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사시하라 카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편의점, '세븐 이레부소' 일을 도우면서 나름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불치병이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남은 수명은 얼마 되지도 않는 절망적인 상황.
수술 성공률도 바닥, 살아남을 확률도 희박하다는 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그녀가 선택한 길은 무엇일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라는 로봇의 몸을 택한 카호.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기계 덩어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고통스러운 나날뿐이다.
…그녀에게도 언젠가 구원의 날이 올까?
카호는 하카소시(ハカソシ) 작가님의 히로인인 사키의 클래스메이트이자 절친이다.
하카소시 작가님의 작품과 크로스오버하며, 이런저런 다양한 에피소드를 풀어나갈… 예정이다.
트위터에서 팔로우 중인 에카켄 선생님(user/4512689)이 모 대형 편의점 체인의 휴머노이드 그림을 올리신 걸 보고 영감을 얻었습니다. 하카소시 선생님(user/422629)의 사키(novel/10836526)가 아닌, 다른 편의점에서 일하는 휴머노이드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대부분은 개조 전의 상황이며, 개조 장면은 생략했습니다. 제가 쓰고 싶었던 건 개조 그 자체가 아니라, 개조에 이르게 된 경위였거든요. 그게 이번 테마입니다.
휴머노이드는 적어도 지금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개조가 이루어지지만, 그 사연은 제각각일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되고 싶어서 된 사람만 있는 건 아닐 것 같아요. 사키만 해도 고민 끝에 가족을 위해 로봇이 되는 길을 택했으니까요. 이번 히로인은 불치병에 걸린 소녀입니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가 가족을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리는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너무 어둡고 칙칙한 글만 써온 터라, 이번엔 좀 밝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써봤습니다. 제 기준으론 짧은 7,000자 분량의 단편이니 가볍게 즐겨주세요. 전연령 대상이라 어두운 묘사는 없을… 예정입니다.
도중에 등장하는 간호사님은 rui76 선생님의 사에키 미스즈 씨입니다.
***
“아빠, 나… 이제 얼마 안 남은 거지?”
사에바 종합병원 병실.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난치병에 걸려 생명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면회 온 부모님의 표정이 내 말 한마디에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카호. 수술만 잘 받으면 다시 학교도 갈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말 마라. 응? 여보, 그렇지?”
“…어? 어머, 그럼. 당연하지. 별소릴 다 하는구나.”
엄마는 예전부터 거짓말에 서툴렀다. 나도 다 알고 있다. 이미 인터넷으로 찾아봤으니까. 수술 성공률은 10%도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성공한다 해도 5년 뒤 생존율은 5% 미만이라는 것까지…. 나는 어차피 길어야 몇 년밖에 못 산다.
그런 나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편의점에서 일하는 부모님께, 더 이상 의료비 부담을 지우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있잖아, 아빠. 만약 내가 로봇이 되어도… 내 딸이라고 생각해 줄 거야?”
“카호….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설마, 휴머노이드가 되겠다는 거야?”
나는 전부터 품어왔던 결심을 털어놓았다.
“응, 아빠. 내가 휴머노이드가 되면 병에 걸릴 일도 없어. 다시 학교에도 갈 수 있고. 그리고… 우리 가게에서도 일할 수 있어. 심야 알바가 안 구해져서 잠도 못 자고 고생하는 아빠랑 엄마를 도와줄 수 있단 말이야.”
“안 돼! 카호, 너 로봇이 된다는 게 뭔지나 알고 그러는 거냐? 인간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노예 같은 신세가 되는 거라고. 예전에 듣기로는,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인식하도록 마음까지 개조당한다고 하더라. 난 내 딸이, 카호 네가 그런 기계 덩어리가 되는 꼴 절대 못 본다!”
아빠는 얼굴을 붉히며 강하게 반대했다. 나를 아끼는 마음 때문이겠지만, 딸이 로봇이 된다는 건 아빠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엄마, 내가 부탁한 자료 가져왔어?”
엄마는 가방에서 A4 사이즈의 얇은 책자를 꺼냈다.
“응, 여기 있다.”
아빠는 자료의 내용을 눈치챘는지 엄마의 손에서 책자를 낚아챘다.
“이봐, 당신! 이 책자는 뭐야? 난 이런 얘기 못 들었어!”
내가 부탁한 자료의 표지에는 대형 편의점 체인 점포를 배경으로, 점원 유니폼 디자인의 매끈하고 타이트한 외피를 두른 채 밝게 웃고 있는 휴머노이드 소녀가 찍혀 있었다.
책자의 제목은 이랬다.
【점포 업무 지원용 범용형 휴머노이드 소개 ~휴머노이드 도입을 통한 안정적인 점포 운영을 목표로~】
표지 사진 하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족의 휴머노이드화를 검토 중인 프랜차이즈 경영주용 자료】
【세븐일레븐 재팬 프랜차이즈 사업본부 가맹점 서포트부】
“그건 아빠 보라고 가져다 달라고 한 거야. 내 건 여기 있어.”
나는 병실 수납장에서 포스트잇이 잔뜩 붙은 똑같은 표지의 책자를 꺼냈다. 이미 몇 번이나 정독했다. 내용은 거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여보, 카호 얘기 좀 제대로 들어줘요. 이 아인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제대로 마주 봐줘요. 그리고…… 난 설령 카호가 로봇이 된다 해도 내 딸인 건 변함없고, 기계 몸이라도 좋으니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당신도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 잊은 거 아니잖아요?”
“당신… 미리 알고 있었군.”
“아빠, 책자 한번 읽어봐. 봐, 먼저 휴머노이드가 돼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야.”
아빠는 마지못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며 지역의 라이프라인을 지키기 위해~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상권이 무너져, 지역의 유일한 소매점이 된 편의점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의 인터뷰 기사였다. 부모님께 편의점을 물려받은 딸이 세 아이를 키우며 남편과 가게를 꾸려나가기 위해 휴머노이드가 된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도 외딴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휴머노이드나, 도심의 바쁜 매장에 지원 나가는 전직 직원 출신 휴머노이드 기사도 있었지만, 내가 포스트잇을 붙여둔 페이지는 따로 있었다.
~난치병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가업을 돕는 고등학생 휴머노이드~
사실 이 책자의 표지 모델인 소녀와 그 가게에 대한 기사였다. 표지의 아이도 난치병 때문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었다고 한다. 휴머노이드화 덕분에 예전처럼 가게 일을 도우면서, 몇 달 만에 고등학교에도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로봇 몸이라면 장시간의 심야 근무도 업무 모드가 알아서 처리해주기 때문에 수면 시간을 걱정할 필요도 없단다. 애초에 로봇이라 지치지도 않는다고 했다.
『저는 가족에게 보살핌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족을 지탱해주고 싶어요. 이 마음은 인간일 때나 휴머노이드일 때나 변함없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이곳을 지켜나갈 수 있어서,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속 그녀는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빠는 기사를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그녀는 빼어난 외모 덕분에 책자 표지뿐만 아니라 사이트 특집 페이지나 신문에도 실린 적이 있었지만, 아빠는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경영주님과 소체가 되실 가족분들께 경의를 표하며, 끝까지 서포트하겠습니다~
다음 페이지는 정장 차림의 인상 좋은 남성 직원의 기사였다. 본사 가맹점 서포트부에서 휴머노이드화 절차와 개조 후 점포 투입, 애프터케어를 담당하는 직원의 인터뷰도 실려 있었다. 방금 그 여고생을 담당했던 사람인 모양이다.
내용에 따르면, 신청이 들어온 모든 사례를 휴머노이드로 개조하는 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본인이 망설이고 있거나 하면 휴머노이드화 대신 다른 경영 개선 방안을 지원하기도 한단다.
“휴머노이드화가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을 경우, 저희는 끝까지 전력을 다해 서포트하겠습니다. 제 업무는 소체가 되신 분의 인생을 맡는 소중한 일이니까요.”
