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기를 쓰면서 제가 패러디, 팬픽을 얼마 정도 번역했는지 살펴봤더니
딱 100개 정도 살짝 안되게 번역했더라구요
남들보다는 패러디 쪽을 꽤 많이 읽고, 꽤 많이 번역한 셈 입니다
그 중에서도 전 이 ‘포켓몬 탐정 사건 파일’을 제 인생 팬픽, 웹소설로 꼽습니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하면
‘해당 원작에 대한 애정이 넘치고’,
‘필력이 좋고’,
‘소설 자체의 구성이 매우 치밀하다’
이 3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정말 좋은 포켓몬 패러디 소설도 많고 재밌게 본 소설도 많지만
이 3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춘 소설은 많지 않았습니다
사실 많은 중국 패러디, 팬픽들이 그렇지만
정말 원작을 플레이 하지 않거나, 읽어보지 않고 쓰는 작품이 많습니다
커뮤니티, 패러디에서나 통용되는 2차 설정으로 뼈대를 잡아 작품을 쓰는 식이죠
포켓몬 장르를 예를 들자면
포켓몬스낵을 영약처럼 취급한다거나,
마치 선협의 축기기, 원영기 같은 천왕급, 챔피언급이라는 근본없는 파워 커브 용어를 사용한다던가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인지 ‘포켓몬 탐정 사건 파일’은 기본적으로 게임 기반의 소설 이라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메인 사이드킥으로서 ‘블루’가 등장하지만 중요 스토리는 본가 BW게임의 여주인공 투희가 캐릭터로 등장하며
철저히 게임 기반의 이벤트로 소설을 풀어냅니다 ex) 칠보시티 박물관 도난사건, 타워오브헤븐에서 불카모스를 추모하는 노간주, 플라스마단의 프리깃 등
이런 특징에서 나오는 장점이 바로 ‘무국적성’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특유의 중국스러움이 없습니다
중국 소설에서 유난히 도드라지는 이익 다툼, 자원 배분 등등 마치 포켓몬 스킨을 뒤집어쓴 선협 소설을 보는 것 같은 불쾌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묵직하고 진지한 포켓몬 세계의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간편하게 이익다툼, 한도없는 포켓몬 수집에 골몰하는 대신 정말 해당 세계관의 인식, 캐릭터를 치밀하게 파고듭니다
대표적으로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한 얘기는 제쳐두고,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게치스 씨?" 휴고가 물었다.
"말해봐라. 병원 휴게실 베갯잇에 뿌려둔 '수면가루'를 생각하면 너와 나, 둘 다 시간은 넉넉하다. 해가 지기 전까지, 우리는 협력에 관한 각 조항을 천천히 협상할 수 있을 거다."
"아뇨, 제가 묻고 싶은 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그 반지에 대한 겁니다."
"호오?" 게치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제 과거 조사에 따르면, 쿨럭, 하르모니아 가문은 당신이 해저 유적의 보물을 발굴하기 전까지, 귀족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체면이 서지 않는 몰락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황금 반지가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물이라고 했죠. 이 점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허허, 모순된다는 건가? 마음대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기적의 물건을 가졌으면서, 어째서 평범하게 몰락했냐고? 스스로 고귀하다고 자부해서, 반지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것을 경멸했기 때문일까?"
왕족의 후예는 비꼬는 투로 되물었을 뿐,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닙니다." 휴고가 말했다.
"설령 어느 세대가 그런 이유로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유산을 계승해야 하는 유혹 앞에서 그들의 후손이 반드시 선조의 가르침을 따르리란 법은 없죠. 제 생각엔, 그건 어떤 강제적인 원인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하물며 명예를 위해 부를 버릴 만큼 고결한 가문이 권력욕의 집합체 같은 게치스 같은 후손을 길러낼 리가 없다. 휴고는 이 부분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호오, 그렇다면 탐정 나리의 생각은 어떤가?"
게치스는 왼쪽 손가락 마디에 낀 반지를 뜯어보며 신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어디 보자……. 쿨럭, 쿨럭. 어떤 환경 조건이 하르모니아 가문이 고대 왕국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현대에 이르러 서서히 사라졌다가, 게치스 씨, 당신 세대에 와서 다시 얻게 된 것일까요?"
