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 「메탈 드림」의 연재를 마친 karma 님께서, 사이트 부활 기념으로 그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메카니컬 레이디』를 보내주셨습니다.
전작의 캐릭터들에 새로운 인물들까지 가세해서, 대체 어떤 식의 「기계화 스토리」를 보여주며 우리를 홀려놓을지?
앞으로의 전개에 기대가 그야말로 폭발 직전입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총 8화 분량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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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언제 와도 영 마음이 안 놓인단 말이지.”
휑하니 넓은 방, 푹신한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창밖의 삭막한 빌딩 숲을 내려다보며 구로사키 쇼타로는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구로사키 상사의 사장, 구로사키 다이고에게서 갑자기 호출이 떨어진 것이다. 구로사키 상사라고 하면 그룹의 본체나 다름없는 곳. 그 정점에 서 있는 사장이 말단 중의 말단인 구로사키 로봇 연구소 소장을 불렀으니, 두말 말고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아카가와에게 대행을 맡기고 차를 몰아 단숨에 달려왔건만, 쇼타로는 사장실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무심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 양반한테 실종 사건 뒤처리로 신세 진 게 있어서 점수 좀 따두려 했더니만, 벌써 한 시간째인가.”
옆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은빛 로봇을 향해 쇼타로가 투덜거렸다.
“시즈카(SIZUKA), 넌 기다리는 게 지루하진 않겠지?”
“저는 로봇입니다. 질리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널 그렇게 개조한 게 바로 나니까.”
인간을 로봇으로 개조할 때, 일상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만 자아를 남겨둔 게 잘한 일인지 쇼타로가 고민하던 찰나, 문이 덜컥 열리며 풍채 좋은 남자가 급히 들어왔다. 구로사키 상사의 사장, 구로사키 다이고였다.
“미안, 미안하네! 회의가 길어졌어. 불러놓고 기다리게 해서 면목 없군.”
쇼타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구로사키 쇼타로,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시즈카도 데려왔습니다.”
“음, 그래. 앉게나.”
다이고는 서둘러 책상으로 가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비서가 차를 내오자 그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히 지시했다. 비서가 문 앞에서 인사하고 나가자, 다이고는 천천히 시즈카에게 다가갔다.
“이게 시즈카인가? 잘 만들었군. 바디 라인이 아주 예술이야. 만져봐도 되겠나?”
“네, 그러시죠.”
다이고의 손이 시즈카의 가슴에서 배로, 그리고 엉덩이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역시 딱딱하구먼.”
“부드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시즈카, 섹스로이드 모드.”
“알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즈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 한번 만져보십시오.”
다이고가 시즈카의 유방을 움켜쥐자, 딱딱했던 금속이 말랑하게 형태를 바꿨다. 동시에 시즈카의 입술 사이로 “아앗…” 하는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어, 로봇 주제에 느끼기까지 하나? 역시 인간을 개조한 보람이 있군.”
“알아보시겠습니까?”
“지난번 실종 사건 때 묻어버린 그 여자인가?”
“네, 맞습니다. 그 동생도 포함해서요. 그런데 오늘 용건은 오더메이드 로봇 주문입니까? 방금 그 비서도 꽤 괜찮은 소체인 것 같습니다만. 사장님께 신세 진 게 있으니 가격은 확실히 깎아드리지요.”
“여전히 장사 속 하나는 빠르군. 오늘 부른 건 비즈니스 때문이긴 하지만 내 개인적인 주문은 아니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이걸 보게.”
다이고가 건넨 서류철을 열자 ‘공영 창관 기획서’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창관요?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일본에선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언론에 새 나가기라도 하면 딱 좋은 먹잇감이 될 텐데요.”
“흥, 언론 놈들은 겉으로만 깨끗한 척하지. 결국 지하에서 성매매가 판치는 건 엄연한 사실이야. 난 그걸 양지로 끌어올리려는 것뿐이네. 일단 내용이나 읽어보게.”
쇼타로는 시키는 대로 서류를 훑어 내려갔다.
“로봇 창녀라… 과연, 이제야 감이 오는군요.”
“음. 창녀가 로봇이라면 인권 문제도 없고, 치정 싸움이 일어날 일도 없지. 어떤가, 기막힌 생각 아닌가?”
“하지만 창녀용이라면 일반적인 인간형 로봇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소체가 진짜 여자라는 게 들통나면 난리가 날 텐데요.”
“알고 있네. 하지만 내 기획에서 로봇 창녀는 단순한 기계 인형이 아니야. 반드시 기계와 인간의 요소를 모두 갖춘 로봇이어야 하네.”
“그렇군요. 그래서 시즈카를 데려오라고 하신 거군요.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음, 아주 좋아. 섹스로이드 모드는 상상 이상이야. 다만 주문이 하나 더 있네.”
“말씀하시죠.”
“로봇 창녀의 외형은 인간과 똑같이 만들어주게.”
“예? 저는 이 매끄러운 메탈릭 표면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자네 개인 취향이고. 대중을 상대로 하려면 역시 인간과 똑같은 게 낫지. 어떤가, 이 일 할 수 있겠나?”
“인간과 똑같은 리얼 타입 모델은 기술적으로 가능합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요. 그보다 20대라는 수량이 문제군요. 요즘 경찰 눈이 매서워서 소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쇼타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사장님네 여직원들을 이용하면 안 될까요?”
“상관없네만, 경찰에 꼬리 밟히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하는 걸세.”
“그렇습니까? 그럼 전원은 무리겠군요.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죠.”
“오, 맡아주겠나? 그럼 기획서를 비서에게 복사해 오라고 하지.”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쇼타로는 기획서를 시즈카에게 건넸다.
“시즈카, 이 내용 전부 기억해.”
“알겠습니다.”
시즈카가 은빛 손가락으로 서류를 파르르 넘겼다.
“기억 완료했습니다. 텍스트 및 이미지 데이터로 20MB(메가바이트)의 용량을 사용했습니다. 연구소로 돌아가면 인쇄할까요?”
“음, 그렇게 해.”
“편리하구먼. 나도 한 대 만들어달라고 할까.”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런데 이번 건과 관련해서 구로사키 상사 쪽에도 담당자를 한 명 세워주시겠습니까?”
다이고는 팔짱을 끼고 한참 고민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래, 딱 적임자가 있군. 비밀 유지도 확실하고 우리 여직원들 사정에도 훤한 놈이지. 자네도 잘 아는 놈일 거야.”
***
“메구로 군, 잠깐만.”
메구로 켄토가 출근하자마자 카자마 과장이 그를 불렀다.
“네, 지금 갑니다!”
메구로는 서둘러 과장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서류를 검토하던 과장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미인이었다. 카자마 아키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제2사업부 공공사업과 과장 자리에 앉은 여자다. 웨이브 진 숏컷, 짙은 눈썹,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유혹하는 듯 촉촉한 입술. 평사원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이런 얼굴로 밥 먹자고 하면 절대 거절 못 하겠지’ 같은 생각을 하던 메구로였지만, 돌아온 말은 달콤한 유혹과는 거리가 멀었다.
“메구로 군, 공공사업과에서 일한 지 몇 년째지? 이 기획서는 뭐야? 이런 빈약한 근거로 클라이언트한테 사업을 제안하겠다는 거야? 딱 잘라 말해서 조사 부족이야. 다시 해와!”
“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메구로는 기획서를 받아 들고 풀이 죽어 자리로 돌아왔다.
“또 과장님한테 깨졌어?”
옆자리 동기 모리시타 미라이가 말을 걸어왔다. 카자마 과장 같은 화려한 미인은 아니지만, 귀염성 있는 외모 덕에 남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많았다. 정작 본인은 일밖에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어. 매번 있는 일이지 뭐.”
“모리시타 씨! 잠깐 이리 와요.”
“이번엔 내 차례네.”
미라이가 서둘러 과장에게 갔다. 메구로의 자리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목소리는 안 들렸지만 둘 다 표정이 밝았다.
“별일 없었나 보네.”
기분 좋게 돌아온 미라이에게 메구로가 말을 건넸다.
“나도 처음엔 코멘트 엄청 달렸었어.”
“난 코멘트 수준이 아냐. 아예 처음부터 다시 하래. 당분간 야근 확정이네.”
“내가 좀 도와줄까?”
“고마워. 근데 괜찮아.”
일단 모아둔 자료를 다시 보려고 바인더를 집어 드는데, 컴퓨터 화면에 메일 알림이 떴다.
“시라토리 유카? 누구였더라… 아, 시라토리 클리닉 원장님이네. 웬일이지?”
시라토리 클리닉은 구로사키 상사 빌딩 1층에 있는 병원이다. 회사와 계약된 의무실 같은 곳이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지난번 건강검진에서 주의 항목이 나왔으니 상담하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머리나 좀 식히고 올까.”
메구로는 옆자리 미라이에게 행선지를 알렸다.
“건강 상담 좀 받고 올게.”
“시라토리 클리닉? 그러고 보니 그 원장님, 나이를 모르겠어.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 같은데, 카자마 과장님 신입 때랑 똑같다더라고.”
“회춘약이라도 연구하는 거 아냐?”
“그럴지도. 잘 다녀와.”
메구로는 1층으로 내려갔다. 클리닉 문을 열자 시라토리 원장이 보였다. 접수처에 직원이 없어 직접 말을 걸었다.
“시라토리 선생님, 메구로입니다.”
“아, 메구로 군. 건강 상담이지? 잠깐만 기다려.”
시라토리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사키 씨, 구로사키 상사 메구로 군 검진 결과랑 엑스레이 사진 좀 가져다줘요.”
용건을 전한 시라토리가 메구로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래? 기운이 없네. 알겠다, 아키(아키코)한테 깨졌지?”
“티 나나요? 우리 과장님, 워낙 무서우셔서 말이죠. 선생님, 오늘 밤에 저 좀 위로해 주시면 안 돼요?”
“아쉽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때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방사선사 미즈노 사키코였다.
“선생님, 검진 결과랑 사진 가져왔습니다.”
“사키 씨, 고마워요.”
“저기, 사키 씨. 저 지금 완전 우울하거든요. 오늘 밤에 저 좀 위로해 주면 안 될까요?”
“선생님이 안 된다니까 나한테요? 싫어요, 그런 거.”
“어라, 다 들렸나?”
“정신 좀 차리시죠.”
“어머, 벌써 사키 씨로 갈아탄 거야? 모처럼 선약 취소하고 시간 좀 내주려 했더니.”
“에이, 진짜! 두 분이서 저 놀리시는 거죠?”
“어머, 들켰네? 음… 건강검진 주의 항목은 감마 GPT(γ-GTP)야. 의사로서 충고하는데 당분간 금주해.”
“알겠습니다… 오늘은 얌전히 회사에서 야근이나 할게요.”
***
겨우 기획서를 다시 만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켄토냐? 나다. 알겠어?”
“아, 구로사키 삼촌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웬일이세요?”
“사실 너한테 부탁할 게 좀 있다. 내일 연구소로 좀 와라.”
“예? 그렇게 갑자기 말씀하셔도…”
“내일 오후 1시다. 늦지 마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끊겼다.
“미치겠네. 삼촌은 여전히 막무가내라니까. 내일 과장님한테 뭐라고 하지?”
메구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수화기를 든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제1화 끝
“구로사키 로봇 공학 연구소에 가겠다고?”
메구로의 말을 들은 카자마 과장의 첫 마디였다.
“네. 구로사키 연구소는 인간형 로봇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가 있는 곳이라…”
“알고 있어, 그런 건. 우리 그룹 연구소니까. 내가 묻는 건 무슨 목적으로 가냐는 거야. 설마 삼촌 만나러 가는데 회사 출장비를 쓰겠다는 건 아니겠지?”
정곡을 찔린 메구로가 당황했다.
“그, 그럴 리가요! 저는 인간형 로봇을 활용한 새로운 공영 사업 기획을, 그러니까…”
구로사키 쇼타로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메구로가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제2사업부의 카가 부장이 나타났다.
“카자마 과장, 대화 중에 미안하네. 방금 사장님 호출을 받았는데, 인간형 로봇을 이용한 공영 창관 건으로 의뢰가 들어왔어. 이게 사양서네. 공공사업과에서 입찰 제안서를 작성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어. 사장님이 이미 구로사키 연구소랑 이야기는 다 해두셨다니까, 누구 한 명 보내서 제안서 내용을 협의하고 오게.”
카자마는 멍한 표정으로 메구로를 쳐다봤다.
“과장님, 부장님이 말씀하신 게 바로 제가 생각하던 겁니다! 창녀로 로봇을 쓰면 사회적 문제를 피할 수 있어요. 금기시됐던 창관을 비즈니스로 만들 수 있다고요. 게다가 로봇이라면 인간으로선 상상도 못 할 플레이도 가능하죠!”
그제야 쇼타로의 용건을 이해한 메구로의 입이 터졌다.
“로봇이랑 플레이? 난 좀 이해가 안 가네. 뭐, 사장님 지시라면 어쩔 수 없지. 좋아, 다녀와. 자네가 먼저 꺼낸 이야기인 건 사실이니까. 풍속 산업에는 남자의 시각도 필요할 테고.”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자네 혼자 보내긴 불안해. 모리시타 씨도 같이 보내지.”
“아, 물론이죠!”
“미라이 씨!”
“네, 과장님.”
“미안하지만 지금 메구로 군이랑 구로사키 연구소 좀 다녀와 줘요. 사장님 지시로 로봇 창관 제안서를 써야 하니까 내용을 좀 상의하고 와요.”
“이게 사양서다. 가는 길에 읽어보도록.”
“알겠습니다. 다녀올게요!”
***
두 사람은 신칸센과 지하철을 갈아타고 목적지 역에 도착했다. 미라이가 역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구로사키 로봇 공학 연구소로 가주세요.”
“미라이, 그전에 잠깐 들를 데가 있어.”
“뭐야? 옛날 여자라도 만나러 가는 거 아냐?”
“어떻게 알았어?”
“야! 일하러 온 거잖아.”
“당연히 일 때문이지. 기사님, 제국공대로 가주세요.”
“제국공대? 그러고 보니 이 근처였지. 너 거기 아는 사람 있어?”
“내 모교야.”
“헤에, 메구로 너 보기보다 수재였구나?”
“보기보다라는 말은 빼지 그래.”
택시는 두 사람을 태우고 제국공대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메구로가 앞장서 걸었고, 미라이가 그 뒤를 쫓았다. 메구로는 어느 연구실 앞에서 멈춰 섰다.
“잠깐, 멋대로 가지 마! 음… 하이바라 연구실? 하이바라 교수라면 동력로 분야의 권위자잖아. 로봇 창녀한테 달 동력로라도 상담하러 온 거야?”
“조금 달라. 보면 알아. 그나저나 대단하네. 하이바라 교수를 다 알고.”
“응, 예전에 아는 사람이 여기 있었거든.”
그때 미라이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메구로는 눈치채지 못했다.
메구로가 문을 열자 그곳엔 은빛 인형이 앉아 있었다. 인형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생긋 웃었다.
“이곳은 하이바라 연구실입니다. 무슨 용건이신가요?”
“아키라(晶)!”
미라이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미라이, 너 이 로봇 알아?”
“아니, 그게 아냐. 아까 말한 지인 이름이 아키라인데, 이 로봇이랑 너무 닮았어. 닮았다기보다 걔가 그대로 로봇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똑같아.”
“구로사키 연구소에서 만든 AKIRA라는 모델이야. 모델이 된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하이바라 교수님 말로는 행방불명됐다더라고.”
“맞아, 아키라는 행방불명됐어. 그 소식 듣고 정말 충격이었는데…”
두 사람이 멍하니 있자 AKIRA가 다시 물었다.
“실례지만, 용건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 맞다. 하이바라 교수님을 뵙고 싶어. 구로사키 상사의 메구로라고 하면 아실 거야.”
그 말을 들은 AKIRA는 잠시 메구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삑’ 소리가 나더니 입을 열었다.
“졸업생 메구로 켄토 님이시군요.”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대학 졸업생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얼굴을 대조했습니다. 하이바라 교수님과 약속은 되어 있으신가요?”
“아니, 근처에 왔다가 들른 거야. 바쁘시면 그냥 갈게.”
“옆에 계신 여성분은 일행이신가요?”
“네. 메구로의 동료인 모리시타라고 합니다.”
미라이는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교수님께 확인하겠습니다.”
AKIRA가 정면을 향하더니 ‘푸르르’ 하는 소리를 냈다. ‘가차’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지껄이기 시작했다.
“AKIRA냐? 무슨 일이냐?”
다시 여자 목소리로 돌아와 자문자답했다.
“교수님. 지금 구로사키 상사의 메구로 님께서 일행분과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 톤이 낮아지며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메구로 군인가? 지금 나가지. 잠깐 기다리라고 해.”
AKIRA가 메구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께서 곧 나오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미라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진짜 잘 만들었다. 인간 비서랑 다를 게 없네? 아니, 그 이상일지도. 역시 세계적인 구로사키 연구소네.”
방 안쪽 문에서 기름기 번지르르한 땅딸막한 남자가 나타났다.
“야, 메구로 군 아니냐! 오랜만이구먼. 대체 웬일인가?”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AKIRA 좀 보려고 들렀습니다.”
“허허, AKIRA는 아주 훌륭한 로봇이지. 웬만한 비서보다 훨씬 쓸모가 있어.”
그때 하이바라는 메구로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메구로 군, 이 여성분은?”
“아, 죄송합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제 동료 모리시타입니다.”
“하이바라 교수님, 처음 뵙겠습니다. 모리시타입니다.”
“하이바라라고 하네. 어떤가, AKIRA는?”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까지 인간 같은 로봇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워요. 이 정도면 충분히 입찰 경쟁력이 있겠어요.”
“입찰?”
“네, 로봇을 이용한 풍속 산업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과연, 그래서 이제 구로사키 연구소에 가려는 모양이군.”
“네, 그전에 AKIRA를 좀 보고 싶어서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무슨 소린가, 메구로 군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자네가 구로사키 연구소를 소개해준 덕분에 AKIRA를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메구로한테 이 로봇에 모델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이온지 아키라 아닌가요?”
사이온지라는 이름을 듣자 하이바라가 흠칫 놀랐다.
“자, 자네가 사이온지 군을 아나?”
“네, 아키라는 제 고등학교 후배예요.”
“그, 그런가. 참 아까운 인재였지. 내가 참 아꼈는데, 2년 전에 갑자기 연구실을 그만두겠다고 하더군. 행방불명된 언니를 찾으러 가겠다면서 말이야. 내가 말렸지만, 결국 언니처럼 행방불명되고 말았어.”
미라이는 한참 동안 AKIRA를 바라봤다.
“메구로, 미안한데 나 잠깐 캠퍼스 좀 걷다 올게. 이 로봇을 보고 있으니까 아키라 생각이 너무 나서.”
그 말을 들은 AKIRA가 미라이에게 생긋 웃으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모리시타 님, 캠퍼스를 산책하신다면 정문 앞 학생과에 들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교내 명소 안내문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고마워. 그럴게.”
미라이는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천만에요.”
AKIRA는 다시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미라이가 사라지자 하이바라가 메구로에게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
“어때, 잘 만들었지? 자네 삼촌 솜씨는 확실해.”
“저도 교수님께 삼촌 소개해드린 보람이 있네요.”
“한번 살펴볼 텐가? 그러려고 온 거잖아. AKIRA, 이리로 와.”
“네, 알겠습니다.”
AKIRA가 벌떡 일어나더니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걸어왔다. 하이바라 앞에서 멈춰 부동자세를 취했다. 메구로는 AKIRA에게 다가가 몸 여기저기를 주먹으로 콩콩 두드려보기도 하고 가슴을 만져보기도 했다.
