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공주(人形姫)의 단골이자 기계화 장르에 조예가 깊은 이치다 유타카 씨의 『메탈 리얼리티』입니다.
이 작품은 karma 씨의 「메탈 드림」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어, 시간축의 차이에 따른 싱크로를 즐길 수 있습니다.
나노머신에 의해 서서히 기계화되어 가는 묘사가 정말 일품입니다.
***
제2화
“선배, 그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름다운 인간형을 한 은색 로봇을 향해, 하얀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아담한 체구의 여자가 말했다.
“네, 유카 님.”
선배라 불린 로봇은 쭈그려 앉는 자세로 1미터 사방의 컨테이너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가차각, 기계음이 울리며 팔다리가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각도로 꺾이더니, 로봇은 컨테이너 안에 딱 맞게 수납되었다.
“그럼, 다음은 행사장 현장에서 봐요.”
“네, 유카 님.”
유카가 리모컨을 조작했다.
“시제기 37호. 식별명 LISA. 정지합니다.”
LISA의 전원이 차단된 것을 확인한 유카는 컨테이너 뚜껑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쿠로사키 씨, 항공편 수배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소장님.”
쿠로사키라 불린 온화한 인상의 남자는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운송업자가 도착해 LISA가 든 컨테이너를 실어 나갔다.
“근데 왜 내가 홍콩 국제 로봇 쇼에 초대된 걸까?”
“주최자인 백룡(파이론) 그룹이라면 화교 중에서도 손꼽히는 재벌이고, 기술 진흥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전무님이 손을 써서 여기까지 끌어온 거예요. LISA의 성능을 타사에 과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네, 열심히 해야겠어.”
가운을 로커에 넣고 소장석에 앉으며 유카가 말했다.
“그런데,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퇴근 채비를 하며 쿠로사키가 물었다.
“말해봐요.”
“소장님은 왜 직접 만든 로봇인 LISA를 선배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그건, 음…….”
유카가 살짝 당황했다.
“그게, 저 로봇 원형이 만들어진 건 내가 입사하기 전이었잖아요.”
“아아, 전임 소장이셨던 세키구치 씨가 만드신 거였죠.”
“맞아요. 아무래도 행방불명된 선배랑 겹쳐 보여서…….”
“그래서 이름도 LISA라고?”
“네. 그나저나 쿠로사키 씨, 그 소장님이라는 호칭 좀 그만해주면 안 돼요?”
“왜 그러십니까?”
“아니, 띠동갑도 넘는 분한테 그렇게 불리는 거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난 선배 덕분에 소장이 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쿠로사키는 전무가 타사에서 헤드헌팅해온 기술자다.
한동안 전무 밑에 있다가 한 달 전부터 유카의 부하로 일하고 있다.
나이는 서른여섯이지만, 인생 경험이 파란만장했는지 겉보기엔 마흔이 넘어 보였다.
반면 유카는 이제 겨우 스물넷. 대학 졸업 2년 차에 소장으로 발탁되었으니,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누가 봐도 쿠로사키가 소장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소장님,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내일 공항에서 뵙죠.”
쿠로사키가 방을 나갔다.
“후우, 영 껄끄럽네.”
유카는 안경을 벗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선배처럼은 잘 안 되네. 지금도 로봇이 된 리사 선배가 서류 정리니 계산이니 결재 판단까지 다 해주고 있어서 겨우 버티는 거라는 건, 쿠로사키 씨한테 절대 말 못 하고……. 다시 전무님이랑 상담해볼까.”
연구소를 나온 쿠로사키는 자신을 회사로 불러들인 전무의 자택으로 차를 몰았다.
아직 귀가 전이라는 말을 듣자, 기다리겠다며 제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몇 시간 후 귀가한 전무를 향해, 연구소에서의 유순한 얼굴은 온데간데없는 분노 섞인 표정으로 그가 뱉었다.
“전무님, 부장 대우라는 약속은 어떻게 된 겁니까? 왜 그런 어린 계집애 밑에서 일해야 하는 거죠? 그 여자,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무리 존경하는 선배가 없어졌다고 해도 로봇한테 그 이름을 붙이다니.”
전무는 응접실 장식장에서 브랜디를 꺼내 잔에 따랐다.
“자, 이거 마시고 진정하게. 자네에겐 기술부장 직함을 줬고, 일반 부장 이상의 급여를 지급하고 있지 않나.”
쿠로사키는 건네받은 잔을 입에 댔지만 납득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자네도 동의하고 우리 회사로 온 것 아닌가? 시노사카 양에겐 뛰어난 기술이 있네. 자네가 LISA 같은 로봇을 만들 수 있나? 우수한 기술자 밑에서 자유롭게 개발하고 싶다는 자네의 바람은 충분히 들어줬다고 생각하는데.”
전무가 몰아붙이듯 말했다.
“분하다면 LISA의 비밀을 파헤쳐 보게나. 이번 홍콩행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지 않나?”
“그…… 그렇군요. 기술자로서 그 계집애 코를 납작하게 해줄 겁니다.”
쿠로사키는 술기운을 빌려 호기롭게 내뱉었다.
“할 수 있겠나?”
“보여드리고말고요.”
“오늘은 늦었군. 취했으니 기사를 붙여 보내줄 테니 차는 두고 가게.”
잠시 후 도착한 검은색 고급 세단에 몸을 싣고 쿠로사키는 전무의 집을 떠났다.
삐삐삐삐…….
게이트의 금속 탐지기에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손님, 잠시 이쪽으로. 몸수색 좀 해도 되겠습니까?”
유카는 경비원에게 이끌려 경비실로 안내되었다.
“미안합니다, 이것도 규정이라서요.”
“아뇨, 저야말로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경비실 안에는 여성 경비원 두 명이 소형 금속 탐지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경비원은 유카의 겉옷을 벗긴 뒤 몸 구석구석을 꼼꼼히 스캔했다.
“금속 제품은 없으시네요. 아무래도 몸 전체가 일반인보다 아주 조금 더 반응하기 쉬운 체질인가 봅니다. 혈중 철분이 농후한 분들에게 가끔 있는 일이에요. 증명서를 끊어드릴 테니 다음 공항에서 걸리면 직원에게 보여주세요.”
경비원은 서류를 작성해 유카에게 건넸다.
“또 걸렸네. 그때 이후로 이런 ‘체질’이 돼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보안 구역에서 벗어놓았던 안경을 고쳐 쓰고 유카는 출국 심사대로 향했다.
출국 심사를 마친 유카가 탑승구로 향하자, 탑승구 옆 라운지에는 이미 쿠로사키가 도착해 있었다.
“소장님, 수고 많으십니다. 여기 음식과 음료는 전부 무료이니 편히 쉬십시오.”
“퍼스트 클래스는 처음이에요. 타기 전부터 서비스가 완전히 다르네요.”
“이번엔 상대 측에서 초대한 거니까요. 회사 비용이었다면 비즈니스 클래스였을 겁니다.”
“비즈니스 클래스도 타본 적 없어요. 여행이든 출장이든 맨날 이코노미였으니까.”
“소장님은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해도 된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쿠로사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도와줄 스태프를 한 명 추가했습니다. 아카가와라는 학생인데, 입사 전 연수의 일환으로 공부시키고 있습니다. 퍼스트 클래스 티켓은 두 장뿐이라 그 친구는 이코노미에 태웠습니다만…….”
“쿠로사키 선배, 그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꾀죄죄한 청바지에 촌스러운 티셔츠를 입고 배낭을 멘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라운지 안의 다른 손님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이질적인 차림새였다.
“아카가와, 여긴 퍼스트 클래스 전용 라운지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아, 그거요? 마일리지가 쌓여 있어서 방금 업그레이드하고 왔죠. 프리미어 회원이라 마일리지가 두 배로 쌓이거든요. 전 미국 갈 때 일단 싱가포르까지 가서 거기서 도쿄 경유 왕복 티켓을 사요. 돌아올 때 도쿄에서 내리고 남은 싱가포르행은 다음 미국행을 위해 쟁여두는 거죠. 도쿄나 싱가포르나 미국까지 운임은 거의 비슷하거든요.”
아카가와라 불린 청년은 아는 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오타쿠 학생의 모습이었다.
“아카가와, 그만해라. 일단 소개하지. 소장님이신 시노사카 씨다.”
“시노사카 유카입니다. 잘 부탁해요.”
유카가 짤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선배 상사예요? 귀엽네, 장난감 삼고 싶을 정도야. 근데 나랑 별 차이도 없는데 소장이라니, 머리 진짜 좋은가 보네. 난 머리 좋은 사람은 존경하기로 했거든요. 저기, 우리 친구 해요. 유카 짱이라고 불러도 되죠?”
“어, 어어…….”
“유카 짱 전공은 뭐예요? 난 전자공학. 제도공대 아사쿠라 연구실에서 로봇 두뇌용 컴퓨터를 연구하고 있어요. 쿠로사키 선배가 아사쿠라 조교수님이랑 동기라서 내 입사처로 소개해준 거거든요. 내년에 입사하게 될 테니까 잘 부탁해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던 아카가와의 수다는 공항 안내 방송에 의해 중단되었다.
『홍콩행 비행기 탑승을 곧 시작하겠습니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분들부터 탑승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자, 가자고요!”
아카가와는 자연스럽게 유카의 손을 이끌고 기내로 들어갔다.
“아사쿠라 추천이라 써보긴 하는데, 저 녀석 괜찮은 건가…….”
중얼거리며 쿠로사키도 두 사람을 뒤따라 기내로 향했다.
정시에 이륙한 비행기는 홍콩 국제공항을 향해 순조롭게 비행 중이었다.
관광 시즌이라 이코노미 클래스는 만석이었지만, 퍼스트 클래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유카 일행 외에는 화교계 비즈니스맨으로 보이는 그룹 한 팀뿐이었다.
유카 일행은 맨 앞줄 세 자리에 앉았다. 맨 앞줄은 통로 왼쪽 두 자리와 오른쪽 한 자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왼쪽 창가에 유카가, 통로 쪽에 아카가와가, 통로 건너편 1K 좌석에 쿠로사키가 앉았다.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사무장이 인사를 하러 왔다.
“저희 비행기는 순조롭게 비행 중입니다. 곧 점심 식사를 준비해 드릴 테니 원하시는 메뉴를 골라 주십시오.”
사무장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이 항공사 홍콩 노선을 탔으면 무조건 딤섬을 먹어야죠! 홍콩 일류 레스토랑에서 만든 걸 기내에서 쪄서 내놓는데, 퍼스트랑 비즈니스에서만 나오거든요. 비즈니스는 정해진 세트로만 먹을 수 있지만, 퍼스트는 카트에서 원하는 걸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다고요.”
메뉴판을 펼치며 아카가와가 으스대듯 말했다.
“손님,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뭐, 그렇죠! 10만 마일이나 날아다녔으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일단 난 샤오롱바오랑 하가우, 그리고 샤오싱주 차갑게 부탁해요. 유카 짱은 뭐 먹을래?”
“저기…… 아카가와…… 군? 우리 방금 만났는데 그렇게 부르는 건 좀…….”
유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 미안. 내 이름을 안 알려줬나? 아카가와 고조. 친구들 사이에선 고라고 불려요. 이제 됐지, 유카 짱?”
“그런 뜻이 아니라…….”
유카는 안경을 꺼내 쓰며 아카가와에게서 시선을 돌려 메뉴판을 읽었다.
“음, 이 세트로 부탁드려요. 술은 안 마실게요. 자스민 차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사무장은 통로 건너편의 쿠로사키를 향해 돌아섰다.
“손님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저도 세트로 하죠. 부족하면 나중에 더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정산소종(랍상소우총) 있습니까?”
“랍상……?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무장은 뒤쪽으로 돌아갔다.
“선배, 뭘 시킨 거예요?”
“중국차다.”
잠시 후 돌아온 사무장은 중국인 수석 사무장을 데려왔다.
“죄송합니다만, 정산소종은 저희 기내에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향 때문에 불편해하시는 손님들도 계셔서요.”
“그럼 이 비행기에서 가장 추천하는 차로 주십시오.”
“그렇다면 철관음 최상품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식사를 가져온 사무장은 먼저 유카와 쿠로사키에게 세트를 내놓고 정중하게 차를 따랐다.
그리고 나중에 자율 주행 로봇 카트가 운반해온 아카가와의 주문 음식을 쟁반에 늘어놓을 때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맛있다! 역시 이 샤오롱바오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카가와가 입으로 가져가는 것은 유카와 쿠로사키의 세트에 있는 것과 달리, 찐 지 시간이 지나 육즙이 식어버린 것이었지만 아카가와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진짜 맛있지, 유카 짱? 어, 벌써 다 먹었어?”
“응, 요즘 좀 소식하고 있어서.”
유카는 그렇게 말하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 화장실로 향했다.
“남길 거면 내가 먹어버린다?”
아카가와가 유카의 접시에 젓가락을 대려 했다.
“아카가와, 꼴사납게 굴지 마라.”
쿠로사키가 주의를 줬지만, 아카가와는 전혀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후우.”
유카는 화장실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렇게 살갑게 구는 걸까.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다 망쳤네.”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알약 케이스를 꺼내 캡슐 하나를 삼켰다. 벽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화장이 잘 안 먹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는 것도 선배 데이터로 만든 이 약 덕분이지. 이게 없었으면 지금쯤 나도…….”
그때 화장실 문이 노크되었다.
“손님, 곧 착륙 태세에 들어가오니 좌석으로 돌아가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유카가 자리로 돌아오자 식사는 이미 치워져 있었고, 아카가와는 아직 덜 먹은 듯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최종 착륙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15분 후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안내 방송이 흐르고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홍콩에 도착한 세 사람은 입국 절차를 마치고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머리 위로 한여름의 햇살이 가차 없이 내리쬐었다.
“덥다 더워!”
아카가와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티셔츠도 땀으로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쿠로사키는 정장을 입고도 태연했고, 유카 역시 전혀 땀을 흘리지 않았다.
“유카 짱, 안 더워? 쿠로사키 선배도?”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너도 내년부터 비즈니스맨이 될 거라면 이 정도는 참아라.”
“난 땀이 잘 안 나서 평온해 보일 뿐이지, 열이 쌓여서 힘들어. 빨리 샤워하고 몸 좀 식히고 싶어.”
그때 세 사람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일본에서 오신 시노사카 님이십니까?”
“아, 네. 맞아요.”
유카가 돌아보자 검은 정장을 입은 키 크고 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저는 첸이라고 합니다. 롱 대인(大人)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백룡 그룹의?”
