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된 소녀가 4년 동안 지구를 지켜내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우주에서 날아오는 기계 병기들을 기계화 소녀가 격퇴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이지만, 그건 애교로 봐주시길.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아래,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소녀는 별똥별을 기다렸다.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아빠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베란다 공기는 차갑고, 여동생은 이미 침대에 들어갔으며 방 안의 불은 꺼져 있다. 부모님은 소녀가 잠든 줄로만 알고 계시니, 깨어 있는 걸 들키면 혼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별똥별을 찾을 때까지 잠들고 싶지 않았다. 절실한 소원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정말로 이루어지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밤하늘을 계속 올려다보고 있자니, 시야 끝에서 빛이 움직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녀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별똥별이라고 믿었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강하게, 아주 강하게 염원했다. 십여 초 남짓한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눈을 뜨자, 눈앞에 작은 빛이 둥둥 떠 있었다.
“피노를 부른 게 너니, 꼬마 아가씨?”
말을 걸어오는 작은 빛을 보며 소녀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떼지 못했다. 설마, 정말로 소원이 닿은 걸까.
“아하하, 겁먹었네. 귀여워라, 귀여워.”
입도 뻥긋 못 하는 소녀를 보며 즐거워하던 작은 빛이 다시 자기소개를 했다.
“난 피노야. 네 소원을 들어주러 왔어.”
“소원?”
소녀가 되물었다. 자신이 한 일이라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응, 넌 별똥별에 소원을 빌었지. 그리고 그건 실현될 거야.”
소녀는 기억해 냈다. 방금 전, 세계가 평화로워지기를 빌었다는 사실을.
“넌 별님이야?”
“아니, 피노는 피노야. 그리고 평화를 지키는 건, 바로 너고.”
“내가?”
피노라고 자칭한 작은 빛은 대답 대신 소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소녀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수호병희(守護兵姫), 별을 지키는 정의의 사자로 선택된 거야.”
◆◆◆
충동적인 소원은 소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녀는 지금, 일상에서 고도 3,000km(3,000킬로미터) 떨어진 진공 속에 있다.
“사나기, 지구에 너무 가까워졌어. 이쯤 되면 유인해서 싸우자.”
“안 돼! 지상에 피해가 가잖아. 여기서 막을 거야!”
“손상률이 30%를 넘었다고!”
사나기의 전신은 장비부터 피부까지 딱딱한 금속 같은 질감을 띠고 있었고, 주변에는 빛을 거부하는 듯한 황금빛 막이 쳐져 있었다. 막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원래 있던 게 아니라 어떤 충격 때문에 생긴 것처럼 보였다. 황금빛 막 안쪽은 거울처럼, 그녀가 잃어버린 왼쪽 다리의 단면을 비추고 있었다.
“저쪽은 아직 태양풍 속에 있어. 그림자가 된 여기라면 리플렉터 레일건으로 정밀 사격이 가능해.”
사나기의 양옆에서 튜브 같은 것이 뻗어 나와 포신을 형성했다. 조준점 끝에는 사나기처럼 황금빛 막을 두른 작은 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빗나가면 어쩌려고? 쏘고 나면 한동안 실드는 못 써.”
“괜찮아. 저쪽은 경계하느라 실드를 계속 켜두고 있어. 눈에 보이는 상대라면 놓치지 않아.”
“그랬으면 좋겠는데.”
조준을 마치자, 물리 법칙에 이끌린 탄두가 빛나는 플라스마를 동반하며 발사되었다. 소리 없는 우주 공간의 정적 속에서, 잠시 후 멀리서 거대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각종 레이더에 반응은 없었다.
“맞았어…… 어떻게든 됐네.”
사나기와 피노는 복귀하기 전, 만약을 위해 폭발이 일어난 장소를 조사하기로 했다.
“죽은 척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알고 있어, 피노. 상처가 무한정 낫는 건 아니잖아, 그치?”
심야의 일본, 사나기는 주변 풍경과 동화된 채 자신의 방 베란다에 내려앉았다. 위장을 푼 몸에는 전투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잘려 나간 왼쪽 다리에서는 골격과 튜브 같은 것이 보였다. 전신의 장비는 너덜너덜한 가루가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졌고, 피 같은 붉은 액체도 흐르고는 있었지만 흘러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증발하듯 사라졌다.
“아파라…… 젠장, 그 기계병희(機械兵姫) 녀석 꽤 많이 맞혔네.”
“그러게. 또 신형인가 봐. 사나기의 수호병희 졸업은 기간 꽉 채울 때까지 국물도 없겠어.”
“수호병희는 4년밖에 못 한다고 했지?”
“응, 피노랑 너무 오래 있으면 떨어질 수 없게 되거든.”
“4년 지나면 6학년이네. 저기 피노, 수호병희 끝나면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거 맞지?”
사나기는 사라진 왼쪽 다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응, 피노가 없어지면 더 이상 변신할 수 없어.”
“그게 아니라, 속 내용물 말이야.”
그제야 이해했는지, 피노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심해. 기계 몸은 나노 머티리얼이 일시적으로 재구성한 것뿐이니까, 원래대로 되돌리는 건 식은 죽 먹기야.”
“그렇구나, 다행이다.”
“하지만 죽어버리면 끝이니까! 무리하면 안 돼!”
“알고 있다니까.”
사나기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는 듯 대충 대꾸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사나기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소녀가 먼저 잠들어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녀왔어, 마유.”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사나기는 어린 여동생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자 상처는 순식간에 수복되었고, 잃었던 왼쪽 다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항상 고마워.”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남는 생체 에너지를 비축해 두고 있었다.
“피노, 인간으로 돌려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나기의 몸은 원래의 질감을 되찾았고, 알몸이나 다름없던 모습은 파자마 차림으로 바뀌었다.
일상에서는 소녀로 지내고, 기계병희가 습격해 올 때는 수호병희로서 조용히 지구를 지킨다. 그것이 사나기의 삶의 방식이었다.
“아빠, 같이 목욕하자!”
“마유도, 마유도!”
드물게 아빠가 일찍 퇴근한 날, 사나기와 여동생 마유는 아빠를 포위하고 떼를 썼다. 언니라는 체면 때문에 아빠 무릎 위는 동생에게 양보했지만, 조금이라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사나기는 아빠 목에 팔을 두르고 등 뒤에서 매달렸다.
“하하하, 귀여운 딸내미들이 부탁하니 거절하기 힘들구먼. 하지만 오늘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말이야, 피곤하네. 이제 초등학생이니까 둘이서도 들어갈 수 있잖아.”
“에이~.”
“치~.”
부루퉁해진 둘을 부엌에서 보고 있던 엄마가 한마디 했다.
“아빠 피곤하시니까 조르지 마!”
결국 둘이서 들어가게 된 자매는 잔뜩 심술이 났다. 오래 씻을 기분도 아니어서 둘 다 대충대충 몸을 닦았다.
“가끔은 좀 어때서, 엄마 구두쇠.”
“그러게~.”
목욕을 마친 사나기와 마유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빠에게 달려갔다. 깨끗이 씻은 만큼 아빠를 향한 돌격에 거침이 없었다. 그걸 본 엄마의 날카로운 호통이 날아왔다.
“사나기, 마유!”
“허허, 괜찮아. 둘 다 조용히 텔레비전만 본다면야.”
아빠가 중재하며 리모컨으로 천천히 채널을 돌렸다. 그중 사이보그를 특집으로 다루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나기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저기, 아빠.”
“응?”
“아빠는 사나기들이 기계가 되어도 좋아?”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마침 사이보그에 대해 해설하고 있었다. 의료 목적부터 군사 목적, 나아가 뇌세포의 나노 머신화를 통한 불로장생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빠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나기의 얼굴을 콕 찔렀다.
“사나기들을 싫어하게 되진 않겠지만, 기계가 된다는 건 생각하기도 싫구나. 기계가 되어버리면 진짜 사나기랑 가짜를 구별할 수 없게 되잖아? 이렇게 귀여운데, 나중엔 미인이 될 거고. 아빠한텐 지금 네 모습 하나면 충분해.”
“으아아아아아!”
기계병희 네 대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사나기는 그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있었다. 적의 평가가 높은 모양인지, 놈들은 연계 플레이를 통한 파상 공격이라는, 마치 짠 듯한 전술을 펼쳐왔다.
하지만 사나기는 자신의 대미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동 전투를 벌이며 플라스마 암즈로 놈들을 하나씩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돌격을 통한 개별 격파는 확실히 유효했고 적의 허를 찌를 수 있었지만, 실드는 거의 소멸했고 사나기의 몸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싸우는 방식이 너무 거칠어! 자기 재생이 못 따라가잖아. 마나 차저도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고…… 한 끗 차이로 죽을 뻔했다고!”
“시끄러워, 시끄러워! 사나기가 이겼으니까 된 거야!”
착란 상태인 사나기를 피노가 달랬다.
“아빠가 한 말이 신경 쓰여?”
“신경 안 써! 난 인간이야! 그러니까 빨리 원래대로 돌려놔!”
“바보 같은 소리 마, 여긴 우주라고!”
너무 날뛰는 바람에 사나기는 지쳐 잠들고 말았다.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피노가 사나기의 몸을 움직였다. 수호병희는 본체의 의식이 얕은 잠 등으로 흐릿해진 상태, 즉 슬립 모드일 때 내부 AI가 숙주의 몸을 조작할 수 있다.
자유 낙하하며 피노는 불안정한 사나기의 정신 상태를 우려했다.
“손을 써야겠어.”
◆◆◆
“언니, 아빠랑 엄마가 늦네.”
마유의 물음에 사나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라져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지만, 자신은 몸을 기계로 바꿔버렸다. 아빠가 싫어하면 어쩌지, 가짜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아, 엄마.”
귀가한 엄마의 표정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백 년의 시간을 찰나에 목격하고 멍해진 인간의 표정이라고 하면 전달이 될까.
“둘 다, 진정하고 들어.”
들으라고 말하면서도 그 목소리는 어딘가 남의 일처럼 들렸다.
“아빠가, 트럭에 치였어.”
“싫어! 아빠가 죽었는데 싸우는 거 싫단 말이야!”
