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카소시 선생님(user/422629)이 쓰신 휴머노이드 사키의 절친, 카호 이야기에서 원래 쓰고 싶었던 클라이맥스 부분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내용이 길어져서 전후편으로 나눴어요.
후편도 완성됐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카호와, 카호네 집 하숙생이자 카호가 짝사랑하는 타츠야의 사랑의 행방을 담았습니다.
타츠야는 카호를 향한 강한 마음 때문에, 철도 기술자에서 휴머노이드 기술자로 자신의 꿈을 바꿔나가게 됩니다.
타츠야가 수험을 치르기 전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전작에서 카호의 출하 장면은 저도 쓰면서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애착이 가는 장면이었는데요. 카호는 로봇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자신의 사랑에 솔직해지지 못합니다. 그런 카호의 등을 밀어주는 게 하카소시 선생님의 히로인이자 절친인 사키, 그리고 사키의 남자친구 쇼 군입니다. 이번에는 쇼 군의 활약이 돋보이는 회차라고 할 수 있겠네요.
캐릭터 디자인을 맡아주신 Zcyonz 선생님께 일러스트를 받았습니다. 꼭 확인해 보세요. 불치병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휴머노이드가 되어야 했던 카호와, 함께 사는 고등전문학교 학생 타츠야의 애틋한 사랑의 행방. 쓰고 싶었던 묘사를 전부 쏟아부었으니 부디 즐겁게 감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 카호와 타츠야의 연애는 결판이 날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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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룸이 끝나고, 주번이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일지를 쓰고 있었다. 반 애들 대부분이 하교하거나 부활동을 하러 가려던 찰나, 사키가 말을 걸어왔다.
“카호, 주번 하느라 고생했어. 이제 갈 수 있어?”
“응, 일지만 교무실에 갖다 주면 끝이야. 오늘은 별일 없었거든.”
“그럼 일지는 내가 갖다 줄 테니까 먼저 가. 이따가 약속 있지 않아?”
어? 사키는 왜 이렇게 나를 빨리 보내려고 그러지? 게다가… 오늘 약속 있다는 얘길 내가 했던가?
“…됐으니까 얼른 가!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 서두르지 않으면 교문에 서 있는 카호의 왕자님이 여자애들한테 둘러싸일걸?”
나는 창가로 달려가 아래쪽 교문을 살폈다. 눈동자에서 ‘치익-’ 하고 렌즈를 조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동으로 광학 줌이 작동했다. 과연, 교문 옆에 타츠야 오빠가 보였다. 검은색 롱 가죽 코트에 브라운색 머플러. 머리카락은 삐죽삐죽하게 스프레이로 고정했다. 저건 꼭….
“타츠야 오빠… 왜 맨날 저렇게 호스트 같은 차림인 거야!”
솔직히 예전부터 저 옷 취향은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편의점 알바할 때도 머리를 저렇게 세우고 계산대를 보니까. 하지만 사실 오빠가 멋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남자 패션 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독자 모델 코디를 몇 가지 정해두고 돌려 입는 것뿐이라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문제는 겉모습만은 꽃미남 포스를 풍기는 오빠 주변으로 여자애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거다. 집음 마이크의 지향성과 감도를 높이자 대화 내용이 들려왔다.
“저기, 우리 학교에 볼일 있으세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여기 졸업생이세요?”
“아니, 난 마을 북쪽에 있는 사에바 고전 학생이야.”
“와, 머리 진짜 좋으시구나!”
“저기, 학교 안 구경시켜 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기다리면 나올 테니까.”
뭐야, 저 애들! 오빠를 바라보는 눈이 아주 초롱초롱하네. 그나저나 오빠도 일일이 대답해 줄 필요 없잖아! 이건 서두르는 게 좋겠어.
“사키! 뒷정리 좀 부탁해도 될까?”
나는 사키에게 일지 제출을 맡기기로 했다. 내가 건넨 일지를 받은 사키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키도 나랑 같은 로봇이다. 저 미소도 합성수지로 만든 인공 피부고, 눈동자도 만들어진 카메라일 뿐이다. 하지만 사키의 마음은 알 수 있다. 이 아이가 가진 따뜻한 마음은 기계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나를 도와주는 소중한 절친이다.
“당연하지. 대신 결과는 나중에 꼭 알려줘야 해!”
“어? 무슨 결과?”
“둘 다 말이야! 자, 어서 가봐!”
둘 다라니, 그런 뜻이었구나. 역시 사키한테는 숨길 수가 없다니까.
나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신발장에서는 그냥 지나쳤다. 나는 신발을 신을 수 없어서 실내화가 없다. 내 신발장에는 등교할 때 부츠처럼 뒤꿈치가 올라간 발 파츠를 닦기 위한 걸레만 들어있을 뿐이다. 신발을 신지 못하는 생활에도 점점 익숙해졌다.
밖으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에 다가가자,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마이크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그 소리들을 무시하고 곧장 오빠 곁으로 향했다.
“타츠야 오빠! 우리 학교에 온다는 말 없었잖아! 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면서!”
‘뭐야, 저 애는?’ 하는 표정으로 오빠 주변을 에워싼 여자애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지만 겁먹을 필요 없다. 약속 상대는 나니까!
“미안, 카호. 못 참고 와버렸어. 오늘 예정대로 같이 가줄 거지?”
“예정보다 27분 41초나 일찍 와놓고 말이 참 많네. 오늘 내 태스크(Task)에는 타츠야 오빠랑 시간을 보내라고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거절도 못 해. 내 감시 제어 앱 보면 알 거 아냐?”
내 감시 제어 앱은 회사 사람이나 가족들 스마트폰에 설치되어 있어서, 24시간 내 상태를 감시할 수 있다. 원격 조작이나 설정 추가도 가능하다. 소유권이 있는 회사 사람과 회사로부터 나를 렌탈한 부모님은 조작 권한이 다르다. 참고로 오빠는 열람만 가능하다. 이 기능 때문에 나에게는 진정으로 혼자 있을 수 있는 프라이버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거부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참고로 오늘 태스크 설정은 엄마가 한 거다. 오빠가 할 수 있는 건 내 상태 열람(이것만으로도 사실 무척 괴롭지만)뿐이고, 부모님과 회사 사람만 설정을 추가할 수 있다. 내가 막판에 오빠한테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보험 같은 거겠지. 자기 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이제 오빠한테서도, 내 마음한테서도 도망칠 생각 없는데 말이지. …뭐, 얼마 전까지 내 태도를 생각하면 엄마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그럼 지금 이 시간의 카호는 프로그램에 묶여있지 않은 거네? 네 의지로 같이 가줄지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조금 이르긴 한데, 같이 가줄래?”
“…윽!”
그 순간, 오빠가 왜 학교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분명 오빠는 내가 태스크에 규정되어서 억지로 같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결정해주길 바라는 거다. 지금 자신과 함께 가줄지를.
…정말 치사하다니까. 잘생긴 건 얼굴 하나로 충분한데. 같이 가기도 전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물론 심장이 뛰는 건 아니니까 인간 시절의 감각에 이끌린 착각일 뿐이지만, 기뻐서 두근거린다.
“고마워…. 나, 오빠랑 같이 가고 싶어.”
“그래, 그럼 역으로 가자.”
“……응.”
교문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당연히 시선이 쏠린다. 오빠와 걷기 시작해도 마이크는 주변의 목소리를 잡아낸다.
“야, 저 로봇 뭐야?”
“2학년 사시하라 아냐? 근데 지금 정식 명칭은 제조사 제조번호라던데.”
“결국 기계잖아? 저런 훈남한테 로봇은 너무 아깝다.”
“로봇은 인간한테 거역 못 하지 않아? 헤어지라고 하면 명령에 따르려나?”
“안 돼. 업무 시간 아니면 관리자 명령 말고는 안 듣는대.”
“야, 그냥 놔둬. 사시하라 쟤도 옛날엔 사람이었어.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봇이 된 거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불쌍하잖아.”
“그러게…. 아깝다, 진짜 잘생겼는데.”
마이크는 조금만 의식해도 나를 향한 무심한 말들을 주워 담는다. 오빠한테는 안 들리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런 건 들려주고 싶지 않아. 걷는 내내 기분이 가라앉아 고개를 숙이자, 오빠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어릴 적, 내 손을 이끌어주던 때가 생각난다. 따뜻하다.
“눈에 띌 생각은 없었는데, 시간보다 일찍 오고 싶어서 그랬어. 상처 줘서 미안하다.”
“아냐, 괜찮아. 이런 거 신경 써봤자 끝도 없는걸. 그리고 아주 조금은 우월감도 느껴져.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고 말이야.”
“뭐야 그게! 하하하!”
솔직히 절반은 허세였지만, 나도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게다가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우울해하고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
“사에덴 타고 사에바 중앙까지 갈 거야. 그다음엔 트램으로 갈아타고. 페리카(Pelica) 잔액은 괜찮아?”
“응, 내 기체는 자동 충전 활성화해 놨어. …벌써 발표 났어?”
“어, 오늘 오후 3시에. 그래서 이미 발표됐을 거야. 사실 수험 ID랑 설정한 비밀번호로 온라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아직 안 봤어. 카호랑 같이 보고 싶어서. 합격 발표.”
“그렇구나. 그럼 진짜 떨리겠네.”
오빠와의 약속, 그것은 제도 공업 대학 공학원 휴머노이드 공학 계열의 3학년 편입 시험 합격 발표를 보는 것이었다.
역에서 사에덴을 타고 사에바 중앙역으로 향한다. 거기서부터는 트램으로 갈아타야 해서 거리에 비해 시간은 꽤 걸릴 것 같다. 승강장에 서 있으니 간선도로 변의 커다란 편의점이 눈에 들어온다. 초록, 하양, 파랑의 세 가지 코포레이트 컬러를 가진 편의점 ‘페어리 마트’다.
“저 페어리 마트는 주차장이 항상 꽉 차 있네. 오, 기차 온다.”
오빠도 사에바 시내에 처음 생긴 페어리 마트가 신경 쓰이는지, 둘이서 전차에 타서도 자연스럽게 페어리 마트 이야기가 나왔다.
“나중에 쇼 군이 정찰하러 가겠다고 하더라. 나랑 사키가 가면 너무 눈에 띄니까.”
“작년에 우리 집에 왔던 그 남자애 말이지? 휴머노이드가 된 사키 양 남자친구였던가?”
“맞아. 잘 기억하고 있네.”
“나중에 쇼 군이랑 사키 양 다시 데려와. 시험도 끝났으니까 카호 친구들이랑도 친해지고 싶거든.”
“응, 고마워.”
“그나저나 저 페어리 마트에도 휴머노이드가 있다며? 카호랑 사키 양의 라이벌이 되려나?”
최근 휴머노이드 여성이 광고 모델이 되기도 했고, 사에바에도 드디어 진출한 페어리 마트는 꽤 위협적이다. 실제로 크리스마스 때 먹은 페어치키치키는 맛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 저 페어리 마트와, 저 가게에 있는 휴머노이드랑 싸우고 싶은 걸까.
“내 프로그램은 라이벌 업체랑 경쟁하도록 감정이랑 사고를 제어해. 하지만 말이야, 가능하다면… 사실은 페어리 마트의 휴머노이드 분이랑 친해지고 싶어. 휴머노이드라서 겪는 고민이나 고통 같은 걸 이해해 줄 수 있고, 모처럼 이웃이 된 거잖아.”
