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백업 완료.
◆◆◆
녀석이 컴퓨터로 키보토스에 빨리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방문을 잠근 지도 2시간이 지났다.
"슬슬 나올 때도 됐는데..."
조금씩 나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태양이 지고 있는 와중에도 여름의 열기는 여전했으니까.
사실. 더운 건 둘째치더라도... 좀 전에 그 녀석이 했던 말 때문에 받은 충격이 아직 가시질 않았다.
깡패들한테 인의라니,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이 곳의 시장이 고용해서 경찰처럼 쓰고 있다니 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내 가슴팍까지도 키가 못 닿는 꼬마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았으니까.
물론... 내가 깡패놈들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돈을 뜯고, 여러 금지된 물건을 파는 식의 온갖 불법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사람들이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걸 외면해 버리는 녀석들...
... 그게 나와 무엇이 다른가?
선생이 아무리 날 용서해줬다곤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난 지금까지 그 여자의 밑에서... 수많은 사람을 해쳤다.
나도 그들과 같거나... 어쩌면 더 못난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선생의 혈육까지, 그것도 저렇게 어린 녀석이. 범죄 조직에게 이상한 동경심을 품고 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
그래, 최소한 저 아이만큼은...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그 뿐이다.
공주도... 히요리도... 미사키도, 다 위험하게 지내게 만들어 버렸는데...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의 혈육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내가 걸었던 이 길이, 얼마나 비참하고 위험한지는 내가 겪어서 잘 아니까...
적어도 저 녀석만큼은 범죄에 엮이지 않도록 할 뿐이다.
그게, 내가 선생에게 할 수 있는 속죄이기도 하고...
...
그래도 이젠 더 이상 범죄조직에 대해 이상한 망상 따윈 품지 않겠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선생도 저 녀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 분명 속상해 할 것이 뻔하다.
듣기로는, 선생도 키보토스에 오기 전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키보토스로 오게 되면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우리에게 온 것이라 누군가 그랬었다.
만일 그 소중한 사람이 저 아이가 맞다면...
그저 '어른의 책임'이라는 이유 하나로. 소중한 혈육을 위험에 남겨 두고 우리에게 왔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물론 저 녀석에겐 부모님이 있다곤 했지만, 긴 시간 집을 비울 때가 많다 했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선생은 우리 때문이라는 변명이라도 되겠지...
저 녀석의 부모는 자기 자식을 도대체 왜 이 정글 마냥 위험천만한 도시에 남겨 놓은 거지?
최소한 폭력배들은 존경할 놈이 아니라 피해야 할 녀석들이라는 것 정도는 확실히 말해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 일단 확실한 건, 키보토스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 마굴 같은 곳에서 저 녀석이 조금이라도 강하게 살도록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그 고동색 머리를 한 어쭙잖은 졸개 녀석에게도 아무것도 못하고 평소에 늘 당하기만 했다 그랬잖아.
그렇다면, 제대로 된 폭력 집단과 괜히 엮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그렇게 결심을 하고 녀석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
.
.
◇◇◇
"힉!"
노크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인터넷에서 또 블아 떡인지를 찾아보는 일에 열중하느라, 사오리가 지금 내 집에 있다는 걸 잊어먹었던 것 같다.
"... 놀랄 것 없어. 나다. ... 그래서 뭔가 좀 알게 된 것이 있는가?"
방문 너머에서 무뚝뚝한 사오리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어떻게든 놀란 마음을 추스른 뒤에 대답했다.
"어... 그, 아뇨."
"흠... 이상하군, 네가 방에 들어가서 조사한다 그런지 벌써 2시간이 넘었는데."
"아, 그... 그건 그러니까... 죄송해요. 아무리 찾아봐도, 파업이 언제 끝나는지도... 키보토스에는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도 잘 안 나오더라고요..."
"그런가... 아쉽군."
내 거짓말에 사오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사오리에게 조폭 일 때문에 꾸지람을 한 소리 들은 게 속상해서 블아 커뮤니티나 눈팅하던 거였는데...
블아 DB가 불탄 이후로 커뮤는 아비규환이었다. 온갖 분탕들이 몰려오는 등 다사다난했으니 말이다.
