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치 마리, 절찬 구애 중!!
23,123자
가령 세간에는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평소에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면 무척 무섭다던가.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인 적 없던 이의 미소가 더욱 고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던가. 귀여운 그림의 이야기가 잔혹한 전개를 맞이할 때 특별히 더 충격을 받는다던가.
“어머, 시스터 마리.”
“아, 정원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평화와 안녕이 정원사님과 함께하기를.”
세상 대부분에는 극이 존재하고 그 극에 가까이 상주할수록 반하는 움직임이 훨씬 더 큰 반향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다.
“아침 운동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네. 덕분에 오늘도 좋은 풍경 속에서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나무를 혼자서 관리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그녀의 이마에 구슬구슬 맺힌 땀방울이 신성한 아침 햇살을 품어 더없이 밝게 빛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성수로 착각하게 만드는 자태다.
“그런….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좋은 말씀 감사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스터 마리의 그런 매일 같은 격려 덕분에 의욕이 납니다.”
체육복을 입은 수녀, 이오치 마리는 ‘정원사님은 겸손하시네요.’ 하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 어지간히 기분 좋았는지 그녀의 큼직한 고양이 귀가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쫑긋거린다.
“…태양이 숨지 않으면 좋으련만.”
“네? 무언가 말씀하셨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원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얼버무렸다.
가엾은 태양.
모처럼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다고 제아무리 쨍쨍하게 발광해 본들 뭐하나. 이 순수한 소녀의 미소가 훨씬 눈이 부신 것을.
실바람이 불어오자 햇살이 고픈 이파리들은 부디 /그녀를 질투하지 말아 달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럼 저는 시스터의 일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혹여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거든 꼭, 대성당의 고해성사실로 찾아와 주세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마리는 조금 눅눅해진 체육복을 주섬주섬 벗어 고이 개고 물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뽀얀 살결을 문댔다.
머리카락을 들어 땀이 많이 흘렀던 목덜미부터 닦고 움푹 팬 쇄골, 소심하게 봉긋 오른 가슴께를 지나 투박한 베이지색 슬립 안쪽으로도 손을 집어넣어 배와 옆구리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간지러워….’
어깻죽지 사이가 가려워 끙끙대며 팔을 꺾어 보았지만 아무래도 수건이 잘 닳지 않았다.
“우으….”
결국 힘이 빠진 그녀가 포기하고 울상으로 혀를 내밀어 앓/는 소리를 했다.
어느 정도 몸가짐이 가다듬어지면 다시 한번 나갈 채비를 한다.
거울 앞에서 신선한 오렌지빛의 머리카락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엮고 늘 입는 원피스를 갖춰 입은 뒤, 베일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귀가 불편하지 않도록 모양을 잡아주면 끝이다.
공용 세탁실에 도착한 마리는 어깨에 멘 밀짚 바구니에서 빨랫감을 꺼내 세탁기에 넣으며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따라 빨래가 많아 보이네요….”
옆자리의 시스터가 커다란 대야나 다름없는 빨래 바구니를 낑낑대며 옮기는데,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제 몸을 완전히 가려 발 달린 바구니가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듯했다.
“아, 네…. 그게…, 어제 초등부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진흙탕에서 구르는 바람에요. 참….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는데.”
시스터가 산더미 같은 빨랫감 위로 동이 트는 것처럼 불쑥 얼굴을 내밀며 곤혹스럽게 대답했다.
“씩씩한 분들…. 아무래도 혈기 왕성한 아이들의 기세를 누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자매님은 늘 고생이 많으시네요.”
제자리에 바구니를 내려놓은 시스터는 결린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기운찬 건 좋지만 다칠까 봐 걱정되네요….’ 하고 중얼거린 뒤, 진정으로 걱정하는 마리의 표정을 보고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고생은 항상 모두의 고민을 선뜻 들어주시는 시스터 마리가 더 많으시잖아요. 저는 고작 고참 시스터분들을 거들며 동생들을 보살피는 일이 전부인 걸요.”
“자매님. 각자에게는 각자의 고충이 있는 법이랍니다. 자매님의 수고에는 많은 분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계세요. 늘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조금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녀의 말에 울분이 쌓여 있던 시스터는 눈꼬리에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소녀의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따스하게 녹일 수 있다니 경이로울 지경이다.
트리니티 종합학원의 대성당은 키보토스에서도 가장 성스럽고 경건한 장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웅장한 양식의 기품있는 구조물과 유서 깊은 장식품, 명인에 의해 잘 조각된 신상이 즐비하다.
다른 지역의 학생이라면 아득히 높은 천장을 우러러보는 것만으로 감탄을 자아낼 광경.
“오늘도 평화와 안녕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그 아래에서 마리는 거울이나 다름없는 대리석 복도를 거닐며 마주치는 모든 시스터들과 교직원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 소소한 기도를 함께했다.
“방금 보셨나요? 역시 시스터 마리는 대단하네요.”
“네…. 저게 바로 시스터후드의 자애의 성녀…. 저도 본받아서 정신을 바로잡아야겠어요.”
이곳이 아무리 그러한 장소라고 해도 한창때의 어린 학생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 활동량이 많은 아침에는 사담이나 웃음소리로 시끌시끌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녀가 지나간 자리는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정숙했다. 마치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극진히 달래는 허브티같이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성품에 감화된 일부 시스터들이 그녀를 보통의 독실한 신자에서 평가를 그치지 않고 ‘자애의 성녀’라고까지 일컫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자, 다시 돌아와서.
시스터후드의 학생들은 그런 그녀가 ‘순수함’의 극에 있다고 여겼다. 가히 ‘신이 내린 순수함’이라 할 만하다고.