내 생각이 너무 무른 걸지도 모른다. 저쪽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나랑 사키의 가게를 진심으로 무너뜨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저 가게의 휴머노이드와는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난 다정한 카호다워서 좋다고 생각해. 그리고 우리 세부소(Sebuso)는 주택가 안의 잡화점 같은 포지션이잖아? 여기는 역 이용객 상대니까 그렇게까지 고객층이 겹치지는 않을 거야. 우리 세부소랑 사키 양의 로산(Rosan)이랑 상권이 겹치지 않는 딱 중간 지점에 페어리 마트가 있기도 하고. 지금은 사에바 첫 출점이라 신기해서 가보는 거겠지만, 극단적인 영향은 없을 거야…라고 믿고 싶네. 실제로 1월이랑 2월 전반 우리 가게 매출은 작년이랑 거의 비슷했거든.”
쇼 군도 그랬지만, 오빠도 우리 가게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있었다. 그게 왠지 기뻤다.
“앗, 벌써 사에바 중앙역이다.”
“그러게. 얘기하다 보니 금방이네.”
나는 오빠 뒤를 따라 출구로 향하며 오빠와 살짝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입가에 왼팔을 갖다 대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띠링, 220엔 이용했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입이 움직이고, 목구멍 안쪽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소매로 조금은 가렸을 거다. 역시 알고 있어도, 이런 로봇 같은 목소리를 오빠한테 들려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너무 강하면 인격 소프트웨어가 수정되어 버리니까 최대한 익숙해져야 하는데….
“어라, 카호. …잠깐 떨어진 것 같았는데.”
“안 떨어졌어. 다음은 트램 탈 거지? 오랜만에 타는 거라 좀 기대될지도.”
확실히 잠깐 거리를 둔 건 사실이지만 길을 잃은 건 아니다. 길은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 “조금 멀어졌어?”라고 물어봤다면, 로봇이라서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내 마음에는 숨김없이 말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이럴 때는 참 무섭다니까. 그래도 눈치 못 챈 것 같다. 앞으로 개찰구는 저렇게 통과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트램 승강장에 도착했다. 보라색 무인 차량에 올라탔다. 여기서부터 마을 북쪽의 사에바 캠퍼스로 가는 거다.
트램에 타고 나서는 오빠도 합격 발표가 다가와서 그런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고,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퇴근 시간까지 2시간 정도 남은 늦은 오후의 차 안은 어딘지 모르게 한산했고, 경쾌한 열차 안내 방송의 전자음만이 울려 퍼졌다.
그런 평온한 시간을 깨뜨리듯, 내 시야에 메시지가 표시되고 설정되어 있던 태스크 알람이 울렸다. 나는 오빠를 향해 감정 없는 보고를 시작했다.
“삑… 15시 30분이 되었습니다. 본 기체는 현재 시각부터 귀가 시까지 센고쿠 타츠야 님과 동행하며 지시에 따릅니다.”
아, 들려버렸다. 감정 없는 로봇 같은 내 목소리. 오빠한테는 들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카호? …아, 그렇구나. 태스크 설정 시간이 지금부터였지.”
“응…. 지금부터가 규정된 시간이었어. 미안해. 이미 같이 행동하고 있는데 융통성 없지. 그래도 프로그램 설정에는 거역할 수 없는걸….”
내가 풀이 죽어 있자 오빠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럴 때는 귀에 달린 비콘(Beacon)이 참 거슬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실질적으로 카호는 나랑 같이 있어 주고 있잖아. 그건 처음에 말했듯이, 이 태스크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어도 카호 네가 나랑 같이 오겠다고 결정한 네 의지의 결과 아니겠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이제 집에 갈 때까지는 우리 자유니까, 태스크는 잊고 즐기자. 응?”
나는 살며시 오빠와 손을 잡았다.
“고마워, 오빠. 마음이 좀 편해졌어. 손 잡았는데 차갑지 않아?”
“시원해서 기분 좋아. 이대로 있어도 돼?”
“……응.”
그 후로는 다시 조용하고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대화는 없었지만, 맞잡은 손의 움직임만으로 대화하는 듯한 행복한 한때. 이런 시간을 좀 더 이 사람과 보내고 싶다….
‘잠시 후 제도 공업 대학 정문, 제도 공업 대학 정문입니다. 일반 후기 입시 합격 발표는 본관 서쪽, 편입 시험 합격 발표는 본관 동쪽입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여러분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4월부터 통학에는 혜택이 많은 12개월 정기권을 꼭 이용해 주십시오.’
“오, 벌써 도착했나. 오늘은 긴장해서 그런지 순식간에 지나간 기분이야. 그나저나 오늘 안내 방송도 센스 있네. 시험 볼 때도 차내 방송이 수험생 응원 메시지였거든. 오늘도 합격 발표 장소 안내부터 격려랑 세일즈 토크까지. 설마 이 회사는 매일 녹음하는 건가? 시험 날이랑 목소리가 같은 걸 보니 녹음하는 사람은 동일인인가 봐.”
트램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오빠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아마 모르고 있겠지.
“아냐, 오빠. 이 트램은 무인 취급이지만, 휴머노이드 운전사가 타고 있어.”
“어? 운전석이 없잖아.”
“운전석 자리에 있는 자동 열차 운전 장치 안에 휴머노이드가 있어. 그녀가 이 트램을 운전하고 안내 방송을 하는 거야. …분명 승객들의 모습이나 정류장 상황에 맞춰서 방송 내용을 바꾸고 있을걸. 그러니까 이 방송도 그녀가 직접 말하고 있는 거야.”
오빠는 신기하다는 듯 차량 운전석 쪽을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안내 방송이 따뜻하게 느껴졌던 거네. 하지만 그러면 무인이 아니잖아. 그녀가 운전하고 있으니까 유인 운전으로…”
거기까지 말하고 오빠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유인(有人)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겠지.
“맞아, 오빠. 잊기 쉽지만 트램의 그녀도 나도 이제 사람이 아냐. 로봇이야. 그래서 무인(無人) 열차인 거지. 사실 나도 그런 표현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분명 이 트램 운전사는 마음을 담아 운전하고 있을 거야.”
트램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오빠가 페리카를 터치하고 내리려 할 때, 시선 끝에 있는 자동 열차 운전 장치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시험 날에도 당신 덕분에 잘 왔습니다. 정성 어린 안내 방송 고마워요. 합격하면 4월부터 다닐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참 성실하다니까, 오빠는. 하지만 그런 점이 좋다. 분명 운전사 휴머노이드도 듣고 있을 거다.
오빠를 따라 오른손을 내밀었다. 적어도 이건 들리지 않게 다시 왼팔로 입을 가렸다.
‘…(띠링, 340엔 이용했습니다.)’
오빠를 흉내 낸 건 아니지만, 자동 열차 운전 장치를 향해 나도 목례를 했다. 기계 상자 속 내용물은 볼 수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안의 그녀가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금 따뜻해진 마음으로 트램에서 내렸다. 휴머노이드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기계로밖에 취급받지 못한다. 내 마음도 결국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디지털 데이터일 뿐이다. 로봇으로만 여겨지는 건 외롭고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빠가 자동 열차 운전 장치에 건넨 그 짧은 한마디가… 너무나 기뻤다. 마치 내 일처럼 기뻐서 나도 모르게 이번에는 오빠 팔에 매달렸다.
“방금 고마웠어, 오빠! 역시 오빠는 다정해.”
“응? 무슨 일 있었어?”
“아냐, 아무것도. 앗, 횡단보도 초록불 됐다. 얼른 건너자!”
나는 오빠에 대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팔을 끌며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제도 공업 대학 사에바 캠퍼스 본관 앞에는 커다란 나무 게시판과 작은 나무 게시판이 보였다. 발표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큰 게시판 쪽은 여전히 인파가 몰려 있었고, 헹가래를 치는 모습도 보였다. 저쪽이 대학 입시 결과겠지.
“이쪽은 조용하네. 뭐, 수험생도 합격자도 인원수가 적으니까.”
오빠는 작은 게시판 앞으로 걸어갔다. 이쪽은 이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시판에는 흰색 A1 용지 정도 크기의 종이에 세 자리 숫자가 15개만 적혀 있었다.
“오빠는… 몇 번이야?”
“102번이야. 접수를 아슬아슬하게 해서 뒷번호일걸?”
나는 게시판 왼쪽 아래를 살폈다.
“있다….”
“오, 있네.”
오빠는 덤덤해 보였지만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번져 있었다. 역시 기쁜 모양이다.
“합격했구나.”
“응, 합격했어.”
나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오빠가 합격했다. 옆에 서 있는 오빠를 보니 조금 쑥스러운 듯한 표정이다.
“솔직히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어. 시험 전날에 큰 격려를 받았으니까. 그래서… 어이쿠, 왜 카호 네가 우는 거야? 합격했는데 울지 마….”
나는 오빠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나 보다. 오빠가 나를 꽉 안아주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축하해, 오빠…. 나 너무 기뻐….”
“나도 기뻐. …응? 카호, 저거 읽을 수 있어?”
오빠가 게시판 아래에 작게 적힌 글씨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카메라 아이를 조절해 초점을 맞췄다.
“수험번호 102번인 분은 본관 1층 입시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써 있어. 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불안해졌지만, 오빠는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아, 여기서 말해주는구나. 카호 미안. 잠깐만 기다려줘. 금방 올게.”
오빠는 눈앞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져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캠퍼스는 아주 깨끗해서 지은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캠퍼스 안쪽을 줌으로 당겨보니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걷는 흰 가운 차림의 학생 그룹이 보였다. 그 바로 뒤에는 로열 블루(대학 상징색인 듯하다)를 기조로 하고 몸통에 커다랗게 흰색으로 번호가 프린트된 외피의 휴머노이드 몇 명(여기서는 몇 대라고 해야 할까?)이 규칙적으로 걷고 있었다.
긴 머리의 미인 휴머노이드는 엄청난 양의 파일과 서적을 안고 걷고 있었다. 마치 짐꾼 같다. 그녀는 무표정했고 감정이 쏙 빠져나간 듯한 인상이었다. 나도 가게에서 일할 때 저런 표정일까? 그렇다면 좀 슬플 것 같다.
뒤를 걷는 다른 휴머노이드는 한쪽 팔과 다리의 외피가 벗겨져 있어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메라 아이를 좀 더 줌인하자, 그녀의 액추에이터가 꿈틀거리며 구동음을 내며 걷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 부분은 기계 두개골이 노출되어 머리카락이 없었고, 당연히 표정도 없었다. 저런 모습으로 걷게 하다니 가엾게도….
맨 뒤를 걷는 짧은 머리의 휴머노이드는 카트 대차를 밀고 있었다. 대차 안에는 기계 부품들이 쌓여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여성용의 가느다란 팔과 손, 곡선을 그리는 허벅지, 잘록한 허리와 두 개의 굴곡이 있는 몸통… 저건 아무리 봐도 여성형 휴머노이드의 파츠다. 모든 파츠는 외피가 벗겨져 내부 기기들이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긴 인공 모발이 달린 부품도 아무렇게나 들어있는 게 보였다. 저건 분명 저 사람의 머리 부분이다….
