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공주(人形姫)의 단골이자 기계화 장르에 조예가 깊은 이치다 유타카 씨의 『메탈 리얼리티』입니다.
이 작품은 karma 씨의 「메탈 드림」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어, 시간축의 차이에 따른 싱크로를 즐길 수 있습니다.
나노머신에 의해 서서히 기계화되어 가는 묘사가 정말 일품입니다.
***
제4화
“이 역이었군요.”
비즈니스 수트 차림의 여자가 신주쿠발 특급 ‘슈퍼 아사기리’ 그린샤(특등석)에서 내려섰다. 벚꽃 잎이 흩날리는 신고텐바역 승강장이었다.
단추 세 개짜리 재킷에 무릎까지 오는 세미 롱 스커트. 밝은 회색으로 맞춰 입은 옷차림은 아시아계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와 어우러져 영락없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의 분위기를 풍겼다.
여자는 개찰구를 나와 역 앞 택시 승강장에서 빈 차에 올라탔다.
“손님, 어디까지 모실까요?”
“시노사카 사이바네틱스로 가 주시겠어요?”
“아, 이번 달부터 영업 시작한 거기 말이죠? 거기 사장님도 손님처럼 젊고 예쁜 분이시던데. 손님도 영업하러 가시는 길인가요?”
“네, 뭐… 그런 셈이죠.”
“근데 시노사카네는 대체 뭘 만드는 데랍니까? 거기로 가는 손님은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도 운송회사 트럭은 뻔질나게 드나들고 말이죠.”
초로의 운전사는 가볍게 스티어링 휠을 돌리며 벚꽃 가로수가 늘어선 산길을 올라갔다.
“그건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없네요.”
“기업 비밀이라는 건가 보구만.”
그 말을 끝으로 운전사는 질문을 멈췄다.
산길을 10분 정도 달리자 차는 히가시후지 국제학원도시의 한 귀퉁이에 도착했다.
넓은 부지에 3층짜리 작은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고, 정문에서 건물까지의 거리도 꽤 멀었다.
“손님, 어떻게 할까요? 정문 앞에 세워 드릴까요?”
“현관 앞까지 가 주세요.”
여자가 미소 짓자, 마치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이 천천히 양옆으로 열렸다.
택시는 부지 안으로 들어서 건물 정면 현관 앞에 멈춰 섰다.
“결제는 카드로 할게요.”
여자는 신용카드를 운전사에게 건넸다.
“네네, 잠시만요.”
카드를 받은 운전사가 미터기 옆 스캐너에 카드를 긁었다.
“손님, 이거 해외 카드네요? 실례지만 혹시 일본 분이 아니신가?”
“네, 전 일본인이 아니에요.”
여자는 건네받은 전표에 사인을 하며 대답했다.
“전혀 몰랐네요. 일본어가 아주 유창하시구만.”
“고마워요.”
여자는 카드를 챙겨 차에서 내렸다.
택시가 부지를 빠져나가자 정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그녀가 현관으로 향하자 투명한 유리 자동문이 열리며, 안에서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숏컷 차림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웬일이야, 아이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정문 센서가 울려서 깜짝 놀랐잖아.”
“미안해요. 유카, 오랜만이네요.”
아이린이라 불린 여자가 말했다.
“아, 아이린 씨다! 오랜만이에요!”
유카의 뒤에서 작업복 차림의 청년이 아는 척을 했다.
“아카가와 씨. 전 당신을 만나러 온 게 아니에요.”
아이린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다시 유카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에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요.”
아카가와가 슬금슬금 아이린 곁으로 다가갔다.
“야, 아카가와! 너 또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뒤따라온 수트 차림의 남자가 아카가와를 호되게 꾸짖었다.
“쿠, 쿠로사키 선배님.”
“선배가 아니라 부장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텐데?”
남자는 아카가와를 쏘아붙이고는 아이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오늘 온 목적은…”
아이린이 말을 잇기도 전에 유카가 가로챘다.
“됐어, 다 알 것 같으니까. 이거 아이린의 테스트지?”
“네, 유카 님. 저는 아이린 님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오케이. 이제 아이린 흉내 안 내도 돼. ARX-046, 커맨드 모드로 이행해.”
“서브 마스터, 시노사카 유카 님의 성문을 확인. ARX-046, 커맨드 모드로 이행합니다. 유카 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린의 모습을 한 로봇은 무표정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세상에, 난 진짜 아이린 씨인 줄 알았는데… 대역 로봇이었다니!”
아카가와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교육을 꽤 잘 시켰네. 아이린한테 이런 재능이 있었나? ARX-046, 지금 아이린이랑 연결할 수 있어?”
“네, 유카 님. 아이린 님과 접속합니다. 삐… 삐… 삐… 따르릉…”
로봇의 몸체에서 전화 신호음이 들려왔다.
“따르릉… 벌써 들켜 버렸나 보네요. 역시 유카예요.”
신호음이 두 번 울리자 로봇의 입에서 방금 전까지 하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쯤 벌어진 채 고정된 무표정한 입에서 나오는 인간적인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를 기괴함이 서려 있었다.
“아이린, 지금 어디야? 설마 대역 로봇 혼자 여기까지 보낸 건 아니지?”
“로봇은 신주쿠 맨션에서 혼자 거기까지 갔어요. 일단 원격으로 감시는 하고 있었지만, 도중에 끼어들기 명령 한 번 없이 무사히 도착했네요.”