“이게 그 아키라의 말로인가. 그 보드랍던 살결이 이렇게 딱딱한 몸뚱이가 돼버리다니.”
“너, 너 설마 아키라랑 잔 적이 있는 거냐?”
하이바라가 무서운 기세로 노려봤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상대도 안 해주더라고요. 한때 휴머노이드 연구실 유키 교수랑 사귀었었죠. 시베리아행이 결정되면서 유키 교수가 먼저 찬 것 같지만.”
“흥, 유키는 내가 시베리아 개발팀 멤버로 추천해줬지. 내년에나 돌아올 거야. 예상대로 여자보다 일을 택하더군. 연락도 잘 안 닿는 곳이라, 지금쯤 아무것도 모른 채 한랭지용 로봇 개발에만 미쳐 있을 거다. 옛 애인이 행방불명돼서 내 로봇이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저기, AKIRA 성기 좀 볼 수 있을까요?”
“어, 그래. AKIRA, 뒤로 돌아서 앞으로 숙여.”
“알겠습니다.”
AKIRA가 뒤로 돌아 허리를 숙이며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메구로는 가랑이 사이를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훑었다.
“리얼하네. 원래 진짜였으니까 당연한가. 안쪽도 확인하고 싶은데 괜찮죠?”
“너무 휘젓지는 마라. AKIRA, 섹스로이드 모드.”
AKIRA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메구로가 다시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AKIRA가 “아으…” 하고 신음을 냈다.
“오, 젖어 나오네. 잘 만들었는데요? 안쪽은 어떠려나.”
메구로는 검지와 중지를 AKIRA의 성기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아윽… 으응… 아앙!”
메구로는 손가락 각도를 이리저리 바꾸며 AKIRA의 반응을 살폈다.
“앙, 메구로 님의 손가락 자극이… 아아, 너무 효과적입니다. 성감 처리 기능이 풀 가동 상태입니다. 자세 제어에 영향이 오고 있습니다.”
AKIRA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하이바라 교수의 안색이 험악해졌다.
“어이, 메구로 군. 이제 됐잖아. 슬슬 구로사키 연구소로 가보는 게 좋지 않겠나?”
“그러게요. 대충 감 잡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써먹겠네요.”
메구로가 손가락을 빼고 왼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려 하자, AKIRA가 살며시 메구로의 오른손을 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세척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메구로의 젖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다. 입을 떼자 손가락은 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땡큐, AKIRA. 그럼 교수님, 나중에 또 뵙죠.”
메구로는 방을 나섰다.
“AKIRA, 저놈 손가락이 그렇게 좋으냐?”
“네, 마스터보다 효과적입니다.”
“나랑 비교하지 마!”
“죄송합니다, 마스터.”
메구로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창문이 내려가며 미라이가 불렀다.
“메구로, 이쪽이야!”
“산책하러 간 거 아녔어?”
메구로가 택시에 올라탔다.
“그러려고 했는데 혼자선 재미없어서. 그렇다고 그 방엔 다시 들어가기 싫더라고.”
“미라이한테 미안하게 됐네.”
“신경 쓰지 마. 그보다 빨리 구로사키 연구소로 가자.”
“그래. 기사님, 구로사키 연구소로 가주세요.”
***
메구로와 미라이가 구로사키 연구소 입구로 들어서자 안내 데스크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구로사키 로봇 공학 연구소입니다. 용건이 어떻게 되십니까?”
“역시 로봇 연구소네. 안내원도 로봇이야.”
“그러게.”
메구로가 안내 로봇에게 다가갔다.
“구로사키 상사의 메구로와 모리시타라고 합니다. 구로사키 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약속되어 있을 텐데요.”
“구로사키 소장님과의 약속을 확인했습니다. 메구로 님 한 분만 예약되어 있습니다.”
“이쪽은 제 동료인 모리시타 씨입니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내 로봇이 ‘푸르르’ 발신음을 냈다.
“구로사키다.”
“소장님, 안내 데스크입니다. 지금 구로사키 상사의 메구로 님이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일행분이 계시는데 들여보내도 될까요?”
“상관없어. 바로 들여보내.”
로봇이 메구로를 향해 돌아섰다.
“들어가십시오. 소장실은 4층입니다.”
두 사람은 안쪽 엘리베이터 홀로 향했다.
“여기 안내 로봇도 잘 만들긴 했는데, AKIRA보다는 융통성이 없네.”
“진짜 로봇이니까 그렇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아니, AKIRA처럼 특주품이 아니라 양산형이라는 소리야.”
“그렇구나.”
4층으로 올라가 소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구로사키 상사 메구로입니다. 이쪽은 모리시타 씨고요.”
문을 열자 쇼타로가 인자하게 맞이했다.
“켄토, 못 본 사이에 제법 사회인 티가 나는구나.”
“삼촌, 오늘은 일 때문에 온 거예요.”
“그랬지, 미안. 사장님께 이야기는 들었다. 로봇 창관 입찰에 참여한다면서? 우리 그룹 일인데 최대한 협조해야지.”
“연구소에서 도와주신다니 든든하네요. 사양서에는 인간과 똑같은 로봇 20대를 제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제국공대에 들러 AKIRA를 보고 왔는데, 그런 로봇이 되는 건가요?”
“AKIRA를 보고 왔나? 그럼 말이 빠르지. 말이나 행동이 얼마나 인간 같은지 알았을 테니까.”
“네, 정말 놀랐어요.”
“이번엔 외형까지 인간과 똑같이 만들 걸세. 그러려면 인간 모델이 필요해. 그래서 부탁인데, 구로사키 상사 여직원들 중에서 모델을 좀 골라줬으면 하네.”
“외형이야 그냥 합성하면 되지 않나요?”
“합성을 하면 아무래도 인간미가 떨어지거든. 게다가 로봇 창녀 모델이 구로사키 상사 여직원이라고 하면 화제성도 충분하고 말이야.”
미라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알겠습니다. 회사로 돌아가서 상사분들과 상의해 볼게요.”
그 후 세부적인 회의가 이어졌다. 두 사람이 돌아가려 하자 쇼타로가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모리시타 씨는 우리 연구소가 처음이죠? 온 김에 견학이라도 하고 가요.”
“미라이, 온 김에 보고 가. 난 자주 봤으니까 삼촌이랑 이야기 좀 더 하고 있을게.”
“그래, 그럼 부탁할게.”
미라이가 방을 나가자 메구로가 입을 열었다.
“삼촌, 우리 회사 여직원 20명을 행방불명시키는 건 무리예요.”
“음, 나도 그게 고민이다. 일단 직원 명부에서 얼굴, 가족 관계, 건강 상태를 보고 후보를 추려봤어. 네 의견을 좀 말해줘.”
쇼타로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안쪽 방에서 시즈카가 나타났다.
“시즈카, 작업 끝났나?”
“네, 완료했습니다.”
“복부 해치를 열고 디스플레이 케이블 연결해.”
“알겠습니다.”
“이게 아키라 누나인가… 자매가 다 미인이네.”
시즈카가 작업을 마치자 디스플레이에 여직원들의 사진과 소속, 이름이 떴다.
“총무과 케이코는 안 돼요. 지금 경찰이랑 사귀고 있거든요. 인사과 마유미는 오케이. 경리과 히토미는 친척 중에 신문 기자가 있어요.”
메구로는 사진을 보자마자 거침없이 코멘트를 달았다.
“시즈카, 켄토가 하는 말 다 녹음해.”
“개인 이름과 링크시킬까요?”
“어, 그렇게 해.”
메구로는 여직원들의 얼굴을 보며 로봇화에 적합한지 평가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미라이와 카자마 과장의 얼굴이 뜨자 그는 생각에 잠겼다.
“미라이랑 과장님인가…”
“오른쪽 직원은 아까 그 아가씨군. 둘 다 아는 사이인가? 내키지 않으면 제외해도 된다.”
“음… 좀 더 생각해보고요.”
확인을 마친 쇼타로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맙다, 큰 도움이 됐어. 정보를 아주 꼼꼼하게도 모았구나.”
“이 정도야 기본이죠. 그보다 삼촌, 나 갖고 싶은 게 있는데.”
“뭐냐?”
“개조용 나노머신요.”
“이놈아, 그게 장난감인 줄 알아? 함부로 밖으로 못 가져나가.”
“알아요. 이번 일에 쓰려고 그러는 거예요. 아이디어가 좀 있거든요.”
메구로가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나자 미라이가 돌아왔다. 미라이는 시즈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와, 재밌었어요! 어, 시즈카 씨? 시즈카 씨를 모델로 한 로봇이 여기에도 있네요?”
그 말을 들은 쇼타로도 놀란 눈치였다.
“어라, 모리시타 씨가 시즈카… 씨를 아나요?”
“삼촌, 미라이는 사이온지 아키라의 고등학교 선배예요.”
“그랬군요. 정말… 그 자매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시즈카 씨를 연구소에서 보고 로봇 모델을 부탁했거든요.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행방불명돼버려서… 내가 그런 부탁만 안 했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그랬다면 아키라 씨도 언니 찾으러 나갔다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테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이바라 교수에게 아키라 씨를 닮은 로봇을 만들어준 겁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자, 미라이, 슬슬 가자. 그럼 삼촌, 아까 말한 거 부탁해요.”
“그래, 알았다. 어떻게든 해보마. 조심히 가거라.”
***
다음 날 아침, 메구로와 미라이는 카자마 과장과 카가 부장에게 출장 보고를 했다.
“어땠나, 구로사키 연구소 로봇은?”
“네, AKIRA와 SIZUKA라는 로봇을 보고 왔습니다. 로봇인데도 인간미가 느껴지더라고요. 외형이랑 감촉만 인간이랑 똑같이 만들면 남자들한테 충분히 먹힐 것 같습니다.”
“그래? 미라이 씨가 그렇게 말하니 확실하겠네. 나도 그 로봇 한번 보고 싶군.”
“그리고 연구소 측 희망 사항이 있습니다.”
“뭔가?”
“우리 회사 여직원들을 로봇 모델로 쓰고 싶다네요. 그건 회사랑 상의해보겠다고 답했습니다.”
“허허, 그거 재밌겠군. 우리 여직원이랑 똑같이 생긴 로봇이 상대를 해준다니.”
그 순간 카가는 두 여자로부터 얼음장 같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세 사람이 회의를 이어가던 중 카가에게 전화가 왔다.
“부장님! 전화 왔습니다.”
“지금 가네. 먼저 계속하고 있어. 금방 오지.”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카가의 안색이 싹 변해 있었다.
“큰일 났어! 고세이 물산이 입찰에 뛰어들었대.”
“고세이 물산이 위협적이긴 하지만, 우리에겐 구로사키 연구소가 있잖아요.”
“그게, 고세이 물산이랑 손잡은 회사가 오피스 테크노 공업이라는데, 이미 인간이랑 똑같은 로봇을 클라이언트한테 보여줬다더군. 메구로 군, 소장님한테 뭐 들은 거 없나?”
“오피스 테크노 공업요? 죄송합니다, 부장님. 처음 들어보는데요.”
“세계적 권위라고 자만하다가 뒤통수 맞게 생겼어! 당장 알아봐. 그리고 이 건으로 내일 긴급 대책 회의가 열릴 거다. 임원들한테 설명해야 하니까 준비 철저히 해.”
“알겠습니다, 부장님. 바로 대응하겠습니다. 미라이 씨는 출장 보고서랑 내일 회의 자료 좀 부탁해. 메구로 군은 연구소에 슈퍼 리얼 모델 샘플 로봇 좀 요청하고. 안 되면 AKIRA나 SIZUKA라도 빌려달라고 해.”
“죄송합니다, 과장님. 저 클라이언트 클레임 때문에 출장 가야 해서 회의 자료는 좀 힘들 것 같아요.”
“알았어. 그럼 회의 자료는 나랑 메구로 군이 만들 테니까 미라이 씨는 보고서만 써줘.”
“네, 알겠습니다.”
“과장님, 샘플 로봇 건인데 연구소에 확인해봤습니다. 최대한 노력은 하겠지만 구하기 힘든 재료를 써서 내일 회의 전까지 맞출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한대요. 일단 만약을 대비해서 시즈카를 지금 포장해서 특송으로 보낸답니다. 저녁 8시쯤 도착할 거예요.”
“오피스 테크노 공업은 알아봤어?”
“네, 로봇 분야 신규 진입 업체예요. 그동안 안내용 고정식 로봇이 주력이었는데, 최근에 인간이랑 똑같은 사무용 로봇을 개발해서 평판이 아주 좋다네요.”
“좀 위협적인걸.”
“과장님, 출장 보고서 다 됐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내일 회의 늦지 않게 첫차 타고 돌아오겠습니다.”
“부탁해, 미라이 씨.”
미라이가 나가고 카자마와 메구로는 회의 자료를 나눠서 작성했다. 8시가 넘었을 무렵 수경실에서 메구로 앞으로 짐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얼른 가서 받아와.”
“네!”
내려가 보니 사람 하나는 족히 들어갈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뜯어보니 안에서 시즈카가 나타났다. 시즈카의 발치에는 리모컨과 작은 금속 케이스가 있었다. 케이스 안에는 갈색 약병이 들어 있었다. 리모컨으로 시즈카를 깨우자 그녀가 조용히 눈을 떴다.
“시즈카, 정상 가동합니다.”
“시즈카, 삼촌이 너한테 내린 지시가 뭐야?”
“메구로 님을 대리 마스터로 모시고 지시에 따르는 것입니다. 마스터께서 메구로 님께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뭔데?”
시즈카의 입에서 쇼타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케이스 안의 약병을 사용해라.”
“알았어. 자, 시즈카, 따라와.”
시즈카를 데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카자마에게 소개했다.
“과장님, 얘가 시즈카예요.”
“와, 미라이 씨 말대로 대단하네. 바디 라인만 보면 로봇이라고는 믿기지 않아.”
카자마는 시즈카의 허리에서 엉덩이 라인을 손끝으로 훑었다.
“하지만 이 메탈 바디로는 인간 같다고 하긴 좀 그렇네. 슈퍼 리얼 모델이 필요한데.”
“과장님, 이거 삼촌이 보내주신 거예요. 지금 딱 필요한 걸 거라면서요.”
메구로가 갈색 병을 내밀었다.
“어머, 드링크? 센스 있네. 로보비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연구소 직원용으로 개발한 거래요.”
“그래? 그럼 잘 마실게.”
카자마는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맛은 별로네.”
그 후 카자마는 다시 자료 만들기에 몰두했다.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과거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떠오르고 판단도 전광석화처럼 빨라졌다.
“효과 대단한데? 이 정도면 금방 끝내겠어.”
카자마는 기계처럼 키보드를 두드리며 자료를 완성해 나갔다.
“좋아, 끝! 이제 복사만 하면 돼. 그건 내일 하자.”
“과장님, 다 하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응, 아주 좋아!”
그렇게 말하며 메구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랑이 사이의 민감한 곳과 젖꼭지에 강렬한 충격이 달렸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혔다.
“아윽!”
“왜 그러세요, 과장님?”
“아, 아냐… 히익!”
다음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쾌감이 몰아쳤다. 카자마는 팔다리에 힘을 빡 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그 와중에도 젖꼭지와 가랑이에서는 끊임없이 쾌감이 터져 나왔다. 카자마는 당장이라도 그곳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아아, 미친 듯이 비비고 싶어… 하지만 메구로 군이 보고 있어.’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카자마는 자신의 의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제2화 끝
아키코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소파 베드 위에 누워 있었다. 등에 닿는 침대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 알몸이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릴 수도,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옆에는 메구로와 시즈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메구로에게 말을 걸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몸이 안 움직이지? 왜 목소리가 안 나와?’
순간,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로봇이라고? 그래서 명령 없이는 못 움직이는 건가. 근데 왜 내가 로봇이 된 거지? 나 지금 꿈꾸는 건가?’
아키코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꿈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갑자기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깨어났을 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아키코, 각성했습니다. 로봇 모드로 기동합니다.”
그 순간 아키코는 자신이 카자마 아키코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메구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키코, 제어 레벨 보고해.”
메구로가 자기 이름을 막 부르고 명령조로 말하는 게 거슬렸지만, 로봇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현재 뇌의 기계화는 로봇 모드 가능 수준입니다만, 생체 뇌에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강한 자극이 가해지면 제어가 해제될 수 있습니다.”
아키코는 자기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메구로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시운전은 나중에 하는 게 좋겠군. 일단 내부부터 확인하자. 아키코, 복부 해치 오픈.”
메구로의 지시에 아키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지만, 머릿속의 또 다른 자아가 지시를 이해했다.
배의 뚜껑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다시 메구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와, 징그럽네. 좀 더 진행되기 전까진 이 녀석들한테 못 보여주겠어.”
아키코는 자기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묻고 싶었지만, 로봇은 명령 없이는 말할 수 없었다.
“시즈카, 일단 아키코 개조 상황 모니터링해서 숙부님한테 데이터 전송해.”
“라져.”
시즈카가 복부 해치를 열고 내부 케이블을 연결하자, 시즈카로부터 지령이 수신됐다.
“아키코, 바디 상황 보고해.”
로봇 따위에게 명령받는 게 불쾌했지만, 아키코는 바디 상황을 모니터링해 데이터를 시즈카에게 전송했다. 동시에 입으로는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바디 상황 보고합니다. 뇌세포 전자 소자화 20%, 골격 세라믹화 20%, 내장 기계화 10%, 피부 아미노 수지화 30%, 근육 이온 신축 수지화 15%입니다.”
제 입으로 뱉는 말인데도 내용은 이해가 안 갔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하는 기분이었다.
“어깨 관절과 대퇴부 조인트는 완성되었습니다.”
“그 말은 팔다리를 뺄 수 있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것만 보여줘도 놈들이 납득하겠지. 좋아, 아키코. 양팔 양다리 분리해.”
갑자기 어깨와 허벅지 뿌리 쪽에서 ‘카칵’ 소리가 나더니 팔다리의 감각이 사라졌다.
메구로가 아키코의 팔다리를 잡아당기자 쑥 하고 빠져나갔다.
‘팔다리가 빠지다니,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을 다 하네. 진짜 대단한 꿈이야.’
“그나저나 그놈들 성격상 가슴 같은 데 만져보겠다고 난리 치겠지. 제어가 풀릴지도 모르지만, 그쪽도 테스트해 볼까. 한계치도 알아둬야 하니까.”
메구로는 아키코의 머리맡으로 돌아가 침대 가장자리에 서서 시즈카를 불렀다. 시즈카와 아키코는 여전히 케이블로 연결된 상태였다.
“시즈카, 네 쪽에서 아키코 강제 정지 가능해?”
“가능합니다.”
“좋아.”
아키코는 얼굴 위로 두 팔이 뻗어오는 걸 보았다. 갑자기 양쪽 가슴을 꽉 움켜쥐는 감촉이 느껴졌다.
난데없이 가슴을 유린당하자 아키코는 신음이라도 내뱉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몸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아키코, 제어에 문제없나?”
“제어 유지 중입니다. 현 단계에서는 생체 뇌의 반사적 행동을 완전히 억제할 수 없습니다.”
한참 동안 가슴을 쥐어짜고, 주무르고, 반죽하듯 만져댔다. 서서히 유두가 딱딱하게 몽우리졌다.
양쪽 유두에 손가락 끝이 닿는가 싶더니, 사정없이 비틀어 올렸다. 아키코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도저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난 로봇이야. 명령이 없으면 소리도 못 내고, 움직이고 싶어도 못 움직여.’
하지만 아키코는 의문이 생겼다.
‘근데 로봇이라면서 왜 가슴을 만지는데 느껴지는 거지? 이거 역시 꿈인가?’
몸의 떨림이 아까보다 심해졌다.
