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무스메! 프리티 더ㅂ...
"우왓!"
트레이너실로 향하던 고요한 복도. 정적을 찢고 터져 나온 발랄한 타이틀 콜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스마트폰 볼륨 버튼을 연타했다. 다행히 등교 시간의 소란스러운 분위기 덕에 시선이 대놓고 쏠리지는 않았지만, 몇몇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뒤통수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드르르륵, 탁ㅡ!
"휴우... 간 떨어질 뻔했네. 미쳤지, 소리 꺼두는 걸 깜빡하다니."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가라앉히며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화면에는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트레이너 시뮬레이터』,
통칭 「TM(트레이너 매니저)」 시리즈의 메인 로딩 창이 빛나고 있었다.
트윙클 시리즈의 그것을 기반으로 우마무스메의 궤적을 예측한다는 이 게임은,
그 지독한 리얼리티와 중독성 때문에 수많은 학생, 직장인, 유부남들을 파멸로 몰아넣은 전적이 있다.
나 역시 그 독한 늪에 빠진 유저 중 하나였다.
참고로 이름에도 없는 '매니저'가 붙은 이유는 같은 배급사의 모 유명 축구 감독 게임의 영향이다.
워낙 입에 잘 붙는 별명이라 이제는 뉴비들이 "이게 왜 TM임?" 하고 묻는 것조차 일종의 'WWE'가 되어버렸다.
본래 트레이너 업계에서 자신의 담당을 시뮬레이션에서 담당을 맡는 행위는 '점술가가 제 운명을 점치는 것'만큼이나 불길한 금기로 통한다. 숫자로 치환된 미래가 현실의 가능성을 갉아먹는다는 미신적인 이유나, 트레이너가 사고를 당한다던가 게임이 현실이 된다던가,
담당이 갑자기 땡땡이 기질이 생긴다던가 하는 온갖 괴담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금기를 범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음 레이스가 바로 「일본 더비」이기 때문이다.
순발력과 스태미너, 페이스 조절이 전부 요구되는 2400M의 거리.
3관중에서도 가장 큰 부담감 속에서 차분함과 긴장감을 적절히 유지해야하는 멘탈리티.
아무리 기대받는 신성이라고 한들 입상 조차 장담할 수 없는
'가장 운이 좋은 우마무스메가 승리하는 레이스'
비록 사츠키상은 얻어내지 못했지만, 일본 더비만큼은 절대 넘길 수 없다는 각오로 준비해왔다.
그럼에도 이 불안감만큼은 도저히 어쩔 수 없었기에, 이런 금기를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TM이 아무리 현실성이 높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게임'.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내 담당 우마무스메를 더비에 출전 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아..."
TM에서의 결과는 언제나처럼 「1착」.
그러나, 아래에는 붉은 낙인처럼 선명한 문구가 박혀 있었다.
[시계 3회 사용]
벌써 20번째였다. 저장된 모든 세이브 파일의 첫 번째 도전과 네 번째 도전 결과는 소름 끼칠 정도로 일치했다.
그리고 언제나 첫번째 도전에 2:24:00 2착, 네번째 도전에 1착.
마치, 저주나 징크스라도 씌인 것만 같은 결과를 반복하고 있다.
그것도 20번 가량의 세이브 파일 내내.
각질을 도주, 선행, 추입으로 바꿔봐도, 무한 휴식이나 외출을 해도, 훈련 강도를 미친 듯이 높여봐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기기를 바꾸고 계정을 새로 만들어도,
첫 번째 시도 2:24:00, 2착, 네 번째 시도 1착.
일본 더비에서만큼은 반드시 같은 결과가 나온다.
"뭐가 문제인 거냐고, 대체..."
머리를 잡고 신음하던 그때였다.
"어라? 왜 그러고 계시는 거예요, 트레이너 씨?"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정적을 뚫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담당 우마무스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ㅡ?! 아... 너였구나... 언제 왔어?"
