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 차가운 공기가 뺨을 찌른다.
나는 최근에야 겨우 익숙해진 거리 풍경을 옆으로 바라보며 시린 손에 숨을 몰아쉬며 걷는다. 추위를 싫어한다.
'이제 장갑 사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따뜻해진 손이 식지 않도록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전투용 장갑이 가방에 들어있던 것이 생각났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약속 시간에 늦을 수는 없으니까.
약속, 그렇네.
드디어 보이는 목적지 건물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쉰다. 긴장의 표시다.
오늘 약속은 아르바이트도 아니고, 학교도 아니다.
'선생님'을 도와주는 일, 그 당번의 날이었다.
"항상 아르바이트로 고생하네. 내일은 잘 부탁해, 세리카."
어젯밤 선생님이 보내온 모모톡을 떠올린다.
'정말이지 선생은...자신은 쉴 틈도 없을 정도로 바쁜데, 이런 일은 척척 해내는구나.'
분명 나만 그런 게 아니겠지. 어느 학생에게나 이런 식일 것이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언젠가 꼭 불평해 주어야겠다.
그러는 사이에 '샬레' 건물 앞까지 와 버렸다.
유리로 된 건물이라 거울 대신 거울을 이용해서 머리와 머플러를 조금 정돈한다.
팔을 뻗어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8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 10분 전, 딱 좋은 시간이다.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차가운 뺨을 한 번 톡톡 두드리며 나는 선생님이 기다리는 사무실로 향했다.
"안녕 세리카. 추운데 여기까지 잘 왔어."
좋게 말하면 사람 좋아 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얼굴의 인물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인자한 미소를 보고 안도하는 한편, 역시나 조금 화가 났다.
'시로코 선배도, 노노미 선배도, 이런 놈이 뭐가 좋다는 건지...'
대책위원회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우리 '아비도스 폐교 대책위원회'의 고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선생님이 아비도스에 오면 선배들의 모습이 이상하다. 이상하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으니, 뭐 그런가 보다. 나는 다르다. 확실히 선생님은 다정다감하고, 위급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부끄러운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멋없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 남의 걱정만 하느라 자기 자신은 뒷전인 것 같고!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적지 않지만...나는 이런 어른따위...
"세리카, 괜찮아? 얼굴이 빨개... 역시 추웠지? 지금 난방 틀어줄게."
"헤, 괜찮아! 미안, 선생님. 걱정끼쳐서."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선생님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리모컨을 잡고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아무래도 저쪽도 아직 사무실에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또 다시 선생님을 신경 쓰게 만들었다.
"학생을 돌보는 것이 어른의 책임이니까"라고 선생님은 자주 말하지만, 왠지 귀찮게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복잡하다. '어른의 책임'이라고 선생님은 자주 말하지만, 그것이 짐이 되는 것은 아닌지 늘 걱정이다.
"...잠깐만 기다려. 원하는 곳에 편히 있어."
"선생님? 무슨 일이야?"
조금 생각에 잠긴 듯한 제스처를 취한 후, 선생님은 "금방 돌아올게"라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안 돼, 너무 많이 생각했어. 마음을 다잡고 왔는데, 이래서는 의미가 없잖아...'
정신 차려, 쿠로미 세리카! 라고 스스로를 독려한다.
일단 시키는 대로 기다리기로 하고 우선 짐을 정리한다. 항상 빌려 쓰는 손님용 옷걸이를 꺼내어 외투와 머플러를 걸었다. 그리고 옷걸이에 옷걸이를 다시 걸려고 하는데, 선생님의 상투가 눈에 들어왔다. 학생회 연합회인 총학생회답게 새하얀 코트인데, 많이 낡은 상태다.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는데도. 자세히 보니 작은 흠집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학생들의 다툼에 휘말려 한 벌이 아예 망가져서 새로 샀다고 했었지'
그게 한 달 전인가. 아마 그 이후에도 매일 누군가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을 것이다. 시선을 돌려 선생님의 책상에 눈을 돌리니 거기에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가 있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바쁘다. 그래도 얼굴을 마주치면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짜증을 넘어 이번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학생을 돕지만, 학생은 선생님을 도울 수 없는 걸까. 그런 생각에서 조금이나마 선생님에게 도움이 되고자 시작한 것이 이 '당번제'였다. 하지만 오늘 당번인 나는 지금 당장은 선생님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눈치를 보고 있다. 왠지 모르게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침울한 마음으로 당번 학생이 사용하는 책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기로 했다. 블레이저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화면에는 8:57이 표시되어 있다. 출근 3분 전, 선생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곧 업무시간인데 어디로 간거야...'
또 어디선가 귀찮은 일로 머리를 싸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선생님을 찾으러 사무실 출구로 뛰쳐나갔다.
'일단 샬레 밖으로 나가서 편의점 점원에게 물어보자.'
라고 생각하며 복도를 돌아서려고 할 때,
"우왓, 세리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무슨 일 있어?"
돌아서서 나온 선생님과 마주쳤다.
"무슨 일이라니, 선생님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서 찾으러 가려고 했다고!"
무심코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선생님을 향해 나는 그만 강하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아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걱정하게 만들었네. 미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그렇게 말하면서 선생님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보여주었다. 하얀색 머그잔이 보인다. 아무래도 잡화점에서 컵을 사다 온 모양이다.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일단 돌아갈까?"
선생님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사무실로 향한다. 나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뒤따라갔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선생님은 자신의 책상이 아닌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양손에 들고 있던 컵 중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에게 손짓한다. 권유에 따라 마주 보는 소파에 앉자 아직 손에 남아있던 다른 컵을 건네주었다.
"커피, 싫어하지 않는다면. 인스턴트여서 미안하지만..."
"아냐, 괜찮아. 고마워, 선생님.