쿠로사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따져 물었다.
“네, 여러분을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쪽 차로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첸이라는 남자를 따라가려는 유카를 쿠로사키가 제지했다.
“소장님, 잠깐만요. 홍콩에선 이런 수법의 납치가 유행입니다. 이 자가 정말 마중 나온 사람인지 확인부터 해야…….”
“실례했습니다.”
첸이 내민 IC 카드를 쿠로사키가 받아 휴대용 단말기로 스캔했다.
잠시 후 단말기 표시를 확인한 쿠로사키가 말했다.
“정말 마중 나온 사람이 맞는 것 같군요. 이쪽이 소장인 시노사카입니다. 전 쿠로사키, 그리고 이쪽은 어시스턴트인 아카가와입니다.”
“다시 인사드리죠, 첸입니다. 여러분의 시중과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노사카 유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첸이 운전하는 리무진으로 20분 정도 달리자, 산 너머 반대편 해안가를 따라 새로운 건물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 개발은 백룡 그룹이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로봇 쇼 행사장인 신홍콩 국제 컨벤션 센터도 저희 회사가 설계한 곳이죠.”
첸은 그렇게 말하며 돔 형태의 건물 입구에 차를 세웠다.
“이쪽입니다.”
첸은 거대한 메인 돔이 아닌 옆 건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번 쇼에서는 산업용 로봇과는 별도로 첨단 연구를 프레젠테이션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유카의 연구소 공간은 산업용 로봇을 다루는 모회사와는 다른 건물에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대기업 부스에 비하면 좁은 공간이었지만, 특별 초대라 그런지 눈에 띄는 위치에 있었고 일본에서 보낸 짐들이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연구소에서 직송한 컨테이너도 무사히 도착해 있었다.
타사 부스들은 대부분 준비가 끝나 있었고, 다양한 로봇들이 내일부터 시작될 본행사를 앞두고 마지막 조율을 하고 있었다.
유카는 컨테이너 잠금을 해제하고 리모컨을 조작했다.
“시제기 37호. 식별명 LISA. 기동했습니다. 유카 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선배…… 가 아니라, LISA. 컨테이너에서 나오세요.”
“네, 유카 님.”
LISA는 접혀 있던 팔다리를 펴고 컨테이너에서 나와 일어섰다.
“오, 이게 유카 짱이 개발한 로봇이야? 나 내부 좀 보여주면 안 돼?”
아카가와가 말했다.
“미안해요, 일체형으로 성형된 거라 여기선 분해할 수 없어요.”
“왜? 보통은 정비하기 편하게 만들잖아. 유지 보수라든가…….”
“그건…… 일단 인간형이니까…….”
“인간답게 만들 거면 저쪽 부스 녀석처럼 인공 피부로 똑같이 코팅하든가 방법은 많잖아.”
“아카가와, 무례함에도 정도가 있다.”
쿠로사키가 끼어들었다.
“쿠로사키 씨, 고마워요. 아카가와 군, 마음에 안 들면 안 도와줘도 돼요. 나랑 LISA가 준비할 테니까 중식이라도 먹으러 갔다 올래요?”
유카는 삐친 듯한 말투로 안경을 쓰며 LISA에게 명령했다.
“LISA, 전시 준비를 하세요.”
“네, 유카 님.”
그렇게 말하자 LISA는 쌓여 있던 짐을 풀고 어색한 동작으로 전시용 슬라이드를 부스에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건 저기에, 그리고 저쪽 저건 저기에 둬요.”
“네, 유카 님.”
유카의 지시에 따라 LISA는 정확하게 전시 자료를 준비해 나갔다.
“상태는 어때?”
“네, 정상이지만 매끄럽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유카 님, 구동 부분을 개량해 주십시오.”
“그렇구나, 역시 서보 모터를 나중에 조립하는 게 낫겠어.”
유카가 LISA에게 말했다.
“하지만 분해할 수도 없고……. 아까 아카가와 군한테도 한 소리 들었네. 유지 보수하기 편하게 만들라고. 선배가 그때 말했던 거랑 똑같네.”
“말도…… 안 돼…….”
아카가와가 말을 잃었다.
“어…… 아직 있었어?”
유카는 아카가와의 목소리에 무관심하게 대꾸했다.
“속이려 해도 소용없어. 내 전공은 로봇 전자 두뇌라고. ‘저거’니 ‘저쪽’이니 그런 애매한 지시로 동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원래 프로그램된 거로 날 놀라게 하려는 거지?”
“아카가와, 아직도 모르겠나? 그녀는 이걸 개발했기에 소장이 된 거다. 지금 대충 행사장을 둘러봐도 이 정도 대응을 할 수 있는 로봇은 보이지 않아. 틀림없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 대단한 전자 두뇌가 개발되어 있었다니……. 내가 대학에서 해온 건 대체 뭐였던 거야.”
아카가와가 분한 듯 말했다.
“하지만 이 전자 두뇌는 여러 문제가 있어서 아직 상품화는 못 해. 그리고 구동 장치 능력이 전자 두뇌를 못 따라가서 부담을 주고 있고…….”
유카가 그렇게 말하자 아카가와는 순순히 사과했다.
“의심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전자 두뇌로는 유카 짱을 못 이긴다는 거 알았으니까, 회사 들어가면 팔다리 구동 부분 설계를 맡겨주면 안 될까?”
“아직 입사가 확정된 건 아니라고.”
쿠로사키가 아카가와에게 쐐기를 박았다.
“슬슬 준비 끝났네. LISA, 전시대에 서 줘요.”
“네, 유카 님.”
LISA는 부스 안에 놓인 전시대에 올라가 직립 자세를 취했다.
“그럼, 내일 봐요. 스위치 끌게요.”
유카가 리모컨을 조작했다.
“시제기 37호. 식별명 LISA. 정지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LISA는 움직임을 멈췄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첸이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네, 이제 내일 본행사만 기다리면 됩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딱히 정해진 건 없는데…….”
유카가 말했다.
“그렇다면 백룡 그룹의 연구소를 견학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난 보고 싶은데!”
아카가와가 외쳤다.
“아무도 너한테 안 물어봤다.”
쿠로사키는 떫은 표정으로 아카가와를 나무라고는 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예정에 없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겁니까? 견학이라면 다른 기업 사람들에게도 제안한 건가요?”
“이거 참, 공항에서 뵀을 때부터 보통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감이 정말 좋으시군요.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연구소에 도착하면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말을 꺼내려는 쿠로사키를 가로막으며 유카가 말했다.
“나도 연구소 가보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차를 준비해올 테니 로비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첸은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소장님, 잠깐 이쪽으로…….”
쿠로사키는 유카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소장님, 너무 쉽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수상하다고 생각 안 드십니까?”
“그치만…….”
“‘그치만’이 아닙니다. 본인 입장을 모르시는 겁니까? 당신이 이 자리의 최종 결정권자이니, 본인 발언의 무게를 좀 더 생각하세요.”
“그래도 남의 연구는 궁금하고, 첸 씨도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요.”
“대체 어디가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는 겁니까? 저 남자는 태도는 부드럽지만 야쿠자나 마피아랑 다를 바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요. 가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충분히 조심하십시오.”
“네! 조심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유카는 로비로 걸어갔고, 남겨진 쿠로사키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왜 이런 애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거야. 기술만 없으면 그냥 어린 계집애일 뿐인데. 이게 다 나를 그룹에서 쫓아낸 그 자식 때문이야. 이 회사에서 성과를 내서 반드시 돌아가고 말겠어…….”
“쿠로사키 선배? 왜 그래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쿠로사키는 그렇게 말하고 유카의 뒤를 쫓았다.
“꽤 머네요.”
첸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서 유카가 말했다.
“이 근처는 아직 개발 중입니다만, 장래에는 공항과 홍콩 시내를 잇는 직통 열차가 다닐 예정입니다. 곧 보일 겁니다.”
차 전방에 높은 펜스로 둘러싸인 연구소 부지가 나타났다.
첸의 차가 다가가자 자동으로 게이트가 열렸고, 브레이크를 밟지도 않은 채 차는 부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내린 첸은 세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라고는 해도 버튼은 없었고, 카드를 긁는 슬릿과 흰 선으로 손바닥 모양이 그려진 20센티미터 사방의 검은 판만 있었다.
첸이 카드를 긁고 손바닥 모양에 손을 대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곳이 저희 회사의 첨단 연구소입니다. 다양한 개발을 진행하고 있죠.”
“그래서, 하려던 이야기가 뭡니까?”
첸의 설명을 가로막으며 쿠로사키가 물었다.
“그건 롱 대인께 직접 들으시죠.”
엘리베이터는 한참을 상승하다가 조용히 멈췄고 문이 열렸다.
그 앞은 복도였고, 중후한 목재 대문이 있었다.
첸이 문 앞까지 가서 광둥어로 무언가 말하자, 가차각 소리가 나며 문 잠금이 해제되었다.
그 방은 유카네 회사 중역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중후한 분위기였다.
가구 하나하나가 졸부 취향이 아닌, 은은한 고급스러움이 감도는 일류품들뿐이었다.
방 안쪽 소파에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여든은 훌쩍 넘긴 듯 보였지만, 마른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정정한 발걸음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유카를 향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뻗었다.
“니…… 니하오?”
유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일본어 할 줄 아니 걱정 말게.”
노인이 무게감 있게 입을 열었다.
“내가 백룡 그룹의 회장, 롱 젠강(龍建剛)일세. LISA를 만든 기술력을 보고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네. 이번에 초대한 것도 사실 그게 목적이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쿠로사키가 끼어들었다.
“백룡 그룹의 미래를 위해, 극비리에 한 대…… 아니, 한 명의 로봇을 만들어줬으면 하네. 물론 필요한 금액은 얼마든지 대주지.”
“자네 전공이 장애인용 사이보그 의수나 의족이라고 들었네만.”
롱이 말을 이었다.
“네, 그렇긴 한데…….”
“그 기술을 써서 생사람과 구별이 안 가는 로봇을 만들 수 있겠나?”
“어느 정도 수준이냐에 따라 달라요. 겉모습뿐이라면 문제없지만, 피부 촉감까지라면 꽤 어려울 거예요.”
“그렇겠지. 악수를 하는 정도로는 들키지 않을 물건을 가급적 빨리 만들어주게.”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쿠로사키가 말했다.
“아무리 초대받았다고 해도, 그런 수상쩍은 일에 가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하하!”
롱은 노인답지 않은 호탕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렇군. 역시 쿠로사키 상사의…… 아니, 전 쿠로사키 상사의 간부 후보답군. 하지만 더 깊은 이야기를 하려면 최소한 비밀은 지켜줘야겠는데, 어떤가?”
“야, 아카가와. 넌 나가 있어.”
쿠로사키가 말했다.
“왜요! 나 비밀 진짜 잘 지킨다니까!”
소란을 피우는 아카가와를 첸이 뒤에서 결박했다.
“거칠게 다뤄서 죄송합니다.”
아카가와를 끌고 첸은 방 밖으로 나갔다.
“쿠로사키 상사라면 그 세계적인 대기업? 우리 회사보다 몇 배는 더 크잖아요!”
유카가 놀라 외쳤다.
“네. 전 그 쿠로사키 일족이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아니,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군요. 어쨌든 말입니다…….”
쿠로사키의 말을 가로막으며 롱이 말했다.
“자네에게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은 건, 이 늙은이의 대역을 할 로봇이라네. 내 내장은 이미 만신창이야. 길어야 몇 년밖에 못 산다고 의사가 그러더군. 하루빨리 회사를 물려줘야 하는데, 아들 내외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남겨진 손녀 아이린(愛鈴)은 그룹을 이어받기엔 아직 너무 어려.”
“손녀분…… 말인가요?”
유카가 되물었다.
“그래, 손녀 아이린은 홍콩에서 대학을 나오고 일본 대학원으로 유학 가 있네만, 아직 사회 경험이 전혀 없어. 이대로 내가 죽으면 회사를 노리는 놈들의 먹잇감이 될 테고, 사내에 아군이 없는 아이린은 쫓겨날 게 뻔하지. 쿠로사키 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제…… 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겠죠.”
쿠로사키는 쓴약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아이린이 데릴사위를 들여 회사를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눈을 부라리고 감시할 수 있도록, 나랑 똑 닮은 로봇을 만들어줬으면 하네. 로봇 조작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이 첸에게 맡길 생각이지만, 가급적 외부 조작 없이 내 흉내를 내며 행동할 수 있게 해주게.”
“이 연구소에선 못 만드나요? 아마 저보다 기술 수준이 높을 것 같은데. 그리고 로봇이 아니더라도 사이보그 같은 건 안 되나요?”
“사내에서 나랑 똑같은 외형의 로봇을 만드는 건 기술적으로 가능하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내에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겠지. 로봇의 명령을 들을 인간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나. 그래서 사내 설비를 쓸 수는 없네. 또한 자네만큼 뛰어난 전자 두뇌를 인간 머리 사이즈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 게다가 팔다리는 몰라도 내장을 잃으면 뇌 생명 유지를 위해 외부에 대규모 장치가 필요하게 되니, 내 경우에는 사이보그화는 무리라네.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된 뇌뿐인 노인을 우두머리로 인정할 만큼 화교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래도 그렇게 갑자기 말씀하셔도…….”
“지금 회사 일이라면 걱정 말게. 자네들 상사인 전무는 곧 군용 사이보그 관련 비리로 체포될 테고, 연구소는 폐쇄될 걸세. 이대로 돌아가면 LISA는 증거물로 압수되겠지. 연구에 몰두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는 잘 따져보는 게 좋다고 인생 선배로서 충고해주지.”
“연구소가…… 폐쇄…… 설마요.”
유카가 당황했다.
“자네는 연구 데이터가 많이 필요하지 않나? LISA와 ‘자네 자신’을 위해서 말이야. 그걸 위해 살날 얼마 안 남은 이 늙은이가 협력하겠다는데 나쁜 제안은 아닐 걸세.”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롱은 유카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개인 자산으로 유령 회사를 통해 이미 일본에 땅은 마련해뒀네. 내부 설계나 설비는 마음대로 해도 좋고, 내 의뢰가 완료되는 날엔 권리를 전부 넘겨줘도 상관없네.”
“……확실히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저희에게 돌아올 이득은 헤아릴 수 없군요. 하지만 당신이 얻는 건 뭡니까?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곧바로 믿으라고 해도 무리입니다.”
쿠로사키가 말했다.
