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기억력의 차이가 있어서, 누군가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보라 하면 저마다 다른 시기를 떠올릴 거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처음 '꼴림'을 느꼈던 날이 언제인지묻는다면, 아마 어린 시절 TV에서 봤던 록맨 애니의 바이러스 카드로 SM여왕이 되어버린 여캐를 처음 본 날이 아니었나 싶다.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할 때 다크 아콘으로 상대 유닛에 마인드 컨트롤을 거는 그 쾌감을 대체 초등학교 저학년이 어떻게 알았던 걸까? 인간의 취향은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지만 그걸 초월하는 타고난 성향이란게 있는게 틀림없다.
성에 눈을 뜨고, 꼬추가 커졌다며 엄마에게 달려간 미친 흑역사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인간을 지배하고, 내 마음대로 뒤튼다는 것에 틀림없는 '꼴림'을 느꼈다.
아버지가 사기 당해서 빚더미에 나앉고, 이윽고 암으로 돌아가시고, 집에 양복 아저씨가 찾아와 누나가 제일 아끼던 바이올린에 빨간 딱지가 붙고,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시고 ... 현학적이고 지루하기만 한 비극적 출신 성분과 성장 과정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어린 시절부터 난 그 안광이 사라진 멍한 눈동자를 사랑했다.
(약스포)
1년이 넘도록 감성과 설움이 북받치는 새벽이면 '데드엔드시티'의 엔딩 중 하나가 떠오른다. 별거 아닌 플탐 짧은 덱빌딩 겜이었음에도 유독 기억에 남았던 엔딩. 최면앱을 개발한 겜붕이가 젊은 여자 도우미를 요청하는데, 거기에 주인공이 경계심 없이 가선 최면에 당하는 흔하디 흔한 엔딩. 그러나 내가 모솔아다 대마법사로 살아오며 감상한 14000605개의 최면물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최면앱에 당한 주인공에게 끝내 제 잘못을 고하는 겜붕이와, 최면에 당했음에도 결론적으로는 나아진 제 삶을 보고 용서해주는 주인공과, 결국 그 최면앱을 의료용 도구로 개선해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겜붕이와 그 아내가 된 주인공의 해피엔딩이 와 닿아서 였다.
'최면순애' 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우스갯소리로 통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난 최면이 좋고, 세상이 좋고, 사람이 좋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최면으로 누군가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물론 현실은 최면따윈 불가능하고, 난 무경력 고졸 빡통 만년 취준생 병신 새끼고, 저딴 상상이나 하며 고추를 흔드는 역겨운 겜붕이지만. 상상은 불가능하기에 더더욱 사랑스럽고 낭만적이기 마련이잖은가.
더 이상 "취업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묻지 않는 어머니 눈가에 주름이 유독 눈에 밟히는 날이다. 최면이 없는 세상이 싫고, 용서라곤 없는 사람들이 싫고, 해피엔딩 이라곤 보이지 않는 미래가 싫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최면타락순애야스가 꼴리는 밤이다.
존나게 사랑한다, 최면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