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
□□□
수십 분은 지나서야 겨우 몸을 가누며 일어날 수 있었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고, 울화통까지 치밀어 올라 길바닥의 깡통을 힘껏 발로 까버렸다.
깡그랑-
"... 빌어쳐먹을!"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온몸이 존나 덥고 쑤시는 건 둘째 쳐도 좋아.
그런데... 여자한테 졌다고? 그것도 발차기 한 방에 개쳐발렸다고?
말도 안 되는 거잖아, 이거는. 내 자존심이 걸레쪼가리가 되었단 말이다.
뭐,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한다고? 좆까, 내 알바 아니잖아.
빠드득...
나 참, 이젠 이까지 갈릴 정도로 열이 뻗히고 있구만... 꼴사납게 되긴 했지만, 이럴 수록 좀 냉정해져야 한다.
일단 대가리를 좀 식혀보자고.
...
...
하아... 씨발. 하긴, 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가리가 잘도 굴러 갈 리가.
아무튼. 원래대로라면 그 씹덕새끼한테서 돈을 뜯어내 생활비를 챙길 수 있었겠지만...
설마 대갈통에 형광등을 달고 있는 이상한 여자가 갑자기 끼어들 줄이야... 생긴 게 어째 이 동네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외국놈인가?
아무튼 그 오타쿠 자식이 어떻게 존나 센 누님을 데리고 온 건진 모르겠지만 그딴 건 상관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망할 찐따에게서 돈을 못 뜯어내면 안 된다고.
안 그러면... 울 엄마가 또 그 미친 인간들 때문에... 으휴, 머리야...
그 양반들 생각만 하면 늘 머리가 아프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대로라면 진짜 위험해진다고.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야 해...
그래, 얼굴을 봐서라도 싸우지는 않고 싶었는데... 어짜피 마스크도 쓰고 있었겠다. 마기꾼이겠지 뭐.
물론 호락호락하진 않을거다.
뭔 사람 하나를 한 손으로 드냐고?
그 정도면 여자는 커녕 사람 하나에게서 나올 힘을 한참 넘어섰지. 그건 그냥 곰이라고.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그 여자가 아무리 잘나고, 암만 날고 기어봤자 이거는 못 당해낼걸?
하지만, 그 방법이란 게 하필이면...
...
하아... 그래, 받아들이자고. 기분은 더럽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다구리 뿐이다.
'야,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다니면 더 쎄지는 거라니깐!'
그 재수없는 잡배들이 꺼낸 얘기가 떠올랐다.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팩트야.
내 먹고사는 문제가 걸렸으니 자존심은 개나 줘 버려야지.
법에는 그 뭐시냐... 생존권이라는 것도 있다며? 사람새끼로 태어난 이상, 먹고 살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겠냐고...
그니까 애시당초... 진작에 순순히 돈을 쳐 안 낸 그 음침한 새끼가 잘못한 거야... 그렇지?
저벅..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나는 녀석들의 소굴로 향했다.
몇 분 쯤 걸어가자 눈에 들어온 컨테이너 앞에 서서 나는 매섭게 그 자식들을 불렀다.
"야 이 새끼들아."
"음?"
내 부름에, 녀석들이 어슬렁 어슬렁 기어나와 나를 훑어보더니...
"뭐야? 이제보니까 너 아까 그 썅놈이잖아!"
"우리 아지트에는 왜 쳐 기어들어왔냐? 좀 전에는 개좆같이 굴지 말고 꺼지라며."
예상대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맞아주었다.
....
젠장맞을...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구먼.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나는 내 싸구려 휴대전화에 담긴 사진 하나를 스윽 내밀어보였다.
녀석들은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갑자기 이딴 애새끼 짤은 왜 보여주는거야?"
녀석들의 볼멘소리에 내가 대답했다.
"늬들이 바라던 대로 손 잡아 줄 테니까, 이 개자식 감싸주는 년 좀 같이 털어달라고."
.
.
.
◇◇◇
다시 집에 돌아오니 벌써 시계는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내 주황빛 머리에서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무래도 여름인 이상, 정오에 서서히 가까워지니 아침에도 땀이 많이 나는 것 같다. 그래서 선풍기를 틀고 사오리와 함께 더위를 식혔다.
"덥죠? 바람 좀 맞으면서 더위 좀 식히셔요."
"선풍기로군... 고맙다."
그렇게 같이 바람을 쐬다가, 사오리가 이렇게 물었다.
"근데 말이지, 혹시 이 곳의 사람들은... 선생과 똑같이 헤일로를 볼 수 있는건가?"
아아, 그러고보니까 게임 속에서는 선생처럼 키보토스 바깥 사람이라면, 헤일로의 존재 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겼는지 눈으로 직접 볼 수도 있었지.
설마 현실에서도 똑같나?
"어... 저는 똑바로 보이는데... 갑자기 왜요?"
"아까 널 괴롭히던 그 고동색 머리의 퉁퉁한 녀석이... 분명 날 더러 '머리에 고리 달린' 사람이라 말했었다. 그리고 실은, 널 뒤쫓아 갈 때에도 두 세 명 쯤 되는 사람들이 내 머리를 힐끗힐끗 쳐다봤었다."
