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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미스터리 스릴러, 어반 판타지, 호러, 타임 루프, 과거 개변, 신, 조사관, 추리, 생존 게임, 트라우마, 저주, 도시괴담
월표 순위 9위 인기작, 작가가 칭화대 출신
신명 조사 보고서
과거로부터 온 납치, 고성에 우뚝 선 열세 줄기의 그림자.
거꾸로 뒤집혀 순환하는 인생, 신이 인류에게 복수하며 불러일으킨 재앙!
이 세계의 이성은 매우 취약하기에, 인류는 달래가며 살아가야 한다.
“진정한 조사관이 겨루는 건 괴담을 처리하는 솜씨가 아니라, 누가 보고서를 더 잘 쓰느냐다!”
제1장 머리 없는 인형
겁에 질린 쥐 한 마리가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고, 시든 덩굴이 안으로 뻗어 들어와 바닥을 덮고 있었다. 마치 흉측한 흉터 같았다.
검은색 작은 정장을 입은 소년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목에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고, 선혈이 쉿쉿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소년의 눈동자는 이미 풀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뜨며 앞에 서 있는 한소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한소는 그와 동갑인 열 살 소년이었지만, 얼굴에는 또래와 다른 성숙함과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납치된 아이들이 모두 그를 믿고 위험한 탈출에 동참한 이유일 것이다.
주변은 고요했다. 옆에 서 있던, 생일 왕관을 쓰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키가 조금 큰 포니테일 소녀와 그 뒤를 따르던 마른 원숭이, 연미복, 바가지머리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소년의 처참한 모습에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훔쳐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유리 장식장 안에 일렬로 늘어선 정교한 목각 인형 소녀들이었다. 인형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얌전하게 장식장 안에 머물러 있었다.
한소는 숨이 멎어가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몸을 굽혔다. 그리고 소년의 손바닥을 끌어당겨 손가락을 하나씩 펴고, 그가 죽어라 움켜쥐고 있던 무기를 가져갔다.
그것은 천 조각으로 감싸 끝을 갈아낸, 아주 날카로운 강철 조각이었다.
소년의 눈빛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한소는 차갑게 말했다.
“넌 나갈 수 없어. 이건 네게 있어 봐야 소용없으니 내가 빌려 가마.”
“하지만 이번에 넌 아주 잘했어. 잊지 않을게.”
“……”
이 소년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아마 3층에서 그 움직임이 빠른 상반신 괴물 여자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년은 살 수 없다. 지금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한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의 소년이 눈을 감을 때까지 기다릴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말했던 대로 한다. 얘는 죽었지만, 나머지는 살아서 나갈 생각을 해야 해!”
“먼저 불부터 붙여.”
“……”
생일 왕관을 쓴 인형이라 불리는 소녀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드레스의 정교한 주머니에서 작은 접이식 장난감을 꺼내 펼쳤고, 그 안에서 작은 돋보기가 나타났다.
소녀는 창밖의 햇살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이 늘 지니고 다니던 가장 아끼는 카드 위에 빛을 모았다.
카드에는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카드 위에서 빛나는 점이 검게 변하더니 연기가 피어올랐고, 이내 희미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한소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다가 불꽃이 확실해지자 포니테일 소녀를 보며 말했다.
“유리 장식장을 묶어버려. 쟤들이 나오지 못하게.”
“쟤들?”
포니테일 소녀는 즉시 뒤를 돌아 장식장 안을 보았다. 그곳엔 낡고 기괴한 모습의 인형들이 눈을 부릅뜬 채 멈춰 서 있었다.
소녀는 더 묻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 유리 장식장의 양쪽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그사이 불꽃이 커지자, 한소는 인형의 손에서 조심스럽고도 긴박하게 카드를 건네받아 주저 없이 두꺼운 보라색 커튼에 갖다 댔다.
이미 여러 번 해본 일인 듯, 그의 동작은 숙련되고 거침없었다.
불길이 확 타오르며 커튼을 타고 번졌다. 마치 굶주린 뱀이 방 안을 휘젓는 듯했고, 곧이어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장식장 안의 목각 인형들은 고온에 구워지는 듯, 몸체의 정교한 재료와 드레스가 검게 타들어 가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가식적인 미소를 짓던 얼굴들도 왜곡된 공기 속에서 기괴하게 변해갔다. 돌연 장식장 안에서 악독한 저주가 터져 나왔다. 인형들은 더 이상 본모습을 숨기지 않고 장식장 안에서 발버둥 쳤다.
