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대사: 한국어
나 김말붕.
중앙 트레센의 트레이너로서 일한지도 어느덧 8년차를 맞이한
'베테랑 트레이너'
옆 나라 한국에서 고등학생때부터 트레이너 특성화 고등학교를 다니고,
졸업과 동시에 제주 트레센에서 경력을 쌓고, 일본 중앙 트레센에 입성.
6년 간 두 명의 담당 우마무스메 모두 G1 우승이라는 목표를 이루게 하여,
이제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훌륭한 트레이너'이다.
그리고, 오늘도 담당 우마무스메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트레이너 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나서,
트레이닝 시간까지 잠시 웹 서핑을 하면서 휴식 중이었다.
"오... 얘는 드디어 데뷔인건가? 저번에 스카우트 레이스 보니까 심상치않던데..."
"URA 트윙클 시리즈 대표자 키무라 사임? 이제 날씨 억까 터지면 누구 욕하냐..."
"라이스가 트레이닝때 쓰다 망가진 신발 삽니다? 미친놈아냐 이거..."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조차 레이스와 관련된 뉴스와 커뮤니티를 볼 정도로,
레이스에 진심인 남자 김 말 붕.
그러나 그런 그도 요즘 정신을 뺏기고 마는 것이 있었으니...
"점유율이 늘고~ 접속자가 늘어~"
"나는 쌀 다 팜~ 난 이미 쌀 다 팜~"
그건 바로 며칠전 알고리즘에 뜬 쇼츠에서 나온 노래다.
처음에는 뭔진 몰라도 춤 추는 것과 노래 내용이 웃겨 웃으면서 봤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후렴구를 부르곤 했다.
그렇게 흥얼거리며 마저 웹 서핑을 하고 있던 중,
3:00 PM 수영장에서 스태미나 훈련 확인 5분 뒤 다시 알림 |
트레이닝 시간에 맞춰둔 알림이 화면에 떴다.
"어라? 벌써 3시라고?"
그렇게 컴퓨터의 시계와 벽면의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담당 우마무스메가 오기는 커녕 연락 조차 없었다.
워낙 성실한 아이라 지각하는 일도 거의 없고, 사정이 생길 때는 항상 연락을 남기던 아이였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 라인을 남겨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린 지도 어느덧 1시간.
여전히 트레이너 실에 오기는 커녕 연락 조차 없는 상태였다.
"...앗, 설마 수영장에서 만나는 걸로 알고 있나?"
담당 우마무스메가 착각하고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
서둘러 노트북을 가지고 수영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하지만 수영장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네... 이런 애가 아닌데..."
혹시나 엇갈릴 수도 있으니 수영장으로 가는 중 담당에게 라인을 남겨봤지만,
아직 확인 조차 안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트레이닝을 멋대로 빠진 우마무스메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그전부터 트러블이 있었거나, 성격이 특이한 우마무스메라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담당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기에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보다 혼란스러운 건 주변의 시선이다.
아무리 일본 전국과 해외에서 여러 우마무스메와 트레이너가 오는 중앙 트레센이라고 해도.
외국에서 온 트레이너는 한창 사춘기의 우마무스메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인 만큼 호의적이었으며,
능력을 인정받은 이후에는 더더욱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선은 강한 경계심과 경멸마저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저 트레이너... 그런..."
"최악이야..."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우마무스메들은 마치 범죄자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담당 우마무스메와 친하게 지내던 우마무스메들도 있었다.
그녀들이랑은 안면이 있으니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혹시나 그녀들이라면 담당의 행방을 알지도 모른다.
"저...저기! 혹시..."
"자신의 담당 우마무스메에게 그런 비열한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도 말을 거시다니, 정말 최악이시군요."
"ㅁ...뭐?"
"오퍼레이션 Arrest, 대상을 체포 조치하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다음 레이스에서 승부를 기대하겠다며 승부욕을 불태우고,
부상으로 출주는 무산되었으나 담당을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의 정보를 공유해주던 그녀들은,
다른 우마무스메들보다도 더 나를 경멸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체포? 내가 뭘 잘못했다고?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하다.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잠깐, 뭔가 오해가..."
