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BO 님으로부터 오랜만에 단편 신작 『아틀리에 사치코』를 받았습니다.
휴일을 이용해 친구 이모의 양관으로 놀러 온 미카 일행의 운명은 과연…
예전에 KEBO 님이 쓰고 싶다고 하셨던 저택물인데, 서서히 조여오는 공포 연출이 역시 일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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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힘들어 죽겠네.”
“엄살은! 이제부터 더 걸어야 하거든?”
버스가 멀리 사라져간다. 산길 한복판 버스 정류장에는 대기실로 보이는 지붕 얹힌 오두막이 덜렁 서 있었다.
“진짜 하루에 딱 세 대뿐이네….”
시간표를 보며 미카가 중얼거렸다. 완행열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역무원 한 명뿐인 간이역에서 버스로 환승해 다시 한 시간 반. 미카 일행은 드디어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자, 가볼까.”
리츠코가 짐을 짊어지며 앞장섰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다른 애들도 주섬주섬 일어났다. 고등학교 때까지 배구부였던 리츠코는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 모습은 마치 인솔 교사가 아이들을 이끄는 것 같았다.
“마리, 이쪽 맞아?”
“응.”
숏컷 머리의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츠코를 선두로 마리, 유코, 미카, 마사미, 카오리까지 여섯 명. 일행은 국도에서 갈라져 나온, 대충 포장만 해둔 듯한 길로 들어섰다. 국도를 벗어나자마자 빽빽한 숲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녀들은 휴가를 맞아 마리의 이모네 집에 놀러 가는 길이었다. 마리의 말에 따르면, 이모부는 한량 기질이 다분해 이 산골짜기에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다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은 아내인 사치코가 혼자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사치코는 남편이 주식으로 남긴 재산 덕분에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다. 가끔 시내로 쇼핑하러 나가는 것 외에는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생전 한량이었던 이모부에 대한 친척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재산을 독차지한 아내 사치코를 향한 눈초리는 더 매서웠고, 사실상 절연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마리는 이상하게 사치코를 잘 따랐고, 자식이 없던 사치코 역시 어릴 때부터 마리를 무척 예뻐했다. 이모라고는 해도 사치코는 아직 젊어서, 마리에게는 나이 차 좀 나는 언니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사치코는 스무 살 무렵에 띠동갑을 훌쩍 넘는 남자, 즉 마리의 이모부와 결혼했는데, 그 사실 또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어? 저기 봐!”
나무 터널이 끝나는 지점, 언덕 너머로 고풍스러운 양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의 발걸음에 활기가 돌았다. 그녀들은 언덕 정상을 향해 힘차게 올라갔다.
“어서 오렴….”
초인종을 누르려던 찰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눈앞에는 사치코가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놀랐다는 말치고는 꽤 차분한 태도로 마리가 사치코와 닮은 미소를 지었다.
“그랬니?”
사치코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너희가 언덕을 올라오는 걸 창밖으로 계속 보고 있었거든. 살짝 놀래켜줄까 싶어서.”
여전히 감정 없는 말투였다. 미카 일행이 보기엔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렴.”
“실례하겠습니다….”
마리를 따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소녀들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와아….”
마사미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다른 애들도 피곤함을 잊은 채 집 안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영화 세트장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계단이 나타났다. 넓은 계단참에서 좌우로 갈라져 2층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저기….”
미카가 조심스럽게 사치코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러니?”
“그게, 이 넓은 집에 혼자 사시는 거예요?”
“응, 그렇단다. 이런 시골구석까지 와서 같이 살 사람이 누가 있겠니. 그래도 조용해서 좋아… 잡음도 안 들리고.”
“평소엔 뭐 하세요?”
마사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리츠코가 옆에서 눈치를 주며 말렸지만, 사치코는 후후, 하고 웃으며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지. 여자 혼자 이런 산속에서 대체 뭘 하며 사나 궁금하겠지. 딱히 남한테 거창하게 말할 만한 건 없단다. 아, 그렇다고 나쁜 짓을 한다는 건 아니고. 직업이라기보다는… 그래, 취미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 뒷말은 사치코가 아닌 마리가 가로챘다.
“이모는 드레스 디자이너야!”
“디자이너?! 그런 말 없었잖아!”