마디마디 끊어진 플라스틱 팔들이 유리창을 거세게 두드렸다.
포니테일 소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유리창을 억눌렀다. 옆에 있던 연미복과 바가지머리도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어 흔들리는 장식장을 막아섰다.
하지만 인형들의 비명은 무언가를 깨운 듯했다. 밖 복도에서 둔탁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후우.”
바닥이 짓눌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그들이 있는 방을 향해 조금씩 이동해오고 있었다.
방 안의 아이들은 다리가 후들거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한소가 외쳤다.
“장식장 잘 보고 있어! 내가 열쇠를 얻으면 바로 뛰는 거야. 그럼 반드시 나갈 수 있어!”
“……”
“……”
그를 따라 여기까지 온 아이들은 한소가 엄선한 이들이었다. 비록 어리고 겁에 질렸지만,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참으며 눈을 감고 등 뒤의 유리창을 막아냈다.
불길이 위에서 덮쳐오자 장식장 안의 인형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더욱 거세게 유리창을 두드렸다. 결국 유리가 깨졌고, 튀어나온 플라스틱 팔이 포니테일 소녀의 팔에 피 맺힌 손톱자국을 남겼다.
소녀는 아픔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인형들의 비명, 번지는 불길, 자욱한 흑연. 이 모든 것이 아이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창백해졌다.
아이들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한소는 어느새 문가로 가서 코와 입을 막은 채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는 방 안의 소란을 무시한 채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복도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고, 바닥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삐걱거렸다.
한소의 코끝으로 지독한 부패취가 스며들었다. 그는 날카로운 철 조각을 꽉 쥐며 성인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발소리가 문앞에서 멈췄다. 붉은 칠을 한 나무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허연 괴물이 비집고 들어왔다. 몸집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해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윤곽으로 보아 남자인 듯했다. 키는 2미터에 달했고 다리는 퉁퉁 부어 있었다.
뒤쪽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목덜미와 피부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마치 물에 십수 일 동안 불어 터진 거인관처럼 기괴하게 팽창해 있었다. 검은색 트렌치코트와 거친 작업복 바지는 몸을 견디지 못해 너덜너덜해졌고, 허리춤에는 황동색 고전 열쇠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한소는 이 괴물을 볼 때마다 치미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괴물의 등에 난 코트 구멍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괴물이 몇 걸음 더 걸어 들어가 장식장 근처까지 가야 한다.
“커헉, 커헉……”
창백한 괴물은 시력이 좋지 않은 듯했다. 방 안으로 몇 미터 들어오고 나서야 번지는 불길을 발견하고는 당황해하며 무거운 다리를 끌고 불길 속으로 파고들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괴물은 장식장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아이들조차 보지 못했다.
심지어 장식장 안의 인형들도 괴물이 나타나자 갑자기 조용해지며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불길보다 이 괴물이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 한소가 철 조각을 쥐고 튀어 나갔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그는 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마른 몸이 마치 어린 표범처럼 날렵하게 부풀어 오른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타이밍, 자세, 착지 지점까지 모든 것이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철 조각을 꽉 쥐고 남자의 등, 눈 모양으로 뚫린 코트 구멍을 향해 힘껏 찔러 넣었다.
그곳은 심장의 위치였다.
푸석!
철 조각은 정확히 괴물의 등에 박혔다. 하지만 철 조각이 너무 짧고 아이의 힘이 부족해 6, 7센티미터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고통을 느낀 창백한 괴물이 몸을 크게 뒤로 젖혔다. 거대한 코끼리 같은 덩치에 힘 또한 막강했다. 괴물의 등에 매달려 있던 한소는 그대로 튕겨 나갔다.
등이 장식장에 부딪히며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지만, 그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다음 순간, 괴물의 몸이 장식장을 들이받았다.
그 충격으로 등에 박혀 있던 철 조각이 괴물의 몸속으로 더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미리 몸을 낮춘 덕분에 한소는 괴물과 장식장 사이에 끼이지 않았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괴물의 허리춤에 달린 황동 열쇠를 낚아챘다. 그리고 괴물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와 문을 향해 질주했다.
동시에 그가 외쳤다.
“뛰어!”