그곳에는 어느새 온 건지 담당 우마무스메가 서있었다.
"방금 막요. 그나저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무리 게임에 불과하더라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불안감을 가지고 가는 것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아하하, 아무것도 아냐. 그냥... 취미로 하는 게임이 좀 안 풀려서."
"게임... 말인가요?"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시, 기분 탓일까, 그 찰나의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깊고 무겁게 느껴졌다.
"후훗, 트레이너 씨도 참. 게임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다니."
'게임'의 결과보다 중요한 '현실'의 일이 있다는 것을 상기 시키듯 알람이 울렸다.
"앗, 벌써 시간이... 슬슬 나는 이번 주말에 있을 더비 사전 인터뷰 하러 갔다올게. 영상 준비 해뒀으니까 먼저 보고 있어."
"네에~"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섰다.
드르륵 탁ㅡ!
트레이너실의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방 안에 홀로 남은 그녀는 트레이너가 앉아 있던 빈 의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지독한 긴장감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이 서늘한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그 의자의 등받이를 쓸어내렸다.
트레이너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불안. 그가 매일 밤잠을 설치며 들여다보던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트레이너 씨도 정말... 걱정마세요. 꼭 같이 이길 수 있을 거에요."
더비까지 남은 시간은 단 4일.
나는 애써 스마트폰을 가방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결국 게임일 뿐이다. 현실의 그녀는 '게임'이 담을 수 없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우마무스메다. 나는 트레이너로서의 본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식단을 점검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그녀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동시에, 담당 우마무스메는 물론, 경기장 특성과 라이벌들의 습관까지 영상을 돌려보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트레이너 씨, 이번 주는 평소보다 훨씬 더 꼼꼼하시네요?"
훈련을 마친 그녀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최대한 평소처럼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비니까. 후회 없이 보내고 싶어서 그래."
"후훗, 걱정 마세요. 저, 정말 기운이 넘치거든요."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게임' 따위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과 노력이 그 보이지 않는 숫자를 박살 내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꼭...이기자..."
"...네..!"
마침내 다가온 일본 더비 당일. 도쿄 레이스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완벽한 마장 상태. 모든 요소가 우리의 승리를 예견하는 듯했다.
도쿄 레이스장, 대기실.
두꺼운 방음벽 너머로 수만 명의 관중이 내뿜는 열기가 지진처럼 은은한 진동이 되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실내는 기분 나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출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5분 남짓이었다.
"트레이너 씨, 아까부터 시계만 보고 계시네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돌아보니 승부복 차림의 그녀가 벤치에 앉아 마지막으로 신발 끈을 점검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내 표정이 이미 잔뜩 굳어있을까 봐 서둘러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긴장이 좀 돼서."
"후훗, 뛰는 건 저인데 왜 트레이너 씨가 그렇게 굳어 계시는 거예요? 자, 이쪽 좀 보세요. 넥타이도 삐뚤어졌잖아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손길로 내 넥타이 매듭을 고쳐 매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어젯밤 스마트폰 액정 위로 무수히 떠다니던 붉은 글씨만이 잔상처럼 남았다.[2:24:00, 2착].
그 숫자가 주는 압박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리 게임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결승선 앞에서 아주 미세하게 뒤처지던 시뮬레이션 속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기... 컨디션은 정말 괜찮은 거지?"
"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대답해 드렸잖아요. 몸 상태는 최고예요."
그녀는 넥타이 매듭을 완성하고는 손바닥으로 내 가슴팍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는 일말의 불안조차 없었다.
"트레이너 씨가 저를 위해 준비해주신 모든 것들을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절 믿어주세요."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는 뜨겁고도 단단했다.
"사츠키상 때의 아쉬움은 오늘로 끝이에요. 트레이너 씨가 밤새 고민하시던 그 '최고의 결과'를 제가 현실로 만들어 드릴게요."