모두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접합부의 기계 단면과 코드들을 드러낸 채 쌓여 있었다. 우리가 정비받을 때도 저렇게 험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다). 저건 마치 고철 부품을 운반하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대체 누구일까. …윽! 설마 저게 교재……인 거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계 몸이라 춥지 않을 텐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명랑하게 웃으며 걷는 흰 가운의 학생들과, 단순한 기계나 도구로 취급받는 뒤쪽 휴머노이드의 대비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두 집단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 하지만 그 사이에는 인간과 로봇의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보이고 말았다. 찰나의 순간, 저 두 집단 각각에 오빠와 내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분명 인격 소프트웨어의 버그겠지. 하지만 아주 잠깐, 흰 가운을 입은 오빠 뒤에서 감정 없는 기계 인형 같은 내가 따라가는 모습이 보이고 말았다.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슬픈 눈물….
“역시 저게 세상 사람들과 휴머노이드의 관계…인 거구나. 쇼 군이랑 사키가 특별한 것뿐일까….”
여기는 휴머노이드 공학을 공부하는 곳이다. 의대가 인체 해부를 하듯이 휴머노이드를 조립하고, 해체하고, 해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몸을 유지보수하거나 업그레이드할 엔지니어나 연구자가 길러지지 않는다.
그런 건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역시 이게 휴머노이드를 공부한다는 거구나…. 언젠가 오빠도 저 흰 가운 학생들의 무리에 섞이게 되는 걸까….
“오래 기다렸지, 카호. …응? 왜 울고 있어.”
“앗, 오빠. 미안.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잖아. 무슨 일인지 말해줘!”
그 강한 어조에 나는 오빠에게 슬퍼하는 이유를 보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몸이 움찔 떨리며 오빠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네, 타츠야 님. 방금 전의 눈물과 슬픔의 이유에 대해서는….”
나는 오빠가 오기 전에 저쪽을 지나간 학생들과 휴머노이드들, 그리고 왜 내가 슬픈 마음이 들었는지에 대해 ‘보고’했다.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역시 나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여기는 그런 공부를 하기 위한 장소니까.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휴머노이드를 고성능 로봇으로밖에 보지 않는 학생이나 교수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야. 혼자 둔 건 내 판단 미스였어. 합격 발표 날인데 데려와서 미안하다….”
오빠도 조금 괴로워 보였다. 오빠는 트램에서도 그랬지만 우리를 인간으로 봐주고 대우해 준다. 그래서 오빠 자신도 여기서의 공부는 마음과의 괴리가 클지도 모른다. 오빠도 앞으로 여기서 고민하고 고통받는 일이 많지 않을까.
“그리고 카호, 너 나한테 ‘말해준’ 게 아니라 ‘보고’한 거지. 말투랑 분위기가 달라서 알았어. 명령으로 인식하게 해서 미안해. 나도 모르게 네가 걱정돼서 강하게 말해버렸네. 지금 태스크 설정 때문에 나한테 복종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걸 깜빡했어.”
오빠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로봇이 명령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무척 신경 써준다. 나도 오빠의 다정함에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아냐, 나도 미안해.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거든. 앞으로 오빠가 공부할 곳이기도 하고. 이게 세상의 상식이니까…. 그리고 로봇은 인간한테 숨기는 게 허용되지 않는 게 보통이니까 그렇게 사과하지 마. 아, 맞다. 근데 오빠는 왜 불려 갔던 거야?”
“아, 맞다. 내가 편입생 대표 인사를 하게 돼서 문구 좀 생각해 오라고 하더라고. 일단 작년 문구를 받아왔어.”
오빠는 서류가 든 클리어 파일을 팔랑거리며 보여주었다.
“그럼 편입 시험 결과가…”
“내가 수석이었어.”
오빠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단해! 역시 오빠는 최고야!”
“성적도 물어봤는데, 영어는 정말 만점이었대. 다들 놀라더라고. 카호가… 응원해 준 덕분이야.”
시험 전날 밤이 떠오른다. 충동적으로 내가 오빠에게 키스했던 그 밤의 일이….
“그런 거 아냐. 난 그냥….”
“아니, 나를 수석으로 합격하게 해준 건 카호 너야. 네가 있었기에 내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거야. ……그리고 말이야, 여기서 볼일은 끝났는데 이다음에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 같이 가줄래?”
그렇게 말하는 오빠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오빠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시험 날 아침, 오빠가 했던 말을 메모리에서 읽어와 시야 한구석에서 재생했다.
[시각 정보 재생]
20XX/1/10/ 06: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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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합격 발표 날, 나한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카호 너한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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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종료 시간 14초]
“응, 약속했으니까. 근데 어디 갈 거야?”
“사에바 타워. 오랜만에 거기 전망대 한번 가보지 않을래?”
“지금 시간은 오빠 명령에 따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으니까 어디든 따라갈게.”
“그건 알고 있어. 그렇다고 해도 난 카호랑 같이 결정해서 가고 싶어.”
“응…. 고마워.”
오빠는 시내에 있는 TV 타워 겸 쇼핑몰이 있는 나들이 명소를 지목했다. 오빠가 우리 집에 하숙하기 전, 초등학생 때 서로의 가족끼리 갔던 게 마지막인 장소다.
나와 오빠는 트램을 반대 방향으로 탔다. 돌아가는 트램은 인간 운전사였다. 올 때는 합격 여부가 신경 쓰여서 말이 없었지만, 갈 때는 이다음 일을 서로 생각하느라 역시 말이 없었다. 종점인 사에바 중앙역까지는 순식간에 도착했다.
“사에바 중앙, 사에바 중앙. 종점입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트램에서 내려 사에덴 백화점 반대편에 있는 사에바 타워로 향했다. 나란히 걷는 오빠는 어딘지 긴장한 기색이었고, 올 때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대화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방금 안내 방송은 녹음된 거였네.”
“그러게. 보통 안내 방송은 다 그래.”
“아, 그렇구나….”
“응….”
화젯거리가 떨어져 점점 어색해졌다. 대화를 잇지 못한 채 전망대 입구에 도착했다. 전망대 직통 엘리베이터 앞에서 오빠가 티켓을 샀다.
“성인 한 장이랑, 고등학생 한 장요.”
“네, 700엔입니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페리카로요. 그리고 예약했던 센고쿠입니다.”
예약? 여기 오는데 예약 같은 게 필요했나. 하지만 안내 데스크 언니는 어떤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미리 이야기를 해둔 걸까.
“아,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셔서 현장 스태프에게 말씀해 주세요. 여기 입장권 두 장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오빠에게 티켓 한 장을 받았다. 눈앞의 고속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단숨에 180m 높이까지 이동했다. 지금 타고 있는 건 우리 둘뿐. 평범한 평일이라 그런지 그렇게 붐비지는 않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전면 유리창으로 된 전망대에 도착했다. 최근에 리뉴얼해서 인테리어가 깔끔했다. 전망 플로어에는 기념품 가게뿐만 아니라 카페와 바가 있어서, 야경을 보며 술을 즐기는 어른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고 한다…는 건 연말에 사키랑 내 사진이 실렸던 잡지 ‘사에바 워커’에서 본 내용이지만 말이다.
“센고쿠 님 맞으십니까?”
오빠는 갑자기 정장 차림의 스태프에게 질문을 받았다.
“네, 맞습니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일행분과 함께 이쪽으로 오시죠.”
그 말에 나는 오빠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 옆 관계자 전용 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계단이 있었고, 두 층 정도 올라가니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 밖으로 연결되는 분위기다.
“끝나시면 엘리베이터 옆 스태프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스태프는 떠났다.
“가자, 카호.”
“응….”
오빠가 문을 열자 그곳은 바람이 쌩쌩 부는 전망대 바로 위 옥상이었다. 바람 소리가 거셌다.
“어때, 카호! 이 시간 동안은 우리 전세 낸 거야. 경치 끝내주지! 사에바 시내가 한눈에 다 보여!”
발아래로 사에바 시내 전경이 펼쳐졌다. 마침 해가 지고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시간대다. 지상보다 바람이 강했고 아직 3월 초다.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온도계는 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빠가 내뱉는 입김도 지상보다 훨씬 하얗게 보였다.
“저기, 왜 전망대 옥상으로 데려온 거야?”
“카호랑 이 야경 보면서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었어. 이리 와봐.”
오빠는 펜스 조금 앞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옆에 나란히 섰다.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은 우리 집이 있는 쪽이다.
“참 예쁜 마을이야, 사에바는. 여기 온 지도 벌써 5년이나 되니까 여기가 내 고향인가 싶기도 해.”
“난 여기밖에 모르지만… 나도 좋아해, 사에바.”
차갑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나 말이야, 작년까지는 고전 졸업하면 도쿄에 있는 대학에 갈 생각이었어.”
“응, 알고 있어. 오빠네 대학도 다른 학과는 다 도쿄에 있다며.”
“맞아. 근데 포기했어. 카호 네가 없는 마을에 가고 싶지 않더라고. 네가 곁에 없으면 내가 망가질 것 같아서.”
“오빠…? 무슨 소리를….”
오빠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카호,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널 정말 좋아했어. 네가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어. 네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난 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네 곁에 있기로 결심했어.”
오빠의 그 말에 가슴이 뜨겁게 요동치고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찼다. 너무나 행복한 기분….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꼭 확인해야 할 게 있다.
“오빠 그 말, 정말 기뻐. 그 말을 계속 듣고 싶었어. …하지만 잠깐만. 오빠는 나 때문에 대학을 바꾼 거야? 오빠 꿈은 어떻게 하고? 그러면… 오빠 꿈을 내가 뺏어버린 거잖아?”
“그건 아냐, 카호! 난 나 자신을 위해서 진학처를 바꾼 거야!”
오빠는 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지? 나를 위해서 휴머노이드 공학을 공부하려는 게 아니었어…?
“…확실히 내 어릴 적 꿈은 철도 기술자가 되는 거였어. 적어도 고전에 들어갔을 때까지는 말이야. 하지만 사에바에 와서 그 꿈은 바뀌었어. 카호, 너를 만나버렸으니까. 처음엔 여동생처럼 생각했던 네가… 더 이상 여동생으로 보이지 않게 됐거든.”
오빠는 옛날을 회상하듯 말을 이어갔다.
“첫사랑이었어! 하루하루 예뻐지는 널 보고 있으면 매일이 행복했고, 매일 가슴이 아팠어. 사실 연인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난 하숙생이잖아. 마음을 고백했다가 서먹해지면 도망칠 곳도 없고…. 그래서 계속 참고, 언젠가 이 집을 나갈 때 고백하자고…. 그리고 나중에 널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었어. 하지만…. 이제 그건 절대 이뤄질 수 없게 됐지….”
오빠는 쏟아내듯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언제나 능청스럽고 쿨하고 여유 넘치던 오빠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내가… 로봇이 되어서 회사 비품이 되어버렸으니까?”
내가 묻자 오빠는 “그래…”라고만 중얼거렸다.
“휴머노이드가 된 너는 인간과 로봇 사이의 괴리에 상처받고, 로봇으로 취급받을 때마다 상처받고, 네 몸의 기능 때문에 상처받았어. 그런 상태의 널 두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내가 도쿄에서 뭘 공부하겠어! 그럴 수는 없단 말이야….”
“하지만 그러면 오빠 꿈은…”
“그건 이제 지금의 내 꿈이 아냐. 3년 전, 너를 향한 사랑을 자각한 그날부터 내 꿈은…”
오빠는 내 양어깨를 붙잡고 카메라 아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카호 너와 함께 인생을 걷는 거야!”