“제어가 불완전하네. 뭐, 이 정도면 대충 속여 넘길 수 있겠지.”
메구로가 반대편으로 돌아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자세가 좀 안 나오네. 허리 밑에 뭘 좀 받쳐야겠어.”
아키코는 엉덩이가 들리고 허리 밑에 부드러운 막대 같은 게 받쳐지는 걸 느꼈다.
가랑이를 메구로 쪽으로 내미는 꼴이 됐다. 아키코 시야에는 안 보였지만, 메구로는 아까 떼어낸 아키코의 다리 하나를 가로로 뉘어 허리에 받쳐둔 것이었다.
“이제 잘 보이네.”
메구로의 손가락이 민감한 곳을 이리저리 자극하자, 아키코는 격렬한 쾌감에 휩싸였다.
‘아, 느껴져... 로봇인데 왜 이렇게 느껴지는 거야...’
아키코는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조차 벙긋할 수 없었다. 그저 몸의 경련만 심해질 뿐이었다.
“아키코, 슬슬 위험한가?”
“네, 제어 한계에 근접했습니다.”
쾌감의 파도가 높아지고 절정에 다다르자, 아키코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터졌다.
‘뭐지? 이 느낌... 이거 꿈 아니지?’
자신을 짓누르던 억압에서 해방된 기쁨에, 팔다리 없는 몸뚱이가 크게 활처럼 휘어지며 동시에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제어 해제됐다. 시즈카, 강제 정지시켜!”
“아키코를 강제 정지합니다.”
시즈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키코의 의식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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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에 카자마 아키코는 눈을 떴다. 옷차림은 어제 그대로였고, 소파 베드에 누워 있었다.
몸을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차고 자기 몸을 확인했다.
“팔다리 다 붙어 있네. 옷도 멀쩡하고. 역시 꿈이었나?”
그때 메구로가 들어왔다. 뒤에는 방대한 양의 복사물을 안은 시즈카가 따라오고 있었다.
메구로의 얼굴을 보자 꿈속의 장면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릴 뻔했지만, 카자마는 태연한 척했다.
“좋은 아침, 메구로 군.”
“앗, 과장님. 깨어나셨어요? 과장님이 만드신 자료는 인원수대로 복사해 뒀습니다.”
“고마워. 근데... 나 여기 누운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에엣? 기억 안 나세요? 과장님, 엄청난 기세로 자료 만드시더니 ‘다 됐다’ 하시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지셨거든요. 그래서 소파 베드로 옮겼는데, 시즈카가 있어서 다행이었죠. 저 혼자선 못 들겠더라고요.”
“실례네. 나 그렇게 안 무거워.”
“아, 아뇨. 제가 힘이 없는 것뿐입니다. 잘 주무셨어요?”
“응, 푹 잤어. 근데 이상한 꿈을 꿨네.”
“어떤 꿈인데요?”
“내가 로봇이 된 꿈. 팔다리가 다 분해되고 말이야.”
차마 메구로에게 가슴이며 거기를 유린당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하, 그건 오늘 회의 때문에 신경 쓰셔서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메구로 군, 나 잠깐 자리 좀 비울게.”
“어, 과장님 어디 가시게요?”
“여자는 남자랑 달라서 몸단장에 신경 써야 하거든. 아, 맞다. 데모룸 준비 좀 해줘.”
“알겠습니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데 모리시타가 들어왔다.
“앗, 과장님도 여기 계셨어요? 저 급하게 나오느라 화장도 제대로 못 해서.”
“나도 회사에서 자버렸어. 자료 완성하고 나니까 긴장이 풀려서 잠들었나 봐.”
“죄송해요. 못 도와드려서.”
“아냐, 괜찮아.”
“주무시는 동안 메구로가 허튼짓 안 하던가요?”
“그럴 리가 있겠니.”
설마 모리시타에게 꿈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자마는 즉시 부정했다.
“지금 메구로 군이 혼자 데모룸 세팅하고 있을 거야. 도와주러 가자.”
“네, 알겠습니다.”
카자마와 모리시타가 데모룸으로 가니 메구로가 테이블에 자료를 돌리고 있었다. 모리시타가 메구로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메구로.”
“어, 왔어?”
“샘플 로봇은 어떻게 됐어?”
“어떻게든 됐지.”
그때 시즈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구로 님, 자료 배포 완료했습니다.”
데모룸을 둘러보니 떨어진 테이블에서 시즈카도 자료를 돌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시즈카가 왔네.”
“응, 이렇게 도와주니까 살겠더라고. 역시 시즈카는 보통 로봇이 아냐.”
“그러게. 오늘 그 양반들이 그걸 좀 알아주면 좋을 텐데.”
“나름대로 수는 다 써놨어.”
“메구로 생각 따위 믿을 게 못 된다니까.”
메구로와 모리시타가 투닥거리고 있을 때 카가 부장이 데모룸으로 들어왔다.
“카자마 군, 준비 다 됐나? 곧 중역들 오실 거다.”
“네, 프로젝터 준비랑 자료 배포 다 끝났습니다. 샘플 로봇은 시간이 안 돼서 메탈 바디 타입으로 준비했습니다.”
“이게 자네들이 떠들던 시즈카라는 로봇인가? 그냥 평범한 로봇이구먼.”
카가의 말에 모리시타가 반박했다.
“내용물은 전혀 평범하지 않아요.”
“자네 주장이 중역들한테 통하면 좋겠다만.”
그러는 사이 중역들이 데모룸으로 들어왔다.
카가 부장을 비롯해 카자마 일행은 각자 위치에 서서 입찰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카가 부장이 의뢰 내용을 설명했고, 카자마가 로봇 창관의 컨셉과 쿠로사키 연구소의 협력 체제 및 업무 분담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상무가 질문했다.
“카자마 군, 쿠로사키 연구소랑 손잡고 정말 괜찮겠나? 고세이 물산이랑 손잡은 오피스 테크노 공업은 벌써 샘플 로봇을 클라이언트한테 보여줬다던데.”
“확실히 아직 슈퍼 리얼 모델 샘플은 없습니다만, 그에 준하는 모델로 오늘 시즈카를 준비했습니다.”
“시즈카라는 게 저기 있는 양철 로봇을 말하는 건가?”
모리시타가 발끈했다.
“겉모습은 양철 로봇일지 몰라도 속은 보통이 아닙니다. 사람 말을 완벽하게 이해해요. 이 자료 배포도 시즈카가 도와준 겁니다.”
“오피스 테크노 공업의 사무용 로봇은 인간이랑 똑같이 사무 처리를 해낸다더군. 그 정도로는 외관의 불리함을 메우기 힘들겠어.”
모리시타가 대답을 못 하고 쩔쩔매자 메구로가 일어섰다.
“여러분 걱정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샘플 로봇은 있습니다.”
메구로의 돌발 발언에 상무가 되받아쳤다.
“메구로 군, 그런 로봇이 있다면 우리한테 보여주게나.”
카가 부장이 당황해서 수습에 나섰다.
“상무님, 메구로가 말하고 싶은 건 샘플 로봇이 지금 쿠로사키 연구소에서 제작 중이라 조만간 선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치, 그렇지?”
“아뇨, 샘플 로봇은 이 데모룸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메구로의 말에 데모룸이 술렁였다.
자신의 수습을 단칼에 잘라버린 메구로 때문에 카가 부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빨리 보여드려!”
모리시타도 메구로에게 귓속말로 경고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괜한 허풍 떨다간 반감만 산다?”
카자마 과장도 메구로를 노려봤다.
“메구로 군, 있지도 않은 로봇 얘기로 회의 흐리지 마. 그런 로봇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그럼 보여드리죠, 샘플 로봇을. 로봇 모드 이행!”
카자마는 메구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신이 아키코가 된 것을 느꼈다.
메구로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설명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지는 안개처럼 흩어졌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단순한 현상일 뿐, 아키코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메구로의 말만이 유일한 의미였다.
‘이 느낌, 꿈꿀 때랑 똑같아. 내가 로봇이라고? 그건 꿈이었잖아! 왜 안 움직여져? 왜 말을 못 하겠지?’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차렷 자세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카자마에게 쏠렸다. 상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카자마 군, 메구로 군 농담에 장단 맞춰주는 건 그만하게.”
하지만 카자마는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제가 농담하는 줄 아시나 본데, 아닙니다. 그럼 우선 아키코를 제 지시대로 움직여 보죠.”
아키코는 메구로가 명령하는 대로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였다.
“메구로 군. 카자마 과장이 자네 장난에 협조해 줄 정도로 사이가 좋다는 건 알겠네. 하지만 우린 당면한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답을 듣고 싶단 말이야.”
상무가 짜증을 내며 툴툴거렸다.
“아직도 의심하시는 것 같으니, 카자마 과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시켜보죠. 아키코, 옷 벗고 알몸이 돼라.”
아키코는 겉옷을 벗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과장님, 이제 그만하세요!”
모리시타의 비명도 헛되이, 아키코는 속옷까지 다 벗어 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됐다.
메구로의 명령은 아키코에게 절대적이었다. 자신을 움직이는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메구로의 명령이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는 건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지만, 명령대로 옷을 다 벗어버렸다.
‘메구로 군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걔 말대로 움직이는 건데? 나 진짜 로봇이야? 로봇인데 왜 이렇게 창피한 거야?’
“카자마 군, 대체 무슨 생각인가? 스트립쇼라도 해서 서비스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우리를 성희롱 중역으로 고소라도 할 셈인가?”
상무의 질문에도 아키코는 묵묵히 알몸으로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아직도 카자마 과장이 연기한다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그럼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드리죠. 아키코, 양팔 양다리 분리.”
“둘 다 적당히 좀 해! 언제까지 이 생쇼를 계속할 거야!”
메구로는 야유를 무시하고 아키코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당겼다. 아키코의 팔이 쑥 빠지자 모리시타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과장님! 세상에...!”
중역들 사이에서도 ‘오오’ 하는 동요가 일었다.
메구로는 나머지 팔도 뽑아내고, 시즈카에게 아키코의 몸통을 들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시즈카가 아키코의 뒤로 돌아가 몸통을 번쩍 들자 아키코의 두 다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어떻습니까.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중역들은 달랑 몸통만 남은 아키코의 모습을 보고 ‘음...’ 하며 신음 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카가 부장과 모리시타는 그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부사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럼 아까 우리한테 자료 설명하던 카자마 과장이 로봇이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게 이번 회의를 위해 준비한 아키코입니다. 이걸로 쿠로사키 연구소의 기술력을 확인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좀 가까이서 보고 싶군. 이쪽으로 가져와 보게.”
“알겠습니다. 시즈카, 아키코를 이분들 앞으로 옮겨.”
시즈카가 아키코의 바디를 받친 채 중역들 쪽으로 다가갔다.
시즈카에게 들려 몸통만 남은 채 중역들 앞에 전시되자,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온몸을 핥듯이 달라붙었다.
‘비참해... 이런 꼴로 구경거리가 되다니. 내가 로봇이라고? 카자마 아키코가 아니라 오늘 회의용 샘플 로봇이라고?’
부사장이 일어나 가까이서 바디를 훑어보았다.
“사람 피부랑 구분이 안 가는군. 메구로 군, 저... 만져봐도 되나?”
“네, 괜찮습니다.”
부사장의 손이 조심스럽게 아키코의 배에 닿았다.
“음, 감촉이 진짜 사람 피부 같군.”
그 손이 조금씩 올라가 가슴에 닿았다. 부사장이 고개를 들어 아키코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 확인하자 손에 힘을 주어 꽉 움켜쥐었다. 아키코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사장이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어이, 방금 좀 움직였는데?”
“죄송합니다. 내장된 창녀 프로그램에 버그가 있어서, 민감한 곳을 자극하면 로봇 모드에서도 약간 반응해 버립니다. 이 문제는 곧 해결될 겁니다.”
메구로의 설명을 듣고 안심한 부사장은 다시 아키코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허어, 이 감촉... 마치 진짜 카자마 군의 가슴을 만지는 것 같구먼.”
부사장의 말에 옆에 있던 전무도 몸을 내밀었다.
“부사장님, 저도 좀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오오, 자네도 한번 만져보게나.”
부사장은 전무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전무는 아키코의 두 가슴을 움켜쥐고 마구 주물러댔다.
“이게 아키코의 젖통인가. 말랑말랑하고 탄력 있는 게 아주 끝내주는군. 오, 벌써 유두가 빳빳하게 섰어. 아키코, 감도가 아주 좋은데?”
“이쪽은 어떨까.”
다리가 빠져서 훤히 드러난 아키코의 가랑이를 상무가 고개를 숙여 들여다봤다.
“오호, 젖어 있군. 아주 잘 만들었어.”
상무는 왼손으로 꽃잎을 양옆으로 벌리고, 오른손 중지로 불룩 솟은 돌기를 짓눌러 비벼댔다.
아키코의 몸이 아까보다 훨씬 격렬하게 떨렸다.
갑자기 상무가 손가락을 안으로 푹 찔러 넣었다. 아키코의 몸이 ‘비쿤’ 하고 크게 휘어졌다.
아키코는 민감한 곳을 차례차례 중역들에게 유린당했다.
‘싫어, 그만해! 만지지 마!’
아키코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할 수 없었다.
‘가슴 주무르지 마... 유두 잡아당기지 마... 안에 손가락 넣지 마... 아, 그렇게 만져대면 나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아...’
아키코는 자신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느꼈다.
메구로가 돌연 아키코의 데모를 중단시켰다.
“여러분, 흥미로우시겠지만 슬슬 시간입니다. 아키코는 아직 개발 중이라 이제 쿠로사키 연구소로 반납해야 합니다.”
아키코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중역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음, 그렇군.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지. 어서 개발을 계속하게.”
메구로는 시즈카에게 귓속말을 했다. 시즈카는 아키코의 몸을 조립하더니, 아키코에게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두 로봇은 데모룸 문을 향해 걸어갔다. 도중에 모리시타의 앞을 지나갔다.
“너 같은 음란한 로봇을 과장님이라고 생각했다니.”
모리시타는 경멸 어린 눈으로 아키코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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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마치고 메구로와 모리시타가 사무실로 돌아오니 시즈카가 먼저 와 있었다. 모리시타가 시즈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시즈카, 아키코는?”
“반납했습니다.”
“오늘 수고했어.”
“천만에요.”
카자마 과장을 찾았지만 자리에 없었다.
“과장님, 안 계시나?”
잠시 후 카자마 과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모리시타가 말을 걸었다.
“앗, 과장님.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어디 계셨어요?”
“안녕, 미라이 짱. 나는, 음...”
카자마는 대답하려 했지만 방금 전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메구로가 얼른 대답했다.
“과장님은 댁에 계셨어요.”
“맞아, 미라이 짱. 지금 막 출근했어.”
갑자기 카자마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메구로, 넌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제가 과장님한테 부탁했으니까요. 회사에 카자마 과장이 두 명이나 있으면 연출이 엉망이 되잖아요. 게다가 밤늦게까지 자료 만드시느라 피곤해 보이시기도 했고요.”
“메구로 군, 모리시타 군, 수고 많았어. 회의는 어땠니?”
“과장님, 샘플 로봇 진짜 대박이었어요. 중역들 전부 입을 벌리고 만져대느라 정신없더라고요. 만족했는지 입찰 고(Go) 사인 났어요.”
“그래? 다행이네.”
모리시타가 메구로에게 투덜거렸다.
“난 진짜 과장님인 줄 알았다니까. 메구로 네 연출이었구나? 다음부턴 나한테 미리 말 좀 해줘.”
“미안, 미안. 갑자기 샘플 로봇이 도착하는 바람에.”
그때 카가 부장이 나타났다.
“이야, 자네들! 아키코 반응이 아주 뜨거워! 부사장님이 벌써 클라이언트한테 연락하셨다더군. 내일 아키코 프레젠테이션하라고 요구가 왔어. 메구로 군, 쿠로사키 소장님한테 잘 좀 말해둬.”
“부장님, 그건 아직 개발 중입니다. 자꾸 중단하면 공정에 차질이 생겨요. 게다가 클라이언트한테 보여줬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 납니다. 시즈카로는 안 될까요?”
“아키코랑 양철 로봇이 비교가 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키코를 클라이언트한테 보여줘야 해. 홀딱 벗겨서 클라이언트가 만지게 해줘. 가능하다면 실전도 시키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카자마가 갑자기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러세요, 과장님?”
“갑자기 머리가 아프네...”
“이런, 안 되겠군. 무리해서 그런 거야. 당장 시라토리 클리닉으로 가게.”
카자마가 걷다가 비틀거렸다.
“위험해! 시즈카, 과장님 좀 옮겨.”
“라져.”
“시즈카, 이쪽이야.”
시즈카가 카자마를 번쩍 들자 메구로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메구로, 과장님 잘 부탁해. 나중에 나도 가볼게.”
“오케이, 맡겨줘.”
카자마를 안은 시즈카가 메구로를 따라 들어오는 걸 보고 시라토리는 깜짝 놀랐다.
“나 이런 로봇 처음 봐.”
“오늘 회의 때 쓴 로봇이에요.”
카자마를 의자에 앉히고 시라토리는 청진기를 대며 진찰을 시작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네. 심박수, 호흡 다 정상이야.”
“그래요? 근데 머리가 너무 아파요.”
“아마 피로 때문일 거야. 일단 두통약 처방해 줄 테니까 경과를 보자고. 지금 약 가져올게.”
“앗, 제가 가져올게요.”
메구로가 시라토리에게 약을 받아와 카자마에게 먹였다.
“메구로 군, 고마워. 두통이 좀 가라앉네. 좀 졸려서 그런데 누워 있어도 될까?”
“네, 푹 쉬세요.”
카자마가 잠들자 클리닉 전화가 울렸다. 시라토리가 전화를 받은 뒤 메구로에게 왔다.
“메구로 군, 미안한데 나 잠깐 나갔다 와야겠어. 사키 짱도 없으니까 과장님 좀 봐줘. 금방 올게.”
“알겠습니다.”
모리시타는 클라이언트 트러블 처리 보고서를 다 쓰고 카자마의 상태를 보러 1층으로 내려갔다.
“메구로 이 녀석, 도통 안 오네. 과장님 핑계 대고 땡땡이치려는 건가?”
시라토리 클리닉 문 앞에서 시라토리 유카와 마주쳤다.
“어라, 미라이 짱. 아키 짱 병문안 왔니?”
“네. 선생님, 어디 다녀오세요?”
“응, 잠깐 볼일이 있어서. 메구로 군한테 가게 좀 봐달라고 했어.”
“그래서 이 녀석이 안 오는구나. 연락이라도 좀 해주지.”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3화 끝
지금 아키코는 메구로의 집에서 알몸으로 침대 위에 누워 메구로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라토리 클리닉에서 로봇 모드로 기동한 뒤, 시즈카와 함께 메구로의 집으로 온 상태였다.
“아키코, 개조 상황 보고해.”
“개조 상황 보고합니다. 뇌세포 전자 소자화 50%, 골격 세라믹화 90%, 내장 기계화 90%, 피부 아미노 수지화 70%, 근육 이온 신축 수지화 60%입니다. 전신 기계화 완료 예정 시각은 내일 24시입니다.”
“뇌 전자화 속도가 느리네. 숙부님 말씀대로 연구소 전용 설비가 없으면 안 되겠어. 미치겠네. 아직 미완성인데 카가 부장은 멋대로 클라이언트랑 약속이나 잡고. 덕분에 오늘 밤도 밤샘 테스트네.”
메구로는 카가 부장 험담을 늘어놓으며 아키코에게 메인터넌스 해치 개방을 명령했다.
기계화가 진행된 아키코의 내부는 어제와 달리 장기는 흔적도 없고 기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속은 이제 제법 로봇 같네. 시즈카, 개조 로그 따서 숙부님한테 전송해.”