"......내가 고민하던 결과?"
"네. 당신이 가장 바라고 있는 그 승리요."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주 찰나의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는 내가 밤새도록 '무언가'에 괴로워했다는 걸 어떻게 저렇게 확신하는 걸까.
단순히 더비에 대한 열정으로 치부하기엔 그녀의 눈빛은 지나치게 깊고 고요했다.
"자, 이제 가야 해요. 다녀올게요, 트레이너 씨."
그녀는 대기실 문을 열기 전,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약속할게요. 트레이너 씨가 실망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설령... 어떤 징크스가 찾아온다고 해도 이겨낼게요."
마지막 대사는 너무나도 작아서, 복도에서 밀려 들어온 폭포수 같은 함성 소리에 묻혀버렸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우당탕—!
"각 우마무스메 깔끔한 스타트와 함께 일본 더비의 시작을 알립니다!"
게이트가 열리는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18명의 우마무스메가 도쿄 레이스장의 초록빛 잔디 위로 쏟아져 나왔다.
14만 관중이 토해내는 거대한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와 고막을 때렸지만, 내 시선은 오직 한 곳, 마군의 뒤편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는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그녀의 선택은 '선입'.무리하게 선두 다툼에 뛰어들기보다,
중반까지 힘을 아끼며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적인 스퍼트를 노리는 작전이다.
그녀는 내가 지시한 대로 안쪽 코스에 바짝 붙어 체력을 보존하며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유지했다.
나는 난간을 꽉 쥔 채 그녀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좋아, 페이스는 완벽해."
1코너를 지나 백스트레치에 진입할 때까지, 그녀의 주행은 나무랄 데 없었다. 훈련 때 다듬었던 리듬 그대로였다. 하지만 레이스가 중반을 넘어서며 3코너를 돌기 시작했을 때, 내 가슴 한구석에서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옆자리에서 나란히 달리는 라이벌의 번호, 앞서가던 우마무스메가 살짝 휘청이며 진로를 바꾸는 모습.
'...익숙해.'
분명 처음 보는 레이스인데도, 마치 수만 번은 본 것 같은 기이한 기시감이 나를 덮쳤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이건 현실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오직 그녀의 승리만을 기도했다.
마침내 제4코너를 돌아 마지막 직선 주로. 500미터가 넘는 도쿄의 긴 직선 주로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지금이다! 가라!"
나도 모르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땅을 박차고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앞서가던 두 명의 주자가 미세하게 엉키며 그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찰나의 지체.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즉각 바깥쪽으로 진로를 틀어 가속하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
관중석의 함성이 폭발했다. 그녀는 중판에서 번개처럼 튀어나와 앞선 무리들을 하나둘 제치기 시작했다. 근육의 박동이 이곳까지 전해질 듯한 역동적인 주행. 결승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선두 주자의 턱밑까지 추격했다.
라스트 10미터.그녀와 선두 주자의 몸이 완전히 겹친 채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겼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전광판의 사진 판독 결과만을 기다렸다. 수 초 뒤, 전광판에 결과가 나왔다.
[1착: 3번 모브][2착: 8번 (사토노 다이아몬드)][차이: 코(鼻)]
그리고 그 아래, 믿을 수 없는 숫자가 박혀 있었다.
[기록: 2:24:00]
"........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2분 24초 00.어젯밤 게임 속에서 수없이 보며 '단순한 프로그램의 한계'라고 치부했던 그 저주받은 숫자가 현실의 전광판에 비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코 차이의 패배. 단 0.01초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일치.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의 풍경이 멀어지더니 관중석의 함성이 아득한 물소리처럼 변해갔다. 심장 박동이 귓가를 울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발밑의 땅이 꺼져 내려가는 듯한 착각 속에서 차가운 식은땀이 전신을 훑었다.
이것은 현실인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정말 현실인가?