뭐?
대체 누가?
분명 집에 들어올 땐 아무도 우리에게 크게 신경 안 썼는데...
"아... 그렇구나... 어, 근데 잠시만요. 하지만 저희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아무도 누나 머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는데요?"
"그런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만... 모두가 헤일로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인가."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그래. 일단 정확하진 않지만... 이곳의 사람이 전부 다 내 머리의 헤일로를 볼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 누가 헤일로를 볼 수 있고 없는지에 대한 기준이라도 알면 좋을텐데..."
"어... 근데, 그건 갑자기 왜요?"
"... 아무래도 키보토스에선 그럴 걱정이 없지만, 여기선 헤일로가 보이니까 너무 튀어보일 것 같아서 말이다. 너에게 일일히 말해 줄 순 없지만 내가 좀 숨어다녀야 하는 신세여서 말이지..."
아, 맞다. 사오리는 키보토스에선 지명 수배중이었지.
물론 그걸 감안하면 사오리가 눈에 안 띄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어... 근데 지금까지... 헤일로를 눈치챈 사람은 저랑 그 녀석 뿐이었는데 그냥 평범하게 돌아다니면 안 돼요? 파업이 끝날 때까지 외출을 아예 안 할 수도 없잖아요."
내 말에 사오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정 외출할거라면 밤이나 새벽 시간대를 노리는 방향이 차라리 나아 보인다."
"... 그치만, 누나가 숨어서 다니는 신세라곤 해도 어짜피 여기서는 누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거에요. 무엇보다... 여기는 그 키보토스에서 온 사람이 거의 없어서 헤일로를 봐도 '이상한 엑세서리'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걸요...?"
"그런가..."
"네. 뭣보다 누나가 아무리 저랑 삼촌보다 튼튼하다곤 해도... 밤에 돌아다니시는 건 위험해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여기 치안 상태가 진짜 막장이거든요."
"... 후우, 정 그렇다면야. 알겠다."
사오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그런데, 혹시 내가 뭔가 도울 것은 없는가?"
"네? 도울 것이라뇨?"
사오리의 뜬금없어보이는 물음에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솔직히 남의 집에서 얹혀 사는 처지인데, 언제까지 도움만 받을 순 없지 않은가."
"아, 아니에요...! 부담... 이라뇨...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뭘."
"그렇다곤 하지만, 역시나 계속 내가 여기서 네 도움만 받는다면 네 입장에서도 뭔가 곤란한 일이 생길 거다. 무엇보다 선생에게 도움 받은 것도 있으니... 게다가 그 조카인 너에게까지 도움을 받은 이상, 네게 꼭 도움되는 일을 해 주고 싶다."
이제 사오리는 내가 선생의 조카라고 완전히 확신하는 걸까.
... 그래, 사오리가 보답해주기를 꼭 바란다면야.
"그으... 그러면... 저기 바깥에 보이세요?"
내가 배란다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자, 사오리의 시선이 거기로 향했다.
"저기 잘 보시면 빨래건조대랑 세탁기가 있거든요. 어... 그러니까 세탁기 안에 빨래가 좀 들어 있을텐데 그것만 좀 꺼내서 건조대에 널어주세요."
"아... 으음, 알겠다."
"네? 어어... 혹시 뭐 불편한 거라도 있어요?"
나의 물음에 사오리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 실은, 세탁물 따위... 널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른다."
"어... 빨래를 널어본 적이 없다고요?"
"어찌보면 당연하다. 힘들게 사는 마당에 옷이 젖으면 그냥 마를 때 까지 젖은 대로 입거나, 바닥에 걸레처럼 늘어놓고 말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으니...."
"아아... 그렇군요."
"그래. 그렇지만... 어..."
갑자기 사오리가 당황하더니 이내 나에게 사과했다.
"으음, 실례를 범했군... 나도 모르게 괜히 내 사정을 함부로 말했으니... 분명 이런 이야기 들어봤자 불편하기만 할 텐데..."
"어... 사과하실 것 까진 없어요. 잘 모르신다면, 제가... 좀 알려 드릴게요..."
정말이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사오리도 참 힘들게 살았구나.
아무리 게임속 이야기래도 그렇지, 베아트리체 녀석은 최소한 양심이 있으면 저런 기초적인 것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오히려 그러니까 베줌마 다운걸까...
에이 모르겠다. 사오리처럼 착하고 예쁜 애라면 몰라도, 2D 속의 정신 나간 여자 따위 내 알바야.
중요한 건 내가 사오리한테 해 줘야 할 일이지.
.
.
.
그렇게 사오리에게 빨래 너는 법을 알려준지 10분도 안 지났을 때였다.
"오... 이제 좀 잘 하시는 것 같아요."
"아니다. 아직 부족해, 좀 더 완벽하게 건조대에 올리도록 해보겠다."
"하하... 그렇게 너무 열내서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처음에는 빨래를 건조대에 올릴 때 마다 옷이 미끄러져 떨어질 정도로 미숙했는데, 이렇게 금방 능숙해질지는 몰랐다.
아직 어린 내 눈으로 보아도, 사오리의 학습 능력은 대단했다. 괜히 스쿼드 리더가 아니였구나...