사실 처음엔 집피를 써서 유동 계정으로, 최애캐가 집에 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식의 질문을 올려볼 생각도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블아 커뮤 말고는 도저히 물어 볼 만한 곳이 생각나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글을 올렸다간...
댓글(3)
ㄴ학생이 진짜로 현생에 사는 니 집에 있다고? 너 어디 아파?
ㄴ(약이나 드시고 정신 좀 차리라는 세리나 콘)
ㄴ허언증은 둘째치고 말투부터 어린애 같은데 차단하죠?
《작성 차단됨》
다음과 같은 이유로 블루 아카이브 만담터에서 영구 차단 당했습니다.
사유: 급식+깡계
차단에 이의가 있다면, 채널의 대표장과 문의해주세요.
대충 이런 꼴이 났을 게 뻔하니...
결국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로. 평소처럼 블아 커뮤에서 올라온 야한 동인지의 번역본을 보고 부끄러운 짓으로 시간을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오리가 내 방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아무튼 한숨을 내쉬고 머지않아, 사오리가 다시 내게 말했다.
"... 좀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괜찮은가?"
"어... 그러실래요...?"
내가 무심코 대답한 순간... 그제서야, 나는 바닥에 미처 숨기지 못한 C102판 블루 아카이브 에로 동인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뇨아뇨! 제가 나갈게요 그냥!"
(벌커덕-)
떡인지를 재빨리 벽장에 정리하고, 컴퓨터와 핸드폰의 화면을 후다닥 감춘 다음 방문을 재빨리 열었다.
그리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오리의 손을 잡고 어떻게든 거실로 향했다.
"이봐, 왜 그래? 뭐 옷이라도 갈아입던 중이었나?"
"어 어으...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떻게든 둘러댔지만, 사오리는 여전히 의아하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내 생각은 거기에서 완전히 멈춰버렸다.
좀 더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는데...
"... 뭐, 감추는 거라도 있는건가?"
!!!!!
정곡을 찔린 나는 새빨갛게 물드는 얼굴을 감추며 어떻게든 얼버무리려 했다.
"그! 그건 아니고요... 방금 그건 그냥 헛소리에요... 누, 누나 말대로 옷 갈아입던 거 맞아요."
누가봐도 거짓말인 게 티나는 내 말에 사오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오리에겐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수많은 블아 에로 만화책을 들키게 된다면, 분명 사오리도 날 더럽다 생각할 테니까...
사실 더 큰 문제는, 사오리가 스쿼드 동인지를 보고 자신이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걸 눈치챌지도 모르고...
"... 알았다. 정 그러면.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지."
사오리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푼 것을 보니, 그래도 어떻게든 잘 넘어간 모양이다.
"예..."
.
.
.
"... 그러니까, 새벽 시간에 운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죠?"
"그래, 그 파업이라는 게 몇 주 동안 할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길어도 일년씩 하지는 않을테니 내가 널 도와주는 시간도 길지는 않을 거다."
윽, 역시나 사오리는 빨리 돌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구나.
어쩌지... 사실 어쩌면, 평생 못 돌아갈지도 모를텐데...
하지만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사오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 그러니까, 그 동안 못된 녀석들에게 엮이지 않을 정도로 힘을 키우려면 새벽에만 운동을 해서는, 부족해."
사오리의 대답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도대체 언제 또?"
"바로 지금이다."
"네?"
"내 말은, 지금같은 저녁 시간에도 운동하러 나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어서 옷 갈아입고 나가자고."
헉, 나 운동은 잼병인데...
사실 새벽에 운동하자는 것도 진심으로 수락한 것도 아니고... 이거 난처해졌네...
"잠깐만요..."
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오리를 불렀다.
"음? 왜 그러지?"
내 머릿속엔 온갖 핑계가 떠올랐다.
어제 사오리를 집까지 옮기느라 맥이 빠졌다거나, 아니면 비를 너무 많이 맞아 감기에 걸렸다거나 하는 식의 핑곗거리들이...
하지만...
"조카, 사람이 약속을 했으면 꼭 지켜야 하는 거야."
...라는 삼촌의 말씀이 떠올라서, 결국 아무런 변명도 댈 수 없었다.