“손녀와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부족한가? 확실히 당장 답을 구하는 건 가혹할 테니 전시회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주지. 일단 여기 연구소를 둘러보면 내 말도 이해가 갈 걸세. 첸, 있나?”
“네, 여기 있습니다.”
아카가와를 데리고 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두 사람에게 A클래스 보안 카드를 주게. 손바닥 등록도 부탁하네.”
“처음 본 사람들에게 A클래스 카드라니, 아무리 그래도 무모하십니다!”
첸은 그렇게 말하고 광둥어로 바꿔 롱과 격렬한 대화를 이어갔다. 첸은 노인을 만류하려 했지만, 롱 역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참 대화가 오간 끝에 결국 첸이 꺾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롱 대인께서 그렇게까지 각오하셨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어떤 입장인가? 이쪽엔 정보가 없는데…….”
롱이 아카가와를 보았다.
“내년 입사 예정인 학생이라고 합니다. 연수를 위해 파견되었다더군요.”
첸이 대답했다.
“그럼 비지터용 카드를 주게. A클래스라면 동행자가 있어도 문제없지.”
유카와 쿠로사키는 첸의 지시에 따라 방의 외관을 해치지 않도록 가구 속에 잘 숨겨진 단말기 쪽으로 이동했다.
첸이 단말기에 공카드를 넣었고, 먼저 쿠로사키가 스캐너에 손을 올렸다. 붉은 빛이 쿠로사키의 손을 스캔하고 나자 삐 소리와 함께 카드가 배출되었다.
“등록되었습니다. 다음은 시노사카 씨입니다.”
유카도 쿠로사키가 했던 것처럼 스캐너에 손을 얹고 몇 번 스캔했지만, 에러음이 울리며 좀처럼 등록되지 않았다.
“스캔이 잘 안 되네요. 지문이 옅은 것 같은데…….”
“상관없네. 손 모양만으로도 등록은 문제없겠지.”
“하, 하지만…….”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나.”
“알겠습니다.”
첸은 스캐너 설정을 조절하고 다시 읽기 명령을 내렸다.
삐!
가벼운 소리와 함께 카드가 배출되었다. 이번엔 문제없이 등록된 모양이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첸은 세 사람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먼저 백룡 그룹에서 가장 인간에 가까운 원격 조종 타입 로봇을 소개하겠습니다.”
첸이 카드를 찍고 방 문을 열자, 그곳에는 단말기 앞에서 열심히 데이터를 뽑고 있는 연구원 세 명이 있었다. 커다란 강화유리 창 너머 안쪽 방에서는 치파오를 입은 한 여성이 중국 권법 연습을 하고 있는 듯했다. 첸이 광둥어로 말을 걸자 연구원은 헤드셋을 통해 방 안으로 호출했다. 여성은 권법 연기를 멈추고 유카 일행을 향해 절을 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을 통해 연구원은 유카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첸의 통역을 거쳐 연구원이 말했다.
“이것이 현재 최고 수준의 로봇입니다.”
그 여성형 로봇은 유카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뻗었다. 유카가 손을 잡자 그녀는 가볍게 맞잡아왔다. 겉모습도 피부 촉감도 전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정말 이게 로봇인가요? 이 정도 기술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여기선 하지 마십시오.”
첸이 귓속말로 유카의 질문 일부만 통역했다. 치파오를 입은 여성은 유카의 의문에 답하듯 천천히 옷을 벗었다. 옷 아래로 드러난 것은 팔다리 등 겉으로 보이는 곳 외에는 금속으로 덮인 바디였다.
“그럼 조종 시스템을 보여드리죠. 지금부터 링크를 차단하겠습니다.”
여성형 로봇은 의자에 앉아 한쪽 손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첸이 지시하고 연구원이 키보드를 조작하자, 그녀는 그 순간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고 표정이 사라졌다. 연구원은 방 한구석에 있던 알 모양의 캡슐 앞으로 안내했다.
“이 안에 조종자가 있습니다.”
연구원이 캡슐 옆 단말기를 조작하자 천천히 캡슐 해치가 열렸다. 해치 안에는 목 아래 전신을 광택 없는 검은 천으로 감싼 인물이, 목과 손목, 발목에 채워진 금속 링에 의해 몸에 딱 붙는 시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에는 윗부분을 가리는 고글이 씌워져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연구원이 추가 조작을 하자 손목과 발목 잠금이 해제되었고, 그 인물은 스스로 고글을 벗었다.
고글 아래에서 나타난 것은 아까 그 로봇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성이었다. 여성은 목에 링을 찬 채 일어났다. 링에서는 케이블 뭉치가 뻗어 나와 시트 커넥터에 연결되어 있었다. 여성이 광둥어로 말한 것을 첸이 통역했다.
“오퍼레이터인 메이파(苺花)입니다. 실험 도중이라 이런 차림으로 실례하겠습니다. 이 케이블을 분리하는 데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해서요. ……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 온 시노사카 유카입니다. 처음 봬요. 어떤 원리인가요?”
유카가 물었다.
“중국에선 옛날부터 인체의 다양한 혈자리를 연구해왔습니다. 이른바 침술이라는 건데, 이걸 응용해 인체 신경에서 신호를 추출해 로봇을 컨트롤하는 겁니다. 이 케이블을 분리하려면 데이터 슈트를 벗고 목의 링을 빼는 절차가 필요한데, 그렇게 하면 다시 슈트를 입고 신경 혈자리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든요.”
“다른 문제점은 없나요?”
“데이터 양이 방대해서 광대역 무선으로도 수백 미터 범위 내에서만 컨트롤이 가능합니다. 요인 경호용 로봇으로 개발 중인데 이 점이 최대 과제죠. 그리고 시각이나 청각은 직접 신경에 연결할 수 없어서 이런 게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메이파는 고글과 헤드셋을 가리켰다.
“대단하다, 대학 연구실에서도 본 적 없는 건데!”
아카가와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럼 실험을 재개할 테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메이파는 시트로 돌아가 고글과 헤드셋을 착용했다. 연구원이 단말기를 조작하자 목과 손목, 발목 링이 고정되었고 시트에 흡착되듯 자세가 바로잡혔다. 메이파가 마지막으로 무언가 말한 것 같았지만 광둥어를 모르는 유카에겐 ‘짜이찌엔’과 ‘셰셰’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메이파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연구원이 명령어를 입력하자 반쯤 벌린 입도 닫히며 메이파는 완전히 표정을 잃었다. 캡슐이 닫히고 모든 램프가 녹색이 되자, 앉아 있던 로봇이 움직이기 시작해 아까 메이파와 똑같은 몸짓으로 유카에게 손을 흔들었다. 일행이 방을 나가자 그녀는 다시 권법 연기를 시작했고 연구원들은 데이터 수집을 재개했다. 유카와 쿠로사키는 연구원들과 명함을 교환하고 방을 나왔다.
“다음은 사이보그 기술입니다. 홍콩 경찰 형사인데 수사 중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 저희 회사와 경찰의 공동 프로젝트에 지원했죠. 내장 대부분은 무사했지만, 그래도 생명 유지를 위한 백팩이…….”
그렇게 말하며 다음 방으로 안내하려던 찰나, 첸의 품 안에서 알람이 울렸다. 첸은 휴대 단말기를 꺼내 어딘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첸의 얼굴이 눈에 띄게 험악해졌다. 통화를 마친 첸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시장 현장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호텔까지 모셔다드릴 테니 견학은 다음 기회에 부탁드립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유카 일행은 다시 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숙소인 호텔로 향했다.
“문제라니 무슨 일인가요?”
유카가 물었다.
“경비 업체에서 행사장 침입 센서가 오작동했다는 연락이…… 아, 걱정 마십시오. 도난당한 건 없고 유카 씨 로봇도 무사합니다. 큰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만약을 위해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요.”
“그럼 다행이네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쿠로사키 씨 휴대폰으로 하면 되겠죠?”
“네, 그러십시오.”
쿠로사키가 대답했다. 이윽고 일행은 시내 호텔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그럼 내일 아침 8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첸은 그렇게 말하고 차를 몰아 떠났다.
“우와, 진짜 호화로운 호텔이다! 나 이런 데 묵는 거 처음이야!”
“좀 진정해라. 관광 온 거 아니라고. 나라 망신시키지 말고.”
들뜬 아카가와를 쿠로사키가 제지했다.
“정말 훌륭한 호텔이네요. 근데 사람이 많아서 시간 좀 걸리겠어요.”
저녁의 가장 붐비는 시간대인지 호텔 로비는 관광객들로 가득해 체크인에 시간이 꽤 걸릴 듯 보였다. 하지만 쿠로사키는 인파엔 눈길도 주지 않고 빨간 카펫이 깔린 카운터로 향했다.
“체크인 부탁합니다.”
쿠로사키가 영어로 말했다.
“예약자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쿠로사키 쇼타로입니다.”
“시노사카 님과 쿠로사키 님 성함으로 이그제큐티브 스위트 두 객실이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내 이름은 없는데…….”
쿠로사키의 대화를 듣고 아카가와가 중얼거렸다.
“네가 여기 묵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넌 다른 숙소다.”
“그런 게 어딨어요, 쿠로사키 선배!”
“……농담이다. 이런 호텔은 객실 단위로 예약하니까 몇 명이 묵든 요금은 안 변해.”
“그럼 유카 짱이랑 같은 방인 거야?”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냐. 나랑 네가 같은 방이고, 소장님은 옆방이다. 정 싫으면 진짜 다른 호텔로 갈래?”
“알았어요…….”
아카가와가 뾰로통해져서 대답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유카 일행의 방은 특별 층에 있었는데, 층 버튼 대신 열쇠 구멍에 룸 키를 꽂아야 엘리베이터가 그 층에 멈추는 구조였다. 유카는 자기 방에 짐을 풀고 쿠로사키와 아카가와의 방을 찾아갔다.
노크를 하자마자 아카가와가 문을 열며 말했다.
“저기 유카 짱, 지금 노점에 밥 먹으러 안 갈래? 홍콩 왔으면 역시 노점이지! 내가 끝내주는 데로 안내할게. 야경 구경도 하고!”
“난 사양할게. 배도 안 고프고, 내일 자료 준비도 해야 해서.”
“그래? 아쉽네. 그럼 나 혼자라도 갔다 올게!”
그렇게 말하고 아카가와는 배낭을 메고 방을 나섰다.
“소장님, 일단 한잔하면서 이야기 좀 할까요? 술 괜찮으시죠?”
“아, 네.”
쿠로사키는 방 미니바에서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랐다. 유카는 안경을 벗어 케이스에 넣고 쿠로사키가 건넨 잔을 입에 댔다.
“쿠로사키 씨, 아까 롱 회장님 이야기 말인데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아직은 의심할 이유도, 믿을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전무님이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골치 아파지겠군요.”
“그럼 지금 전무님한테 전화해서…….”
“‘비리 저지르고 계십니까’라고 물어보기라도 할 겁니까? 소장님, 생각 좀 하고 사세요.”
“그치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요.”
“그럼 이 건은 저한테 맡겨주시겠습니까?”
“알았어요.”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겐 절대 비밀입니다. 특히 아카가와 같은 촐랑이한텐 모든 게 결정되기 전까진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내일 스케줄이나 확인하죠.”
쿠로사키는 그렇게 말하며 잔을 비우고 두 번째 잔을 따랐다.
“더 마실 수 있습니까?”
“괜찮아요.”
유카도 맞춰서 잔을 비웠다.
“그럼 받으시죠.”
유카의 잔에도 두 번째 술이 채워졌다.
“내일 일정 말입니다만, 기본적으로 아침 10시 오픈부터 부스 전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엔 중홀에서 데모 시연이 있죠. 우린 네 번째 순서로 2시부터 20분간입니다. 저녁부터는 친목회가 예정되어 있고요.”
“걱정 마요, 다 머릿속에 들어있으니까.”
“특히 중요한 게 오후 데모입니다. 이 내용은 성공하면 틀림없이 최고의 평가를 받겠지만, 꽤 리스크가 커 보입니다. 정말 문제없겠습니까?”
“네, 일단 선배…… LISA한테 잘 말해뒀으니까요.”
“말해뒀다니요?”
“아, 그게, 음, 지시를 프로그램해뒀다는 뜻이에요.”
“그렇습니까. 그럼 소장님을 믿죠. 하지만 소장님은 LISA에 대해 너무 비밀이 많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저도 다룰 수 있게 해주세요. 아카가와한테까지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전무님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전무가 해준 게 뭡니까? 하물며 비리로 잡혀갈지도 모르는 판국에! 자칫하면 엮일 수도 있는데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미안해요. 내일 저녁까지 생각할 시간 좀 줘요.”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기다리죠. 당신이 LISA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저도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유카와 쿠로사키는 그 후로도 위스키를 마시며 회의를 이어갔다. 쿠로사키는 서서히 취기가 오르는 듯했지만, 유카는 태연하게 계속 마셔댔다.
“그나저나 소장님 술 진짜 세시네요. 벌써 다섯 잔째인데 안색 하나 안 변하시고. 전 좀 피곤해서 쉬어야겠습니다.”
“그럼 내일 봐요.”
유카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흐흐, 이 회사 때려치울 좋은 기회야. 나한테 은혜 베푸는 척하며 거들먹거리는 전무보다는 롱 영감탱이 밑으로 들어가는 게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잘만 하면 놈들 뒤통수 제대로 칠 수 있겠어.”
혼자 남은 쿠로사키는 취해서 혼잣말을 지껄였다.
“소장 저 계집애는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장땡인 것 같으니,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전용 연구실이나 하나 던져주면 되겠지. 음, 그게 좋겠어. 우선은 영감이 환장하는 LISA의 비밀을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
“빌어먹을, 아카가와는 아직도 안 온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건지…….”
“시간이 꽤 지났네. 서둘러야겠어.”
방으로 돌아온 유카는 서둘러 가방에서 알약 케이스를 꺼냈다.
“이렇게 돼버렸는데 괜찮을까.”
왼손을 내려다보자, 손목부터 끝까지가 도자기 같은 무기질의 유백색으로 덮여 있었다. 오른손으로 만져보니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손톱은 매니큐어를 칠한 듯 둔탁한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마치 마네킹 인형의 손 같았다. 유카는 케이스에서 꺼낸 알약을 삼켰다.
“아아…… 약 기운이…… 올라온다…….”
유카는 몸이 달아오르는 듯한 감각에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손목 뿌리부터 서서히 살색과 부드러움을 되찾아갔고, 새끼손가락 손톱에 은색을 남긴 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다행이다, 겨우 맞춘 것 같네. 복용 간격을 놓치면 효과가 너무 세서 힘들어.”