자신감과 자부심, 그리고 다정함이 느껴지는 직원의 모습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다음 페이지부터는 편의점 지정 기종 휴머노이드와 편의점 전용 업무 모드의 세부 기능, 옵션 등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기종은 야마토 전기제 범용 휴머노이드를 베이스로 세븐일레븐이 특주한 모델이라고 적혀 있었다. 참고로 베이스 기종은 다른 편의점 체인에서도 도입 사례가 많다고 한다.
세븐일레븐에서는 경영주나 소체의 희망에 따라 업무 모드 중에 자신의 의식을 얼마나 드러낼지 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처럼 부드러운 응대부터 로봇 같은 사무적인 응대까지 선택 가능하다는 것이다.
뒷부분은 계약 형태와 서포트 방식에 대한 소개였다. 개조 비용을 점포 측에서 부담하고 경영주가 소유권을 갖는 방식과, 프랜차이즈 본부에서 비용을 부담하고 회사가 소유권을 갖는 방식. 전자는 기체 유지 및 유지보수 비용을 점포가 부담하고, 후자는 본부가 부담한다.
회사가 소유권을 가질 경우, 경영주의 점포에는 기체를 대여해주는 형태가 된다. 타 점포 지원이나 경영상의 명령 및 지시에 따를 의무가 생기며, 기체의 마스터 관리자 권한도 회사가 보유하게 된다.
또한 미성년자는 개조되더라도 학업 우선권이 인정되어, 고등학교·대학교 재학 중에는 업무 모드 가동 시간에 제한이 걸린다. 본부 측에서도 학생 생활을 방해하는 명령은 내리지 않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부분은 ‘개정 휴머노이드 촉진법’이라는 법률로 보호받는다고 적혀 있었다. 나중에 법전이라도 한번 찾아봐야겠다.
아빠는 자료를 다 읽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유지보수 비용은 너무 비싼 거 아니냐. 확실히 사이보그화보다는 낫겠다만, 이래서는 생활이….”
“어? 아빠, 그쪽이 아니야. 본부에서 비용 부담해주는 쪽으로 할 거야.”
나는 소유권을 회사에 넘기는 플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카호! 그러면 넌 회사의 소유물이 되는 거잖아! 아무리 로봇이 된다지만 몸의 제어권까지 생판 남한테 넘기다니, 난 절대 허락 못 한다.”
아빠는 강하게 반대했다. 아니, 반대해주는 거다. 그 마음은 고맙지만, 현실적으로 휴머노이드는 정밀 기계라 유지비가 결코 싸지 않다. 물론 직원 월급 주는 것보다는 싸니까 도입하는 거겠지만. 아빠 말대로 불안한 점은 있겠지만, 난 이미 답을 내렸다.
“아빠, 난 본부 소속 휴머노이드가 될래. 집 대출금도 갚아야 하는데 내 유지비까지 들면 지금 병원비만큼 계속 돈이 나갈 거 아냐.”
아무리 보험이 된다 해도 입원은 돈이 많이 든다. 이 비용은 가계에도, 그리고 내 마음에도 큰 짐이었다. 부모님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 원래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가게 일을 도울 생각이었지만, 이 병든 몸으로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결심한 거다.
나는 부모님께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아빠, 엄마. 나 아직 죽기 싫어. 인간으로서 침대 위에서 겨우 몇 년 더 사느니, 로봇이 되더라도 훨씬 오래 살면서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되고 싶어. 당분간은 회사 로봇이 되겠지만, 10년 지나면 기체를 불하받을 수 있대. 그러니까 그때까진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난 살고 싶어. 부탁이야. 아빠, 엄마. 내가 휴머노이드가 되는 거 허락해줘!”
더 이상……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꽉 껴안아 주고는 병실을 나갔다.
“카호, 엄마가 본부 슈퍼바이저님한테 얘기해둘게. 이 인터뷰에 나온 분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네 마음은 꼭 전할게.”
엄마까지 병실을 나가자, 교대하듯 간호사 언니가 들어왔다.
『면회 중에 실례합니다. 사시하라 카호 님, 링거 교체해도 될까요?』
간호사 사에키 미스즈 씨는 금속 외장으로 덮인 로봇 같은 외형이다. 하지만 그녀는 로봇이 아니다. 감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몸을 기계로 바꾼 사이보그다.
“미스즈 언니. 부모님 가셨으니까 편하게 하셔도 돼요.”
『어머, 시간이 좀 남아서 더 계실 줄 알았는데. 그럼 시작할게.』
미스즈 언니는 나밖에 없는 걸 확인하자 평소처럼 싹싹한 말투로 돌아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링거액 병을 교체한다. 내가 입원했을 무렵엔 언니도 막 기계로 개조받은 직후라 몸을 움직이는 게 서툴렀는데, 요즘은 아주 익숙해졌다고 한다.
“언니, 저 휴머노이드가 되기로 했어요.”
『그렇구나. 나 같은 사이보그가 되는 방법도 있긴 한데. 역시 돈 문제 때문이야?』
“네, 저희 집이 역 뒤쪽에서 세븐일레븐을 하거든요. 본부에서 휴머노이드화랑 유지비를 부담해주는 제도가 있더라고요.”
나는 미스즈 언니에게 아까 그 책자를 건넸다. 언니는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다 이따금 손을 멈췄다.
『과연 그렇네. 하지만 회사의 비품이 된다는 거잖아. 관리자 권한도 회사 쪽이 쥐고 있다는 게 좀 무섭지 않아?』
“확실히 그건 저도 무서워요. …근데 고등학교 동창 중에 다른 편의점 체인에서 휴머노이드가 된 애가 있는데, 가끔 휴일에 다른 점포 지원 나가는 거 말고는 별일 없대요.”
『흐음, 뭐 미성년자는 법으로 보호받으니까. 오, 감가상각 끝나면 되살 수도 있네~. 유지비는… 역시 나랑 비슷하게 드는구나.』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휴머노이드가 되는 거요.”
『……이건 병원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내 혼잣말로 들어줘. 카호 몸은 인간으로서 오래 살기는 아마 힘들 거야. 그래서 네가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몸을 기계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긴 했어. 고쳐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난 솔직히 네가 그런 결단을 내려줘서 마음이 놓여. 좀처럼 결정을 못 내리는 환자들도 많거든. 그리고 몸을 기계로 바꾸는 건 정신적으로 꽤 버거운 일이야.』
“역시… 그렇겠죠.”
『힘들 거야. 내 후배 중에도 휴머노이드인 애가 있는데, 사고 제어를 당하면서도 자기 정체성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더라고.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봐.』
“네, 저 죽기 싫어요. 더 살아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우리 가게도 지키고 싶어요.”
『효녀네. 저기, 카호야. 딱 하나만 기억해줘. 휴머노이드가 되어도 카호는 카호라는 걸. 네가 회사의 소유물인 로봇이 된다 해도, 부모님이 낳아주신 사시하라 카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것만 잊지 않으면 어떤 모습, 어떤 몸이 되어도 분명 괜찮을 거야. 아, 그리고 휴머노이드화 처치를 받게 되면 우리 병원은 퇴원하게 되니까, 시기 정해지면 꼭 알려줘.』
“알겠어요, 꼭 기억할게요. 고마워요, 미스즈 언니.”
미스즈 언니가 나간 뒤, 나는 링거 거치대를 끌고 전화가 가능한 라운지로 천천히 걸어갔다. 결심을 굳힌 이상,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은 상대가 있었다.
“여보세요… 오랜만이야. 저기,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나도 말이야…”
***
“…그런 일이 있었구나. 사시하라가 계속 입원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심한 병인 줄은 몰랐어.”