마사미와 다른 애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리도 참, 쑥스럽게.”
사치코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디자이너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건 아냐. 그냥 취미 같은 거지… 이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자, 일단 짐부터 풀고 좀 쉬렴. 마리야, 2층 방은 마음대로 써도 돼. 이불 같은 건 나중에 창고에서 가져가고.”
“네~ 가자, 얘들아!”
마리를 따라 소녀들이 계단을 우르르 올라갔다.
짐을 정리하고 주변을 산책하는 사이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독특한 냄새를 맡고, 마리 일행은 넓은 다이닝 룸 옆 주방으로 모여들었다.
“죄송해요. 저희가 좀 거들게요.”
마리가 말하자, 사치코는 즐거운 듯 커다란 냄비 안을 휘젓고 있었다.
“괜찮단다.”
그림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사치코가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워낙 오랜만에 여러 명분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카레도 괜찮니?”
마리 일행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마리의 대답과 동시에 애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모님, 접시는 어떤 거 써요?”
“식탁에 이 의자 좀 가져다 놓을게요!”
능숙하게 식사 준비를 돕는 소녀들을 보며 사치코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그럼 먹어볼까.”
사치코가 커다란 냄비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일곱 그릇의 카레라이스가 차려졌고, 각자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기운찬 목소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됐다. 사치코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천천히 카레를 입으로 가져갔다.
“더 있으니까 마음껏 먹으렴.”
사치코는 정말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저녁 식사 후, 마리 일행은 넓은 거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마리야, 사치코 이모님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치코가 신경 쓰였는지 미카가 물었다.
“음… 아마 아틀리에에 계실걸?”
“아틀리에?!”
“응. 이모부가 이 집 지을 때 엄청 공들여서 만든 곳이야. 덕분에 이모도 거기서 드레스 디자인할 마음이 생겼나 봐.”
잡지를 보던 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을 느꼈다.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한번 여쭤볼게. 근데 그전에 이불부터 좀 옮기자.”
마리는 마치 유치원 선생님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은 조금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마리의 말에 동의했다.
“내가 안 가면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일단 나 말고 두 명만 같이 가자. 나머지는 먼저 씻고 있고.”
마리가 상황을 정리했다.
“씻는 건? 이모님은?”
“아까 먼저 씻으라고 하셨어. 대중탕처럼 넓은 게 아니라서 빨리 안 씻으면 마지막 사람은 한밤중에나 씻게 될걸? 욕실이 별채에 있어서 밤에 혼자 가면 꽤 무서워.”
마리가 덤덤하게 현실적인 공포를 심어줬다.
“싫어! 나부터 씻을래!”
겁 많은 카오리가 제일 먼저 소리쳤다.
“안 돼.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이번엔 리츠코가 나섰다.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다섯 명이 손을 내밀었다.
“어, 마리는?”
마사미가 마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말했잖아. 내가 안 가면 욕실이든 창고든 못 찾는다니까.”
마리가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아, 그럼 너는 언제 씻어?”
“난 마지막에 씻어도 돼. 익숙하니까.”
“오케이! 그럼 다시, 가위바위보!”
리츠코가 잽싸게 외쳤다.
“악! 치사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마사미가 엉거주춤하게 손가락 하나만 내밀고 있었다.
“그게 뭐야?”
보를 낸 미카가 빵 터졌다.
“자, 마사미 탈락!”
리츠코가 선언했다. 나머지 네 명은 한 번에 승부가 났다. 리츠코와 유코, 카오리 세 명이 가위를 냈다.
“어?”
마사미의 손에서 눈을 떼고 상황을 파악한 미카가 비명을 질렀다.
“결정됐네. 마사미랑 미카는 이불 담당. 우리는 순서대로 씻으러 간다!”
리츠코의 진행은 언제나처럼 거침없었다.
“자, 가자.”
마리가 일어났다. 마사미와 미카도 투덜거리며 엉덩이를 뗐다.
“잠깐만.”
리츠코가 마리를 불러 세웠다.
“왜?”
“욕실 어떻게 쓰는지 알려줘야지.”
“아, 맞다… 그럼 일단 욕실 오리엔테이션부터 할까?”
애들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 같이 방을 나섰다.
“아.”