"... 혹시 위험한 녀석들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내가 잘 보고 있을테니까 안심해라."
사오리는 원래부터 쓰고 다니던 마스크를 다시 입에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사오리에게 난 짧게 대답했다.
"... 예."
땀 흘리는 건 질색이지만, 이제와서 사오리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으니까.
내 대답을 확인한 사오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뜀박질부터 시작할 건데, 혹시 근처에 적당한 운동장 같은 곳 없나?"
운동장... 운동장이라...
뭐, 운동장이라면 근처에 하나 있지만, 솔직히 거기보단 공터가 더 낫지.
"그... 운동장은 없고, 대신 운동하기 좋은 공터가 하나 있어요. 거기로 가실래요?"
사오리는 내 대답에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러지."
사오리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오리는 이미 신발까지 다 신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보니... 내가 아까 줬던 셔츠를 그대로 입고 있는게 아닌가.
정말이지... 아침에 몸을 말렸다고는 해도 그렇지.
사오리의 속옷은 아직 다 안말랐으니 셔츠를 입고 나가면 속이 비쳐 보이는데...
"그... 누나. 그렇게 입고 나가면 좀 부끄럽지 않겠어요...?"
"응? 아....."
"어... 아침에 저 따라오셨을 땐 그래도, 위에 겉옷을 입고 나오셔서 괜찮았을 텐데... 지금 겉옷까지 입고 나가면 더울 거에요. 요새 밤에도 엄청 더워서요."
하지만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사오리는 이내 다시 대답했다.
"상관없다. 어짜피 어두워서 볼 사람도 적고... 이 정도 부끄러운 것 쯤은 참을 수 있어."
말은 저렇게 했다지만, 실은 분명히 봤다.
내 말에 마스크 안의 사오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듯이 붉게 물들었던 것을.
... 그래, 이대로 같이 나간다면 여자아이인 사오리에게 폐를 끼치는 거야.
나는 말없이 다시 안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아니... 이봐, 갑자기 그쪽으로는 왜..."
사오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잽싸게 장롱을 뒤져 메리아스 하나를 찾아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입던 거라 이런 걸 입혀 주는 것도 미안하고, 무엇보다 이게 사오리 몸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노브라로 나가는 것 보다야 낫겠지.
나는 다시 신발장으로 향한 다음, 사오리에게 내 메리아스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 이거, 밖에 없어서 죄송하지만... 그래도 속에다가 입고 같이 나가요... 역시, 부끄러우니까..."
"....."
말없이 속옷을 건네받은 사오리는 신발을 벗어 예전 삼촌의 방에 들어갔다.
아침에도 진작에 화부터 내지 말고 이럴 걸 그랬는데 말야.
그래, 역시 입고 나가는 게 좋겠지.
나보다 나이가 많을 뿐, 사오리도 여자아이니끼...
여자아이...
그것도... 예쁜...
"...... 우읏..."
하아... 또 다리 사이에 피가 쏠려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최애캐에... 가장 꼴린다 생각하던 캐릭터지만... 지금은 엄연히 같이 지낼 손님이다.
그리고 그런 손님에게 이상한 생각이나 품고...
난 역시 글러먹은 녀석일까...
그래, 심호흡을 하면, 좀 부풀어 오른 게 가라앉을지도 몰라...
"스읍... 후..."
나는 그렇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사오리에 대해 쓸데없는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호흡하면서...
"습... 휴..."
.
.
.
■■■
삑... 삑....
환자감시장치는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맥박이 안정적이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조금도 안정되지 않았다.
의식 불명이라니. 그것도 선생님이.
그렇게 강하던, '어른'이...
"후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삿짱은 어디에 있을까.
아니, 애초에 무사하긴 한 걸까...
나와 히요리를 구하려고, 자기 몸까지 날렸으니까...
...
그러고보니. 선생님이 쓰러졌던 날 저녁.
조사를 다 받고 나오다가 마주친 삿짱의 얼굴... 정말 많이, 어두웠는데.
그렇게 삿짱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던 적은, 마담이 우릴 숙청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말곤 거의 없었다.
