아니, 캡슐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알몸으로 눈을 뜬 채 부동자세였다. 아래 기계에서 뻗어 나온 튜브가 가랑이 뒤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토미!”
눈을 뜬 사토미에게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사토미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에미도 마찬가지였다. 멍한 눈은 허공을 응시할 뿐 미동도 없었다. 그때 문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다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문득 사토미의 락커를 열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머리 높이의 틈새로 빛이 들어왔다. 락커 안의 구겨진 옷들을 보니 틀림없는 사토미의 옷이었다. 잠시 후 카오리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토미…….’ 그녀는 사토미가 더 이상 예전의 사토미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사토미와 에미, 그리고 동료들은 ‘연수’에서 ‘무언가’를 당해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증거가 귓불의 피어싱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틈새로 비치는 빛에 그림자가 졌다. 카오리는 조심스레 밖을 엿보았다.
예상대로 오늘 연수를 받았을 동료들이 사토미 일행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정한 간격으로 걷더니 비어 있는 캡슐 앞에 멈춰 서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벗은 옷을 옆 락커에 정갈하게 집어넣었다. 알몸이 된 그녀들 앞의 캡슐이 전투기 조종석처럼 열렸다. 아래에서 튜브가 뻗어 나왔다. 그녀들은 그 튜브를 손에 쥐더니, 모두 똑같은 동작으로 망설임 없이 자신의 항문에 찔러 넣었다.
카오리는 그 모습에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동료들은 망설임도 수치심도 없이, 마치 조이스틱으로 입력된 게임 캐릭터처럼 행동한 뒤 캡슐 안에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팔다리가 자동으로 고정되고 캡슐이 닫혔다. 그녀들도 차례차례 ‘표본’의 무리에 합류했다.
다시 실내가 조용해지자 카오리는 락커 밖으로 나왔다. 방금 캡슐에 들어간 동료들을 살피며 걸었다. 그녀들에게도 역시 피어싱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그녀는 빈 캡슐들을 발견했다.
‘아직 더 있어…… 설마!’
의문이라기보다 확신이었다. 빈 캡슐을 세어보니 정확히 31개. 내일 예정된 연수 참가 인원과 일치했다.
‘말도 안 돼…….’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귀에 피어싱이 박힌 채 캡슐 안에서 눈을 뜨고 알몸으로 굳어 있는 자신의 모습……. 내일 연수에 가면 그것이 현실이 될 게 뻔했다.
“싫어…….”
카오리는 비명을 삼키며 그곳을 뛰쳐나왔다.
<22일 오전 · 오성물산 자재부>
“뭐라고요…….” 자재부 3과 쿠로키 과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연락해보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쿠로키. 오늘 연수 예정자 31명 중 그의 부하인 하마모토 카오리만 참석하지 않았다.
“쳇, 이럴 땐 로봇들도 쓸모가 없군…….” 중얼거리며 서랍에서 주소록을 찾았다. 그의 앞에서는 오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파견된 두 기의 OARL이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한 명은 비서실의 카타가와 마유미(KatagawaMayumi), 다른 한 명은 제2영업부 2과의 오하라 메구미(OharaMegumi)였다. 이들이 카오리와 안면이 있는지는 쿠로키도 알 길이 없었다. 결국 쿠로키가 직접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마모토, 하마모토…… 여기 있군.”
수화기를 들고 어깨로 받친 채 번호를 눌렀다.
<22일 오전 · 하마모토 카오리의 집>
따르릉…… 따르릉…….
“으음…… 어?”
깜짝 놀라 일어난 카오리. 시계를 보니 열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밖은 이미 환했다.
어젯밤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불안감에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들기 전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수화기를 잡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수에 가면 사토미처럼 될 텐데……. 하지만 그녀는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하마모토냐?”
“과장님, 죄송합니다…….” 쿠로키의 목소리였다.
“감기냐?”
“아뇨, 죄송합니다. 금방 갈게요.”
“아니, 잠깐 기다려봐.”
잠시 보류음이 흐르더니 툭 끊겼다.
“여보세요?”
“아, 미안.” 다시 쿠로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연수 안 가도 된단다. 지금 오면 얼마나 걸리겠어?”
“어…… 한 시간 정도요.”
“집에서 나오는 데는?”
“네, 한 30분 정도면…….”
“알았다. 부탁하마.”
전화가 끊겼다.
‘빨리 가야 해…….’ 카오리는 생각했다. 이런 늦잠은 처음이었다.
‘나쁜 꿈을 꾼 거야, 분명히.’ 그녀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연수 내용에 대한 의구심이 그런 악몽을 꾸게 한 것이라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머리와 화장을 정돈했다. 정확히 30분 뒤, 그녀는 문을 열었다.
‘이럴 땐 기숙사면 좋았을 텐데!’ 기숙사라면 회사까지 뛰어서 5분이다. 카오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파트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그 아래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사토미!”
“데리러 오라고 해서.”
바로 옆에 전무의 벤츠가 서 있었다.
“데리러 오다니…… 이걸 타고?” 벤츠를 가리키는 카오리. 사토미는 뒷좌석 문을 열며 손짓했다.