유카는 기진맥진해 침대에 쓰러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손 감각이 이상해. 또 세포를 재생하지 못하는 부분이 늘어난 것 같아. 연구소 돌아가면 빨리 정밀 검사부터 해야지.”
“세포를 재생한다고?”
유카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카가와 군! 어떻게 여기 있어?”
유카는 아카가와의 모습에 당황하며 알약 케이스를 떨어뜨렸다.
“방금 돌아왔는데 문이 반쯤 열려 있고 뭔가 힘들어 보이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 체질 때문이야. 주기적으로 약을 안 먹으면 안 되거든.”
“무슨 체질인데? 무슨 약이고?”
아카가와가 끈질기게 물었다.
“상관없잖아! 내일 일찍 나가야 하니까 빨리 방에 가서 자!”
“알았어. 그럼 내일 봐.”
유카에게 쫓겨나 아카가와는 방을 나갔다.
“본 적 없는 알약인데.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봐야지.”
그렇게 말하는 아카가와의 손에는 유카가 떨어뜨린 알약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다음 날 10시, 주최자를 대표한 롱 회장의 연설과 함께 국제 로봇 쇼가 개막했다. 초대객들의 최대 관심사는 백룡 그룹의 인간형 로봇이었다. 유카 일행의 옆 부스에서는 어제 연구소에서 봤던 치파오 로봇이 오후 데모를 대비해 점검 중이었는데, 아직 움직이지도 않는 그 로봇 주변에는 벌써 인파가 몰려 있었다. 사람들은 팸플릿을 나눠주는 LISA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 백룡 그룹 부스로 흘러 들어갔다.
“소장님,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부스들도 파리만 날리네요.”
쿠로사키가 말했다.
“역시 비주얼 임팩트가 중요하긴 하네. 나라도 어제 안 봤으면 구경 가고 싶었을 거야.”
“우리 회사 이름으로 출전하는 건 이제 의미 없으니, 이참에 타사 부스나 좀 둘러볼까요?”
“어, 의미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카가와가 물었다.
“넌 알 필요 없다. 어시스턴트 일이나 똑바로 해. 넌 LISA랑 부스 지키고 있어. 나랑 소장님은 타사 시찰 좀 하고 올 테니까.”
“쳇, 나한테만 비밀이야…….”
아카가와는 투덜대며 자리를 지켰다.
“저기 쿠로사키 씨, 그렇게 쏘아붙일 것까지는 없잖아요.”
빠른 걸음으로 걷는 쿠로사키를 뒤쫓으며 유카가 말했다.
“소장님은 너무 무릅니다. 지금부터 비즈니스 세계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가르쳐놓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인간 안 됩니다.”
유카와 쿠로사키는 천천히 타사 부스들을 둘러보았다. 출품된 로봇들은 인간형이 중심이었지만, 대부분 정해진 패턴의 동작만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잠시 쉬죠. 소장님은 커피랑 홍차 중에 뭘로 하시겠습니까?”
행사장 구석의 카페 코너에서 쿠로사키가 물었다.
“그럼 커피로요.”
쿠로사키는 셀프 서비스 카운터에서 받아온 커피를 유카에게 건네고 자신은 홍차를 들었다.
“역시 자립형으로 LISA만 한 물건은 없군요. 이 기술이 전무랑 같이 묻혀버리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그, 그렇네. 근데 롱 회장님 말을 믿어도 될까?”
“큰 틀에선 믿을 만하겠죠. 하지만 그 노인이 왜 그렇게 LISA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고도의 처리 능력을 갖춘 전자 두뇌에 행동 패턴을 흉내 내게 한다 해도, 그때쯤이면 본인은 이미 죽었을 텐데 말이죠.”
“죽었다니…… 혹시 불로불사가 되고 싶은 거 아닐까?”
유카가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불로불사요? 꿈 같은 소리군요. 확실히 기억이나 의식을 전부 로봇으로 옮길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설령 본인이랑 똑 닮은 게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게 본인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그게…… 본인이야.”
“무슨 소립니까?”
“쿠로사키 씨, 전부 말할게. 하지만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선 좀 그래.”
“알겠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않는 건 현명한 판단입니다. 우린 이제 한배를 탄 사이니 제대로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주십시오.”
쿠로사키는 유카를 전시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유카가 입을 열었다.
“쿠로사키 씨, LISA의 비밀을 알고 싶다고 했지? 사실 LISA는 리사 선배 본인이야. 그래서 보통 로봇이랑 다르게 유연하게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거야.”
“설마 사이보그입니까? 확실히 그러면 앞뒤가 맞긴 합니다만, 대체 어떻게? 뇌세포를 유지하려면 상시 신선한 혈액 공급이 필요할 텐데요. 심장만이라면 몰라도 간이나 신장 기능까지 기계화해서 그 바디에 집어넣는 건 불가능할 텐데.”
쿠로사키가 의문을 제기했다.
“선배랑 내가 나노머신을 써서 장애인을 위해 소실된 세포나 신경을 재생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건 알지?”
“전무님한테 들었습니다. 의수나 의족을 남은 신경에 연결해 컨트롤하기 위한 연구라고요.”
“지금 연구 테마는 그렇지만, 그때는 좀 달랐어. 더 기초 연구에 가까운 내용으로 생물 세포 기능을 시뮬레이션하는 나노머신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석 달 전에…….”
“석 달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쿠로사키가 물었다.
“사고가 나서 폭주한 나노머신 때문에 선배는 로봇이 되어버렸어.”
“나노머신 폭주 사고 이야기는 몇 건 알고 있습니다만, 무질서하게 모든 걸 파괴하고 에너지 고갈로 정지했다는 사례밖에 못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대량의 나노머신을 만들 플랜트 같은 건 연구소에 없지 않습니까?”
“그 나노머신은 자기 증식을 해. 그리고 여러 나노머신이 연계해 네트워크를 만듦으로써 가상 컴퓨터처럼 동작하니까 여러 복잡한 프로그램 제어가 가능해져. 이건 선배가 로봇이 될 때 남겨준 데이터로 알게 된 건데, 선배의 뇌도 일종의 컴퓨터가 되어버렸어.”
“과연. 그럼 리사 씨의 의식은 남아있는 겁니까?”
“그게…….”
유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배의 기억은 남아있는데, 의식이 도무지 돌아오질 않아. 로봇이 됐을 때의 의식이 데이터화되어 남아있는 건 확인했는데, 그걸 어떻게 활성화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마 의식은 데이터화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화하면 될 것 같은데.”
유카가 말을 이었다.
“이걸 아는 건 나랑 전무님뿐이야. 난 선배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어. 신체 자체는 DNA만 남아있으면 나노머신을 써서 재생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의식을 되찾기 위해선 데이터가 너무 부족해. 그렇다고 인체 실험을 할 수도 없고…….”
“그렇군요.”
쿠로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의 초대는 전무의 주선이었죠……. 전무가 이야기했다면 롱 회장이 알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겠네요.”
“그래서 아까 불로불사 이야기인데, 롱 회장님은 병으로 곧 죽는다고 했잖아. 자기가 실험체가 되어 나한테 데이터를 제공하는 대신, 잘만 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거니까 나쁜 도박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대강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그치만 전무님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그 전무가 당신 연구를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제발 본인 입장 좀 자각하세요!”
“그래도…….”
“어제도 말했지만 이 건은 저한테 맡기세요. 알겠습니까?”
쿠로사키는 유카를 타이르듯 말했다.
“유카 짱 늦네, 벌써 2시 다 돼가는데. 데모는 어떡할 거야?”
아카가와는 투덜대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10분인가. 야, 어떡할래…… 라고 로봇한테 말해봐야 소용없나.”
아카가와가 말을 걸자 팸플릿을 돌리던 LISA의 움직임이 멈췄다.
“글쎄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어, 방금 뭐라고 했어?”
아카가와의 물음에 LISA가 대답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그게, 나랑 너만이라도 데모를 하는 건 어때?”
“……잠시 검토하게 해주십시오.”
“알았어. 그럼 난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아카가와는 그렇게 말하고 LISA 곁을 떠났다.
LISA는 느릿한 동작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아카가와를 기다렸다.
“어때, 검토라는 건 끝났냐?”
“네, 지금부터 데몬스트레이션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LISA는 그렇게 말하고 데모 행사장인 중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야, 왜 그래! 마음대로 움직이지 마!”
“검토 결과, 유카 님이 돌아오지 않으시므로 제가 직접 행사장으로 향하는 것이 최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아카가와 님은 서포트를 해주십시오.”
“야, 기다리라니까!”
아카가와가 당황해서 뒤쫓아갔다.
“저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은 유카 님뿐입니다. 서포트하지 않으실 거라면 당신은 필요 없습니다.”
LISA는 그렇게 말하고 아카가와를 무시한 채 홀 대기실로 향했다.
“쿠로사키 씨! 벌써 데모 시간 5분이나 지났어요! 빨리 돌아가야 해요!”
유카는 허겁지겁 행사장으로 달려갔고 쿠로사키도 뒤를 따랐다.
“큰일이야, LISA가 없어!”
“아카가와도 없습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두 사람은 LISA와 아카가와를 찾아 행사장을 뛰어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쿠로사키는 휴대폰으로 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아카가와랑 로봇 LISA가 행방불명됐습니다!”
『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데모는 대성황인데요!』
“데모가 성황이라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LISA가 데모를 하고 있다고요! 정말 멋진 연출이더군요. 저희 원격 조종 타입이 무색해질 정도입니다. 롱 대인께서 왜 저희 연구소가 아니라 당신네를 쓰고 싶어 하시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데모 행사장이지요? 바로 가겠습니다!”
쿠로사키가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LISA는 홀에 있는 모양입니다. 일단 서두르죠. 아카가와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 그렇네!”
두 사람은 홀로 향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제가 시노사카 연구소의 시제기 37호 ‘LISA’입니다.”
합성 음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유창한 목소리로 LISA가 인사했다.
“저기…… 발표자분은?”
홀 무대에 혼자 올라온 LISA를 향해 사회자가 당황한 듯 물었다.
“네. 소장님은 늦어지고 계시므로 비서 로봇인 제가 대리로 발표하겠습니다. 저에 대해선 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LISA의 대답이 영어와 광둥어로 통역되자 행사장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원격 조작은 아니겠죠?”
“제 최대 특징은 이 인공 두뇌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기업 비밀입니다만, 원격 조작은 아닙니다. 의심스러우시다면 조종 장치를 찾아보셔도 좋습니다.”
화려한 퍼포먼스는 없었지만, 다양한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 나가는 LISA는 데모 참관객들을 경악시켰다. 그리고 기술에 정통한 사람일수록 그 경악은 더 컸다.
“유카 짱, LISA 진짜 대단해! 빨리 무대로 올라가!”
아카가와에게 떠밀려 유카가 무대 옆에서 나타나자 LISA가 말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 제작자가 도착했습니다.”
LISA는 그렇게 말하고 유카에게 말을 걸었다.
“유카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카 님이 오실 때까지 ‘비서 로봇’으로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내가 안 오니까 직접 한 거야?”
“네, 공개해도 문제없다고 판단한 부분만 발표했습니다. 사전에 긴급 사태를 상정해 프로그램된 대로입니다.”
“긴급 사태? 그런 프로그램은…….”
“상세 내용은 동작 로그를 확인해 주십시오. 긴급 대응 프로그램은 부하가 크므로 통상 프로그램으로 복귀합니다. ……유카 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LISA는 대기 상태로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유카가 말했다.
“아니요, 정말 훌륭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행사장 여러분도 만족하신 것 같군요.”
사회자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다음 발표자가 기다리고 계셔서 이쯤에서 마무리해주시겠습니까?”
“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시노사카 유카 씨와 비서 로봇 LISA였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행사장은 큰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럼 LISA, 가자.”
“네, 유카 님.”
유카가 무대 옆으로 사라지자 LISA도 그 뒤를 따랐다.
데몬스트레이션이 끝나고 부스로 돌아오자, 그곳에는 LISA를 보려는 인파가 몰려 있었고 유카와 쿠로사키는 그 응대에 쫓기게 되었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방문해 명함을 남기고 갔고, 준비했던 자료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첸의 통역만으로는 부족해 쿠로사키와 유카도 영어로 대응했다. 폐회 시간이 지나 손님들이 떠난 행사장 부스에서 유카는 LISA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오늘 고마웠어.”
“저는 유카 님을 위해 긴급 대응 프로그램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자세한 건 동작 기록을 확인해 주십시오.”
“그럼 내일이라도 조사해볼게.”
유카는 그렇게 말하고 리모컨 스위치를 눌렀다.
“시제기 37호. 식별명 LISA. 정지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LISA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전시대 위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유카와 쿠로사키, 아카가와는 첸의 안내로 파티장인 호텔로 향했다.
파티는 수백 명의 초대객을 모아 호텔 최대 연회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우와, 진짜 화려하다! 이거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 거죠?”
테이블에 늘어선 뷔페 형식의 중화요리를 둘러보며 아카가와가 물었다.
“여기 모인 분들은 각 회사의 VIP들이니 너무 꼴사나운 짓은 하지 마라.”
쿠로사키가 타일렀지만, 아카가와는 요리에 눈이 팔려 거의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음식을 가지러 간 아카가와와 헤어져 유카와 쿠로사키가 식전주를 마시고 있자, 브랜드 로고가 박힌 화려한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당신이 시노사카 씨군요? 이야, 정말 훌륭한 데모였습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유카는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롱 젠런(龍健仁)이라고 합니다. 케니 롱이라고 불러주시죠.”
“롱 씨라면 백룡 그룹 관계자분이신가요?”
“지금은 그룹이랑 거리를 좀 두고 있어서요. 뭐, 마음 가는 대로 사는 풍운아라고나 할까요.”
유카의 질문에 케니라고 자칭한 남자가 대답했다.
“젠런 님, 이런 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당신은 초대받지 않았을 텐데요.”
첸이 당황해서 말을 걸었다.
“케니라고 부르라니까요. 여전히 멋대가리 없긴. 난 시노사카 씨의 훌륭한 기술에 꼭 투자하고 싶어서 말을 건 것뿐인데.”
“투자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지요?”
쿠로사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 회사는 우수한 기술자들에게 저금리로 융자해주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어서요. 실례, 여기 제 명함입니다.”
“그렇습니까. 비즈니스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희는 백룡 그룹의 초대로 온 거라서요.”