시즈카는 자기 해치를 열고 아키코와 케이블로 연결했다.
“아키코의 개조 로그를 채취합니다. ...채취 로그 송신합니다. ...송신 완료했습니다.”
“이제부터 아키코 기능을 테스트한다. 모니터링해 줘.”
“아키코의 바디 제어가 필요합니까?”
“아니, 반응을 보고 싶으니까 모니터링만 해.”
“라져.”
메구로는 아키코의 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계속 괴롭혔다. 아키코는 무표정했지만, 비육(媚肉)에서는 윤활액이 분비되기 시작했다.
만져댈 때마다 메구로의 손가락 움직임에 맞춰 음란한 소리가 났다.
“바디 반응은 정상이군. 시즈카, 모니터링 결과 보고해.”
“생체 뇌의 성적 반응은 전자 뇌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고 있습니다. 바디에 가해지는 자극에 적절히 반응 중입니다.”
“로봇 모드는 문제없어 보이네. 그럼 아키코, 섹스로이드 모드로 이행.”
섹스로이드 모드에서는 성적 자극 신호에 대해 생체 뇌의 반응으로 직접 바디를 반응시키게 되어 있었다.
쿠로사키의 충고에 따르면 생체 뇌가 활동하는 부분이 많아 동작이 불안정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가능하면 전자 뇌가 완벽해진 뒤에 테스트하고 싶었지만, 내일 데모를 위해 오늘 반드시 끝내야 했다.
“만약을 위해 팔다리는 빼둘까.”
메구로는 아키코에게 어깨와 대퇴부 조인트 해제를 명령하고, 사지를 분리해 침대 밑에 두었다.
손발을 뺏기고 몸통만 남은 아키코의 가슴을 메구로가 쥐어짜고 손가락으로 유두를 꼬집자, 무표정하던 아키코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윽... 아아아...!”
“시즈카, 모니터링 보고!”
“쾌감도 상승 중입니다. 현재 전자 뇌에 의한 생체 뇌 제어 로드 30%입니다.”
“아키코, 쾌감 증폭 장치 기동. 레벨 2.”
가슴을 주무르며 메구로가 손가락으로 음순 사이에 보이는 돌기를 자극하자, 아키코는 몸통을 애처롭게 비틀었다.
“아윽... 아앗...!”
“시즈카, 모니터링 보고!”
“쾌감도 추가 상승 중입니다. 전자 뇌에 의한 생체 뇌 제어 로드 60%입니다.”
“아직 여유 있네. 레벨 3.”
메구로는 돌기에서 밀혈(蜜壷)로 손가락을 옮겼다. 이미 윤활액으로 듬뿍 젖은 그곳은 메구로의 손가락을 매끄럽게 깊숙이 받아들였다.
비순 사이로 윤활액이 흘러넘쳐 침대 시트를 적셨다.
“크으, 조이는 게 장난 아니네.”
손가락 끝으로 깊은 곳을 자극하자, 아키코는 한층 더 높은 비명을 지르며 절정에 도달했다.
“으으윽! 아아앗! 아우우우!”
그때 갑자기 시즈카가 경고를 보냈다.
“생체 뇌의 반응이 아키코의 전자 뇌 제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전자 뇌가 긴급 정지합니다. 생체 뇌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생체 뇌가 각성합니다.”
“젠장, 너무 몰아붙였나.”
방금 전까지 메구로가 시키는 대로 하던 아키코가 갑자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기 어디야? 몸이 안 움직여... 꺄악! 팔다리가 없어! 배가 열려 있잖아! 시즈카랑 연결돼 있고!”
“이런, 오리지널 자아가 돌아와 버렸네. 전자 뇌가 고장 났나?”
“전자 뇌 보호 회로가 작동해 일시 정지된 상태입니다. 10분 이상 정지 후 재기동하면 복구됩니다.”
“그거 다행이네.”
“전자 뇌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보다 내 몸이 왜 이래!”
“네 몸은 로봇으로 개조됐어. 전자 뇌라는 건 네 전자 뇌를 말하는 거고.”
“내 전자 뇌? 내가 로봇이라고?”
“그래. 넌 슈퍼 리얼 창녀 로봇 아키코야.”
“이거 꿈이지? 맞아, 아키코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에선 이런 느낌 못 느끼지 않나?”
메구로는 그렇게 말하며 윤활액이 솟구치는 음순에 다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키코의 가랑이에서 뇌세포까지 전율 같은 쾌감이 관통했다.
“히이익!”
아키코는 활처럼 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양쪽 유두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올랐다.
“뭐, 뭐야... 왜 이렇게 느껴지는 거야!”
“쾌감 증폭 장치가 작동 중이니까. 창녀 로봇에겐 필수 기능이지.”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창녀 로봇은 나를 모델로 한 아키코잖아!”
“그러니까 네 자신이 아키코라고. 어제 네가 마신 로보비탄에는 인간을 로봇으로 개조하는 나노머신이 들어 있었어. 미안하긴 한데, 역시 창녀 로봇 실물이 필요했거든. 아, 설명하기 귀찮네. 시즈카, 아키코 기억 좀 되돌려줘.”
“라져.”
아키코의 머릿속에서 ‘카칵’ 하고 뭔가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어젯밤의 장면들과 회의실 장면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이건...?”
“전부 기억났나 보네, 아키코?”
“싫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내가 로봇인 건데!”
“인간이랑 똑같은 로봇을 만들려니 인간을 토대로 쓰는 게 제일 빠르더라고. 아주 자연스러운 발상이지. 나노머신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기계로 네 육체를 안쪽부터 기계 바디로 바꿔버린 거야. 이미 뇌도 절반은 전자 뇌로 개조됐어. 완성되면 넌 명령에 순종하는 로봇이 될 거야.”
“말도 안 돼!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로봇으로 만들다니, 너무해! 귀신! 악마! 나 원래대로 돌려놔!”
아키코의 욕설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메구로는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숙부님. 저 켄토인데요. 아키코 개조 상황요? 별로예요. 그쪽에 데이터 보냈으니까 확인 좀 해주세요. 섹스로이드 모드로 가게 했더니 자아가 돌아와 버렸어요. 카가 부장은 내일 클라이언트랑 아키코 실전 시키겠다고 멋대로 정해버렸는데, 아키코가 이 모양이니 답이 없네요.”
“잠깐만! 내가 아키코라는 건, 내일 실전을 내가 한다는 소리야? 싫어! 난 섹스 장난감 따위 되기 싫단 말이야!”
“이미 진작에 섹스 장난감이야. 시즈카, 나 통화하는 동안 아키코 쾌감 증폭 장치 테스트 좀 해줘. 전자 뇌가 멈춰서 레벨 변경은 안 되지만, 레벨 3 그대로 테스트는 가능하잖아.”
“가능합니다.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시즈카는 손을 뻗어 금속 손가락으로 아키코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야!”
“레벨 3에서의 기능 확인을 수행합니다.”
움켜쥔 가슴을 천천히 짓이기듯 돌렸다.
“하아아아...!”
레벨 3의 쾌감 증폭 때문에 가슴을 잡힌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시즈카의 손가락이 유두로 옮겨갔다. 가슴만 만져도 이 정도인데, 민감한 유두를 유린당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아키코는 겁이 났다.
“자, 잠깐... 그만해! 이 바보 로봇아!”
“아키코, 당신은 내 하위 로봇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지시할 권한이 없습니다. 테스트를 속행합니다.”
“히익! 아윽!”
시즈카의 가차 없는 유린에 아키코의 몸은 배가 된 쾌감으로 떨렸고, 음순은 다시 윤활액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난 인간이야! 너 같은 양철 로봇이랑은 다르다고!”
“당신 발언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과거에 인간이었다는 점에서는 나나 당신이나 똑같습니다.”
“뭐? 그럼 너도 원래 인간이었어?”
“네. 저는 사이온지 시즈카라는 인간이었습니다. 쿠로사키 연구소에서 비서 로봇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세상에... 아윽! 싫어! 시즈카, 그만해!”
아키코는 살벌한 눈으로 메구로를 노려봤지만, 시즈카의 애무로 인한 쾌감이 몇 배로 증폭되어 덮쳐오는 바람에 그저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메구로는 휴대전화로 쿠로사키와 대화를 이어갔다.
“미안해요 숙부님, 얘기가 끊겼네. 좀 바빠서요. 네? 짐요? 아, 아까 소포 하나 왔던데. 열어보라고요? 리모컨이네. 아키코 리모컨이죠?”
메구로는 케이스에서 리모컨을 꺼냈다.
“아키코가 통제 안 되면 이걸로 정지시키라는 거죠? 좋아, 한번 해보자. 시즈카, 잠깐 떨어져 봐.”
시즈카가 아키코에게서 떨어지자 메구로는 리모컨을 아키코에게 겨눴다. 시즈카의 애무에서 해방되어 안도하던 찰나, 묘한 기계를 들이대자 아키코는 불안해졌다.
“그 기계 뭐야? 나한테 뭘...”
그 말을 끝으로 아키코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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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카자마는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 입던 파자마 차림으로 자기 집 침대 위였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7시네.”
왠지 시계를 보지도 않았는데 시간을 알 수 있었다.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고, 정지 버튼을 누르며 카자마는 의아해했다.
평소에는 알람 없이는 절대 못 일어나고, 일어난 뒤에도 개운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마치 몸 안에 타이머가 작동한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기상 직후의 나른함도, 졸음도 전혀 없었다.
‘어제 시라토리 클리닉에서 두통약 먹고 잠들었을 텐데. 언제 집에 왔지? 기억이 안 나네.’
어제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기억을 거부하듯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했다. 뭔가 나쁜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아침을 먹으려 했지만 식욕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피곤해서 그런가? 요새 좀 바쁘긴 했지.’
카자마는 일단 아무것도 먹지 않고 회사로 향했다.
출근하니 메구로가 시즈카의 해치를 열고 조정 중이었다.
“메구로 군, 안녕. 시즈카는 스탠바이 중이네? 아키코는 아직 안 왔어?”
“앗, 과장님. 안녕하세요. 아키코는 아직 개발 중이라 조정이 필요해서 시간 맞춰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 아키코를 아직 못 봤네.”
“그러게요. 마침 몸 안 좋으실 때랑 겹쳐버려서.”
그때 모리시타가 인사를 건넸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미라이 짱, 안녕.”
“어제 과장님 병문안 가려고 클리닉 갔었는데 벌써 가셨더라고요.”
“그랬니? 언제 집에 왔는지 기억이 안 나네. 몽롱해서 그랬나 봐.”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기분이 들었지만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 메구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과장님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저랑 시즈카가 댁까지 모셔다드렸어요.”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메구로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두 사람과 헤어져 자리에 앉으니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시라토리인데 카자마 씨인가요?”
“네, 카자마입니다. 어제는 감사했어요.”
“그 뒤로 두통은 좀 어때?”
“네, 덕분에 가라앉았어요.”
“그래? 다행이네. 혹시 또 아프면 언제든 와.”
“장사 열심히 하시네요. 그때 부탁할게요.”
카자마는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기계처럼 몰두해서 일을 처리해 나갔다.
점심시간 종이 울림과 동시에 모리시타가 카자마를 점심 먹으러 가자고 꼬시러 왔다.
“미라이 짱, 7초 빨라.”
“뭐가요?”
“점심시간 시작 말이야.”
“그래요? 7초 정도야 뭐 어때요. 그보다 점심 같이 드실래요?”
“고마워, 미라이 짱. 근데 지금 식욕이 없네.”
“그래요? 그래도 뭘 좀 드셔야 몸에 안 나쁘죠.”
“응, 알아. 근데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그렇다면 뭐... 저 혼자 갔다 올게요.”
모리시타를 보내고 카자마는 점심시간에 뭘 할까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계속 일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모리시타는 카자마가 계속 일하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과장님, 언제부터 저렇게 일에 미친 사람이 됐지?’
메구로가 점심 먹고 돌아오자 동료 사메지마가 다가왔다.
“메구로. 방금 안내데스크에서 연락 왔어. 공영 오락 사업과의 야마키라는 사람이 널 찾아왔다는데?”
“오, 벌써 왔나? 땡큐.”
카자마에게 클라이언트가 왔다고 전하고 메구로가 안내데스크로 가려 하자 사메지마가 말을 걸었다.
“메구로. 너 과장님이랑 일하는 거야?”
“응. 공영 로봇 창관 건 같이 담당하고 있어.”
“그렇구나. 넌 쿠로사키 연구소 인맥이 있으니까 좋겠다. 부럽네. 나도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과장님이랑 일해보고 싶다.”
“너 신입 때부터 카자마 씨 팬이었지?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사메지마.”
부러워 죽겠다는 사메지마의 시선을 뒤로하고 메구로는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메구로가 클라이언트를 사무실로 안내해 오자 카가 부장과 카자마 과장이 맞이했다.
“여기가 이번 업무를 담당하는 공공사업과입니다. 부장인 카가와 과장인 카자마를 소개하죠.”
“반갑습니다, 카가입니다.”
“카자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영 오락 사업과의 야마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찬가지로 키노시타입니다. 이야, 정말 미인이시군요. 당신 같은 분이 로봇 창녀의 모델이 되어주신다면 공영 로봇 창관은 성공 보장입니다! 하하하!”
“오늘 보여드릴 슈퍼 리얼 로봇은 카자마를 모델로 했습니다. 메구로 군, 준비됐나?”
“죄송합니다. 아직 준비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곧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메구로 군, 클라이언트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최대한 서둘러.”
“알겠습니다.”
카가는 야마키와 키노시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데모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오늘은 마음껏 창녀 로봇의 감촉을 확인해 보십시오. 상대는 로봇이니까 아무리 만져대도 불평 안 합니다. 그야말로 장난감처럼 다뤄주세요. 하하.”
클라이언트와 카가 부장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카자마는 다시 두통을 느꼈다. 카가 부장이 클라이언트를 데리고 나가자 모리시타와 메구로에게 두통 얘기를 꺼냈다.
“미라이 짱, 또 머리가 아프네. 미안하지만 잠깐 클리닉 좀 다녀올게.”
“이런, 큰일이네요. 모리시타는 시즈카 데리고 부장님이랑 클라이언트 응대하고 있어. 내가 과장님 모셔다드리고 아키코 데리고 데모룸으로 갈게.”
“알았어.”
카자마를 진찰한 시라토리 유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어디도 이상이 없는데.”
“근데 머리가 너무 아파요.”
“그래? 그럼 두통약을 바꿔보자. 경과를 좀 지켜보자고.”
시라토리가 조제실로 들어가 미즈노 사키코에게 조제를 지시했다.
“자, 카자마 씨. 이거 두통약이에요.”
“제가 가져갈게요.”
메구로는 조제실 카운터 너머로 미즈노에게 약을 받았다.
“자, 과장님. 약이에요.”
“고마워.”
카자마는 약을 먹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왠지 졸리네... 어디 누울 데 없을까?”
“그럼 안쪽 병실 침대 써요. 회사 돌아갈 땐 뒷문 이용하고요. 일반 환자들이랑 안 마주치는 게 나으니까.”
“고마워요.”
카자마는 메구로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로 들어갔다.
데모룸에서는 클라이언트들이 슈퍼 리얼 모델의 등장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카자마 과장이 갑자기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는 바람에 일정이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구로가 곧 슈퍼 리얼 모델을 데리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동안 이 시즈카를 봐주세요. 시즈카는 쿠로사키 연구소의 기술력을 집약해 제조된 특별 모델로, 양산 모델과는 차원이 다른...”
모리시타가 시간을 끌고 있을 때 메구로가 아키코를 데리고 데모룸으로 들어왔다. 모리시타는 아키코를 보자 안도하며 달려갔다.
“과장님! 이제 괜찮으세요?”
“모리시타, 과장님이 아니라 아키코야.”
“어? 아, 맞다.”
“그보다 부장님 안 계시네? 어디 가셨어?”
“그러게, 아까까지 계셨는데 갑자기 어디 가버리셨어. 혼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모리시타는 다시 데모룸 중앙에 서서 아키코를 소개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슈퍼 리얼 모델 아키코입니다!”
키노시타와 야마키는 아키코를 보고 깜짝 놀랐다.
“허어, 진짜 카자마 과장이랑 똑같네.”
“이거 카자마 과장까지 있으면 더블 아키코가 되겠는데?”
그때 모리시타는 카자마 아키코와 아키코가 동시에 같이 있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자마 과장님이 사실 아키코인 거 아냐? 설마... 나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야.’
모리시타는 잡생각을 털어냈다.
“그럼 아키코 조작 담당인 메구로와 교대하겠습니다.”
메구로가 모리시타와 자리를 바꾸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그럼 실제로 여러분 눈으로 아키코를 직접 확인하시죠.”
메구로는 아키코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고 클라이언트 앞에 세웠다. 야마키와 키노시타는 아키코의 알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허어, 피부가 참 곱네. 보기만 해서는 로봇인 줄 모르겠어. 진짜 로봇 맞아?”
“로봇이라는 증거를 보여드리죠. 아키코, 메인터넌스 해치 오픈.”
아키코의 복부에 이음새가 나타나며 해치가 열리자, 기계로 가득 찬 뱃속이 드러났다. 야마키와 키노시타는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봤다.
“과연. 확실히 로봇이구먼.”
해치가 닫히자 이음새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만져봐도 됩니까?”
“그럼요. 아키코의 바디 감촉이 인간의 피부나 근육과 얼마나 흡사한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아키코의 가슴, 엉덩이, 가랑이를 차례로 만져댔다. 아키코는 무표정하게 두 남자의 손길을 받아냈다.
“음... 확실히 만지는 느낌도 사람이랑 다를 게 없어.”
“무반응, 무표정인 것도 로봇다워서 좋지 않습니까, 키노시타 씨?”
“그래요, 야마키 씨? 전 ‘아앙’ 하고 소리 내는 쪽이 더 좋은데요.”
“그럼 키노시타 씨 취향에 맞춰 아키코의 또 다른 모드를 테스트해 보죠. 아키코, 섹스로이드 모드 이행. 단, 자세는 그대로 유지해.”
아키코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 다시 한번 만져보시죠.”
야마키가 가슴을 움켜쥐자 아키코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젖혔다.
“아아아...!”
“오호, 무반응도 좋지만 이렇게 소리를 내니 더 좋구먼.”
아키코는 두 사람에게 유린당하며 계속 신음을 흘렸다. 몸을 비틀면서도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느라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음순에서 흘러나온 윤활액이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 젖었어! 이거 진짜 리얼한데?”
“이야, 이런 미인의 몸을 마음껏 만질 수 있다니 꿈만 같군요. 현실에서 이랬다간 성희롱으로 고소당할 텐데 말이죠. 안 그래요, 모리시타 씨?”
“하아... 뭐...”
모리시타는 속으로 ‘나랑 섹스 로봇을 비교하지 마’라고 생각하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맞다. 꿈같으니까 창관 이름은 ‘드림’을 쓰죠. 로봇을 쓰니까 ‘로보 드림’ 어때요?”
“그것보다 첨단 기술 이미지로 ‘테크노 드림’이 낫지 않겠나?”
“좋아요, 테크노 드림으로 하죠!”
“어머, 멋진 이름이네요.”
참 단순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모리시타는 장단을 맞췄다.
어느새 돌아온 카가 부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어떻습니까, 두 분이 아키코를 시운전해 보시는 건?”
“시운전이라뇨?”
“로봇 창녀로서의 기능을 확인해 보시는 거죠.”
“이야, 이런 사람들 앞에서 좀... 사양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호텔 방을 잡아뒀습니다. 자, 준비해, 메구로 군.”