『나도 그때 전화로 얘기 듣고 알았어. 이것저것 휴머노이드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더라고. 근데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라고 카호가 신신당부해서 입 꾹 다물고 있었지. 미안해, 쇼 군.』
『나도 도저히 애들한테 말할 용기가 안 났어. 나도 내가 곧 죽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근데 사키한테 이것저것 배우면서 나도 마음을 굳힐 수 있었어.』
수업이 끝난 방과 후. 나는 클래스메이트이자 상담 상대였던 휴머노이드 사키, 그리고 사키의 남자친구인 쇼 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학교에 다시 등교한 첫날. 나는 휴머노이드 모습으로 전교생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마치 그때의 사키처럼.
교복을 입었어도 손이나 무릎 아래로는 세븐일레븐 유니폼 디자인의 외피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게다가 머리도 얼굴 부분만 빼고는 금속 커버로 덮여 있어서, 누가 봐도 로봇이라는 게 티 나는 외모는 지금도 좀 거부감이 든다.
점포에서 일할 때는 이 몸에 도색된 외피 자체가 유니폼이라, 업무 모드 중에는 옷을 입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몸의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팔에 바코드 리더기와 POS 단말기를 장착하고 가동한다. 주로 남성 고객들이 빤히 쳐다보는 게 괴롭긴 하지만, 조만간 익숙해질 거라 믿는다.
『확실히 관리자 권한은 회사가 갖고 있고, 나 자신도 회사의 비품이라 제어 프로그램에는 거역할 수 없지만… 그래도 회사 사람들은 로봇인 나한테 친절하게 상담도 해주고, 가동 시간 같은 것도 아빠랑 상의해서 무리하지 않게 잘 짜주더라고.』
『다행이다. 우리 회사도 내가 성적 떨어졌을 때는 휴일 지원 근무 빼주는 식으로 배려해주거든. 카호가 일하기 좋은 환경이라니 마음이 놓이네.』
이제야 사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이 아이도 분명 불안했겠지. 부모님을 위해서라지만, 내가 건강한 몸이었다면 휴머노이드가 되겠다는 결심 따윈 절대 못 했을 거다. 이 아이는 정말 마음이 강한 아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아직 손님들이 로봇 취급하거나 쌀쌀맞게 굴면 좀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건 휴머노이드가 된 덕분이니까. 여기, 볼래?』
나는 치마를 살짝 내려서 하복부의 플레이트를 보여주었다. 쇼 군이 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부끄러운 건 나라고. 왜 하필 위치가 여기인 걸까.
형식명: HS-207G
고유식별번호: HS-207PS1114KS
소체명: 사시하라 카호
제조년월: 20XX년 Y월
야마토 전기 주식회사 사에바 제작소
세븐일레븐 재팬 캐피털 본부
주 관리 점포: 사에바 XO점
리스 물건 번호: 20XX-854031
『처음엔 말이야, 이 떼어낼 수도 없는 금속 플레이트가 박힌 모습을 보고 꼭 노예 낙인 같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침대 위에서 죽음만 기다리던 나를 해방해준 건 분명 이 기계 몸이야. 그러니까… 보답하는 마음으로, 부모님 가게랑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할 거야.』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프로그램된 것일지도 모른다. 로봇다운 사고방식을 갖도록 제어당하고 있는 걸지도…. 물론 정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로봇이 되고 나서 강해진 또 하나의 감정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왜냐하면….
『그건 그렇고, 사키. 나 너한테 꼭 해둘 말이 있어.』
『어? 뭔데, 카호?』
사실 사키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개조된 직후부터 줄곧.
『이 사에바에서 휴머노이드가 일하는 편의점이 다섯 군데나 있어. 알고 있어?』
『어, 그래? 난 몰랐는데.』
『그중에서 너희 가게 매출이 2위라는 것도?』
『정말?! 아니, 그런 건 어디서 알아온 거야, 카호?』
역시 사키는 이런 아이다. 느긋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다. 참고로 1위는 같은 계열인 세븐일레븐 국철 사에바역 서구점인데, 다름 아닌 내가 개조 전에 읽었던 그 책자의 표지 모델 가게였다. 그 여고생 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은 3학년이고 옆 학교에 다녔으니, 세상 참 좁다 싶다. 개조 전에 본사 직원이 다리를 놓아줘서 병문안까지 와줬던 다정한 선배였다. 여러 고민을 들어주기도 했고.
개조 후에 인사하러 갔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줬었지. 우린 서로 스마트폰 없이도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자주 대화한다. 나의 동경 대상인 휴머노이드다. 선배를 추월하는 건 감히 엄두도 안 나고, 애초에 같은 계열 점포다.
나는 사키에게 검지를 딱 치켜세우며 선언했다. 옆에서 쇼 군이 “오, 사키의 결정적 포즈다!”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무시했다.
『너희 가게 매출 2위 자리는 다음 달부터 내가 가져갈 거야. 너희 가게 손님들, 내가 다 뺏어올 거니까!』
개조되고 나서부터 로손(Lawson)에서 손님을 뺏어오고 싶다는 욕구가 엄청 강해졌다. 역시 이것도 휴머노이드가 된 영향인 걸까. 사키는 나를 보며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이길 수 있겠어. 중학교 때부터 가게 일을 도와왔으니까. 분명 그럴 거야.
사키는 내가 무서웠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저기… 카호야. 카호네 집이랑 우리 맨션, 2km 넘게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뺏어오겠다는 거야?』
끝
ZcyonZ 작가님께서 제가 소설로 쓴 휴머노이드 히로인, 카호의 모습을 그려주셨습니다.
덕분에 창작 의욕이 마구 샘솟네요. 캐릭터 이미지도 훨씬 선명해진 덕분에 이번 편을 막힘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ZcyonZ 작가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카호와, 그녀의 집에 하숙 중인 짝사랑 상대 타츠야의 로맨스 행방을 담았습니다. 타츠야는 카호를 향한 일편단심 때문에 철도 기술자라는 꿈을 접고 휴머노이드 기술자로 목표를 바꿉니다.
카호는 로봇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솔직해지지 못하죠. 그런 카호의 등을 밀어주는 게 하카소시 작가님(user/422629)의 히로인이자 절친인 사키, 그리고 그녀의 남자친구 쇼 군입니다. 이번엔 쇼 군의 활약이 돋보이는 회차라고 할 수 있겠네요.
최근 재해 파견 에피소드나 장편 최신화 등, 카호 이야기를 포함해 어두운 내용만 써온 것 같아서(이번에도 어두운 묘사는 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이라서요), 후반부는 최대한 밝게 써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음 편에서 카호와 타츠야의 연애는 결판이 날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
“참고서, 필기구는 예비까지 넉넉히 챙겼고…. 아, 이건 무조건 가져가야지.”
카호에게 받은 합격 기원 부적을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1월 4일 저녁, 방 문을 열었을 때 사에바 대사 종이봉투에 담긴 채 놓여 있던 부적이다. 그날 초詣(하츠모데, 새해 첫 참배)를 간 건 카호뿐이다.
직접 건네지 못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복잡한 심경이 엿보였지만, 마음만큼은 확실히 전해졌다.
방 문을 열자, 평소라면 이 시간에 마주칠 일 없는 상대가 서 있었다. 심야 교대를 마치고 막 돌아온 건지, 옷은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외피만 드러낸 모습이었다. 팔에는 POS 단말기를 그대로 차고 있었다.
『시험 보러… 벌써 가? 다음 기차까지 아직 23분(약 23분)이나 남았는데.』
“좀 일찍 나가려고. …여기서 기다린 거야?”
카호는 얼굴 옆면에 달린 비콘 중앙, 주황색과 초록색 라인이 들어간 부분을 가리켰다.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다.
『집음 마이크를 타츠야 방 쪽으로 향해 놨거든. 곧 나올 것 같아서. 내 마이크는 인간 귀보다 성능이 훨씬 좋거든. 편하지? 로봇이라는 거.』
카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카호는 나를 대할 때 유독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곤 한다. 애처로운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도공업대학 사에바 캠퍼스는 시내에서 멀어. 사에덴을 타고 트램으로 갈아타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리거든.”