기계병희의 존재를 감지한 피노가 사나기를 불렀지만, 그녀는 수호병희로 변신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빠도 없는데 지켜봤자 의미 없어. 다 죽어버려!”
“엄마랑 마유가 있잖아? 그리고 네 아빠는 이렇게 떼쓰는 사나기를 싫어하게 될 게 뻔해.”
“그럴 리 없어! 아빠는 기계가 싫다고 했단 말이야!”
피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사나기에게 물었다.
“그 기억은 틀렸어. 잘 떠올려 봐. 네 아빠는 기계가 된 사나기를 좋아했을 거야.”
“아니야, 아빠는 기계가 된 사나기를 싫어해.”
치직.
“앗.”
“아빠는 수호병희로 변신한 사나기를 정말 좋아하지?”
“아니야, 아빠는 인간인……”
바지직!
“아아아악!”
몸을 크게 뒤로 젖히며 사나기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야, 아니라고오오오!”
치직, 파직, 바지직하며 전기가 터지는 작은 소리가 소녀의 머릿속과 몸속에서 터져 나왔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파열음은 수백 번에 달했다.
“아니…… 어, 어라? 나, 울고 있네.”
“아빠가 돌아가셔서 그런 거 아니야?”
눈물을 닦으며 사나기는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싸우지 않으면 천국에 계신 아빠가 비웃을 거야.”
사나기는 지금까지 중 가장 심하게 부상당해 있었다. 양팔과 양다리는 떨어져 나갔고, 복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눈은 한쪽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이거 살아있는 거야?”
“이게 한계야. 일단 마유가 있는 곳까지 돌아가자.”
베란다로 내려가자 파자마 차림의 마유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마유는 당황했지만 피노는 침착했다. 끔찍한 모습이 된 언니를 보고도 마유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괜찮아, 지금은 최면술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해서 마유는 괜찮은 거야?”
“너 말이야,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사나기는 곧바로 입맞춤을 당하고 침대로 옮겨졌다.
“그렇구나, 지금의 난 가벼우니까……”
“그래. 하지만 덕분에 대폭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겠어.”
“어?”
피노는 그렇게 말하더니 마유의 몸속으로 들어가 사나기 위를 덮쳤다.
“이걸로 됐어.”
“무슨 짓을…… 아아악!”
간신히 보이는 한쪽 눈에 비친 것은 피노와 함께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들려는 여동생의 모습이었다. 몸을 겹치고 스스로를 액체로 바꿔 사나기에게 녹아들려는 동생을 보며 사나기는 절규했다.
“그만둬! 그렇게 하면 마유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하지만 아무도 방에 들어올 기미는 없었다. 그녀의 스피커가 고장 나 소리를 내지 못했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어차피 마나 차저로서 한계였어. 머티리얼로 쓰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만해!”
“안 멈춰. 이제 마나 차저는 필요 없거든. 두 명분의 소체를 내포할 수 있을 정도로 보디 성능이 올라갔으니까.”
체내로 흘러 들어오는 마유는 사나기에게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고, 통증을 완화하며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 동시에 소녀의 몸에 재생 스위치를 켰다.
“안, 안 돼!”
사나기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감각…… 아무것도 없는 곳에 몸이 출현하고, 그곳에 쌓기 나무처럼 차례차례 새로운 것이 덧대어지며, 연결되는 순간 신경이 통하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 따뜻하고 기분 좋으면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흉포하고 자극적인…… 억지로 말로 표현하자면 그런 감각이 덮쳐왔다.
“아아아악!”
사나기는 다시 비명을 질렀지만 역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 만들어…… 만들어져! 만들어지고 있어!?”
사지 단면이 가렵기 시작하더니, 느리지만 눈에 보이는 속도로 몸의 재생이 시작되었다.
“이, 인간인데, 조립되고, 짜 맞춰지고, 이, 있어어.”
외치는 말은 의도하지 않은 무의미한 것이었지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칠 때마다 마유 안에서 미리 만들어진 몸과 교체하는 방식으로 재생해 왔지만, 마유의 기능을 얻은 지금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새로 만들어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재생법은 수리라기보다 개조, 개량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았다.
지금까지의 전투 경험과 마유라는 에너지원을 얻어 다시 만들어져 가는 강인한 신체를 보며 피노는 가슴이 뛰었다.
“기뻐해, 사나기. 피노 일행은 점점 더 강해질 거야.”
아침이 되었지만, 재생을 마친 사나기는 아직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동생이 사라진 것, 자신의 몸이 만들어지고 자라난다는 사실을 피노에 의해 강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마, 마유가 죽다니…… 몰랐……”
츄이이이잉.
“아, 알고,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엄마가 방을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다. 남편을 잃은 뒤로 이어진 폭음이 피노의 편이 되어주었다.
결국 마유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결론 났다. 여동생의 행방에 대해 사나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아빠와 여동생을 연달아 잃은 사나기 가족은 외갓집에 몸을 의탁했고, 상처 입은 채 3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사나기의 전투 일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격렬해졌다.
“타깃 소멸. 피노, 남은 건 몇 대?”
“센서에 적영 셋. 한 마리 정도 더 숨어있을 것 같아.”
“그럼 분명 이거겠네.”
사나기는 손을 뻗어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인공위성에 전자기 충격포를 투사했다. 안에 실려 있던 배터리가 폭발했고, 폭염 속에서 스텔스를 위해 실드를 꺼두었던 기계병희가 비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나기는 레이저 클로로 심장부를 움켜쥐고 기계병희 해킹에 들어갔다.
“그래, 네놈이 내 위치를. 목숨 건 정찰이라니, 눈물 나네. 고작 기계 주제에!”
사나기의 백팩에서 대량의 아광속 미사일이 발사되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세 개의 섬광이 근처 우주역에서 반짝였다.
“사나기, 전자기 충격포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잖아. 어라라, 지구권 통신은 원인 불명의 전파 장애로 대혼란 상태네.”
어이없어하는 피노에게 사나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리 전투는 숨겨야 하잖아. 피노 일이 줄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너무 대놓고 저지르면 뒷수습하기 힘들단 말이야.”
사나기는 대기권을 통과해 조부모님 댁에 마련된 자신의 방으로 몰래 돌아왔다. 그 모습은 피노와 처음 만났을 때의 사나기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인간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변화가 나타났다. 3년 이상의 세월을 확실히 느끼게 하는 신체 성장, 전혀 없던 가슴도 중학교 입학을 앞둔 여자아이치고는 나름 주장을 하고 있었다. 파자마도 그 몸에 맞춘 사이즈로 변해 있었다.
“역시 인간 몸이 편해.”
침대에 누워 베개를 껴안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수호병희 몸은 싫어?”
피노의 물음에 사나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릴 때가 생각나거든. 기계병희가 밉고 또 미워져서 견딜 수가 없어. 기계 몸은 좋아. 하지만 추억은 싫어.”
“괜찮아, 이제 곧 수호병희가 된 지 4년이야. 졸업하면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다시 떠올릴 걱정도 없잖아?”
졸업이라는 말을 듣고 사나기는 지구 생각만 하던 자신을 조금 되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도 졸업이네. 왠지 나, 이것저것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살을 에는 북풍이 부는 겨울, 사나기는 조부모님 댁 베란다 겸 빨래 건조장인 2층에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아쉽게도 흐렸고, 엄마는 조부모님을 모시고 장을 보러 나갔다. 휴일의 사나기는 날씨가 나쁘지 않은 한 대개 하늘을 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기계병희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습관이었지만, 이제는 ‘왜 나는 놀지 않을까’라든가 ‘왜 남들처럼 친구가 없을까’ 같은, 나이에 걸맞게 머리가 돌아가는 생각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만 할 뿐, 사나기는 그 이상의 행동을 할 발상을 하지 못했다.
“저기 사나기, 넌 스스로가 한가하다는 생각 안 하니?”
기계병희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말을 걸지 않던 피노의 목소리가 들리자, 멍하니 있던 사나기는 자아를 되찾았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마지막이니까, 기념으로 평범한 대화라도 해볼까 싶어서.”
피노의 말이 끝나자 사나기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호병희로 변신할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마지막이라니, 어?”
“잊었어? 수호병희는 4년이 한계야. 그리고 오늘이 4년째 되는 날이지. 오늘 밤, 피노랑 너는 작별이야.”
사나기의 몸에서 작은 빛의 점이 분리되었다. 그것은 공중에 떠서 그녀 앞에서 멈췄다.
“이렇게 천천히 이야기하는 건 4년 만이네, 사나기.”
“피노……”
잊고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그런 감각이 사나기에게 느껴졌다.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것들. 당연하지만 어딘가 소홀히 했던 감정들. 눈앞의 피노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노를 만나기 전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왜 미리 말 안 해줬어.”
“그렇게 거창한 일도 아닌걸. 그보다 사나기, 넌 정말 잘해줬어. 이제부터는 친구도 사귀고, 많이 놀고, 널 위해서 사는 거야.”
피노답지 않은 모습에 사나기는 나이에 걸맞은 미소를 지었다. 꾸밈없는, 온 힘을 다한 환한 미소.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뭐야, 그건 당연한 거잖아.”
“그럼 피노는 안심이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추위도 잊은 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그대로 해가 지고 헤어질 거라 생각한 순간, 사나기의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동시에 되찾았다고 생각한 감정도 얼어붙었다.
“피노, 이거.”
“응, 아무래도 순순히 졸업시켜 주진 않을 모양이네. 대군이야. 수는 대략 열…… 아니, 스물!”
“빨리 변신하자. 놈들을 너무 화나게 했어. 지구가 부서지겠어.”
사나기의 몸은 무지갯빛 입자에 휩싸였고, 인간의 몸에서 튕겨 나가듯 두 단계 정도 작은 수호병희 모습의 사나기가 나타났다. 남은 입자들은 그대로 사나기의 몸 주변에서 굳어지며 다양한 장비와 무기로 변했다. 사나기는 익숙한 솜씨로 장비가 고정되기도 전에 이륙 자세를 취했다.
“어떡할래, 사나기? 적은 하이퍼 스페이스를 막 빠져나왔어. 태양계 외곽에 있는 것 같아.”