휴고는 게치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노기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단도를 쥔 손에도 더욱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곧 입에 담을 진실이, 인내에 익숙한 이 야심가조차도 참을 수 없는 사실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마음속의 답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
"혈통입니다."
장포를 입은 현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병약한 탐정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마른 목소리로 거침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 손에 있는 그 반지는, 순수한 하르모니아 왕족의 혈통을 이은 계승자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혈통은,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점차 희석되었죠. 그래서 이 거의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추세에 맞서기 위해, 혹은 그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위태로운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가문이 몰락 직전에 처해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던 하르모니아 왕족은 결국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상식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궤변이다, 그만해라."
귓가에 들려오는 말은 마치 귀를 찢는 듯한 "금속음" 같았다. 게치스는 화려한 소매를 휘저으며, 목 깊은 곳에서부터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휴고의 조리 있는 서술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탐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친혼."
휴고는 현자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덮어버릴 만큼 목소리에 힘을 주며, 병상에서 힘없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일반적으로 현대 과학 상식에 따르면, 혈연이 가깝고 유전자 유사성이 높은 배우자일수록 결함이 있는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오래된 신물이 다시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해, 고대 왕족의 고귀한 혈통을 회복하기 위해, 하르모니아 가문은 대를 이은 근친혼을 시작했습니다. 먼 친척을 본가로 들이고, 사촌 오빠가 사촌 여동생과 결혼하고, 조카가 조카딸과 혼인하고, 심지어는 차마 듣기 힘든 짝을 이루는 방식까지……. 이런 기형적인 혼인이 고대 왕족의 마지막 후예들에게서 끊임없이 반복되었죠. 마침내 당신의 혈통 순도가 반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준에 도달하기까지 말입니다. 그제야 고대 왕국의 혈맥이 부흥할 수 있었던 거죠. 쿨럭,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마침내 탐정의 설명을 중단시켰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게치스의 분노로 가득 찬 붉은 눈동자뿐이었다.
휴고는 상대가 손에 든 작은 칼을 무시하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위와 같은 정보를 추리해 내자, 이전에 풀리지 않았던 많은 수수께끼들이 자연스럽게 풀렸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반지를 언급할 때 왜 그런 경멸적인 어조를 사용하는지, 왜 각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왼손만 사용해 저를 위협했는지, 왜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대 왕국의 직계 혈통인 게치스 씨가 왜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양자 N을 교단의 후계자로 선택했는지……. 이 모든 이유는, 당신이 왕족 혈통의 계승자인 동시에 혈통에 깊이 속박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야심으로 가득 차 있지만, 온몸에 흐르는 자신의 피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혐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흑막 뒤에 서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꼭두각시 조종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탐정의 추리는 여기까지였지만, 그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사실은 더욱 아이러니했다. 즉, 지금까지 전해진 가장 순수한 하르모니아 혈통을 지닌 게치스조차, 지금은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양자를 새로운 시대의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워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온 가문이 수백 년간 이어온 뒤틀림과 고난이 맺은 결실이, 고작 사람을 투명하게 만들어 모습을 감출 수 있게 하는 반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대 왕국의 영광은, 검은 뇌전이든 하얀 불꽃이든, 혈통을 짊어진 자가 강림했다고 해서 다시 현세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제물 의식 속에서 그, 게치스는 그저 헛되이 소모된 공물일 뿐, 꼭두각시가 될 자격조차 없는 가짜에 불과했다.
분노가 극에 달하자, 게치스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그는 탐정을 바라보았다——
BW를 플레이 하면서 게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단서나, 게임상의 캐릭터 사진을 통해 많은 2차 창작에서는 크게 존재감 없는 게치스라는 보스 캐릭터가 사실은 수 세대에 걸친 근친혼에 의한 유전병 환자였다라는 장면을 설득력있게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포켓몬스터 세계관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하고 최대한 설득력 있는 장면을 보여주려고 하는 노력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첫번째 장점입니다.