이 도시는 대형 연구소, 휴머노이드 관련 기업 사업소, 대학들이 전부 북쪽 구역에 몰려 있어 시내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옛날 자위대 훈련장이었던 곳을 연구 학원 도시로 만든 거라고 한다.
소음 없는 미래형 구역이긴 하지만 통학하기엔 좀 불편한 모양인지, 버스나 트램 노선을 한창 늘리는 중이라고 들었다.
『흐음, 잠깐만 기다려 봐.』
카호가 말하며 합성수지와 금속으로 된 비콘 끝부분을 깜빡거렸다. 통신을 하거나 제어 신호를 받을 때 쓰는 안테나인데, 끝부분 LED 색깔과 점멸 상태로 기체의 가동 상황을 표시한다. 지금은 데이터 통신 중인 모양이다.
그녀는 편의점 체인의 소유물, 즉 ‘기계 비품’ 취급이라 자기 위치나 가동 상태를 몇 초마다 전송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통신을 자기 마음대로 끊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참고로 이 비콘은 옷을 입을 때 자꾸 걸리는 모양이다. 아끼던 티셔츠를 찢어 먹은 뒤로 카호는 앞이 트인 옷이 아니면 입지 않게 됐다.
로봇에게 옷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한 설계자 놈들이 있다면… 옷이 안 입어진다며 울면서 옷을 내다 버리던 카호의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네, 사에덴이랑 트램 갈아타면 37분(약 37분)이나 걸리는구나. 지금 열차 지연은 없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 그리고 오늘 기온이 4도(4°C)까지밖에 안 올라가니까 코트는 두꺼운 걸로 입어.』
“알아봐 줘서 고마워, 카호. 근데 괜찮아. 약간 쌀쌀해야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
『그래? 그럼 다행이고….』
카호가 갈 곳 잃은 두 손을 뒤로 맞잡았다. 고요한 복도에 미세한 모터 소리만 울려 퍼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망설이는 듯 보였다.
『저기 있잖아…!』 “있지…!”
얄궂게도 타이밍이 겹쳤다. 카호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카호, 왜 그래? 말해봐.”
『…정말 괜찮겠어? 타츠야, 기계공학 전공이잖아. 대학도 그쪽으로 가서 나중에 아저씨처럼 국철 입사해서 신칸센 설계하고 싶어 했잖아. 근데 타츠야가 시험 보려는 곳은… 휴머노이드 공학 계열이잖아.』
결국 이 소리를 하려고 기다린 건가. 알고는 있었지만.
카호는 내가 진로를 바꾼다고 말한 날부터 틈만 나면 그 소리를 했다. 휴머노이드 공부를 하겠다는 나를 몇 번이고 말렸다. 시험 당일인 오늘까지 이럴 줄이야.
하지만 나 역시 카호의 말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카호. 나도 이 일에 대해서는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내가 강한 어조로 말하자, 기체가 움찔 떨리더니 숙이고 있던 얼굴이 나를 향했다. 강제로 말을 듣는 자세가 된 걸까. 관리자의 명령이나 예약된 작업에 반하지 않는 한, 카호는 인간의 지시나 말에 따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뭐, 뭔데? 타츠야….』
“대학 합격 발표 날, 나한테 시간 좀 내줄래? 카호한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
『하지만 난 매장 근무 시간이….』
“아저씨랑 아주머니께는 이미 말씀드렸어. 그날 시프트는 빼주기로 하셨으니까. 카호, 네가 그 몸이 되고 나서 두 달 동안 나 계속 피한 거 알아. 왠지 모르겠지만 이유도 알 것 같고. 그러니까 나, 제대로 결과 낸 다음에… 듣고 싶은 말이 있어. 그날 하루만 나한테 시간 내주면 안 될까?”
나도, 카호도 어딘가 서로를 피하고 있었다. 제대로 마주 보는 걸 회피해 왔다. 지난 두 달간 우리 관계는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이제 그걸 끝내려 한다. 시험 결과와 함께, 카호를 향한 내 마음의 결판을 낼 것이다.
카호는 볼을 붉히며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깐 채….
『…생각해 볼게.』
그 말만 작게 남기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자, 아침으로 먹을 주먹밥이랑 점심 도시락. 돈가스 넣어뒀으니까 힘내. 타츠야 군이라면 분명 잘 해낼 거야. 아무 걱정 안 한단다.”
카호 어머니가 챙겨주신 도시락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잘 다녀올게요.”
카호는 끝내 다시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가 준 합격 기원 부적만으로도 충분했다.
현관을 나와 역까지 10분 남짓한 길을 걸으며 짝사랑하는 그녀를 생각했다.
카호를 처음 만난 건 내가 일곱 살 때였다. 아버지 동창이었던 사시하라 아저씨가 카호를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카호는 나를 참 잘 따랐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소꿉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어릴 적 내 꿈은 아버지 같은 철도 기술자였다. 국철 기술직이 되거나 철도 차량 제조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막연하게 그런 미래를 그리며,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전문 지식을 일찍 배울 수 있는 5년제 국립 사에바 공업고등전문학교 기계공학 전공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집 근처에는 공업고전이 없었다. 애초에 고전은 현에 한 곳 정도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곳이 지금 다니는 학교였지만, 집에서 편도 2시간 반(약 2.5시간) 통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기숙사 입소를 고민하던 차에 사시하라 아저씨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집에서라면 가까우니까 남는 방에서 하숙하렴. 카호도 분명 좋아할 거야.”
그 호의에 기대어 지낸 지 벌써 5년이 흘렀다.
카호를 향한 감정을 명확히 자각한 건 카호가 중학교 2학년, 내가 고전 2학년 때였다.
카호가 출전한 육상 경기 현 대회 응원을 갔다. 높이뛰기에서 자기 키보다 높은 바를 진지한 표정으로 뛰어넘는 카호의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운동으로 다져진 슬렌더한 체형에 살짝 부풀기 시작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비록 지방 대회까진 못 갔지만, 5위로 입상했을 때 터져 나오던 그 환한 미소. 그때의 카호는 내 머릿속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그날 이후, 세 살 어린 여동생 같던 소꿉친구는 더 이상 소꿉친구가 아니게 됐다.
카호는 예쁘다기보다 귀여운 타입의 여자아이다. 키가 작고 얌전해 보이지만, 밝고 다정하며 이 동네를 무척 사랑했다. 카호의 꿈은 집 1층에 있는 편의점을 물려받는 것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여자답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카호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깊어만 갔다.
하지만 그녀는 한 지붕 아래 사는 동거인이고, 방도 바로 옆이다. 마음을 전했다가 서먹해지면 서로 생활하기 불편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이 감정은 고전을 졸업하고 이 집을 나갈 때까지 봉인하기로 했다. 졸업하면 고백해서 연인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그런 내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호에게 가혹한 운명이 닥쳤다.
작년 봄부터 카호는 몸 상태가 나빠지더니, 여름 방학 직전 가게 일을 돕다 쓰러져 그대로 입원했다.
정말 걱정됐지만, 카호 부모님께는 여름 감기가 도진 것뿐이라고 들었고 병문안을 갔을 때도 카호가 기운차 보여서 처음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
당시 나는 원래 진학하려던 대학 편입 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기도 했다.
제도공업대 기계공학 계열 합격이 결정된 가을이 되어서도 카호는 퇴원하지 못했다. 그때쯤 카호의 병이 단순한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 불치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아저씨와 아주머니, 그리고 나까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때 편의점 체인의 슈퍼바이저가 제안한 것이 카호를 점포 운영용 로봇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소유권을 본사에 양도하고 본사로부터 카호를 대여하는 형태라면, 제조 비용과 유지비를 전액 부담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단, 카호의 관리자 권한은 본사가 가지며 본사의 명령이 최우선이라는 조항이 작은 글씨로 적힌 팸플릿을 보고 아저씨는 거세게 반발했다.