“반차원항 전이로 놈들 배후를 치자. 마지막인데 무리 좀 해도 되겠지.”
“정말 막무가내라니까. 그거 최근에 생각만 해두고 한 번도 안 써본 항법인데.”
“지구가 없어지는 것보단 나아. 우주로 나간다!”
사나기는 베란다에서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날아오르는 순간 사나기는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 속도라면 인간의 눈에는 착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설령 엄마가 봤더라도 자신이라고 눈치채지는 못할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외우주로 시선을 돌렸다.
외우주에서 날아온 기계병희들도 장애물이 많은 성계 내부에서 광속을 넘어 기습해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무런 전조 없이 나타난 사나기의 양전자포에 휩쓸려 세 대가 우주의 먼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전과는 사나기의 예측을 밑돌았다.
“세 대밖에 못 잡았어? 피노, 남은 놈들 세어줘.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친다.”
실드 전개를 경계하며 사나기는 손에 든 양전자포를 분해하고 관통력이 높은 샷건 자벨린을 장비했다. 수백 자루씩 묶인 창을 광범위하게 쏟아붓는 이 무기는 지금까지 수많은 기계병희를 실드째 꿰뚫어 왔다.
“받아라!”
사나기의 기합과 함께 빗발치는 날카로운 창의 폭풍에, 막 전개된 실드들이 차례차례 벗겨져 나갔다. 하지만 창을 피한 몇몇 빛줄기가 사나기를 포위하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나기, 포위당하겠어.”
“알고 있어!”
기습으로 섬멸하는 것을 포기한 사나기는 샷건 자벨린을 폭발력이 있는 블래스트 자벨린으로 변환하고, 발사와 동시에 실드가 파괴된 기계병희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폭염을 연막 삼아 쓰면 일시적이나마 상대를 분단할 수 있다. 수천 번의 전투를 겪으며 몸을 강화한 사나기는 일대일이라면 순식간에 승부를 낼 자신이 있었다. 적은 추정 스무 대. 팀킬은 없을 거라 믿으며 사나기는 연막 속 전투를 택했다.
확인된 것만 실드 파괴에 성공한 게 일곱 대, 그중 발이 묶인 게 다섯 대. 그놈들은 블래스트 자벨린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남은 건 두 대.”
사나기는 고기동 백팩을 가동하며 포톤 블레이드를 뽑아 들었다.
“빈틈을 보일 때 끝낸다.”
폭발과 동시에 사나기는 미리 예측하고 있던 기계병희의 몸통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그 기세를 죽이지 않고 두 번째 휘두름으로 머리를 파괴했다.
“다음!”
폭염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지만, 사나기는 새로운 불씨를 만들기 위해 블래스트 자벨린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때, 발사구와 실드의 미세한 틈 사이로 날아든 레이저가 블래스트 자벨린을 꿰뚫었다. 사나기는 당황해서 배리어 밖으로 무기를 버렸지만, 폭풍에 휘말려 연막 밖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연막 밖에는 전투 태세를 갖춘 기계병희들이 각기 다른 무장을 한 채 포위하듯 기다리고 있었다.
“사나기, 적의 수는?”
“이젠 나도 셀 수 있어. 남은 건 열둘이야.”
쉴 틈 없이 적의 총탄과 빔 병기, 미사일과 전자기 충격이 사나기에게 집중되었다. 사나기는 즉시 후방으로 실드를 집중하고, 공격을 포기한 채 회피하며 태양계 방향으로 도망쳤다.
“잠깐 사나기, 도망만 쳐서는 못 이겨.”
“방금 그 레이저, 운 좋게 맞은 게 아니야. 저 중에 엄청난 놈이 섞여 있어. 아무것도 없는 곳은 위험해.”
하지만 퇴로를 차단하듯 빛 하나가 앞질러 오더니 사나기의 샷건 자벨린과 비슷한 무기로 공격해 왔다. 전방에 실드를 두지 않았던 사나기는 급히 전방위로 전환하려 했지만 늦었고, 수십 자루의 창이 온몸에 박혔다. 관통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몸 곳곳에서 나노 머티리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랑 대등하다고? 웃기지 마!”
상처 부위에서 나노 머티리얼을 분사해 바늘을 뽑아낸 사나기는 길을 막아선 기계병희를 향해 돌진했다.
“안 돼, 재생도 덜 됐는데!”
“시끄러워!”
그대로 덮칠 것 같았던 사나기였지만, 두 번째 탄환을 크게 피하며 기계병희를 지나쳐 다시 태양계로 가속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에만 전념하지 않고, 가속한 상태로 태양을 등진 채 가슴 해치를 열어 내부 구조를 노출했다. 의도를 알아챈 피노가 냉정한 말투로 사나기에게 중얼거렸다.
“대미지는 각오한 거지?”
“상관없어, 인간인 부분만 무사하다면!”
“그건 보장할게.”
사나기는 새어 나오고 있던 나노 머티리얼을 자신의 동력로와 직결시켜 에너지를 주입하고 단숨에 플라스마화했다. 나노 머티리얼이었던 플라스마는 에너지가 계속 증폭되면서도 주인의 지배를 받으며 사나기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갑자기 나타난 무색의 태양 무리에 기계병희들이 하나둘씩 타 죽어갔다.
기계병희들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체 병기는 물론 빔 병기조차 사나기의 필살기인 나노 플라스마 병기에 상쇄되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끄, 으으으으으!”
그것을 조종하는 사나기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동력로는 한계를 넘은 에너지를 계속 뿜어내며 거의 폭주 직전의 상태였다. 이를 억누르기 위해 사나기는 자신의 내부에 제어봉과 실드를 계속 생성해야 했고, 그 소재로 자신의 몸을 깎아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구전. 피노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기계병희 한 대가 플라스마를 튕겨내며 다가왔다. 상대는 강력한 전자기장으로 자신을 감싸 플라스마를 막아내고 있었다. 맞서 싸우려 해도 지금의 사나기는 양다리를 다 써버렸고 왼손도 절반이나 소모한 상태였다. 반격에 쓸 수 있는 건 오른손뿐이었다.
“이 녀석이 아까 그……!”
“동력로를 지켜, 사나기!”
어린 사나기의 오른팔로는 검을 쳐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기계병희는 손에 든 결정체 검을 사나기의 동력로에 찔러 넣었다. 동력로의 빛이 꺼지고 사나기에게 노출된 기계 장치들이 내뿜던 작은 빛들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승리를 확신한 기계병희는 플라스마가 소멸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검이 뽑히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해킹 성공.”
사나기는 씨익 웃으며 자신을 찌르고 있는 검을 움켜쥐었다.
“너한텐 격의 차이를 가르쳐주고 나서 죽이기로 결심했거든.”
기계병희는 혼란에 빠졌다. 죽은 척한 게 아니었다. 분명히 동력로를 직격했는데.
“나한테는 말이야, 동력로가 두 개 있거든. 그리고……”
박혀 있는 검을 타고 지금까지 사나기의 나노 머티리얼에 공급되던 방대한 에너지가 기계병희에게 흘러 들어갔다.
“부서진 동력로의 에너지는 너희가 받아줘야겠어.”
폭발 직전까지 에너지가 주입된 기계병희는 사나기의 의지대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그들을 휘말리게 하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사나기는 적의 전멸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우주 공간에 몸을 던졌다.
“아아, 마지막까지 이겨서 다행이야…… 이제 끝이지? 피노.”
“응, 이제 끝이야.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뒷일을 피노에게 맡기고 사나기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눈을 뜨자 사나기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은 인간으로 돌아와 있었고 손발도 무사히 붙어 있었다.
“피노?”
사나기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성취감과 함께, 홀로 방에 남겨진 미묘한 외로움을 느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평범한 삶이라……”
평범하다는 말을 되새기며 사나기는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와 책상 등 개인 공간에 놀잇감 하나 없는, 개성이 보이지 않는 삭막한 방. 과연 이게 평범한 걸까, 사나기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인형 같은 건 어떤 게 있더라.”
인형 하나쯤은 있는 게 자연스럽겠지, 하고 말은 해보지만 구체적인 이미지도 실감도 나지 않았다. 그녀의 방에서 그나마 나이에 어울리는 것이라고는 할머니가 개어서 옷장 앞에 두신 옷가지와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책가방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그녀가 준비한 게 아니었다.
“아, 학교……”
오늘이 평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사나기는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모르면 동급생들을 보고 배우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평범하게, 평범한 생활을 해야 해.”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가자 엄마가 된장국 건더기를 썰고 있었다. 평소엔 할머니가 하시던 일인데 싶어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엄마가 요리하는 건 드문 일이네.”
“무슨 실례되는 소리야, 해주고 있는데. 네가 직접 할래?”
“할머니는?”
“할아버지랑 여행 가셨잖아!”
“아……”
그러고 보니 해외여행을 가신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고 사나기는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의 기억력에 어이없어하며 부엌에 선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침 식사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너도 할머니 너무 고생시키지 마. 나이 들면 추위가 뼈에 사무친다니까. 자, 다 됐으니까 얼른 먹어.”
사나기는 차려진 대로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음식을 입에 넣었다.
“맛있다.”
“뭐야, 너 오늘 기분 나쁘게 왜 이래?”
딸한테 기분 나쁘다니 말이 심하시네, 하고 사나기는 생각했지만 엄마 말도 일리가 있다고 고쳐 생각했다. 사나기는 스스로를 수호병희라고 자각하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맛있다거나 맛없다거나 하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도 생각하며 살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다 문득 떠올렸다.
“하지만 아빠랑 마유는 이제 밥이 맛있는지도 모르겠네.”
그녀가 불단을 바라보자 엄마는 걱정스러운 듯 사나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너 열이라도 있는 거니? 추석도 아닌데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 같은 소릴 하고……”
엄마는 시선을 피하더니 쏜살같이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큰 소리를 내고 싶지만 나오지 않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의아해하며 엄마를 따라 나간 사나기도 밖을 보자마자 기절할 뻔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커다란 손이 붙잡아 주었다.
“괜찮니, 사나기?”
“아빠!”
죽은 줄 알았던 아빠와 마유가 현관에 와 있었다. 사나기와 엄마의 심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바보! 왜 살아있는 거야!”