"문답무용!"
"커헉..!"
그러나 돌아온 것은 두 우마무스메의 강력한 발차기였다.
아무리 최소한의 힘조절을 했다고는 해도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우마무스메의 분노가 담긴 강력한 발차기를 맞은 나는,
천천히 의식이 흐려져갔다...
...
...
정신이 잃은 나는 이사장실에서 의자에 속박 당한채 눈을 떴다.
"...여기는...이사장실..?"
"실망입니다. 김말붕 트레이너."
차갑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따라간 시선 끝에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짓던 타즈나 씨가 있었다.
"타즈나 씨? 그게 대체 무슨..."
모두에게 친절한 타즈나 씨였지만, 외국에서 혼자 온 내가 신경 쓰였던 탓일까.
처음 트레센에 왔을 때부터 나를 유독 더 챙겨주던 타즈나 씨였다.
그런 내게 지금의 그녀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상심(傷心)... 외국에서 온 열정적이고 유능한 트레이너라고 생각했네만..."
아키카와 이사장... 내가 트레센의 트레이너가 되기 위해 전 직장에 이미 사표내고 편도로만 비행기를 끊었다는 말을 듣고,
감격하며 나를 믿고 채용한 것으로도 모자라, 학원 근처에 숙소를 구해준 은인.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들이 이렇게나 실망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수영장에서의 일도 그렇고 이들의 말도 그렇고,
분명 오해가 있다.
"이사장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제 얘기를..."
"격노(激怒)! 담당 우마무스메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도 모자라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서도 할 말이 있는가!"
담당 우마무스메에게 상처를 줬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트레이닝과 휴식을 위한 외출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상처라니.
그리고 범죄?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찔리는 것조차 없다.
애초에 요즘 한 것이라곤 트레이너 업무나 레이스 관전밖에 없다고!
"오해입니다! 제발 삼자대면의 기회라도 주십시오!"
"허망(虛妄), 자네의 담당이 이미 직접 말했다만, 그렇게나 원하면 마지막 기회는 주도록 하겠네. 타즈나! 그녀를 불러오도록!"
그렇게 타즈나 씨가 잠시 나간 사이, 온갖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뭔가 실수한 게 있지는 않았을까.
만약 정말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범죄라고 얘기한 거면 감옥 가는 건가?
그렇게 온갖 생각을 하던 중, 타즈나 씨가 내 담당 우마무스메를 데리고 들어왔다.
평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미소와 귀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봐주던 우마무스메는 온데 간데 없고,
슬픔과 분노, 그리고 경멸만이 느껴지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아니 트레이너 씨."
"라이스..."
평소에 나를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던 라이스가,
트레이너 씨라는 차가운 말투로 부르니 왠지 가슴이 아파왔다.
할 말이 많았지만 무언가에 북받친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예(猶豫), 지금부터 15분만 대화할 시간을 주겠네, 할 말이 있다면 서둘러 말하도록!"
그러나 여유를 부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15분 동안 서둘러 오해를 풀지 못하면, 내 트레이너 인생은 물론, 인간 김말붕의 인생도 끝장이다.
"라이스! 무슨 오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들려줘! 뭣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뻔뻔해..! 라이스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야?!"
오해라는 말을 듣고 침착해지긴 커녕,
오히려 분노에 가득찬 표정으로 노려보는 라이스는 날 향해 소리질렀다.
이러다간 15분이 되기도 전에 끝내버릴 것 같으니, 서둘러서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부탁이야, 제발 뭐가 널 그렇게 생각하게 했는지 알려줘."
조금이나마 진심이 닿았을까?
제발... 얘기만이라도 해주길...
하지만 오히려 더 실망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듯, 라이스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째서...끝까지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 거야..? 라이스와 함께한 2년은 고작 그정도였던 거야..? 라이스는 진심으로 오라버니와 함께했던 시간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오라버니는 라이스를 그저 돈으로만 보고 있었던 거야..?"
"돈..? 그게 무..."
"오라버니가 라이스를 팔아버릴 거라고 했잖아!"
"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한국어가 나와버렸다.