2. 필력이 좋다
또한 이 작품은 포켓몬스터 팬픽임을 떠나 순수하게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제222장 호박색 습작: 탐정의 첫 포켓몬
소년, 넌 "10만볼트" 전기 충격을 받아본 적 있나?
그렇게 단호하게 고개를 젓다니, 운이 좋았네.
나는 예전에 벌집을 지키다가 식탐 많은 럭시오한테 전기 공격을 당한 적이 있거든.
야생 포켓몬 주제에, 그 커다란 고양이가 속성 간의 상성 관계를 기억하고 있었다니 참 대단했지.
처음에는 날카로운 이빨로 "깨물어부수기"를 사용하려는 줄 알았는데, 녀석이 발톱을 들어 올리자 공중에 형태를 알 수 없는 샛노란 번개가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생각할 틈도 없이 온몸이 찌릿찌릿해졌고, 그 감각은 다음 순간 극심한 고통으로 변해 숨이 멎을 뻔했다.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에는 내 몸에서 풍기는 역겨운 탄내까지 맡을 수 있었지.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야. 뭐, 내가 멋대로 꺼낸 이야기지만……. 음, 그래. '말했다'고 이해하는 건 좀 부적절하겠지.
방금 대화하는 동안 내 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으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 같은 포켓몬은 늘 조용하다는 인상이 있고, 나 자신도 동족 중에선 과묵한 편인 특이한 개체지만, 벙어리는 아니어서 울음소리 정도는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누군가와 마음껏 대화하는 건 태어난 이래 처음이라 꽤 신선한 경험이야.
대화 상대가 인간 아이일 줄은 정말 몰랐네.
비정상적인 걸로 치자면, 너야말로 더 별나지.
내가 표정에 마음이 다 드러나는 포켓몬이라는 건 인정한다.
얼굴 표정이 남들의 세 배나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넌 순식간에 그 표정들을 전부 언어로 번역해서, 마치 독심술이라도 쓰는 것처럼 내 생각을 이해했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괴물 같은 천재이거나, 아니면 천재 같은 괴물이거나.
넌 천재인가? 뿔충이처럼 대단한 천재? 뿔충이는 당연히 천재지.
종족 수명은 우리랑 비슷한데 진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거든.
태어난 지 열흘 만에 독침붕으로 진화하는 뿔충이도 본 적 있다.
걔들은 벌집을 짓지도 못하고 생김새도 좀 무섭지만, 진화하고 또 진화해서 독침붕이 되면 굉장히 강해져.
모든 개체가 그렇게 진화할 수 있지.
이 정도로 우수한데 심지어 팀플레이까지 할 줄 아니, 이런 포켓몬은 천재라고밖에 할 수 없지 않겠어?
너도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슈퍼 천재인가?
하긴, 그것도 그렇네. 천재라는 평가는 남이 해주는 거니까.
경험 많은 나조차도 스스로를 천재라고 칭하는 뿔충이는 본 적이 없다.
인간이든 포켓몬이든 다들 의외로 겸손하고 신중하단 말이지.
정말 지나치게 다정한 세상이야. 재능이 있으면 대담하게 드러내야지, 안 그러면 진짜 평범한 녀석들이 너무 불쌍하잖아.
음, 정했다! 소년, 지금 이 순간부터 넌 내가 인정한 천재다!
소년 천재, 재능 괴물, 대단한 인간. 반박은 일절 받지 않겠다!
아, 왜 또 그렇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거야? 반박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이게 바로 인간들이 말하는 반항기라는 건가? 아아, 생각났다. 그렇군, 그렇군.
전에 야외 훈련장에서 있었던 그 일 때문이구나?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누구에게나 단점 한두 개쯤은 있는 법이야.
우리가 만든 벌집 격자도 가끔은 완벽한 육각형이 아닐 때가 있다고.
넌 그저 포켓몬 배틀을 지휘하지 못할 뿐이잖아. 내 생각엔 그건 단점 축에도 못 껴.
네가 지금 뭘 고민하는지 당연히 알지.
널 무척 걱정하던 그 금발 누나를 피해서 혼자 이곳 야외로 달려올 때부터 쭉 네 뒤를 따라왔으니까.