그녀가 트리니티에 끼치는 영향력은 고작 고교 1학년, 겨우 단 한 사람에 의한 것이라 하기엔 평범과는 퍽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기가 세고 지독한 파벌 싸움 속에서 치이며 날이 선 학생들도 그녀 앞에서는 큰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시꺼먼 속도 무의식중에 순백으로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으니까.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지간한 전란이 아니고서야 끄나풀의 증오도 남지 않았고 오직 그녀의 머리를 장식한 산딸나무 꽃향기만 은은하게 남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금해하는 이들도 우후죽순 생겼다. 마리가 그 순수함에서 벗어났을 때, 과연 어떤 반향을 가지고 올 것인가.
하지만 그 궁금증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금기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누구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거나 티를 내려 하지 않았다.
이른 오후, 고해성사실 주변을 청소하고 있던 마리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화색을 띠었다.
“선생님께서요?”
“네, 티파티에 용무가 있어서 오셨다고…. 지금은 동아리 회관에 계신 모양이에요.”
“그런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그녀의 씩씩한 고양이 귀가 물에 젖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자루걸레를 쥔 두 손에 묘한 망설임이 엿보인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금방 기운을 차린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얼굴에 좀 전까지의 그늘은 온데간데없었다. 마리는 멈춰 있던 손을 다시 움직여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소식을 전한 시스터는 그 사소한 변화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언뜻 봐선 대단한 통찰력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아마 시스터후드에서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이라면 누구라도 캐치했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 시스터 마리의 안부를 여쭈었다고도 들었습니다.”
“네!? 그게 정말…!”
마리의 푸른 눈동자가 비눗방울처럼 반짝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음을 자각하고 어깻바람을 억눌렀다.
“…그게 정말인가요?”
“네. 시스터 히나타에게 직접 들은 사실이랍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는 걸까요….”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 다시 밀대를 민다.
시스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무드등의 전원을 껐다 켰다 하는 것 같아 무척 귀여웠다. 그래서 무심코 허청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 자매님? 왜 그러시나요?”
“후후….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 이 이상 무엇을 숨기랴.
완전무결의 백치 같은 마리도 어느 인물이 간섭하면 무르익은 봄날에 핀 수줍은 벚꽃처럼 뺨을 연분홍색으로 물들이곤 했다.
이것은 시스터들의 입방아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앙증맞고 공공연한 사실이다.
“시스터 마리. 여기는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다녀오도록 하세요.”
“네? 그럴 수는…. 괜찮습니다. 아쉽지만 선생님은 다음에도 뵐 기회가 생기겠지요. 사사로운 일로 제 본분을 잊어선 안 되니까요.”
“후후…. 오늘 오후는 저희를 제외한 대부분의 클래스에 채플 수업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간에 고해성사실을 찾아올 분은 그리 많지 않겠지요. 저 혼자서도 충분하답니다.”
“하지만…. 그런…. 자매님에게 전부 맡기고 저만 자리를 비울 수는….”
“그리고 선생님께서 정말 중대하게 하실 말씀이 있는 거라면 큰일이지 않나요? 다른 분들도 아니고 시스터 마리를 찾고 있다고요? 막, 이렇게…. 둘이서만 특별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던가…. 그럴지도 모르고요!”
“그…, 그런…! 자, 자매님! 그런 표현은…!”
시스터의 호들갑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마리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우왕좌왕 마구마구 자루걸레를 바닥에 휘둘렀다.
“흠흠…. 아무튼 선생님이 트리니티를 떠나시기 전에 얼른 다녀오세요. 그 감정의 표출구 같은 자루걸레는 저한테 맡기고요.”
“…그럼. 그러면…, 잠시 부탁하겠습니다…. 금방 다녀오도록 할게요.”
그녀는 큰 결심 앞에 망설이는 사람처럼 옷자락을 몇 번이나 쥐었다 놨다 하더니 시스터에게 조심스럽게 고개 숙여 부탁했다.
잰걸음으로 떠나는 마리의 뒷모습을 보며 시스터는 ‘선생님의 일에는 무르다…. 후훗. 하나코 씨의 말이 맞았군요. 열심히 하는 마리에게는 좋은 휴식처가 되겠지요.’ 하며 청소를 계속했다.
***
동아리 회관으로 향하는 마리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보폭을 벌리는 속도가 아주 조금 빠르고, 팔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주 조금 격하고, 입가의 잔잔한 미소가 아주 조금 더 방긋 피었다.
그러면서 만나는 이마다 정중한 인사는 빼먹지 않았다.
‘어쩐지 신기한 기분….’
원래라면 습관과도 같은 그 행위가 가슴 한편에 위안이 되고 있었다.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분수를 모르고 박동하는 심장을 달래는 것이다.
‘곤란하네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랜만이라서 그런 걸까? 글쎄, 그녀는 그 원인을 알지 못했다. 이런 간질간질하고 먹먹한 기분을 알게 된 것은 그를 처음 만나고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마리는 항상 누군가를 위하는 역할이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소한 공감의 말을 전하는 정도. 하지만 그것은 사람에 따라 대단한 일이 되기도 했다.
마음에 짐이 있는 이의 무게를 덜어 주고, 상처가 있는 이의 반창고가 되어 주고, 근심으로 눈앞이 막막한 이의 길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이 역할이 좋았다. 종종 격한 감정의 반동을 아직은 어리고 가느다란 몸으로 받아내는 게 힘들 때도 있었으나 그만큼 누군가의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무척이나 보람되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그는 사람들을 위하는 그녀를 위하는 유일한 역할을 자처했다.
말석이긴 해도 키보토스 최대의 대성당, 그곳에서 트리니티 내의 여러 훌륭한 성당과 역사적인 유적들을 관리하는 ‘시스터후드’의 간부.
자칫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선의다.
하지만, 사제지간이라는 관계가 그렇게 만드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과 마리라는 사람 사이가 그렇게 만드는 걸까.
마리는 이상하게 그의 앞에 있으면 한없이 작아지는 걸 느꼈다. 소임을 잊고 어리광을 부리고 마는 것이다.