방에서 나오던 사치코를 발견하고 유코가 가볍게 목례했다.
“씻으러 가니?”
사치코가 상냥하게 물었다.
“네. 근데 카오리 다음 순서라서요.”
“그렇구나… 유코라고 했지?”
“네.”
“아틀리에, 구경해 볼래?”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유코가 깜짝 놀랐다.
“응.”
사치코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돼요?”
유코는 기쁘면서도 살짝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부담 갖지 마렴. 멀리까지 왔는데 구경이라도 해야지.”
유코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렴.”
유코는 사치코의 뒤를 따라갔다.
“영차!”
마사미 일행이 이불을 2층으로 옮겼다.
“이제 절반 남았네.”
익숙한 듯 마리가 말했다. 창고는 1층 안쪽에 있었다.
“뭐?! 이게 겨우 절반이라고?”
미카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투덜댔다. 6인분의 요와 이불을 나르는 건 평소 운동 부족인 그녀들에게 꽤 고된 노동이었다.
“싫음 관둬. 근데 배 내놓고 자다가 감기 걸려도 난 모른다?”
마리가 툭 던지듯 말했다.
“이 근처 밤엔 꽤 쌀쌀하거든.”
수다를 떨며 방마다 이불을 배분하던 마리 일행. 다시 1층으로 내려가려고 계단에 발을 올린 순간, 아래에서 리츠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야, 혹시 유코 못 봤어?”
“못 봤는데. 왜?”
리츠코 대신 갓 씻고 나온 카오리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대답했다.
“욕실 비었는데 유코가 안 보여.”
“없다고?”
“응.” 리츠코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슬쩍 방에서 나간 뒤로 안 보여. 신발이 그대로인 거 보니까 밖으로 나간 건 아닌 것 같은데.”
일행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뭐, 일단… 나부터 씻어야겠다.”
리츠코가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빨리 씻고 싶어 안달 난 눈치였다.
“그래, 리츠코 너 먼저 씻어. 유코 보이면 말해줄게.”
“알았어. 참 나, 걔는 어디 간 거야.”
리츠코는 자기 짐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화장실이라도 갔겠지 뭐. 일단 이불부터 다 옮기자.”
“에휴….”
미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지 말고 빨리 와. 버리고 간다?”
마리가 생긋 웃었다.
“아, 같이 가!”
미카가 서둘러 마리의 뒤를 쫓았다.
“저기, 이건….”
사치코를 따라 들어온 방 안에서, 유코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틀리에 안쪽,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숲처럼 늘어선 구석에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너머는 아틀리에와는 전혀 딴판인 공간이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렴.”
“네?”
유코는 어깨에 뭔가를 느꼈다. 사치코의 손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본 유코의 눈앞에,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미소를 지은 사치코의 얼굴이 있었다.
“음….”
유코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뒷덜미에 느껴진 둔탁한 통증.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흘러 들어온다….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유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사치코의 팔이 그 몸을 받아냈다.
“아….”
온몸이 저릿거리는 감각 속에서 유코는 뭐라고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혼란스러운 탓일까, 유코의 눈에는 사치코의 손가락 끝에서 바늘 같은 무언가가 돋아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치코는 미소를 머금은 채 유코의 몸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유코는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예감한 듯했지만, 더 이상 의식을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유코야~.”
중얼거리며 걷는 카오리.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일찌감치 씻고 나온 그녀는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마리 일행은 이불을 나르러 갔고, 리츠코는 씻는 중이다. 카오리는 심심풀이 겸 유코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니, 집 안 구석구석을 탐험한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넓네.”
혼자 궁시렁대던 카오리의 눈에 별채가 들어왔다. 사치코의 아틀리에라고 들었던 곳이다. 마침 거기서 사치코가 나오고 있었다. 카오리는 반가운 마음에 사치코 쪽으로 다가갔다.
“사치코 이모님!”
“어머, 깜짝이야.”
말과는 달리 전혀 놀란 기색 없이 사치코가 미소 지었다.
“죄송해요. 혹시 유코 못 보셨어요?”
생긋 웃으며 묻는 카오리.
“아, 유코라면 아틀리에에 있단다.”
사치코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치, 치사해! 혼자 구경하고 있었단 말이죠?”
“후후후후.”