“엄마, 아파.”
엄마는 어린 마유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는.
“나 원 참, 사나기야.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구나. 아빠가 정신을 차려보니 마유랑 할아버지 집 앞에 있더라고…… 엄마는 저 모양이고, 어제 너랑 엄마는 할아버지 댁에서 자고 간 거니?”
아무래도 자신이 죽었다는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나기는 그걸 눈치채고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아빠에게 대답했다.
“응, 자고 갔어!”
“그나저나 너, 왠지 좀 커지지 않았니?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커진 것 같은데…… 아빠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그, 그게……”
사나기는 엄마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맞다 아빠, 사나기 방에 가자!”
“뭐야, 할아버지 댁에 네 방도 생겼니?”
“빨리, 빨리!”
엄마가 마유를 꼭 껴안고 있는 걸 확인하고 사나기는 아빠의 손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나기는 말이야, 사나기는 말이야.”
4년 동안의 어둠을 밝히듯 사나기는 아빠에게 재잘거렸다. 생각나는 건 뭐든 이야기하고, 손을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온 힘을 다해 어리광을 부렸다.
“오늘따라 말이 많네. 그리고 사나기, 이제 초등학생이니까 ‘나’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었나?”
“오늘은 괜찮아!”
방에 돌아와서도 사나기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피노와 융합해 수호병희가 된 것, 기계 몸이 된 것, 4년 동안 훌륭하게 싸워온 것 등을 아빠에게 들려주었다. 아빠는 즐겁게 이야기하는 딸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래서 사나기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거네.”
“응! 하지만 아빠가 기뻐한다면 다시 기계가 되어도 좋아!”
딸의 말에 아빠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피노가 없으면 사나기는 인간으로 못 돌아오잖아. 그래도 괜찮겠니?”
“아빠를 위해서라면!”
사나기는 방에 필요한 공구들을 끌어모아 개조 수술을 위한 수술대를 준비했다.
“에헤헤…… 어라? 이상하네. 왠지 좀 무서운가? 기쁜데도, 진짜 이상해.”
사나기가 겁먹은 모습을 보자 아빠는 딸을 다정하게 안아 올렸다.
“이러면 안 무섭지?”
아빠의 손이 따뜻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사나기 안에서 공포가 씻겨 내려갔다.
“저기, 이대로 수술하는 동안에도 계속 안아줘.”
“그래, 알았다.”
아빠는 딸에게 다정하게 키스하고는 수술대 위에 눕혔다.
“으아아, 아빠아!”
사나기는 전신에 주입되는 나노 머티리얼에 의해 신체 조직이 침식당하며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정지하기 시작했다. 가슴은 절개되었고 개조를 마칠 때까지 생명을 유지할 장치가 심장 위치에 매몰되었다. 그러는 동안 침식을 마친 부분부터 잘려 나가 기계로 가공되어 다시 몸속으로 채워졌다. 되돌려진 기계는 나노 머티리얼에 동화되어 마치 고동치듯 사나기에게 혈액 대신 전기 정보가 담긴 나노 머티리얼을 공급했다.
“떼어내고, 붙여지고…… 사나기, 장난감이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사나기는 블록을 끼워 맞추는 장난감을 연상한 모양이었다.
“넌 장난감이 아니야. 훨씬 고차원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거란다.”
침식은 내장까지 이어졌고 자극은 더욱 격렬해졌다. 내장은 뽑혀 나가 기계화되어 다시 조립되었다. 그럴 때마다 소녀의 뇌는 흔들렸다. 이게 반복되다간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빠, 도와줘……”
“기분 좋지, 사나기?”
“기분, 좋아?”
“그래, 사나기는 아직 어려서 모르는구나. 이 감각은 아주 기분 좋은 거란다.”
드디어 생명 유지 장치가 제 역할을 마치고 사나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으아아아! 이거 안 무서운 거야? 기분 좋은 거야!?”
“그래, 기분 좋은 거야. 자, 다음은 뇌를 개조할 차례야. 훨씬 더 기분 좋아질 거야.”
“될래, 훨씬 더 기분 좋아질래애!”
◆◆◆
“닥터, 보디 해석은 거의 끝났어. 오, 벌써 피노의 해석 결과가 올라왔네? 그럼 남은 건 이 아이의 전뇌뿐이네. 모니터링은 어떻게 돼가?”
닥터라고 불린 여성은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를 쓴 채 부하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구 카피본이랑 링크가 끊겼어. 하지만 문제없어. 아직 깊은 꿈속이거든. 죽은 아빠랑 재회해서 기뻐하고 있어. 마리카, 이대로 전뇌 해석 들어갈게. 보디 조립도 부탁해.”
마리카라고 불린 여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헤에, 이 정도로 갈기갈기 해부하고 있는데 아직 정신이 버티고 있네. 소체가 어린데도 대단한걸.”
“어리기 때문일지도 몰라. 피노가 성장을 멈춘 게 득이 됐을 수도 있고. 이 아이는 성적 쾌락을 줘도 완전히 자각하지 못해. 무지하기 때문에 탐닉할 수 있는 걸지도.”
마리카는 눈앞에서 머리가 열려 전뇌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소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흐음. 저기 닥터, 끝나면 얘 체감 데이터 추체험할 수 있게 복사 좀 해줘. 끝내주게 짜릿한 마약이 나올 것 같거든.”
“이 아이 전뇌가 해석을 견뎌낸다면 말이지. 악취미에 어울려 주는 건 질색이지만, 오늘은 피노 시스템이 크게 진화하는 역사적인 날 중 하나니까 조금은 봐줄게.”
“헤헤, 역시 말이 통한다니까, 닥터 님.”
마리카는 만족스러운 기색이었지만 닥터는 그리 내키지 않는 듯했다.
“태평해서 부럽네. 동작 체크 끝나면 피노 시스템 업데이트에 본성 연합 보고, 우리 몸에 피드백까지 해야 한다고. 전자 마약 가지고 놀 시간이 언제 날지 모르겠네.”
“에이, 시간이야 만들려고 하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지.”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마리카는 피아노를 치듯 콘솔을 조작해 나갔다.
“자, 꼬마 아가씨. 서로 기계병희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처지잖아. 여기서 죽으면 재미없다고? 근성 좀 보여봐.”
사나기의 작은 전뇌에 데이터 추출용 나노 머티리얼이 주입되었다. 발광하기 시작한 전뇌를 지켜보며 마리카는 닥터의 지시에 따라 사나기의 몸을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기계 생명체로의 진화를 연구하는 기지에 소년이 끌려왔다. 처치가 곤란해진 책임자는 소년의 몸을 기계화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수술대 위에 눕혀진 알몸의 소년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지구인, 연합형의 전형적인 지적 생명체이자 수컷. 예전부터 필요했던 사나기와 원래 유전자가 가까운 개체로서 우수한 샘플이라 생각된다…… 과연, 웬일로 서류 형식을 딱 맞춰왔다 했더니 이런 속셈이었군.”
가운 입은 여자는 샘플 수집이라는 핑계로 불필요한 수컷까지 잡아 오는 부하의 행동을 몇 번이나 주의시켰다. 이번에 부하는 충고를 따랐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불쾌했다. 오히려 규칙을 지키는 척하며 자기 요구를 밀어붙이는 기분이었다.
“카이리 그 자식, 진짜 지 꼴리는 대로 하는구먼. 하필이면 사나기의 아들을 데려오다니, 악취미도 정도가 있지.”
조수 여자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마리카,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건 이 애의 처치야. 마리카의 나노 머티리얼이 주입된 상태라 이대로 두면 죽어.”
박사의 말에 빡쳤는지, 조수 마리카가 목소리를 높였다.
“살리자고? 이 꼬맹이를? 원래라면 죽여야 할 상황이었잖아. 실제로 다른 인간들은 다 죽였고. 야, 얘를 살려둬 봤자 사나기만 괴로울 뿐이야. 그만두자고.”
박사는 지구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사나기라는 건 자신들 시작병희(試作兵姫) 부대의 새로운 동료다. 피노 시스템이라는 자동 기계화병 양산 시스템을 통해 개조를 받고, 4년간의 시험을 통과해 동료가 되었다.
그녀가 지구를 떠나 기지로 올 때, 지구에는 사나기가 인간으로 돌아갔다는 설정으로 유전자와 기억이 동일한 복제본이 만들어진다. 이건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시작병희로서 인간을 버리는 자에 대한 마지막 배려의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사나기는 자기가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탈주해 지구로 돌아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지구에 있던 복제본과 마주치고 말았다. 복제본은 성장해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었고, 사나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시작병희인 사나기의 모습을 본 인간은 전부 죽이는 게 규칙이다. 하지만 생식 가능성을 연구하는 카이리가 끼어들어 지구에 있던 사나기의 아들만 살려서 데려온 것이다. 방금 박사가 말한 대로, 샘플로서 적합하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서.
“카이리에겐 수컷 샘플을 채취할 권한이 있어. 우리에겐 샘플을 죽일 권한이 없고. 유감이지만 여기선 계급보다 임무가 우선이야.”
권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마리카는 벽을 주먹으로 쳤다. 금속제 벽이 크게 움푹 들어갔지만, 잠시 후 천천히 원래 형태로 돌아왔다.
“늘 하던 대로인가.”
“그래, 카이리의 특권이 만료될 때까지는 마음대로 하게 둘 수밖에 없어.”
박사는 정신을 잃은 소년 위로 수술용 기계를 내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냥 소생시켜서 양식장에 처넣을 거야?”
“아니, 연합식으로 간다. 수컷의 기능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업그레이드 가능하게 개조할 거야.”
“피노 시스템도 안 쓰고 이런 시설에서? 생식 기능을 남겨야 한다며, 어떻게 하려고?”
소년의 몸을 고정하고, 주입된 나노 머티리얼과 수술용 기계를 링크시킨다.
“우리 기술은 아직 생식 기능이 미발달한 개체에 사용하기엔 최적화되어 있지 않아. 그렇기에 사나기를 보유한 우리는 실험 명목의 개조가 권장되지. 사나기도 미발달 상태에서 개조가 가해진 희귀한 사례야. 그 데이터를 살리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지. 즉, 어떤 사양으로 개조하든 카이리의 권한으로는 참견할 수 없다는 소리야.”