이렇게 생각하던 나는 사오리의 이마에도 땀이 줄줄 나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빨래를 다 널게 되면 에어컨 바람부터 쐬게 해 줘야겠다. 블아 관련 야한 잡지 살 돈만 줄이면 뭐 전기세 부담도 없을테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셔츠든, 바지든. 사오리에게 빨래를 넘겨 줄 때마다 손이 몇 번 닿을 때마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그치만 사오리에게 느끼는 설렘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어...
원래도 얘가 최애 학생이긴 했고, 방안에 사오리 떡인지도 잔뜩 있는데...
그런 사오리를 실물로 보고 있어서 그런가...
"... 이봐. 혹시 어디가 아픈건가? 얼굴이 빨갛다."
"아... 아뇨! 그냥 더워서 그래요, 더워서."
이럴 줄 알았어, 결국 눈치챘구나.
괜한 연심을 숨기고 싶어 나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했다.
"그런가... 그럼 이제부턴 내가 혼자서 하겠다. 생각해보니 얹혀 사는 입장에서 집주인이랑 같이 일을 하는 것도 좀 실례지."
"으, 실례는 아니에요. 그냥 가르쳐 드리려고 한 것 뿐이니까. 근데, 누나는 안 더워요?"
"아직 문제될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 마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오리의 이마에도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역시 장마철이라서 더위가 누그러졌다곤 해도, 긴팔 옷을 입히는 게 아니었어. 입힐 만한 게 저것밖에는 없었다곤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무리하지는 말고, 힘들면 쉬세요. 그리고 누나 옷도 좀 이따가 빨래 돌릴게요."
"그래... 잠깐, 방금 내 옷을 세탁해준다 그랬었나? 집주인에게 이런 부탁하긴 미안하지만... 혹시 세탁하기 전에 주머니를 좀 확인해줬으면 한다. 아마 그 안에 전자기기나 다른 중요한 게 있을거다."
"아아, 알겠어요."
나는 그렇게 빗물에 푹 젖은 사오리의 탱크탑을 챙기고, 재킷과 면바지의 주머니를 뒤졌다.
면바지에서는 휴대전화와 여러 쪽지, 그리고 재킷 주머니 안에는 온갖 폭발물과 총기...
잠깐, 폭발물이랑 총기?
'힉...!'
큰일 날 뻔했다.
하마터면 떨어트려서 크게 다칠 뻔했어.
"이, 이봐. 잠깐만!"
그 때, 사오리가 창문을 열고 다급하게 거실로 들어와 날 불렀다.
"어? 아아, 네! 어쩐 일이세요?"
"허억... 그러니까... 혹시, 그 안에, 슈류탄이나 총이 있었나?"
"어... 네. 위험해 보여서... 일단 따로 빼놓긴 했어요."
"으윽... 그, 미안하게 됐다. 진작에 내가 위험한 물건을 가진 걸 알려줬어야 했는데, 정말로 큰일 날 뻔했군..."
사오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아무래도 선생의 가족인 날 위험에 빠트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런 사오리에게 가까이 가서 말했다.
"괘... 괜찮아요. 안 다쳤잖아요."
"아냐...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책임이었어..."
사오리는 이렇게 말하며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도 계속 주눅들게 할 순 없지.
"이젠 괜찮아요... 어쩌면 조심하지 않은 제 책임도 있겠죠. 우선 빨래부터 계속 널어주세요. 다 널어야지 누나 옷도 빨 수 있으니까요."
"... 알겠다."
드르륵-
짧게 대답한 사오리는 다시 배란다로 향했다.
머리에 조금 흐른 식은땀을 닦으며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온갖 화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뭐, 키보토스에선 총 안 들고 다니는 게 알몸으로 다니는 것 보다 더 이상한 짓이랬었지?
하지만... 여기에서까지 총기를 들고 다니면 오히려 오해를 사거나 위험해질 게 뻔하다.
사오리한테 이야기해서 키보토스로 돌아가기 전까진 어딘가에 잘 정리해야겠어. 물론 애초에 돌아 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사오리의 젖은 옷들을 빨래바구니에 넣기 위해 다시 배란다로 향했다.
그때, 사오리가 날 불렀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네?"
그러면서 사오리는 어느 뺄랫감 하나를 펼쳐 내게 보여줬다.
"이건... 어떻게 건조대에 올리면 되는 건가?"
근데 그 빨랫감이라는 것이...
"어..."
다름아닌, 내 팬티였다.
자그마한 곰 무늬가 하나 그려진 하늘색의 내 팬티였다!
"으어..........."
눈에 초점이 흐려지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얼굴이 말도 안되게 화끈거리며 토미토같은 빛깔로 변했다.
그러고 난 다음 내가 실성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이봐?"
사오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그걸로 바람빠진 풍선마냥 맥아리없이 흐물거리며 주저앉았다.
"이봐... 정신 차려!"
.
.
.
◆◆◆
벌컥벌컥-
"아..."
내가 냉수를 떠다주자 마자, 거실에 앉아 있던 녀석은 그걸 순식간에 들이키고 정신을 차렸다.
"윽,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그니까, 너무 창피했거든요."