입술을 삐죽 내미는 카오리를 보며 사치코가 웃었다.
‘근데 왜지?’
카오리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사치코는 왜 유코를 혼자 두고 여기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사치코가 말을 건넸다.
“너도 같이 가볼래?”
“네?!”
놀라긴 했지만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카오리. 드레스 디자이너의 아틀리에를 구경할 기회는 흔치 않다. 그녀는 ‘가보면 유코가 왜 혼자 있는지 알겠지’라고 제멋대로 결론 내렸다.
“그럼 저도 갈래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카오리. 사치코는 역시나 그 미소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며 카오리를 안으로 이끌었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조에 몸을 담근 리츠코. 온천은 아니었지만, 유백색 물이 가득 찬 욕조는 피곤한 몸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여긴 김이 참 잘 서리네.’
몽롱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욕조에 앉아 있으니 샤워기조차 안개에 가린 듯 흐릿했다.
‘창문이라도 좀 열까….’
벽 높은 곳에 달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창문이라기보다 유리 벽처럼 박혀 있는 구조였다. 그때였다. 리츠코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라…?’
천장에 환풍기 같은 게 달려 있는데, 김이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는 사이 안개는 더욱 짙어져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불이라도 났나?’
일단 욕조에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갔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렇게 그녀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리츠코 애들은 왜 이렇게 안 와?”
겨우 이불을 다 깔고 한숨 돌리는 마사미 일행.
“침대 메이킹 알바비라도 받아야겠어.”
미카가 투덜댔다. 그녀와 마사미는 인원수만큼 놓인 레트로풍 침대에 놀라며 이불을 깔았다. 익숙지 않은 일이라 꽤나 중노동이었다.
“뭐, 리츠코는 그렇다 쳐도 유코는 원래 한 번 씻으면 함흥차사잖아.”
마사미가 헛웃음을 지었다. 미카도 따라 웃다가 문득 마리를 보았다. 순간 미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리야, 왜 그래?”
“응? 아, 잠깐 멍 때렸어.”
다시 웃는 세 사람. 하지만 미카는 방금 본 마리의 얼굴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마치 인형 같은 그 얼굴에서.
30분 정도 지났지만, 제일 먼저 씻으러 간 카오리도, 유코도, 리츠코도 침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야, 거실에 있는 거 아냐?”
참다못한 미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한번 가보자.”
세 사람이 일어났다.
“여기가 안쪽 방이라 우리가 떠드는 소리를 못 들었나?”
“그럴 리가. 우리 아까 얼마나 시끄러웠는데.”
미카와 마사미는 대화를 나누며 복도로 나갔다. 그사이 마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거실에 도착했지만, 다른 세 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야, 이거 진짜 이상해.”
미카가 속삭였다.
“사치코 이모님은?”
마사미가 마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마 아틀리에에 계실 거야….”
마리가 대답했다. 그 표정을 보고 미카가 물었다.
“마리야, 너 진짜 괜찮아?”
“응? 왜?”
“아니, 그냥… 좀 이상해서.”
기묘한 침묵이 세 사람을 감쌌다.
“에이, 다들 피곤해서 어디 처박혀 쉬고 있겠지.”
마사미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보다 미카 너야말로 괜찮아?”
“어? 어… 뭐….”
마사미를 쳐다보며 미카는 아까 느꼈던 공포가 막연한 불안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마사미도 웃고는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건 미카의 불안에 동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원래 좀 그런 면이 있긴 했지만, 오늘따라 마리의 말투는 유독 부자연스럽고 무기질적으로 느껴졌다.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야, 혹시 말이야.”
마사미가 긴장을 풀려는 듯 말을 꺼냈다.
“그 세 명, 이모님한테 졸라서 아틀리에 구경하고 있는 거 아냐?”
미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가볼까?”
마리가 제안했다. 미카와 마사미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
마리가 아틀리에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니?”
처음 마중 나왔을 때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미소를 띤 채 사치코가 얼굴을 내밀었다.
“카오리 애들 여기 없어요?”
마리를 제치고 마사미가 물었다.
“있단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치코가 대답했다.
“너무하네, 자기들끼리만 구경하고! 말이라도 해주지.”
마사미가 투덜대자 사치코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다. 너희도 들어올래? 이제 곧 준비가 다 될 거란다.”