“왜 내 딸을 당신들한테 빌려 써야 해? 우리 딸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주머니께 들은 바로는 아저씨의 분노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슈퍼바이저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카호를 어릴 때부터 봐왔기에 어떻게든 돕고 싶어 고심 끝에 내놓은 제안이었고,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아저씨가 방을 나간 뒤, 아주머니가 몰래 팸플릿을 챙기셨다.
그 후, 카호와 부모님은 수없이 고민한 끝에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카호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너무나도 커다란 결정이었다.
카호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역에 도착했다. 좀 느긋하게 걸었는지 기차가 곧 올 시간이었다.
완행열차를 타고 두 정거장을 지나 사에바 중앙역에서 보라색 노면 전차인 사에바 트램으로 갈아탔다. 도시 북쪽의 캠퍼스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트램 안에는 수험생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몇몇 보였다. 다들 참고서를 펼치고 있었지만, 나는 자꾸만 카호의 일이 떠올랐다.
11월 초, 카호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카호는 인간으로서 병원에서 퇴원한 게 아니라, 로봇으로서 공장에서 ‘출하’되어 왔다. 카호의 생일 딱 일주일 전이었다. 카호는 인간으로서 17세 생일을 맞이하지 못했다.
편의점 주차장에 멈춰 선 정밀 기계 수송용 트럭에서 충전용 크레이들과 예비 배터리 팩, 팔에 장착할 POS 단말기, 카호의 상태를 감시하고 제어할 태블릿 등이 차례로 내려졌다.
그리고 운송업자가 마지막으로 관처럼 생긴 수송 케이스 뚜껑을 열자, 그 안에 비닐로 진공 포장된 소녀형 로봇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라면 숨이 막혀 질식했을 모습이었다. 얼굴 옆에는 비콘이 달려 있고 머리카락은 약간 주황빛이 도는 색으로 물들어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시하라 카호였다.
“아아아아아악!!!”
얼굴이 보이는 순간,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매달려 통곡했다. 배 아파 낳은 딸이 기계로, 그저 ‘물건’으로 취급받는 모습을 견딜 수 없으셨을 거다. 아저씨도 묵묵히 카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저기, 보호용 진공 포장은 저희가 뜯어도 될까요?”
운송업자의 물음이 두 분께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부탁드릴게요.”
내가 대신 대답했다. 업자는 능숙하게 비닐 끝을 찢어 카호를 꺼냈다.
“저, 대표자분 죄송한데, 수송 케이스를 회수해야 해서요. 이 로봇 좀 기동시켜서 케이스 밖으로 꺼내 주시겠어요?”
“아저씨?”
카호 부모님은 굳어버린 채였다.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시는 듯했다.
“저기, 손님께서 괜찮으시면 저희가 업자용 간이 조작 모드로 기동해서 꺼내 드릴까요?”
운송업자도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건지, 아니면 빨리 퇴근하고 싶은 건지 그런 제안을 해왔다. 그들도 나한테 말을 거니 내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업자가 손때 묻은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러자 카호의 전신에서 삐삐거리는 비프음과 모터가 돌아가는 웅 하는 기계 구동음이 들려왔다.
30초쯤 지나자 눈을 번쩍 뜨더니 카호의 귀여운 목소리를 베이스로 한 전자 음성을 내뱉었다. 그 목소리에 감정 따위는 없었다.
『본 기체는 범용형 휴머노이드 HS-207PS1114KS입니다. 간이 제어 모드로 기동 중입니다.』
카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스템 메시지를 읊었다.
“HS-207PS1114KS, 기립. 수송 케이스 밖으로 한 걸음 나와 대기하라.”
『알겠습니다.』
카호는 지시받은 동작을 막힘없이 수행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 케이스 앞에 섰고, 그대로 부동자세가 되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는 손님께서 로봇 모드를 전환해 주세요. 태블릿에 설정 화면이 떠 있으니까 그대로 따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납품서고요. 대표자분은 수령 확인란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그때 아주머니가 업자를 향해 소리치셨다.
“당신들! 아까부터 남의 딸을 로봇 로봇 거리면서! 이 애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보, 그만해!”
아저씨는 다시 울음을 터뜨린 아주머니를 달래며 눈으로 내게 ‘부탁한다’는 신호를 보냈고, 내가 ‘사시하라’라고 서명했다.
【납품서】라는 단어도 그렇지만, 납품 목록 첫 줄에 적힌 문구.
{ HS-207G형 휴머노이드 1대 }
이 한 줄이 카호가 지금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잔인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운송업자는 빈 케이스를 트럭에 싣고 떠났다. 남겨진 건 무표정하게 편의점 주차장에 서 있는 카호뿐이었다.
카호는 옷 같은 건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외피’라고 불리는, 편의점 점원 같은 디자인의 고무 슈트가 피부처럼 카호의 몸을 덮고 있었다. 가슴도, 엉덩이도 소녀의 라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방치된 것이다. 인간에게 할 짓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건 이런 뜻이었나.
나는 카호의 모습과 처우에 경악하면서도, 넋이 나간 부모님께 말을 건넸다.
“아저씨, 아주머니! 카호 깨워줘요. 이대로 두면 카호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두 분은 충격이 크셨지만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우선 내가 카호를 자기 의지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카호에게 말을 걸었다.
“카호? 나 누군지 알겠어?”
카호의 고개가 느릿하게 내 쪽으로 돌아갔고, 카메라 렌즈가 조리개를 조절하며 나에게 초점을 맞췄다. 영화 속 로봇의 움직임 그 자체였다.
『HS-207PS1114KS는 간이 제어 모드로 기동 중입니다. 본 기체는 제조 번호 이외의 음성 명령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카호의 얼굴을 하고서, 알파벳과 숫자 나열이 아니면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건 정신적으로 꽤나 고통스러웠다.
“HS-207PS1114KS. 너는 카호랑 다른 거야? 어떻게 해야 카호가 되는 건데?”
『본 기체를 퍼스널 모드로 전환하려면 태블릿에서 변경해 주십시오.』
나는 현관에 놓인 태블릿을 가져왔다. 화면을 보며 계정 설정 등 나중에 해도 되는 건 건너뛰자 모드 전환 화면이 나타났다.
업무 모드
퍼스널 모드
메인터넌스 모드
…
각 모드 설명을 확인하고 두 번째, 퍼스널 모드를 선택해 실행했다.
태블릿과 연동되어 카호가 움찔 떨더니, 20초 정도 지나 시스템 메시지를 내보냈다.
『HS-207PS1114KS, 퍼스널 모드로 기동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카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이 편의점 주차장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나와 부모님을 바라봤다. 그 표정은 몹시 부끄러워 보였고, 또 슬퍼 보였다.
“카호? 너, 카호 맞니?”
『아빠, 엄밀히 말하면 난 이제 사시하라 카호가 아니야. 지금의 난 사시하라 카호를 소체로 제조된, 세븐일레븐이 보유한 야마토 전기제 HS-207G형 휴머노이드 HS-207PS1114KS야. 난 이제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게 종속되어 봉사하는 로봇…인 거야.』
카호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가장 불안했던 것을 물었다.
“저기, 카호. 넌 네가 로봇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사시하라 카호라는 자각은 없는 거야?”
카호는 불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걸 모르겠어. 지금의 난 사시하라 카호라는 인간의 인격을 재현했을 뿐인 퍼스널 모드용 운용 소프트웨어일 뿐이야. 스스로를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라고 인식하도록 공장에서 인격 조정을 받았거든.』
쓸쓸하게 자신을 설명하던 카호의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말이야. 내 메모리에는 아빠, 엄마, 그리고 타츠야랑 지낸 추억이 있어. 인간이었을 때 즐거웠던 일이나 친구들, 학교 일까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까…』
카호는 말을 멈추고 부모님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포와 기대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이런 로봇인 나라도… 다시 한번 아빠, 엄마의 딸이… 되어도 될까요?』
불안 섞인 그 말에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카호에게 달려들어 꽉 껴안으셨다.