녀석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말하길레,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아니다. 일단 아픈 건 아니어서 다행이군. 일단 빨래는 전부 건조대에 올렸다."
"어어... 그, 제 속옷도요?"
내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창가 방향으로 녀석이 눈을 돌렸다.
찬찬히 건조대에 널린 세탁물들을 바라보던 녀석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잘 널어놓으셨내요. 팬티는 안 가르쳤던 것 같은데..."
"그냥 네가 알려 준 대로 따른 것 뿐이다."
"에헤헤... 누나가 잘 이해한 덕분인걸요."
"....."
이번에는 반대로 내 낯짝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칭찬은 익숙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선생한테도 칭찬 받을 때마다 이러긴 했는데...
쪼로록-
그때, 어디선가 꼬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내 배가 굶주렸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아... 이런."
내가 말하자, 녀석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배... 고프신 거죠? 어짜피 슬슬 점심 시간 가까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슬슬 점심밥 준비할건데 특별히 드시고 싶으신 거 있어요?"
"없다. 뭐든지 줘도 돼. 집에 남는 음식이라도 좋으니..."
"어... 그래도 어떻게 집에 온 손님께 그렇게... 그냥 원하시는 거 있으면 해드리거나 배달시켜드릴게요."
"아냐, 배달이라면 괜찮다. 남의 집에 얹혀 사는데 비싼 것 까지 원하면 민폐지 않은가."
"... 그렇다면,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으음..."
정말이지, 그냥 아무거나 내어줘도 상관 없다니깐...
상한 걸 줘도 감사해야 할 판인데, 너무 이렇게 잘 대해 줘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럼... 계란 볶음밥으로 해줄 수 있나? 아침 때처럼 그... 선생이 해주던 거랑 비슷하게..."
마지못해 내가 대답하자, 녀석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 바로 할게요. 그동안 잠시 쉬고 계세요."
그렇게 말한 녀석이 부엌으로 걸어가나 싶더니, 잠깐 멈칫 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거실의 구석으로 가 뭔가를 집어들더니, 갑자기 내 옆에서
삑-
하는 소리가 울린 게 아닌가.
휘이이이잉-
곧이어 옆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흰색 상자에서 냉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건...?"
내 질문에 녀석이 다시 부엌으로 향하며 말했다.
"어, 에어컨 틀어드린 거에요. 빨래 다 널어놓고 보니까, 선풍기만으론 땀이 안 식으시길레..."
에어컨이라...
편리하다곤 하지만, 저건 몇 번을 봐도 늘 적응이 안 된다.
그리고 분명 샬레에 있었던 것은 저렇게 크지 않고 벽에 달려 있었는데...
아니 잠깐만, 그게 문제가 아냐.
"어후~ 요새 더워서 그런지 냉방비가 많이 나가더라고."
그래, 분명 몇 주 전에 선생조차 이렇게 말했잖아.
선생도 성가시게 여기는 문제인데, 저런 어린 녀석에게는 큰 부담일 게 뻔하다.
"저기... 이봐. 이런 거 함부로 틀어도 괜찮은가?"
"네?"
"그러니까... 저건 전기비를 많이 잡아먹는다고 들었다. 잠깐 얹혀갈 손님한테까지... 이러는 건 아깝지 않나...?"
"아, 아녜요. 솔직히 저도 더워서 틀은 거기도 하고... 그... 니까, 에어컨 비용. 요새 좀 많이... 깎아 줘요."
"그런가..."
전기세 할인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지만... 뭐, 저 녀석도 시원하기를 원해서 틀은 거라면 별 문제 없겠지.
"아, 그리고 요리하는데 시간 좀 걸리니까... 그동안 심심하면, 저기 책꽂이에 꽃힌 책이라도 보고 계셔도 돼요."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책은, 생각보다 중요할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아야지 키보토스로 다시 돌아갈 항공편 같은 것도 알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지역에 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사실, 녀석을 미행하던 와중에 이 도시가 키보토스와는 너무 다르게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키보토스에서는 단 한 번도 찾기 힘든 평범한 남자들이 여기선 잔뜩이었던 것 부터 이미 믿겨지지가 않았는데, 헤일로를 단 사람도, 수인이나 로봇도, 총을 지닌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외국에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당분간 지내려면 최대한 적응도 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이 도시에 대한 정보도 찾아봐야할 것 같다.
그렇게 책꽂이를 향해 다가가니, 나름 깨끗한 책들이 많았다. 전부 새로 사서 그런지, 아니면 들여 놓고 잘 안 읽은 것들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만...
스윽...
나는 책꽂이에서, 좀 읽은 티가 나 보이는 어느 책 하나를 뽑아냈다..
책 이름이, 그러니까... '데...ㅁ...'
음... 영어로 제목이 적혀 있어서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군.
결국 나는 그 희한한 책을 집어넣은 뒤 다른 책을 찾아보려 했지만, 도중에 녀석이 나를 불렀다.
"그... 누나, 요리 다 됐는데 와서 드셔요."
"... 알았다. 지금 가지."
마침 밥도 다 차려진 것 같고... 시간도 정오가 되었으니,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
아무래도 선생의 고향인 이 동네에 대해선 녀석에게 물어봐야겠어.
.
.