대화를 하면 무심코 그의 호의에 기대고 싶어졌고 그가 떠나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고, 밤에는 그의 웃는 얼굴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그는 훌륭하게 그녀의 마음속에 발을 들였다.
“하하…. 오늘은 두 사람 덕분에 살았어.”
‘선생님의 목소리…. 다른 분이 계신 걸까요?’
계단을 모두 오르니 모퉁이 옆 복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는 잠시 멈춰 서서 용태를 가볍게 정돈하고 칠칠치 못하게 표정이 헤벌쭉 풀리지 않도록 뺨을 두드린 후 발을 뗐다.
“…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환영이랍니다.”
“…부디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이야기 속에 낯선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당당하게 모퉁이를 돌 참이었던 그녀는 처음 보는 여학생 두 명이 그와 하하호호 사담을 나누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벽에 기대어 몸을 숨겼다.
‘어…, 어라? 저, 어째서….’
불과 몇 초 전에 보았던 광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그와 어슴푸레 뺨을 물들이고 간드러진 웃음소리로 호응하는 두 소녀.
화기애애하기만 한 그 광경이 어째서인지 마음속에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칠흑 같은 안개로 뒤덮여 곰팡이처럼 눌어붙더니 이내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갈피를 잡지 못한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소리 없이 당황했다.
‘이건 대체….’
일시 떠오른 임시방편으로 가슴을 톡톡 두드려 보지만, 단단히 틀어막은 무언가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 마리?”
“선생님…?”
“여긴 어쩐 일로…. 그보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마리를 발견한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흐르는 식은땀을 흘겨보곤 근심스럽게 물었다.
“…네? 아…. 네. 저는 괜찮아요.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
“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힘든데 꾹 참고 있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요란하게 손짓하며 걱정했다. 마리가 이처럼 맥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후후.”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리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마리?”
“저는 괜찮습니다, 선생님. 조금 컨디션이 좋지 않았나 봐요. 어디가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무리하면 안 된다?”
“네. 오랜만에 선생님이 방문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를 드리러 온 건데, 걱정을 끼쳐 드리고 말았네요….”
“괜찮아. 와 줘서 고마워. 마침 할 얘기도 있고…, 그리고―”
그가 한 발짝 다가온다. 체구가 왜소한 마리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려다본다.
“마리가 보고 싶기도 했고.”
‘아….’
뭉글뭉글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살피는 눈빛이 봄날의 햇살처럼 살갑게 내려온다.
이상하다.
분명 무해하고 좋으면 좋았지, 나쁠 리가 없는 그의 그런 애정이 독이다. 마리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녹아내려 간 ‘답답함’ 대신 또 다른 ‘답답함’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코올이라곤 혀끝에도 대 본 적이 없는데, 선생님이라는 독한 술잔에 풍덩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꽃보라가 흩날리며 가슴을 옥죄인다. 멍하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저 그의 뺨에 손을 뻗어 투박한 피부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니까, 이유는 둘째치고 본능적으로 그래선 안 된다고 느끼니까.
눈을 질끈 감고 시선을 조금씩 아래로 내리자, 아아.
이번엔 그의 넓은 가슴에 두 손을 모아 기대고 안기고 싶다. 정말 조금, 정말 약간만 소심하게 손을 뻗어도 닿는 거리인데. 그래선 안 된다. 왜? 기도가 턱 막힌 듯 답답하기만 하다.
꾹 참으며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내렸다.
‘선생님의 손….’
커다랗고 믿음직한 손. 얼굴을 가려도 손바닥이 남는 커다랗고 듬직한 손. 언제 어디서든 힘든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괴로운 일이 있어도 이유도 묻지 않고 선뜻 내미는 손.
그와 알고 지내면서 몇 번인가 그 손에 도움을 받거나 소소하게 맞닿은 적이 있었다.
저 손에 앙증맞고 어여쁜 제 손을 포개고 싶다. 있는 힘껏 쥐고 그의 온도를 느끼고 싶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마리?”
“…네, 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의 부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취하기라도 했는지 얼굴에는 잔열이 남아 후끈거린다. 마리는 제 몸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확신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니까요….”
그럼에도 괜찮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문제만큼은 그에게 직접 말하는 것을 피하고 싶다고.
그와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한 후, 트리니티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앉은 마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마리 쨩~”
이윽고 그런 그녀의 심란함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폴짝폴짝. 도대체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자신의 고혹적이고 풍만한 몸매에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발걸음으로 우라와 하나코가 뛰어온다.
“마. 리. 쨩!”
그녀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 하나코 씨. 갑작스럽게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분명 바쁜 일정이 있으셨을 텐데….”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실 필요 없답니다. 마리 쨩이 부르면 수개월 동안 고대하던 수업이 있어도, 정말 갖고 싶었던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람을 받았어도 달려올 거예요~ 이렇게 말이죠. 후후후♡”
“네!? 그,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죄송해서 어떡하죠? 저, 저는 괜찮으니 다음에…. 아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후훗. 농담이에요. 저, 오늘은 아무런 예정도 없었답니다.”
“하, 하나코 씨…. 휴우…. 다행이에요. 저는 커다란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고 생각해서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어요.”
하나코는 마리의 반응이 흡족했는지 생글거리며 그녀의 곁에 앉았다.
“후후후…. 그래서 오늘은 저에게 어떤 용건이신가요? 뭔가 긴히 하실 말씀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혹시 ‘그. 렇. 고. 그런….’ 이야기일까요?”
“네? 그렇고 그런…?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초원에서 만난 순한 양 같은 표정. 게슴츠레 뱀눈을 뜨고 상대의 속내를 훑는 누군가와는 역시 완전히 결을 달리했다.
하나코는 그녀에게 던진 장난이 예상한 대로 기분 좋게 들어맞자 ‘후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말을 거두었다.
“그…, 하나코 씨가 보충수업부의 활동으로 바쁘신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염치없이 연락을 드려 불러낸 이유는….”