담당 우마무스메를 판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양측의 합의 하에 담당 계약 해지 이후 새 트레이너가 붙는 경우는 있지만,
담당 우마무스메를 돈을 받아 파는 경우는 없다. 아니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있다면 범죄까진 아니지만 트레센 교칙과 URA 트레이너 규범 위반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브로커 등에게 파는 행위는? 당연히 없다. 아니 애초에 범죄잖아!
어?
"저... 라이스? 잠깐만 진정하고 얘기 들어줄래?"
"라이스는 더 이상 할 얘기 없..."
라이스의 말을 끊는 건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확실히 말할 게! 난 절대 널 팔아넘긴다거나 그럴 생각이 없어!그런 제의도 없었고! 만약 있었더라도 절대 널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거짓말..."
아 왜 또 뭐가.
왜 전해지질 않는 건데.
"라이스 다 들었단말야! 오라버니가 인터넷으로 라이스를 산다는 글을 읽던 것도!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는 것까지도!"
아ㅡ 진짜 미치겠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콧노래를 부르지도 않는데 뭘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애초에 노래라곤 위닝 라이브 아니면 안듣는데, 그나마도 쇼츠에 나오는...
설마.
" 라이스 설마 그 노래가 점유율이 늘고~ 접속자가 늘어~ 나는 쌀 다 팜~ 난 이미 쌀 다 팜~ 이 노래야..?"
"이제서야 솔직해지는 거야..? 한국어로 말하면 라이스가 모를 줄 알았어..? 라이스를 다 팔았다고 그랬잖아!"
"하..."
정말 오해가 맞았다는 안도감과 이게 이렇게 된 거였나 싶은 허무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타즈나 씨, 죄송하지만 잠시 휴대폰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1분이면 됩니다."
뭔가 분위기가 변했음을 느껴서였을까, 다행히도 타즈나 씨에게 휴대폰을 빌릴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쌀사 시간 없잖아~ 오를 거야 이미 알고 있잖아~ 난 다 털었어 이미~ 설거지라고~ 소리쳐~도~"
갑자기 내가 영상을 재생하자, 다들 '이 미친 히토미미가 뭔 짓을 하는거지? 진짜 정신이 나갔나?'싶은 얼굴을 했지만,
나는 오히려 후렴부가 되기 직전 소리를 더 키웠다.
"점유율이 늘고~ 접속자가 늘어~ 나는 쌀 다 팜~ 난 이미 쌀 다 팜~"
"에..?"
"당혹(當惑)!"
"설마..?"
"어... 이제 제 얘기 좀 들어주시렵니까..?
그 이후 다행히도 오해는 쉽게 풀렸다.
내가 읽던 글의 제목인 "라이스가 트레이닝때 쓰다 망가진 신발 산다'를 읽던 것을,
주변 소리탓에 '라이스....산다' 로 중간을 빼먹고 들어버린 라이스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문 앞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놀래키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던 라이스는,
내가 노래를 흥얼거리던 것을 듣고, 번역기를 통해 뜻을 찾아 봤다고 한다.
그러나 번역기는 '쌀 다 팜'을 ライスを売る(쌀을 팔다)로 번역해버렸다.
그걸 보고 충격받아 도망쳐버린 라이스를 맥퀸과 부르봉이 발견했다.
그리고 셋의 대화 내용을 들어버린 주변 우마무스메들로 인해 소문이 퍼져 결국 이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해명을 한 직후 바로 학원 근처의 병원에 입원했다.
갈비뼈가 6개 부러지고 4개가 더 금이 갔다고 한다.
아키카와 이사장과 타즈나 씨는 사과와 함께 해명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으며,
맥퀸과 부르봉도 다음날 병원에 찾아와서 정말 죄송하다며 사과하러 왔다.
오해였다고는 하지만, 라이스의 일에 그렇게나 분노해준 것이 조금은 감동이기도하고,
"사과로 무마할 셈이냐"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금액의 치료비였기에 용서하기로 했다.
라이스는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계속 찾아왔으며, '죄송합니다...'와 '라이스는 못된 아이야'라는 말을 반복하며 침울해져 있었다.
다행히도 퇴원하면 같이 온천이라도 가자고 하니 조금씩 기력을 찾았다.
여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