그 말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CPU 부하가 단숨에 치솟으며 기체 온도가 상승했다.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가리켰다.
“어? 나랑…?”
“카호 네가 없는 인생 따위 아무 의미 없어. 지금 괴로워하는 널 난 그냥 둘 수 없어. 난 네 몸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 네 마음과 마주하고 싶어. 널 고통에서 구하고 싶어. 그래서 난 휴머노이드 공학을 공부할 거야. 기계화 정신 의학을 공부할 거야. 그리고 휴머노이드가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연구를 할 거야.”
내 시야가 크게 일렁였다. 시야의 숫자나 그래프에는 이상이 없다. 카메라 렌즈가 눈물로 젖은 거다.
“그리고 이건 내 꿈이야. 확실히 난 기계공학 전공을 버리고 휴머노이드 공학 계열을 선택했어. 하지만 그건 너를 위해서 진학처를 바꾼 게 아냐! 네 곁에 머물 내 인생을 위해서 진학처를 바꾼 거라고!”
“으으… 흑… 흐윽….”
오빠는 내 몸을 아주 강하게 끌어안았다. 프레임이 삐걱거릴 정도로.
“카호.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내 꿈에는 네가 꼭 있어야만 해. 네가 없으면 내 꿈은 이뤄지지 않아. 네가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어! 너와 인생을 걷는 내 꿈을 이뤄주게 해줘!!”
오빠는 나를 안은 채 조금 떨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속마음을 다 털어놓은 건 처음이다. 난 계속 오빠의 꿈을 오해하고 있었다. 쿨하고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열정적일까. 나, 몇 년 동안이나 헛다리 짚고 있었네….
“흑… 흐윽…. 오빠 마음 다 전해졌어. 내 착각도 알겠고. 근데 말이야, 이런 막무가내 고백이 어디 있어? 하하하! 뭐야 오빠, 평소의 여유는 다 어디 가고 이렇게 필사적이야…. 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빠를 안은 채 나는 혼자 대성통곡하듯 웃어댔다. 오빠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카호?”
겨우 웃음을 멈춘 나는 오빠를 마주 보았다. 눈물을 살짝 닦아냈다.
“저기, 이번엔 내 마음을 전해도 될까? 나도 말하고 싶어.”
“아, 미안. 내가 너무 혼자 떠들었지.”
“아냐, 괜찮아. 내 생각 속의 오빠는 훨씬 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 따뜻했어. 저기 오빠, 나도 오빠 좋아해. 초등학생 때 아저씨 손잡고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부터 계속 좋아했어. 그래서 고전에 합격해서 하숙하기로 결정됐을 때부터 너무너무 기뻤고, 오빠랑 보낸 시간은 전부 내 보물이야.”
오빠의 뺨이 붉어졌다. 나도 분명 새빨개졌을 거다. 나도 이 마음을 고백하는 건 처음이니까.
“하지만 오빠는 세 살이나 많고, 엄청 잘생겼잖아. 분명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오빠가 데려오는 동급생 언니들은 다 미인이었고, 오빠는 모르겠지만 다들 나한테 적의를 팍팍 드러냈거든. 그래도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난 오빠의 연인이 되고 싶다고 계속 빌었어….”
“그랬…구나. 몰랐어.”
그야 당연하지. 필사적으로 숨겼으니까….
“…하지만 난 그 마음을 한 번 봉인했어. 난 병 때문에 인간을 그만두고 로봇이 됐으니까. 오빠는 머리도 좋고 앞날이 창창한데, 기계 인형인 내가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타일렀어. 오빠가 고전을 졸업하고 집에서 나가면 오빠를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 사시하라 카호의 인격 소프트웨어에서 오빠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사라지질 않았어! 그게 기쁘면서도 너무 괴로웠어….”
“카호….”
어떡해, 나도 마음이 넘쳐서 멈추질 않아….
“그래서 오빠가 휴머노이드 공학 계열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겉으로는 반대했지만 사실은 정말 기뻤어. 오빠가 아직 여기 있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 솔직하지 못하지, 나도. 근데 반대한다고 말해버린 바람에 어색해서 합격 기원 부적도 제대로 못 전해줬어….”
“그랬구나. 하지만 그때 네 마음은 다 전해졌어.”
그 부적을 줄까 말까 고민했는데, 주길 잘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어. 오빠는 사에바에 남아줄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해줬어. 그러니까 이제 나도 내 마음에 거짓말 안 할래.”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앞의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나 오빠 좋아해. 오빠랑 같이 있고 싶어! 오빠랑 계속 같이 인생을 걸어가고 싶어! 오빠 없이는 로봇이 된 카호는 분명 마음이 부서져 버릴 거야. 만약 오빠가 곁에 있어 준다면, 나 어떤 일이라도 견뎌낼 수 있어. 아무리 로봇 취급을 받아도,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야 해도, 분명 이겨낼 수 있어!”
내 뺨에도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격 소프트웨어가 제어되지 않는다. 다시 CPU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센고쿠 타츠야 씨… 당신을 좋아해요. 제 마음… 받아주세요….”
내가 거기까지 말을 끝낸 순간, 오빠가 턱을 감싸는 금속 프레임 파츠를 붙잡더니 슥 하고 비스듬히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나는 두 팔을 오빠 등에 두르고 눈을 감았다.
“음…… 츄…… 아……… 으음…………… 츄…………… 앗………”
나는 오빠와 맞닿은 내 입술에 몇 년 치의 마음을 담았다. 계속 좋아했던 마음과 내내 참아왔던 애절함을…. 오빠를 향한 모든 감정을 입술에 실었다.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 내 모든 진심을 부딪치며… 서툴지만 필사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아무도 없는 사에바 타워 전망대 옥상은 소리도 빛도 시간도 사라진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몇 분이나 서로를 껴안고 키스를 했을까. 시야에 항상 표시되는 시간으로 7분 42초가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1시간, 2시간, 아니 영원처럼 느껴지는 지복의 시간이었다.
조금 진정된 나와 오빠는 손을 잡고 옥상을 걸으며 발아래 사에바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서로 깍지 끼는, 이른바 연인들의 잡기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기, 오빠. 만약 연인이 되면 부탁하고 싶었던 게 있어.”
“응? 뭔데?”
“나 말이야, 여동생처럼 오빠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당신을 타츠야라고 부르고 싶어. 로봇인 내가 이름을 막 부르는 건 안 좋을지도 모르지만, 타츠야라고 부르고 싶어. 안 될까?”
나는 간직해온 마음을 꺼냈다. 오빠가 동급생 여자애들이랑 얘기할 때 타츠야, 타츠야 하고 불리는 게 부러웠다. 그 사람들에게 어린애 취급받거나 여동생처럼 여겨지는 게 싫었다. 오빠는 나만의 연인이다. 그러니까 오빠가 아니라 타츠야인 거다.
“좋아. 나도 카호가 그렇게 불러주는 게 더 기뻐.”
“후훗, 기쁘다. 타츠야! 정말 좋아해.”
나도 모르게 발꿈치를 들고 타츠야의 뺨에 키스했다. 분명 오늘의 일은 내가 폐기 처분될 때까지 메모리에 영구 보존될 거다. 지금 이 기분과 함께. 재생할 때마다 행복해질 것 같다.
몸이 좀 차가워진 것 같아 돌아가려고 계단 문을 열자, 아까 그 스태프분이 서 있었다.
“추운 날씨였는데 즐거운 시간 되셨나요?”
““네!””
“그럼 내려가실까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올 때와 달리 우리는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스태프분이 전망대 문을 천천히 열어주자….
팡! 팡! 팡!
안에서 수많은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센고쿠 씨! 프로포즈 성공 축하드려요!””
““사시하라 씨랑 행복하세요!!””
전망 플로어에 들어서자 사에바 타워 스태프분들과 마침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마중 나와 박수를 쳐주었다.
“자, 센고쿠 님, 여기 있습니다.”
스태프분이 타츠야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걸 받아 들고 나를 정면으로 마주한 타츠야는 유리 케이스에 담긴 프리저브드 플라워 장미 부케를 들고 있었다.
“카호, 다시 한번 말할게. 널 정말 좋아해. 넌 병 때문에 휴머노이드라는 로봇이 됐지만, 내 사랑은 눈곱만큼도 변하지 않아. 너 없이는 난 행복해질 수 없어. 네 마음과 몸은 내가 지탱해 줄게. 부디 받아줘.”
새빨간 장미 부케다. 망가지지 않게 케이스에 들어있다. 이거라면 계속 장식해둘 수 있겠다.
“타츠야. 나도 당신을 좋아해. 당신을 좋아하는 이 마음은 설령 내 마음과 몸이 기계가 됐어도 변하지 않아. 인간 여자친구랑 똑같은 일은 다 못 해줄지도 모르지만, 난 계속 당신 곁에 있을게.”
케이스에 든 부케를 받자 다시 커다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로봇인 나를 축복해 주는 게 너무 기뻤다. 그 따뜻한 배려에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꼭 행복해지겠습니다!”
“흑… 감사…합니다… 흐윽.”
우리는 그대로 스태프분들과 축복해 준 손님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만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타츠야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타츠야아. 이런 건 반칙이야.”
“기뻐해 주니 다행이네. 그 장미 부케 내가 들까? 깨지면 속상하잖아.”
“어? 괜찮아. 내가 들게. 기계라 안 힘들어.”
그렇게 말하자 타츠야는 나에게서 부케를 뺏어 들었다.
“몸의 문제가 아냐. 여자애한테 짐을 들게 할 수는 없거든. 어때?”
라며 신사적인 멘트를 날려주었다. 역시 다정하다니까, 타츠야는. 말 한마디도 내가 ‘명령’으로 수신하지 않도록 조심해 주는 게 느껴진다.
“음, 그렇게 말해준다면 부탁할까나.”
그나저나 전망대 옥상 대관 같은 것도 하는구나. 몰랐네. 그렇게 생각하자 자동으로 내 제어 시스템이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고 시야 구석에 검색 결과가 떴다.
[사에바 타워 프로포즈 플랜: 전망대 옥상을 1시간 동안 대관해 드립니다. 필요에 따라 꽃다발, 캔들 등 제휴 꽃집에서 주문 가능. 예약 및 금액 등은 여기를 클릭]
그런 문구가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검색이 되다니 로봇은 참 편리하다. 나는 검색된 공식 사이트 정보를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가……
열람하는 걸 그만두었다.
결코 싼 가격은 아니겠지만, 나는 타츠야의 마음을 금액 따위로 측정하고 싶지 않았다. 뭐든 데이터를 쉽게 조사할 수 있는 이 기계 몸은 편리하지만… 이런 무드 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어떤 고백이라도 타츠야가 해준 고백이니까 기쁜 거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내서 좋았던 건, 이게 ‘프로포즈 플랜’이라는 것. 방금 그 말, 타츠야는… 나와의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기쁨이 솟구쳤다.
엘리베이터가 지상에 도착했다.
“자, 늦었으니까 역까지 가자.”
“저기, 타츠야.”
“응? 왜?”
쪽-
마음이 벅차올라 말이 나오지 않았던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려 키스를 했다.
“자, 이제 집에 가자!”
나와 타츠야는 손을 맞잡고 퇴근 인파로 붐비기 시작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후편에서 계속..
이 작품은 전후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편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전편을 먼저 봐주세요.