발광하는 나노 머티리얼을 확인한 박사는 소년의 머리를 고정하고 새로운 나노 머티리얼을 주입했다. 그걸 본 마리카는 소년을 공중에 띄우고, 고정된 상태에서 어디든 절개할 수 있도록 수술대를 변형시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실패해서 눈을 못 떠도 우리 책임은 아니겠네. 과연, 머리 좀 썼는데 박사?”
“아니, 일부러 실패하진 않아. 뭐, 맡겨둬. 나도 카이리 녀석은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예이 예이, 뭔 생각인지는 몰라도 할 일이나 제대로 하면 되는 거지?”
마리카가 합류하자 기계들이 움직임에 속도를 냈다. 안쪽 창고와 직결된 레일에서 컨테이너 하나가 운반되어 왔고, 그 안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빛나는 형광색 액체가 담긴 실린더들이 여러 개 꺼내졌다.
“박사! 꼬맹이 깨우지 마라? 지금 깨어나면 뇌신경 다 타버릴 테니까.”
“걱정 마, 이 애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푹 자게 할 테니까.”
소년의 몸 여기저기가 절개되고, 혈액, 수액 등 주요 체액이 흐르는 모든 관에 튜브가 끼어들었다. 빨려 나가는 체액과 같은 양만큼 보충되는 것은 방금 그 형광색 액체였다.
“기분 좋냐, 꼬마야? 사나기 오리지널 나노 머티리얼이다. 진짜 엄마가 만든 거니까 아주 찰떡같이 잘 맞을 거야!”
이번에 사용하는 건 혈연관계, 게다가 나이가 비슷한 사나기를 한 번 변화시켰던 나노 머티리얼이다. 부담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고, 그럴 필요가 있었다.
나노 머티리얼은 주도권을 가진 사이보그가 다루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나노 머티리얼을 변질시켜 자신에게 유리하게 고쳐 쓸 수 있다. 하지만 나노 머티리얼의 주도권이 없는 자, 이번처럼 생몸에 제어 시스템도 없고 의식까지 잃은 인간을 개조할 경우, 나노 머티리얼은 격렬하게 자기주장을 한다. 자신이 가진 특징을 무차별적으로 육체에 반영하려 드는 것이다.
“역시 부모 자식이라 그런지 침식 속도가 장난 아니네. 박사, 그쪽은?”
“지금 말 걸지 마, 나노 머티리얼이 뇌까지 도달했단 말이야.”
나노 머티리얼이 개체의 특징이나 성별을 바꿔버리지 않도록 박사가 조작하고 있는 덕분에, 재구성 절차가 최소한으로 끝났다. 절차가 적을수록 소년의 부담은 줄어들고, 부담이 적을수록 수술 후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이 커진다. 육체를 분자 레벨에서 조작할 수 있는 박사들에게 죽음이란 곧 의식의 상실을 의미했다. 생전의 의식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녀들에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밀 작업 중이었나, 미안하게 됐네. 나 같은 말단한테는 무리인 작업이니까 열심히 좀 해보라고, 박사님.”
“연습해 봐도 좋아. 스펙상으로는 너도 가능하니까.”
마리카는 실린더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튜브를 제거해 나갔다.
“난 섬세한 작업은 안 맞아. 박사가 좌천되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소년의 겉모습은 변화가 없었지만, 그 몸은 단백질이 아닌 특수 하이폴리머 섬유로 대체되어 강력한 레이저를 쓰지 않으면 상처 하나 내기 힘들 정도로 강화되었다.
“내가 좌천될 때쯤이면 이 기지는 폐기되겠지.”
하지만 나노 머티리얼만으로는 거기까지가 한계였고, 내부 구조를 기계화하려면 전용 시스템을 내장하거나 수동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데이터 채취용 기지는 애초에 남성 개조를 상정한 시스템 따위 갖추고 있지 않아 수동으로 작업해야 했다.
“그럼 난 계속 집도 담당이나 하면 되겠네.”
마리카는 소년의 복부를 갈라 동력로 형태로 가공된 심장을 꺼냈다. 심장은 가공된 상태에서도 맥박치며 나노 머티리얼을 전신으로 순환시키고 있었다. 마리카는 그걸 가차 없이 잘라냈다. 소년의 몸은 위기를 감지했는지 움찔하며 떨렸지만, 의식도 육체도 봉인된 어린 그에게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천장의 불빛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작아도 팔팔한 심장이네. 좋은 동력로가 되겠어.”
전용 용액에 넣고 마리카는 완성형 데이터를 입력했다. 심장은 한순간 폭발적으로 팽창했고, 그때 내부로 촉매가 되는 결정이 삽입되었다. 결정에 빛이 깃들고, 그걸 확인한 심장은 내부에서 구조를 재구성하며 크기를 줄여 원래 심장과 같은 크기의 동력로로 변했다.
“박사, 뇌는?”
“한계까지 억누르고 있어. 서둘러, 오래 못 버텨.”
“아이서(Aye, sir).”
마리카가 동력로를 소년의 심장 부위에 다시 집어넣자, 동력로는 주변과 순식간에 결합하며 높은 기계음을 내며 침식을 시작했다. 동력로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 새로운 신호망에서 잇달아 지령이 떨어졌고,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던 골격과 내장이 스스로를 최적화하기 위해 급격히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격렬해서 소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마리카, 앰플!”
“라져, 앰플 주입!”
신호에 맞춰 마리카는 기계를 조작해 변화 중인 내장들에 일제히 약물을 주사했다. 그러자 소년의 움직임이 잦아들었고 고통스럽던 표정도 조금 완화되었다.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버텨봐야 30분, 그때까지만 끝나면 좋겠는데.”
걱정하는 박사와 달리 마리카는 낙관적이었다. 얼굴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소년의 턱을 만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런 쬐끄만 몸뚱이 개조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은데…… 어?”
마리카는 소년의 자지가 발기한 것을 발견하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구경했다.
“이 새끼, 제법인데? 애새끼 거시기를 보는 게 몇 백 년 만이더라.”
“그냥 둬. 대사가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딱딱해지는 법이니까.”
마리카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소년의 그것에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의 물건은 익숙하지만 이건 정말 작고 귀여웠다. 절개된 피부 틈새로 투박한 기계가 보이는 것과 대조적으로, 생생하고 어린 소년의 그것은 갭이 너무 커서 마리카의 동력로에 잃어버렸던 고동마저 느끼게 했다.
“마리카, 내장은 끝났으니까 뇌로…… 왜 그래, 마리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뇌지? 오케이.”
두개골을 절개해 뇌를 노출하는 동안, 마리카는 소년의 작은 물건에 정신이 팔린 자신에게 쑥스러움을 느꼈다. 인정하는 건 쉽다. 하지만 남성으로서 기능하지 않는 생식기가 어떤 감각을 느낄지, 그리고 그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자 전율이 일었다. 원래부터 전자 마약으로 쾌락은 충분히 맛보고 있던 마리카였지만, 소년의 그것을 추체험해 본 적은 없었다. 동경하는 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지만, 그 마음은 그녀에게 매우 부끄러운 것이었다. 왜 부끄러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더 쑥스러웠다.
“박사, 준비 끝났어.”
“최면 심도 최대, 분리!”
“라져, 분리!”
소년의 뇌수가 분리되어 동력로 때와 마찬가지로 용액 속에 담겼다. 뇌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에 의해 재단되었고, 부위별로 제어 칩이 박혔다. 이 칩 하나하나가 뇌의 수억 배에 달하는 처리 능력을 갖추고 소년의 복잡해진 기계 몸을 제어한다.
칩은 박히자마자 주변 뇌세포와 융합하며 뇌세포 자체에도 변화를 주었다. 기계와 뇌를 직결하기 위한 플러그를 생성하거나, 전력으로 뇌의 사고력을 부스트할 수 있게 하고, 뇌 자체가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도 죽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는 등 역할이 많았다.
“칩 장착 완료야, 박사.”
“이쪽도 슬슬 한계야. 속도 높인다. 재결합!”
“오냐, 재결합!”
뿔뿔이 흩어졌던 뇌를 다시 하나로 합쳤다. 정신을 컨트롤하는 박사에게 분리나 결합 같은 작업은 소년의 뇌가 비명을 지르기 때문에 억누르는 데 애를 먹는다. 그래서 작업은 짧을수록 좋았다.
“그대로 재장착!”
“재장착, 지금!”
형태가 변한 뇌가 소년의 머릿속으로 돌아갔다. 동력로에 불이 붙은 활발한 몸과 링크되듯 뇌도 활성화되었고, 뇌의 나노 머티리얼이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그 불규칙한 빛에서 뇌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번쩍거리는 게 장난 아니네. 박사, 괜찮은 거야?”
“깰 것 같아…… 하지만 조금만 더. 마리카, 조립이랑 봉합!”
박사의 지시에 따라 마리카는 기계가 드러난 소년의 몸에 새로운 피부를 형성시키고, 기지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를 장착했다. 소년은 아직 나노 머티리얼을 자유롭게 다룰 수 없었기에, 통신기나 자세 제어 장치 같은 기본적인 것조차 따로 달아줘야 할 정도로 노멀한 상태였다.
“시스템만 있으면 이런 수고는 안 해도 될 텐데.”
“수고스러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투덜대지 말고 손이나 움직여.”
피부를 입히고 최소한의 장비를 갖춘 소년은 벌거벗겨야 겨우 기계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심플한 모습으로 정리되었다. 나노 머티리얼을 다룰 수 있는 전뇌를 가졌다면 이런 특징도 지우고 완벽하게 의태할 수 있었겠지만, 기존 개조 시스템을 쓰지 않고 본인의 의식을 봉인한 채 진행한 개조로는 이게 한계였다.
“끝났다…… 박사, 의식은?”
“남아있는 것 같긴 한데, 깨어나기 전까진 몰라.”
마리카는 알몸의 소년을 보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이 고생을 했는데 눈 안 뜨면 진짜 눈물 날 것 같네.”
그런 마리카를 보며 박사가 곁눈질로 웃었다.