“그렇게 뜸 들이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하나코 씨. 그러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가…, 병에…, 걸린 것 같아서요.”
직전까지 두둥실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타고 있던 하나코의 표정이 순식간에 불이 붙은 동아줄처럼 잿빛으로 변했다.
“병…, 이요?”
“네….”
“어떤 병이요? 아니죠. 그걸 아직 모르니까 제게…. 그러네요. 마리 씨? 혹시 지금도 많이 아프신 상태이실까요?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증세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냉정함을 잃어버린 하나코가 마리의 두 손을 낚아채고 허둥거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마리는 그녀의 걱정을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뒷얘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말씀드리면 좋을까요. 특별히 어딘가 몸이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내상?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일까요? 아니면 바이러스성 질환일 수도 있어요. 좀 더 구체적인 증상이 있으셨나요? 세상의 병은 셀 수 없이 많이 있답니다. 가볍게 접근했다가 증세가 악화되고 나면 늦어요. 당장 저와 함께 세리나 씨에게 진단을….”
“지, 진정하세요. 하나코 씨. 분명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 거에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아직 이게 병인지 아닌지도 확신이 가지 않아서요….”
근심이 흘러넘쳐 주체하지 못하는 하나코를 보면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터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째서일까.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스레 몸을 배배 꼬게 되고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하나코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몸이 아파서 증상에 대해 논하는데 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걸까. 얼굴에 미열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떤 분을 떠올리면…. 감기에 걸린 것처럼 멍해지고 가슴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잡념으로 기도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 안절부절못하게 돼요. 그리고 분명 아무런 일도 아닐 텐데, 다른 분들이 그분과 계신 걸 보면 이렇게….”
마리가 재현하듯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조막만 한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톡톡 두드린다.
“이렇게 두드려도 답답한 게 사라지지 않을 만큼 가슴속이 꽉 막혀서 초조해요. 심할 때는 먹먹함 때문에 명치 부근이 욱신거리며 아플 때도 있답니다…. 이건…, 이건 병일까요? 시스터후드의 다른 분들께는 큰 걱정거리를 만들어 폐를 끼치게 될까 봐 제가 아는 한 가장 박식하신 하나코 씨에게 우선 연락을 드렸습니다….”
“후훗.”
“하나코 씨?”
이야기하는 도중부터 손을 쥐고 있던 그녀의 힘이 빠져나갔다 싶었더니 어느새 평소의 하나코로 돌아와 세상만사 행복한 얼굴로 싱글벙글하였다.
문제가 심각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우려했던 마리는 더운물과 찬물을 획획 넘나드는 그녀의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그러네요~ 그건…. 맞아요. 그건 분명 병이죠♡”
“여, 역시 그런가요? 어, 어떡하죠? 심각한 병일까요?”
“어떻게 보면 세상의 어느 병보다도 심각한 병이라고 할 수 있죠. 후후후. 키보토스의 의료 기술로는 고칠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이 쟁취할 수 있는 마음의 병이랍니다~”
쟁취? 하나코의 표현이 다소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리가 갸웃거렸다. 하지만 심각하다는 단어가 좀 더 와닿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저, 저는 어떻게 해야….”
갑작스러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눈앞이 막막하기만 해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마리 씨. 걱정하지 마세요. 그 병은 분명 ‘심각한’ 병이기는 하지만, 생명에는 아~ 무런 지장이 없답니다. 후후후…♡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평소처럼 생활하시면 돼요.”
“정말인가요? 하지만 시스터 활동에 지장이 생기면….”
“어머,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깊이 찔러 넣으시다니…. 과연 선생님…. 크고 우람한 걸로 이렇게 순진한 마리 쨩을…. 후후후…. 정말 여자아이 상대로는 용서가 없으시네요♡”
“하나코 씨…?”
“후훗. 죄송해요. 별 거 아닌 혼잣말이었답니다. 저도 이 분야에선 미력하지만, 간단히 조언을 해드리자면, 그 병은 ‘왜 그 병에 걸렸는가.’를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뒤는 또 다른 국면에 부딪히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시름 덜게 되겠죠. 그러니 우선 직접 고찰해 보는 건 어떨까요?”
“따로 치료를 받거나 약을 처방받을 필요는 없는 건가요?”
“네. 그 병은 마리 쨩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고칠 수 없거든요♡”
그러고는 ‘고친다는 표현은 다소 어폐가 있을까요? 아무튼, 저는 급히 가볼 곳이 생겨서 이만 가볼게요. 다른 경과가 나타난다면 부디 또 연락해 주세요~’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져 갔다.
마리는 이 미지의 상황에 연신 귀를 쫑긋거리며 신음할 뿐이었다. 하나코는 원래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곤 했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멀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으로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코의 모호한 조언 하나. 마리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시스터들 몰래 도서관을 찾았다.
―
각종 의학 서적들부터 오컬트에 이르는 자료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눈을 부릅뜨고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
“부정맥….”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심장병과 관련된 병들의 개중에는 증세가 약간 비슷한 것도 있는 듯했으나,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하나코의 말에 따르면 죽는 병은 아니라고 했고, 그 뒤에 죽을병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이라며 덧붙였다.
‘설마…. 저주…, 인가요?’
키보토스의 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데다,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고 어둠 속에 둘러싸인 것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면 오컬트 자료에서 본 저주와 닮은 점이 있다.
분명 누군가에게 저주받을 만큼 나쁜 일을 했다는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의 착각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만에 하나 의도치 않게, 혹은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의 원망을 샀다면 그것 또한 치루어야 할 과업. 마리는 그런 생각을 할수록 더욱 독실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노력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은 병을 낫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이기도 하나,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부디 선생님과 이전처럼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그날도 어김없이 도서관에 다녀왔다.
방으로 돌아온 마리는 여느 때처럼 샤워를 마치고 선생님에게 선물로 받은 바디로션 한 움큼 짜내 맨들맨들한 살갗을 문질렀다.