표지는 캐릭터 디자인을 맡아주신 Zcyonz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선생님의 미려한 일러스트 덕분에 카호의 매력이 1200%는 더 살아난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전편 이후, 사에바 타워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온 뒤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도입부에 하카소시 선생님의 작품 「열차 운행 업무용 휴머노이드 SH200STD0914MY ~어느 학생 휴머노이드의 일상~」의 히로인 중 한 분이 출연해 주셨습니다.
하카소시 선생님, 감사합니다. 후편의 포인트는 아버지의 시선, 그리고 카호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수위 높은 장면을 썼습니다. 태그가 힌트예요. 사랑의 결말 뒤에 기다리고 있던 것을 부디 지켜봐 주세요.
****
사에바 타워를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사에전철 사에바 중앙역으로 향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HS-207PS1114KS! …사시하라 씨! 사시하라 카호 씨!』
고유 식별 번호와 이름으로 불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엔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휴머노이드가 서 있었다.
『앗, 2반 타카다 씨. 안녕. 퇴근하는 길이야?』
그녀의 이름은 타카다 미노리. 옆 반 친구이자 나나 사키와 같은 휴머노이드다. 정식 명칭은 SH200STD1217MT라는 고유 식별 번호로, 사에바 트램에서 일하고 있을 터였다. 키는 좀 작지만 숏컷이 잘 어울리는 밝고 활기찬 아이다.
『응, 맞아. 사시하라 씨는 오늘 업무 태스크 설정이 늦은 시간이야?』
『나는 오늘 시프트를 빼달라고 해서, 남자친구랑 대학교 합격 발표 보러 갔다 오는 길이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남자친구'라는 말을 썼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연인 사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되겠지. 익숙하진 않지만 왠지 기분이 좋다.
“안녕하세요. 센고쿠라고 합니다.”
타카다 씨는 타츠야를 본 순간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저기, 사시하라 씨? 혹시 15시 41분에 트램 타고 제국공업대학 정문에서 남자친구분이랑 같이 내렸어?』
『어? 응, 내렸는데 왜?』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내 말을 들은 타카다 씨는 기쁜 듯 얼굴을 활짝 폈다.
『역시 그랬구나! 사실 그 열차를 운행했던 게 나였거든. 뭐, 정확히는 자동 열차 운전 장치로서였지만.』
『그랬구나. 사에바 트램 휴머노이드라는 건 알았지만 기관사였네. 근데 진짜 우연이다.』
『나도 설마 사시하라 씨 일행이 탈 줄은 몰랐어. 아, 당신 남자친구분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저한테요?”
타카다 씨는 타츠야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15시 41분에 트램에서 내리실 때, 수고하신다는 말씀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 너무 기뻤어요.』
그때 일이구나. 역시 타카다 씨도 기뻤던 거야.
“아! 아뇨, 그건 제가 할 소리죠. 센스 있게 안내 방송 해주셔서 저도 기분 좋았거든요.”
『그래도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제 기체는 팔다리가 분리된 채로 자동 열차 운전 장치라는 상자 속에 조립되어 들어가요. 모습이 보이지 않고 무인 열차 취급을 받다 보니 제 존재를 알아채는 손님이 거의 없거든요.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로봇이 되고 나서 힘든 일도 많지만, 오늘은 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타카다 씨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고생이 보상받거나 인정받는 일이 휴머노이드에게는 거의 없다 보니, 그 기쁨이 나에게도 절절히 전해졌다.
“그렇군요. 정말 힘든 일을 하고 계시네요. 저, 4월부터 통학하니까 앞으로 신세 좀 질 것 같아요. 잘 부탁해요, 타카다 씨.”
그 말을 들은 타카다 씨는 꽃이 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합격 축하드려요! 4월부터 기다리고 있을게요. …미안해, 사시하라 씨. 데이트 방해해서.』
『아냐, 고마워. 나도 휴머노이드니까 타카다 씨 마음 잘 알아. 오늘 나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뻤어. 말 걸어줘서 고마워.』
『미노리…라고 불러줘. SH200STD1217MT도 괜찮지만 너무 기니까.』
『그럼 나도 카호라고 불러줘. 난 고유 식별 번호로 불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럼 카호 짱, 다음에 학교나 트램에서 보자!』
『응, 미노리 짱 다음에 봐!』
키 작고 씩씩한 미노리 짱은 손을 크게 흔들더니, 교복 밖으로 비쳐 보이는 보라색 라인이 들어간 외피 팔다리를 숨기지도 않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분명 안내 방송 내용도 노선 주변 정보를 매일 조사하는 거겠지.”
미노리를 함께 웃으며 배웅한 타츠야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야. 오늘도 합격 발표 날인 거 알아보고 전해준 거잖아. 아마 시간대별로 멘트도 바꿀걸, 미노리 짱은.』
“정말 대단한 배려야.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애가 그냥 기계 부품 하나처럼 취급받다니…. 휴머노이드란 게 대체 뭘까.”
타츠야는 고민에 빠진 듯했다. 세상엔 아직 휴머노이드 가동 수가 적다. 주변에 휴머노이드가 있지 않은 이상,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관계를 깊게 생각할 일은 별로 없을 테니까.
『휴머노이드는 인간에게 종속되어 봉사하기 위한 로봇이야. 그러니까 기계로 취급받는 게 틀린 건 아냐. 하지만 말이야, 이렇게 사람처럼 대해주면 기쁜 것도 사실이야. 우리에게도 마음이 있으니까.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더 늘어난다면… 지금보다 우린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타츠야는 내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어. 휴머노이드에 대해 더 공부해야지.”
『응, 기대할게, 타츠야!』
우리는 사에전철을 타고 집 근처 역으로 향했다. 손은 계속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연인들의 맞잡은 손 그대로였다. 조금 부끄럽지만 뭐 어때.
인간과 휴머노이드 커플은 아직 드물다. 거리나 전철 안에서도 우리를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여자들이 더 그런 것 같다. 타츠야가 워낙 눈에 띄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다. 타츠야와 연인으로 있을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 슬픈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겠지만, 타츠야가 곁에 있어 준다면 난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역에 도착했다. 타츠야를 따라 개찰구를 통과한다. 나는 개찰구에 오른손을 갖다 댔다. 더 이상 왼쪽 팔을 입에 대고 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삐빅, 220엔 이용했습니다.』
내 목소리를 베이스로 한 시스템 메시지가 타츠야에게 들렸고, 그가 뒤를 돌아봤다.
“어라, 페리카 쓰면 금액도 알려주네.”
『응. 좀 시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기계 몸이 지금의 나니까. 타츠야에겐 이런 거 숨기지 않을래.』
“고마워, 카호. 난 카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나도 타츠야에 대해 알고 싶은걸.』
다시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서 우리 모습을 본 부모님이 뭐라고 하실지 둘이서 예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기뻐해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군! 합격했나. 뭐, 타츠야 군이 떨어질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말이다. 우선 축하하네. 4월 이후에도 여기서 통학할 거지?”
“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야 고맙지. 대학 수업이나 과제 양 봐가면서 시프트 다시 넣어주면 정말 고맙겠어.”
편의점 위층에 있는 집 거실에는 아빠와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가게는 어쩌고? 하고 물으니,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봐주고 계신단다. 오늘 같은 날은 가족끼리 오붓하게 대화하라는 뜻이겠지. 정말 감사했다.
“저기, 아저씨, 아주머니. 보고드릴 게 하나 더 있어요. …카호.”
『응.』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빠와 엄마 앞에 나란히 섰다.
“『저희, 사귀기로 했습니다.』”
“카호 씨는 제가 소중히 아끼겠습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러니까… 교제를 허락해 주세요.”
『아빠, 엄마. 부탁드려요. 저도 타츠야 씨 아니면 안 돼요.』
아빠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이렇게 진지한 표정은 드문데. 우리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둘 다 앉아라.”
“『네.』”
아빠의 권유에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조금씩 불안함이 밀려왔다.
“카호, 넌 우리 소중한 딸이야. 로봇이 됐어도 그건 나나 네 엄마나 마찬가지다. 네 행복을 언제나 바라고 있어. 그 점을 전제로 묻겠다. 괜찮겠니?”
『응… 아빠.』
“세상 일반적으론 인간과 로봇 커플은 아직 아주 적어. 보수적인 집안에선 휴머노이드와의 교제를 절대 인정 안 하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미안한 말이지만 넌 회사의 소유물이다. 기업 소유의 휴머노이드가 인간관계로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 해당 기억을 말소하거나 인격 수정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어. 알고 있니?”
『응…. 알고 있어. 메모리에 기록되어 있고, 내 사고나 행동도 문제 생기지 않게 프로그램 제어랑 원격 감시를 받고 있으니까.』
아빠는 내가 휴머노이드가 된 뒤로 휴머노이드 관리 공부를 시작하셨고, 계약 관계나 법적 취급에 대해 열성적으로 공부하셨다. 휴머노이드에게 인권이 인정되기 전까지는 인간 쪽에 잘못이 있더라도 기업은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태연하게 휴머노이드의 기억을 지우거나 인격 소프트웨어를 주물렀다고 한다. 끔찍한 이야기다. 그런 가혹한 취급을 받아도 당시 휴머노이드들은 눈물을 흘리는 기능조차 없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줄었다지만, 기업이 이미지 하락이나 번거로운 일을 피하려는 경향은 여전하다.
“방금 말한 기억이나 인격 수정은 과거 사례를 보면 대부분 연애 때문이었어. 그것도 본인들보다는 상대방 부모나 형제들의 항의가 많았지. 타츠야 군은 네 부모님으로부터 우리가 맡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그러니까 카호와 타츠야 군이 사귀는 걸 타츠야 군 부모님께도 두 사람이 확실히 말씀드려야 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타츠야 군 아버지는 나한테도 절친이야. 도리는 지켰으면 좋겠구나. 우선, 그럴 수 있겠니?”
“『네.』”
우리의 대답을 확인하듯 고개를 끄덕인 아빠는 이번엔 나를 향했다.
“먼저 카호. 이런 말 하긴 싫지만, 넌 이제 로봇이다. 분명 인간 커플보다 훨씬 많은 장애물이 있을 거야.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고생할 일이 많겠지. 그 장애물의 절반은 사랑하는 타츠야 군이 짊어지게 될 거다. 그걸 알면서도 타츠야 군과 사귈 거냐?”
아빠의 말은 엄격했다. 정말 각오를 묻고 계신 거다. 나도 손을 가슴에 얹고, 한 마디 한 마디 확인하듯 아빠에게 대답했다.
『아빠. 로봇인 나는 마음을 속일 수 없어. 그래서 솔직하게 말할게. 로봇인 나랑 사귀는 타츠야 씨는 힘들 거야. 주변 눈치도 보게 만들고, 자유도 뺏게 될 거야. 타츠야 씨한테 난 폐를 많이 끼칠 거야. 타츠야 씨 부모님께도 안 좋은 마음 들게 할지도 몰라. …하지만, 난 타츠야 씨를 포기 못 해! 그리고 타츠야 씨라면 이런 로봇인 나라도 받아줄 거라고 믿어. 내가 진심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타츠야 씨밖에 없어!』
나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아빠에게 호소했다. 내 말이 듣는 사람에 따라선 이기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난 로봇이라는 걸 숨기듯 사귀는 건 싫다. 나도 조금씩 이 기계 몸인 자신과 마주하며 살아갈 거다. 그 고생의 일부는 파트너가 짊어져야 한다. 그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은 타츠야뿐이다.
아빠는 다음으로 타츠야를 향했다.