.
녀석이 내어 준 끼니를 먹고, 나는 감사를 표했다.
"... 정말 잘 먹었다."
"헤헤... 저야말로, 잘 드셔 줘서 고맙죠."
무심하게 예의상 던진 말이었을 뿐인데, 녀석은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익숙해졌는지 말을 더듬는 건 줄었지만, 그래도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일단 식사도 끝났으니만큼, 나는 녀석에게 본격적으로 이 도시에 대해서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지역은 내가 살던 키보토스랑은 굉장히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좀 자연스럽게 지내려면 좀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아서 말이지."
"아아... 그렇겠네요. 여긴 누나 입장에선 외국이라고 봐야 하니까요."
"그렇다. 물론 키보토스 바깥에 대해선 몇 번 선생을 통해 들은 적이 있어. 키보토스와 다르게 남녀 비율이 균등하다거나, 총기를 함부로 지니고 다니면 안된다는 이야기 정도 뿐이지만..."
"그렇군요... 그 정도만 해도 많이 알고 있으신 거나 다름없지만..."
"그런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 해 줄 수 있겠는가? 이를 테면... 이 도시와 키보토스 사이의 거리 같은 것 말이다."
일단 가장 급한 것부터 물어봤지만, 녀석의 말문이 갑자기 막혀 버렸다.
"어....."
"... 이봐?"
"아... 죄송해요. 그... 어... 사실 키보토스는 삼촌이 출장 간 도시 정도로만 알고 있지 정확히 뭐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잘 모르거든요. 대충... 으... 비행기 타고... 가야한다는 것 정도밖엔..."
녀석은 다시 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겨우 떨면서 말하는 게 멈췄다 생각했더니만, 갑자기 또 저러는 것 같다.
"후... 일단 알겠다. 최소한 어느 편을 타고 가야하는지 정도만 알면 좋겠군..."
"... 근데 누나, 아까 말했던 것처럼 지금 공항에서는 다같이 파업하고 있고... 비행기 타고 가실 돈은 있어요?"
돈이라... 솔직히 말하면 밀입국이 더 낫긴 하다. 몰래 화물칸에 숨어 들어가는 건 여러 번 해봤으니 말이다.
물론 그걸 대놓고 이 녀석 앞에서 말하면 아무래도 선생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있다. 겉옷 안에 지갑이 있을 텐데..."
잠깐, 그러고보니 내가 겉옷에서 지갑을 빼 놓긴 했었나?
그리고 내 겉옷은 어디 간 거지?
"... 이봐, 아까 내 겉옷을 정리해 달라고 했는데 말이지... 어디에 두었다고 했었나?"
"아... 그거라면, 흙투성이가 되버려서 누나가 첨에 입었던 옷이랑 같이 세탁기에..."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잽싸게 배란다로 향해 세탁기 문을 열었다.
"이런..."
이미 내 겉옷은 젖을 대로 젖은 상태였다.
그래도 아직 멀쩡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 주머니에서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봤지만, 결국 나오는 건 망가진 것들 뿐이었다.
들어있던 지폐가 다 젖고 찢어져버린 지갑이며, 세젯물을 먹고 고장난 소형 권총에 날이 무뎌져 버린 컴벳 나이프까지...
"하아아..."
망가진 물건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이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충 상황을 눈치 챈 녀석이 큰 죄라도 지은 것 처럼 쭈뼛거리다가 울상을 지으며 사과했다.
"어... 죄송해요... 자꾸 사과하게 되는 것 같지만... 으..."
"으흠, 흠..."
나는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추스렸다.
바꾸는데 돈 좀 꽤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옷을 빨아준 저 녀석을 탓할 순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애초에 내가 녀석에게 주머니 속의 물건들을 좀 더 빼달라고 제대로 말한 적도 없었으니.
"... 됐다. 그나마 핸드폰이랑 AR은 먼저 밖에 빼두었으니 다행으로 여겨야지."
"으으... 네."
여전히 녀석은 풀이 죽은 상태였지만, 난 그래도 녀석을 통해 알아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만 기운 차리고, 내가 묻는 것들에 제대로 답해줬으면 한다. 여기서 좀 더 자연스럽게 지내는 편이 서로에게 좋으니까."
계속 침울한 표정을 짓던 녀석도 맘을 다잡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 알겠어요.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드리는게 좋을지..."
.
.
.
◇◇◇
나는 사오리의 부탁대로, 키보토스와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줬다.
솔직히, 사오리는 이미 게임 속의 선생을 통해 이미 여기에 대해 알 대로 아는 모양이었다.
남녀 수가 똑같고, 사람들이 대부분 총 한발에 죽을 수도 있으니 총기 소지는 불법인 거. 이거 정도면 거의 다 아는 수준 아닐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키보토스와 이 도시는 많이 다르다.
거기는 못 미더운 취급을 받긴 하지만 발키리라도 있지, 이 도시는 키보토스로 따지자면 칸나같은 사람이 세금으로 놀고 먹는 와중에 와카모나 아케미 같은 애들이 도둑 잡는 거 아냐?
그리고 키보토스는 거의 첨단 도시지만 여긴 철도 빼면 혼자서 95년도라고 다른 도시 사람들이 놀리는 경우도 심심찮으니까.