거대한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와 이성을 집어삼켰다. 숨이 막히고 시야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난간을 붙잡으려 했으나, 손끝에 닿는 것은 오직 허공뿐이었다. 그대로 정신의 끈이 끊어지며,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암흑 속으로 추락했다.
"허억...!"
급격히 산소를 갈구하는 폐부의 움직임과 함께 상체가 튕기듯 일어났다.
아스팔트 위로 추락하던 아찔한 감각이 아직 등줄기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얀 천장, 은은하게 들려오는 공기청정기의 소음,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약한 파우더 향기.
"트레이너 씨? 정신이 드세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벤치에 앉아 신발 끈을 묶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각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승부복의 매무새.
"정말, 갑자기 쓰러지셔서 깜짝 놀랐다고요. 나쁜 꿈이라도 꾸신 거예요? 식은땀이 엄청나요."
그녀가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체온.방금 전, 전광판에서 보았던 그 끔찍한 숫자 '2:24:00'과 코 차이의 패배가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눈앞의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지금... 몇 시지?"
"음? 12시 25분요. 출전까지 딱 15분 남았네요. 왜 그러세요?."
12시 25분.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쓰러지기 전, 아니 '첫 번째' 레이스를 준비하며 시계를 확인했을 때도 정확히 이 시간이었다.
"너, 아까... 넥타이 매주지 않았어?"
"네? 무슨 소리에요. 이제 막 신발 다 묶었는데. 넥타이가 삐뚤어지긴 했네요. 이리 와보세요, 고쳐 매 드릴게요."
그녀가 내게 다가와 넥타이 매듭을 잡았다.
손길 하나,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의 깊이, 심지어 내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는 박자까지. 모든 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단순한 데자뷔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정교하고,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기, 이번 레이스 말이야.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아니, 만약에 네가 2착을 하더라도..."
"트레이너 씨? 갑자기 무슨 소릴 하시는 거에요?"
그녀가 내 말을 끊었다.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깊은 심연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평소의 맑은 빛으로 돌아왔다.
"꿈자리가 정말 사나웠나 보네요. 걱정 마세요. 트레이너 씨가 저를 위해 준비해주신 그 모든 것들을 전 믿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다시 한번 내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대기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은 그녀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다.
"약속할게요. 트레이너 씨가 실망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설령... 어떤 징크스가 찾아온다고 해도 이겨낼게요."
그녀가 나간 뒤, 적막만이 남은 대기실에서 나는 가방 속 스마트폰을 꺼내려다 멈췄다.
손이 벌벌 떨려서 도저히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꿈이라면, 왜 내 기억 속의 2:24:00은 이토록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는 걸까.
왜 그녀의 마지막 미소는, 승리를 다짐하는 우마무스메가 아니라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관찰자처럼 느껴지는 걸까.
멀리서 일본 더비의 개막 팡파레가 울려 퍼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대기실을 나섰다.
우당탕—!
"각 우마무스메 깔끔한 스타트와 함께 일본 더비의 시작을 알립니다!"
도쿄 레이스장의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
18마리의 우마무스메가 일제히 잔디를 박차고 나가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그녀의 스타트는 매끄러웠다.
꿈결 속에서 보았던 흐릿한 잔영과는 달리, 지금 내 눈앞의 그녀는 훨씬 더 기운차게 대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중단보다 조금 앞선 위치, 마군에 휩쓸리지 않는 바깥쪽 코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이상적일 만큼 쾌적한 포지셔닝이었다.
'좋아, 이대로라면 3코너 진입 전에 충분히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어!'
내 예상대로 레이스는 순조로웠다.
그녀는 리드미컬한 호흡으로 마군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백스트레치를 지날 때의 속도도, 코너를 도는 궤적도 꿈에서 보았던 그 비참한 패배의 기록과는 판이했다. 그녀의 발걸음 한 번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솟구쳤다.