“당연하지! 안 그래, 여보? 넌 우리 딸이야.”
“그럼! 어떤 모습이 되어도 넌 변함없는 우리 딸이야! 어서 오렴, 카호야.”
『아빠, 엄마. 고마워요.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쩌나 너무 무서웠어. 나… 드디어 집에 돌아왔구나. …으아아아앙!!』
세 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유대를 확인하는 모습에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에게는 카호가 로봇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카호는 옆에서 지켜보던 나를 발견하고는 미세한 구동음을 내며 다가왔다.
『다녀왔어, 타츠야. 아빠랑 엄마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놀랐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타츠야를 만나려면 로봇이 되는 수밖에 없었어….』
“어, 정말 놀랐어 카호. 그래도 어서 와. 건강한 모습 보니까 마음이 놓인다.”
『고마워. 이제 심야 편의점 근무 같은 건 내가 다 할게. 난 기계니까 아무리 일해도 안 지치고 잠도 안 자도 되거든. 그러니까 마음 놓고… 도쿄에 있는 대학 가도 돼.』
카호의 말이 가슴 한구석에 걸렸다. 맞다, 난 3월부터 도쿄에 있는 대학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카호는 로봇이긴 해도 어쨌든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도 다음 주부터 다시 다닐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때의 나는 카호가 돌아왔으니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는 안일한 기대, 아니 그저 망각에 가까운 소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이 로봇이 된다는 게 아무 일도 아닐 리가 없었다. 카호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카호는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식욕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먹고 난 뒤의 처리 과정이 번거롭고, 정신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견디기 힘든 모양인지 자연스레 식사 자리를 피하게 됐다.
다음으로 불필요한 외출을 하지 않게 됐다. 즉, 놀러 다니지 않게 된 거다. 그 디자인의 외피는 벗을 수도 없고 명찰도 떼어낼 수 없다. 24시간 내내, 설령 퍼스널 모드일 때조차 그 점원 유니폼 같은 외피 차림으로 생활해야 한다. 학교 교복도 그 위에 껴입을 수밖에 없다. 옷을 입을 때마다 비콘에 걸리고, 굽이 높고 충전 커넥터가 내장된 탓에 신발도 신을 수 없게 됐다. 발가락도 사라져 버렸다.
업무 모드 시간대의 이야기지만, 그녀는 로봇으로 취급받기에 옷을 입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접객 프로그램에 따라 가동된다. 그 모습 때문에 음란한 시선을 받거나 성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몸을 만져지는 일도 있지만, 계속 미소 지으며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하도록 강제당한다.
그만큼 카호의 마음은 멍들어갔고, 퍼스널 모드로 전환되자마자 주저앉아 오열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카호는 이제 잠을 잘 필요조차 없다. 식사도 필요 없지만 대신 충전이 필수다. 전용 크레이들 위에 서서 뒷덜미에 제어 케이블을, 척추 같은 금속 부품에 달린 충전 단자에 전원 케이블을 연결해 충전하는데….
『아, 아앙! 시, 싫어…. 으으, 아앗!』
카호는 매일같이 신음 소리를 내며 충전당한다. 충전 시에는 강제로 성감 신호가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업무 시간도 충전 시간도 전부 작업으로 등록되어 있어 카호 마음대로 시간을 바꿀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아아! 앗, 앗, 아앗!』
벽 너머로 들려오는 카호의 목소리에 나도 생리적인 반응이 온다. …당연하지만 불가항력이다. 좋아하는 여자의 신음 소리를 매일 듣는데 나를 탓하는 건 번지수가 틀렸다.
『으, 윽… 응, 아아아아앗!!』
위잉, 윙…
카호가 절정에 달할 때는 격렬한 구동음이 벽 너머까지 울린다. 몸을 비틀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다음이다….
『으으, 흑… 흐윽…. 으아앙….』
기본적으로 휴머노이드는 충전 시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있고, 절정 후에는 기체 신호가 가라앉을 때까지 여운에 잠겼다가 슬립 모드로 이행한다. 카호도 마찬가지지만, 그녀는 성감이 잦아들면…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상태의 카호를 떠올리며 자위할 마음 따위 도저히 들지 않았다.
충전이라는,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를 해야 하는 슬픔 때문인지, 전기적인 유사 신호로 매일 강제 절정을 느껴야 하는 비참함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도 알겠지만 옆방의 나에게 신음 소리가 들린다는 수치심 때문인지….
카호가 일상 속에서 당황하고, 상처받고, 우는 모습을 며칠 본 것만으로도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이 고통을 카호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한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카호는 로봇인 채다. 설령 감가상각 기간이 지나 카호를 되살 수 있다 해도 로봇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밝고 씩씩했던 카호의 얼굴은 슬픔에 잠겨 눈물로 젖어버렸다.
나는 그런 카호를 사에바에 두고 도쿄 대학에 가서 국철에 취직한다. 그리고 철도 차량 설계에 매진하는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난 이제 카호를 내버려 둘 수 없다. 카호가 곁에 없는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카호가 로봇이 됨으로써, 나는 오히려 내 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만큼 난 이미 카호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제도공업대학교 공학원 기계공학 계열 진학을 포기했다. 카호 없는 도쿄에서의 캠퍼스 라이프 따위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카호가 돌아온 다음 주, 나는 다시는 올 일 없을 줄 알았던 고전 진학 지도실을 찾아가 다시 출전 상담을 했다. 연초에 있을 제도공업대 후기 편입 시험에서, 같은 공학원이라도 휴머노이드 공학 계열 모집이 남아 있는 걸 확인했다. 무엇보다 공학원 중에서 휴머노이드 공학 계열만큼은 사에바 캠퍼스에서 공부할 수 있어 카호와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휴머노이드 기술직이 된다면 내가 카호를 지탱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수험을 결정했다. 전기 시험 때 쳤던 기계공학 계열과 시험 과목은 같아도 범위나 출제 경향은 꽤 차이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거다.
다음으로 편입 시험 추천서를 써달라고 지도 교수님을 찾아갔다.
당연히 혼났고 만류당했다. 왜 추천 입학까지 걷어차고 다시 보려 하느냐고. 너 같은 우등생이 학교 얼굴에 먹칠할 셈이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거기서 나는 소꿉친구가 휴머노이드가 되어 고통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똑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휴머노이드들을 위해, 그들이 좀 더 인간답고 존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 인생을 걸어도 좋다고 호소했다.
“…결국, 좋아하는 여자 때문이라는 거군?”
“타츠야, 좀 더 영리한 놈인 줄 알았더니 너도 결국 남자구나.”
“…네, 그렇습니다.”
다 들통났다. 하지만 마음에 거짓은 없었다. 교수님들도 포기하신 듯했다.
“처음부터 솔직히 말하지 그랬냐. 그런 눈으로 말하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교수님, 제도공대에는 제가 추천 사퇴 사과를 해두겠습니다.”
“아니, 내가 하지. 내 모교니까. 휴머노이드 공학 계열로 다시 지원한다는 말도 전해주마. 뭐, 마음에도 없는 분야 연구해봤자 일류는 못 될 테니까. 그런데 타츠야? 너, 그 여자 평생 사랑할 자신 있나?”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로봇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수석으로 붙어라. 그리고 우리를 배신한 만큼 확실한 성과를 내와.”
“네!”
다음 날, 학교장 직인이 찍힌 추천서를 받았고 원서를 제출했다.
그 후 두 달 가까이, 일반 편입 시험을 위해 미친 듯이 공부했다. 편의점 시프트도 줄이고 아버지와 카호의 반대도 무릅쓰며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 잠을 줄이고 연말연시에도 놀러 가지 않았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니까.