손끝부터 가느다란 팔을 지나 모락모락 온기가 피어오르는 상부에서 갈라지는 하부에 따라 매끈한 두 다리 끝까지 꼼꼼하게.
민감한 부분에 스칠 때마다 선생님이 사주었다는 사실이 상기되며 미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이상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죄스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가로젓는다.
마지막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카락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면 잠자리에 눕는다. 마리는 그날 있었던 일이나 내일 해야 할 일, 그리고 선생님과 나누었던 모모톡 몇 마디를 생각하며 두어 번 이불을 뒤척이다 서서히 잠이 든다.
여기까지는 매일 같은 일상인데, 어딘가 불순물이 섞여 들어왔다.
대성당 뒤편의 시스터들이 기거하는 생활관. 그 외벽에 보름달이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그녀의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다. 건물 주변은 물론이고 내부에도 사람의 인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공허한 복도를 그녀가 걸었다.
보안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듯, 막힘없이 해제하고는 저벅저벅.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을 어느 시스터의 방앞에서 멈추었다.
「이오치 마리」
이 생활관에서 먹고 자는 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을 이름이 적힌 문패가 떡하니 붙어 있다. 만약 외부인이 침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트리니티 전체가 발칵 뒤집힐지도 모르는 상황.
그녀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새근새근.
고요한 방안에 마리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그녀는 마리가 깨지 않도록 발꿈치를 들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그녀는 기상천외하게도 학원의 지정 수영복을 입고 있다.
“음음.”
작게 소리를 내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 뒤 기다랗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옆으로 넘기고 허리를 숙여 마리의 귓가에 얼굴을 갖다 댔다.
“오오…. 저는 신님이에요오요오요오….”
그녀가 속삭였다.
“독실한 신자인 마리 쨩에게 병이 낫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아다아다아….”
“으음….”
마리가 뒤척이자 그녀는 흠칫 놀라 몸을 숙여 침대 옆에 숨었다.
“조, 조금 목소리가 컸나 보네요….”
다행히 마리가 꿈에서 깨 제 방에 수영복을 입고 무단 침입한 외부인과 마주치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트리니티 중앙 도서관 2층 동쪽의 4번 물품 보관함에 그 방법이 들어있습니다아다아다아…. 비밀번호는 공구일이…. 잊지 마세요오요오…. 공구일이….”
***
“왜 그러시나요, 시스터 마리?”
“…신기한 꿈을 꾼 것 같습니다.”
멍하니 식판을 바라보는 모습을 의아해하는 시스터에게 마리는 별일 아니라며 기우를 덜어 준 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장 중앙 도서관으로 향했다.
간밤에 꾼 꿈 때문이었다.
정말 기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니와를 닮은 분홍색의 흙인형이 수영복을 입고 히히덕거리더니 주변을 가뿐한 뜀박질로 빙글빙글 돌며 자기가 신이라고 자칭하는데. 개꿈도 이런 개꿈이 없었다.
하지만 마리는 의심하지 않았다. 믿음이야말로 시스터의 최우선 덕목 중 하나. 물론 이런 꿈까지 하나하나 그런 잣대를 세울 필요는 없지만, 그 생생함이 기묘했다.
“4번 물품 보관함이었던가요….”
정말로 무언가 들어 있는지 사용 중임을 알리는 빨간불이 떠 있었다. 뭐,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직접 확인해 보면 모든 것이 확연해질 일이었다.
“비밀번호가 분명…. 공구일이…, 였죠…?”
덜컥하고 보관함의 문이 퉁겨져 나왔다.
설마설마하며 가슴 졸이던 마리는 화들짝 놀라서 그대로 멈추었다.
조금 진정하고 다가가 보니 영양 드링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떤 병이든 낫는 영양 드링크. 시스터 마리 X에게.」
잘못 쓴 건지 쨩이라는 글자가 가위표로 지워져 있었다.
마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대로 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 꿈을 꾸었다고 한들 자기 것도 아닌데 함부로 손을 대서야 도둑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대놓고 제 이름이 쓰여 있다고 해도 말이다. 마리는 그런 죄책감을 목전에 두고 진짜 주인이 있지 않을까 며칠 동안 지켜보며 수소문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주인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고, 요 며칠, 마리의 자취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긴 우타즈미 사쿠라코가 사정을 물었다.
“이게 말씀하신 영양 드링크인가요?”
“네….”
그녀는 보자마자 글자의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 눈치챘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체가 아니었어도 전후 사정을 듣고 누구의 소행인지 단박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이건 분명 평소 마리의 행실이 기특해서 내려준 은총일 겁니다. 며칠이나 주인을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젠 쓰인 대로 마리가 거두는 것이 주인의 바람이라고 해도 될 테지요.”
안에 든 내용물까지는 유추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마리가 선생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시스터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이미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고, 이런저런 일로 교류하며 지켜본 하나코는 마리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꿈을 꾸었다는 건 어찌 된 일일까요, 기적이 텔레파시와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 걸까요?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사적인 일로 하나코와 관련되면 꿈자리가 사납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사쿠라코는 마리를 잘 다독이며 안심시켰고, 그날 밤.
바짝 긴장한 마리는 후줄근하게 잠옷을 입은 상태로 침대 한 가운데에 영양 드링크를 세웠다. 그리고는 그 앞에 정좌해 몇 번이고 기도해 가며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에야 전부 마셨다.
막상 마시고 나니 뭔가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만 거사를 치른 것처럼 심란할 뿐. 하지만 이 역시 믿음이 중요하다 여기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이었다.
때마침 선생님이 트리니티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괜찮을까요….”
그가 있는 곳은 직접 모모톡으로 물어보았다. 트리니티 교정 외곽의 인적이 드문 소공원. 그는 아직 꽃잎이 피지 않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라…?’
이상하다.
확실히 무언가 잘못됐다.