방 안의 아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겁에 질린 쥐떼처럼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포니테일 소녀는 장식장과 너무 가까웠다. 소녀가 도망치려던 찰나, 장식장 사이로 튀어나온 플라스틱 손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소녀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장식장 안의 인형들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소녀를 덮쳤다.
불길 속에서 소녀의 공포에 질린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오직 문밖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그런데 심장에 철 조각이 박혀 움직임이 둔해졌던 괴물이 갑자기 다시 일어났다. 괴물은 분노하며 비대하게 부푼 두 팔을 휘둘러 주변을 닥치는 대로 낚아챘다.
옆을 지나가던 바가지머리와 연미복이 붙잡혀 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바가지머리는 머리가 장식장에 부딪히며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고무줄처럼 탄력을 잃은 머리가 인형처럼 덜렁거렸다.
연미복은 괴물의 손가락에 몸이 파고들며 뼈가 으스러졌다. 입에서는 내장 파편이 섞인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오히려 그들보다 조금 늦었던 인형과 마른 원숭이가 괴물의 곁을 지나 문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한소를 쫓았다. 뒤에 있는 괴물도 무서웠지만, 앞서가는 한소도 두려웠다. 버려져 광기 어린 괴물 곁에 홀로 남겨질까 봐 겁이 났다.
문가에 가장 가까웠던 한소가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무언가 생각난 듯 소리쳤다.
“멈춰, 멈춰!”
그가 온 힘을 다해 외쳤지만, 마른 원숭이는 멈추지 못하고 문가로 돌진했다.
그 순간, 묵직한 바람이 몰아치며 먼지 쌓인 피아노 한 대가 아이들의 머리 위를 지나 문가에 처박혔다.
문가에 도달했던 영악한 아이 마른 원숭이는 그 한 걸음 차이로 피아노에 깔려 피떡이 되고 말았다.
한소의 심장이 격하게 수축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피아노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뒤따라온 인형의 팔을 잡아 끌어올려 함께 피아노를 넘어 칠흑 같은 복도로 뛰어들었다.
‘문, 문이 나타나야 해……’
열쇠를 꽉 쥔 채 마음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들었다.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어두운 복도 끝의 공간이 뒤틀리더니 무언가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 정면에 ‘EXIT’라고 적힌 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 문의 스타일은 고성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억지로 짜 맞춰진 듯한 모습이었다.
한소는 기뻐하며 한 손으로는 인형을 끌고, 다른 손으로는 황동 열쇠를 쥔 채 철문을 향해 돌진했다.
뒤쪽에서는 괴물이 비틀거리며 문가까지 쫓아왔지만, 자신이 던진 피아노에 가로막혔다.
덩치가 너무 커서 피아노를 넘지 못한 괴물은 분노 섞인 포효를 내지르며 앞을 가로막은 피아노를 산산조각 냈다.
그 틈을 타 한소는 어린 인형을 거의 끌다시피 하며 철문으로 달렸다. 소녀의 하얀 무릎은 이미 크게 까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것이 생사가 걸린 탈출임을 알기에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괴물의 몸에서 뺏어온 황동 열쇠는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기분 나쁜 점액이 묻어 있었다. 그 점액 때문인지 열쇠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한소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소는 식은땀을 흘리며 열쇠를 주우려 했다. 그사이 괴물은 이미 복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소에게 끌려가던 인형이 열쇠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낚아채 한소에게 내밀었다.
소녀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자신이 더 이상 짐이 아니라는 사실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듯했다.
“내가……”
한소는 열쇠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익숙한 감각에 의지해 열쇠를 구멍에 꽂았다.
그는 가장 어리지만 말을 잘 듣고 영리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는 이 인형 같은 소녀에게 강렬한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인형의 정교하고 작은 얼굴이 눈앞에서 터져 나갔다.
방금까지 보여주던 기특한 미소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머리가 으깨진 것이다.
한소의 얼굴에 선혈이 튀었다. 핏빛 시야 너머로 문가의 괴물이 보였다. 방을 나온 괴물은 거대한 몸집 때문에 더 이상 추격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살덩이가 강물처럼 복도를 뒤덮으며 빠르게 다가왔다. 그 속에는 녹아내리는 괴물의 얼굴과 팔들이 뒤섞여 있었다.
점액질 속에서 튀어나온 팔 하나가 인형의 머리를 부수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한소의 오른쪽 눈을 스치며 차가운 흔적을 남겼다.