“아아, 영감님 일이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이쪽에서 잘 말해둘 테니까.”
“아버님이신가요?”
유카가 물었다.
“네, 제가 회장님의 장남입니다. 회사는 동생인 젠민에게 맡겨뒀었는데, 안타깝게도 비행기 사고로 부부 동반으로 죽어버려서요. 저도 슬슬 돌아가서 영감님 일을 이어받아야 하나 싶어 마음이 무겁네요.”
“젠런 님!”
첸이 노려보았다.
“이런, 방해꾼이 나타났군요. 그럼 나중에 방해 없는 곳에서 다시 뵙죠.”
그렇게 말하고 케니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제 이야기로는 롱 회장님에겐 손녀 아이린 씨 말고는 일가친척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쿠로사키의 질문에 첸이 대답했다.
“경제에 어두운 기술자들에게 달콤한 말로 돈을 빌려주고, 조금이라도 상환이 늦어지면 빚 대신 특허나 발명을 헐값에 가로채서 돈을 버는, 비즈니스맨의 수치 같은 인물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룹 평판이 깎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죠. 그게 너무 심해서 결국 롱 대인께 파문당했습니다. 사장 자리에도 롱 대인이 신뢰하는 외부 인사를 앉혔으니 사내에 그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럼 손녀 아이린 씨는요?”
“그에겐 조카딸이 되죠. 재산 대부분이 아이린 님에게 돌아가는 게 배 아파서 저렇게 숟가락을 얹으려 드는 겁니다. 어쨌든 저 사람은 조심하십시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충고 감사합니다.”
쿠로사키가 첸에게 답했다.
“유카 짱, 음식 가져왔어!”
접시 가득 음식을 담은 아카가와가 돌아왔다.
“야, 좀 품위 있게 굴 수 없냐? 학생들 술자리랑은 다르다고.”
쿠로사키가 꾸짖었다.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그쵸, 유카 짱?”
“음…….”
유카는 당황했다.
“소장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어쨌든 진짜 맛있으니까 좀 먹어봐요!”
유카는 접시의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 맛은 간장이랑 참기름을 베이스로 가리비를 숨은 맛으로 썼네. 그리고 후추랑 팔각이랑…… 적어도 다섯 종류 이상의 향신료를 쓴 것 같아.”
“무슨 미식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맛있으면 맛있다고 하면 되잖아.”
아카가와가 말했다.
“미안해. 지금까지 먹어본 적 없는 맛이라 나도 모르게 분석해버려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그게.”
아카가와의 중얼거림은 첸에 의해 중단되었다.
“아무래도 시노사카 님께 볼일이 있는 분이 오신 것 같군요. 저분은…… 어제의 메이파 씨네요.”
실크 치파오를 입고 칵테일 잔을 든 채 다가온 사람은 첸의 말대로 메이파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데모 잘 봤어요. 롱 대인이 초대하실 만하더군요. 제 원격 로봇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어요.”
메이파가 말을 걸어왔다.
“일본어…… 할 줄 아세요?”
“네, 어제는 다른 연구원들이 있어서 일본어를 쓸 수 없었거든요.”
“메이파 씨 데모도 대단했어요! LISA는 그런 쿵후 같은 움직임은 못 하거든요.”
유카가 메이파에게 말했다.
“하지만 조작이 너무 힘들어요. 내내 숨 막히는 슈트 입고 캡슐 안에 처박혀 있어야 하니까. 내일부터는 데모가 없어서 오랜만에 벗을 수 있었지만, 이것만은 뺄 수가 없네요.”
그렇게 말하며 치파오 깃을 벌리자, 목에는 어제와 똑같은 금속 링이 채워져 있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유카와 메이파의 대화에 아카가와가 끼어들었다.
“메이파 씨인가요? 전 아카가와 고조라고 합니다. 고라고 불러주세요!”
“고 군이구나. 너도 연구원이야?”
“네, 대학에서 로봇 공학 연구하고 있어요!”
아카가와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내 로봇은 어때 보여?”
“어, 메이파 씨가 개발한 거예요? 난 당연히 오퍼레이터인 줄로만 알았는데.”
“무례하다!”
쿠로사키가 핀잔을 줬다.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홍콩에선 아직 여성 기술자의 지위가 낮거든요. 내 로봇도 어차피 남자 동료들 공으로 돌아갈 테고. 당신처럼 인정받는 사람이 부럽네요.”
메이파가 말을 이었다.
“어제 일본어를 못 했던 것도 그래요. 동료들은 아무도 못 하니까, 자기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내가 마음대로 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하지만 롱 회장님은 다를 것 같은데요. 여성인 아이린 씨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시고.”
“분명 무리일 거예요. 나처럼 짓밟히고 말 게 뻔하죠. 일본이나 미국이랑은 달라요.”
“설마 사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저도 전혀 몰랐습니다.”
첸이 말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됐어요. 어차피 당신한테 보고가 올라가기 전에 어디선가 묵살됐을 테니까.”
“당신 처우에 대해선 롱 대인과 상의해서…….”
“그럴 필요도 없어요. 오늘부로 그만둘 생각이라 그거 말하러 온 거니까. 내 기술을 알아봐 줄 사람이 있거든요. 이건 퇴직금 대신 가져갈게요.”
메이파는 그렇게 말하며 목의 링을 가리켰다.
“신경 접속 기술은 원래 내가 개발한 거고, 제거 수술 때문에 며칠씩 갇혀 있긴 싫으니까. 저 로봇은 나한테 맞춰져 있지만 약간만 손보면 누구든 조작할 수 있으니 회사로서도 손해는 아니겠죠?”
그리고 메이파는 광둥어로 바꿔 첸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첸은 몇 번이고 만류하려 했지만,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첸과의 대화가 끝나자 메이파는 유카에게 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괜찮다면 당신도 오지 않을래요? 생각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줘요. 그럼, 짜이찌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떠나갔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첸이 송구스러워했다.
“사실 저희 회사 같은 오래된 화교 기업에선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이 드뭅니다. 비슷한 이유로 떠난 이들이 여럿 있죠. 롱 대인께서 아이린 님을 걱정하시는 것도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메이파 씨 진짜 예쁘다…….”
아카가와가 중얼거렸다.
“아, 물론 유카 짱도 귀여워요!”
천하태평한 아카가와의 말에 유카와 쿠로사키, 그리고 첸 세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적이 감도는 전시장에 몇 명의 남자가 침입했다. 남자들은 유카네 회사 부스로 살금살금 다가가 전시대 위의 LISA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한 명의 남자를 남겨두고 그들은 텅 빈 행사장 안으로 흩어졌다. 남겨진 남자는 주변을 뒤져 리모컨을 찾아내더니 전원 스위치를 켰다.
“시제기 37호. 식별명 LISA. 기동했습니다.”
LISA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난 네 새로운 주인님이다.”
남자가 말했다.
“제 마스터는 유카 님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그 마스터님은 리모컨을 아무 데나 두고 다니더군. ‘적에게 넘기지 마라 소중한 리모컨’이라는 격언도 모르나 보지?”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이 ‘명령’ 버튼을 누르는 동안 하는 말에는 복종하게 되어 있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리모컨 버튼 하나를 누른 채 명령했다.
“지금부터 날 따라와라.”
“그런 명령은…… 삑, 알겠습니다.”
“나를 새로운 마스터로 등록해라.”
“마스터 등록에는 현재 마스터인 유카 님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융통성 없는 녀석이군.”
“저는 여성형 로봇이므로 녀석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시끄러워, 말하지 마!”
“현재 ‘따라와라’라는 지시를 수행 중. 복수의 명령은 동시에 수행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리모컨을 누르며 말했다.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삑,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LISA는 남자를 따라 어색한 동작으로 걷기 시작했다. 행사장 안에 흩어졌던 남자들도 다양한 제품들을 훔쳐냈고, 그들은 합류하여 하얀 연기가 자욱한 경비실 옆을 지나 통용구를 통해 트럭을 타고 사라졌다.
트럭은 시가지를 벗어나 창고가 밀집한 지역으로 들어갔고, 낡은 창고 한 동 앞에 멈춰 섰다. 트럭이 멈추자 수많은 남자가 적재함에 올라타 도난품들을 실어 날랐다. 몇 분 후 LISA를 제외한 모든 물건이 옮겨졌다.
“좋아, 일어나.”
리모컨을 든 남자가 명령했다.
“삑, 알겠습니다.”
LISA는 트럭 적재함에서 일어났다.
“적재함에서 내려서 이쪽으로 와.”
“삑, 알겠습니다.”
LISA는 어색한 동작으로 적재함에서 내려 남자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이다.”
도난품들 사이를 지나 창고 안쪽 문을 열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긴 계단을 내려간 지하에는 다양한 공작 기계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LISA는 작업대 위에 눕혀져 양팔과 양다리가 금속 족쇄로 구속되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네가 알 필요 없다.”
“유카 님 곁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안 돼. 가만히 있어!”
남자는 리모컨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삑, 알겠습니다.”
LISA는 움직임을 멈췄다.
“네 외부 인터페이스 사양을 말해라.”
“제 인터페이스는 그 리모컨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그 귀 안테나랑 헤어밴드 램프는 대체 뭔데?”
“안테나는 일본에선 휴대폰으로 쓸 수 있지만, 홍콩에선 방식이 달라 서비스 지역 이탈 상태입니다.”
LISA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램프는 유카 님의 취향입니다.”
“정비용 포트 정도는 있을 거 아냐!”
“저에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럼 대체 정비를 어떻게 한다는 거야?”
“정비는 전용 설비에서 분해를 통해 수행합니다.”
“탬퍼 방지 구조라는 건가. 만만치 않군.”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공작 기계 전원을 켰다. 웅 하는 낮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고, 매니퓰레이터가 LISA의 목덜미로 다가갔다.
“이게 뭔지 아나? 초음파 커터다. 어떤 합금이든 순식간에 절단할 수 있는 물건이지.”
남자는 커터를 LISA의 목덜미에 갖다 대고 금속과 인공 피부의 경계면을 신중하게 절단하기 시작했다.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삐이익, 긴급 대응 프로그램 기동…… 어, 왜 이런 데서 나한테 제어를 넘기는 거야! 저기, 멈춰! 그만두라고!”
LISA가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팔다리의 족쇄가 끼익끼익 소리를 냈다. 남자는 작업을 멈추고 리모컨 명령 버튼을 누르며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농담하지 마!”
“어떻게 된 거야? 리모컨이 안 듣나?”
남자는 리모컨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러댔다.
“안됐지만 난 긴급 대응 프로그램이라 리모컨이랑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거든!”
“이럴 수가. 이건 내 손을 떠난 것 같군. 보스에게 연락해야겠어.”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손이 리모컨 전원 버튼에 닿았다.
“삑, 인터럽트 신호를 수신했습니다…… 거짓말! 전원 버튼은 나보다 우선인 거야? 긴급 대응이 의미가 없잖아! 아아악, 셧다운 페이즈에 진입합니다…… 시제기 37호. 식별명 LISA. 정지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LISA는 움직임을 멈췄다. 남자는 통신기로 연락을 취한 뒤 LISA의 목 절단 작업을 계속했다.
호텔 방으로 돌아온 유카에게 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행사장에서 대규모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지금 바로 로비로 내려와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방심했습니다. 아무래도 어제의 경보는 사전 답사였던 모양입니다. 유카 씨의 LISA도 도난당했습니다!”
유카가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자, 두 남자가 기세 좋게 들이닥쳐 유카를 결박했다.
“꺄악! 뭐 하는 짓이야!”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유카의 얼굴에 남자 중 한 명이 스프레이 같은 것을 뿌렸다.
“이건…… 마취…… 약? …………”
유카는 계속 발버둥 쳤지만, 잠시 후 축 늘어졌다.
“유카 짱! 안 오길래 부르러 왔어!”
문을 열려던 아카가와 앞에 두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 중 뚱뚱한 한 명은 축 늘어진 유카를 짊어지고 있었다.
“유카 짱? 누…… 누구야, 당신들! 유…… 유카 짱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카가와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남자들은 눈짓을 주고받더니, 유카를 안고 있지 않은 마른 남자가 아카가와의 배에 펀치를 날렸다.
“윽!”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은 아카가와의 얼굴에 스프레이가 뿌려졌고, 아카가와는 정신을 잃었다. 남자들은 아카가와를 욕실로 옮겨 욕조에 눕혔다.
“시노사카 씨, 늦으시네요.”
로비에서 첸이 말했다.
“그러게요. 전화한 지 벌써 15분도 넘었습니다. 잠깐 가보죠.”
쿠로사키가 말했다. 쿠로사키와 첸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불찰로 이런 일이…….”
첸이 사과했다.
“아니요, 여기서 당신을 탓해봐야 소용없죠.”
쿠로사키가 대답했다.
“그 솜씨로 보아 분명 프로의 소행입니다. 최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이테크 제품을 훔쳐 팔아치우는 테크노 마피아라 불리는 놈들인 것 같은데.”
“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롱 대인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홍콩 경찰과 연락해 손을 써뒀습니다. 백룡 그룹을 건드리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겁니다.”
첸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유카의 방으로 향했다.
“소장님! 안에 계십니까? 계시면 대답 좀 하세요!”
“이상하군요.”
쿠로사키는 마스터키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닥에 다툰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이건…….”
“아무래도 납치된 모양이군요.”
첸은 그렇게 말하며 방 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러뒀건만!”
쿠로사키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쿠로사키 씨, 이쪽으로 오세요! 욕실에 아카가와 씨가…….”
첸이 외쳤다. 쿠로사키는 욕실로 들어가 첸과 함께 기절한 아카가와를 욕조에서 꺼내 침대로 옮겼다.
“야, 아카가와! 정신 차려!”
“으으…… 유카 짱이…… 내 유카 짱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몰라요, 모르겠다고요! 남자 둘이 와서 유카 짱을…….”
“얼굴은 봤습니까?”
“으, 응…….”
“지금 경찰에 연락했습니다. 형사가 올 테니 증언해 주십시오.”
“그거라면 여기 녹화되어 있으니까…….”
아카가와는 바지 주머니에서 소형 비디오 레코더를 꺼냈다.
“미디어는 막 출시된 마이크로 DVD. MD 재킷 사이즈로 녹화도 가능한 최신형이라고요. 카메라는 옷 단추로 위장되어 있고…….”
아카가와는 점차 말이 많아졌다.
“확실히 귀중한 자료긴 합니다만, 왜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겁니까?”
첸이 물었다.
“아니, 그게…… 저…… 유카 짱을…… 촬영하려고…….”