메구로가 당황해서 카가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장님, 아직 그쪽은 테스트 안 끝났어요!”
“이 멍청아! 이 절호의 기회를 날릴 셈이냐?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냥 시켜!”
“부장님이 정 그러시다면야...”
인간을 로봇으로 만든 게 들통나면 카가 따위가 책임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럼 호텔로 안내하겠습니다.”
카가가 준비한 호텔 방으로 클라이언트와 아키코가 들어갔다. 카가와 메구로, 모리시타는 두 사람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부장님, 저 과장님이 걱정돼서 잠깐 가봐도 될까요?”
“안 돼, 모리시타. 클라이언트가 있는 곳을 비우다니.”
“어차피 저쪽은 섹스 로봇에 정신 팔려서 우리 신경도 안 쓸걸요?”
“아냐. 안 보여도 정성은 다 통하는 법이야. 그치, 부장님?”
“메구로, 너 제법 기특한 소리를 하는구나. 맞아, 모리시타. 메구로 좀 본받아라.”
“메구로, 너 언제부터 우수 사원이 된 거야?”
갑자기 방 안에서 아키코의 비명이 들렸다.
“꺄악! 싫어! 안 돼!”
모리시타와 카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잠깐, 아키코 목소리잖아! 괜찮은 거야?”
“메구로! 뭐야 저거? 무슨 일 생기면 네 책임이다! 어떻게 좀 해봐!”
“괜찮아요. 금방 조용해질 겁니다.”
메구로가 몰래 주머니 속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아키코의 비명이 멎었다.
일을 마친 야마키와 키노시타는 숨을 몰아쉬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왔다.
“이야, 한마디로 환상적이었습니다!”
“제대로 즐겼습니다. 이거라면 사업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네요. 하하하!”
“마지막 비명은 뭐였습니까?”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려서. 지금 시작 중인 ‘강간 모드’가 오작동한 모양입니다.”
“과연. 그런 취향의 손님도 있을 수 있겠군요. 완성되면 꼭 저한테 제일 먼저 시운전시켜 주십시오. 하하하!”
“두 분이 기뻐하시니 다행입니다.”
카가는 야마키와 키노시타에게 비굴할 정도로 아부를 떨었다.
“자, 시즈카. 우린 클라이언트 배웅할 테니까 아키코 원래대로 조립해서 제자리에 치워둬.”
“라져.”
“그러고 보니 아키코는 항상 어디다 치우는 거야?”
“그건 비밀이지.”
카가와 모리시타가 클라이언트를 쫓아 나가자 메구로는 시즈카에게 아키코 리모컨을 건넸다.
“이걸로 아키코 조작해. 그리고 지금 기억은 지워두고. 내가 최대한 시간 끌게.”
“라져.”
클라이언트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한숨 돌리자마자 바로 퇴근하자는 메구로의 말에, 모리시타는 카자마를 보러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내키지 않아 하는 메구로를 끌고 모리시타가 시라토리 클리닉에 가니 환자들로 북새통이었다.
“선생님, 과장님은요?”
“어머, 과장님이라면 안쪽 병실에 있을 거야.”
“있을 거라니요, 선생님. 안 보셨어요?”
“미안해. 오늘 웬일인지 환자가 너무 몰려서 나랑 사키 짱이랑 정신이 하나도 없네.”
“잠깐 들여다봐도 되죠?”
“그럼. 기운 좀 북돋아 줘. 나중에 한가해지면 나도 갈게.”
병실 문을 여니 시즈카가 있었다.
“시즈카!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아키코 치우고 나서 과장님 곁에 있으라고 시켰어. 수발들 사람이 있으면 편할 것 같아서.”
“메구로 치고는 센스 있네?”
“난 원래 센스 만점이라니까.”
카자마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자고 있었다.
“난 잠깐 시즈카 점검 좀 할게.”
메구로는 시즈카의 해치를 열고 내부를 체크하는 척하며 아키코 리모컨을 꺼냈다. 모리시타에게 안 들리게 시즈카와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키코 기억은 지웠어?”
“죄송합니다. 전자 뇌에 트러블이 발생해 생체 뇌 기억 제어가 불완전합니다. 전자 뇌 기억은 삭제했지만 상황에 따라 생체 뇌에서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았어. 데모 얘기는 피하도록 하자.”
모리시타가 침대로 다가가자 카자마가 눈을 떴다.
“아, 미라이 짱... 왔니?”
“죄송해요, 깨웠나요? 기분은 좀 어떠세요?”
“으응... 아직 머리가 멍하네. 미안해, 데모 참석 못 해서.”
“과장님, 데모 걱정은 하지 마세요.”
“맞아요, 과장님. 푹 쉬세요.”
그때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카가가 병실로 들이닥쳤다.
“오오, 카자마 군! 어떤가, 좀 괜찮나?”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아직 좀 안 좋네요.”
“그래? 그건 그렇고 자네한테 보여주려고 가져온 게 있네.”
“그게 뭔데요?”
“아키코 비디오야! 데모룸 시청각 설비에 카메라가 있길래 녹화해 뒀지.”
‘이 양반이...!’ 메구로는 아차 싶었지만, 카가는 메구로의 속도 모르고 아키코 비디오를 카자마에게 보여줬다. 화면에는 아키코가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봐봐, 카자마 군. 진짜 똑같지?”
“어... 그, 그러네요.”
대답하는 카자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아키코가 알몸이 되어 남자들에게 유린당하는 장면이 나오자 카자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왠지... 내가 농락당하는 기분이에요.”
“정말이지, 내 눈앞에서 이런 데모는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창피해서 못 보겠네.”
“정말... 그러네요.”
그 말을 내뱉자마자 카자마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그러세요, 과장님? 제가 뭐 기분 나쁜 말 했나요?”
“아니... 그게 아냐.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자꾸 눈물이 나네.”
모리시타는 비디오를 끄고 카자마를 꼭 껴안아 주었다.
“아키코가 자기랑 겹쳐 보여서, 장난감이 되는 장면을 못 견디겠나 봐요.”
“이런 비디오 보고 울 줄은 몰랐군. 난 가보겠네. 나머지는 자네들이 알아서 해.”
카가는 기분이 상했는지 휑하니 나가버렸다. 모리시타가 카자마에게 물었다.
“과장님, 어떻게 하실래요? 좀 더 쉬다 가실래요?”
“나... 집에 가고 싶어.”
“그럼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메구로의 말에 카자마가 움찔했다.
“아니... 미라이 짱이 해줬으면 좋겠어.”
“어? 저로는 안 되나요?”
“메구로. 이럴 땐 여자끼리가 편한 법이야.”
비틀거리며 일어난 카자마를 부축하며 모리시타는 갈 채비를 했다.
메구로는 일이 꼬였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제4화 끝
“자, 다 왔습니다.”
모리시타가 카자마를 맨션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시라토리 클리닉을 나선 뒤로도 카자마는 차 안에서 내내 꺽꺽거리며 울어댔다.
모리시타가 옆에서 말을 붙여봐도 그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문을 열고 카자마를 소파에 앉히자 겨우 울음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뭔가에 잔뜩 눌린 듯한 표정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모리시타가 AKIKO 이야기를 꺼냈다.
“AKIKO 말이에요, 정말 카자마 씨랑 판박이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저 말이죠, 사실 AKIKO가 진짜 카자마 씨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했다니까요.”
“내가 AKIKO라고?”
무슨 말을 해도 반응 없던 카자마가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모리시타를 쳐다봤다.
“그냥 공상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방금… 뭔가 기억날 뻔했어.”
“그게 뭔데요?”
“모르겠어. 하지만 너무 끔찍한 일인 것 같아. 떠올리는 것조차 무서울 정도로.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듯한….”
“카자마 씨가 카자마 씨가 아니게 된다고요? 그럼 정말 제 말이 맞기라도 하다는….”
모리시타의 말을 가로막듯 전화벨이 울렸다. 모리시타가 수신기를 들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카자마 씨 댁입니다.”
“니시 소노코라고 합니다만, 아키코 씨 계신가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지만, 니시라는 성함은 기억에 없었다.
“카자마 씨, 니시 소노코라는 분한테 전화 왔는데 받으실래요?”
니시 소노코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카자마의 뇌 속 스위치가 켜졌다. 그 사람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강박이 전신을 지배했다.
“응, 받을게.”
카자마가 수신기를 건네받았다.
“네, 카자마입니다.”
수신기 너머에선 목소리 대신 기계적인 발신음이 흘러나왔다. 본능적으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온몸이 굳어버렸다. 의식이 멀어짐과 동시에 카자마의 뇌 속으로 직접적인 명령어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발신음이 멈추자 카자마는 수신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얼굴에 가면을 쓴 듯한 미소를 띠며 모리시타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미라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 오늘은 이만 가줄래?”
“네? 아, 네…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부탁이야. 가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 모리시타는 집을 나섰다.
“알겠어요. 그럼 갈게요. 몸조리 잘하세요.”
“고마워.”
현관에서 모리시타를 배웅한 카자마는 그 자리에 마네킹처럼 굳어버렸다.
5분 뒤, 마치 전원이 들어온 것처럼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맨션 입구에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메구로가, 조수석에는 휴대폰을 든 SIZUKA가 앉아 있었다.
“SIZUKA, AKIKO에게 다운로드한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는 모양이군. 이 정도 거리면 리모컨으로 조작이 가능해.”
메구로가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자, AKIKO는 실 끊긴 인형처럼 고개를 툭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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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로는 리모컨으로 AKIKO를 조종해 방 안으로 들인 뒤, 옷을 벗겨 침대에 눕혔다.
“SIZUKA, AKIKO의 기계화 진행 상황을 확인해.”
SIZUKA가 침대 옆에 서서 자신과 AKIKO를 케이블로 연결했다.
“AKIKO의 바디를 스캔합니다. …AKIKO의 기계화 프로세스 완료. 전자 두뇌 이외의 모든 부위는 정상입니다.”
“좋아. 지금부터 AKIKO를 기동한다. 전자 두뇌에 트러블이 있을지 모르니, SIZUKA는 AKIKO의 바디가 움직이지 못하게 제어해.”
기동 모드를 로봇 모드로 설정하고 리모컨 스위치를 눌렀다. AKIKO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몸이 안 움직여.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 로봇 모드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SIZUKA가 문제를 보고했다.
“전자 두뇌의 생체 뇌 제어 기능에 오류 발생. 생체 뇌가 자립 활동 중입니다.”
AKIKO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기억났어. 어제였어. 팔다리가 다 뜯겨나가고… 내가 AKIKO였던 거야. 너무해. 그런 놈들한테 나를 장난감으로 던져주다니. 으으윽!”
“기억이 돌아와 버렸군. 역시 미완성 상태로 실전에 투입하는 건 무리였나.”
“이제 이런 비참한 기분은 싫어. 차라리 SIZUKA처럼 아무것도 못 느끼는 로봇으로 만들어줘!”
“이 상태로 회사에 두는 건 무리겠군. 어쩔 수 없지. 내일 연구소로 보내버려야겠어. 회사에는 병가라고 둘러대지 뭐.”
그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야? 이 시간에.”
숨을 죽이고 기척을 죽였지만,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메구로!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헛수고 말고 문 열어!”
“제길, 사메지마다. 왜 하필 지금 오는 거야?”
“싫어! 이런 모습, 누구한테도 보이기 싫단 말이야!”
“쉿! 금방 쫓아낼 테니까 조용히 해.”
메구로가 문가로 다가가 문 너머로 대답했다.
“미안한데 사메지마,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말이야. 다음에 보자고.”
“구라 치지 마. 카자마 과장이랑 너랑 같이 들어가는 거 다 봤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기 전까진 절대 안 가!”
“네가 본 건 과장님이 아니야. 과장님이랑 똑같이 생긴 로봇이라고. 업무용이라 지금 조정 중이야.”
“어디서 약을 팔아? 진짜 로봇이라면 어디 한번 보여줘 봐!”
메구로가 한숨을 내쉬며 AKIKO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더는 못 숨기겠어. 안으로 들일 테니까 철저하게 로봇인 척해. 지금 네 꼴이 카자마 과장 본인이라는 걸 들키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으윽, 비참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메구로가 문 너머로 사메지마에게 말했다.
“조건이 있다. 여기서 본 건 절대 아무한테도 말 안 한다고 약속해.”
“약속할게! 그러니까 빨리 문이나 열어!”
메구로가 문을 열어 사메지마를 들였다. 사메지마는 무표정한 AKIKO가 복부 해치를 열고 SIZUKA와 케이블로 연결된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진짜였냐?”
“지금 여기 있는 건 공영 로봇 창관에 납품할 창녀 로봇 샘플이야. 회사 극비 사항이니까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마.”
“이 로봇, 진짜 카자마 과장이랑 똑같이 생겼네.”
“그래, 과장님을 모델로 만든 AKIKO라는 로봇이다. 이제 됐지?”
“이름까지 과장이랑 똑같구먼.”
사메지마가 손을 뻗어 AKIKO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당황한 메구로가 사메지마의 손을 쳐냈다.
“어이, 함부로 만지지 마!”
그 순간 AKIKO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사메지마는 눈치채지 못했다.
“야, 메구로. 나 이 로봇 테스트 좀 해보게 해주면 안 되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건 극비 프로젝트 로봇이라고.”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내가 본 거 다 까발려 버린다?”
“이봐, 아무한테도 안 말하기로 약속했잖아! 회사 기밀 유설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이 방에서 본 건 말 안 해. 하지만 밖에서 본 건 별개지.”
“그게 무슨 소리야?”
“카자마 과장이 네 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만 해도 회사 기밀 누설은 아니잖아, 안 그래?”
“이 자식이… 남의 약점을 잡고 늘어져?”
“맘대로 생각해. 그래서, 어쩔 거야? 나 이거 쓰게 해줄 거야, 말 거야?”
“큭… 어쩔 수 없군. 딱 한 번뿐이다. SIZUKA, 케이블 분리해.”
SIZUKA가 케이블을 뽑고 AKIKO의 메인터넌스 해치를 닫았다.
“AKIKO, 이 녀석 상대해 줘.”
“땡큐! 은혜는 잊지 않으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AKIKO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사메지마를 상대하라는 명령에 당장이라도 “그만둬!”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이 사실은 카자마 아키코 본인이라는 것만큼은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AKIKO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인간이 아니야. 감정 없는 로봇이야. 무슨 짓을 당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명령에 따를 뿐인 기계일 뿐이야.’
“어이, AKIKO.”
“네.”
“히히히, 과장님 이름을 막 부르니까 기분 째지는데? 이제부터 내가 널 좀 따먹어줘야겠다.”
AKIKO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그대로 뱉어냈다. 거부감이 들었지만 로봇 연기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제 몸을 마음대로 사용해 주십시오.”
“진짜 과장이랑 다르게 로봇이라 그런지 아주 고분고분하구먼.”
사메지마가 AKIKO를 껴안고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애무를 받는 육체로부터 쾌감이 뇌로 흘러 들어왔지만, AKIKO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필사적으로 견뎠다.
“히히히, 피부가 아주 착착 감기는 게 끝내주는데? 진짜 과장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이 가슴 탱탱한 것 좀 봐. 아, 못 참겠다!”
사메지마가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야, 내 눈앞에서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보는 그대로다. 동경하던 카자마 과장이랑 한판 뜰 수 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으니까.”
“네가 안 괜찮아도 내가 불편하다고!”
알몸이 된 사메지마는 메구로의 말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AKIKO의 몸 위로 덮쳐왔다.
메구로는 사메지마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AKIKO가 돌발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사메지마는 정신없이 AKIKO의 유두를 빨아댔다.
“크으으, 내 거는 이미 풀발기라고. 당장이라도 박아버리고 싶네.”
AKIKO가 그 말뜻을 이해하는 순간, 뇌의 일부분이 사메지마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AKIKO는 머릿속에 떠오른 메시지를 억양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알겠습니다. 윤활액 분비를 시작합니다.”
비부(秘部)로 제어 신호가 전달되었고, 분비된 윤활액으로 내부가 젖어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남자의 편의에 따라 언제든 욕구를 채워주는 쾌락용 장난감이 되어버린 처지가 너무나도 서글펐다.
사메지마는 그곳으로 손을 뻗어 감촉을 확인하듯 마구 헤집었다.
“우효! 벌써 질척질척하잖아. 로봇은 귀찮은 절차가 없어서 좋단 말이야. 좋아, 제대로 가보자고!”
사메지마는 AKIKO의 허벅지를 억지로 벌리고 몸을 밀어 넣었다.
“오오! 이거 느낌 장난 아닌데?”
사메지마의 행위가 만들어내는 쾌감은 로봇인 척 무반응을 가장하려는 AKIKO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차라리 진짜 로봇이 되어 이 고통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AKIKO, 최고다!”
“사, 사메지마 님… 즐, 즐거워하시니 기쁩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쾌감을 견디느라 AKIKO는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연기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인지조차 분간이 안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메지마는 AKIKO의 안에 욕망을 쏟아내며 행위를 마쳤다.
“푸하아! AKIKO, 너 진짜 끝내준다. 로봇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야.”
“사메지마 님, 저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위가 끝난 뒤에도 AKIKO는 아무런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메구로, 이거 진짜 물건이다. 내가 보증하지. 반응이 좀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볼일 다 봤으면 빨리 꺼져.”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구먼.”
사메지마는 바지 벨트를 매더니 책상 위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야! 그건 건드리지 마.”
“뭐 어때, TV 좀 보겠다는데. 응? 뭐야, 이 리모컨은? 웬 버튼이 이렇게 많아?”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메구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사메지마가 리모컨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자, 그에 맞춰 AKIKO의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헤에, 이 로봇 리모컨이었냐? 이거 재밌네!”
“이 자식이, 이건 장난감이 아니야! 극비 프로젝트용 프로토타입이라고!”
메구로는 리모컨을 뺏어 들고 사메지마를 밖으로 밀어냈다. 도어스코프를 통해 그가 간 것을 확인한 뒤 AKIKO에게 말을 걸었다.
“잘 상대해 줬어, AKIKO. 덕분에 살았다.”
“메구로 님의 지시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AKIKO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메지마는 갔으니까 이제 로봇 모드인 척 안 해도 돼.”
“현재 저는 로봇 모드입니다.”
“뭐? 로봇 모드라고? 전자 두뇌가 복구된 건가?”
“네. 전자 두뇌가 복구되었습니다. 저의 생체 뇌는 전자 두뇌의 제어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야? SIZUKA, AKIKO의 전자 두뇌와 생체 뇌를 스캔해.”
“알겠습니다. AKIKO, 메인터넌스 해치를 개방하세요.”
SIZUKA가 자신의 해치를 열고 AKIKO와 연결을 시도했다.
“메구로 님, AKIKO의 생체 뇌 제어 기능이 완전히 복구되었습니다. AKIKO는 이제 완벽한 로봇입니다.”
“크크크… 됐다! AKIKO가 완성됐어!”
메구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SIZUKA, AKIKO의 데이터를 수집해서 숙부님께 보내. AKIKO, 내일부터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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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회사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카자마를 발견한 모리시타가 달려갔다.
“카자마 씨!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응, 컨디션 아주 좋아.”
“다행이다. 어제 모습 봐서는 한참 쉬셔야 할 줄 알았거든요.”
“걱정 끼쳤네. 이제 다 괜찮아.”
두 사람이 사무실에 도착하자 공공사업과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카가가 싱글벙글 웃으며 메구로와 대화하고 있었다. 카자마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 카자마 군! 이제 좀 괜찮나?”
“네, 몸 상태 아주 좋습니다.”
“부장님, 근데 다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예요?”
모리시타가 끼어들며 물었다.
“공영 로봇 창관 수주에 성공했네! 자네들이 노력해준 결과야.”