“꽤 맘에 들었나 보네? 처음엔 죽이라고 난리더니.”
박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마리카는 쑥스러운 듯 소년을 안아 들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
소년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건 마리카의 얼굴이었다. 소년은 마리카의 얼굴 따위 알 리 없으니 당연히 놀랐지만, 머리가 멍해서 뒤로 물러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신이 좀 드냐, 꼬마야?”
소년은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기억을 뒤졌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부자연스러워 당황하며 소년이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디죠?”
“메이븐 성단 연합 진화 연구소 은하계 지부, 우리 기지다.”
“전혀 모르겠어요.”
혼란에 빠진 소년이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세요?”
“마리카라고 부른다. 네가 깰 때까지 그 귀여운 얼굴을 감상하던 변태 누님이지.”
거시기를 구경한 시간이 훨씬 길었지만, 그 사실은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했다.
“귀엽다고 하지 마세요. 벌써 열 살이니까.”
“오호, 그래?”
“어, 어라?”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소년은 자신이 열 살이라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았다. 묘한 감각에 휩싸여 마리카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제가 열 살인가요?”
진지하게 묻는 소년의 모습이 마리카는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나한테 묻냐? 네 입으로 말했잖아.”
“기억이 안 나요.”
어느 정도 기억 장애를 예상했던 마리카는 놀라지 않고 소년에게 되물었다.
“네 이름은 알아?”
“몰라요.”
마리카는 일어나 소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노 머티리얼과 전뇌를 통해 직접 데이터를 주고받았다.
“하루키라는 이름, 기억나?”
마리카의 물음에 소년은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알 것 같아요. 익숙한 느낌인데…… 누구 이름이죠?”
“너다.”
“저요?”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년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마리카는 머리를 긁적였다.
“듣고도 기억이 안 나냐? 중증이네. 뭐, 천천히 떠올리면 돼. 네 나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잖아?”
“그렇네요. 얘기하다 보면 생각날지도 몰라요. 저기 마리카, 다른 건 뭐 아는 거 없어요?”
몸을 내미는 하루키의 머리를 마리카가 검지로 톡 건드렸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 자기 이름도 가물가물한 놈한테 뭘 더 말해주겠냐. 일단 기지 생활에 적응할 생각이나 해.”
요령이 없는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하루키는 마리카의 제안이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리카 말이 맞네요. 아, 그것 말고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요?”
“상관없어. 묻는 거야 공짜니까.”
“당신은 로봇인가요?”
마리카는 헤드폰 같은 귀에 온통 플러그투성이인 바디슈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자 마약을 상용하는 그녀는 평소에도 이 모습으로 지내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뭐, 로봇처럼 보이겠지 싶었다.
“어, 뭐 그런 셈이지. 일단 너처럼 원래는 생몸이었지만.”
“생몸요?”
“원래는 생물이었다는 소리야.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 얘기지만. 여기 있는 말 하는 로봇들은 다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면 돼. 그런 걸 연구하는 기지고, 그런 실험을 하는 곳이니까.”
“왜 그런 곳에 제가 있는 거죠?”
마리카는 카이리를 떠올리고 기분이 잡쳤다. 모처럼 하루키와 보내는 시간을 망친 것 같아 필요 이상으로 짜증이 났다.
“그건 말이지, 악취미에 저질인 우리 집안 문제아가 무단으로 널 납치한 데다 돌아가지도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미안하게 생각한다.”
마리카는 하루키 앞에서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하루키는 그 주먹을 잠시 바라보다가 일어나 마리카에게 안겼다.
“미안해요. 마리카 잘못이 아니잖아요.”
“뭐, 뭐야…… 꼬맹이가 어른 걱정하는 거 아냐.”
분노는 씻은 듯 사라졌고, 마리카는 하루키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기까지가 거주 구역이다. 이 앞에서 길 잃으면 귀에 달린 안테나를 써. 원래 있던 곳까지 안내해 줄 테니까.”
기지 안을 안내하며 마리카는 하루키에게 내장된 기능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아직 자신이 기계 몸이라는 자각이 없었고, 장착된 옵션도 잘 모르는 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카도 자세히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말해서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 마리카, 이 귀 안테나는 못 빼나요?”
하루키는 자기 몸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기계의 증거를 손으로 열심히 잡아당겼다.
“어, 그거 빠지면 혹시라도 길 잃었을 때 우리도 널 못 찾으니까. 왜, 빼고 싶어?”
“아뇨, 딱히……”
속으로는 빼고 싶었지만, 하루키는 마리카를 생각해서 대답을 흐렸다. 지금의 자신은 기댈 곳이 여기뿐이다. 지금 친절하게 대해주는 마리카도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경계심이 있었다.
“귀여운 녀석.”
그런 아이의 기색을 마리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하루키의 머리를 잡고 마구 헝클어뜨렸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인 하루키를 보자 마리카의 가슴이 더욱 설렜다.
“어머나, 약쟁이치고는 꽤 귀여운 짓을 하네.”
분위기를 깨며 거주 구역 쪽에서 키 큰 여자가 나타났다. 하루키를 빤히 쳐다보는 가느다란 눈매에 창백한 피부, 새빨간 립스틱과 그만큼이나 붉은 긴 머리카락. 게다가 어깨가 넓은 우아한 검은 코트가 마리카와는 정반대 타입이라는 인상을 하루키에게 심어주었다.
“카이리, 무슨 용건이야. 나 지금 바빠.”
“바빠? 그 소년, 의식이 돌아오면 나한테 데려오기로 되어 있었을 텐데. 그 이상의 용건이 더 있나?”
턱을 살짝 치켜들고 고압적인 시선으로 카이리가 말했다. 마리카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녀는 충동을 억누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미완성이다. 동작 체크 끝날 때까지는 못 넘겨.”
감정을 억제하는 마리카의 모습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카이리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상관없어. 미완성인 채로 내 권한으로 수령하겠다.”
“당신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는 거죠?”
하루키의 대꾸에 두 사람 모두 놀랐다. 카이리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지기보다 마리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게 더 빨랐다.
“잠깐 카이리, 얘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기억도 없다고.”
“닥쳐.”
카이리에게 밀쳐진 마리카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는 카이리의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눈동자에는 증오가 불타고 있었다.
“소년, 무슨 권리가 있냐고 했지? 이게 권리다.”
“하루키, 도망쳐!”
마리카의 말이 하루키에게 닿기도 전에 카이리는 하루키의 멱살을 잡았다. 소매 없는 심플한 셔츠가 강제로 잡아당겨졌지만 하루키는 저항할 수 없었다.
“뭐, 뭐야, 힘이 안 들어가?”
“당연하지. 우리 시작병희는 임무 달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임무를 방해하려 들면 무력화되는 건 당연한 일. 넌 수컷이지만 시작병희의 소재를 쓰고 있는 모양이군. 자, 소년…… 하루키라고 했나? 따라와 줘야겠어.”
일어나지 못하는 마리카를 뒤로한 채 카이리는 하루키를 데리고 거주 구역을 떠났다.
“도착이다.”
카이리를 따라 하루키는 두꺼운 금속 문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밝았고 바닥은 아주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갑자기 불안정해진 발판에 비틀거리며 하루키가 벽을 짚자, 벽 역시 푹신하게 힘을 흡수하며 하루키의 작은 손을 감싸 안았다.
“뭐예요 이 방은? 이상해요.”
“실험실이다. 너희가 날뛰어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만든 곳이지. 사나기, 나와.”
카이리가 부르는 쪽을 보자 하루키는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이는 자기보다 조금 어려 보였고, 금발의 예쁜 머리카락에 심플한 수영복 한 장만 걸친 모습이었다. 저런 차림으로 갇혀 있었던 건가. 하루키는 지금 자신의 처지와 겹쳐 소녀에게 동정심과 친근감을 느꼈다.
“이번엔 또 뭘 시키려고…… 그 애는!”
하루키를 본 사나기라는 소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걸 보고 카이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 복제본과 같이 있던 소년이다. 상상하는 대로, 그 아들이지.”
카이리의 말에 사나기는 더욱 당황했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 원인인 하루키는 왜 사나기가 당황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너, 나를 알아?”
“아, 안다고 하지 마! 몰라!”
날카로운 외침에 하루키는 마음이 깊게 상처 입는 걸 느꼈다. 왜 이렇게 아픈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소년의 가슴에 깊숙이 박히는 외침이었다.
“그렇구나, 나를 모르는구나.”
낙담하는 하루키를 보며 카이리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지독한 녀석이네, 사나기는. 자기 아들을 모른다고 하다니.”
“아들!?”
놀라는 하루키에게 사나기가 다급히 변명했다. 그녀 자신도 낙담하는 하루키를 보며 마음 아파하는 자신을 깨닫고 있었다.
“내가 낳은 게 아냐! 지구에서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을 줄은 몰랐단 말이야!”
몰아붙이는 사나기에게 카이리가 기름을 부었다.
“그래, 넌 분명 아이를 낳지 않았지. 하지만 사나기라는 인간은 무사히 성장해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수호병희(守護兵姫)가 되어 인간으로 돌아갔다는 기억을 간직한 채로 말이야.”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사나기가 귀를 막고 절규했지만 카이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다만 네가 지구로 돌아가지만 않았어도 복제본은 죽지 않고 인간으로서 생을 마감했을 테고, 이 소년도 지구인으로 살 수 있었을 거다. 사나기, 책임도 안 느끼고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건 너무 뻔뻔하지 않나?”
“그건……”
“잠깐만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나기와 몰아세우는 카이리 사이에 하루키가 끼어들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마치 얘가 내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어떻게 나보다 작은 여자애가 엄마예요? 이유를 설명해 줘요.”
카이리는 불쾌한 듯 하루키와 사나기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부모 자식이 쌍으로 멍청하긴. 저기 사나기가 탈주해서 지구에 간 것까지 포함해서 기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면 다 나오는 얘기잖아. 공들여 기계화한 뇌, 쓰지도 않고 녹슬게 둘 참이냐? 과거의 사건에 상대 시간의 오차나 피노 시스템의 작용, 연결해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냐?”
“기계화라고요? 내 뇌가…… 기계라고!?”