“세상에!” 카오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토미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카오리가 탄 뒤 사토미가 타고 문이 닫혔다. 그때 카오리는 깨달았다.
“사토미?”
사토미는 완전히 무표정했다. 그리고 그 귓불에는 피어싱이 빛나고 있었다.
“쿠로키 과장에게 통달. 하마모토 카오리를 확보. 지금부터 운송합니다. 확인 바랍니다.”
운전석의 카와하라 케이코가 그렇게 발음하고 있었다.
“운송을 개시합니다.” 몇 초 뒤 케이코가 중얼거리자 차가 출발했다.
“운송이니 확보니, 그게 무슨 소리야?” 카오리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케이코도 사토미도, 그리고 사토미 반대편에 카오리를 끼고 앉은 다른 여자도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었다.
‘말도 안 돼…….’
카오리는 마침내 깨달았다. 어제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 사토미도, 이 차에 탄 다른 여자들도 모두 ‘무언가’를 당해 로봇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카오리가 겁에 질려 사토미의 얼굴을 보자 사토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운송이란 대상을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것입니다. 확보란 대상을 확인 보호하여 감시하에 두는 것입니다.”
“사토미……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사토미(KuritaSatomi)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려줘!” 문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헛수고였다. 사토미와 반대편 여자가 믿기지 않는 힘으로 카오리의 양어깨를 눌렀다.
“이거 놔! 놓으라고!” 카오리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사토미! 대체 왜 이래! 원래대로 돌아와!” 카오리가 울먹이며 외쳤다. 하지만 사토미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대체 왜 이래, 라는 질문의 의도를 판별할 수 없습니다. 원래대로 돌아와, 라는 질문의 의도를 판별할 수 없습니다.”
“사토미…….”
“대상 하마모토 카오리 확보 지속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쿠리타 사토미(KuritaSatomi) 컨트롤 유닛의 부하가 옐로 존에 도달했습니다. 케이스 2로 이행합니까?”
사토미는 혼잣말하듯 발음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카오리.
“사토미, 대체…….”
사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했다.
“케이스 2로 이행합니다. 히라카와 전무에게 통달. 하마모토 카오리에게 마취를 사용합니다. 확인 바랍니다.”
“마취라니…… 싫어…….”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카오리.
“마취 사용을 개시합니다.” 사토미가 중얼거렸다. 마치 자동응답기 기계음처럼…….
반대편 여자가 케이스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사토미가 카오리를 다시 억눌러 목덜미를 드러내게 했다.
“싫어…… 하지 마…… 제발…….” 고개가 꺾인 채 카오리는 눈동자만 굴려 주사기를 쫓았다. 반대편 여자는 허망한 얼굴로 주저 없이 주사기를 카오리의 목덜미에 꽂았다.
“아아아아아아악!”
따끔…….
카오리의 비명과 함께 바늘이 파고들었다. 목덜미를 통해 마취액이 주입되었다.
“……아아아아.”
바늘이 빠졌다. 손발이 저리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마비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이윽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눈꺼풀이 감겼다.
‘……사토미.’
의식을 잃는 순간, 그녀의 눈앞에는 그 광경이 떠올랐다. 사토미와 나란히 캡슐 안에서 피어싱만 한 채 알몸으로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22일 저녁 · 오성물산 응접실>
“이걸로 됐군요.”
“네, 계약 성립입니다.”
양사 사장이 계약서를 한 부씩 챙겼다. OARL화된 비서가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납품은 조금 전 무사히 끝났습니다.”
“전무에게 들었습니다. 저 비서도 그렇고 정말 훌륭한 결과물이군요.”
“네. 하지만 이건 양산형이니까요. 사장님이 말씀하신 감정 시뮬레이션 모델도 시제품이 나와 있습니다.”
“허어.” 오성물산 사장 호시다가 몸을 내밀었다.
“쿠로에 군.” 오피스 테크노 사장 오오노가 이나무라 옆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명함에는 ‘오피스 테크노 기연, 쿠로에 신이치’라고 적혀 있었다.
“네. 사야, 유키.”
정장 차림의 두 여성이 들어왔다. 몸짓이 유연하고 우아해 호시다는 오랜만에 ‘진짜 여자’를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저희 회사의 개인 고객용 최고급 패키지, ‘에타나리아(Etanaria)’입니다.”
“최고급이라…… 그럼 이들도 역시?”
“네. 완전히 오더메이드로 한 구씩 제작합니다. 아직 발표 전입니다만, 사장님도 한 구 어떠십니까?” 오오노가 으스대며 말했다.
“난 로봇이랑 잘 취미는 없네만.” 남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사야와 유키도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호시다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허, 이 로봇들 웃고 있군.”
“네.” 이번엔 쿠로에가 답했다. 오오노가 설명을 유도했다.
“기본은 프로그램이지만, 생체 뇌 기능을 OARL보다 많이 남겨두고 제어 유닛을 머릿속에 내장했습니다. 모드를 전환하면 인간 시절의 자아도 남아 있죠. 뭐, 상황에 적응했는지 요즘은 프로그램처럼 고분고분해졌습니다만…….”
