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다 씨의 신연재, 『아브라멜린의 작은 상자』입니다.
개조를 통한 로봇화가 아니라 마법으로 인형이 된다는, 지금까지와는 살짝 결이 다른 작품인데요.
여자아이가 순종적이고 예의 바른 인형처럼 변해버리는 취향을 가진 분들이라면 제대로 꽂히지 않을까 싶네요.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됩니다.
“유스케, 또 너네 아버지가 수상쩍은 골동품 보내셨어.”
사쿠라다 유스케의 방으로 소꿉친구이자 하숙집 주인집 딸인 아라이 미사토가 들어왔다.
미사토의 품에는 낡은 보석함 같은 상자가 안겨 있었다.
“또 아버지야?”
부모님이 해외 주재 중이라 유스케는 아라이 집안에 혼자 하숙하고 있었다.
“여전하시네. 자, 여기 편지.”
미사토는 그렇게 말하며 유스케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를 자세히 보니 겉면에는 크로스워드 퍼즐처럼 글자가 빽빽하게 새겨진 칸들이 파여 있었다.
유스케는 미사토가 보는 앞에서 건네받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건 ‘아브라멜린의 작은 상자’라고 불린다. 술사 아브라멜린이 수호천사와 악마를 봉인한 상자로, 이걸 가진 자는 위대한 힘을 부릴 수 있다고 전해진다… 라는데.”
“이 안에 천사나 악마가 들어있다고? 수상해 죽겠네.”
미사토가 상자 뚜껑 하나를 열었다.
상자 안은 붉은 벨벳으로 덮여 있었고, 메이드복을 입은 앤틱 인형 하나가 들어있었다.
“뭐지, 이 인형은?”
미사토는 상자에서 인형을 꺼내 손에 들었다.
도자기 같은 재질의 인형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교해서, 옷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진짜 잘 만들었다.”
미사토는 감탄하며 인형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이 인형이 천사니 악마니 하는 그거라는 거야?”
“봐봐, 이 옷 등에 검은 날개가 달려 있어. 아마 이게 악마라는 뜻 아닐까?”
“흐음….”
유스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상자 뚜껑을 닫았다.
그 순간, 파칭! 하고 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인형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꺄악!”
깜짝 놀란 미사토가 인형을 놓쳤다.
하지만 인형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빛을 내뿜으며 공중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빛은 이내 사각형 감옥처럼 인형을 감쌌고, 상자에 새겨져 있던 것과 똑같은 빛나는 글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글자들은 하나둘 인형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럴 때마다 인형의 크기가 조금씩 커졌다.
마침내 인형이 사람만 한 크기가 되자 회전이 멈췄다.
공중에 남은 글자들이 단어를 형성하더니 인형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도자기 같던 옷이 보드라운 천으로 변했다.
다음 단어가 인형의 뒷머리에 박히자, 머리카락은 찰랑거리는 결을 되찾았고 머리 장식은 레이스 천으로 바뀌었다.
그다음 단어는 넷으로 갈라져 사지로 빨려 들어갔다.
장갑을 낀 양손과 니삭스에 하이힐 펌프스를 신은 두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글자가 단어가 되어 인형의 얼굴로 흡수되었다.
“아응….”
인형은 가느다란 신음 섞인 숨을 내뱉더니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메이드복 스커트를 살랑거리며 우아하게 바닥에 내려앉아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뭐, 뭐야. 이게 대체….”
“당신 누구야?”
유스케와 미사토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메이드복 차림의 여자는 유스케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제 이름은 할파스라고 합니다. 마술사 아브라멜린 님에 의해 소환되어 이 상자에 갇혀 있는 몸이지요.”