'전부 다 내 탓이다. 내가 선생의 컨디션을, 잘 살폈어야 했는데....'
뒷골목에서 침울하게 캔커피를 마시던 삿짱은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맘같아선 화를 내고 싶었다. 그게 왜 삿짱 때문인데... 라고.
물론 자책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삿짱은 그 날 당번이라 선생님이 쓰러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게다가 선생님을 등에 업고 힘들게 병원까지 달렸지만... 총학생회에게 감사 인사는 커녕. 붙잡혀 조사를 받느라, 선생님에게 병문안마저 가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마음에 상처가 컸겠지.
.....
곤히 잠든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는 선생님의 손을 잡아보았다.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답답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았지만...
돌아오는 건 의식을 잃은 사람의 차갑고 거친 살갗의 촉감 뿐...
.....
'선생님,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마음같아선 선생님을, 그리고 삿짱을 믿고 싶다.
두 사람은 이 정도로 굴하지 않는다는 강인한 마음씨를 지녔으니까.
하지만, 역시 그렇게 강한 두 사람의 상태가 말이 아니다보니...
이 의문스러운 번민과 불안 때문에 조금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
그러고보니 병문안도, 총학생회가 우리에게 볼일이 있다고 해서 어렵게 올 수 있었던 거였지.
헌데 우리가 전과가 있다곤 해도... 대체 뭘 근거로 총학생회는 삿짱을 의심했던 거지?
... 그리고, 그래놓고서는. 대체 왜 이번에는 우리를 부른 건지-
(벌컥-)
그 때, 누구인가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저기, 그... '하카리 아츠코' 씨. 맞으시죠?"
더듬거리는 누군가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거기엔 금발 생머리에, 날개가 달린, 나보다 두어 살 쯤 많아보이는 학생이 우물쭈물거리며 서 있었다.
"... 응. 그렇다면... 언니가, 총학생회에서 보낸 사람이지?"
"네... 어... 아차, 저는 이와비츠 아유무라고 합니다. 이름부터 먼저 말씀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스스로를 아유무라고 소개한 언니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얼굴에는 떨떠름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
저 아유무라는 언니의 너무 깍듯한 태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역시 삿쨩을 의심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단, 그... 저번에 조마에 씨 일은,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꼭 알아봐야 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내 눈치를 살피던 아유무 언니가 사과를 건넸다.
사과도 사과지만, '알아봐야 하는 게 있다' 라고...
"응... 그럼, 그 확인해야 했던 부분은 뭐야?"
"그게... 여러분이 이전에, 신원 불명의 오토마톤 부대와 대치한 일과 선생님의 쓰러지신 사건 사이에서 여러 가지, 알아봐야 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 뭐라고...?
마담의 잔당이랑? 삿짱하고, 우리가...
선생님이 쓰러지신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
잠깐의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좀 놀랐으니 말이다.
믿기지 않는 구석이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알아봐야 할 것은 알아봐야 하니까.
"그렇다면... 그 두 사건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린 선ㅂ... 아니, 수석 행정관님께서 여러분께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스쿼드 여러분들을 찾고 있었기도 하고요."
"... 알겠어. 그런데 언니, 혹시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어? 미사키랑 히요리도 이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필요가 있어 보이거든."
"아, 네. 마침 저희 역시 다른 두 분께도... 이 사실을 전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빨리 다녀올게. 병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서 말야."
.
.
.
◇◇◇
지금 시간은 8시 정각...
사오리를 공터로 안내한 지도 10분 지났나.
슬슬 기분 나쁘게 번쩍거리던 유흥가의 전광판 불빛도 안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공터에 도착하려면 또 3분 정도 유흥업소 근처를 가로질러야 하지만 딱히 상관 없었다.
"... 이봐."
그 때, 사오리가 갑자기 날 불러 세웠다.
"ㄴ... 네?"
"그게 말이지. 굳이 공터로 갈 필요가 있겠나?"
마스크를 쓴 사오리의 굵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네가 제일 잘 알 것 같은데. 이 근처로 돌아다니는 게 너한테 별로 안 좋다는 걸 말이다."
"아아....."
역시, 사오리도 알고 있었구나.