・・・
『잠시 후 제도공업대학 정문, 제도공업대학 정문입니다. 편입 시험을 치르는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 4월부터 통학하실 때도 저희 사에바 트램을 꼭 이용해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귀여운 소녀의 전자 음성이 차내에 울려 퍼졌다. 센스 있는 안내 방송이네. 오늘을 위해 녹음한 걸까? 무인 차량이니 미리 준비해둔 모양이다. 회사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멋진 배려였다. 4월부터는 나도 트램을 타고 이곳에 다니고 싶다.
트램에서 내렸다. 밖은 춥지만 수험생들의 열기가 느껴진다. 괜찮다, 할 수 있다. 오늘 과목은 수학, 물리, 화학. 전부 자신 있는 과목들뿐이다. 떨어질 리가 없다.
기다려 줘, 카호. 이 시험에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전부 쏟아부을게.
나는 조용한 투지를 불태우며 캠퍼스 정문을 통과했다….
『카호야. 오늘 하루 종일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또 업무 모드일 때 로봇이라고 누가 심한 말이라도 했어? 에휴, 이제 슬슬 익숙해져야지~.』
아침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쉬는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사키가 상태를 보러 왔지만 완전히 헛짚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가. 나도 로봇이지만 대놓고 로봇 취급당하는 건 그것대로 상처니까. 하지만 지금 고민은 그게 아니다.
『사키…. 나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잘 모르겠어. 하아~. 인간이었을 때라면 분명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을 텐데….』
『저기, 로봇 취급당해서 힘들 때도 꼭 말해줘. 근데 오늘 고민은 그게 아니지? 아침부터 다 알고 있었어. 카호, 상사병이지? 볼이 계속 빨갛잖아. 우린 열 같은 거 안 나니까 분명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키는 쓸데없이 예리하다. 가끔 저렇게 머리가 잘 돌아갈 때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 애한테 비밀은 무리다 싶다.
『저기, 사키. 점심시간에 시간 돼? …사키라면 내 마음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아, 쇼 군도 같이 봐도 될까?』
『알았어. 쇼 군한테도 말해둘게. 쇼 군은 밥 먹으면서 들어도 상관없지?』
『그렇네…. 점심시간은 원래 밥 먹는 시간이었지. 교실에 있기 싫어서 도서관만 다니다 보니 잊고 있었어.』
남들이 맛있게 점심을 즐기는 장소에 끼고 싶지 않아서, 어느샌가 점심시간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어버렸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내 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편하다.
『누가 듣는 게 싫으면 옥상으로 갈까? 이맘때면 사람도 없을 테니까.』
『그래, 오늘은 4도(4°C)까지밖에 안 올라가니까 아무도 안 오겠지.』
점심시간….
“에취! 거 참, 확실히 아무도 안 오겠네. 이렇게 추운데!”
혼자 코트를 걸치고 있어도 쇼 군은 추워 보였다. 핫팩을 소중하게 쥔 쇼 군의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나랑 사키는 이제 입김이 안 나오니까 지금이 춥다는 감각이 더 무뎌진 걸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쇼 군. 춥지…. 저기,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점심 먹으면서 들어줘. 내가 상담하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그럼 사양 않고. 뭐 춥긴 해도 남들 눈 피하려면 여기밖에 없으니까. 좋아, 카호한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얘기는 들어줄게.”
말하며 쇼 군은 매점에서 산 야키소바 빵과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사키랑 쇼 군, 우리 집에 하숙하는 세 살 많은 고전 오빠 있는 거 알지? …아니, 만난 적 있었지.』
『기억해. 타츠야 씨지? 카호네 놀러 갔을 때 봤잖아. 진짜 잘생기셨지. 그리고 카호의 왕자님.』
뭐, 그 표현이… 틀린 건 아니지.
“야, 사키. 그건 놀러 간 게 아니라 카호네 집에서 정기고사 공부 모임 한 거잖아. 학교 끝나고 돌아온 타츠야 씨한테 네가 수학 배웠으면서.”
맞다, 작년에 우리 집 왔을 때 만났었지. 사키가 고교 수학에 좌절하기 직전이었을 때다.
그땐 참 즐거웠는데…. 사키도 나도 아직 인간이었고, 평범한 여고생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안 돼, 그런 생각 해봤자 의미 없다. 로봇인 우리가 인간으로 돌아갈 일은 없으니까.
『사실 그 타츠야가 오늘 아침에…』
나는 타츠야가 오늘 아침에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한 것, 애초에 타츠야가 내가 로봇이 된 뒤로 대학 추천 합격을 포기하고 꿈과 상관없는 휴머노이드 공학을 전공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오늘이 그 시험일이라는 것 등을 털어놓았다.
『난 타츠야가 좋아. 멋있고 다정하니까. 하지만 난… 타츠야의 꿈을 뺏으려 하고 있어. 타츠야는 원래 도쿄에 있는 대학 가서 철도 관련 연구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휴머노이드가 된 직후부터 진로를 바꾼다고 했어. 이대로라면 나 때문에 타츠야 인생이 꼬여버릴 거야. 타츠야는 나 같은 로봇이 아니라… 인간 연인이랑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데. 나 때문에 타츠야는….』
문득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니, 사키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어라, 카메라 아이 초점이 전혀 안 맞네.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반면 쇼 군은 인자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카호… 나 조금 반성했어. 염장 지르는 거 듣는 쪽은 이런 기분이었구나. 크리스마스 때는 미안했어. 쇼 군이랑 있을 때도 좀 조심할게.』
『응? 응? 사키? 무슨 소리야? 난 지금 진지하게 고민 중인데….』
“아니, 카호. 네 말은 아무리 들어도 자랑이야. 네가 타츠야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주 잘 알겠어. 근데 말이야, 방금 한 말 중에 내가 그냥 넘길 수 없는 게 하나 있어.”
『그게 뭔데, 쇼 군?』
쇼 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여느 때 없이 엄한 표정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한마디만 할게. 네가 진심으로 타츠야 씨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타츠야 씨가 너무 불쌍해!”
쇼 군에게 처음으로 분노 섞인 눈빛을 받았다.
『잠깐만, 쇼 군!』
“사키, 나한테 조금만 말할 기회를 줘. 가만히 들어줄래?”
쇼 군은 말리려던 사키를 오히려 제지했다. 사키는 서브 마스터 권한을 가진 쇼 군의 명령을 수신했기에 움찔 떨더니, 얼굴을 쇼 군에게 향한 채 자세가 굳어버렸다.
『네, 본 기체는 쇼 님의 발언이 끝날 때까지 대기합니다.』
“미안해, 사키. …카호, 넌 타츠야 씨를 좋아한다고 했지. 그럼 타츠야 씨도 카호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어? …응,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럴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
“그럼 왜 몰라주는 거야? 타츠야 씨가 카호를 위해 자기 미래를 바치려 한다는 걸.”
쇼 군이 핵심을 찔러왔다. 하지만 그런 건….
『…알고 있어. 그래서 괴로운 거야. 왜냐면 타츠야는 이런… 편의점 비품에 불과한 로봇인 나 때문에 인생을 망치려 하고 있잖아.』
내 말에 쇼 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모른다는 거야, 카호. 타츠야 씨한테는 네가 편의점 비품 로봇인지 인간인지 따위는 상관없어. 나한테 사키가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야! 로봇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난 사키가 좋아. 타츠야 씨도 분명 똑같을 거야.”
그건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연인인 거니까. 명령을 수신하고 가만히 쇼 군의 말을 듣고 있는 사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타츠야 씨는 인생을 망치려 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카호 곁에 있을 수 없는 인생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걸. 그래서 카호 곁에 머물면서 카호의 몸과 마음을 공부할 수 있게 휴머노이드 공학을 전공하려는 거 아닐까?”