“아니요, 다 카가 부장님 덕분이죠.”
“나보다는 역시 AKIKO의 공이 컸지.”
“메구로, 그러고 보니 AKIKO는 어디 있어? SIZUKA도 안 보이네.”
“SIZUKA는 아까 포장해서 쿠로사키 연구소로 보냈어. AKIKO는 지금 최종 테스트 중이야. 보관 장소는 극비 사항이라 미라이한테도 알려줄 수 없네. 미안.”
“흐음, 그렇구나.”
모리시타는 메구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리에 앉은 카자마를 힐끗 쳐다봤다. 그때 카가 부장이 메구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메구로 군, 자네가 제안했던 그 건 말일세.”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카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부사장님이 반대하고 계시네.”
“그렇습니까? 그거 곤란하네요.”
“난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데, 부사장님은 쿠로사키 상사의 품위에 어긋난다고 하시니 원.”
“부사장님이 카자마 과장님을 꽤 아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렇지. 카자마 군이 직접 설득해 보는 건 어떤가?”
“아니요,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선 눈이 많으니 저쪽 가서 얘기하시죠.”
그렇게 카가와 메구로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모리시타는 아까부터 카자마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메구로는 비밀이라고 했지만, AKIKO를 숨기기에 딱 좋은 장소가 있잖아.’
두 사람이 사라지자 모리시타는 카자마의 자리로 향했다.
“과장님, 여쭤볼 게 좀 있는데요.”
“뭔데?”
“사실 태양광 발전 설비 건 말이에요. 작년에 우리 둘이 같이 했던 거 기억나세요?”
“응, 기억나. 보고서 파일이라면 여기 있어.”
카자마는 서랍에서 CD 한 장을 꺼내 주었다.
“고마워요. 그때 고세이 물산 태양광 설비 정보 얻기가 진짜 힘들었잖아요. 카가 부장님이 미인계라도 써서 알아 오라고 했던 거 기억나세요?”
카자마는 기억을 더듬듯 허공을 응시하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기억나.”
“그때 과장님이 부장님한테 그런 짓 안 해도 알아 올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셨잖아요.”
“응. 둘이서 변장하고 청소부 구인 공고에 지원했었지. 청소하는 척하면서 고세이 물산 설비를 조사했었어.”
“제가 프리터 역할 하느라 갈색 가발 쓰고 화장도 엄청 진하게 했었죠. 음… 과장님 역할은 뭐였더라?”
“나는 정리해고당한 중년 아줌마였지. 센스 없는 낡은 옷에 머리는 부스스하게 하고, 얼굴에 주름이랑 처진 살 만드느라 고생 꽤나 했어.”
이건 카자마와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다. 모리시타는 눈앞의 카자마가 진짜라고 확신했다. 카자마는 자신의 아줌마 분장 모습을 들키기 싫다며 모리시타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었다. 카가 부장에게도 정보 입수 방법은 비밀로 했었다.
“근데 그 얘기가 지금이랑 무슨 상관이야?”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미라이, 용건 없으면 얼른 자리로 돌아가.”
“아, 네! 죄송합니다.”
모리시타는 자리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분명 AKIKO랑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리시타가 가자마자 사메지마가 카자마의 자리로 왔다.
“과장님, 요청하신 기획서입니다.”
“고마워.”
카자마는 서류를 받아 들고 무표정하게 읽어 내려갔다.
“이해할 수 없어.”
딱 한마디였다.
“어디가 말입니까?”
“전부 다. 당신 문장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아. 다시 써와.”
사메지마는 울컥했지만 꾹 참고 자리로 돌아갔다. 도중에 모리시타가 말을 걸었다.
“엄청 깨진 모양이네요?”
“아니, 오늘 과장님 좀 이상해. 진짜 로봇 아냐?”
그러다 사메지마는 메구로의 책상에서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다.
“오, 이건…!”
“왜 그래요?”
“이거 로봇 카자마 리모컨이야. 메구로 집에서 봤던 거라고.”
“그럼 AKIKO가 메구로 집에 있다는 거예요?”
“앗, 이거 메구로가 비밀로 하라고 했던 건데.”
“괜찮아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사메지마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카자마를 향해 스위치를 눌렀다.
“너, 사실 로봇이지? 정체를 밝혀라!”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사메지마의 농담에 웃던 모리시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카자마가 무표정하게 일어나 차렷 자세로 굳어버린 것이다.
“AKIKO, 로봇 모드로 이행합니다.”
주변 직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메지마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AKIKO에게 다가갔다.
“헤에, 방금 나한테 소리 지르던 과장님이 로봇이었단 말이지?”
“방금 전까지 의인 모드로 작동 중이었습니다.”
“의인 모드? 그러니까 사람 흉내를 냈다는 거냐? 대단한 기능이구먼.”
“현재는 로봇 모드입니다. 무엇이든 명령해 주십시오.”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소란스러워졌다.
“야, 다들 조용히 해!”
사메지마가 일갈하더니 AKIKO를 쳐다봤다.
“우선, 옷부터 다 벗어볼까?”
“알겠습니다.”
여직원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직원들 사이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AKIKO는 거침없이 옷을 벗고 속옷까지 전부 내려놓은 뒤 다시 차렷 자세로 섰다.
사메지마는 책상 위의 클립 두 개를 집어 들더니 AKIKO의 양쪽 유두를 집었다. 여직원들의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사메지마가 손가락으로 클립을 튕겨댔지만, AKIKO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꼿꼿이 서 있었다.
“멀쩡하네. 역시 로봇 맞구먼.”
그때 돌아온 메구로가 경악하며 달려왔다.
“사메지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오, 메구로 왔냐? 과장님인 줄 알았더니 네 극비 로봇이었더라고. 근데 왜 이 기계 인형이 과장 행세를 하고 있는 거냐?”
“그, 그건… AKIKO 테스트의 일환이야. 모두를 속인 건 미안하지만 극비 프로젝트라 어쩔 수 없었어.”
횡설수설하며 메구로가 AKIKO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자리로 돌아가는 와중에 모리시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어떻게 AKIKO가 그 변장 얘기를 알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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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모리시타는 침대 위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자문했다.
‘그때 변장했던 건 나랑 카자마 씨밖에 모르는 일인데. 아무리 똑같이 만들려고 해도 그런 세세한 정보까지 로봇한테 입력한다고?’
모리시타는 수십 번도 더 뒤척였다.
‘하아… 카자마 씨랑 AKIKO가 동일 인물이라면 모든 게 설명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모리시타는 지난 며칠간 카자마의 이상한 언행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AKIKO가 곧 카자마 씨라면, 카자마 씨가 AKIKO 비디오를 보고 울었던 이유도, 자기가 자기가 아니게 된다고 했던 말도 다 이해가 돼. 호텔에서 AKIKO가 비명을 질렀던 것도 설명이 되고. 내가 AKIKO를 보고 카자마 씨라고 느꼈던 것도 당연한 거야.’
자신의 엉뚱한 상상이 이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낸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건 꿈같은 얘기잖아. 대체 누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야?’
순간 모리시타의 머릿속에 한 이름이 번개처럼 스쳤다.
“쿠로사키 연구소!”
모리시타가 벌떡 일어났다.
‘SIZUKA나 AKIRA도 본인이랑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어. 만약 쿠로사키 연구소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설마 저 로봇들도 원래는….’
모리시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니시 소노코의 목소리,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시즈카 씨 목소리였어! 그럼 그건 SIZUKA가 말한 건가? 니시 소노코라는 이름도 니시온지(西園寺)를 비꼰 거 아냐? 그 전화 받은 뒤로 카자마 씨 상태가 이상해졌고.’
모리시타는 떨림을 멈추려 이불을 꽉 껴안았다.
‘그렇다면 그 녀석은 쿠로사키 연구소의 앞잡이야.’
모리시타의 머릿속에 아주 잘 아는 동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5화 끝
다음 날 아침, 모리시타가 한 눈으로 출근했을 때는 이미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완전 지각이네. 어제 이상한 상상 하느라 한숨도 못 잤어. 바보 같긴. 인간이 로봇이 된다니, 무슨 B급 SF 영화도 아니고.”
눈치를 살피며 사무실로 들어가자 여직원들의 수다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동료인 야마카와 메구미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안녕, 메구. 카자마 씨 왔어?”
“안녕, 미라이. 과장님은 요양 때문에 당분간 쉰다고 연락 왔어. 근데 웬일이야? 오늘 엄청 늦었네.”
“응, 일이 좀 있어서. 근데 다들 왜 저렇게 난리야?”
“미라이, 게시판 봤어?”
“게시판? 아직 안 봤는데.”
“대박이야, 이번 사원 연수!”
“사원 연수?”
쿠로사키 상사에서는 일 년에 몇 번씩 사원 연수가 열린다. 모리시타도 두세 번 가봤지만 하나같이 지루한 내용뿐이었다. 여직원들이 저렇게 열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제가 뭐 대단한 거라도 돼?”
컴퓨터를 켜고 게시판을 확인했다. [인사부 공지] - [사원 연수]를 클릭하자 화제의 연수 내용이 떴다.
여직원을 대상으로 한 ‘최신 로봇 공학’ 연수였다. 확실히 생소하긴 했지만, 여직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이 연수가 왜?”
“장소랑 시간 좀 봐봐.”
내용을 확인한 모리시타는 아연실색했다.
“뭐야, 이 연수?”
“그치? 장난 아니지?”
연수 장소는 첫날인 금요일 아침에 회사에 모여 버스로 S현 F시에 있는 쿠로사키 연구소로 이동해 실습을 한 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유명 리조트지인 S현 I시의 제휴 펜션에서 강의를 듣는 일정이었다.
강의는 오전뿐이고 오후는 각자 레포트 작성 시간이었다. 주말에는 연수가 없지만 숙박비는 전액 회사 부담. 게다가 참가자에게는 준비금으로 10만 엔(약 100만 원)이 지급된다. 이건 그냥 놀다 오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여직원들이 난리 칠 만했다.
“왜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아니, 조건이 좋은 연수가 있는 거야?”
“그건 참가 조건이 까다로워서 그래. 거기 클릭해봐.”
이런 파격적인 조건에 걸맞은 참가 조건이 뭘까 싶어 클릭한 모리시타는 경악했다.
참가 조건은 로봇 공학 실습의 일환으로 쿠로사키 연구소에서 로봇의 모델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로봇은 공영 창관 ‘테크노 드림’에 납품할 창녀 로봇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정원은 로봇 대수와 같은 20명.
“결국 창녀 로봇 모델이 되는 대가라는 거야?”
“그런 셈이지. 자기랑 똑같은 얼굴과 몸을 가진 섹스 로봇이 남자들 장난감이 된다는 게 좀 찝찝하긴 하지만, 조건이 너무 좋잖아.”
이 기괴한 참가 조건은 모리시타에게 어젯밤의 악몽 같은 상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설마 하는 마음에 강사 프로필을 확인해보니 전원 쿠로사키 연구소 직원이었다. 모리시타는 이 연수에서 지독한 구린내를 맡았다.
“분명 여직원이 창녀 로봇 모델이 되는 건 회사 품위에 어긋난다고 반대하던 임원이 있었을 텐데.”
“부사장님 말이지? 어제 카가 부장님이랑 메구로가 설득했대. 부사장님이 카자마 과장님 팬이잖아. 과장님이랑 똑같이 생긴 그 로봇을 마음대로 쓰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오케이 하셨나 봐.”
“그렇구나. 과장님이 임원들한테 인기가 많긴 하지.”
“그랬더니 다른 임원들이 난리가 났대. 반대한 사람만 득 보는 게 어딨냐고. 그래서 지금 메구로가 AKIKO 스케줄 조정하느라 임원실마다 뛰어다니고 있어.”
“그럼 AKIKO는 당분간 그 영감탱이들 상대나 하겠네.”
“미라이, 너 저 로봇 동정하는 거야?”
“그, 그런 거 아냐. 그냥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 정이 들어서 그렇지.”
“흐음, 그건 그렇고 미라이, 너도 같이 신청 안 할래?”
“싫어!”
모리시타는 반사적으로 거절했다. 예상치 못한 강한 거부 반응에 야마카와가 당황했다.
“뭐야, 그렇게 정색할 것까지야.”
“아, 미안. 요새 좀 바빠서 참석 못 할 것 같아.”
“아~ 그러셔? 그렇게 바쁘신 모리시타 님을 억지로 꼬셔서 정말 죄송하게 됐네!”
야마카와는 쌩하니 뒤돌아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모리시타는 중얼거렸다.
‘미안해, 메구. 하지만 이 연수, 도저히 신청할 기분이 아냐.’
어제의 악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연수에 참가했다가 로봇으로 개조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해. 절대 안 가.’
근거 없는 상상이라 치부하려 해도, 연상되는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니 단순한 망상으로 넘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만약 진짜라면, 저 애들 전부 로봇이 되어버릴 거야. 어떻게 구해야 하지? 누구한테 상담해? 누가 믿어주겠어. 잘못 말했다간 미친년 취급이나 받겠지. 그리고 만약 진짜라면, 내가 눈치챘다는 걸 저놈들한테 광고하는 꼴이잖아.’
모리시타는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모두를 구하는 수밖에 없어.’
결국 모리시타는 연수 신청 체크박스를 클릭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인사부 지시에 따라 면접을 보러 가자 면접실 앞에서 야마카와와 마주쳤다.
“뭐야, 미라이. 안 한다더니 잽싸게 신청했네?”
“응, 역시 리조트 펜션 일주일 연수가 끌리더라고.”
“근데 경쟁률 장난 아냐. 총무부 나카무라 케이코에 인사부 카토 마유미, 경리부 사사키 히토미까지 다 왔어.”
“다들 예쁜 애들뿐이네.”
“너도 예뻐, 미라이. 나도 어디 가서 안 꿀리고. 우리 둘 다 뽑히면 좋겠다. 아, 참, 카자마 과장님도 같이 간대.”
“과장님도 신청했어?”
“그분은 인솔자야. 특별 케이스지.”
“그렇구나.”
모리시타는 복잡한 심경으로 대답했다.
면접 3일 뒤, 모리시타에게 연수 안내문과 수강자 명단이 도착했다. 명단을 훑어보던 모리시타는 특정 경향을 발견했다.
‘젊고 남자들한테 인기 많은 애들 위주인 건 창녀 로봇 모델이니까 그렇다 쳐도, 전부 혼자 사는 애들뿐인 게 걸려.’
명단을 확인하고 있는데 야마카와가 다가왔다.
“나 뽑혔어! 미라이 너는?”
“나도 된 것 같아.”
“뭐야, 말투가 왜 그래? 별로 안 기뻐 보여.”
“아, 아냐. 당연히 기쁘지.”
“하긴, 넌 워낙 성실하니까 일 걱정돼서 그러지? 그건 그렇고 건강검진은 언제 받을 거야?”
“건강검진?”
“안내문 안 봤어?”
서둘러 안내문을 확인해보니, ‘연수 일정이 고되므로 사전에 시라토리 클리닉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것’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뭐가 고되다는 건지, 왜 건강검진이 필요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글쎄, 회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스리사이즈라도 재려는 거 아냐?”
야마카와가 모리시타 앞에서 포즈를 취해 보였다.
“내 몸매 그대로 만든 로봇이라면 남자들 다 코피 터질걸?”
“그렇겠네.”
‘그 로봇이 너 자신이 될지도 몰라’라는 말은 목구멍 뒤로 삼켰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말해봤자 미친 사람 취급만 당할 거야. 내 망상이면 다행인데… 확인해볼 방법이 없을까.’
“시라토리 선생님, 건강검진 부탁드려요.”
“어머, 미라이도 연수 참가하니? 의외네.”
“네? 제가 로봇 모델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건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신청 안 할 줄 알았거든. 미라이는 일에 워낙 진심이니까.”
“저도 리조트 펜션의 유혹에는 장사 없더라고요.”
“하긴 그렇겠네. 그럼 신체 계측부터 시작하자.”
키, 몸무게, 스리사이즈 정도겠거니 생각했는데 어깨너비에 소매 길이까지, 이건 거의 맞춤 정장 치수를 재는 수준이었다.
“선생님, 이렇게까지 자세히 재야 해요?”
“그러게 말이야. 회사에서 내려온 지침이야. 로봇 모델 한다며, 그래서 그런가 보지.”
계측이 끝나자 텅 비어있던 인체 도면 위에 모리시타의 상세한 수치들이 빽빽하게 적혔다.
“후우, 겨우 끝났네. 그럼 저 갈게요.”
“잠깐만, 아직 혈압이랑 채혈, 검뇨, 엑스레이 남았어.”
“뭐가 그렇게 많아요?”
“이것도 회사 지정 항목이야.”
“에이, 적당히 써주시면 안 돼요?”
“안 돼. 난 그렇게 일 안 해.”
“네, 네… 알겠습니다.”
“자, 팔 내밀어봐.”
체념하고 채혈과 검뇨를 마친 모리시타를 미즈노 사키코가 불렀다.
“모리시타 씨, 다음은 엑스레이예요.”
“사키 씨는 진짜 대단해. 방사선사에 약사, 간호사까지 완전 슈퍼걸이라니까.”
“아니에요. 다 선생님 덕분이죠. 연고 없는 저를 거둬서 자격증 따게 도와주시고 의학 공부도 가르쳐주셨거든요.”
“그랬구나. 부모님은 언제 돌아가셨는데?”
“8년 전요. 그때 고등학생이라 막막했는데 선생님이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와, 사키 씨 스무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었어? 선생님이랑은 원래 알던 사이였어?”
“사키랑은 집이 가까웠어.”
“어디 사셨는데요?”
“모리시타 씨, 죄송해요. 그때 일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 미안해. 내가 너무 실례했네. 근데 시라토리 선생님 정말 인품이 훌륭하시네요.”
“그런 거 아냐. 마침 여기 개업하려는데 일손이 필요했거든. 갈 곳 없는 사키라면 같이 와줄 것 같아서 부른 거야. 근데 여러 명 고용할 형편은 안 되니까 혼자서 다 해줬으면 해서 자격증 따게 한 거지. 내가 오히려 사키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선생님, 그 고마움 월급으로 좀 보여주세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정말 못 말린다니까. 자, 모리시타 씨 시작할게요.”
엑스레이실에 들어갔을 때 모리시타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키 씨, 물어볼 게 있는데….”
“모리시타 씨, 움직이지 마세요.”
“미안.”
미즈노의 지시에 따라 바륨을 마시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트림을 참는 고역을 치른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
“이제 됐어요.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예요?”
“저기, 카자마 씨 엑스레이 사진 있어?”
“있긴 한데, 왜요?”
“좀 보여주면 안 될까?”
“안 돼요. 환자 개인 정보는 보여드릴 수 없어요.”
“제발! 마메야 찹쌀떡 사줄게.”
미즈노가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요. 뇌물 쓰지 마세요.”
“무슨 일이야?”
시라토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선생님, 모리시타 씨가 카자마 씨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달래요.”
시라토리가 모리시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유가 뭐야? 말해줄 수 있니?”
“죄송해요, 지금은 말씀 못 드려요. 하지만 많은 사람의 운명이 걸린 일이에요.”
시라토리는 한참 동안 모리시타를 응시하더니 미즈노에게 말했다.
“사키, 문 잠가. 그리고 카자마 씨 엑스레이 사진 가져와.”
“선생님!”
“어서!”
미즈노는 마지못해 안쪽 선반에서 카자마의 사진이 든 봉투를 꺼내왔다.
“이게 카자마 씨 사진이에요.”
시라토리가 사진을 살폈지만 평범한 인체 사진이었다.
“음… 딱히 이상한 그림자는 없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거 언제 찍은 거예요?”
“지난달 정기 검진 때 찍은 거야.”