꼬맹이인 내가 유흥업소 근처를 쏘다니는 건 좋지 않다는 걸...
"... 내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 공터보다 가까운 곳에 초등학교 하나가 있었다. 거기 운동장은 아무래도 이 시간에도 열어놓고 있는 모양이더군"
"....."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왜냐하면, 그 초등학교는 바로 내가 졸업한 곳이었으니까.
나를 변태로 낙인 찍었던 애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인데,
이젠 그 초등학교 근처에만 가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거기를 또 간다고?
그건... 싫어...
"... 어때, 저 학교 운동장으로 가는 게 더 낫지 않겠나?"
이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었던 사오리의 말에... 잠깐 야속하다는 생각까지 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좀 싫어요."
"음? ... 왜 그런가?"
"그... 따로 말씀드리지 못할 사정이 있어요."
약간 고개를 떨구는 나를 내려다보던 사오리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 뭐, 무슨 사정인지는 굳이 캐묻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위험한 곳을 가로질러서 굳이 공터까지 가야 하겠는가."
"어... 나쁜 사람 만나면 누나가 지켜주신다 그러지 않았어요?"
"당연하지. 하지만, 애초에 그런 녀석을 안 만나는 게 훨씬 좋지 않겠나."
"..."
사오리의 말에, 결국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그 악몽같은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사오리와 함께 발을 다시 들이게 되었다.
◆◆◆
(타닥- 타닥-)
"흐엑... 헉... 흐억.....!"
거칠다 못해 마치 죽어가는 사람같은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한 채, 녀석에게 페이즈를 맞춰 주며 같이 뛰고 있었다.
...
녀석의 휴대전화로 시계를 슬쩍 보았다.
12분 47초.
이게 녀석이 뜀박질을 시작하고 나서 흐른 시간이다.
물론 준비운동을 한 시간까지 빼면 2분은 빼고 계산해야 한다.
... 일단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역시 이 녀석은 기초 체력부터 엉망이었다.
선생처럼 키보토스의 바깥 사람은 우리보다 약하다고 누누이 들었지만, 이 녀석은 그걸 감안해도 너무나 허약했다.
어떻게 전력질주도 아니고 가벼운 조깅만으로도 이렇게 순식간에 지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초보자라면 이렇게 나약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보다도 더 거슬리는 게 하나가 있었다.
"으헉... 헉... 헉...!"
그건 바로 저 녀석의 신음소리 같은 숨소리였다.
선생의 혈육인 저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엄살을 피우는 것 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이봐, 아직 30분은 더 남았어. 페이즈는 맞춰 줄 테니까, 전력질주가 아니어도 목표치까지는 뛰어라."
내가 딱 잘라서 말하자 녀석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지만, 결국 고개를 떨구고 계속 내달렸다.
사실 이 정도 수준은, 우리 분교에서 마담이 시키던 훈련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
거기에서는 3시간 이상의 지나치게 강도 높은 훈련 탓에 쓰러지는 아이들도 많았고, 그런 학생들은 바로 총살행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녀석이 20분도 안 지나서 저렇게 헉헉대는 것이 썩 좋지는 않았다.
진짜로 죽을 듯한 훈련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니 말이다...
... 그래도, 어떻게든 따라오려고 하는 부분은 기특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지 5분도 채 안 지나서, 녀석은 결국 한계에 달했다.
"크헉... 안 돼 더... 더 이상은...!"
불안정하게 휘청거리며 달리던 녀석이 결국...
(철푸덕-)
"흐엑-!"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운동장 흙바닥에 넘어진 것이다.
녀석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나는 재빨리 뛰어가서 녀석을 내려다봤다.
선생을 빼닮은 녀석의 밝은 오랜지빛 곱슬머리에는... 이미 흙먼지와 땀방울이 뒤엉켜 있었다.
"이봐, 괜찮나? 움직일 순 있겠어?"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녀석의 비명이 워낙에 커서, 난 저 녀석이 발목이라도 접지른 줄 알았다.
"우욱... 예... 그, 근데 무릎이 너무... 따끔... 거려서요."
무릎이라...
'설마 찰과상이라도 입은 걸까?'