그…런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난 정말 기쁠 거야.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타츠야의 마음에 응석 부려도 되는 걸까.
『하지만… 난 역시 로봇인걸. 회사의 소유물일 뿐이고, 내 감정이나 마음조차 프로그램 제어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난 평생 편의점을 위해 일해야 하니까 인간처럼 인생을 선택할 수도 없어. 분명 폐만 끼치게 될 거야….』
옆에서 듣던 사키도 고개를 숙였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 사키도 가슴이 미어지는 걸까.
“아까부터 카호는 자기가 로봇이라서, 로봇이라서… 그걸 핑계로 도망치고 있는 거 아니야? 왜 로봇이라서 포기하는 건데? 왜 로봇이라서 연애하면 안 돼? 왜 로봇은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건데? 카호나 사키의 몸과 마음에 인간 같은 자유가 없다는 거, 우린 이미 백번 천번 알고 있어. 매장 비품이라 어디로 이사 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아. 그럼 우리가 다가가면 되는 거잖아! 조금 제약은 있겠지만, 로봇을 연인으로 삼는 시점에서 우린 이미 그 각오 다 끝냈다고!”
뺨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흐른다…. 그렇구나, 타츠야는 이미 각오를 마친 거였어. 장래 진로를, 꿈을 바꿀 정도의 강한 결의였던 거야. 쇼 군과 타츠야는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옆에서 듣던 사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 기쁜 거겠지.
“나머지는 카호 네 마음먹기 달린 거 아니야? 네가 로봇이라는 걸 핑계 삼아 진짜 감정을 억누를 건지, 아니면 본심으로 당당하게 타츠야 씨와 마주할 건지. 분명 넌 로봇인 네가 타츠야 씨에게 짐이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응, 응. 맞아, 쇼 군. 로봇인 내가 타츠야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만약 내가 사키한테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면 어땠을 것 같아? 난 절대 사키를 용서 안 해. 그리고 본심을 들을 때까지 절대 포기 안 할 거야. 만약 카호 네가 타츠야 씨를 좋아한다면… 그 마음은 제대로 전해야 해. 그게 너를 위해 꿈까지 바꾼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카호 네 다정함은 타츠야 씨도 분명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카호 네가 타츠야 씨의 마음에 답해줘.”
쇼 군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아까부터 흐르던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사키…. 미안해. 이야기를 좀 들어줬으면 해서 명령을 안 풀었어. 내 할 말은 여기까지야.”
사키는 눈물을 흘린 채 쇼 군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부끄러운 소리를 그렇게 해! 절반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잖아. 이럴 때 서브 마스터 권한으로 명령하지 마! 쇼 군한테 안기고 싶어 죽겠는 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미안 미안. 근데 크리스마스 때 사키가 했던 고민을 카호가 똑같이 하고 있길래.”
『정말, 그때 일은 이제 꺼내지 마아….』
크리스마스 이야기? 파티 전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중에 사키한테 물어봐야지. 하지만 부럽다. 쇼 군과 사키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쇼 군. 나 이제 내 마음을 알 것 같아. 타츠야랑 제대로 마주해 볼게. 나, 정말 로봇이라는 걸 핑계로 도망치고 있었나 봐. 사실 내 마음은 몇 년 전부터 변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사키.』
『응? 왜, 카호야?』
『오늘 고마워. 근데… 남한테 훈수 두면서 너도 결국 바로 염장 지르는 건 좀 아니라고 봐….』
그 후, 쇼 군이 이제 너무 춥다고 해서 교실로 돌아갔다.
셋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남학생들의 시선이 꽂혔다.
“나카타, 잠깐 얘기 좀 하자.”
“어, 나 아직 고로케 빵 안 먹었는데.”
“이 자식, 카와하라 양뿐만 아니라 사시하라 양까지… 용서 못 한다.”
쇼 군은 다른 남학생들에게 어깨동무를 당한 채 끌려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랑 사키의 뺨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어서 우리가 삼각관계고 쇼 군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오해를 샀다고 한다. 방과 후에는 오해가 풀렸지만, 쇼 군은 이미 멍투성이가 된 뒤였다.
고마워, 쇼 군. 그리고… 미안해.
그날 저녁.
『다녀왔어요, 엄마. 장보기 끝났어. …저기, 타츠야 돌아왔어?』
“고맙다, 카호야. 타츠야 군은 조금 전에 왔단다. 내일도 시험이라 오늘은 방에서 집중하고 싶대. 카호야, 타츠야 군한테 저녁 좀 가져다줄래?”
『응, 엄마.』
나는 엄마가 쟁반에 차려주신 주먹밥과 된장국, 돈가스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똑똑.
『타츠야. 엄마가 저녁 드시래.』
“어.”
달칵.
“고마워, 카호. 여기 둬 줄래?”
타츠야가 책상 끝을 가리켜서 쟁반을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전자사전과 영어 잡지가 놓여 있었다.
『어, 뭘 읽고 있는 거야? …해외 과학 잡지 논문?』
“응. 장문 독해 기출문제에 과학 잡지 논문이 나왔더라고. 근데 잘 아네? 영어 잘해?”
『내 시야에 들어오는 외국어는 항상 자동 번역돼서 일본어 자막으로 뜨거든. 편리하긴 해. 내일 시험은 영어야?』
“어, 맞아. 영어랑 면접만 남았어. 오늘 수학, 물리, 화학만큼 자신 있는 건 아니라 좀 불안하네.”
그렇게 겸손을 떨지만 타츠야는 TOEIC 900점대니까 분명 점수 잘 나오겠지.
『오늘 시험은… 어땠어?』
“뭐, 모르는 문제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
대단하다, 타츠야는. 역시 내가 인간이었어도 아까운 사람이야. 하지만 오늘은 사키랑 쇼 군이 응원해 줬으니까 그런 생각 하면 안 돼.
『저기, 타츠야. 합격 발표 날, 나도 같이 있으면 안 될까?』
“진짜? 그럼 나야 좋지만, 부담되네. 무조건 합격해야겠는걸.”
타츠야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역시 여유가 느껴졌다. …멋있다. 낮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자꾸 의식하게 된다.
『저기, 어떻게 하면 무조건 합격할 수 있어?』
“글쎄, 카호가 응원해 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생각해보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충동적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수려한 얼굴에 이끌려 두 손을 타츠야의 뒷머리에 감싸 쥐고….
그대로 20초 동안, 나와 타츠야만 존재하는 세계에 몸을 맡겼다….
『하아…. 어때? 응원이 좀 됐어?』
이때 시야에는 CPU 부하 100%를 나타내는 경고 문구가 흐르고 있었다. 사고 처리가 따라가지 못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볼도 분명 새빨갛겠지.
“어…. 아마, 아니, 나 만점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타츠야의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멍해져 있었다.
『그래… 힘내.』
나는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며 방을 빠져나온 뒤, 옆방인 내 침대로 다이빙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금 한 행동을 떠올리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바보바보바보바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불 속에서 몸을 비틀며 10분 정도 몸부림치고 나서야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살며시 오른손 중지로 입술을 덧그려 본다. 왠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따뜻해졌다. 행복한 감각….
『나, 역시 타츠야가 좋아. 가슴이 아플 정도로, 미칠 것 같을 정도로 타츠야가 좋아. 이런 마음, 처음부터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난 이제 인간이 아니다. 야마토 전기제 HS-207G형 휴머노이드 HS-207PS1114KS가 지금의 진짜 나다. 로봇이 되어 따뜻한 몸을 잃었다. 사고도 제어당하고 있고, 나를 소유한 회사와 설정된 프로그램에는 거역할 수 없다. 지금까지 힘든 일이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나를 만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로봇인 나에게 사시하라 카호와 똑같은 사랑하는 마음을, 타츠야를 좋아한다는 이 감정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한동안 이 행복한 여운에 푹 잠겨 있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