마리는 진짜, 정말로 심상치 않은 일이 제 몸에 일어나고 있음을 통감했다.
반갑다고 손을 흔드는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몸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단언컨대 이것은 어딘가 아프다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선생님선생님선생님선생님선생님선생님….’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강직한 눈동자, 코, 입, 어깨, 팔, 몸, 허리, 다리, 발끝까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며 그를 핥았다.
“하아…. 하아…. 하아….”
거리가 좁혀져 갈수록 숨이 가빠져 갔다. 마리는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있는 힘껏 배에 힘을 줬다. 이 아찔한 감각은 생각하는 능력마저 저해시켰고 오로지 ‘그래선 안 된다.’라는 집념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마리? 얼굴이 빨간데…, 괜찮아?”
그가 휘청거리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걱정했다.
마리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잡아서 안 되었다.
‘쓰담쓰담쓰담쓰담쓰담쓰담쓰담쓰담….’
당장 저 손을 붙잡아서 제 머리 위에 얹고 불이 붙을 때까지 쓰다듬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 다음 차갑게 식은 뺨을 뜨거운 그 손으로 어루만져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런 다음, 그런 다음, 그런 다음. 배운 적도, 들은 적도, 느껴 본 적도 없는 그런 경지에 이르는 행위를 오직 그 본능에 의한 ‘욕망’에 의해 상상하고, 다다른다.
“선생님….”
“어, 어…. 왜?”
“선생님…. 선생님….”
“어…, 나 여기 있어. 마리?”
아, 아아. 귀가 녹아 버릴 것만 같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 이름을 불러 주기를 바랐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괜찮은 거…, 맞지?”
“네, 네에…. 전…, 저는 괜찮습니다…, 아…. 하아….”
그의 눈동자가 혼란 속에 흔들린다. 혹시 아픈데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또는 아픈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오치 마리’라는 자신의 학생을 향해 사랑으로 탐색하고 있다.
마리는 그걸 알고 있다. 아아, 알다마다. 그는 그 어떤 미증유의 시련이 눈앞에 닥쳐도, 죽음의 공포가 정신을 좀먹어 가도 애틋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으니까.
그게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당장 저 눈을 포함한 그의 얼굴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잡아당겨 살짝 부푼 두 가슴에 끌어안고 싶었다.
터질 것이 뜀박질하는 이 심장의 고동을 들어 주길 바랐다.
안고 싶고
안기고 싶고
만지고 싶고
만져지고 싶고
그와 함께 얽히고설켜 뜨겁게 녹아내리고 싶었다.
“선생님….”
“마리, 아무래도 당장 구호기사단한테….”
“죄, 죄송합니다―!!”
마리는 비명이나 다름없는 사죄와 함께 남은 기력을 짜내어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녀가 마신 것은 욕망에 대한 자제심을 무너뜨리고 그 욕망을 배로 증폭시키는 약. 단적으로 말해 오랜 시간 그런 불경한 것들을 꾹꾹 눌러 담아 멀리한 마리에게는 독약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강제로 해방하고 폭주시킨다. 내성이 전혀 없는 그녀에게는 지옥과 같은 나날이었을 테지. 하지만 마리는 끝까지 저항했다.
수면욕이라던가, 지식욕이라던가, 식욕이라던가 하는 일반적인 욕망은 별거 아니었다. 애당초 0에 수렴하던 것이 1이 되고 2가 되고 한다고 뭐, 큰 변화가 있겠는가?
문제는 단 하나. ‘선생님’에 대한 것뿐.
마리는 끊이지 않는 기도를 기본 베이스로 손이 닿는 곳마다 대청소를 하기도 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공부를 하기도 하고 평소에 하던 운동량을 배로 늘려 보기도 하는 등, 가능한 한 생각할 겨를이 없도록 바쁜 시간을 만들었다.
대단한 성과가 있었느냐 하면 글쎄.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백번 나았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샬레의 선생님’이라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나타난 학생이 술이라도 마신 사람처럼 헤벌쭉 휘청거리고 이상야릇한 목소리로 몇 번인가 사람을 부르더니 쌩하고 도망쳤다.
그래. 이 키보토스에 그런 짓을 할 만한 학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마리다. 이오치 마리.
거대한 트리니티 대성당의 훌륭한 시스터들이 ‘자애의 성녀’라는 이명으로 칭하는 한 명의 어엿한 시스터이자 착하고 순수한 걸로는 첫손가락에 꼽는 소녀.
당연히 그는 그날 이후 마리에게 애간장이 타도록 연락했다. 모모톡은 물론이거니와 학원에서의 일과가 끝날 시간만 되면 전화를 걸어 댔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리는 도무지 그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만나서 사정을 듣고 싶어 하는 그와, 어떻게든 그를 피해서 이성이 온전한 평화 속에서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하는 그녀의 치열한 술래잡기가 시작된 것이다.
“저, 마리! 나기사한테 추천 받은 가게에서 롤케이크를 사 왔거든. 잠깐 얘기를….”
“선생님선생님선생님…. 아. 그. 저…, 지금은…. 죄, 죄송합니다―!!”
이 컴컴한 혼돈에 오해는 오해를 불러 와, 그는 마리에게 말도 못 붙일 미움을 받은 줄로 착각해 사죄 공세를 이어 나갔다.
디저트에 조예가 깊은 학생들에게 수소문해 걸출한 케이크를 사 가 보기도 하고.
“마리! 잠깐,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이거 길 가다가 본 머리핀인데, 마리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안 돼요…. 안 돼요…. 이 이상 가까워지면…. 아! 저,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마리―!!”
온종일 번화가를 전전하며 골라 온 액세서리를 선물해 보기도 한 데다가.
「미소가 눈부신 친애하는 마리에게」
갖가지 칭찬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석고대죄한다는 사죄의 하모니로 편지지를 가득 채워 이 악물고 마리를 쫓아가 벽쿵과 함께 전달한 뒤, 사이좋게 도망치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마리는 미칠 지경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근질근질 가열한 초콜릿처럼 녹아내릴 것 같은데, 아주 사탄이 따로 없다.