하는 걱정이 들어 녀석의 무릎을 바라보니...
"... 이건, 그냥 까진 것 뿐이잖냐."
나도 참, 괜히 놀랐군.
심지어 피도 한 방울 안 났잖아.
"쓰읍, 아야얏... 으으윽..."
하지만 내 말 따윈 제대로 듣지 못한 건지, 녀석은 계속 침을 삼키며 괴로워했다.
"허 참....."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봐, 이 정도 부상은 별 거 아니다. 옷에 먼지부터 털고 다시 뛴다."
그러나 내 말에 녀석은 마치 오랫동안 참았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소리쳤다.
"무... 무리라니깐요...! 이만큼도 힘들어 죽을 정도인데, 더 이상 제가 뭘 어떻게 뛴다는 거에요..."
...
정말이지 골치 아프게 되었군...
"야, 나약한 소리 하지 마. 정신 차리고 얼른 다시 일어나서 뛴다. 끝까지 뛰겠다는 건 지켜야 할 것 아닌가."
좀 거친 말투지만, 이럴 때일 수록 녀석이 마음을 굳게 먹도록... 더욱 엄격하게 나와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그래도 녀석은 고집을 피웠다.
"안돼요. 저 못해요! 이 이상 할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이 녀석이...!'
"이봐, 계속 돈 뜯기면서 살고 싶은 거냐!"
"!!!!!"
.....
내 고함을 듣고, 놀란 토끼 눈을 뜬 채로 굳어버린 녀석의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했다.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윽박을 지르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의 조카에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다그칠 뿐이었다. 아니, 다그쳐야만 했다.
"그런 소리 할 시간에 1분이라도 더 뛰어서 강해지란 말이다. 알아들어?!"
은인의 혈육에게 너무 엄격하게 군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불량배들이 판을 치는 이 정글같은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을 기르는 것 뿐이니...
무엇보다도.
'차라리 죽는 편이...'
이런 나약하고 한심한 소리에, 저 녀석이랑 미사키를 겹쳐 보고 말았으니까.
오히려 그 때와는 달리 주먹이 올라가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지던 침묵 끝에...
결국 녀석은 고개를 떨군 채로 스스로 일어났다.
어떻게든 울음을 참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파졌다.
'... 윽박질러서 미안하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ㅇ... 이걸로... 끝...!"
간신히 나와 약속한 운동 시간을 전부 채운 녀석이 바닥에 주저앉아 쉬었다.
저 녀석이... 끝나자마자 쉬면 관절이 다친다고.
"... 그래, 이 정도면 나쁘진 않은데... 스트레칭은 하고 쉬어라."
"엥... 우웃..."
내 말을 들은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몸을 일으킨 다음 발목과 무릎을 빙글빙글 돌렸다.
...
스트레칭까지 끝나고, 녀석과 나는 같이 벤치에 앉았다.
"..... 헤헤... 생각해보니 10년도 넘게... 이렇게 필사적으로 달린 적이 없었어요...."
녀석이 수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10년... 그러니까 체력이 모자란 거지.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그러니까 한 4살 때 쯤에도 이렇게 죽기살기로..."
"... 4살 때?"
"아앗,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으... 잊어 주세요. 네."
녀석은 나의 물음에 당황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그 나이에서 뭔가 필사적으로 달릴 일이 있었다. 라고...
... 어째 신경이 쓰이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지금은 할 말부터 먼저 해야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 내일 새벽부턴 진짜 열심히 해야 할 거다."
"네?"
"너의 기를 죽이고 싶진 않다만, 지금의 너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나약하니 말이다."
"아아..... 웃, 맞는 말이에요."
녀석의 표정에 풀이 죽은 듯한 느낌이 서렸다.
나도 참, 기를 죽이긴 싫다고 말해놓고선 이게 뭐란 말인가.
내가 좀 더 친절하게 말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
(휘이잉.....)
여름밤의 바람이 운동장 바닥을 스치며, 모래먼지를 그렸다.
여전히 후텁지근한 공기였지만, 땀을 식히기엔 충분한 정도의 온도.
......
"그, 미안해요."
바람을 맞으며 함께 쉬던 녀석의 말에, 나는 의아해졌다.