마침내 운명의 제4코너. 500미터가 넘는 지옥의 직선 주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가 스퍼트 타이밍을 기다리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하며 폭발적인 가속력을 준비하는 그 찰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말도 안돼..."
스퍼트를 올리려던 그녀의 불과 몇 미터 앞에서, 선행하던 두 주자가 미세하게 엉키며 비틀거렸다.
한 명은 한계에 달해 다리가 풀렸고, 다른 한 명은 그를 피하려다 급격히 바깥쪽으로 사선을 그리며 밀려 들어왔다.
아까와 형태는 달랐지만, 결과는 똑같은 '벽'이 그녀의 앞을 완벽하게 봉쇄해버렸다.
그녀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보폭을 줄여야 했고, 다시 가속을 붙였을 때는 이미 결정적인 0.5초가 허공으로 흩어진 뒤였다.
그녀는 비명 같은 기세로 추격을 시작했다. 꿈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거칠고, 더 필사적인 발구름이었다. 흙먼지를 뚫고 나가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집념을 넘어선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라스트 100미터, 50미터. 그녀는 다시 한번 선두의 코밑까지 따라붙었다.
14만 관중의 함성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지만, 내 눈에는 전광판 옆에서 무정하게 흐르는 타이머 숫자만이 보였다.
거의 동시에 통과한 결승선. 그러나 사진 판독 끝에 올라온 결과는 잔인할 정도로 똑같았다.
[1착: 3번 모브][2착: 8번 (사토노 다이아몬드)][차이: 코(鼻)]
[기록: 2:24:00]
숫자가 전광판 위에서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과정은 달랐다. 사고의 형태도 미세하게 달랐다.
그런데 어떻게 결과는 단 0.01초의 오차도 없이 그 숫자에 수렴할 수 있단 말인가.
주변의 소음이 멀어졌다.
차가운 한기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차올랐다.
심장이 조여드는 고통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마치 깨진 거울처럼 조각나기 시작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은 확신으로 변해 나를 짓눌렀다.
시뮬레이터로 함부로 미래를 훔쳐보고,
그녀의 운명을 숫자로 재단하려 했던 나의 오만이 이 지옥 같은 굴레를 불러들인 것이 아닐까.
나의 불안이 현실을 오염시키고, 그녀를 영원한 2착의 궤적 속에 가둬버린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자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해진 결말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뿐이었다.
무력감과 죄책감이 해일처럼 밀려와 이성을 집어삼켰다.
나는 비틀거리다 그대로 정신의 끈을 놓치며, 다시 한번 끝을 알 수 없는 암흑 속으로 추락했다.
"..허..억...!"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대기실의 정적 속에서 지나치게 크게 울려 퍼졌다. 아스팔트 위로 고꾸라지던 감각은 온데간데없고, 손바닥에 닿는 것은 소파의 가죽 시트였다.
"트레이너 씨? 어디 안 좋으세요? 식은땀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벤치에 앉아 신발 끈을 고쳐 매던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까와 똑같은 모습, 똑같은 조명.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 때문이야... 내 오만이 모든 걸 망치고 있어."
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리 지를 기운조차 없었다.
그저 가슴 속을 짓누르는 둔탁한 죄책감이 나를 질식시킬 것 같았다.
시뮬레이터로 미래를 훔쳐보고, 그녀의 노력을 숫자로 재단하려 했던 그 금기. 그 대가가 지금 이 기괴한 반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트레이너 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다가와 내 곁에 앉았다. 서늘한 손이 내 손등 위로 겹쳐졌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그 기분 나쁜 게임으로 너의 결과를 미리 보려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너를 믿지 못해서, 데이터 따위에 의지해서 너를 이 굴레에 가둬버린 것 같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 목소리는 힘없이 젖어 있었다.
"정말 못 말리겠네요, 우리 트레이너 씨는."
그녀는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였다. 그녀는 내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마치 달래는 듯한 어조로 속삭였다.