그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짧게 '응'이라고만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얼굴이 뜨겁다. 선생님의 얼굴도 볼 수 없어 받은 컵을 양손에 들고 그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비친 내 얼굴은 별로 형용하고 싶지 않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앞에 서 있다. 한동안 코를 간지럽히는 커피 향과 사무실에 걸려 있는 시계 바늘 소리만 방안에 흐르고 있었다.
맞다, 시간.
생각에 잠겨 소매에 숨겨져 있던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간은 9:05, 근무시간을 5분이나 지나고 있었다.
"...일, 괜찮아?"
나는 짜증을 내며 물었다. 아직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다. 선생님은 한 박자 늦게, 부드럽게 답했다.
"가끔은. 세리카는 항상 열심히 하고 있잖아? 오늘은 일도 적고,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선생님이 무리하잖아!"
폭발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해버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다.
눈두덩도. 선생님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보이지 않는다.
"일이 적다는 거. 거짓말이지? 선생님, 또 무리하고 있잖아. 자신도 바쁜데 왜 그렇게 남의 걱정만 하는건데."
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선생님'인 이상 우리에게 기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라도 의지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선생님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짊어질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런 힘든 일, 그냥 도망쳐도 좋을텐데...
"좋아하거든. 이 일을."
그것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평소처럼 타인을 배려하는 목소리와는 또 다른 감정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갑자기 이 세상에 와서 '당신은 선생님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린짱에게는 미안하지만, '왜 내가?' 라고 생각했어."
원망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지만, 그 목소리에서 부드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학생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기 시작했지."
"뭘?"
"너희들의 얼굴이야. 기뻐하는 얼굴, 화난 얼굴, 즐거워하는 얼굴 그리고, 지금처럼 울고 있는 얼굴도."
선생님은 부드럽게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항상 실실거리던 선생님의 얼굴이 지금은 너무 슬퍼 보였다.
"나는 너희들의 웃는 얼굴을 좋아해. 힘들고 괴로운 일도 그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힘들지 않아."
선생님이 내 눈물을 그 손으로 닦아주었다. 얼굴을 만지는 건 싫지만, 지금 이 사람의 손은 불편함보다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선생님만 상처받잖아. 힘들고, 쉬지도 못하고..."
나는 쩔쩔매면서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재미있어. 그래서 할 수 있는거고."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의 얼굴은 물방울이 맺힌 시야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맑아보였다.
'아, 이 사람은 정말 속이 깊구나.'
그렇게 자비로운 목소리로, 부드러운 얼굴로 말해주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대답했다. 강한 사람. 대단한 사람. 이게 어른이구나. 이런 훌륭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것은 아직 어린 나에겐 너무 큰 욕심이었나 보다.
"하지만 나도 가끔은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어."
"어..."
지금껏 부처님 같은 자비심을 품고 있던 어른이 마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니까. 사실 귀찮아서 그렇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힘들어서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지."
"그럼 왜 ......?"
나는 호소하듯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갑자기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내 쪽에서 눈을 돌렸다.
"내가 아는 아이 중에 정말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거든. 그 아이는 입으로는 항상 까칠하게 대하면서도 매일같이 학교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야.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로."
"아니, 잠깐 선생님!"
부끄러워서 말대꾸를 하려고 하니 머리를 세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래도 참을성 있게 들어달라는 뜻인 것 같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선생님에게 당황했다.
"그 아이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어.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거야?'고. 그랬더니 그 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가 할 수밖에 없잖아. 왜냐면 우리 학교니까'라고 대답했지. 그 말을 듣고 이 아이는 친구를, 선배를, 그리고 학교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서툴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으으..."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로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이 이번에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상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버릇도 선생님의 나쁜 버릇이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너무 특정 학생을 치켜세우는 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나는 그 아이를 존경해. 너무 열심히 하다가 쓰러질 것 같은 그 아이를."
그것은 언젠가의 추억이었다. 해질녘 공원에서 선생님이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줬다. 그래, 그게 너무 좋아서 나도 선생님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좌절할 때면 그 아이의 미소를 떠올려.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그 밝은 미소를. 그러면 신기하게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컵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앉은 후로 서로 컵에 입을 대지 않았던 것이 생각난다.
"뜨거워!"
"선생님! 괜찮아?"
당황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에게 달려가려고 한다. 선생님은 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하면서도 혀를 살짝 내밀어 힘들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양이 혀다.
"아니~ 이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직 뜨겁네."
"의외네. 선생님. 고양이 혀구나"
생각해보니, 큰 어른이 따뜻한 음료에 화상을 입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모처럼 그동안 멋지게 나를 위로해줬는데, 이대로는 진지한 분위기가 망가져 버린다.
"그래, 그래. 세리카랑 똑같네."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움직여 보인다. 아무래도 내 귀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무슨! 사람이 걱정하고 있는데! 바보!"
완전히 독기가 풀려서 평소처럼 선생님에게 소리를 질러댄다. 어느새 눈물이 멈추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도 풀렸다. 얼굴은 여전히 뜨겁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선생님은 자신의 책상으로 가려고 한다. 허둥지둥 벽시계를 보니 9:30을 조금 넘긴 시간이다. 이제 곧 업무에 복귀해야 할 시간이다.
--이런 어른. 언제부터 진심이었을까. 어디까지 진심일까...
어쨌든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일단 오늘 당번이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선생님을 도와주는...것 같다.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새하얀 머그잔을 들어 올려 그 내용물을 단숨에 마셨다. 선생님이 내려주신 커피는 뜨거운거에 약한 나조차도 문제없이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식어버렸지만 말이다.
"저기, 선생님?"
'응?' 이라고 대답하는 뒷모습이 나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고, 부끄러웠지만 나는 역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갤펌
원본(픽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