“준비요?”
미카는 사치코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응. 자, 들어오렴.”
사치코가 손짓했다. 마사미와 미카는 망설였지만, 마리가 뒤에서 사치코와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떠밀었다.
“그럼… 실례할게요.”
얼떨결에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선 마사미가 몸을 움찔 떨었다.
“왜 그래?”
미카도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꽤 넓은 아틀리에 안, 어스름한 조명 아래 수많은 마네킹이 각기 다른 의상을 입고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마네킹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교했다. 피부가 딱딱하고 관절에 구체 조인트가 박혀 있다는 점만 빼면 살아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저기….”
미카가 입을 떼려던 찰나, 사치코는 안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얼떨결에 안으로 발을 들인 마사미와 미카는 눈부신 광채에 눈을 가렸다.
지이이잉… 덜컥… 보글보글보글….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소리였다. 마치 공장에 온 듯한 기계음. 이윽고 눈이 빛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방 중앙의 작업대 위에서 기계들이 무언가를 조립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마사미와 미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게… 뭐야….”
작업대 위에 놓인, 아니 놓인 형태로 배치된 신체.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모든 관절 부위가 절단되어 있었다. 그 절단된 관절마다 금속 광택이 나는 구체가 박혀 있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계 팔들이 그것을 다시 원래 형태로 조립하고 있었다. 살짝 눈과 입을 벌린 채 놓인 머리 부분을 본 순간, 그녀들은 그것이 유코의 얼굴임을 알아차렸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겨우 목소리를 낸 미카.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마사미가 미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천천히 한곳을 가리켰다.
“저건… 카오리랑 리츠코?”
보글거리는 소리의 근원지가 거기 있었다. 벽에 박힌, 사람 한 명이 딱 들어갈 만한 크기의 원통형 투명 용기. 카오리와 리츠코는 전신이 금속 브래킷으로 고정된 채, 은은한 초록빛을 내는 형광색 액체에 잠겨 있었다. 그녀들의 머리에는 금속 패드가 채워져 있었고, 작업대 위의 유코처럼 멍하니 눈과 입을 벌린 허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빈 용기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미카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은 도저히 믿기 힘든 것이었지만, 눈앞의 상황은 그 상상이 정답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리츠코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마사미가 사치코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사치코는 대답 대신 몸에서 기계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띠링…. 전자음 같은 소리.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미카와 마사미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리보너 스탠바이.”
사치코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완벽한 기계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비명을 질렀다.
사치코의 눈동자가 오렌지색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미안해…. 하지만 무서워할 거 없어. 미카랑 마사미도 금방 리츠코처럼 만들어줄 테니까.”
“마리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사미와 미카는 아연실색했다.
“영원히 지금 모습 그대로 있게 해줄게.”
갑자기 마리의 말이 끊기더니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치코와 똑같은 기계음이 마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스템 기동… 리셋… 5, 4, 3.”
두 사람은 뒷걸음질 쳤다.
“미카야, 도망쳐!”
마사미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섰다. 미카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2, 1.”
마리의 눈이 사치코처럼 오렌지색으로 빛났다.
“꺄아악!”
비명을 지른 건 마사미였다. 도망치려던 찰나, 마사미의 팔이 마리의 손에 붙잡혔다. 그 힘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했다.
“마사미!”
“살려줘!”
마사미가 울부짖으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팔을 붙잡은 마리에 이어 사치코가 마사미를 뒤에서 안아 올리더니 빈 용기 쪽으로 끌고 갔다.
미카는 마사미를 도우려 했지만, 마리가 마사미를 넘겨주고는 미카 앞을 가로막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마리. 그 옆에서는 토막 났던 유코가 착착 사람의 형상으로 조립되고 있었다.
용기 안의 기계 팔이 마사미의 몸을 낚아채 리츠코 일행처럼 고정했다. 마사미는 반광란 상태로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사치코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 움직임을 제압하더니 순식간에 마사미를 용기 안에 가두어버렸다. 구속된 마사미의 머리 양옆으로 금속 패드가 무자비하게 다가와 머리를 꽉 눌렀다. 그러자 곧 마사미의 상태가 변했다. 발버둥 치던 몸이 신음과 함께 몇 번이나 경련하더니, 이윽고 축 늘어졌다.