"트레이너 씨는 그저 저랑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우리의 마지막을 늦추고 싶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답을 찾으려 했던 거잖아요? 저는 그 마음 다 이해해요. 그러니까 자신을 미워하지 마세요."
"하지만 결과가... 그 숫자가 바뀌지 않아."
"괜찮아요.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당신이 그토록 바랐던 승리를, 제가 꼭 현실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러니까 트레이너 씨는 평소처럼 절 믿고 기다려 주시기만 하면 돼요. 아셨죠?"
그녀는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눈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잠시 멈춰 섰다.
"다녀올게요, 트레이너 씨. 이번엔......"
이길 수 없는 레이스에 출전하며 다녀오겠다고 인사하는 그녀에게,
죄책감에 짓눌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엔 3코너에서 안쪽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바깥쪽으로 크게 돌아볼게요. 지난번처럼 진로가 막히면 안 되니까요."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난번이라니? 너... 방금 뭐라고......?"
내가 당혹감에 젖어 묻자, 그녀는 찰나의 순간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제 말은... 사츠키상 때 말이에요! 그때 안쪽 코스에서 좀 고전했으니까, 이번엔 조심하겠다는 뜻이었어요. 후훗,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 그래. 사츠키상 이야기였구나."
"네! 그럼 진짜 다녀올게요!"
홀로 남겨진 대기실 안에서 나는 멈춘 듯한 호흡을 내뱉었다.
사츠키상? 아니, 사츠키상에서 그녀의 진로가 막혔던 적은 없었다.
'설마...?'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일본 더비의 개막 팡파레 소리가 이제는 환희가 아닌, 거대한 거미줄이 조여드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우당탕—!
"각 우마무스메 깔끔한 스타트와 함께 일본 더비의 시작을 알립니다!"
세 번째 울려 퍼지는 게이트가 열리는 소리.
나는 이제 그 소리가 전력질주를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단단히 고정된 감옥의 문이 잠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대기실에서 말했던 대로 움직였다. 평소보다 이른 타이밍에 외곽으로 빠져나와 진로를 확보하려 애썼다.
마군에 휩쓸려 스퍼트가 늦어지는 변수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주행에서 느껴졌다.
'이번엔 달라. 이번엔 밖으로 나갔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광판 속 그녀의 위치를 쫓았다. 제3코너를 지나 4코너에 진입하는 순간, 그녀는 과감하게 바깥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 찰나, 마치 그녀의 움직임을 미리 읽고 있었다는 듯 외곽에 있던 주자들이 일제히 간격을 좁히며 벽을 형성했다.
분명 아까와는 다른 전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마군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 갇혀버렸다.
"안 돼... 나오라고! 거기서 나오란 말이야!"
내 비명 섞인 외침이 함성에 묻혀 사라졌다. 그녀는 진로를 찾기 위해 좌우로 몸을 비틀었지만, 앞서가는 우마무스메들의 등 뒤는 견고한 바리케이드처럼 그녀를 밀어냈다. 결국 그녀가 틈새를 찾아 뚫고 나왔을 때, 도쿄 레이스장의 직선 주로 위로 남은 거리는 이미 너무나 짧았다.그녀의 발구름은 처절했다. 이전 루프보다 더 거친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치 자신의 다리가 부서져도 좋다는 듯 앞을 향해 튀어 나갔다.
하지만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전광판의 숫자는 변함없이 잔인했다.
[1착: 3번 모브][2착: 8번 (사토노 다이아몬드)][차이: 코(鼻)]
그리고, 내 영혼에 낙인을 찍는 듯한 기록.
[기록: 2:24:00]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과정은 분명히 달랐다.
전략도, 위치 선정도, 사고의 형태도 전부 변했다.
하지만 모든 변수는 기묘하게 뒤틀려 결국 '2:24:00'이라는 단 하나의 종착역을 향해 모여들었다.