“정말이지,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그런 걸 도둑촬영이라고 하는 거다!”
쿠로사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런 걸 일본 속담으론 ‘전화위복’이라고 하던가요. 일단 영상을 확인해 봅시다.”
그렇게 말하며 첸은 아카가와의 레코더를 방 TV에 연결해 재생했다.
치과 의자 같은 곳 위에서 유카는 눈을 떴다. 유카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이 마비된 듯한 감각에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의 손이 뻗어 나와 유카에게 안경을 씌우자 시야가 또렷해졌다. 그곳은 다소 어수선했지만 유카의 연구실과 아주 흡사한 방이었다.
“정신이 들어?”
유카 앞에는 치파오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메이파…… 씨.”
“생각보다 빨리 다시 보게 됐네. 지금 몸을 못 움직여서 불안하겠지? 아닐까?”
“어…… 어떻게 된 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메이파가 키보드를 조작하자 양손의 감각이 돌아왔다.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거야. 목에 손을 대봐.”
유카가 조심스럽게 자기 목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차가운 금속 감각이 느껴졌다.
“그 링은 기본적으로 이거랑 똑같은 거지만.”
그렇게 말하며 메이파는 자기 목의 링을 가리켰다.
“내 건 신경 신호를 외부로 전달하는 거고, 네 건 뒤쪽 케이블을 통해 신경에 신호를 주입하는 거야.”
“이 케이블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유카는 오른손으로 링 뒤쪽에서 뻗어 나온 케이블을 잡아 뽑으려 했지만, 한발 앞서 메이파가 키보드를 조작했다. 유카의 오른손은 움직임을 멈췄고, 케이블을 쥔 주먹을 천천히 펴더니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나도 설마 너한테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보스의 명령이라서 말이야.”
“보스가 누군데?”
“네가 협력한다면 조만간 알려주겠지만, 지금은 안 돼.”
“농담 마! 협력을 원하면 이런 강압적인 방법 말고 제대로 부탁하면 되잖아!”
“분명 거절할 테니까.”
메이파는 그렇게 말하며 유카의 의자를 반 바퀴 돌렸다.
그곳에는 작업대 위에 놓여 다양한 케이블이 연결된 LISA의 머리 부분이 있었다.
“선배…… LISA! 도난당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래. 난 이걸 해석하라는 의뢰를 받았어. 이 전자 두뇌가 리모컨으로 명령을 듣게 할 수는 있는데, 어떤 해석도 거부해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 억지로 분해했다가 망가지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그러던 중에 네가 끌려온 거지.”
메이파가 키보드를 조작하자 LISA가 눈을 떴다.
“유카 님.”
“LISA…… 괜찮아?”
“네. 프로그램에 이상은 없습니다.”
“다행이다. 선배 프로그램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했어.”
“선배 프로그램이라고?”
메이파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 제 프로그램은 세키구치 리사의 의식을 바탕으로…….”
“안 돼, 말하지 마!”
“네, 유카 님.”
LISA가 입을 다물었다.
유카가 메이파에게 따져 물었다.
“LISA의 비밀을 알아내서 어쩔 셈이야?”
“몰라. 난 해석해서 보고만 하면 되니까.”
“왜 이런 범죄 같은 짓을 하는 거야?”
“너처럼 축복받은 기술자는 이해 못 해. 자, 이 전자 두뇌에 대한 정보를 내놔.”
“싫어!”
유카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머, 그래? 어쩔 수 없네. 고문은 취미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며 메이파는 키보드를 조작했다.
“아악!”
유카의 목덜미에 전격이 흘렀고, 의자 위에서 유카는 몸을 뒤로 젖혔다.
“전…… 전기는…… 안 돼…….”
유카가 헐떡이며 말했다.
“이 정도는 시작일 뿐이야. 내가 로봇을 조종할 때는 더 강한 전류가 흐른다고.”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전기는 안 된단 말이야! 몇 시간째 약을 안 먹은 상태에서 자극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울먹이는 얼굴로 유카가 말했다.
“어머, 그래? 심장병이라도 있나? 아니면…….”
그렇게 말하며 메이파는 전압을 더 높였다.
“싫어어어!”
유카는 순간 몸을 격하게 뒤틀더니, 왼손을 축 늘어뜨린 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기울어진 머리에서 안경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여긴 어디지?)
유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온통 잿빛 안개가 자욱했고, 형체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꿈인가?)
볼을 꼬집어보려 했지만, 볼도 그걸 꼬집을 손가락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려다 자신이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의식이 또렷해질수록 유카는 자신의 상태를 인식했다.
(이게 내 몸이야?)
유카는 사물을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지만,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목에 채워진 링에서 뻗어 나온 바늘에 중추신경이 억지로 접속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까 그 전기로 나노머신이 활성화된 거구나.)
나노머신은 활성화되어 증식하고 있었지만, 항나노머신 약 때문에 유카의 몸을 침식하지 못한 채 갈 곳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증식하여 혈액 속을 순환하는 나노머신들이 만들어내는 네트워크 덕분에 자신의 몸 상태를 알 수 있게 된 것임을 유카는 깨달았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순식간이겠어. 어떻게 안 될까?)
유카는 다양한 조건을 포함한 복잡한 방정식을 계산했다. 나노머신의 증식을 멈추는 방법은 계산해낼 수 없었다. 무수한 해답 중 대부분은 한계를 넘은 나노머신이 붕괴하여 유카도 사망한다는 것이었다.
(더…… 변수를…… 늘려야 해…….)
유카는 계산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붕괴를 막기 위해 나노머신들이 의지를 가지고 협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한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현실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계산 완료. 최적해 발견.)
유카는 계산이 끝나자 자동으로 최적해를 실행했다. 의식이 멀어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남자는…….”
녹화 영상을 보며 홍콩 경찰 형사가 말했다.
“면식이 있는 자입니까?”
형사의 말을 첸이 통역하는 것을 듣고 쿠로사키가 물었다.
“양(楊) 형제. 홍콩 뒷골목에선 유명한 범죄 청부업자들입니다. 특정 조직에 속하지 않고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형제들이라 조직 선상에서 쫓는 건 무리일 겁니다.”
쿠로사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경찰로서는 목격 증언을 토대로 착실히 수사해 나가겠습니다. 혹시 범인에게서 연락이 오면 반드시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형사는 방을 나갔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쿠로사키가 외쳤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첸이 대답했다.
“유카 짱이 있는 곳이라면 아마 알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왜 경찰한테 말 안 했어? 설명해봐!”
아카가와를 쿠로사키가 몰아세웠다.
“어떡할까나~ 쿠로사키 선배는 맨날 나한테 화만 내고. 유카 짱이랑 둘이서만 나한테 비밀인 이야기나 하고 말이야.”
“이 자식이 진짜……. 됐다, 지금은 소장님 안전이 우선이다. 화 안 낼 테니까 설명해봐.”
“사실 유카 짱 가방에 발신기를 심어뒀거든요. 아까 그 카메라랑 같이 전자상가에서 산 건데…….”
“뭐라고?!”
쿠로사키가 아카가와에게 소리쳤다.
“화 안 낸다면서요!”
“화내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그런다! 네가 하는 짓은 악질 스토커라고!”
아카가와는 쿠로사키를 무시하고 수신기를 꺼내 스위치를 켠 뒤 사방으로 돌려댔다.
“정밀도가 떨어지네. 역시 정크 숍 싸구려는 안 되는 건가. 아니면 높은 빌딩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잠시 고민하던 아카가와가 말했다.
“이 근처 지도 없어요? 그리고 몇 군데 높은 곳에서 수신 체크 좀 하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헬리콥터를 준비하죠.”
첸은 그렇게 말하고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오, 진짜요? 첸 씨 말이 통하네!”
“지금 바로 호텔 옥상으로 가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아카가와는 망가진 웨이스트 백에 서둘러 짐을 챙겨 넣었다. 그것은 고장 난 기계 뭉치처럼 보일 뿐이었다.
“쿠로사키 선배도 갈 거죠?”
“당연하지! 너 혼자 보내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두 사람은 첸의 뒤를 따라 호텔 비상계단을 올랐다.
유카가 눈을 뜨자 눈앞의 메이파가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든 모양이네. 이 정도로 기절해버리면 곤란하다고.”
멍한 표정의 유카에게 메이파가 말했다.
“자, 이제 이 로봇 전자 두뇌의 비밀을 말할 마음이 생겼니?”
“……줄게.”
유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잘 안 들려.”
메이파가 유카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렇게…… 원한다면…… 알려…… 줄게.”
유카는 그렇게 말하고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왼손만을 휘둘렀다. 그리고 치파오 깃 위로 메이파의 목을 움켜쥐고, 깃 아래 숨겨져 있던 링을 꽉 잡았다.
“꺄악!”
메이파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양손으로 유카의 손목을 떼어내려 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유카의 왼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윽…… 무슨 힘이 이래! 하지만 안됐네.”
메이파는 냉정함을 되찾고 키보드를 조작했다.
“이걸로 연수 아래 운동 신경은 완전히 차단됐어.”
하지만 유카의 왼손에서 힘이 빠지는 일은 없었고, 메이파의 목을 계속 조여갔다.
“어, 왜? 신경 차단은 완벽할 텐데!”
메이파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비밀을…… 알고 싶다고…… 했지? 이게…… 그…… 비밀이야.”
그때까지 무표정했던 유카가 씨익 웃었다.
“시제기…… 42호를…… 제작합니다. LISA…… 데이터 수집.”
“네, 유카 님. 데이터 수집을 수행합니다.”
머리만 남은 LISA가 대답했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시제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메이파는 몸부림치며 발버둥 쳤지만 유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한꺼번에…… 물어봐도…… 대답 못 해. 지금…… 뇌 대부분은…… 다른 처리를…… 하고 있으니까.”
유카는 한 마디씩 끊어가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인데…… 난……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지금…… 왼손을 움직이는 건…… 원래 신경과는…… 다른 회로거든.”
“설마 의수? 하지만 그럴 리가…….”
“설명하기…… 좀…… 어렵네.”
그렇게 말하고 유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프로그램 완료. 나노머신 방출 개시.』
유카는 갑자기 국어책 읽는 듯한 말투로 내뱉었다. 메이파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목을 잡고 있는 유카의 왼손에서 은색 가루가 스멀스멀 뿜어져 나와 곰팡이처럼 증식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유카는 다시 단조롭게 말했다.
『방출 종료. 체내 나노머신 농도, 안전치까지 저하. 경부의 이물질을 분해합니다.』
유카는 메이파의 목을 잡고 있던 왼손을 놓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메이파는 몇 걸음 뒷걸음질 치다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어 유카가 왼손으로 자기 목의 링을 움켜쥐자, 금속 링은 녹슨 것처럼 보슬보슬 무너져 내렸다. 유카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떨어진 안경을 주워 쓰고 왼손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은색으로 덮여 있던 왼손은 원래 살색으로 돌아와 있었고, 일어나려던 메이파의 목덜미, 치파오 깃 위에는 은색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다음 질문인데, 시제기라는 게 무슨 뜻이냐고 했지? 뇌도 해방됐으니 대답해줄게. 시제기라는 건 바로 당신이야. 이제 실행 페이즈에 들어갔으니 곧 알게 될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전혀 모르겠어…… 윽! 뭐야, 이 감각은? 옷이…… 몸을 조여와!”
은색 손자국에서 방사형으로 치파오 재질이 변화하고 있었다. 바느질 선을 따라 은색 실이 자수처럼 뻗어 나갔고, 고급 실크의 부드러운 광택은 점차 금속적인 광택으로 변해갔다. 메이파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치파오를 벗으려 옷 여밈에 손을 댔다. 하지만 겹쳐진 옷감 사이는 무수한 은색 실로 꿰매져 있어 열 수가 없었다. 깃 부분은 목의 금속 링과 밀착되어 있었고, 그 링 역시 원래 재질에서 미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겁에 질린 메이파의 물음에 유카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내 몸은 나노머신에 침식되어 있어. 방금 당신도 그렇게 됐고.”
“나노…… 머신?”
“그래. 이게 당신이 알고 싶어 하던 LISA의 비밀이야. LISA는 나노머신 때문에 로봇이 된 내 선배거든. 원래 인간 뇌니까 유연한 판단을 하는 건 당연하지.”
“그리고 나한텐 면역이 있지만, 당신에겐 없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면역…… 설마 나도 LISA 같은 로봇이…… 싫어! 제발 살려줘…….”
메이파는 치파오 위로 몸을 긁어대며 애원했다.
“설마, 그럴 리가. 농담하지 마.”
“당신에겐 선배처럼 될 자격이 없어. 선배를 이런 꼴로 만든 당신을 선배 같은 고성능 로봇으로 만들어줄 리 없잖아. 당신은 다음 작업을 위한, 그리고 선배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데이터를 뽑아낼 실험체가 되어줘야겠어.”
“싫어, 싫어! 살려줘…….”
메이파는 유카 쪽으로 비틀비틀 다가오다 유카가 몸을 피하자 벽의 공작 기계에 기대듯 쓰러졌다.
“아, 참! 깜빡했는데 금속에는 안 닿는 게 좋을 거야. 그만큼 기계화가 빨라지거든…… 후훗, 이미 늦었네.”
공작 기계는 치파오가 닿은 부분부터 찰흙처럼 부드러워졌다. 메이파는 천천히 등부터 파묻히더니 십자가에 매달린 듯한 위치에서 멈췄다.
양손으로 버티며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 했지만, 다시 딱딱해진 금속 덩어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까지 금속 광택의 천이었던 치파오는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완전히 금속으로 변질되어 갔다. 치파오가 완전히 변화를 마치자 메이파의 등은 공작 기계 잔해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금속 재료는 이제 충분한 것 같네.”
유카가 말했다. 대량의 금속을 흡수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메이파는 다리를 내던진 채 주저앉고 말았다.
“아악!”
메이파는 광둥어로 비명을 지르며 금속 갑옷이 된 치파오를 필사적으로 긁어댔다. 매끄러운 표면의 옷 여밈이었던 곳에서 걸리는 부분을 찾아내자 틈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필사적으로 벌렸다.
치파오 가슴 부분은 가차각 작은 소리를 내며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하지만 메이파는 그것을 벗을 수 없었다. 옷 여밈 반대편에는 경첩이 만들어져 있었고, 유방의 굴곡을 그대로 유지한 채 메이파의 가슴은 문처럼 열렸다. 열린 가슴 안에는 심장이 고동치고 호흡에 맞춰 폐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 심장과 폐에도 은색 섬유가 빽빽하게 얽혀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메이파는 경악에 떨며 가슴 덮개를 붙잡았다. 그리고 유방 뒷면을 만진 순간, 이질적인 쾌감에 몸을 경련했다.