‘마사미, 미안해….’
미카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전력으로 방을 뛰쳐나가 문을 닫았다. 다행히 마리는 아직 문 저편에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스템 기동.” “시스템 기동… 리셋.” “5, 4, 3.”
아틀리에에 서 있던 마네킹들이 마리와 똑같은 기계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씩 눈동자를 오렌지색으로 빛내며 미카를 향해 다가왔다.
“꺄아아악!”
미카는 비명을 지르며 출구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출입문은 열려 있었다. 아틀리에를 탈출해 별채에서 본채 현관으로 내달리는 미카. 뒤에서는 마네킹들이 느릿느릿 쫓아오고 있었다.
“안 돼… 제발….”
중얼거리며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손잡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마네킹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디든… 창문이라도!’
필사적으로 창문을 더듬었다. 하지만 모든 창문이 마치 벽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급한 마음에 의자를 집어 던졌지만, 유리창에는 금조차 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나갈 수 있는 곳은 별채뿐이지만, 거기엔 마네킹 군단이 버티고 있다. 아니, 이미 그녀를 향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녀의 짐작이 맞다면, 저 마네킹들도 한때는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에게 잡힌다는 건, 자신 또한 유코나 리츠코처럼 저들의 동료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밖으로 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1층 안쪽… 창고 앞이었다. 무기질적인 발소리가 천천히 그녀를 압박해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창고 문을 열었다.
‘열렸다!!’
그녀는 안으로 뛰어들어 급히 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이불 더미 속에 몸을 파묻고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멈추고, 창고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미카는 의도한 대로 이불 속에 몸을 잘 숨긴 듯했다.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 오렌지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창고 안을 훑었다. 다행히 문은 열었어도 물건을 일일이 들춰볼 지능은 없는 모양이었다.
피를 말리는 시간이 흘렀다. 이불 틈새로 미카가 살며시 밖을 살폈다. 간신히 보이는 마네킹의 다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거기 서서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키고 있는 건가….’
미카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기는 막다른 길이다. 저 마네킹을 처리하지 않는 한 탈출은 불가능했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다른 마네킹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탈출하려면 이놈을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미카는 호흡을 가다듬고 한꺼번에 이불을 마네킹 쪽으로 걷어차며 자신도 함께 몸을 날렸다. 이불째 들이받힌 마네킹이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미카는 이불 위로 마네킹을 짓밟으며 일어섰다. 하지만….
미카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복도 끝 출구에 마네킹들이 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마리가 눈에서 오렌지색 빛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마리야….”
그 목소리가 스위치라도 된 듯, 마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네킹들을 거느리고 천천히 미카에게 다가왔다.
“싫어… 오지 마….”
뒷걸음질 치던 미카의 어깨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겁에 질려 뒤를 돌아본 미카의 눈앞에, 방금 들이받았던 마네킹의 무기질적인 얼굴이 있었다. 마네킹의 팔이 미카의 몸을 단단히 붙잡으려 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아 고개를 세차게 내젓는 미카의 뺨에, 딱딱하진 않지만 기분 나쁘게 차가운 손이 닿았다. 미카가 눈을 크게 떴다. 뺨을 만지고 있는 건 마리의 왼손이었다. 그리고….
마리의 검지 손가락이 미카의 목덜미에 닿았다. 다음 순간,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고압 전류가 미카의 의식을 암흑 속으로 밀어 넣었다.
…
그것은… 신비로운 감각이었다.
그녀는 온통 초록빛에 휩싸여 있었다. 동시에 그것이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공포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쁨이나 쾌감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그녀에게는 초록색 빛이 세상의 전부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녀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영상의 파편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임을 인지했다.
친구들과 함께 마리의 이모네 집에 놀러 왔다.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이모 사치코의 아틀리에에서 기계 인형화 처치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 또한 마리에게 붙잡혀 처치를 받는 중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기억을 되살렸다. 그렇다고 해서 공포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는 양옆에서 뇌 개조 패드에 눌려 있었다. 패드에서 뻗어 나온 개조 침이 측두부를 뚫고 들어가, 뇌 속에 세균 크기의 특수 칩을 주입하며 그녀의 뇌세포를 기계로 변환시키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 인식 대기 나는 누구 리셋 미카 인식 칩 주입 중 리스타트….)