"???"
미안하다, 라고...
"... 아니다. 솔직히, 운동에 미숙한 너를 좀 거칠게 다룬 것도 잘못이니까."
"네, 그치만... 제가 누나를 잘 몰라서 자꾸 상처를 드리는 것 같아서요."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하자, 나는 녀석과 눈을 맞추며 되물었다.
"그건... 무슨 의미지?"
"그러...니까. 아까 아침에도 저희 삼촌에 관한 말은 듣지도 않은 채로 누나를 안방에 끌고 갔잖아요?"
"그렇긴 하다만.... 으음, 그건 네가 사과하지 않았나."
"네, 하지만... 이번에도 누나가 절 도와주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꾸 엄살만 피웠으니깐요."
"......"
"그니까, 제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는 게 좀 서툴거든요. 워낙에... 친구도 없는 녀석인지라 대인관계도 엉망이어서..."
녀석의 말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너무 그렇게 자책하는 것도 좋은 건 아냐.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정신을 바로잡고 일어날 생각부터 하는 게 좋을 거다."
...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정작 자책을 많이 해대는 것은 나 스스로가 아닌가...
하지만, 녀석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저도 그건 알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도, 다 내 탓이야 이런 건 아니거든요."
".....?"
"그... 그러니까, 실은.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계속 칭얼대는 와중에도 참아주고, 도와주셨으니깐요."
"고맙다... 라는 건가?"
"..... 당연하죠. 솔직히, 여긴 누나한테 있어서 완전히 먼 나라랑 똑같잖아요? 그래서 많이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죠."
"....."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건 어떻게 눈치 챈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누나는 그런 와중에도 절 많이 도와주셨으니깐요. 오히려 제가 누나에게 도움을 드려야 할 판인데도 말이애요."
"....."
"누나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누나가 살면서... 어으, 거의 처음으로 사귄 친절한 사람... 이리고 생각해요."
녀석은 '친절한 사람' 이라는 말을 꺼내며 얼굴을 붉혔다.
친절한 사람이라...
".... 그렇군."
나는 짧게 대답했다.
...
'아니야.'
'난,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야.'
'만약 내가 너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었다면...'
'오늘 새벽에, 내가 널 보고도 선생의 혈육이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그리고, 네가 그렇게... 선생처럼... 생판 남인 나를 이렇게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난 그냥 너를 귀찮은 꼬마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저... 나는 받은 대로 보답하기 움직인 것일 뿐이야.'
'물론 네가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맙지만, 어른인 선생과는 다르게...'
'난 네가 미숙하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이렇게, 쓸데없이 엄격하게 나오고, 훈련 강도도 똑바로 맞춰주지 못한 거야.'
'... 그러니까, 고마워해야 할 건 오히려 나야.'
'내가 네 삼촌의 학생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히 낯선 사람인 나를 받아줬으니 말야.'
'... 그러니까.'
'그.....'
'...'
'정말, 고마워.....'
...
.
.
.
◇◇◇
...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전화의 시계를 보니, 9시 20분으로 나오네.
그러고보니, 사오리의 휴대전화는 충전을 못 시켜줬네...
사오리의 폰으로는 여기서 통신이 안 될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가면 충전시켜줘야겠어.
"... 돌아갈까요?"
나는 벌떡 하고 밴치에서 일어나 사오리에게 말했다.
"... 그러자."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그... 그럼 내일 새벽에는 한 몇시쯤 부터 나가서 운동할거에요?"
학교 운동장의 계단을 내려가던 중에, 사오리에게 물었다.
"... 5시 반. 여름이니까 아직은 해가 일찍 떠오를 테니 말이지."
뭐?! 그 꼭두새벽에 나간다고.....
"히익! 저... 그, 그 시간대에는 못 뛰어요!"
"아냐, 할 수 있어. 이번에 한 시간도 충분히 채웠지 않느냐."
"우웃....."
... 그래. 사오리가 저렇게 응원하는데, 방금 전처럼 엄살피우면 곤란해.
"... 알았어요."
나는 애써 기운을 차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치도 못한게 있었다.
설마 했더니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누가 엿듣고 있었을 줄은....
(부스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