“그럼 안 돼요. 더 최근 건 없나요? 이번 건강검진 사진은요?”
“그분은 안 받았어. 인솔자니까.”
모리시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선생님, 두통 때문에 오셨을 때 진찰하면서 뭐 느끼신 거 없어요?”
“심박수도 호흡도 아주 깨끗했어.”
“흐음… 겉모습으로는 절대 모르게 되어 있는 건가. 역시 엑스레이 사진이 아니면 안 되는 걸까.”
“미라이가 뭘 조사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카자마 씨 엑스레이 사진이 꼭 필요한 거니?”
모리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자마 씨를 여기로 데려와. 내가 적당한 핑계를 대서 엑스레이를 찍어볼게.”
“하지만 계속 쉬고 계셔서 언제 출근할지 몰라요.”
“연수 인솔자라면 출발 당일에는 회사에 나오지 않겠니?”
“아! 그렇겠네요. 그럼 제가 당일날 어떻게든 여기로 모셔올게요.”
“우리는 아침부터 촬영 준비 해둘게. 근데 미라이, 대체 뭘 확인하려는 거야?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거니?”
“죄송해요. 괜히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서…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알았어. 지금은 더 묻지 않으마.”
모리시타가 나가려 하자 시라토리가 불러 세웠다.
“참, 잊은 게 있네.”
“네?”
“나도 마메야 찹쌀떡 아주 좋아한단다.”
“알겠습니다! 꼭 두 분 것 다 사 올게요.”
출발 당일, 쿠로사키 상사 빌딩 정문 앞에 버스 한 대가 멈춰 섰다. 버스 옆면에는 ‘쿠로사키 로봇 연구소’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카자마가 내렸다. 그때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버스 뒤편에서 카자마를 향해 돌진했다.
오토바이는 직전에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속도를 다 줄이지 못하고 카자마와 충돌했다. 카자마는 수 미터를 날아갔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라이더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카자마에게 달려갔다. 카자마는 아스팔트 위에서 눈을 뜬 채 고장 난 인형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전자 두뇌 재기동 성공. 정상 기동. 바디 스캔 시작. 바디 손상 경미. 제어계 정상. 재기동 문제없음. 생체 뇌 스캔 시작. 생체 뇌 충격으로 동작 정지 중. 손상 없음. 생체 뇌 강제 복구 실시. AKIKO 의인 모드로 기동합니다.”
카자마가 움찔하더니 오토바이에 치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멀쩡하게 일어났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몸에는 긁힌 상처 하나 없었다.
“괜찮아. 조심 좀 하지 그랬어. 큰일 날 뻔했잖아.”
라이더가 헬멧을 벗자 모리시타의 얼굴이 드러났다.
“미라이? 너였어?”
“과장님, 혹시 모르니까 시라토리 선생님한테 진찰받으러 가요.”
“괜찮다니까 그러네.”
싫다는 카자마를 모리시타가 억지로 끌고 시라토리 클리닉으로 향했다.
“선생님! 제가 과장님을 오토바이로 쳐버렸어요. 뼈가 부러졌을지도 몰라요!”
“어머, 큰일이네! 당장 엑스레이 찍어보자.”
“잠깐만요, 선생님. 저 바빠요. 이런 데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요!”
“금방 끝나요. 아직 출발 시간 넉넉해요.”
“싫어! 이거 놔!”
“아키코 씨, 그냥 사진 한 장 찍는 거예요. 금방 끝나요.”
마치 겁탈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질색하는 카자마를 모리시타와 시라토리가 억지로 진찰대에 눕히고 다리, 가슴, 머리 엑스레이를 찍었다.
“모리시타 씨, 당신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사람을 쳐놓고 억지로 사진까지 찍게 하고!”
“죄송합니다.”
모리시타는 숨을 헐떡이며 짧게 사과했다. 카자마는 씩씩거리며 클리닉을 나가버렸다.
‘이래 놓고 아무것도 안 나오면 난 진짜 천하의 미친년 되는 건데….’
카자마와 다시는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서둘러 미즈노에게 현상을 부탁했다.
“사키 씨, 초특급으로 부탁해!”
“알았어요.”
미즈노가 현상실로 들어갔다. 몇 분이 흘렀을까, 갑자기 안에서 미즈노의 비명이 들렸다.
“꺄악! 뭐야, 이거!”
시라토리가 급히 현상실로 뛰어 들어갔다.
“왜 그래, 사키?”
“이, 이것 좀 보세요!”
“세상에… 이게 뭐야?”
엑스레이 사진 속에는 기계 덩어리들이 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적어도 방금 그 카자마 씨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거네요.”
뒤늦게 들어온 모리시타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미라이, 네가 확인하려던 게 이거였니?”
시라토리가 묻자 모리시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가 없어. 방금 그게 로봇이었다니… 그 AKIKO라는 로봇인 거지?”
“머리 사진 좀 보여주세요.”
“여기 있어.”
건네받은 사진 속 뇌 부위에는 집적 회로 같은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시라토리도 모리시타의 어깨 너머로 사진을 살폈다.
“이 회로 같은 게 아마 전자 두뇌겠지. 근데 빈 공간이 너무 많네. 이 공간에는 뭐가 들어있는 걸까?”
시라토리의 말에 모리시타의 머릿속을 맴돌던 가설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버스를 세워야 해요!”
“어? 미라이, 왜 그래?”
모리시타는 대답도 없이 클리닉 밖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정문을 나서자마자 버스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기다려요! 멈춰요!”
모리시타의 외침에도 버스는 무정하게 멀어져 갔다.
“아직 출발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왜 벌써?”
버스를 배웅하던 인사부 카토 마유미를 붙잡고 따졌다.
“카자마 과장님이 갑자기 일정이 당겨졌다고 하셔서요. 급하게 연락했더니 다들 준비 끝났다고 하길래… 미라이 씨만 안 왔다고 했더니 그냥 먼저 가겠다고 하셨어요.”
“당장 쫓아가야 해.”
모리시타는 오토바이에 올라타 헬멧을 썼다.
“자네가 이 오토바이 주인인가?”
갑작스러운 부름에 돌아보니 경찰관 두 명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오토바이로 사람을 치고 뺑소니치려 한다는 신고가 들어왔네. 서까지 같이 가줘야겠어.”
“죄송해요, 나중에 꼭 갈게요! 지금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다들 그렇게 말하고 도망가려고 하지.”
“진짜예요! 제발요!”
“안 돼.”
말해봤자 소용없겠다 싶어 모리시타가 스로틀을 당기려 했다. 하지만 경찰관이 옷자락을 낚아채는 바람에 그대로 길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고, 경찰관은 모리시타의 팔을 뒤로 꺾어 제압했다.
“이 자식이, 도망까지 치려고 해?”
“아니라고요! 당신들이 내 말을 안 들어주니까 그렇잖아!”
“시끄러워! 가서 얘기해.”
모리시타는 그대로 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서에서 모리시타는 아주 진을 다 뺐다. 도주 시도가 경찰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겨우 풀려났을 때는 이미 오후 3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로비에는 카토 마유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이 씨, 경찰한테 끌려가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네, 아주 난리도 아니었네요.”
“카가 부장님한테 연락드렸는데 엄청 화내셨어요.”
“그렇겠죠.”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오토바이 타고 쫓아가야죠.”
“미라이 씨, 조사받느라 지쳤을 텐데 운전은 무리예요.”
“그래도 가야 해요. 다들 걱정… 아니, 모델이 부족하면 민폐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이거 드시고요.”
카토 마유미가 영양제 한 병을 건넸다. 그때 시라토리가 로비로 들어왔다.
“선생님, 와주셨네요.”
“마유미 씨가 연락해줬어.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환자가 밀려서… 괜찮니?”
“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이제 회사로 갈 거니?”
“아니요, 버스 쫓아가려고요.”
“미라이, 지친 몸으로 운전하는 건 위험해.”
“저도 그렇게 말했는데 도무지 듣질 않네요.”
“괜찮아요. 마유미 씨가 영양제도 줬거든요.”
모리시타가 병뚜껑을 땄다.
“로보비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 어디 회사 거예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메구로 씨가 주신 거라.”
모리시타는 입을 대려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병을 뗐다. 라벨을 자세히 보니 ‘쿠로사키 연구소’라는 작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메구로가 줬다고요?”
“앗, 참!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모리시타가 무서운 기세로 다그치자 카토는 울상이 되었다.
“죄송해요. 메구로 씨랑 싸웠다는 게 진짜였나 보네요.”
“내가 메구로랑 싸워요?”
“네, 메구로 씨가 미라이 씨 피곤할 테니까 이 드링크 좀 전해달라고 하셨거든요. 지금 싸우는 중이라 자기 이름은 대지 말아 달라고….”
병을 쥔 모리시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개자식이…!”
병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려다 꾹 참고 카토를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도 이거 마셨어?”
“아니요, 저한테는 이거 한 병만 주셨어요.”
“그래요? 그럼 됐어요.”
“죄송해요, 저 이제 회사 들어가 봐야 해서….”
모리시타의 살벌한 표정에 겁을 먹은 카토는 서둘러 도망치듯 나갔다. 시라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라이, 왜 그래? 갑자기 화를 내고… 저 친구 깜짝 놀랐잖니.”
모리시타는 병뚜껑을 다시 닫고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시라토리에게 말했다.
“선생님, 밖으로 나가요.”
“그래, 여기서 말하기 힘든 내용인가 보구나.”
모리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와 오토바이 쪽으로 걸어가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모리시타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데?”
“이 드링크 성분 좀 조사해 주세요.”
“알았어. 근데 왜? 메구로 군이 독이라도 탔을까 봐?”
“그럴지도 몰라요.”
“미라이!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선생님,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저 최근에 메구로 만난 적도 없다고요.”
“그럼 왜 독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말하자면 긴데, 아까 그 엑스레이 사진이랑 관계가 있어요.”
“아, 그 아키코 씨 닮은 로봇?”
“네. 선생님은 그 텅 빈 전자 두뇌를 보고 무슨 생각 하셨어요?”
“글쎄, 로봇은 잘 모르지만 그 정도 회로로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
“전 그 빈 공간에 들어있는 게 인간의 뇌라고 생각해요.”
“미라이! 그게 무슨… 설마….”
“카자마 씨의 뇌요.”
“말도 안 돼. 그건 너무 나갔어.”
“믿기 힘든 얘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요.”
모리시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시라토리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아직 다 믿기지는 않지만….”
시라토리는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
“네 상상대로라면 확실히 내 의문도 풀리긴 하네. 적어도 네가 왜 그렇게 버스를 걱정하는지는 알겠어.”
“네, 이 화려한 연수는 로봇으로 만들 여자들을 모으기 위한 함정 같아요.”
“근데 이 드링크랑은 무슨 상관이니?”
“저도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제 짐작이 맞다면 메구로가 엮여 있을 거예요. AKIKO는 항상 메구로가 데려왔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가 네 입을 막으려고 약을 탔다는 거니?”
“독살일 수도 있지만, 저를 로봇으로 만들려고 한 걸지도 몰라요.”
“이거 한 병으로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걸 조사해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요.”
“알았어. 내가 해보마.”
“부탁드려요. 제 망상으로 끝나면 제일 좋겠지만… 일단 전 버스를 쫓아갈게요.”
“운전 조심해라.”
모리시타는 오토바이를 타고 쿠로사키 연구소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갓길에 세울까 하다가 마침 안내판이 보여 휴게소로 들어갔다.
휴게소에서 전화를 확인하니 시라토리였다.
“여보세요, 선생님.”
“미라이, 네 짐작이 맞았어.”
“뭐가 좀 나왔나요?”
“분석 결과는 그냥 평범한 영양제야.”
“에이, 선생님… 사람 놀라게 하지 마세요.”
“그런데 미라이, 내가 시험 삼아 머리카락을 넣어봤거든? 근데 꺼내보니까 재질이 완전히 변해있었어. 인조 모발이랑 거의 똑같은 재질로 말이야.”
“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나도 하도 이상해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봤지. 그랬더니 뭔가 살아있는 게 있더라고.”
“그게 뭔데요?”
“모르겠어. 미생물 같은데 너무 작아서 내 현미경으로는 제대로 안 보여. 근데 그게 머리카락에 달라붙어서 뭔가를 하고 있더구나.”
모리시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미생물 같은 게 인간을 다른 물질로 바꿔버린다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
“그럼 그걸 쓰면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네요?”
“아마도.”
“세상에… 만약 제가 마셨다면….”
“너도 지금쯤 AKIKO처럼 됐겠지.”
“선생님! 그 미생물 활동하는 거 사진 찍어서 발표하면 쿠로사키 연구소 악행을 다 까발릴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그게 안 돼.”
“왜요?”
“지금은 다 사라졌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진 찍으려고 카메라 찾아서 돌아오니까 이미 미생물 같은 건 온데간데없더라고.”
“말도 안 돼….”
“음, 내 짐작인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소멸하게 설계된 것 같아.”
“증거 인멸까지… 아주 철저하네요.”
모리시타가 허탈해하고 있을 때, 휴게실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둘러보니 TV 앞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사람들 틈 사이로 TV 화면을 확인한 모리시타는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설마….”
“왜 그래, 미라이?”
“버스… 애들이 탄 버스가….”
“버스가 왜?”
“추락했대요. 지금 뉴스 속보로 나오고 있어요.”
TV 화면에는 쿠로사키 상사 여직원들을 태운 버스가 운전 부주의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절벽 아래 바다로 추락했다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제6화 끝
“버스가 추락한 지점은 조류가 급해 현지 다이버들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며, 실종자들의 시신 수습은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바닥에 주저앉은 모리시타의 귀에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미라이 쨩! 미라이 쨩!”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시라토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리시타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귀에 갖다 댔다.
“선생님… 저, 늦었어요. 이제 다 끝났어요. 으으으….”
모리시타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미라이 쨩, 포기하면 안 돼.”
“하지만 선생님, 다 죽었다고 발표됐잖아요. 시신도 못 찾는다는데… 분명, 다들 벌써 로봇으로 개조당했을 거예요.”
모리시타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잘 들어. 네 짐작대로라면 그 아이들은 이미 로봇이 됐을지도 몰라. 하지만 희망은 있어.”
“위로 같은 건 관두세요.”
모리시타는 바닥에 웅크린 채 오열했다.
“위로가 아니야. 그 미생물의 수수께끼를 풀면, 반대로 로봇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미생물도 만들 수 있지 않겠어?”
그 말을 듣자 모리시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맞아! 선생님 말씀대로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 수 있다면, 반대도 가능하겠죠. 포기하면 안 되겠네요.”
“그래, 미라이 쨩. 일단 돌아오렴. 같이 대책을 세워보자.”
“네.”
대답은 했지만, 모리시타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역시 애들이 걱정돼서 안 되겠어요. 지금 바로 쿠로사키 연구소로 갈게요.”
“잠깐, 안 돼, 미라이 쨩! 너까지 잡히고 말 거야.”
“괜찮아요, 선생님. 조심할게요.”
“미라이 쨩!”
시라토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휴대폰 전원을 끈 모리시타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리시타가 쿠로사키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다들 어디 있는 거지? 아직 로봇이 안 됐어야 할 텐데….”
모리시타는 멀찍이 떨어진 엄폐물 뒤에서 연구소 정문을 살폈다. 강화복 같은 바디를 걸친 여성형 로봇들이 정문을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로봇들은 일정한 주기로 정문 주변을 순찰했다.
“경비가 너무 삼엄해. 평범한 연구소가 아냐. 정면 돌파는 무리겠어. 뒷문 쪽은 어떨까?”
하지만 뒷문에도 똑같은 여성형 경비 로봇 두 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도 로봇이 지키고 있네. 빈틈이 없어. 어떡하지….”
그때, 트럭 한 대가 뒷문으로 다가왔다.
“좋아, 저 짐칸에 숨어들자.”
모리시타가 막 움직이려던 찰나, 누군가 어깨를 꽉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니 시라토리가 서 있었다.
“선생님! 여긴 어떻게…?”
“쉿, 목소리 낮춰!”
모리시타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걱정돼서 단숨에 달려왔어. 정문은 로봇 천지니까 뒷문으로 올 줄 알았지. 너야말로 지금 뭘 하려던 거야?”
“저 트럭 컨테이너에 숨어서 잠입하려고 했어요. 선생님 때문에 타이밍 놓쳤잖아요.”
“어머, 그건 미안하게 됐네.”
트럭은 뒷문에서 멈춰 섰고, 경비 로봇이 컨테이너를 열어 내부를 점검했다. 안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가 있었고, ‘특수 수리실행’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경비 로봇은 상자의 결속 벨트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내용물은 모리시타 일행의 위치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 형태의 물건인 듯했다.
갑자기 경비 로봇이 경고음을 내뱉었다.
“생명 반응 확인!”
로봇이 상자 안으로 손을 뻗자, 쥐 한 마리가 튀어나와 부지 안으로 도망쳤다.
“소동물 부지 내 침입. 제거합니다.”
그러자 다른 경비 로봇이 양눈에서 빔을 발사했고, 쥐는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어버렸다.
“점검 의뢰 로봇 확인. 생명 반응 없음.”
이후 트럭은 부지 안쪽으로 사라졌다.
“저 쥐가 네 운명이 됐을지도 모르겠네.”
“윽….”
모리시타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빨리 애들을 구해야 해요. 어디론가 옮겨지면 영영 못 구한다고요.”
“그렇다고 무턱대고 덤비다간 너까지 잡혀. 그럼 누가 그 애들을 구하겠니?”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미라이 쨩 걱정도 일리가 있어. 둘이 같이 들어가 보자.”
“저런 로봇들을 상대로 어떻게 잠입해요?”
“괜찮아. 우선 이것부터 갈아입어.”
시라토리가 건넨 옷은 평범한 정장이었다.
“그냥 옷이잖아요. 왜 갈아입으라는 거예요?”
“쿠로사키 소장한테 면담 신청을 할 건데, 그런 라이더 수트 차림이면 이상하잖아.”
“네?! 쿠로사키를 만난다고요? 그건 너무 무모해요!”
“됐으니까 갈아입어. 네 생각만큼 무모하지 않아. 허락만 해주면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거든.”
“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렇게 쉽게 만나줄까요?”
시라토리에게 무슨 복안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모리시타는 마지못해 라이더 수트를 벗어 던지고 옷을 갈아입었다.
“자, 다 입었어요. 그래서, 대체 어떤 작전으로 면담을 따낼 건데요?”
“사실 나, 쿠로사키 소장이랑 구면이거든.”
“헤에, 대단하네요. 언제 적 이야기인데요?”
“음… 한 8년 전인가?”
“에이! 그렇게 옛날이면 기억도 못 하겠네요.”
“해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야.”
“그건 그렇지만….”
모리시타의 불안을 뒤로한 채, 시라토리는 성큼성큼 뒷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앗, 선생님! 같이 가요!”
당연하게도 시라토리는 뒷문 경비 로봇에게 제지당했다.
“실례지만, 용건이 무엇입니까?”
“개업의 시라토리 유카라고 합니다. 쿠로사키 소장님을 뵙고 싶어서요.”
“소장님 면담입니까?”
경비 로봇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다시 시라토리를 향했다.
“예약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소장님 면담 예정이 없습니다.”
“네, 약속은 안 했어요. 마침 근처를 지나던 길이라 오랜만에 얼굴이나 뵐까 해서요.”
“소장님께 확인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 로봇에게서 호출음이 들렸다.
“소장님, 경비 로봇 R0C2입니다. 지금 뒷문에 시라토리라는 여성이 소장님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모리시타의 예상대로였다.
“소장님께서는 귀하의 성함을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잠깐만요! 쿠로사키 씨랑 직접 통화하게 해주세요.”