‘마리! 마리! 마리!’ 연호하면서 숨는 곳마다 신출귀몰 등장해 이맘때의 소녀라면 누구라도 기뻐할 만한 일을 창의적으로 폭격해댄다. 화해는커녕 완전히 역효과라는 걸 모르고 말이다.
‘이젠…, 더는…. 선생님….’
마리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평생 해 왔던 것 이상으로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일주일 조금 넘는 그녀의 간절한 시간을 누군가 지켜보았다면, 그게 천 명이든 만 명이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폭포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숭고한 근성을 치하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룩한 의지를 지녔든 어쨌든 간에 사람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고 마리는 고작 신장 151cm에 열다섯 언저리인 가냘픈 소녀였다.
마음속에 커다란 불이 났다고 그 쪼끄만 양손으로 백날천날 물을 퍼다가 부어 봤자 간에 기별이나 가겠는가? 심지어 원흉이 되는 놈이 옆에서 눈치 없이 전심전력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이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급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깐]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당장 갈게!!]<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선생님.]
“야호!”
그는 남은 일과를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고 샬레를 뛰쳐나와 곧장 트리니티로 향했다.
발걸음은 가볍다. 무엇이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이가 소원해져 버린 특별히 아끼는 학생과 화해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문득 그런 의구심이 든 것은 구교사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아무리 기회를 만들고자 발악해도 시간을 내어 주지 않았던 그녀다. 그동안의 반응을 보건대, 그게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그러는 건 이미 눈치챘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다고 할지.
생각해 보니 모모톡부터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마리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투철해 하고 싶은 말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부탁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망설이거나 좀 더 감정을 풀어서 이야기하고는 했다.
요컨대 이러쿵저러쿵 주고받는 대화량이 꽤 많다는 얘기다.
하지만 오늘은 어땠는가? 딱 용건 하나만 부상한 잔잔하고 무미건조한 모모톡이지 않았나? 아까는 신이 나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분명 차이가 있었다.
거기다 만나기로 한 장소가 구교사의 빈 교실. 이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장소다.
시설 자체는 살아 있지만, 공적으로는 창고 정도로 사용되고 있고 가끔 호기심 많은 학생이 담력 시험을 위해 숨어드는 게 고작이다.
당연히 마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정이다. 원래라면 무난히 교정이나 대성당 뒤편의 공원 정도가 되었을 터였다.
오전부터 시커먼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습기도 다분해 옷도 신발도 눅눅하니 기분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왠지 으스스한 거 같기도 하고….”
어느새 사람의 인적이 뚝 끊긴 구교사의 교정은 날씨 보너스를 포함해 굉장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교내에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면 발걸음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는 3층의 빈 교실까지 단걸음에 올라왔다. 가능하면 얼른 마리와 합류해 그 환한 미소에 보이지 않는 가호를 받고 싶었다.
또각또각, 적막한 복도에 구두굽 소리가 울린다. 창문도 모두 닫혀 있어 정말 고요하다.
교실 문 앞에 도착하자 복도 쪽 창문 너머로 마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창가 쪽에 서서 창문 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드르륵 하고 오래된 나무 문이 비명을 지른다. 오래돼서 그런지 잘 열리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들어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
대답이 없다.
마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선명하지 않고 누리끼리한 구식 조명 아래에서 대성당의 숭고한 신상처럼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잔뜩 긴장한 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번개가 쾅쾅 내려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까, 깜짝이야…. 마리? 괜찮아?”
“네~ 선생님!!”
하지만 더욱 깜짝 놀란 것은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홱 하고 돌아서더니 귀신 같은 몸놀림으로 다가와 그의 두 손을 낚아챘다.
“마, 마리!? 이, 이게 무슨….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부릅뜬 채 번뜩이는 푸른 광채가 마치 조금 전에 본 번개와 같았다. 동공에서 뜨겁고 강렬한 광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네, 선생님. 저는 완전 괜찮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기억 속의 마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 않은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붙잡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저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이렇게?”
“저는 정말….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는데…. 하지만,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가 도망치면 도망치려 할수록 더욱 끈질기게 쫓아오셔서….”
“마리…?”
울분에 찬 목소리였다. 눈꼬리에 서글픈 눈물방울도 맺혀 있었다.
하지만, 입과 눈이 웃고 있었다. 뺨은 보기만 해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저….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낀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마리가 따라서 한 발짝 따라왔다.
“하아….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그를 부를 때마다 그녀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망설임, 본디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인영 같은 것이 사라져 갔다.
이윽고 막다른 길에 부딪혀 수세에 몰린 그는 맞서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마, 마리…. 잠깐…. 내 얘기 좀 들어 봐…”
“저…. 사실…, 꽤 오래전부터 이렇게, 선생님과 맞닿고 싶었어요…. 이렇게….”
마리가 그의 두 손을 잡아당겨 제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 쓰다듬어 주세요…. 머리가 헝클어지거나 하는 건 상관없답니다. 제가, 제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요.”
그러더니 까치발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재촉한다.
이미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안다. 저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보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모를 상황에 입이 바짝 마른 그가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
“아…! 아…! 하아아….”
마리는 직접 말한 대로 베일이 벗겨지든, 머리가 헝클어지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황홀한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작게 신음했다.
“선생님선생님선생님선생님….”
“어, 으, 응….”
“다, 다음은…. 다음은…. 손을 제게….”
대단히 흡족했는지 하늘은 우중충한데 해가 뜬 것처럼 방긋 웃는다.
마리는 그가 내민 손에 제 손을 겹쳐 쥐락펴락하며 여러 가지 형태로 포갰다. 개중에는 일반적인 악수도 있었고 연인들이 하는 모양도 있었다.