“타츠야 군. 딸아이가 한 말은 진실이야. 자네가 교제 상대로 선택한 내 딸은 안타깝게도 이제 인간이 아니야. 기계 몸을 가진 로봇이지. 거기서 눈을 돌리는 건 용납 못 하네.”
“네, 물론입니다.”
“카호의 인권은 인간과 달리 제한되어 있어. 카호에겐 직업을 선택할 자유도, 거주지를 옮길 자유도 없고, 가장 강력한 관리자 권한은 회사 쪽에 있지. 뭘 하든 프랜차이즈 본부에 신청해야 해. 연인인 자네의 마음보다 회사의 명령이 우선이야. 부모인 우리 의사보다 회사의 방침이나 명령이 우선이지. 카호 본인의 의사 따윈 고려 대상이 아니야. 그렇게 평생을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며 부자유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카호는 그런 딸이야.”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알겠네. 그럼 하나 더 묻지. 카호. 아니, HS-207PS1114KS! 그 자리에서 기립해라!”
『네, HS-207PS1114KS는 기립하여 대기합니다.』
규잉- 하는 모터 소리를 내며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고, 정면 벽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아빠는 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왜? 어째서? 같은 의문이 생기기도 전에, 내 사고는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나를 세워둔 채 아빠는 말을 이어갔다.
“카호는… 우리 딸이지만, 회사 사람이나 우리가 제어하는 로봇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아무리 인간처럼 행동해도 내 이 말 한마디조차 거역할 수 없지. 분명 싸움조차 성립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앞으로 사귀어 나갈 건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 처지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느끼자 슬픔이 밀려와 몸이 떨렸다. 이런 모습, 역시 타츠야에게 보여주는 건 괴롭다.
“자네가 관리 권한을 갖게 되면 이런 일을 아주 쉽게 할 수 있어. 그걸 자제하는 능력도 요구되지. 미안하다, 카호. 자유롭게 있어도 좋다.”
『네, HS-207PS1114KS는 명령을 해제합니다.』
나는 명령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졌지만, 기분이 풀리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카호, 앉으렴.” 하는 엄마의 권유에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아빠도 괴로운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셨다. 어떤 아버지라도 자기 딸의 이런 모습은 분명 슬플 테니까.
“전 인간입니다. 그리고 카호 씨도 마음은 인간이에요. 서로 실수도 하고, 싸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라도 카호 씨의 신체 기능을 악용하는 식의 해결만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제가 그걸 어긴다면, 부디 저를 꾸짖어 주세요.”
아빠는 가만히 타츠야를 응시하다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먼 훗날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미리 말해두마. 결혼도 프랜차이즈 본부가 제시한 조건 하에서만 가능해. 만약 결혼한다 해도 카호는 기계 몸이라 자연 분만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그 말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여보, 당신 정말!”
아빠의 너무한 말투에 엄마가 제지하고 나섰다. 아이를 인간 여성처럼 낳을 수 없다는 건 내 최대 콤플렉스 중 하나다. 내 성기는 인공물이고, 이제 자궁도 난소도 없다. 제조되기 전에 채취된 난자만이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었다는 유일한 증거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걸 가차 없이 타츠야에게 들이댄다. 하지만 전부 진실이다. 고개를 숙인 채 나는 흐느끼고 있었다.
“여보! 지금 물어봐야 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야. 끝까지 말하게 해줘….”
엄마는 아빠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타츠야는 아빠를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카호와의 아이는 인공 수정이 되겠지. 카호는 당연히 모유로 아이를 키울 수도 없어. 편의점 일을 그만둘 수 없으니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고, 카호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으니 타츠야 군이 전근을 가게 되면 무조건 기러기 아빠 신세야. 그리고 카호는 타츠야 군과 함께 늙어갈 수도 없어. 수십 년이 지나도 지금 모습 그대로겠지. 카호와 사귀는 것, 그리고 그 연장선에는 그런 보통 인간과는 다른 제약과 고생이 아주 많단 말일세. 그걸 다 듣고도 다시 한번 확인하겠네.”
“네.”
“자네는 그걸 전부 받아들일 각오가 정말로 되어 있는가?”
아빠가 내민 것은 스무 살 학생인 타츠야에겐 너무나 무거운 이야기였다. 왜 이런 말을 하시는 걸까. 타츠야는 30초 정도 지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단계에서 아저씨가 하신 말씀을 전부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소중한 카호 씨를 항상 행복하게 해주겠다… 같은 무책임한 말은 못 하겠습니다….”
타츠야는 괴로운 듯 말을 쥐어짜 냈다. 타츠야는 지금의 자신에게 절대적인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 거다. 그도 그럴 게 타츠야는 아직 학생이니까. 아빠가 묻는 것들이 너무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약속하겠습니다. 전 절대로 카호 씨를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설령 곤경을 헤쳐 나갈 힘이 부족하더라도 제가 카호 씨의 마음과 몸을 지키는 방패가 되겠습니다. …카호 씨 곁에 반드시 붙어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카호 씨와 함께 극복해 나가겠습니다. 카호 씨는 분명 로봇입니다. 인간과 평등해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의 관계만큼은 절대로 평등하게 만들겠습니다. 대등한 파트너로서 서로 존중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평생을 걸고… 카호 씨를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주 깊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빠가… 엄마가… 두 분 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리고 울고 계셨다. 아빠의 눈물은 내가 휴머노이드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날 이후로 처음 보았다.
“타츠야 군…. 고개 들게. 아직 학생인 자네에겐 상상조차 안 될 일들까지 몰아붙였군. 짓궂은 질문을 해서 미안하네. 용서해주게.”
이번엔 아빠가 깊게 머리를 숙였다.
“아뇨… 아닙니다. 당연히 전부 생각해둬야 할 일들이니까요.”
아빠는 분명 타츠야의 각오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거다.
“자네 각오는 잘 알았네, 타츠야 군. …여보, 괜찮겠지?”
아빠가 엄마에게 시선을 보냈다.
“네, 여보….”
엄마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소파에서 일어나 타츠야 옆에 서더니….
다음 순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여보! 뭐 하시는 거예요?”
“잠깐만요, 아저씨!”
『아빠!』
“타츠야 군, 부탁하네!! 내 딸을, 카호를 행복하게 해주게!! 카호를 불쌍한 로봇으로 만든 건 내 책임이야! 이 아이에게 의료용 전신 의체도 못 사주고, 휴머노이드 소유권마저 회사에 넘겨버린 못난 애비란 말이다. 카호의 고통은 다 내 탓이야….”
나는 참지 못하고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소유권 넘기라고 한 것도 나란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도 아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카호는 착한 아이다. 상냥하고 배려심 깊고, 중학교 때 하던 육상부도 안 하고 이 가게에서 더 일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가족 생각 끔찍한 착한 딸이야. 그런 딸이! 예쁜 카호가 매일같이 상처받는 모습을 난 이제 더는 못 보겠어! 뻔뻔한 소리라는 거 안다…. 하지만 자네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타츠야 군이 카호를 고통에서 구해줘! 나도 아내도 타츠야 군과 카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네! 그러니까 제발…. 남들만큼만, 남들만큼만 행복하게 해줘. 카호가 인간 여자다운 인생을 살게 해달란 말이다! 부탁하네…. 부탁해…. 제발…….”
아빠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오열하셨다. 아빠는 계속 나를 로봇으로 만든 걸 자책하고 계셨던 거다. 확실히 전신 의체 사이보그라면 뇌는 생체 그대로라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남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집 한 채보다 비싼 기체 값과, 신입사원 월급에 맞먹는 유지비가 매달 들어간다. 전부 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라서, 돈을 못 내게 된 사이보그들이 눈물을 머금고 휴머노이드가 되는 사례는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난 내가 직접 휴머노이드가 되기로 결정했고, 소유권을 회사에 넘기는 것도 내가 먼저 제안했다. 그런데도 아빠는 우리 집에 돈만 많았어도라며 계속 괴로워하셨던 거다.
“아저씨, 고개 드세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미숙할지 모르지만, 제가 카호 씨를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아빠는 내민 타츠야의 손을 잡고, 자신의 두 손을 포개었다.
“고맙네… 고마워… 정말 고맙네….”
몇 번이고 되새기듯, 눈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채 타츠야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는 이날, 소꿉친구 동거인에서 연인 사이가 되었다.
저녁 식사로 나온 건 팥찰밥과 도미 소금구이였다. 오늘 타츠야의 합격 축하다. 그리고 우리 교제 시작 축하 파티도 겸하게 됐다. 오늘은 두 가지 의미로 경사스러운 날이다.
참고로 엄마한테 만약 시험 떨어졌으면 어쩔 셈이었냐고 물어봤더니,
“어머, 넌 타츠야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니?”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모처럼이라 오랜만에 저녁을 같이 먹었다. 섭취한 음식을 나중에 폐기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그런 것보다 타츠야와 부모님과 함께 먹고 싶어졌다.
아빠도 엄마도 오늘은 정말 행복해 보이신다. 아빠는 맥주 마시는 속도가 빠르다. 취기가 돌았는지 아까 일이 생각나서 또 울고 계시지만 행복해 보이신다. 이런 아빠의 모습은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기뻐하시는 아빠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야.”
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는데, 엄마도 기뻐 보이신다. 그리고 나도 오랜만에 젓가락을 들고 팥찰밥과 도미를 먹었다.
『맛있다. 식사라는 게 정말 소중한 거였네. 영양이 어쩌고 하기 전에,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왜 잊고 살았을까….』
“이게 가족이지. 우리 집도 아버지는 맨날 잔업이었고, 이 집도 편의점이 있으니까 다 같이 모이기가 쉽지 않다는 건 알아. 그래도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
『응, 맞아. 엄마, 그동안 미안해. 나 다시 식사 챙겨 먹어도 될까? 역시 충전만 하는 건 너무 슬퍼.』
엄마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아빠가 맥주를 너무 많이 드셔서 잠드시는 바람에 나는 업무 모드로 전환되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대신 타츠야와 둘이서 저녁 식사 후 가게를 보게 됐다.
손님이 뜸해진 밤 10시, 엄마가 내려오셔서 내 업무 모드를 해제하셨다.
“타츠야 군은 이제 올라가 봐도 돼. 합격 발표 날까지 가게 보게 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아빠가 오늘 술이 좀 고프셨던 모양이니 이해해주렴. 카호는 이따 급속 충전한 다음에 평소처럼 0시부터 6시까지 시프트 들어가고.”
나는 준관리자 권한인 엄마의 명령을 태스크로 설정한다.
『네, 태스크 등록했습니다…. 그럼 2시간 동안 잘 부탁해요, 엄마.』
“그래, 푹 쉬렴.”
나와 타츠야는 계산대 뒤 계단을 올라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손을 잡았다. 서로 지금까지 참아왔던 만큼 조금이라도 더 닿아있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 것 같다.
“카호, 목욕은 어떻게 할 거야?”
그 말에 0시까지의 태스크를 조립해본다. 평소라면 학교 끝나고 저녁 시프트 들어갔다가 저녁 식사(최근엔 안 먹었지만), 입욕, 충전을 마치고 0시부터 6시 시프트에 들어간 뒤 아침 식사(최근엔 안 먹었지만), 등교하는 생활 사이클인데 오늘은 우리 귀가가 늦어서 시간이 좀 빠듯하다.
