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폐하.”
소묵의 귓가에 변성기 소년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소묵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내관 복장을 한 사람이었다.
이 넓디넓은 방을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기억이 소묵의 뇌리로 밀려들었다.
전생에 소묵은 고아였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대학에 합격했고, 졸업 후에는 직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나날이 형편이 나아지던 어느 날, 국도를 걷다가 대형 트럭에 치이고 말았다.
소묵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묵’이라는 제왕의 몸으로 환생했다.
하지만 원래 주인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선제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소묵은 양자로 들어온 몸이었다.
선제는 붕어한 뒤 소묵을 네 명의 대신에게 맡겼으나, 엄산오가 점차 대권을 독점하고 당파를 만들어 횡포를 부렸다. 심지어 같은 보정대신이었던 소숙을 제멋대로 죽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지금의 황태후는 엄산오의 누나였다.
두 사람이 안팎에서 모든 것을 쥐고 있었다.
현재 자신이라는 황제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폐하. 약 드실 시간입니다.” 위심이 약사발을 들고 소묵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위심은 소묵의 곁을 지키는 내관으로, 일찍이 선제를 모셨던 인물이다.
비록 위심이 겉으로는 엄산오의 명령에 복종했지만, 소묵은 마음속으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소묵이 쓴 약을 마시자 한 시녀가 들어와 아뢰었다. “폐하, 승상께서 폐하께서 풍한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차 오셨습니다.”
“어서 승상을 들게 하라.” 소묵이 황급히 말하며 침상에서 내려와 맞이하려 했다.
소묵은 엄산오에게 불만이 가득했지만, 연기해야 할 때는 연기해야 했다.
게다가 순진무구한 사람처럼 굴면 상대를 마비시킬 수도 있었다.
그때 기회를 봐서 엄산오를 제거하면 된다.
잠시 후.
장검을 찬 중년 사내가 큰 걸음으로 들어와 읍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엄산오의 모습을 보며 소묵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을 차고 궁에 들어오다니.
이것만 봐도 상대가 자신이라는 황제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 수 있었다.
“상부께서 어찌 예를 갖추십니까.” 소묵은 서둘러 다가가 엄산오를 부축해 일으켰다. “상부께서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신이 듣자 하니 폐하께서 풍한에 드셨다 하여 용체를 살피러 왔습니다.”
말을 마친 엄산오가 방 안의 궁녀 몇을 쳐다보았다.
“게 누구 없느냐, 이 궁녀들을 끌어내 참하라! 폐하조차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데 어디에 쓰겠는가?”
“상국,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궁녀 몇이 겁에 질려 황급히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내관 몇이 들어와 이 궁녀들을 끌어내려 했다.
엄산오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이 궁녀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소묵이 모를 리 없었다.
얼마 전, 도찰원 부도어사 왕찬이 몰래 입궁하여 원래 주인을 찾아와 ‘역적’을 제거할 일을 상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사실이 엄산오의 귀에 들어갔다.
하지만 왕찬은 도찰원의 이인자였고, 대주의 언관은 황제조차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왕찬은 엄산오가 죄명을 꾸며내 관직을 박탈당하고 경성을 떠나야 했다.
엄산오가 이 시녀들을 죽이는 것은 ‘폐하께선 다른 생각을 품지 마시지요. 폐하 주변의 모든 것은 제가 결정합니다’라는 뜻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상부, 선제께서는 늘 짐에게 인자한 마음을 가지라 가르치셨습니다. 이 궁녀들은 죽을죄를 지은 것은 아니니, 궁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그치시지요.” 소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산오는 소묵을 잠시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각자 곤장 열 대씩을 치고 궁에서 내보내도록 하지.”
엄산오가 손을 흔들자 내관들이 궁녀들을 끌고 나갔다.
“폐하께서는 용체를 잘 보중하셔야 합니다. 신이 직접 궁녀 몇을 골라 폐하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상부께서 마음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소묵은 어수룩하고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폐하께서는 푹 쉬십시오.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상부, 조심히 가십시오. 위 공공, 상부를 배웅해 드리게.”