“아… 아이린. 만약 들켰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어머, 그런 일 없게 정밀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유카는 자기가 만든 로봇에 자신 없나요?”
“그런 게 아니라… 뭐, 됐어. 무사히 도착했으니까. 그래서 아이린은 지금 어디인데?”
“첸의 차로 방금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어요. 15분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알았어. 그럼 쿠로사키 씨한테 차 준비하라고 하고 기다릴게.”
“네, 그럼 이만. 뚜— 뚜— 뚜— ……아이린 님과의 접속이 끊겼습니다.”
“유카 씨, 인형이랑 대화하는 것 같아서 소름 돋아요.”
“무슨 소리야. 앞으로 이런 기계 인형을 만들어야 한다고. 다음에 만들 로봇은 이것보다 훨씬 더 완벽해야 하니까 실패는 용납 안 돼.”
“알고 있다니까요. 그나저나 갈수록 아이린 씨랑 똑같아지네.”
아카가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봇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삐… 저를 만지지 마십시오.”
로봇이 무표정하게 뱉었다.
“역시 아이린이라니까. 이런 것까지 철저하게 가르쳐 놨네.”
“너무해 진짜…”
“자, 이제 아이린 씨 맞이할 준비나 해. 내가 차를 내올 테니까 넌 응접실이나 치워.”
풀이 죽은 아카가와를 향해 쿠로사키가 명령했다.
사무실 현관 앞에 검은색 대형 세단이 멈춰 섰다.
“오랜만입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마른 체격의 중국인이 인사를 건넸다.
“첸 씨, 오랜만이에요.”
첸이 뒷좌석 문을 열자, 안에서 아까 그 로봇과 똑같이 생긴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이번엔 진짜 생생한 육신을 가진 룽 아이린이었다.
아이린은 아까의 로봇과는 달리 세련된 디자인의 블라우스에 미니스커트, 스니커즈를 신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이번엔 진짜로 오랜만이네요, 유카.”
“아이린도 잘 지냈나 보네.”
아이린이 내린 뒤, 첸은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 세단 문 옆에 바짝 붙였다.
안쪽 시트에서 나온 노인이 천천히 몸을 움직여 휠체어에 앉았다.
“오랜만이구먼.”
휠체어에 앉은 노인은 유카 일행이 작년 여름 홍콩에서 만났던 백룡 그룹의 총수이자, 유카 회사의 투자자인 룽젠강이었다.
“루… 룽 어르신! 오, 오랜만입니다.”
유카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시노사카 사이바네틱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대접할 준비도 못 했습니다.”
쿠로사키도 뒤따라 인사를 올렸다.
“허허, 이런 건 불시에 들이닥쳐야 실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법이지.”
그렇게 대답하는 노인은 예전에 비해 부쩍 나이가 든 것처럼 보였다.
“여기가 처음인 건 젠강 어르신뿐이네요.”
쿠로사키는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아이린의 대역 로봇이 차렷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유카, 왜 이 아이를 계속 세워 둔 거예요? ARX-046, 소파에 앉으렴.”
“네, 아이린 님.”
수트 차림의 로봇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아이린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이린은 캐주얼 차림이고 대역은 수트 차림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역 쪽이 백룡 그룹 후계자인 줄 알겠어.”
“당연하죠. 그러라고 이만큼 교육한걸요. ARX-046, 자율 모드.”
“네, 아이린 님. 자율 모드로 이행합니다. …교육해 주신 덕분에 이만큼 충실하게 아이린 님을 연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봇이 아이린과 똑같은 말투로 대꾸했다.
“대학교에도 몇 번이나 서로 바꿔서 갔었지만…”
아이린이 로봇을 보며 미소 지었다.
“…단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죠.”
로봇이 아이린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이 정도 로봇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내 투자도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니 안심이 되는구먼.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룽 노인은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었다.
“쿠로사키 군에게 줄 선물이 있네. 첸…”
“네, 어르신.”
첸은 노인의 부름에 작은 종이 꾸러미를 꺼내 쿠로사키에게 건넸다.
“이건…”
“다즐링 첫물 차(First Flush)라네. 자네가 차를 좋아한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쿠로사키는 찬장에서 찻잔을 꺼내 테이블에 정렬했다.
“룽젠강 어르신, 아이린 씨, 첸 씨, 사장님이랑 저, 그리고 아카가와 것까지…”
“잠깐만요, 이 아이한테도 한 잔 주시겠어요?”
아이린이 끼어들었다.
“로봇에게… 말입니까?”
“네. 대역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음용 기능도 넣어 뒀거든요. 이런 데서 차별하면 애써 학습시킨 효과가 사라져 버려요.”
“역시 아이린답네. 학습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겠어. 성장한 제어 프로그램을 빨리 보고 싶은걸.”
“유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차 다 마시면 유카한테 당신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게 해 줘요.”
아이린이 로봇을 향해 생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차를 음미할 시간을 주시는 아이린 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마치 자의식이 있는 것 같아. 빨리 프로그램 보고 싶어 죽겠네.”
“저에게 자의식은 없습니다. 아이린 님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프로그램, 그것이 저입니다. 저의 말도, 몸짓도, 표정도 아이린 님을 연기하기 위해 최적의 패턴을 계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프로그램을 빨리 보고 싶어 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서브 마스터인 유카 님보다 마스터인 아이린 님의 명령을 우선해야 하기에,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여기서 끊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