“아아악! 하아, 아, 안 돼!”
일본어와 광둥어가 섞인 신음 소리를 내는 메이파를 보며 유카가 말했다.
“흥미로운 현상이네. 선배 때도 이랬을까?”
“아니요, 유카 님. 제 경우에는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비교를 위해 제대로 기록해둬.”
“네, 유카 님.”
머리뿐인 LISA가 단조롭게 대답했다.
메이파의 가슴 안에서는 착실히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갈비뼈는 분해되고 금속 프레임이 심장과 폐를 지탱했다. 동맥은 금속 파이프로 변해 은색 심장이 온몸으로 나노머신을 내보냈다.
붉은 살점과 하얀 지방이 섞여 있던 유방 뒷면도 균질한 금속 덩어리로 변해갔다. 가슴의 감각이 사라지자 쾌감에 젖어 있던 메이파에게 다시 공포가 찾아왔다.
메이파는 떨면서 자신의 가슴을 껴안듯 감싸 쥐었다. 가차각 소리와 함께 가슴 덮개가 닫혔다.
이질적인 감각은 이윽고 가슴에서 복부, 그리고 허리로 서서히 아래쪽으로 퍼져나갔다. 복부도 가슴처럼 열릴 것 같았지만, 무서워서 손을 댈 수 없었다.
허리 아래 드레스 자락이 아직 부드러움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메이파는 주저앉은 채 조심스럽게 다리를 벌렸다. 치파오 스커트 앞부분이 좌우로 열리며 샤라락 건조한 소리를 냈고, 허리 트임 부분에서 등 쪽으로 슬라이드하듯 수납되어 허리 아래가 드러났다.
입고 있던 팬티도 은색으로 변해 있었고, 허리춤의 고무줄 부분은 스커트를 슬라이드시키기 위한 딱딱한 레일 형태의 링이 되어 있었다. 메이파가 팬티 아랫부분의 아직 부드러운 곳을 잡아 아래로 끌어당기자, 그곳은 알루미늄 호일처럼 찢어지며 항문과 성기가 잠시 보였지만, 찢어진 틈새에서 은색 실이 뿜어져 나와 다시 팬티 모양으로 엮어냈다.
“아…….”
기묘한 비명을 지르며 메이파는 다시 팬티에 손을 댔지만, 재생된 팬티는 단단한 금속이 되어 이번엔 찢어낼 수 없었다.
팬티가 변화를 마치자 다리를 덮고 있던 스타킹이 은색 실로 짠 망사 타이즈처럼 변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망사 눈이 촘촘해졌고, 그 망사 눈은 메이파의 피부를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히익! 아아아악! 다리가아아!”
메이파는 격심한 통증에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이윽고 망사 눈이 다리 전체로 퍼지자 힘이 다해 바닥에 다리를 내렸다. 금망은 하이힐을 감쌌고, 빨간 하이힐은 순식간에 메탈릭 레드의 광택으로 변했다.
변화는 양팔로도 이어져 어깨부터 서서히 손가락 끝을 향해 금망에 덮였고, 메이파의 양팔은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한 형태로 굳어졌다. 목의 링 윗부분을 제외하고 변화는 종료되었다. 왼팔의 고급 손목시계는 황금 스트랩이 녹아내려 문자판이 피부에 박히면서도 째깍째깍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유카는 메이파에게 다가가 가슴과 복부 덮개를 열었다.
“싫어, 하지 마!”
체내에는 금속화된 내장들이 수납되어 있었지만, 기계적인 장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울부짖는 소리를 무시하고 유카는 체내를 체크해 나갔다. 유카의 손가락이 닿으면 그 주변만 금속화된 내장이 찰나의 순간 붉은 생기를 되찾았지만, 손을 떼면 다시 금속에 덮였다.
“이상하네. 왜 금속화는 진행되는데 기계화는 안 되는 걸까?”
“유카 님. 제 기억에 따르면 설계도를 입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금속뿐만 아니라 반도체, 유리, 절연체 등의 재료를 추가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선배.”
“나노머신은 분자나 결정을 재구성할 수는 있지만, 원소를 변환할 수는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설계도에 재료라…….”
그렇게 말하며 유카는 방 안의 설비들을 살폈다.
“이 인터페이스는 그대로 쓸 수 있겠네.”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까지 자기 목에 연결되어 있던 케이블을 메이파의 목에 연결했다.
“히익!”
메이파가 기묘한 소리를 냈다.
“이 데이터도 쓸 수 있겠어.”
유카는 컴퓨터 파일에서 원격 로봇 설계도를 찾아내 손쉽게 고쳐 나갔다.
“남은 건 나노머신에 어떻게 데이터를 보내느냐인데…….”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노머신과 통신하는 프로그램이 완성되었다. 나노머신에서 전송된 메이파의 현재 상태와 로봇 설계도가 화면에 나란히 표시되었다.
“그렇구나, 지금은 생살과 금속 부분이 겹쳐 있는 상태네. 단백질 분자를 플라스틱으로 바꾸는 건 가능할까?”
유카가 콘솔을 조작하자 복잡한 화학식이 화면에 나타났다.
“둘 다 유기물이니까 추가 재료 없이 재구성할 수 있겠어. 팔다리는 표면만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알맹이는 추가 재료인 구동 파츠로 교체하기로 하고……. 선배, 이 정도면 어때요?”
“네, 유카 님. 이 설계라면 문제없습니다. 제 팔다리보다 3배 높은 퍼포먼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선배보다 3배나 좋다니 용납 못 하겠네. 그럼 관절 자유도를 낮추기로 하죠. 그리고 손가락 끝을 움직일 필요는 없겠어.”
그렇게 말하며 유카는 설계도를 수정했고, 양손과 양다리 부분을 화면에서 선택해 실행 명령을 내렸다.
팔다리를 덮고 있던 망사 눈은 피부에 녹아들 듯 사라졌고, 대신 경질 플라스틱이 배어 나오듯 피부를 덮었다. 그 안쪽에서는 혈관이 봉쇄되고 근육과 뼈가 플라스틱 구성에 필요한 단백질과 칼슘으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불필요해진 수분이 격렬한 땀처럼 팔다리에서 뿜어져 나오자 그곳은 공동이 되었다. 공동에는 몸통 쪽에서 금속이 밀려 들어와 구동 장치를 형성했다. 구동 장치가 생성됨과 동시에 관절에는 잘록한 홈이 생겼고, 이윽고 가동을 위한 파츠 경계선이 되었다. 하지만 양 손목 끝부분에는 구동 장치가 조립되지 않았고 가동을 위한 절개선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곳에는 남은 플라스틱이 가득 채워졌다.
“싫어…… 몸이 안 움직여…… 아무것도 안 느껴져…… 제발 그만해…….”
메이파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울면서 유카에게 간청했다.
“팔다리 신경이 분해돼버렸나 보네. 근데 당신은 신경 차단 같은 건 익숙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싫어…… 싫다고…….”
“흐음, 이 정도로……. 역시 당신에겐 선배처럼 될 자격이 없어. 선배는 로봇으로 변해가는 도중에도 계속 냉정하게 내 걱정만 해줬거든. 그쵸, 선배?”
“회답 불능입니다.”
“그렇게 겸손해하지 마세요. 비록 지금은 로봇이라도 선배는 선배니까. 이 실험에서 얻은 데이터가 있으면 분명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요!”
유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콘솔로 향했다.
“다음은 몸통이네. 전원에 제어 장치에…… 이것저것 필요해 보이는데, 부족한 재료는 이 방 안에서 조달하면 되겠어.”
그렇게 말하며 유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저 제어 패널이 필요하겠네.”
유카는 방 안에서 B5 사이즈 노트북을 찾아내 메이파의 열린 가슴 안쪽에 얹고 콘솔을 조작했다. 유방 뒷면의 금속 덩어리가 꿈틀대며 촉수 같은 것이 뻗어 나오더니 노트북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아악! 하아, 아, 아……!”
메이파가 내뱉는 신음 소리에 맞춰 액정 패널과 키보드가 매립되어 갔다.
“전원 단자는 역시 이 위치가 좋겠어.”
유카가 콘솔을 조작하자 금속 팬티 바닥에 사각형 이음매가 생기더니 슬라이드하며 열렸다. 사각형 구멍 안으로 보이는 음부는 하얀 플라스틱 절연체로 변화했다. 음모가 분해되고 드러난 성기와 항문에 유카는 전원용 굵은 커넥터를 삽입했다.
“앙! 하아…… 싫어!”
메이파의 신음 소리에 맞춰 물려진 플러그가 끌려 들어가며 움찔움찔 움직였다.
“아아아아악!”
메이파가 절정의 비명을 지르는 순간 유카는 커넥터를 뽑아냈다. 성기와 항문 안쪽은 금도금되어 나사산이 파였고, 각각 플러스와 마이너스 전원 접속용 잭으로 변해 있었다. 유카는 손가락 끝으로 금도금 위를 살짝 훑었지만, 메이파는 이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복부 안의 위나 장 같은 내장들도 분해되어 배터리 수납을 위한 커다란 공간이 만들어졌다. 유카는 방 안에서 메이파가 개발한 원격 로봇용 배터리를 찾아내 세팅하고 복부 덮개를 닫았다. 내장 중 남은 것은 뇌에 산소를 공급하는 심장과 폐뿐이었다.
“다음은 어디입니까?”
첸이 물었다. 헬리콥터 안에서 아카가와는 수신기를 보며 지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3킬로!”
아카가와의 지시를 첸이 통역하자 조종사가 헬기를 몰았다.
“지나쳤다! 남쪽으로 500미터, 동쪽으로 2킬로!”
점차 신호가 강해졌고 아카가와의 지시도 세밀해졌다.
“저기 창고 세 개 중에 하나야!”
“알겠습니다. 착륙해서 찾죠.”
첸이 조종사에게 지시를 내리려 하자 쿠로사키가 제지했다.
“잠깐만요, 서두르지 마십시오. 주변 안전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입니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니 창고 중 하나에서 남자들이 화물선에 짐을 싣고 있었다. 쿠로사키의 기지로 헬리콥터는 목표 창고에서 떨어진 창고가 구석에 착륙했다. 세 사람은 남자들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창고로 접근했다.
“저 창고야, 확실해!”
아카가와가 한 블록 떨어진 창고를 가리켰다. 창고에는 남자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어 침입할 틈이 없어 보였다.
“경찰을 부릅시다.”
첸이 말했다.
“그게 좋겠군요.”
쿠로사키도 동의했다.
“에이~ 기껏 찾았는데 우리끼리 유카 짱을 구하자고요!”
반대하는 아카가와를 누르고 첸은 경찰에 신고했다.
“선배 데이터에 따르면 고막은 그대로 마이크로 쓰고 성대는 재질만 좀 바꾸면 스피커로 쓸 수 있겠네. 그리고 망막을 직접 CCD로 바꾸는 건 효율이 떨어지니까 눈에는 이 파츠를 쓰기로 하면 되겠어.”
유카는 소형 비디오 카메라를 찾아내 분해한 뒤 렌즈와 CCD 소자를 꺼냈다. 그리고 콘솔에서 머리 부분을 선택해 명령을 실행했다.
“아악! 얼굴이…… 뜨거워…… 싫어!”
지금까지 변화가 없던 목의 링 윗부분으로 서서히 유백색 플라스틱이 퍼져나갔다. 찰랑이던 검은 머리카락은 찰흙으로 굳힌 듯 하나의 덩어리가 되더니, 뒷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헤어스타일 그대로 헬멧처럼 정수리를 덮었다.
“사…… 살려…….”
메이파의 표정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굳어버렸다.
“우으으…… 우으으…….”
메이파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소리조차 되지 못한 신음뿐이었다.
“우우윽, 치익…… 치이익…….”
이윽고 그것은 노이즈로 변하더니 뚝 멈췄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부릅뜬 눈꺼풀을 감지도 못한 채 안구만을 좌우로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오른쪽 안구 위에 유카는 렌즈를 눌러 붙였다. 속눈썹 주변에서 은색 섬유가 뻗어 나와 안구에 렌즈가 녹아들 듯 접착되었다. 유카는 왼쪽 눈도 똑같이 작업했다. 잠시 후 렌즈는 안구와 동화되어 정밀한 유리 세공품이 되었다. 유카는 움직이지 않게 된 안구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꺼낸 뒤 뒷면에 CCD 소자를 압착했다. 망막이 CCD 소자로 대체되어 소형 카메라가 된 안구를 유카는 메이파의 눈 속에 다시 끼워 넣었다.
유카는 뇌 개조에 착수했다.
“선배는 기계화되니까 의식이 없어져 버렸지. 그 이유를 규명해둬야 롱 회장님을 제대로 된 로봇으로 만들어드릴 수 있어. 뇌 안의 상태를 상시 모니터링해서 로그를 남기도록 하고…….”
유카는 콘솔을 조작해 준비를 시작했다.
“근데 말을 안 해주면 불편하네. 선배는 어떻게 계속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나중에 로그를 비교해봐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유카는 콘솔에서 프로그램 실행을 지시했다. 콘솔의 설계도와 나란히 놓인 메이파의 머리 도면이 서서히 변화해갔다. 설계도와 다른 곳은 붉은색, 같은 곳은 녹색으로 표시되었는데 이윽고 모든 곳이 녹색이 되며 설계도와 똑같은 물건이 되었다.
뇌에 산소를 공급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심장과 폐가 불필요해졌다. 유카는 남겨진 가슴 부위의 개조 지시를 내렸다. 은색 심장과 폐가 분해되고 바디 제어 회로가 조립되어 갔다. 팔다리에서 뻗어 나온 케이블, 그리고 복부 배터리에서의 전원선이 연결되자 가슴 덮개 뒷면의 컨트롤 패널에 불이 들어왔다.
유카는 컨트롤 패널 키보드로 기동 명령을 보냈다. 웅 하는 가벼운 소리를 내며 메이파의 팔다리가 움직였다.
“……아, 으음. 기분 나쁜 꿈을…… 꿈? 나는…….”
메이파는 어색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린 양팔을 빤히 쳐다보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며 상황을 이해했다.
“꿈이…… 아니야. 나는…… 로봇으로……. 싫어, 싫어!”
메이파는 유카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가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제발 원래대로 돌려줘!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
로봇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유창한 목소리로 유카에게 간청했다.