어이, 너도 진작에 날 눈치챘어야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실수로 나뭇가지에 부딪혔을 때 갑자기 돌아서서 날 받아주지도 않았을 테고.
오늘은 왠지 운이 지지리도 없네.
어이, 어이! 울상 짓지 마!
내가 표정을 읽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생명의 은인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천재답게 좀 여유를 가져봐.
내가 뭔가 오해했나?
설마 내가 나뭇가지에 부딪힌 게 너 때문은 아니겠지?
아, 고개를 끄덕였어! 그런 거였나.
포켓몬을 지휘할 수 없는 특이 체질, 포켓몬들을 서투르게 만드는 기묘한 오라라…….
하하하하하, 세상엔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구나.
견문이 넓어졌어.
따분하게 지금까지 살아온 보람이 있네.
그렇게 되니, 아까 있었던 일도 쉽게 이해가 가는군.
넌 분명 그 딥상어동과 상성이 맞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그 갓 태어난 녀석은 혈기왕성해 보여서 분명 머릿속에 싸움과 승리 생각뿐일 거야.
너처럼 필패가 확실한 트레이너의 손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겠지.
그래서 넌 엄청난 천재이면서도 포켓몬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 거겠지.
아니, 오히려 천재이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을 예견하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도망친 걸 거야.
어차피 네 몬스터볼은 포켓몬이 더는 성장할 수 없게 만드는 감옥이니까…….
아, 미안. 내 표정이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네.
정말 미안하다. 음,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인연인데,
사실 나도 그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제3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
난 표정으로만 답할 수 있고 말로는 대답할 수 없지만 말이야.
어차피 인간은 포켓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런데 나처럼 무지하고 무능한 포켓몬의 견해가 정말 고민 해결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내가 황당무계한 말을 할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는 건가? 후자겠지.
천재들의 취향은 역시 기묘하군.
그만두자.
포켓몬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천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딥상어동을 키우는 트레이너가 되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면, 다시 처음의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네 눈에 포켓몬 간의 배틀은 어떤 모습이지?
넌 "10만볼트"에 맞아본 적 있나? "화염방사"에 데어본 적은? "냉동빔"의 추위나 "잎날가르기"의 날카로움을 느껴본 적은? 그럼 "돌진"은? "날개치기"는 어떻고? 적어도 "벌레의야단법석"이라도 들어봤어야지…….
뭐라고? 지금까지 "마비가루"조차 겪어보지 못했다니, 정말 순탄한 인생이었구나.
솔직히 부럽다.
위에 말한 기술들을 내가 전부 겪어본 건 아니지만, "10만볼트"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무서운데, 포켓몬 배틀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된다면 분명 더 다양하고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겠지.
나는 겁 많고 소심한 포켓몬이라 그런 일을 겪는 게 무서워서, 풀숲에서 벌레 잡는 아이만 봐도 멀리 도망친다.
그런데도 기술 공격을 꽤 많이 당했지.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도 너와 같겠지.
너희에겐 포켓몬처럼 타고난 방어력이 없으니,
정말로 기술에 맞으면 분명 우리 포켓몬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입을 거고, 심지어 원래대로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포켓몬이 겪는 뼈저린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너희 인간들이 "우리에게 정말 포켓몬에게 싸우라고 지시할 권리가 있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거기에 대해 불만을 가진 포켓몬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야 기세등등한 공격 기술들이 무섭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나와 맞서는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분명 기뻐서 이리저리 날아다닐 거야.
만약 계속 백전백승한다면, 어쩌면 나조차도 배틀을 좋아하게 될지 모르지.
그러고 보니, 아까 "10만볼트" 얘기했었지?
"10만볼트"에서 '볼트'는 도대체 무슨 뜻이야?
사람 이름 같은데, 볼트 씨는 너희 세계에서 아주 대단한 사람인가?
그만두자. 네가 설명해 줘도 난 이해 못 할 거야.
인간의 언어 환경은 애매함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런데도 트레이너의 지시를 알아듣는 포켓몬들은 정말 대단한 노력을 하는 거지.