『오늘은 여기저기 다녔으니까… 지금 충전 잔량으론 1시간 17분이 필요하네. 으음.』
“먼저… 충전할 거야?”
그 말에… 나는 움찔하며 반응했다.
『응…. 타츠야, 이따 시간 있어?』
“응? 난 괜찮아. 이따 씻고 자기만 하면 되니까.”
『……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 방으로… 와줄래?』
나는 충전에 관해서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게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는 차마 입이 안 떨어졌지만, 타츠야는 이제 연인이니까… 역시 숨기는 거 없이 다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상담하기로 했다. 내 충전에 대해서…. 시간이 없으면 목욕은 건너뛰지 뭐. 아침에 샤워하면 되니까.
방으로 타츠야를 불러들여 내 침대에 같이 앉았다. 5년이나 같이 살면서 내 방에 수없이 왔었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두근거린다. 타츠야가 내 침대 감촉을 확인하듯 만져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카호는 침대 써?”
『난 잠을 안 자게 됐으니까 자는 용도로는 안 쓰지만, 울고 싶을 때나 의욕이 안 생길 때는 역시 누워서 뒹굴거리고 싶을 때가 있어. 이 비콘은 딱딱한 데 누우면 끝부분이 상하거나 부러질 수도 있어서 그런 동작을 하려고 하면 락이 걸리거든. 아까처럼 직립 자세를 취하게 돼.』
나는 귀의 비콘을 가리켰다. 끝부분 LED는 항상 무슨 색인가로 깜빡이거나 켜져서 내 기기 내부 상태나 통신 상황, 감정 같은 걸 표현한다. 이 비콘 끝이 뒤통수보다 뒤로 튀어나와 있어서 엄청 거추장스럽다. 이 디자인 고안한 사람은 이 모습으로 하루만 살아봤으면 좋겠다. …이거 꽤 진심이라니까?
『그래서 이 침대는 내가 유일하게 누울 수 있는 곳이야. 정신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해. 안 없어져서 다행이야.』
사실 내가 제조되어 여기 납품(이라는 표현은 싫지만)될 때, 반입 업체가 침대를 치울지 물어봤단다. 보통 휴머노이드가 된 사람은 침대를 안 쓰게 되니까 처분하는 경우가 많고, 중고로 팔면 돈이 자동으로 들어오기도 해서 그렇게 하는 소유주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빠가 “딸아이가 쉴 곳이 없어지잖아요.”라며 거절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기뻤다.
『그리고 잠이랑 식사 대신 필요한 작업을 저 충전 크래들에서 하는 거야. 충전만 하는 게 아니라 아까 먹은 걸 탱크에서 배출하고 세척하는 기능도 있어. 시간 없으니까 그건 내일 하겠지만.』
나는 방구석에 자리 잡은 충전 크래들을 가리켰다. 업무용 체중계보다 한 바퀴 더 큰 그것은 발 모양 금속 단자가 달린 내 기체를 올려놓는 부분과 수직으로 선 벽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면 부분에는 내 등에 꽂을 케이블이나 코드류 단자가 달려 있고, 터치패널식 디스플레이가 매립되어 있었다.
『나한테 충전은 휴식이 아냐. 프로그램으로 매일 실시하도록 정해진 작업일 뿐이야. …저기, 내가 어떤 식으로 충전당하는지 알아?』
그 질문에 타츠야는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볼이 새빨갛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잘은 모르겠는데….”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저기 말이야, 타츠야가 매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타츠야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누군가의 결정적 포즈다.
“…그야 들려오는 걸 어떡해. 하물며 좋아하는 여자애 소린데. 참을 수 있는 놈 있으면 내가 좀 보고 싶다!”
타츠야도 필사적으로 항의한다. 뭐, 원인은 나니까 그렇게 되겠지.
『에이, 농담이야. 어쩔 수 없는 거 알아. 오히려 매일 들려줘서 미안해. 나도 사실 부끄럽지만 충전은 프로그램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따를 수밖에 없거든….』
나는 타츠야에게 힘없이 웃어 보였다.
“저기, 카호. 너 충전할 때… 그 소리 난 다음에… 울고 있지 않아? 왜 우는지, 싫지 않다면 알려줬으면 좋겠어. 힘든 일이 있다면 나도 같이 나누고 싶으니까.”
아, 그렇구나. 그것도 들리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해준다면 제대로 이야기해야 해. 우린 연인 사이니까.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거야. 부끄럽지만 타츠야니까 말할게.』
나는 크래들을 노려보았다.
『난 충전이 괴로워. 내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로봇 청소기 같은 가전제품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하니까. 타츠야도 알겠지만 내가 소리를 내는 건 충전 중에 저 크래들이 나한테 성감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야. 내 의사 따윈 저 기계는 들어주지 않아. 멈춰달라고 해도 충전 중엔 기체 동작이 락이 걸려서 도망칠 수도 없어. 괴로워도, 무서워도… 머릿속 프로그램에 적혀 있는 이상, 난 충전이라는 작업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돌려 타츠야와 눈을 맞췄다. 아마 아까부터 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을 거다.
『타츠야…. 난 말이야, 매일 밤 저 기계한테 강간당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강간당하며 내는 신음 소리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한테 매일 밤 들려주고 있는 거야.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
『난 크래들 설정을 바꾸려고 했어. 하지만 난 프로그램 때문에 터치패널을 만질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래들 터치패널을 만지려 했지만, 패널 바로 3cm 앞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보이지? 나한텐 이런 사소한 것도 허락되지 않아….』
침대 위치로 돌아와 타츠야 옆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부모님께 부탁해서 회사에 성감 신호만이라도 꺼달라고 했지만, 그럴 경우 충전할 때 극심한 통증이랑 구토감이 생기기 때문에 성감 신호를 끄는 건 회사 방침상 허가되지 않는다는 답변만 들었어. 이제 나한텐 도망칠 곳이 없어.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나는 타츠야의 가슴에 눈물 젖은 얼굴을 묻었다.
『그게 내 충전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우는 것밖에 없잖아!! 우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해! 이게 평생 계속된다니… 너무 고통스러워…. 도와줘… 타츠야….』
나는 몸을 떨며 타츠야에게 속마음을 쏟아냈다. 아무리 로봇이라도 성에 관한 민감한 내용이라 좀처럼 입을 떼기 힘들었다. 나는 타츠야에게 매달려 엉엉 울었다. 타츠야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꽉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기… 카호. 난 말이야…”
『삑… 현재 시각 22시 33분. 업무 모드 이행 10분 전까지 충전이 완료되지 않을 우려가 있어 본 기체는 충전 태세로 이행합니다… 어, 뭐야….』
내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규잉- 하며 재빨리 일어섰고, 충전 크래들을 향해 규칙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싫어! 잠깐만! 안 돼! 멈춰줘! 제발!!』
“왜 그래! 카호!”
이때 나는 잊고 있었다. 업무 모드 이행 전까지 충전 시간이 확보되지 않을 것 같으면 강제적으로 기체를 제어해 충전 크래들에 접속시킨다는 사실을…. 충전은 이 기계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남은 시간으로부터 자동으로 발동되는 강제 충전 프로그램에 나의 필사적인 소원은 닿지 않았다….
나는 울면서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내 몸을 이끌고 크래들 위에 올라가 발 모양 금속 단자에 위치를 맞췄다. 다음으로 손을 양옆으로 30도 정도 벌렸고, 그 위치에서 양 손목이 금속 암에 고정되었다. 수치심과 분함에 나는 흐느끼며 프로그램에 조종당하고 있었다.
목 뒤쪽쯤에서 위잉- 하며 케이블 하나가 뻗어 나왔다. 찰칵.
『아앙!』
목덜미에 제어 케이블이 접속된다. 이어서 등 뒤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덜컥.
『으윽!』
다음으로 등 중간쯤 위치에 충전 케이블이 접속된다.
“괜찮아? 카호!”
『보지 마, 타… 삑, 지금부터 급속 충전을 개시합니다…… 츠야… 제발….』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을 때, 가장 사랑하는 사람 눈앞에서 무자비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등과 목덜미에서 성감 신호가 흐르기 시작했다. 애정이나 마음의 교감, 자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센서에 가해지는 전기 신호였다. 몸에 피할 곳 없는 성적 자극이 쏟아져 들어온다.
『앗… 아아…… 싫어… 멈춰줘…… 아아… 제발… 앗… 하아…』
이런 비참한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기계가 기계를 범하는 끔찍한 의식 따위. 나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프로그램에 의해 팔다리 액추에이터 동작이 락이 걸렸다. 허용된 움직임은 겨우 몸통과 목을 비트는 것과 바이브레이션 기능으로 기체를 떨게 하는 것뿐이었다.
『앗… 싫어… 이런 거… 윽, 흑…… 앙… 흑… 흑… 아…』
부끄럽고 슬퍼서 눈물이 쏟아졌다. 분명 환멸 느꼈겠지. 이런 케이블 꽂혔다고 꼴사납게 신음 소리나 내는 여자친구라니.
『미안해, 타츠야…. 앙. 이런 나로선… 하아하아… 너한테……』
쾌락의 파도에 맞춰 기체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분명….
“카호!!!”
타츠야는 나에게 달려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껴안고… 입술을 빼앗았다.
『츄… 으으… 삑, 센서에 외부 접촉 감지, 본 기체는 현재 급속 충전 중이므로 떨어져 주십시오… 음… 츄… 푸하… 으음… 츄… 으음… 타츠야… 왜 그래?… 앙!』
타츠야는 시스템 메시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나를 껴안은 채 눈을 응시했다.
“카호는 매일 밤 이런 고통을 계속 견디며 버텼구나…. 고마워….”
『…앙… 타츠야… 으음… 무슨… 으윽… 뜻이야?』
치밀어 오르는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며 말의 진의를 물었다.
“카호가 힘들고 고된 충전을 받으면서도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 난 기뻐.”
그렇게 말한 타츠야는 다시 입술을 겹쳤다.
『츄… 으으음… 삑, CPU 부하 상승 중. 충전 중에는 불필요한 연산 처리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츄우…… 앙… 츄… 아아앗!』
키스로 입술이 막혀도 목에 있는 스피커가 신음 소리를 덮어씌운다. 타츠야와의 키스가 기분 좋아서 마음이 고조된다. 에러가 떠도 멈출 수 없다. 멈추고 싶지 않아…. 타츠야는 내 상태를 살피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미안해…. 분하지만 지금 당장 카호를 이 작업에서 구해줄 힘이 나에겐 없어…. 나한테 더 큰 힘과 지식이 있으면 좋을 텐데.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게 해줘….”
『아앗!! …앙…. 괜찮아…. 나야말로 이기적인 소리를… 으응, 앗…』
“카호, 눈을 감아봐…. 조금만 상상해봐. 지금 카호는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있어. 인간이랑 똑같이….”
타츠야는 머리와 뺨을 어루만지며, 쾌락으로 파르르 떨리는 나를 껴안고 상상의 세계로 이끌려 했다. 뭘 하려는 걸까.
『응…. 알겠… 아앙…. 어…. 타츠야….』
“카호의 몸은 나한테 꽉 안겨 있어. 카호를 안고 있는 건… 나뿐이야. 난 카호를 독점하고 싶어. 그래서 카호가 도망가지 못하게 내가 두 손으로 카호 손목을 누르고 있어….”
타츠야는 손목을 고정하는 금속 부품 위치에 자기 손으로 내 손목을 쥐었다.