이것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었다.이 세계 자체가 그녀의 1착을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범한 '금기'가 그녀를 이 영원한 2착의 궤적에 박제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전신을 훑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망쳤어. 너의 승리를, 내가......"
죄책감이 목을 조여왔다. 그녀의 노력을 숫자로 치환하고, 미래를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의 연극으로 만들어버린 나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관중석의 환호는 이제 나를 비웃는 조소로 들려왔고, 도쿄 레이스장의 풍경은 마치 타버린 필름처럼 힘없이 바스러졌다.
나는 그 비참함 속에서, 다시 한번 의식의 끈을 놓고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
"트레이너 씨? 정신이 드세요?"
네 번째.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 지옥 같은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어김없이 12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내 앞에는 다시 한번 신발 끈을 묶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루프가 반복될수록, 그녀의 미소는 점점 더 깊고 기이한 광기를 띠는 것 같았다.
"아...... 아아......"
이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것은 비릿한 절망의 맛뿐이었다.
나는 소파 아래로 흘러내리듯 주저앉아, 차가운 대기실 바닥만을. 바라봤다.
네 번째. 지옥 같은 12시 25분이 다시 찾아왔다.
하얀 천장, 공기청정기의 일정한 소음, 그리고 어김없이 들려오는 신발 끈 묶는 소리.
모든 것이 정지된 사진처럼 똑같았지만, 오직 내 영혼만이 누더기처럼 찢겨 나가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망쳤어... 너의 미래를, 너의 꿈을... 내가 숫자로 다 망쳐버렸어......"
내가 그 금기된 시뮬레이션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너를 그저 한 명의 우마무스메로 믿어주었더라면.
나의 불신과 나약함이 불러온 이 루프라는 저주가, 너를 영원히 2:24:00이라는 족쇄에 채워버린 것이다.
"트레이너 씨."
그녀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나는 마치 죄인처럼 몸을 떨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싸 쥐고,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올려 자신의 품에 안았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왜 자꾸 자신을 괴롭히나요, 나의 트레이너 씨."
그녀의 승부복에서 나는 은은한 은방울꽃 향기와 뜨거운 체온이 나를 덮쳤다.
그녀는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게 하고는, 마치 겁먹은 아이를 달래듯 아주 천천히, 리듬감 있게 내 등을 쓸어내렸다.
"당신은 그저 나를 사랑한 것뿐이잖아요. 나랑 헤어지기 싫어서, 우리가 가장 빛나는 순간에 영원히 멈추고 싶어서...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답'을 찾으려 했던 거잖아요? 전 다 알고 있어요."
"아니야... 나는 그저 네가 우승하기를 바라서... 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이번에도 넌 지게 될 거야.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내 목소리는 힘없이 바스러졌다. 승리에 대한 기대 같은 건 이미 타버린 재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번에도 그녀는 2분 24초 00으로 들어올 것이고, 나는 다시 이 지옥 같은 소파 위에서 눈을 뜰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벌처럼.
"쉿, 괜찮아요."
그녀가 내 입술 위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그녀의 품 안은 따뜻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나를 안고 있는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갈수록, 나는 그녀의 소유물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그 완벽한 기록, 완벽한 승리... 제가 가져올게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니까요."
그녀는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강제로 눈을 맞추게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고 어두웠으며, 그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소유욕과 애착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제가 이기면, 이제 더 이상 불안해할 필요 없겠죠? 이제 우리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거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대답할 의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내 넥타이를 마지막으로 반듯하게 고쳐 매준 뒤,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당신의, 당신만을 위한 레이스를 하고 올게요."
철컥
문이 닫혔다.
나는 홀로 남겨진 대기실에서 텅 빈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봤다. 팡파레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번에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다시 찾아올 암흑과, 다시 들려올 "정신이 드세요?"라는 목소리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나간 자리에는 오직 차가운 정적과, 지독하리만큼 달콤한 은방울꽃 향기만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우당탕ㅡ!