아니, 아니. 내가 포켓몬이 트레이너를 선택하면 고뇌만 따른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사실 고민보다는 거두어지는 것의 장점이 훨씬 더 많지.
더는 야생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지낼 필요도 없고, 천적의 습격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듣자 하니 매일 맛있는 음식을 세 끼나 준다고 하더라.
물론 그렇게 되면 주인을 위해 배틀에 몸을 던져야 하지만, 야생에 있어도 혹독한 싸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전체적으로 보면 좋은 점만 있고 나쁜 점은 없어.
뭐라고? 자유를 잃는다고?
어이, 어이. 나 같은 집단생활을 하는 포켓몬의 존재를 비꼬는 건가?
모든 생물이 자유를 위해 사는 건 아니라고.
나에게 자유로운 권리 따위는 그저 골칫거리일 뿐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어떤 인간, 특히 너 같은 소년이 내게 어떻게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훌륭한 트레이너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다.
되지 말라고.
잘 생각해 봐.
너의 모든 고민은 "어떻게 하면 훌륭한 트레이너가 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 때문에 생긴 거잖아.
불행한 체질에 얽매인 네가 그 목표를 달성하려는 건, 마치 풀타입 포켓몬이면서 나인테일이나 윈디를 이기려는 것과 같아.
패배를 피하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고,
사실 아주 간단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 도전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굉장히 비겁하게 들리겠지.
지금 너도 날 무척 경멸하고 있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심을 담아 표정으로 연설하겠다.
트레이너가 되는 게 힘들다고 생각되면, 그냥 되지 않으면 돼.
그 딥상어동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
실패를 인정할 용기를 내고, 쓰디쓴 패배를 삼키면 되는 거야.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지? 실패를 받아들이기 싫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싶어?
이야, 정말 대단한 뚝심이네.
넌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전설적인 천재라도 되는 거냐?
그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볼게.
이봐, 소년. 상대방의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네 자신을 좀 더 생각해 보라고.
다정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포켓몬을 얻는 게 인간에게 좋은 점만 있을까?
인간이 포켓몬을 얻고 나면, 게으르고 나약해져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비밀 하나 알려줄까?
많은 포켓몬은 약한 미진화 단계에서만 배울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있어.
예를 들어 뿔충이가 단 10일 만에 독침붕이 되어서, 딱충이 시절에 "단단해지기"를 배우지 못했다면, 독침붕이 되고 나서는 그 기술을 다시는 배울 수 없게 돼.
물론,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다시는 배울 수 없는 기술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후회하지 않겠어?
특히 너처럼 큰 뜻을 품은 인간이라면 말이야.
생각해 봐.
세상에는 단순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포켓몬을 내보내면 오히려 방해만 되는 특별한 사건은 없을까?
오직 고립무원의 인생을 보내야만 터득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은 없을까?
나는 천재가 아니라서 그런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상상할 수 없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게 조건이 까다로운 일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맡을 수 있는 인간이 나선다면 상황이 아주 재미있어지지 않겠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어.
설령 네가 지금 트레이너가 되는 걸 포기하더라도, 미래의 어느 날 언제든지 되돌릴 수 있다는 거야.
당연히 되돌릴 수 있지!
십수 년이 지나도 자기 생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
또 십수 년이 지나도 과거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냐고.
만약 어느 날 네 생각이 갑자기 바뀌거나, 상대에게 의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포켓몬을 만나거나, 아니면 그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떠밀려서 포켓몬을 다시 키우기 시작한다고 해도, 그때 가서 트레이너가 되면 그만 아니겠어?
인간의 삶은 아주 기니까, 다양한 삶의 방식을 경험해 봐.
나는 뛰어난 포켓몬도 아니고, 인간 사회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문제 회피에 있어서는 전문가거든.
너에게 전수해 줄 수 있는 건 허둥지둥 도망치는 각오뿐이야.
오늘이 네가 첫 포켓몬을 받으려던 날이었지?
바로 지금 이 순간 좌절을 겪고 괴로워하고 있다면, 우리 이걸 무기한으로 순서미루기 해서, 머나먼 미래가 우리 대신 이 일을 해결하게 만들자.