『으음… 아앗… 타… 츠야…?』
“카호는 조금씩 긴장이 풀려서 나한테 몸을 맡겨줘.”
타츠야의 두 손은 다음으로 등과 목덜미로 뻗어 나갔다. 순간 무서워서 움찔 떨었지만, 타츠야는 커넥터 주변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기분 좋아…. 기계가 아니라 다정한 인간의 손이 나를 만지고 있다.
『아앗! …타… 삑, 충전 커넥터에는 고압 전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손을 떼 주십시오. …츠야, 기분 좋아….』
“미안, 커넥터는 안 닿게 할게. …카호는 등이 약점이지. 난 목덜미랑 등을 집중적으로 계속 쓰다듬을 거야. …카호의 귀여운 목소리를 듣고 싶으니까….”
커넥터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며 등과 목덜미를 더듬는 타츠야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그러자… 등과 목덜미에서 오는 신호에… 다정하고 따뜻한 신호가 섞여 들어온다. 충전에 맞춰 흐르기만 하는 쾌락 펄스뿐만 아니라, 자애로움… 감싸 안아주는 듯한 부드러운 신호가 느껴진다.
『아앗! …타츠야! …타츠야아! …키스해줘. 하아하아… 더 만져줘. …더 사랑해줘!』
“다른 데도… 만질게?”
『응! …더 타츠야의 신호를 느끼고 싶어! …앙앙! …하아하아…. 더 내 센서를 타츠야로 가득 채워줘!! …아앙!』
나는 눈을 감은 채 쾌락에 몸을 맡겼다. 더! 더 타츠야를 원해서 나도 모르게 파렴치한 조르기를 하고 만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인격 소프트웨어 처리는 한계에 도달했고, 시야에는 경고 메시지가 떠 있다. CPU에서 열기가 느껴져도 멈추지 않는다. 타츠야를 갈구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어!
『츄… 아아…, 레로…. 쿠츄… 하아… 음… 쿠츄… 으음! …푸하… 츄우우….』
전망대에서 마음을 나누던 키스와는 전혀 다른, 서로를 갈구하며 탐하는 키스. 타츠야를 원하고, 또 타츠야도 나를 원한다는 감정이 전해진다. 혀를 얽고 인공 타액이 침처럼 흘러내린다….
『하아하아… 아앙! …츄… 거기 기분… 삑, CPU 부하율 80%, 기체 온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충전 시퀀스 이외의 종료를 권장합니다… 지이이. …더… 더! …아아앗!』
타츠야의 손은 내 가슴을 부드럽게 쥐고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쾌락의 파도가 강렬하다. 인간일 때와 똑같다. 닿으면 기분 좋아지는 곳은 로봇 몸이 되어도 똑같았다. 경고 메시지는 나와 타츠야를 떼어놓으려 한다. 하지만 멈추지 않아. 멈추고 싶지 않아! 난 기계 따위가 아냐. 나와 연인의 시간을 방해하지 마!
입술이 막히고 왼손으로 가슴을 애무하는 타츠야의 오른손은… 몸통을 타고 스윽 내려갔다. 사라진 배꼽 위치를 지나 고유 식별 번호 등이 적힌 하복부 금속 플레이트를 훑고… 그리고 가랑이에 있는 인공 성기를 보호하는 크림색 외피를 쓸어 올렸다.
『하아아아아!! 아아… 삑, 성기 형성은 퍼스널 모드에서는 허가되지 않습니다. 설정을 확인해 주십시오… 앙. 거기… 안 돼… 앙!! 이상해져 버려… 으으으, 아앙!』
“카호, 이 외피는 계속 이 상태야? …카호의 소중한 곳은 여기 있는 거야?”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며 매끈한 내 가슴팍 외피를 몇 번이고 강하게 압박했다. 눌릴 때마다 쾌락의 파도가 나를 치받았고, 몸이 파르르 떨렸다. 타츠야의 얼굴도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아하아…. 원래는 여기가 변형… 아아앙! …성기랑 항문… 히양… 형성되는 거야… 근데 섹스로이드 모드가 안 되면… 으으… 내 성기를 꺼내는 게… 안 돼… 앙! 명령이 없으면… 하아하아… 내 마음대로… 못 바꿔… 아앗!』
그 말을 듣자 타츠야는 내 눈을 보며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카호, 섹스로이드 모드로 전환!”
안 돼, 타츠야. 그 명령을 난….
『타… 삑, 명령자 인증에 실패했습니다. 권한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모드 전환은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츠야… 미안해… 아앙! 나도… 으응! …타츠야랑 이어지고… 싶어… 미안해… 섹스도… 하아하아… 마음대로 못 하고… 아우윽… 로봇이라 미안해….』
절묘한 타이밍에 메시지가 뜬다. 마치 감정이 없을 프로그램이 우리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지금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이어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내 몸인데 스스로 만지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일 때처럼 혼자서 위로하는 것조차 나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대신이 이 충전이라니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타츠야가 내 관리자가 되어준다면… 분명 우리 몸은 이어질 수 있을 거다. 그날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관리자 권한이 필요하구나…. 미안해. 몰랐어. 그럼 오늘은 이걸로 참아줄래?”
타츠야는 가랑이를 보호하는 외피를 세로로 몇 번이고 문지르듯 훑었다. 인간 여성과 마찬가지로 이 위치는 센서가 집중되어 있어서, 겉에서 성기와 항문을 애무받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고 기체의 바이브레이션이 강해졌다. 타츠야의 반대쪽 손은 쉬지 않고 유두 없는 가슴을 아까보다 더 강하게 주물러댔다. 타츠야는 몸을 더 밀착시켜 왔다. 내 허벅지에 딱딱한 감촉이 전해진다. 타츠야도 나 때문에 느끼고 흥분해준 거야. 원래는 타츠야가 나를 꿰뚫어 줬으면 좋겠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지금은 타츠야에게 이 기계 몸을 맡기자….
『타츠야아…! 굉장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돼… 야앗! 앗앗! 나… 가버… 삑, CPU 부하율 90%, 기체가 프리즈될 우려가 있습니다. 즉시 충전 이외의 처리를 종료하십시오… 그래… 온다! 와버려!! …앗앗앗, 타츠야! …아앗, 타츠야…!』
“괜찮아, 카호. 기분 좋아져도 돼. 다 잊고 나만 느껴줘….”
그 말이 스위치였다. 기계화 뇌가 수신하는 쾌락 신호가 단번에 45%나 증폭되었고… 내 몸은 타츠야에게 지배당했다.
『아앗, 타츠야! 타츠야! 앗앗앗앗! 가버려. 아앙, 앙앙앙!! 타츠야아… 타츠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가가가아아아아아』
내 절규는 후반부에 노이즈로 변했다. 일정 주파수의 소리가 목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타츠야의 얼굴을 비추던 카메라 아이의 시야 영상도 멈췄다. 시야 구석의 상태 표시나 시각, 동작 로그가 깨져서 나타났다. 성감 신호 과부하로 인해 나는 프리즈된 컴퓨터처럼 모든 처리가 정지되었다….
“카호, 카호…? 괜찮아?”
아마 타츠야의 목소리가 계기였을까. 시간으로 따지면 불과 몇 초 사이.
다음 지각한 순간, 나는 전신을 뻣뻣하게 굳히며 몸통과 목만으로 힘껏 뒤로 젖혀졌고, 규잉, 규잉- 하며 내부 모터 소리를 밖으로 흩뿌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신음 소리와 함께 비쿤! 비쿤! 하며 이완과 긴장을 반복했다. CPU 부하율은 여전히 100% 가까이 달해, 이제 경고 메시지를 띄울 여력도 없이 내 인격 소프트웨어 처리도 지연되는 상태였다. 그래도 성감 신호를 처리하기 위해 나는 몇 번이고 몸을 젖히고 몇 번이고 신음을 내뱉으며 기체를 떨었다. 카메라 아이의 초점은 잡히지 않았고, 포커스 잡는 소리가 큐익큐익- 하며 작게 귀에 들려왔다. 입을 다무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해 인공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은 성적 절정으로 실신한 인간 여성의 모습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카메라 아이의 동영상 처리가 늦어져 시야 영상이 끊기고 블록 노이즈가 발생하는 가운데, 타츠야는 조금 미안한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정한 의미로 몸을 겹치지는 못했지만, 타츠야에게 몸을 맡기고 절정을 맞이했을 때는… 지금이 충전 작업 중이라는 것 따윈 이미 잊고 있었다. 아니, 잊게 해준 거다. 타츠야도 익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충전당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다. 나는… 타츠야의 손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게 너무나 기쁘고, 또 미안했다. 타츠야는 자기 소중한 부분을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했는데….
『고마워… 삑, 기체의 성적 절정을 관측하여 슬립 모드로 30초 후 이행합니다. …우 타츠야, 나 너무… 25… 기분 좋았어…. 나 행복… 20… 해…. 고마워… 타… 15… 츠야….』
다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기쁨과 행복의 눈물. 로봇이 되고 나서 슬프고 힘들어서 참 많이 울었다. 몇 번이고 울었다. 하지만 오늘은 행복한 일이 참 많았다. 타츠야가 대학에 붙고, 타츠야에게 고백받고…. 그리고 타츠야에게 충전의 고통에서 구원받았다.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는 언제나 타츠야가 곁에 있어 주었다.
“잘 자… 카호.”
『타… 10… 츠야, 나도… 5… 사랑해… 삑, 슬립 모드로 이행합니다. 인격 소프트웨어 처리를 종료합니다. 충전 완료 예정 시각은 23시 50분입니다.』
성적 절정을 맞이한 뒤에는 잠시 여운이 남았다가 강제로 슬립 모드에 들어간다. 평소 이 시간은 절망과 슬픔뿐이었는데, 오늘은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 의식이 가라앉는다. 이 1시간 남짓한 시간만이 나의 진정한 수면 시간일지도 모른다.
다음에 깨어나면 난 바로 업무 모드로 전환되어 엄마 대신 아침까지 심야 시프트를 뛴다. 업무 모드의 나는 박제된 듯한 영업용 미소로 내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게 거의 허락되지 않지만… 분명 오늘은 진심 어린 미소로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퍼스널 모드의 내가 행복하다면, 업무 모드의 나도 행복한 기분으로 충실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날 이후로 충전 시간에 슬퍼하는 일은 없어졌다. 나에게 괴로운 작업이었던 충전은 타츠야와의 소중한 비밀 스킨십이 되었고, 연인 사이의 행복한 한때로 바뀌었다….
나는 로봇. 편의점 업무 지원용 범용형 휴머노이드 HS-207PS1114KS. 세븐일레븐이 소유한 관리 비품. 회사로부터 원격으로 감시 제어당하고 프로그램에도 거역할 수 없다. 내 존재가 비참하고 슬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난 태어날 때부터 로봇이었던 게 아냐. 사시하라 카호라는 인간으로서의 이름이 있다. 인간이었을 때와 형태는 조금 바뀌었어도 분명 마음과 기억이 있다. 난 아빠와 엄마의 딸이고, 사키와 쇼 군의 절친이며, 곧 대학생이 될 센고쿠 타츠야의 여자친구다. 그들이 곁에 있어 주기에 난 기계 몸을 가진 로봇이 되었어도 살아갈 수 있다.
낙담할 때도 있겠지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 그러니까 어떤 힘든 일이라도 타츠야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
기계 몸이 된 지 4개월 남짓. 드디어 나는 앞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