초록색 액체로 가득 찬 캡슐 안에서, 표정이 사라진 채 가끔 전류 반응으로 움찔거리는 것 외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의 의식은 이미 그녀의 것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은 소멸했다. 칩과 융합되어 반생체 기계화된 뇌세포들의 결합으로 기계 세포 덩어리가 된 뇌 중추가, 원래 있던 기억을 데이터로 치환하며 미카의 의식을 기계 인형의 의식으로 변환하고 있었다.
“시스템 기동… 리셋… 5, 4, 3.”
이미 조립이 끝난 유코와 카오리는 시스템 평가 프로그램을 실행 중이었다. 딱딱해진 사지에 구체 관절형 모터가 심어져 다른 ‘마네킹’들과 같은 모습이 된 그녀들은,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일정한 동작을 반복하며 리셋을 거듭했다. ‘본부’에 의해 B체로 분류된 그녀들은 며칠 동안 이 과정을 수천 번 반복한 뒤, 이 저택에 ‘사치코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채 보관될 것이다.
한편 뇌 개조와 신체 특수 합금화라는 1차 처치를 받는 미카와 마사미는 캡슐 안에 있었고, 1차 처치를 마친 리츠코는 같은 방 안에서 조립되는 중이었다. 특수 액체에 의해 탄성이 뛰어난 특수 합금으로 변질된 사지는 관절마다 절단되어 구체 관절형 모터가 조립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기계에 의해 자동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기계를 제어하는 것 또한 인간이 아닌,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 즉 사치코나 마리 같은 기계 인형들이었다. 사치코나 마리처럼 A체로 분류된 그녀들은 B체보다 인간에 가까운 감촉을 가진 특수 금속으로 신체가 변환되고 구동부가 설치된 뒤, 특수 섬유 피부를 덧씌워 인간과 똑 닮은 기계 인형으로 다시 태어나 ‘본부’의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이윽고 새로운 다섯 기의 기계 인형이 완성되고 평가가 끝나자, ‘본부’로 그 사실을 알리는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야, 시험 끝나면 스키 타러 안 갈래? 우리 이모가 A 스키장 쪽에서 로지 운영하시거든. 알바 겸 해서 가보자, 어때?”
“갈래, 갈래! 무조건 갈래!”
유키코는 미카의 제안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봄방학 땐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이런 친구를 둔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일정은 말이야….”
미카가 계획을 설명했다. 유키코는 ‘본부’가 정한 기준을 완벽히 통과했다. ‘본부’는 그녀를 포획 대상으로 지정하고 ‘미카’에게 관련 데이터를 입력했다. 전국에 흩어진 ‘하우스’ 중 이번에는 A 스키장 근처 하우스로 유키코를 유인한다. 일주일 뒤면 유키코도 기계 인형으로 다시 태어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미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기계 인형으로 개조된 지 수개월이 지난 미카에게 이번 소체 확보 작업은 벌써 두 번째였다. 이번에 유키코를 포함해 몇 명을 더 포획한 뒤에는 미카 자신의 유지 보수 작업도 예정되어 있었다.
“또 누구 부를까?”
미카는 프로그램에 따라 유키코와 대화를 나눴다. 이미 대상자는 정해져 있었고, 프로그램은 유키코가 그 후보자들을 유인하도록 유도하는 메시지 패턴 몇 가지를 순식간에 생성해냈다. 그리고 이 모든 대화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본부’에 전송되고 있었다.
“음, 쇼코는 어때?”
쇼코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미카의 프로그램이 수명의 ‘쇼코’를 검색해 대조를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미카의 기계화된 뇌 속에서 ‘쇼코’의 전신 모습과 기타 데이터가 추출되어 대상자 데이터와 대조되었다. B소체 데이터 중에 일치하는 항목이 확인되자 ‘본부’와 데이터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 모든 작업은 찰나의 순간에 끝났고, 미카의 기계 뇌는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오케이. 내가 전화해 볼게.”
미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체 확보 프로그램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 옆에서 유키코는 즐거운 표정으로 여행 준비 쇼핑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끝>
※ 이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며, 등장인물 및 기타 모든 설정은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