하루키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고 카이리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뭐야 소년, 몰랐어? 넌 뇌도 몸도 싹 다 기계로 개조됐어. 기억이 없는 건 수술 부작용이다. 전부 갈아치웠으니 그 정도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말도 안 돼, 그런……”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루키는 자기 양손을 내려다보았고, 사나기는 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허공을 휘저으며 지켜보았다. 그 꼴이 카이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귀 못 알아먹는 놈은 질색이라고 했을 텐데.”
카이리는 손바닥에 접속용 나노 머티리얼을 전개해 하루키의 머리에 손을 댔다. 자신보다 권한이 강한 개체의 요청에 하루키의 몸이 반응했고, 뒷머리와 목덜미 부분에 나노 머티리얼 주입용 플러그가 나타났다.
거기에 카이리는 자신의 나노 머티리얼을 주입했다. 하루키에게 흘러 들어간 이물질은 높은 권한을 무기로 하루키의 내부를 제멋대로 휘저으며 그가 기계라는 사실을 자각시키려 들었다.
“아, 가…… 데이터 링크, 내부 구조 체크, 아아악!”
소년의 전뇌는 침식당했고, 무의식마저 무시한 채 의식 영역에 자신의 몸 상태를 강제로 띄웠다. 하루키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강제로 메모리에 기록되면서 ‘모르지만 알고 있다’는 모순된 정신 상태가 만들어졌다.
“가, 하악……”
결국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전뇌는 풀가동되었고, 높은 전압과 함께 하루키를 고문했다. 모순은 카이리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졌기에 처리 능력이 높은 전뇌조차 한계에 다다랐다.
“기계…… 알고 있어, 나는, 으아아아악!”
머리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고, 하루키는 점차 단순한 단어를 억양 없는 기계적인 말투로 반복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 나는 기계…… 개조되어, 되어서, 실험 동물로 끌려, 끌려온 인간 수컷…… 하루키, 내 이름, 나의, 나…… 사나기, 나의, 엄마, 의, 이름……”
하루키의 전뇌는 이성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그 틈을 타 카이리의 의지를 담은 나노 머티리얼들이 그의 더 깊은 곳으로 침투해 세뇌를 시도했다.
전뇌에 타인의 나노 머티리얼을 강제로 주입하는 건 성단 연합에서 인권을 가진 상대에게 행할 경우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다. 절차를 밟으면 상대에게 절대복종을 강요할 수도 있으며, 해제 방법은 기억을 포함한 모든 데이터의 삭제뿐이다. 하지만 하루키에게 그런 인권 따위는 없었다. 취급은 어디까지나 실험 동물일 뿐. 카이리는 그걸 이용해 처음부터 그를 편리한 인형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하루키, 하루키!”
사나기는 이제 하루키에 대한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목적은 다르지만 전뇌를 난도질당하는 경험을 해본 적 있는 사나기는 하루키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과거의 굴레 따위는 상관없었다. 처지가 비슷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었다.
“피노 시스템이 없어도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에서 케이블을 뽑아 하루키의 목덜미에 연결했다. 강한 노이즈가 통증이 되어 몰려왔지만 그녀는 하루키에게 계속 접근했다.
“으아아, 가, 하악…… 기, 기다려, 구해, 줄 테니까.”
사나기는 자신의 나노 머티리얼로 카이리가 주입한 나노 머티리얼을 선별해 뽑아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자신이 오염되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키를 구하고 싶었다.
“크크크, 가상하기도 해라. 마리카가 봤으면 감동했겠어.”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카이리가 원하던 전개였다. 사나기는 들어온 지 1년도 안 됐지만 카이리와 같은 시작병희다. 직접 나노 머티리얼을 주입하면 제재 대상이 된다. 하지만 하루키를 매개로 하면 그건 사나기의 자유의지가 되고 카이리는 처벌받지 않는다. 이렇게 카이리는 사나기를 합법적으로 손에 넣어 유린하고, 그녀를 아끼는 기지의 시작병희들의 마음을 짓밟으려는 비열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조금만 더…… 하아아! 어, 왜 이래!? 이 신호…… 으, 으냐아아악!”
하루키에게서 나노 머티리얼을 거의 다 제거했을 무렵, 사나기는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걸 느꼈다. 동시에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감각도. 뒤를 돌아보니 카이리가 뒤에서 엉덩이에 있는 앰플 주입구에 건 타입 실린더를 박아 넣고 있었다.
“전부 청소해 버리면 곤란하거든, 꼬마 아가씨. 애들은 애들답게 고양이처럼 재롱이나 떨면 되는 거야.”
뽑혀 나간 실린더를 노려보며 사나기가 목소리를 깔았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노 머티리얼용 앰플을 주입했다. 그뿐인데?”
사나기에게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서 솟구치는 폭력적인 충동, 어리광 부리고 싶은 충동,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성적인 욕구. 어느 것 하나 평소에 느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하루키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몰라도, 네 마음대로는 안 될 거야.”
“입으로는 뭔들 못 하겠어.”
“으냐아아아악! 냐아아아악!”
이번에는 뒷머리에 앰플이 주입되었고 사나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며 하루키에게서 손을 떼고 네발로 엎드렸다.
“머, 머리가 빙글빙글해냐……”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사나기를 카이리가 걷어찼다. 중심을 잃고 사나기는 부드러운 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지구의 동물, 고양이로 만든 앰플이다. 양이 많을수록 네 마음을 고양이로 물들이지.”
사나기에게 주입된 건 새끼 고양이 앰플이었다. 유기물, 무기물을 가리지 않고 침투하는 강력한 약물은 먼저 나노 머티리얼 전체에 퍼진 신호망과 그 중추인 전뇌에 영향을 준다. 반복 투여하면 중추까지 변화를 일으켜 되돌릴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게다가 뜨거워…… 냐냐!”
사나기는 자신의 가랑이에 갈라진 틈이 생긴 걸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표면 장갑은 그대로인데 나노 머티리얼이 성관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영복처럼 보이던 장갑판이 부드러워지고 그곳에 비부가 드러나는 것은 사나기에게 상상 이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냐, 냐째서…… 그만해냐아!”
“안 그만둬. 아직 안 끝났으니까. 야, 일어나.”
카이리는 누워 있는 하루키에게도 앰플을 주입하고 멱살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하루키의 몸은 경련하고 있었다.
“그만해냐! 하루키도 고양이로 만들 셈이냐!?”
“아니, 잘 봐.”
하루키는 경련하는 채로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스터 인증 완료. 나는 하루키…… 이후 카이리 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겠습니다.”
“하루키!”
사나기의 외침도 하루키에게는 닿지 않았다. 하루키는 그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카이리 쪽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카이리, 님…… 명령을.”
그 모습을 보며 카이리는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예의는 바른데 동작이 좀 불안정하네, 도련님.”
카이리는 다시 앰플을 하루키에게 주입했고 하루키는 부르르 떨었다.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 움직임은 어딘가 괴로워 보였다. 사나기는 자신이 앰플을 맞았을 때를 떠올리며 절규했다.
“그만해냐! 이제 하루키한테 앰플 놓지 마!”
“그렇다면 꼬마 아가씨, 네가 대신 맞아줘야겠는데.”
카이리는 다른 앰플을 들고 사나기 쪽으로 다가왔다.
“자, 잠깐, 싫어…… 냐아아아악!”
전신에 자신 이외의 신경이 뻗어 나가는 기묘한 감각과 그에 따른 고통, 그리고 자신의 감각이 변해가는 것이 사나기를 괴롭혔다. 세 번의 앰플 주입으로 사나기는 네발로 기는 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나노 머티리얼은 앰플에 반응하듯 귀를 고양이처럼 뾰족하게 만들었고 꼬리까지 돋아나기 시작했다.
앰플의 제어에 의해 떨고 있는 두 아이에게 카이리가 명령한 것은 성관계였다. 그녀의 나노 머티리얼 때문에 두 사람은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서툰 지식으로 서로의 생식기끼리 얽히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두 사람이 생몸인 인간이고 이곳이 목욕탕이었다면 장난치는 남매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행위는 풋풋했다.
“냐아, 으냐아~”
“성, 성관계 개시, 개시……”
하지만 그런 모습이 카이리에게는 감질났다.
“하는 법도 모르나? 알맹이까지 애새끼들이라 곤란하구먼.”
카이리는 새로운 앰플에 성관계 절차를 프로그래밍해 하루키에게 박아 넣었다.
“가가, 가, 가아악!”
유독 격렬한 경련 끝에 하루키는 눈물과 침을 흘리며 갑자기 적극적인 섹스로 돌입했다. 돌변한 태도와 하루키에게 앰플이 주입된 것에 사나기가 분노했다.
“뭐, 뭐 하는 거냐아! 내가 대신이면 안 놓겠다고 했잖아냐! 거짓말쟁이냐!”
“닥쳐, 암캐 년아.”
카이리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네 번째 앰플을 사나기에게 주입했다.
“으으냐아아아아악!”
약물이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에서 추가로 주입되자 사나기 안에서 농도가 짙어진 앰플은 나노 머티리얼의 변화라는 형태로 겉으로 드러났다. 귀는 완전히 고양이 귀가 되었고 꼬리도 다 자랐으며 손발도 고양이 모양으로 변해 하얀 털까지 났다. 내부의 이물질에 미쳐 날뛰는 사나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키는 성관계를 계속했다.
“으냐아악!”
개조된 몸이고 상대의 성기가 작다고는 해도 처녀인 사나기에게 성행위는 자극이 너무 강했다. 질이 쓸리는 자극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싫어, 냐아! 하루키이!”
말은 닿지 않았다. 하루키는 여전히 먼 산을 보는 눈으로 미성숙한 성기를 찔러넣고 있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사나기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사나기가 엄마여도 좋아냐, 아니어도 좋아냐, 그러니까 이런 거 그만하자냐, 서로 아프기만 해냐!”
닿지 않았다. 사나기가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성기는 더 깊숙이 들어왔다.
“냐아아악! 하루키, 이제 안 되는 거냐?”
대답이 없었다. 하루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사나기는 자신의 아픔보다 점차 하루키가 가엽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느껴져냐?”
대답은 없었다.