이건 실패가 아니야.
그저 처리해야 할 문제를 포장해서 내일의 자신에게 부치는, 지극히 합리적인 미루기일 뿐이라고.
미루는 거 좋아해?
나는 아주 좋아하는데.
아마 예전에 벌집에서 너무 열심히 일했던 것에 대한 반작용인가 봐.
나는 자유는 싫어하지만, 태만함은 아주 좋아해.
나는 지금 끝내주는 은퇴 생활을 만끽하는 중이야.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빼면 모든 게 뜻대로라,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다고.
어때, 소년?
내가 보내는 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은퇴 휴가에 동참하지 않을래?
만약 트레이너가 되는 걸 포기한다면 시간이 아주 많아질 거 아냐?
한가할 때 이 숲으로 와서 나랑 이렇게 이야기나 나누는 건 어때?
아주 재미있지 않아? 지금 가입하면 맛있고 달콤한 꿀도 나눠줄게.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그러면 내 표정이 잘 안 보이잖아……
궐수시티로 향하는 궤도 열차 안에서 휴고는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하면서도, 유난히 소란스러운 추억의 꿈을 꾼 것 같았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에피소드이면서 그나마 스포일러성 요소가 적은 화 입니다
포켓몬의 입장에서 주인공에게 건네는 위로를 담백하고 ‘포켓몬’ 스렂게 쓴 것이 제겐 굉장히 인상깊고 서정적인 부분이 곳곳에 많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재밌게도 배틀 위주의 작품은 아니지만 배틀씬이 적지 않게 등장하는 편입니다
정말 순전히 턴제 기술쓰기 나열이 아닌 전투씬을 정말 수준 높게 그려 직접 보시는 것을 추천 합니다
3. 소설 자체의 구성이 치밀하다
이 작품은 포켓몬 팬픽 중 흔치 않은 5세대 하나지방을 배경으로 합니다
보통 90% 이상의 소설들이 관동-성도, 호연 지방을 배경으러 하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꽤 신기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왜 작가가 하나지방을, 플라스마단을 배경, 주요 사건으로 낙점한지 알게 됩니다
"제 관점은 이렇습니다—"
탐정은 평소와 같은 음량으로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플라스마단은 다른 어떤 지방의 지하 조직과도 다릅니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플라스마단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플라스마단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구조적 모순 위에 세워졌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불패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조가비갑옷'이라는 비유보다는, 이 시점에 이른 지금, 이 조직은 차라리 눈 오는 날의 빙큐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몇 번이고 물리 공격으로 그 껍데기를 부순다 해도, 몇 번이고 새로운 '아이스페이스'를 만들어낼 테니까요. 그러므로 제가 플라스마단에 공격을 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그들의 국왕 N을 체포하든, 고위 간부인 칠현인을 소탕하든, 그 조직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로켓단, 마그마/아쿠아단, 갤럭시단 등은 생각해보면 정말 순수하게 나쁜 악당 캐릭터들입니다
즉 갈등서사가 명확하고 대립구도 또한 선명하여 마치 본가 게임처럼 줄거리가 단선적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로켓단과 대립하거나. 협력하여 이익을 얻거나 하는 식이죠
포켓몬에 등장하는 악의 세력 중 유일하게 플라스마단 만이 진정한 악의 세력이면서 동시에 반박하기 힘든 명분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친구라는 포켓몬을 몬스터볼로 잡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평범한 중국식 팬픽이라면 이익, 성장을 도모하며 관동지방으로가 로켓단 휘하에 투신하고 마피아, 갱단처럼 구는게 설정 상 맞겠지만
복잡한 사건, 구도를 노린다면 5세대 하나지방만큼 적절한 배경은 없는 셈 입니다
이런 복잡한 다자구도에서 게치스, 칠현인, 노간주, 하나지방 사천왕등 크게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던 캐릭터들이 매우 매력적으로 그려지는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포켓몬을 딥하게 파고들기 때문에
포켓몬스터 세계관에 흥미가 없다면 크게 호불호가 갈릴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켓몬스터를 좋아한다면 읽어서 후회할 일 없을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