일단은 이 도시가 똥통 취급받는것 부터 사오리에게 전해줬다.
새로 취임한 시장이 철도 건설에 신경을 써 교통이 좋은 거 하나 빼면 완전히 낙후됐을 뿐더러, 건물들도 구닥다리에 학교까지 드물어서 다들 이 도시를 떠나는 추세라고 말이다. 오락실이나 노래방 하나 찾기도 힘든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흐음...?"
모든 설명을 다 들은 사오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하다 못해 블랙마켓도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여기 진짜 사람 사는 곳이 맞긴 한건가...?"
무어라 중얼거리던 사오리는 이내 내 시선을 의식하고 당황하다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내게 말했다.
"... 실례했다. 그, 블랙마켓이니 뭐니 하는 건 잊어 줘. 아직은 네가 알아봐야 좋을 거 없다."
"어... 네."
사오리의 말이 나는 참 의아하다고 느꼈다. 보통 저런 이야기는 삼촌이 많이 했었는데... 이를 테면-
'... 저기 삼촌, 그니까... 우리가 자주 보던 아저씨들은 그 인간들 잡아간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하면,
'... 조카, 그건 아직 몰라도 돼. 너무 어린 너한테는 정신건강에 안 좋아.'
라고 삼촌이 자주 이야기했으니까.
뭐, 사실 대충 그 인간들을 처리한 뒤에 무사히 도망친 걸로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용은 없었지만...
일단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오리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 어쩌면, 네가 아침에 말했던 이야기는 여기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군."
"네?"
"내일부터, 새벽에 운동하자고 약속하기 전에 네가 말했지 않은가. 이 도시, 경찰이 세금만 잡아먹을 뿐더러 뇌물도 심심찮게 받는다고."
"....."
"하... 그러니까 도시 상황이 이 모양이지... 아무리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다곤 해도 참-"
"어... 그, 경찰 사람들 말씀하시는 거라면... 경찰들도 죄다 어른이에요. 키보토스랑 다르게..."
"뭐라..."
사오리는 약간 짜증이 난 듯 했지만, 눈치없게도 나는 설명만 늘어놓았다.
"뭐... 당연한 일이기도 해요... 여긴 키보토스랑 다르게 애들이 독립하는 게 느려서 함부로 직업을 못 가지거든요. 끽해봐야 알바라던가..."
"잠깐만. 좀 조용히 하고 있어봐라."
"힉! ... 네."
정말이지... 결국 나답게 또 쓸데없는 짓만 하다니...
무슨 설명충도 아니고, 남의 기분도 똑바로 파악 못한 채로 줄줄 해설만 늘어놓으니 이런 꼴을 보는 거지...
그렇게 나와 사오리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 많이 힘들었겠군."
"... 네?"
침묵을 깨고 사오리가 꺼낸 이야기는 좀 뜻밖이었다.
"선생 말이다. 네 녀석도 그렇고 말이다."
"아... 딱히..."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지만 사오리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라면 누구든 힘들 거다. 네 말대로라면, 여긴 거의 정글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
나는 그제서야, 사오리가 조금 슬퍼하는 것을 눈치챘다.
"... 너도, 외출했다던 네 부모도, 선생도... 이런 곳에서 힘들게 지냈을 것 아닌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지금 사오리는... 사오리 자신과 나를, 그리고 선생을 겹쳐 보는 게 아닐까.
사오리는 어린 나이에도 군인처럼 혹독하게 살았다. 그런 사오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랑 삼촌도 힘들긴 했고...
물론 사오리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래도 다들 사람이 살기엔 정말 가혹한 곳에서 살아온 건 사실이다.
계속 지내다보니 적응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그치만... 사오리가 날 가엾이 여기는 게 편한 일은 아니었다. 난 오히려 여자아이로서 뭣하나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사오리가 더 안됐는데...
결국 난 침울해진 기분을 풀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어... 그, 그래도! 여기... 경찰들만 일 똑바로 못하는 거지 생각보다 도둑이나 범죄는 많이 없어요."
"... 그게 무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오리에게, 나는 이 사실을 전했다.
"이 도시는... 그... 조직폭력배? 그 사람들이 대신 지켜주거든요."
그러나 내 말은 역효과만 내버린 것 같았다.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이 말을 들은 사오리의 동공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
"우물쭈물대지만 말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해라."
사오리의 반응에 망설이던 나는,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니까... 여기 경찰들이 갱생 불가능이라고 판단한 시장 아주머니가... 몰래 조폭들을 고용해서, 범죄자를 붙잡거나 순찰 같이 경찰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대요. 그... 조폭이라 해도 인의라는 걸 지키는 사람들만 비밀리에 선발해서..."
"......"
사오리는 내 말을 듣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 어... 혹시... 무슨 문제라도..."
내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미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오리가 내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힉?!"
"이봐... 잘 들어라."
".....네?"
"넌 불량배들한테 무슨 환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큰 착각이다."
"....?"
"물론 나도 살아남는다는 이유로 정말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줬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냐.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는 녀석들이다.