“내 목소리 안 들려냐?”
역시 대답은 없었다. 사나기는 결심한 듯 하복부에 줬던 힘을 뺐다.
“이제 됐어냐. 원망하지 않아냐.”
말은 없어도 마음은 통할 거라는 생각으로 사나기는 진심으로 하루키를 받아들였다. 성기는 깊숙이 박혔고 미성숙한 체내에서 만들어진 정액은 있는 힘껏 사나기의 체내로 보내졌다.
몸을 기계화시킨 그녀들 시작병희들은 진화의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 않기 위해 번식에 다양한 수단을 남겨두었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자신의 뿌리인 생물로서의 생식 방법이다. 그녀들은 기계이면서도 임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시작병희로 선정되는 건 기본적으로 여성이며 ‘병희(Princess)’라는 명칭의 유래이기도 하다. 하루키처럼 성기를 유지한 채 개조되는 사례는 드물었다.
행위 끝에 카메라 같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하루키를 보며, 의식을 고양이에게 지배당하면서도 사나기는 자아를 붙들었다.
“하아, 하아, 하루, 키……”
하루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에게 주입된 건 로봇용 앰플이었고 이 역시 인권이 있는 자에게 쓰면 죄가 되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대상의 사고를 빼앗고 제어 하에 두는 것으로 원래는 프로그램 폭주 시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미안해, 냐, 나 때문에……”
사나기는 자신의 의식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카이리가 만족했기에 강제 종료 지령이 떨어진 것이다. 하루키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보다 먼저 말 없는 인형이 되어 사나기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카이리의 계획은 예상대로의 결말을 가져왔다. 그녀가 행한 행위는 자신의 권한으로 행한 신형기 사나기를 이용한 생식 실험이었고 합법으로 판정되었다. 하루키에 대한 처우는 실험 동물에 대한 것으로 당연히 불문곡직, 사나기에 대한 앰플 사용은 ‘실험 참가자의 폭주 행위 억제’로서 인정되는 행위였다.
결국 카이리는 처벌받지 않았고 고양이 같은 모습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사나기와 감정을 잃고 간신히 기억만 유지하는 하루키만이 남겨졌다.
“미안하다, 내가 널 끌어들였어……”
어린 하루키와 사나기 두 사람을 껴안고 마리카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울지 마냐~ 마리카는 나쁜 짓 안 했어냐~”
위로하는 사나기는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생식기가 노출된 채 고정되어 버렸기에 윤활액이 새지 않도록 어쩔 수 없이 채워둔 것이었다. 사나기는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마리카의 품에 머리를 비볐지만 마리카에게는 오히려 그게 더 괴로웠다. 고양이 귀, 꼬리, 손발. 이것들은 나노 머티리얼이 강하게 기억하고 신경을 뻗어버렸기에 강제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나기에게 그런 수술을 했다간 의식이 버텨낼 수 있을지……
“그치만 너희 원래대로 못 돌아온단 말이야.”
“괜찮아냐. 어차피 사나기들은 로봇이야냐. 마리카가 예뻐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냐.”
“나도 행복해.”
하루키도 사나기를 따라 마리카의 품에 머리를 비볐다. 하지만 그 몸짓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그날 이후 하루키에게서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 기억상실 상태에서도 풍부했던 말과 표현은 카이리의 한정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적화되어 버렸고 그 외의 일을 하기엔 너무나 부적합했다. 이것 또한 대대적인 개조 없이는 고칠 수 없었다. 정신에 제약이 걸려 있는데 개조까지 가하면 인격이 파괴될 터였다.
너희들, 원래는 로봇 같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 원래대로 못 돌아오는데 슬프지도 않냐!? 시작병희는 인간의 연장이었단 말이다!
마리카는 말을 삼키고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위로받아 기뻐해야 할 텐데 그녀는 자신의 무력감과 자책감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자신도 나노 머티리얼이긴 하지만 기계 몸이다. 차라리 부서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곁눈질로 보며 카이리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소망은 마리카가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보는 것이었다.
카이리는 우수한 시작병희였다. 그 우수함을 인정받아 시찰을 온 연합 국적 남성과의 성관계까지 허가받았다. 하지만 그 후 시험을 통과해 시작병희가 된 마리카는 훨씬 더 우수했다. 기지 내 유일한 연합인인 박사의 눈에 들어 조수로서 다양한 특권도 부여받았다. 다른 시작병희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카이리가 자랑할 수 있었던 건 연합 국적 남성의 아이를 출산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와는 곧바로 떨어졌지만 카이리에게는 준연합 국적 자격이 주어졌다. 그녀는 기뻐했다. 영광의 나날이 돌아올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그녀는 틈만 나면 마리카가 아끼는 것들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지금 난 아주 만족스러워. 너한테 감사해도 좋겠어, 마리카.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니까.”
“그래? 그럼 이제 여한은 없겠네.”
카이리의 등 뒤에서 말을 건 건 박사였다. 그녀는 평소의 하얀 가운이 아니라 검게 물든 정규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 차림…… 무슨 생각이지, 박사?”
“시작병희, 내가 군무 중일 때는 메르세데스 소장이라고 불러라. 널 인격 파괴 혐의로 구속한다.”
카이리는 경계했지만 곧 자세를 풀었다. 박사, 즉 메르세데스는 이 기지에서 유일한 연합인인 동시에 정규 군인이기도 하다. 임무 이외의 일로 카이리가 거역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카이리는 생각했다. 자신은 인격 파괴 혐의를 피해 합법 판정을 받았을 터였다. 왜 박사가 이런 강경한 태도로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일까.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연합 국적을 가진 박사는 몰래 본성에 하루키의 입양 신청을 해두었던 것이다. 카이리에게 합법 판정이 내려진 후 신청이 통과되었고 사나기가 하루키의 아이를 출산했기에 판정이 뒤집히게 된 것이다.
우선 카이리에게 주어졌던 특권은 연합 국적을 취득한 하루키의 아이를 출산한 사나기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것은 카이리가 생식 실험 임무 발령 권한을 잃고 주도하는 것도 불가능해짐을 의미한다. 새로 주도권을 얻은 사나기가 카이리에게 절대복종하고 있는 현 상황은 카이리의 월권행위로서 새로운 군법회의를 열 구실이 되었다. 군법회의 자리에서 본성 연합 국적을 취득한 하루키에게 과거 카이리가 행한 행위가 다시 거론되었고 처단받게 된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 정도 짓을 저질렀으면 누구라도 극형이야.”
박사는 차갑게 내뱉었다. 살인에 버금가는 폭거를 몇 번이나, 그것도 준연합 국적 신분으로 저질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네년,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그 꼬맹이를 개조했구나! 연합 사양으로! 입양할 수 있게!”
“자업자득이야. 네가 아무 짓도 안 했으면 심판받을 일도 없었어.”
“그만둬! 알았으면 안 했어! 기회를 줘! 난 죽기 싫어!”
“메이븐 본성 연합 진화 연구소 은하계 지부 소장 메르세데스가 명한다. 지금부터 카이리의 모든 기능을 정지하고 해체 처분한다.”
◆◆◆
“엄마~!”
마리카는 뒤를 돌아 달려와 안기는 다섯 살 정도의 남자아이를 받아 안았다.
“오, 아키토 혼자 왔어? 형아랑 누나는?”
“일 끝나고 온대요!”
아키토는 해맑게 대답했고 그 미소에 마리카도 온 힘을 다해 웃어주었다.
“그래그래, 방해 안 하고 잘 있었어?”
“네!”
책상에서 일어나 아키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리카는 사나기와 하루키의 모습을 확인했다.
“봐라, 형아랑 누나 왔다~”
“이놈 아키토! 엄마 방해하면 안 된다냐~!”
“엄마, 일, 일단락?”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마리카는 책상을 떠나 레크리에이션 룸으로 향했다.
“괜찮아. 박사님이 너희 오면 일 다 팽개치고 놀아줘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그거 정말 괜찮아냐?”
“걱정돼.”
“아, 누나 치마 입었다!”
아키토는 마리카의 품에서 스르르 내려와 사나기의 치마를 잡아당겼다.
“앗, 하지 마냐!”
“에이, 역시 기저귀 찼네~”
“시, 시끄러워냐! 누나도 멋 부리고 싶단 말이야냐!”
“멋 부리기……”
“자자, 얘들아! 꾸물거리다간 쉬는 시간 다 끝난다. 얼른 가자.”
키 큰 마리카를 따라 세 아이가 레크리에이션 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모니터로 지켜보는 인물이 있었다. 박사였다.
“딱히 천천히 와도 상관없는데 말이지.”
카이리의 손에 주입되었던 절대복종 나노 머티리얼이 그녀의 기능 정지로 무력화되었기에 사나기와 하루키의 상황은 아주 조금이나마 호전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인격을 초기화하지 않고 변해버린 사나기의 몸을 원래대로 돌리거나 두 사람의 사고를 인간에 가깝게 만드는 건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박사의 결론이었다. 인격 초기화는 그들을 아무런 감정도 기억도 없는 로봇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박사는 마리카에게 아직 복구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전했다. 그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혁신적인 기술 발전이 있다면 먼 미래에 개성을 유지하면서 나노 머티리얼의 부작용만 제거하는 방법이 발명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나기와 하루키의 아이, 아키토의 육체적 성장은 성장이 멈춘 두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바이오 메탈을 소재로 조절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아이로 머물게 함으로써 마리카와 긴 시간을 부모 자식으로 보내게 하려는 박사의 이기심이었다. 박사는 오랜 파트너인 마리카가 전자 마약도 쓰지 않고 웃으며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다음 시작병희는 몇 백 년 뒤에나 나올지 모르니까. 마리카가 애들이랑 좀 논다고 해서 일에 지장 생길 건 없지.”
하지만 박사는 우주 곳곳에 사이보그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당사자 중 한 명이다. 수많은 미개척 행성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악의 축이다. 집도의는 한가할지 몰라도 연구소 소장의 손이 빌 날은 없었다.
“뭐, 내가 바쁜 건 어쩔 수 없네.”
박사는 기지의 중추인 감시소로 들어가 은하계 곳곳에서 움직이는 피노 시스템의 동태에 눈을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