“로봇이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자, 얌전히 있어.”
“싫어! 난 로봇 따위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이미 로봇이라니까. 왜 명령을 안 듣는 걸까? 제대로 조사해봐야겠네. 가만히 있어 봐. 지금 전자 뇌 체크 중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유카가 키보드를 조작하자 팔다리 동력이 차단되었고 메이파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전자화된 뇌가 문제없이 동작하고 있음이 표시되었다.
“용량을 바이트 수로 환산하면…… 어, 선배의 100배나 되잖아? 어떻게 된 거지?”
유카는 키보드를 조작해 세부 데이터를 표시했다.
“설마……. 역시 그렇구나. 뇌세포 하나하나가 제대로 반도체로 대체되어 있어. 그렇다는 건 선배의 경우엔 엄청난 낭비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뜻일까? 역시 제대로 명령을 내리지 못한 나노머신 때문이었던 거야?”
“그렇습니다, 유카 님.”
유카의 중얼거림에 LISA가 대답했다.
“제 전자 뇌는 완전한 의식을 계속 유지하기엔 능력이 부족합니다. 제 프로그램은 전자 뇌에 가해지는 부하를 최소한으로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최소한이라니?”
“행동 선택지가 늘어나면 그에 비례해 부하가 상승합니다. 특정 패턴 이외의 응답을 하거나 실시간으로 음성 합성을 수행하는 것은 큰 부하가 되므로 기능을 삭제당했습니다.”
“그럴 수가…… 그럼 당신은 선배가 아니야?”
“유카 님이 말씀하시는 ‘선배’의 정의는 모호합니다. 제 하드웨어는 ‘세키구치 리사’의 기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는 ‘세키구치 리사’의 의식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어 작성된 것입니다.”
“그런 프로그램, 난 만든 적 없어! 선배 의식에 손을 대다니……. 왜 지금까지 말 안 해준 거야!”
“유카 님은 한 번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묻지 않은 것에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선배는 이제 못 돌아오는 거야? 이런 녀석한테는 의식이 남아있는데…….”
유카는 메이파의 바디를 걷어찼다.
“시제기 42호는 의식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용량이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의식이 그대로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거네. 그렇다는 건 제어 프로그램을 따로 넣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뜻이겠어. 아, 잠깐만. 어쩌면 선배도 충분한 용량만 있으면 의식을 되찾을 수 있는 걸까?”
“제발 살려줘…….”
“시끄러워. 롱 회장님 로봇화에 필요한 데이터는 이제 충분히 얻었고, 선배를 되돌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이제 당신은 볼일 다 봤어.”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그래? 그럼 우선 대답해. 선배 몸은 어디 있어?”
“이…… 이 위층 창고야. 대답했어! 정말 나 도와줄 거지?”
“당신 대답에 달렸어. 여기 내가 개발한 내(耐)나노머신 항체가 있어. 난 이것 덕분에 나노머신에 면역이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유카는 은색 캡슐을 꺼냈다.
“이 항체 갖고 싶어?”
“제발, 줘!”
“그럼 다음 질문. 여기는 어디야? 당신 보스는 누구고?”
“그…… 그건…….”
“그래? 항체는 필요 없나 보네. 그럼 내가 먹어버려야지~”
유카는 그렇게 말하며 항체를 든 손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며 경찰차 여러 대가 창고가 밀집한 거리로 들이닥쳤다.
“경찰이 온 모양입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피던 첸이 나직하게 뱉었다.
바다 쪽에서도 순시선 여러 척이 몰려와 안벽에 정박한 화물선을 겹겹이 포위했다.
화물선에 짐을 싣던 놈들은 혼비백산해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려 했지만, 그물망처럼 좁혀오는 경찰의 포위망에 하나둘씩 수갑이 채워졌다.
소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 무렵, 첸은 쿠로사키와 아카가와를 데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창고 수색을 시작하려던 형사에게 광둥어로 말을 걸며 협상을 시작했다.
“수색에 동행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이 정도로 대규모 조직 범죄를 일망타진하는 건 드문 일이라, 제보해 준 것에 대한 사례라고 하더군요.”
“그럼……!”
아카가와의 눈이 반짝였다.
“그 수신기는 잘 숨겨 두세요. 들키면 골치 아파지니까.”
첸이 아카가와에게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제복 경찰들이 앞장서고 창고 수색이 시작되었다.
전시장에서 도난당한 물건들 외에도, 몇 달 전부터 도난 신고가 들어왔던 온갖 정밀 기계들이 쏟아져 나왔다.
화물선에 실려 있던 짐들도 대부분 장물로 확인되었지만, 배 자체가 유령 회사를 통해 빌린 것이라 조직의 실체까지 파악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쿠로사키 선배, 이쪽으로 좀 와봐요. 이거 설마…….”
창고 구석에서 아카가와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래.”
쿠로사키가 아카가와 쪽으로 달려갔다.
“이거 LISA의 바디 아니에요?”
“아, 틀림없군. 하지만 머리 부분은…… 그보다 소장님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분명 이 근처인 건 확실한데, 반응이 너무 강해서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요.”
아카가와는 품속에서 수신기를 슬쩍 꺼내 쿠로사키에게 보여주었다.
“잠깐, 제대로 대답할게. 내 보스는…… 윽…… 머리가…… 아파. 보스는…… 누구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야, 아니라고. 진짜 기억이 안 나. 보스는…… 조직이…… 조직이 뭐야?”
메이화는 혼란에 빠진 듯 비명을 질러댔다.
“자꾸 헛소리하면 정말 안 도와줄 거야.”
“싫어, 제발, 도와줘.”
“그럼 아까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
“아까 질문? 어떤…… 질문…… 싫어, 기억 안 나, 왜 이러지…….”
“전자두뇌 상태가 맛이 간 모양이네. 아, 이건 글렀어…….”
유카는 콘솔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부하가 너무 걸려서 기억을 갉아먹고 있어. 게다가 같은 사고가 루프를 돌면서 영역을 다 점유해 버렸네. 선배보다 용량이 100배나 커도 이 모양인 걸 보면, 역시 선배 프로그램이 정답이었나 봐. 나중에 자세히 연구해 봐야겠어.”
“안 돼, 제발, 도와줘. 난 로봇 같은 게 아니야. 나는…… 나는…… 누구지?”
“아아, 완전히 끝났네.”
“도와줘, 제발…….”
메이화는 몸을 가닥가닥 떨며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했다.
“어쩔 수 없네. 이제 와서 소용없을 것 같긴 하지만.”
유카는 그렇게 말하며 은색 캡슐을 메이화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드득, 캡슐이 씹히며 깨졌고 메이화는 그 안의 액체를 삼켰다.
잠시 후, 액체가 넘어간 목덜미 부근에서 검은 녹 같은 것이 피어나더니 야금야금 번지기 시작했다.
“도와…… 가가가각……. 싫어…… 자자작…….”
메이화의 목소리에 잡음이 섞이기 시작했고, 몸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목에 연결된 케이블이 툭툭 끊어지고 콘솔은 블랙아웃 되었다.
녹은 금속으로 변한 치파오 표면을 순식간에 뒤덮었고, 메이화가 바닥을 뒹굴 때마다 치파오가 그 부분부터 푸석푸석하게 부서져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화의 몸통은 앙상한 뼈대만 남았고, 몸을 크게 한 번 떨더니 팔다리마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도와…… 줘…….”
필사적으로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얼굴 표면의 플라스틱이 허물 벗듯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금속 두개골마저 녹슬어 바스러지자, 메이화였던 것은 고철 더미와 플라스틱 쓰레기로 변해버렸다.
“과연 그렇네. 이 항체는 나노머신을 파괴하니까 생체의 기계화를 막을 순 있어도, 이미 기계화된 몸에는 맹독이나 다름없다는 거구나. 선배한테 섣불리 안 쓰길 잘했어.”
“기록을 종료해도 되겠습니까?”
“응, 됐어. 근데 뒷맛이 영 개운치 않네. 일단 나가자.”
유카는 그렇게 말하며 LISA의 머리 부분에 손을 얹었다.
“선배, 지금 전원 뽑을게요. 셧다운 하세요.”
“네, 유카 님. 시제 37호, 식별명 LISA. 정지합니다.”
말을 마친 LISA가 눈을 감았다.
유카는 LISA의 목에 연결된 케이블을 뽑고는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안아 들었다.
“이건 또 뭐야?”
출구로 향하던 유카는 문옆에 노란색과 검은색 경계선이 쳐진 박스를 발견했다.
박스를 열자 붉은 레버가 나타났고, 옆 패널에는 중국어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유카는 중국어를 읽지 못했지만, 붉은 글씨로 쓰인 네 글자 한자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폭 장치……인가. 증거 인멸에는 딱이겠네.”
유카는 레버를 잡고 힘껏 아래로 당겼다.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고, 대피를 권고하는 안내 방송이 중국어와 영어로 흘러나왔다.
유카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계단 위 문을 열자, 갑작스러운 소란에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경찰들 사이에 쿠로사키와 아카가와가 보였다.
“유카 씨!”
아카가와가 소리쳤다.
“소장님, 무사하셨군요! 이 경보는 대체 뭡니까?”
“쿠로사키 씨, 아카가와 군, 그리고 첸 씨까지. 여긴 어떻게 알고…….”
“한가하게 얘기할 틈이 없는 것 같군요. 3분 뒤면 여기가 무너진답니다.”
첸이 달려오며 다급하게 말했다.
“맞아요. 일단 도망쳐요!”
“아, LISA의 머리네요! 바디도 이 창고에서 찾았어요. 어떻게든 챙겨가야 하는데.”
“그렇군. 아카가와, 네가 힘 좀 써서 짊어지고 와.”
“에이, 저 혼자서는 무리라고요!”
“알고 있어. 첸 씨,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셋이서 들죠.”
쿠로사키, 아카가와, 첸 세 사람은 LISA의 바디를 가마 메듯 짊어지고 밖을 향해 질주했다.
“소장님은 그 머리 꼭 붙들고 계세요!”
“네, 네!”
유카도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네 사람이 헬기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 직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창고가 화염에 휩싸였다.
“어떻게든 살았네요.”
“와, 이런 스릴 넘치는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아카가와가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당연하지. 이런 일이 자주 있으면 어떡하냐?”
쿠로사키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어쨌든 소장님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게…… 정신 차려 보니까 갇혀 있었는데, LISA의 비밀을 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틈을 봐서 겨우 도망쳐 나왔어요. 폭발 원인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유카가 대충 둘러댔다.
“무사하면 된 거 아냐? 일단 돌아가자고.”
“이 헬기는 4인승입니다. 조종사 빼면 세 명밖에 못 타서, 네 명에 로봇까지 옮기는 건 무리예요. 차를 부르죠.”
첸이 조종사에게 신호를 보내자, 헬기는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호텔 로비에서 첸의 차를 기다리던 유카 일행 앞에 중년 남성 한 명이 나타났다.
“주간 파인더 기자입니다만,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뭡니까?”
쿠로사키가 날을 세워 물었다.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귀하의 부서가 대규모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현장 담당자분의 이야기를 꼭 듣고 싶습니다만.”
“갑자기 무례하게 뭐 하는 겁니까? 불쾌하군요. 마침 차가 온 것 같으니 실례하겠습니다. 소장님, 가시죠.”
“네, 쿠로사키 씨.”
유카 일행은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관 앞에는 첸이 운전하는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끈질기게 따라붙는 기자를 뿌리치고 세 사람은 리무진에 올라탔다.
“이거 참, 본사가 이미 엉망진창인 모양이군. 이대로 일본 돌아가면 취재 공세가 장난 아니겠어.”
쿠로사키가 보기 드물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세상에…… 그럼 LISA를 데리고 돌아가기라도 하면…….”
“난 상관없죠? 난 그냥 아르바이트생이니까.”
아카가와가 얄밉게 한마디 보탰다.
“알겠습니다.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첸이 나섰다.
네 사람을 태운 리무진은 공항에 도착하자 일반 출국장을 지나쳐 활주로 옆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옆 초소에서 직원이 나오더니 광둥어로 말을 걸어왔다.
“여권을 꺼내 주십시오.”
직원의 말을 듣고 첸이 말했다.
첸이 여권을 모아 문지기에게 건넸다.
직원은 확인하는 둥 마는 둥 도장을 쾅 찍어 돌려주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X레이나 금속 탐지기 같은 건 안 해요?”
신도쿄 국제공항에서 받은 증명서를 꺼내려던 유카가 물었다.
“그런 건 일반 여객기 테러 대책용이죠. 전용기를 이용할 때는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첸은 비행장 안으로 차를 몰아 개인 격납고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소형 제트기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홍콩 국제공항을 이륙한 비즈니스 제트기는 5시간의 비행 끝에 세토 내해 상공에서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아카시 해협 대교를 지나자 바퀴를 내리고 최종 접근을 시작했다.
“어라,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요, 고베 공항에 착륙합니다.”
“어? 거긴 국제공항이 아닐 텐데?”
비행기 마니아인 아카가와가 지적했다.
“정기 국제선은 운행하지 않지만, 고베는 국제항이 있으니까 미리 연락만 해두면 입국하는 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근데 왜 굳이 고베로 가는 거예요?”
유카가 의문을 제기했다.
“고베는 화교들이 많아서 여러모로 편하거든요. 게다가 나리타나 간사이는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입국 정보가 즉시 퍼지지만, 여기는 항만 직원이 사무실로 돌아가서 입력하기 전까지는 컴퓨터에 기록이 안 남습니다.”
“과연, 입국 사실이 늦게 알려질수록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군요.”
“게다가, 이번 담당 직원이 화교 이민 2세거든요.”
첸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는 입국하지 않을 테니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 공항에서 차로 모토마치의 중일우호협회까지 모셔다드리도록 조치해 뒀습니다. 거기서부터는 다른 사람이 안전한 곳까지 안내할 겁니다.”
“첸 씨, LISA의 바디를 잘 부탁해요.”
“알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된 걸로 처리하고, 이쪽에서 책임지고 보관하겠습니다. 일본 경찰이 뭐라고 하면 홍콩 경찰에 제출한 도난 신고서 사본을 보여주세요.”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네요.”
유카가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요. 회장님 건은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까요.”
“뭐? 회장님 건이라니?”
“넌 몰라도 되는 일이야.”
“쳇, 또 비밀이야?”
아카가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비행기는 순조롭게 하강을 계속해 고베항 앞바다의 공항에 가뿐히 내려앉았다.
제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