눈에 통증은 없었지만, 마치 바람이 빠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2초 뒤, 끈적한 액체가 얼굴 전체를 적셨다.
하지만 한소는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다치지 않은 왼쪽 눈으로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등 뒤의 철문이 열리고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복도를 집어삼킬 듯 몰려오는 괴물의 살덩이 파도가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한소는 천천히 소녀의 손을 놓았다. 소녀의 작은 몸이 쓰러지게 내버려 둔 채,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발밑이 허공으로 바뀌며 자유낙하가 시작되었다.
눈앞에는 문의 건너편에서 광기 어리게 요동치는 살덩이들이, 머리 위로는 하얀 햇살이 가득했다.
“허억……!”
한소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자신이 대학 강의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를 괴고 자느라 두 팔은 저렸고, 소매에는 땀 자국이 배어 있었다.
옆자리의 동기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야, 한소. 너 대단하다? 마녀 교수님 수업 시간에 잠을 자다니. 왜, 드디어 마음 고쳐먹고 우리 같은 돈 많은 백수들이랑 같이 타락하기로 한 거냐?”
“……”
한소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깨달았다. 돌아왔다는 것을.
이번에도 결국 혼자만 돌아왔다.
손목의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52분. 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감정의 동요와 새로 유입된 기억의 파편들을 갈무리하며 옆자리의 절친 허기를 바라보았다.
“거울 좀 빌려줘.”
허기의 얼굴색이 변했다.
“야, 헛소리 마. 나 화장 안 해. 거울이 어딨어?”
그러면서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건네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자친구 건데 두고 갔어.”
한소가 거울을 펼치자 열아홉 살의 자기 얼굴이 비쳤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창백한, 미남이라 불릴 만한 얼굴이었지만, 오른쪽 눈에서 헤어라인까지 이어진 흉측한 흉터가 그를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흉터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쪽 눈동자는 옅은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패배자 같은 자신의 모습처럼 추하고 기괴했다.
“뭐야, 또 그 흉터 때문에 그래?”
허기는 흉터를 살피는 한소를 보며 웃었다.
“너 아르바이트해서 돈도 꽤 벌었잖아. 아니면 흉터 제거 수술이라도 받든가. 돈 모자라면 내가 빌려줄게.”
한소는 대답 대신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 열쇠가 미끄러지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둘이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한소, 누가 찾아왔어.”
짐을 챙겨 나가려는데 밖에서 아는 동기가 소리쳤다.
한소가 고개를 돌리자 계단식 강의실 밖에 한 남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정장을 입었고, 여자는 흰색 원피스에 정교한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가방을 든 기사가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지위가 높고 집안이 좋아 보였지만, 얼굴에는 오랜 세월 비탄에 잠긴 사람 특유의 초췌함이 서려 있었다.
“헐, 또 왔어?”
한소가 입을 떼기도 전에 옆에 있던 허기의 안색이 변했다.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
“한소 군, 한소 군! 여기야……”
허기가 투덜거림을 마치기도 전에 부부는 한소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왔다.
여자는 슬프면서도 비굴할 정도로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제발, 제발 우리를 귀찮게 생각하지 말아 줘요……”
“혹시, 최근에 뭐 생각난 거 없어요?”
“정말 나쁜 뜻은 없어요. 방해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정말로, 우리는 그저 만만의 행방만이라도 알고 싶어서 그래요. 설령, 설령 유골이라도 좋으니까……”
“……”
주변의 학생들은 그들을 보자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기인 한소가 어릴 적 납치 사건을 겪었다는 사실을.
당시 수십 명의 아이가 함께 납치되어 도시 전체의 수사관들이 출동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결국 살아 돌아온 것은 한소뿐이었다.
그는 경찰에게 낡은 성에 갇혀 있었으며, 다른 아이들도 그곳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 건물 안에 괴물이 있어 아이들을 잡아먹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치안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특수부대와 대규모 경찰력을 투입해 수색했지만, 그런 성은커녕 괴물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한소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명확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날 이후로 증발한 듯 사라졌고,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은 부모가 희망을 버리고 스스로 상처를 달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몇몇은 한소를 찾아와 작은 단서라도 떠올려주길 간청했다. 아이의 유골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이 부부도 그중 하나였다.
한소는 그들을 이해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그는 그들의 딸을 데리고 탈출하려 했으니까.
정말 귀여운 아이였다.
다만 실수로 머리를 잃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