"각 우마무스메 깔끔한 스타트와 함께 일본 더비의 시작을 알립니다!"
네 번째 울려 퍼진 게이트가 열리는 소리.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그녀의 움직임은 더 이상 '선입'이라는 틀에 갇혀 있지 않았다. 마군을 헤집고 나가는 주행은 눈이 부실 정도로 경쾌했고, 마치 바람의 흐름을 미리 알고 있는 듯한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직선 주로에 들어섰다.
그녀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전광판에 선명하게 새겨진 기록은
[1착: 8번 사토노 다이아몬드] 2:23:80.
저주받은 2분 24초의 벽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트레이너 씨! 보셨어요? 제가... 제가 해냈어요!"
환호하는 14만 관중 사이로 그녀가 나를 향해 달려와 품에 안겼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숨결은 뜨거웠고, 옷자락을 꽉 쥔 손은 승리의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마주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루프가 끝났다. 기적은 일어났고, 우리는 정해진 운명을 이겨낸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바랐던, 우리 둘만의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돌아온 대기실에는 오직 우리 둘만의 고요하고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때, 대기실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멀리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아, 사토노 가문 분들이 오셨나 봐요! 트레이너 씨, 잠시만요. 금방 인사만 드리고 올게요."
그녀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문밖으로 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축하의 목소리와 그녀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홀로 남겨진 대기실은 기이할 정도로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벗어놓은 승부복과 가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승... 정말 한 거구나.'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밀려왔다.
시뮬레이터에서 항상 네 번째 도전에서 보았던 그 기록, 2:23:80. 그리고 네 번째 재도전 끝에 얻어낸 결과.
모든 것이 너무나도 정교하게 짜인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나는 무심결에 그녀의 가방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서둘러 나가며 건드렸는지, 가방 틈새에서 작은 금속 물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어...?"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낡은 회중시계 모양의 장식품.
하지만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었다.
시계의 투명한 유리면 위에는 누군가 날카로운 송곳으로 정교하게 새겨놓은 듯한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4」
심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내가 시뮬레이터 속에서, 세 번의 실패 끝에 단 한 번의 승리를 얻기 위해 사용했던 '네 번째 재도전'. 내가 루프라고 믿으며 발버둥 쳤던 그 모든 처절한 시간들조차,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고 관리되던 '횟수'에 불과했던 것일까.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가족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그녀가 문가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해맑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시계를 가만히 응시했다.
"찾아버리셨네요, 그거."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내 손에서 시계를 부드럽게 뺏어갔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우승의 기쁨 대신, 소름 끼칠 정도로 깊고 진득한 애착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토노 가문의 어른들은 참 까다로우세요. 당신이 제 트레이너로서 부족하다며, 이번 더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당장 교체하겠다고 하셨거든요. 당신을 제 곁에서 치워버리려 했어요."
그녀는 시계를 소중하게 가슴에 품으며, 넋이 나간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당신이 없는 미래 따위... 저에겐 아무 의미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조금 도와준 거예요. 아무도 우리 사이를 방해할 수 없도록, 가장 완벽한 승리의 순간에 우리를 박제해버린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그 내용은 잔인했다.
"이제 이 기록 안에서, 당신은 영원히 사토노 가문이 인정한 '최고의 트레이너'예요. 누구도 당신을 제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죠. 이 루프가 반복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이 행복한 대기실에 함께 있을 수 있어요."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나는 깨달았다.
이 세계의 플레이어는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
더 이상 트레이너 시뮬레이터는 내가 트레이너가 되는 시뮬레이션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녀가 나를 독점하기 위해 선택한 NPC에 불과했다.
"자, 이제 다음은 '국화상' 시뮬레이션을 시작해 볼까요? 가문의 어른들이 또 당신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제가 다시 한번 '1착'을 할 때까지, 몇 번이고 시간을 돌리면 되니까요."
딸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