“갇혀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는 당신들의 언어로 흔히 ‘악마’라 불리는 존재입니다. 550년 전 마술사 아브라멜린 님에게 소환되었죠. 아브라멜린 님은 문자를 이용한 마법진으로 저를 포함한 여러 천사와 악마를 부리셨습니다. 이 상자에는 저의 ‘진실한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그 힘으로 저는 마법적으로 이 상자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상자에서 저를 꺼내주신 분께 복종하라는 아브라멜린 님의 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할파스는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가볍게 목례했다.
“말도 안 돼, 그런 일이….”
유스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전 주인님들도 처음엔 다 그러셨으니까요. 다시 한번 뚜껑을 열어봐 주시겠습니까?”
유스케가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찰나, 할파스는 동작을 딱 멈췄고 몸이 빛에 휩싸이며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도자기 인형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진짜네. 꿈이 아니었어.”
유스케가 상자 뚜껑을 닫았다.
인형은 다시 커지더니 메이드복을 입은 여인으로 변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해하셨나요? 이 상자의 뚜껑을 열면 저는 다시 인형으로 돌아갑니다. 또한, 상자를 연 분의 허락 없이는 이 상자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어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몇백 년이나 상자 속에 갇혀 있었다니 너무 불쌍해. 저기, 구할 방법은 없는 거야?”
“안심하십시오. 인형인 동안에는 저의 시간이 멈춰 있기 때문에, 전 주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주 짧은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이 상자가 파괴되면 저는 해방되겠지만, 저 스스로는 이 상자에 손을 대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할파스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그래? 그럼 일단 이 방 좀 치워줘. 아버지가 보낸 잡동사니 때문에 난장판이거든.”
유스케가 말했다.
“네, 주인님.”
할파스는 대답하며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두 손을 머리 위에서 교차시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할파스는 두 팔을 곧게 뻗은 채 위에서부터 양옆으로 천천히 벌렸다.
“술사 아브라멜린의 이름 아래, 지옥의 공작 할파스가 명한다. 이 방을 구성하는 만물의 정령들이여. 혼돈에서 질서로,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갈지어다.”
할파스의 양손에서 빛의 입자들이 뿜어져 나와 방 안 가득 퍼져나갔다.
“으악, 눈부셔!”
이내 방 안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고, 유스케와 미사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주인님, 이제 되었습니다.”
유스케가 조심스레 눈을 뜨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던 방이 칼같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박! 그럼 내 방도 좀 부탁해!”
“주인님의 명령이 없으면 저는 마법을 쓸 수 없습니다.”
“알았어. 유스케, 얼른 명령해 줘!”
“그래, 그럼 저기 미사토 방도 똑같이 정리해 줘.”
유스케가 말을 마치고 방을 나서 미사토의 방으로 향하자 미사토도 그 뒤를 따랐다.
할파스도 두 사람을 따라 걷기 시작했지만, 방 문턱에서 발을 멈췄다.
“왜 그래?”
“네, 주인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상자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 맞다. 그랬지. 허락할게.”
“감사합니다.”
할파스는 그제야 두 사람을 따라 미사토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사토의 방은 유스케의 방만큼 엉망은 아니었지만, 할파스가 주문을 외우자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진짜 대단하다. 또 어떤 걸 할 수 있어?”
“주인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아브라멜린 님과의 계약에 어긋나지 않는 한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다만 큰 마법에는 반작용이 따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반작용?”
“네. 마법으로 무언가를 변화시키면 인과관계가 재구성됩니다. 방 청소 정도야 문제없지만, 예를 들어 큰돈을 만들어낼 경우 그것이 존재하는 데 가장 모순이 없도록 현실이 바뀝니다. 근처 금고에서 현금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주인님의 지문이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지요.”
“그렇구나. 은근히 불편하네. 그래도 요리 같은 건 상관없지?”
“네.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해 두셨다면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재료가 부족할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든 대가가 따를 것이라 생각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오늘 비프스튜 만들려고 했는데 아직 재료를 안 샀거든. 같이 장 보러 가자.”
“주인님의 허락만 있다면 기꺼이 동행하겠습니다.”
“그래, 허락할게.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