그러고는 제 뺨에 가져다 대곤 마구마구 뺨을 부비적거렸다.
‘뭔가….’
“아, 아아아…. 이거에요…. 줄곧 이러고 싶었어요. 선생님의 손은 추운 날에도 이토록 따스하시네요…. 뺨이 녹아버릴 것 같아요…. 아…!”
‘뭔가…, 뭔지 모르겠지만 귀여워….’
범상치 않은 상태라는 것은 알겠는데, 억지로 해달라고 말하는 입장치고는 미묘하게 마리가 마리다워서 앙증맞았다.
하지만 그런 무른 생각은 금방 일축되었다.
“마, 마리!”
“퍄…. 하아…. 네? 왜. 왜 그러시나요? 선생니임?”
마리는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던 그의 검지 손가락을 뱉어 내며 도리어 당당하게 몸을 밀착해 왔다.
“그, 그런 건 좋지 않…”
“네? 그런 게 어떤 건가요? 선생님? 선생님?”
점점 그녀의 눈빛과 행동거지가 야릇해져 갔다. 요구 사항도 차츰 대범해져 그의 품에 몸을 비비적거리기도 하고, 심장 박동을 느껴달라며 그의 손을 제 가슴에 붙잡아 두기도 했다.
그뿐이랴, 어디든 좋으니 마음껏 만져 달라며 말하기도 하고, 몸을 숙여 달라고 부탁한 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체취를 느끼기도 하며, 그의 뺨에 볼을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이러니 이제 두 사람의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기 시작했다.
이젠 그가 이 상황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어떻게든 허리를 뒤로 빼고 버티고 있긴 했지만, 약간의 땀에 젖은 마리의 머리카락이 흩날려 샴푸 향을 풍길 때마다 힘이 빠져나갔다.
“선생님…. 선생님….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주세요….”
시키는 대로 하자, 완전히 눈이 풀려 버린 마리가 까치발을 들어 얼굴을 내밀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두 사람의 뜨거운 숨이 서로의 입술을 달궜다.
“마리…. 이 이상은…”
안 된다고 강고하게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 역시 마리에게 홀리기라도 했는지 의식이 몽롱해져 몸을 맡겨 버리고 말았다.
촉촉하고 뜨거운 입술이 포개지고 그녀의 작은 혀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새롭게 개척한 땅 위를 천진난만하게 들쑤셨다.
두 혀가 실뭉치처럼 얽히며 탐욕스럽게 서로를 탐했다. 탐욕과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두 사람이.
영 능숙하지 않아 숨에 찬 마리가 먼저 입술을 뗐다. 까치발을 들고 있던 그녀의 두 다리가 바들바들 경련했다.
“아…. 배가….”
결국 힘이 풀린 그의 허리가 마리의 몸에 기댔다. 마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딱딱한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
“선생님…. 이건….”
마리는 그것을 바라고 있으면 이상하게 허리가 저릿저릿한 것을 느꼈다. 허리? 아니, 허리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아래쪽일까.
두근
두근
두근
지금까지도 보다도 더 격렬하게 가슴이 고동했다.
“하아…. 하아…. 하아….”
숨도 더 거칠어지고 떨림도 더욱 커졌다.
마리는 그의 오른손을 자기 다리 사이의 은밀한 곳으로 잡아끌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애가 타서 미칠 것만 같은 그곳을 그의 굵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긁어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두근
두근
두근
“안 돼.”
기어코 그의 손가락 끝이 닿기 직전, 그가 마리를 있는 힘껏 떨쳐 냈다.
“안 돼. 정말로 안 돼. 이 이상은…. 하아…. 하아….”
정신을 차리고 가쁜 숨을 내쉰 그는 복도 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는 마리가 황홀경에 도취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문을 거칠게 열어 그 정체를 끌어냈다.
“하나코!”
“앗…. 안녕하세요…. 선생님…?”
교실 안에 있던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잔뜩 붉어진 하나코가 있었다.
그 순간 털썩하는 소리가 교실 안에서 들린다. 돌아보니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잠깐, 마리!”
“마리 쨩!?”
두 사람은 당장의 상황을 뒤로 미루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잠든 것뿐이에요.”
“마리….”
자세히 보니 마리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용납하기 힘든 이런 결심을 하는 데까지 며칠이나 밤을 지새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코. 설마 너가 벌인 일이야?”
날이 바짝 선 그의 처음 보는 눈빛에 지레 겁을 먹은 하나코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걱정돼서 보러 왔습니다만….”
“만?”
“이상하네요…. 제가 마리 쨩에게 준 약은 절대 이렇게 효과가 강한 약이 아니에요. 정말 약간이라고 할지, 사람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는 정신계 자양강장제 같은 것이지 절대 최음제 같은 게 아닙니다.”
“뭐…?”
“그리고 가장 의아한 것은…. 그 약, 약효의 지속시간은 기껏해야 하루 이틀 정도…, 였을 텐데요….”
심장이 내려앉은 것처럼 등골이 싸늘해진 그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 곤히 자고 있는 마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리의 행동이 이상해진 것은 약 일주일 전부터. 만약 하나코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본 마리는 명실상부 ‘진짜 마리’라는 것이다.
***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샬레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그는 스마트폰의 진동 소리와 함께 긴장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리예요.]
>[많이 바쁘신가요?]
[아니, 그렇게 바쁘진 않아.]<
>[그, 그럼….]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도….]
[…바로 갈게.]<
잠에서 깬 마리는 이전의 마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동안 너무 순수했던 나머지 약간의 등 떠밂만으로 쌓여있던 게 폭발한 걸지도 모른다.
그는 마리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수시로 그녀의 ‘해소’를 도맡았다. 트리니티 구교사, 3층 그 빈 교실에서.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는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홀린 듯, 아슬아슬한 일선 위에서 마리와 함께 춤을 추었다. 그는 마리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하지만 이제, 인내는, 그의 차례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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