그들이 지껄이는 인의니 뭐니 하는 건, 그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변명일 뿐이고, 괜한 이들까지 범죄에 끌어들이기 위한 선전 수단에 불과할 뿐이란 말이다...!"
"아..."
"그러니까, 너도 괜히 그런 폭력배들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보았다간 크게 후회할 거다."
"..."
"..... 혹시나 기분 상했을까봐 말하는 건데, 난 그저 선생의 혈육인 너까지 위험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아서 그럴 뿐이야. 그러니 너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아 줬으면 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오리의 말이 그닥 와닿지 않았다. 경찰들이 안 하는 걸 폭력배가 하는 건 여전히 사실이었으니...
'... 사오리도 삼촌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내 눈에 조직폭력배들은, 법이 똑바로 처리하지 못한 그 인간들을 대신 처리해준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 조카! 녀석들이 착해서 우릴 그냥 보내 준 게 아냐. 그냥 우리를 죽여도 돈이 안 되니까 그냥 놓아준 거라고.'
'그치만, 삼촌. 진짜 깡패아저씨들이 그런 이유로 우릴 살려줬다곤 해도... 그 인간들이 두 번 다시 나쁜 짓 못하게 만든 건 사실이잖아.'
'하아... 정말이지, 조카야! 아무리 그 인간들이 최악이긴 했어도, 조폭 녀석들은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그 인간들을 죽였을 거야. 엄연히 경찰과 법에 맡겨야 했을 일을 그 녀석들이 멋대로 처리한 것 뿐이라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삼촌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렇게 다시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맘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 알았어요. 누나 말대로, 저도 그런 사람들 좀 피해서 다닐게요."
사오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야 너도, 네 삼촌도 안전할 거다."
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여전히 사오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삐져버린 내 속내를 어떻게든 감추기 위해, 내가 또 다시 찾은 건 휴대전화였다.
현실도피에는 이거만큼 유용한 게 없지.
"... 그, 누나. 저 휴대폰 좀 쓰고 올게요."
"음?"
"어... 그니까, 누나가 그 키보토스로 돌아가시려면... 아무래도 언제쯤 파업이 끝나고, 뭘 타고 가야 하는지도 좀 봐야하니깐요..."
"...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하군."
"네, 그... 그럼 잠깐 실례할게요."
사오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나는 그렇게 휴대폰을 들고 내 방문을 잠궜다.
그리고선 금새 다른 게임을 하거나, 의미없이 블아 커뮤를 떠돌아 다니는 것으로 시간을 버렸다.
내 딴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울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사오리가 와도 내가 좋은 쪽으로 바뀐 것은 없나 보다.
최애캐랑 살면 나도 더 행동을 조심하며 더 성숙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난 여전히 미숙한 어린애 그대로니까... 결국 난 사오리의 발목만 잡는 건 아닐지...
그렇게 오늘 나는 동거라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깨달음을 하나 배운다.
그 동거 상대방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마음가짐을 바로 하지 않으면 여전히 힘들다는 것도...
.
.
.
○○○
8월의 어느 토요일 저녁.
커튼이 드리워져 책상 위의 불빛 말곤, 어둠만이 감도는 어느 사무실 안 쪽.
"....."
어떤 여인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똑똑-
이내 사무실 문 앞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여인은 문을 향해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냉담하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얼굴 몇 군데에 싸움의 흔적이 남아있는 근육질의 사내였다.
사내는 90도 인사를 한 다음에 인삿말을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사무실에서는 직책에 맞게 시장님이라고 부르세요."
"아~ 예... 뭐. 마님이던 시장님이던... 좀 호칭을 하나로 고정시켜 주시면 하는데 말입죠."
찌릿-
사내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여인이 도끼눈을 치켜떴다.
"윽! 죄송... 합니다..."
"... 흥."
사과하는 사내에게,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사진 몇 장과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여러 고생 끝에, 드디어 찾아낸 겁니다. 예전부터 예고했던... 당신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놈들의 정보에요. 동선을 계산한 대로라면 높은 확률로 이 지역 안에 있어요."
사진을 건네받은 사내는 턱을 쓰다듬으며 사진들과 서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저, 시장님... 그러니까... 겨우 이런 녀석들을 진짜 10년 가까이 때려박아서 찾아야 했던 겁니까? 이 놈들에게 뭐 얻어낼 만한 게 있을까요?"
"음?"
"마... 아니, 시장님. 10년 전에. 그니까 저희 조직이 시장님을 모시기 시작할 때 부터 이 녀석들을 최우선으로 찾으라 그러셨죠? '받아 낼 것이 있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근데 시장님. 척 보니까 저것들 중에 하나는 알바 뛸 나이도 안 돼 보이는데 뭐 뜯어낼 게 있기야 하겠습니까?"
"....."
여인이 피처럼 검붉은 색을 띤 머리카락을 굳은 표정으로 쓸어넘기며 불쾌하다는 사인을 취하자 남자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였다.
"엄... 뭐 좋습니다. 적당히 자료 조작하면 사람 하나 불법 거주자로 만드는 것도 쉽고, 억지 좀 부려서 암시장까지 고려하면 생각보다 짭짤할 수 있다 쳐요. 그치만 겨우 이런 걸 가지고 윗선에서 무마해주기나 할까요?