“예, 폐하.”
엄산오를 보낸 후, 소묵은 침상에 다시 누웠다. 문득 한 구절이 떠올랐다. ‘짐의 일생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으니, 과연 저편에 닿을 수 있을까?’
소묵이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그의 머릿속에 책 한 권이 나타났다.
표지에는 ‘백세서’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소묵이 마음을 먹자, 두루마리가 저절로 펼쳐지며 글자들이 떠올랐다.
[백세서, 이 책을 사용하면 숙주는 캐릭터를 생성하여 각기 다른 인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각 인생에서 숙주는 다른 임무를 받게 되며, 임무를 완수하면 일정한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소묵은 단호하게 ‘사용!’을 선택했다.
[생성할 캐릭터의 이름을 기입해 주십시오.]
소묵은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인생 체험이니, 원래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 몰입감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분신 ‘소묵’이 생성되었습니다.]
백세서는 블랙홀처럼 거대한 흡인력을 방출했다.
소묵의 의식은 순식간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의식이 돌아오자 소묵은 자신이 산 위 오두막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백세서가 다시 소묵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숙주께서는 ‘소묵’이라는 새로운 분신을 생성했습니다.
백세서 안의 시간 흐름은 바깥세상의 백 배입니다.
숙주의 의식이 백세서를 떠나면, 백세서 안의 시간은 정지합니다.]
[인물 배경: 당신은 양국 정왕 소경의 아들로, 재능은 평범했으나 당신의 아버지는 평범한 당신을 용납하지 못했다.
당신이 여덟 살 되던 해,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기절시킨 뒤 한 소녀의 타고난 검골을 당신의 몸에 이식했고, 그들은 당신에게 그것이 후천적으로 각성한 검골이라 속였다.
당신은 그 후 검도 천재로 발돋움하여, 불과 열여덟의 나이에 이미 원영경의 검선이 되었다.
하지만 당신은 성정이 올곧아, 자신의 검골이 한 소녀에게서 왔으며 그 소녀가 강제로 검골을 적출당한 탓에 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신은 가문과 크게 다툰 뒤 집을 나와 용천검종에 들어가 한직인 장로가 되었다. 동시에 당신은 그 소녀의 행방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보상하고자 한다.]
[임무 발급: 당신이 찾아야 할 소녀의 이름은 강청의이며, 그녀는 흑풍성 현무대가에 나타날 것입니다. (숙주가 상대를 찾기 전까지 강청의의 위치를 계속해서 알려 드립니다) 숙주께서는 그녀를 산으로 데려가 검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임무 기간은 오십 년입니다.
임무 정산 시, 강청의의 경지가 높을수록 숙주가 얻는 보상이 풍부해집니다.]
‘오십 년이라… 다행히 백세서의 시간은 바깥세상의 백 배 속도로 흐르는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겠지.’
소묵은 백세서에서 주의를 거두고, 연못으로 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이 분신은 전생의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
이편이 좋았다. 몰입감이 더 느껴졌다.
탁자 위의 장검을 집어 들고, 소묵은 곧장 산을 내려갔다.
“만두 사세요.”
“갓 쪄낸 만두예요.”
흑풍성 현무 거리, 만둣가게 주인이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낡고 해진 삼베옷을 입고, 몸집이 작고, 얼굴은 잿빛이며,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운 단발머리의 작은 거지가 몰래 다가오고 있었다.
주인이 한눈파는 사이, 작은 거지는 더러운 천으로 만두 몇 개를 감싸 쥐고 달아났다!
“또 네놈이 만두를 훔치는구나!”
주인은 정신을 차리고 밀방망이를 들고 뒤쫓아 갔다.
“이놈, 거기 서지 못해! 이번에야말로 네놈 다리를 분질러 놓겠다!”
이런식으로 가상세계 들어가거나 뭐 그런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