두 기의 에타나리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호시다. 그러자 두 기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쿠로에 씨, 이거 정말 로봇 맞나?” 호시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어 시스템에 학습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서요. 뭐, 그래서 ‘라이브 모드’, 즉 처치 전의 자아를 일부러 남겨둔 겁니다. 덕분에 미묘한 몸짓이나 표정까지 재현할 수 있게 됐죠.”
“재현?”
“이 두 기는 자율형이라 서버가 필요 없습니다. 제어 장치가 직접 생체 뇌에 액세스해 처치 전과 가장 흡사한 행동을 시뮬레이션하죠. 물론 제어 장치에는 절대복종입니다만.”
“그렇군. 이걸 그 유흥업소용으로 응용하겠다는 건가.”
“역시 사장님, 정확하십니다. 이건 이거대로 뒷세계 수요가 엄청나거든요. 가격을 아무리 올려도 살 사람은 삽니다. 전무님께 들은 프로젝트에는 이것의 보급형 모델을 개발해 투입할 생각입니다.”
“알겠네. 그런데 이 에타나리아라고 했나?”
“네. 다음 주 홍콩에서 열리는 어느 분의 파티에서 제품으로 첫선을 보일 예정입니다.”
“그게 아니라, 결국 평범하고 고분고분한 젊은 여자와 뭐가 다른 건가?”
쿠로에가 웃었다.
“뭐가 웃긴가?”
“사장님, 생물은 늙지만 에타나리아는 늙지 않습니다. 즉 스무 살짜리 여자를 에타나리아로 만들면 50년 동안 똑같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죠. 학습 기능 덕분에 사장님 취향대로 길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질리면 새로 사시면 됩니다. 질투도 하지 않죠. 50년, 아니 관리만 잘해주시면 사장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사장님 소유입니다. 소체만 지정해주시거나 데려오십시오. 제가 온 힘을 다해 제작해드리겠습니다.”
“에타나리아를 만들 수 있는 건 지금 쿠로에 군뿐이라서요.” 오오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네. 생각해보지. 그럼 일단 국내 독점권은 우리 쪽으로 하는 걸로.”
“좋습니다.”
두 사장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계약이 성립되었다.
<22일 밤 · 오성물산 여직원 기숙사>
두 남자 앞에서 무심하게 옷을 벗어 락커에 정리해 넣는 여자.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묵묵히 작업만 반복한다. 아침까지 하마모토 카오리라고 불렸던 여자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HamamotoKaori’라는 알파벳 나열로 인식된다. 물론 직원이 ‘하마모토’라고 부르면 반응하도록 서버 설정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완전히 알몸이 된 카오리는 캡슐의 보급용 튜브를 항문 소켓에 연결한 뒤 부동자세를 취했다. 팔다리가 고정되고 뚜껑이 닫혔다. 카오리는 눈을 뜬 채 슬립 모드에 들어갔다.
카오리뿐만 아니라 31구의 OARL이 차례로 캡슐에 들어가 슬립 상태가 되었다. 다른 캡슐들에도 이미 수많은 OARL이 잠들어 있었다.
“이걸로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오피스 테크노 담당자가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수령 확인 서명 부탁드립니다.”
전무가 수령증에 사인했다. 이번 납품이 모두 끝났다. ‘여직원 기숙사’라는 이름의 창고에 125구의 OARL이 수납된 광경을 보며 전무는 숨을 들이켰다. 모두가 똑같이 허망한 눈과 표정, 그리고 귀에서 빛나는 피어싱.
‘아차, 이 패키지의 상품명을 생각해야지…… 그래, 직장의 꽃…… OL…… 고참…… 그래, 꽃과 고참을 합쳐서 ‘츠보미(蕾, 꽃봉오리)’, 좋아, 이걸로 가자.’
전무는 내일 회의에서 ‘츠보미 시리즈’라는 이름을 제안하기로 마음먹었다.
※ 이 이야기는 전부 픽션이며, 등장인물 및 기타 모든 사항은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작가의 후기>
기세에 밀려 또 써버리고 말았네요. ‘귀축 기업’ 시리즈(^^; 이번에는 Karma 님이나 다른 이야기들과도 접점을 좀 만들어 봤습니다.
그나저나 사실 이 소체들의 사후 처리(관계자 압살 같은 거 말이죠)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라(참 무책임하기도 하지…), 이 소재로 더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뭐랄까, 이 세계관이 제멋대로 확장되는 느낌이라 재미있달까요…
자, 이번에는 ‘츠보미(꽃봉오리) 시리즈’ 같은 센스 없는 이름을 내뱉어 버렸습니다만, OARL 시리즈 중에서 입에 착착 붙는 괜찮은 상품명 생각나시는 분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기본적으로 소체가 없을 때는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해서 OARL화 시킨 뒤 납품하는 패턴도 있으니까, 일반 기업용으로 쓸 법한(어둠의 세계 느낌 안 나는) 이름이면 오케이입니다. 답례로 에타나리아 엘리전트 사양 한 대 증정해 드릴게요(못 해, 못 한다고…!).
그럼.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2. 12.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