아니 애초에, 호적등본에 존재하지도 않는 년이랑... 로또 2등탄 돈을 집 하나 겨우 마련하는 데 다 때려박을 정도로 가난해서, 보호자란 놈이 맥시코에 돈 벌러 나가서도 겨우 먹고 사는 애새끼가 뭔 돈이..."
"닥치세요. 돈이고 자시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질릴 대로 질린 여인이 사내의 말을 잘라버렸다.
"어짜피 힘 말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당신들에게 일일히 말씀드려봐야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저 놈들은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내 인생을, 그리고 내 자존심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았단 말입니다."
'참내... 저런 젖비린내 나는 놈들이 뭘 했으면 얼마나 했다고. 그리고 겨우 애새끼들 따위에게 자존심이 아작난 거라면 그냥 지가 정신병자 아냐?'
사내는 속으론 빈정거리면서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잊었나요? 경찰 대신 자기들이 시장의 오른팔이리고 해 봤자 당신들은 내 지원 없이는 모조리 굶어 죽을 사냥개 신세라는 걸 잊었나보죠?"
"으... 실례했습니다."
"무엇보다. 페널티는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윗선에서 무마를 안 해주더라도... 당신들이 알아서 감당해야 하는 것, 그게 사냥개의 의무니까요."
".....예."
"좋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최대한 빨리 저 놈들을 찾아 내 눈 앞에 데려놓으세요. 당신네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여인은 '모든 걸'에 힘을 주며 사내를 압박하고선 사내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저... 시장님."
"... 뭡니까."
"혹시, 타겟을 붙잡으면... 안 죽이는 선에서 돈 될 것만 좀 떼어내면 안되겠습니까?"
"... 맘대로 하세요. 허나, 만일 털어낼 대로 털어내시다가 삐끗해서 죽여버리기라도 한다면... 당신들도 추한 꼴로 만들어 드릴 테니 각오하십시오."
"..."
탁-
사무실 문이 닫히자, 여인은 이전에 자신이 홧김에 누군가에게 내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뭐, 좋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 하나만큼은 기억해두시죠.
너가 그렇게 노래하던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 따위... 빛을 발하기도 전에 내가 처참히 짓이겨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을...!'
여인은 이내 미소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머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요? 처참히 짓이겨 드리겠다고.
...
뭐, 어짜피 이쪽의 너에게는 말해줘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려나."
.
.
.
한편, 이가 갈리는 것을 어떻게든 숨긴 사내는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쌍욕을 내뱉었다.
"젠장! 우리 없었으면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을 년이...!"
불같이 화를 내던 사내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늦여름의 귀뚜라미 소리 뿐.
이내 허공에 주먹을 휘둘러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통감한 남자가 체념했다.
그러고선 사내는, 고개를 크게 두 번 가로젓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큰형님. 접니다."
"... 어떻게 됐는가?"
휴대전화에서 나온 '큰형님'이라는 자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사내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뭐 평소대로죠. '마님 평균'입니다."
"크으... 그러냐. 내 당장 그 여자를 그냥!"
"형님, 진정하십시오. 아직 저 여자에게 얻어먹을 게 있잖습니까."
"후... 오냐. 그래서, 그 시장 되는 여자가 뭐라고 말하더냐?"
"예. 그니까 예전부터 마님이 찾던 애새끼 둘이 슬슬 레이더망에 잡히는 것 같답니다. 그러니 찾아서 산채로 대령하라더군요."
"그런가... 참 내, 그 여자는 여전히 속내가 어찌 되먹은 건지를 모르겠군... 여하튼. 지금 여기에 우리 조직한테 돈 빌린 놈들이 300명쯤 되니 해볼 만 하지 않겠냐?"
"예. 근데 마님이 찾는 애새끼들이 좀 외곽 지역에 살고 있는지라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부분만 쳐주면 빚쟁이들 수가 100명도 안 되는지라..."
"100명... 100명 밑이라... 빌어먹을..."
...
잠시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빚진 놈들 중에서, 아직 코흘리개 수준이거나 자식 가지고 있는 놈들이 얼마쯤 되냐?"
"... 그건 세 봐야 압니다."
"대충 세 봐서, 60명 안팎이면 하는 데 까진 해 봐.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가 되었건간에, 똑같은 데 다닌다고 하는 녀석이 하나쯤은 나올 거 아니더냐? 공권력도 반쯤은 우리 편이니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옙. 만약 실패하면 어케합니까? 기한은 석 달 좀 안 되게 줘서 넉넉하긴 합니다만... "
"... 뭐 어쩌긴. 그 땐 그냥 이판사판이다! 우리가 다같이 들고 일어나면, 지 몸뚱이 하나 간수도 못할 거라는 데에 걸어봐야지. 아무튼 고생 좀 해라."
"예. 수틀리면 바로 분부대로 하죠.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토사구팽 할 새도 없이 쳐버리겠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 망할 여자에게 끌려다니는 신세라곤 하지만 너도 자긍심을 좀 가져라. 우리 오디오스(Odios)의 일원인 이상 말이지. 아무튼 고생 좀 해라."
"... 잘 알았습니다. 최대한 빨리 좋은 소식 들고 오겠습니다."
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