“소장님, 시라토리 씨가 직접 통화하고 싶어 합니다.”
경비 로봇은 가슴에서 수화기를 꺼내 시라토리에게 건넸다.
“여보세요? 시라토리 유카입니다. 8년 전에 신세 좀 졌었죠. 성이 바뀌기도 했고 워낙 옛날 일이라 기억 못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네, 맞아요. 저예요. 이제 기억나세요? 근처에 왔다가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요.”
시라토리는 수화기를 로봇에게 돌려주며 모리시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실례했습니다. 시라토리 씨, 들어가십시오. 동행분의 성함도 말씀해 주십시오.”
“간호사 미즈노입니다.”
“확인되었습니다. 소장실 위치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니까 됐어요.”
시라토리는 경비 로봇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모리시타는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도대체 선생님이랑 쿠로사키 소장이랑 무슨 관계예요?”
“말했잖아. 옛날 지인이라고.”
“그건 그렇지만….”
“사키 쨩이랑 같이 이 근처에 살았었거든.”
“헤에, 그랬구나. 성이 바뀌었다고 하셨는데, 결혼하셨던 거예요? 전 당연히 미혼인 줄 알았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좀 있어. 그보다 빨리 애들부터 찾자. 자, 어디부터 뒤져볼까?”
“선생님, 건물 내부 다 아시는 거 아니었어요?”
“알 리가 있겠니.”
“아까는 안다면서요!”
“바보야, 위치를 다 안다고 하면 길 잃은 척을 못 하잖아. 좋아, 지하부터 간다.”
“참 나… 누가 더 무모한 건지. 앗, 선생님, 같이 가요!”
계단을 단숨에 내려가는 시라토리를 허겁지겁 따라갔다. 지하 1층을 헤매다 보니 ‘정비실’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 수상한데.”
시라토리가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잠겨 있었다. 문 옆에는 숫자 패드가 달린 터치패널이 있었다.
“4자리 숫자네. 이건 어떨까?”
시라토리가 키를 몇 번 두드리자 잠금이 해제됐다.
“열렸다.”
“대박. 선생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쿠로사키(9639)니까 9639를 눌러봤지.”
“그걸로 열린다고요?”
안으로 들어가니 사방이 캄캄했다. 모리시타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모리시타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으그극… 윽….”
수많은 알몸의 여성들이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녀들은 바닥에 그려진 격자 칸 안에 한 명씩 들어가 서 있었다.
모두 모리시타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으으… 어떻게 이런 일이….”
그중에서 낯익은 얼굴, 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성을 발견했다. 야마카와 메구미였다. 모리시타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메구미! 메구미! 제발 대답 좀 해봐!”
“네. 저는 메카니컬 레이디 MEGUMI입니다. 어떤 요청에도 응답하겠습니다. 고객님, 어떤 서비스를 원하십니까?”
야마카와는 억양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으… 메구미가 로봇이 됐어….”
모리시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미라이 쨩, 정신 차려! 쿠로사키 연구소의 악행을 폭로해야 할 거 아냐.”
시라토리가 다그치지 않았다면 모리시타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맞아요… 내가 이 사실을 알려서 애들을 구해야 해.”
모리시타는 눈물을 닦고 기운을 내어 일어섰다.
“난 쿠로사키 소장한테 가서 시간을 벌게. 그동안 미라이 쨩은 이걸로 갈아입고 증거를 수집해.”
시라토리는 가방에서 온통 검은색인 전신 타이즈 형태의 스파이 수트를 꺼냈다.
“선생님, 이런 옷은 또 어디서 났어요?”
“내 친구 중에 스파이 놀이 좋아하는 애가 있거든. 야간 투시경이랑 적외선 카메라두 있어. 빨리 갈아입어.”
신축성 있게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이라 확실히 움직이기는 편해 보였다. 머리를 가리는 마스크와 장갑도 세트였다.
모리시타가 옷을 벗고 스파이 수트를 입으려 하자 시라토리가 제지했다.
“속옷도 다 벗어. 몸에 밀착시켜야 하니까.”
“네?! 발가벗는 건 부끄러운데….”
“무슨 소리야, 여자끼리. 시간 없어, 빨리!”
반박하고 싶었지만 말다툼할 시간이 없다는 건 사실이었기에, 모리시타는 마지못해 속옷까지 전부 벗어 던졌다.
그때 복도에서 시라토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라토리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아까 그 경비 로봇의 목소리였다.
“망했다, 경비 로봇이야. 내가 어떻게든 따돌릴 테니까 미라이 쨩은 여기 숨어 있어.”
“앗, 잠깐만요, 선생님! 제 옷은요!”
“금방 올게, 기다려!”
시라토리는 알몸인 모리시타를 남겨둔 채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모리시타는 문에 귀를 대고 밖의 대화에 집중했다.
“로봇 씨~ 나 여기 있어요!”
시라토리의 목소리에 경비 로봇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라토리 선생님, 이곳은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미안해요. 내가 길치라서 엉뚱한 데로 들어왔나 봐요.”
“삐빅. 길치. 의미… 방향 감각이 둔하여 길을 잘 찾지 못함. 이해했습니다. 그럼 제가 소장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어? 아, 그래요. 부탁할게요.”
시라토리가 너무 쉽게 따라나서자 모리시타는 당황했다.
“잠깐, 선생님! 내 옷 돌려주고 가야죠!”
하지만 시라토리는 미련 없이 경비 로봇을 따라가 버렸다.
모리시타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옷을 뺏어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실내 온도는 알몸이어도 춥지 않았지만,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상태라 마음이 영 불안했다.
“누가 오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문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대화 소리는 띄엄띄엄 들렸지만 ‘정비실’이라는 단어는 확실히 들렸다.
“망했다, 이쪽으로 오나 봐!”
방 안을 둘러봐도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문에 귀를 대니 목소리가 아까보다 선명해졌다.
“후지와라, 아카가와 씨가 갑자기 부르다니 무슨 일이지?”
“뭐야, 사사키. 못 들었어? 아직 테스트 안 끝난 로봇이 있다잖아.”
“이상하네. 우리 분량은 다 끝냈을 텐데. 아카가와 씨, 자기가 까먹은 거 우리한테 떠넘긴 거 아냐? 그 양반은 안 온대?”
“볼일 있어서 늦는대.”
목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알몸을 숨기려면 알몸들 사이로…!”
모리시타는 일렬로 늘어선 옛 동료들 맨 끝에 비어 있는 칸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 안에 들어가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었다.
모리시타가 자리를 잡자마자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들어왔다.
“어이, 사사키. 문 잠금 안 돼 있는데?”
“아, 조명도 켜져 있잖아.”
“아카가와 씨한테 걸렸으면 소리 지르고 난리 났겠네. 자, 꼰대 오기 전에 얼른 끝내자고.”
후지와라가 보드에 끼워진 전표를 확인했다.
“어디 보자, 제조 번호 ML20이라는데. 어디 있지?”
사사키와 후지와라는 칸마다 적힌 번호를 하나하나 확인해 나갔다.
“오지 마… 이쪽으로 오지 마….”
모리시타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필사적인 바람에도 불구하고, 두 남자는 서서히 모리시타에게 다가왔다.
“여기다. ML20이 이거네.”
사사키와 후지와라가 가리킨 것은 바로 모리시타였다.
“말도 안 돼! 왜 하필 나야?!”
모리시타는 도망칠까 생각했지만, 어렵게 잠입한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일단 로봇인 척하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디 보자, 얘 이름이 뭐지? 어라? 전표가 비어 있네.”
후지와라는 전표를 넘겨봤지만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카가와 씨, 또 깜빡했구만. 어쩔 수 없지.”
“이 로봇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것도 그렇네.”
후지와라가 모리시타에게 물었다.
“야, 들리냐? 네 이름 대봐.”
모리시타는 각오를 다졌다. 로봇인 척, 최대한 억양을 죽이고 대답했다.
“저는 메카니컬 레이디 MIKI입니다.”
“좋아, MIKI. 지금부터 테스트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외관 검사 시작. 우선 한 걸음 앞으로.”
모리시타는 명령대로 한 걸음 나갔다. 사사키와 후지와라는 모리시타의 몸을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봤다.
알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 모리시타는 수치심에 죽을 맛이었다. 문득 어릴 적 맹장 수술 자국이 떠올라 들키지 않기를 기도했다.
“육안 검사 통과. 피부 표면 이상 없음.”
모리시타는 안도했다. 다행히 못 보고 지나친 모양이다. 하지만 검사는 계속됐다.
“다음은 촉진 검사.”
사사키와 후지와라는 모리시타의 팔, 가슴, 배, 등, 허벅지 등 여기저기를 주무르고 꼬집으며 감촉을 확인했다.
“이거 피부가 보들보들한 게 끝내주는데. 아카가와 씨 전용 창부 로봇인가?”
장난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모리시타는 제멋대로 몸을 만져대는 불쾌감을 꾹 참아냈다.
“다음은 보행 테스트. MIKI, 전진. 그리고 턴. 우, 좌, 좌, 우.”
모리시타는 의심받지 않도록 명령에 따라 걷고 좌우로 회전했다.
“MIKI, 제자리로. 흠, 보행 문제없음. 자, 이제 드디어 성감 반응 검사다.”
“기다렸다고.”
“난 오른쪽. 사사키, 네가 왼쪽 맡아.”
성감 반응이라는 말에 모리시타는 겁이 났지만, 두 남자는 양쪽에서 손을 뻗어 모리시타의 유두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유두가 유린당하는 감각에 신음이 터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하지만 애무를 받은 유두가 예민하게 꼿꼿이 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두 남자는 모리시타의 유두를 빤히 관찰했다.
“어떡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불안해하는 모리시타와 달리 두 남자는 덤덤했다.
“유두 반응 정상.”
창부 로봇은 인간이랑 똑같이 반응하는구나, 하며 납득하더니 이번엔 다리를 벌리라고 명령했다.
다리를 벌리자 후지와라가 모리시타 앞에 주저앉아 비순 사이에 기구를 무심하게 삽입했다. 비명이 터질 뻔했지만 이 악물고 견뎠다.
‘난 로봇이야… 애들을 구하려면 참아야 해….’
후지와라는 모리시타의 가랑이에 꽂힌 기구의 계기판을 읽었다.
“내부 온도 정상. 이제 질 반응만 확인하면 끝이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는 생각도 잠시, 이 시험이 최대 난관이었다. 후지와라가 비순 사이의 기구를 넣었다 빼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 그렇게 움직이면… 소리 나올 것 같아… 몸이 반응해버려… 으으윽… 하지만 참아야 해. 지금까지 고생한 게 다 물거품이 된다고….”
후지와라는 기구를 왕복시켰고, 사사키는 가랑이 사이의 변화를 뚫어지게 지켜봤다.
“기구를 넣었다 뺄 때마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파르르 떨리네. 진짜 리얼하다.”
“응, 잘 만들었어.”
모리시타는 내부가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질척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윤활액 분비 정상. 근데 얘, 너무 축축한데? 좀 과한 거 아냐? 나중에 좀 조이게 조정하는 게 좋겠어.”
모리시타는 두 놈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 죽을 만큼 수치스러운 테스트가 드디어 끝나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남자는 모리시타 앞에 서서 차렷 자세를 명령했다.
“자, 이제 내부 테스트다. 복부 해치 개방.”
모리시타는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건 진짜 로봇도 아닌데 가능할 리가 없었다.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달려 나가려 했다.
그런데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몸이 안 움직이지? 빨리 도망쳐야 로봇이 아니라는 걸 안 들킬 텐데!”
아무리 애를 써도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모리시타의 몸은 부동자세 그대로였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 남자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제 배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배가 열리지 않는 걸 수상하게 여기기 전에 어떻게든 도망치려 발버둥 쳤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 어떤 문장이 떠올랐다.
‘복부 해치 개방.’
모리시타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어? 이 상황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자 복부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고개조차 까닥할 수 없었다.
“음… 다른 로봇들이랑은 좀 다르네. 역시 이건 특별 사양이야.”
“응. 장치들이 아주 콤팩트하게 들어가 있어. 이 배치 설계는 천재적인데.”
모리시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왜 내 배를 보고 장치니 설계니 하는 거야? 설마 내 몸이…!”
후지와라와 사사키가 컴퓨터를 가져와 능숙하게 MIKI의 내부와 케이블을 연결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 사사키. 동력로 출력 확인부터 시작하자.”
“좋아, 후지와라.”
“싫어어어어!”
MIKI는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것은 머릿속에서만 울릴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제7화 끝
내부 테스트를 마친 후, MIKI의 바디에 흥미를 느낀 사사키와 후지와라는 지시받지도 않은 분해 작업을 시작했다.
MIKI의 사지를 떼어내고, 몸통만 남은 MIKI를 로봇 고정용 링 프레임에 고정했다.
링 프레임 안쪽에는 4개의 로드가 뻗어 나와 로봇의 어깨와 허벅지를 고정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양 어깨는 2시와 10시 방향으로, 양 허벅지는 나란히 6시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그러고 나서 프레임을 수직으로 세워 작업대에 고정했다.
“난 진작에 로봇이 되어 있었던 거야…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제멋대로 몸을 유린당하는 동안 MIKI는 충격으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사사키와 후지와라는 복부 해치에 연결된 컴퓨터로 MIKI의 내부를 조사하며 세련된 설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노멀 타입 동력로로 이 정도 출력을 내다니.”
“이 로봇 설계한 사람, 절대 아카가와 씨는 아닐 거야.”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두 사람은 MIKI의 내부 구조를 파헤치는 데 정신이 팔려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어쨌다고?”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카가와가 서 있었다.
“내부 기기 동작 확인이나 하랬지, 누가 분해 점검까지 하랬어?”
“죄송합니다. 이 로봇이 너무 대단해서 그만….”
“너희 같은 놈들이 건드릴 수준이 아냐!”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조립할게요.”
아카가와에게 호통을 듣고 후지와라는 팔을, 사사키는 다리를 집어 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아카가와가 두 사람의 작업을 제지했다.
“잠깐만. 그 팔이랑 다리 좀 보여줘.”
또 혼날까 봐 사사키와 후지와라는 조심스럽게 팔다리를 내밀었다.
아카가와는 그것들을 받아 조인트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조인트의 홈을 중심으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미묘하게 색이 변하고 있었다.
“허… 이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재질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건가?”
“그쵸, 대단하죠? 바깥쪽의 유연한 재질이랑 안쪽의 단단한 재질을 이음새 없이 융합해 놨어요.”
아카가와는 MIKI의 복부와 연결된 컴퓨터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봤다.
“동력로 출력이 평소에도 30%나 높아. 순간 출력은 두 배까지 낼 수 있다고?”
“네. 아무래도 비선형 제어를 하는 것 같아요. 이 출력에 복합 구조재라면 가드 로이드랑도 맞짱 뜰 수 있겠는데요.”
아카가와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MIKI는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불쾌한 감각을 느꼈다.
“어라, 이건?”
“왜 그러세요?”
“아, 아니… 제어 시스템도 꽤 공을 들였군.”
“그렇죠? 아카가와 씨, 대체 누가 이 로봇을 설계한 거예요?”
“사실 나도 듣지 못했어.”
“그건 내가 설명해주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아카가와가 고개를 돌리니 쿠로사키 소장이 서 있었다. 소장 뒤에는 누군가 숨어 있는 듯했다.
“소장님! 오셨습니까? 어,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시죠?”
“소개하지. MIKI를 설계하고 제조한 시라토리 유카 군이다.”
시라토리는 쿠로사키 뒤에서 나타나 꾸벅 인사를 건넸다.
후지와라와 사사키는 설계자가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와… 이런 젊은 여자분이 설계했다니. 죄송합니다, 저희가 멋대로 MIKI를 분해해버려서.”
“괜찮아요. 내 로봇을 보고 어땠는지 들려줘요.”
“대단하다는 말밖엔 안 나오네요. 공부 많이 됐습니다.”
MIKI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믿었던 시라토리에게 배신당했다는 충격으로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시라토리 선생님이 날 로봇으로 개조한 거야?’
하지만 그 자리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아카가와였다. 아카가와는 입을 뻐금거리며 시라토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너… 살아 있었던 거냐?”
“어머, 오랜만에 만났는데 ‘살아 있었냐’니, 너무 무례한 거 아냐? 고우 군.”
“고우 군? 두 분 아는 사이예요?”
후지와라와 사사키는 시라토리와 아카가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 자식들이 왜 남의 얼굴을 빤히 봐. 이 녀석은 옛날에 여기서 나랑 같이 연구했던 적이 있어.”
“에에! 우리 연구소 직원이었다고요? 어쩐지 MIKI의 기본 베이스가 우리 기술이랑 비슷하다 했어요. 근데 언제쯤 계셨던 거예요? 저희는 시라토리 씨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겠지. 그 사건 이후로 여기 얼굴을 안 비췄으니까.”
“그 사건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8년 전 연구소에서 일어난 지반 침하 사고 말이다.”
“8년 전에 그런 사고가 있었어요? 근데 시라토리 씨는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그래. 이 녀석 외모는 그때랑 전혀 변하지 않았어.”
“동안이라는 소리 자주 들어. 고우 군은 팍 늙어버렸네. 이제 오타쿠는 졸업했어?”
“푸흡! 아카가와 씨, 오타쿠였어요?”
“이, 이 자식들이! 검사 끝났으면 얼른 니들 자리로 꺼져!”
“네, 네, 알겠습니다. 고우 군… 아니, 아카가와 씨.”
후지와라와 사사키는 낄낄거리며 방을 나갔다.
“어머나, 불쌍해라. 고우 군, 그렇게 화낼 것까지 없잖아?”
“날 고우라고 부르지 마!”
“어머, 처음 만났을 때는 자기가 먼저 고우라고 불러달라고 했으면서.”
“옛날이야기다.”
“흐응, 지금은 어엿한 주임 연구원이라 이거지? 상사 체면 때문에 애들을 쫓아낸 건가?”
“여기서부터는 저놈들이 들어선 안 될 이야기니까 보낸 거다.”
“과연, 알겠어.”
“설마 살아 있을 줄이야. 난 당연히 그 사고 때 매몰된 줄 알았지.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죽은 줄 알았던 여자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 당신들이 끝까지 쫓아올 거 아냐. 1년 정도 은신처를 옮겨 다니며 추적이 끊긴 걸 확인한 뒤에, 쿠로사키 상사 본사 빌딩에 진료소를 차렸지.”
“이름도 바꾼 모양이군. 시라토리 유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땐 누군지 몰랐어. 목소리를 듣고서야 너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지.”
“그나저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쿠로사키 상사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의외로 쿠로사키 상사랑 쿠로사키 연구소는 관계가 희박하거든. 지금까지는 말이야.”
“그렇군. 쿠로사키 상사와 쿠로사키 연구소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니까 다급해졌다는 건가.”
“난 지금의 생활을 잃고 싶지 않아.”
“그래서 쿠로사키 연에 기술을 제공하겠다는 거군.”
“그냥 돌아와 봤자 제품 소재나 실험 재료로 쓰이고 말 거 아냐. 그래서 지금까지 독자적으로 나노머신을 연구해온 거야.”
“좋아.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카가와 군, 자네는 MIKI를 어떻게 평가하나?”
“객관적으로 봐서, 이 녀석은 확실히 우리 현재 모델보다 수준이 높습니다. 하지만 소장님이 제 연구를 중단시키지만 않았어도 저 역시 이 정도 수준엔 도달했을 겁니다.”
“자네 상상은 묻지 않았네. 사실로서 MIKI가 우리 모델보다 우수하다는 거군.”
“뭐… 그렇습니다.”
아카가와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어때요? 이제 제 실력을 인정해 주시겠어요?”
“이 기술이 진짜라면, 자네 제안은 고려해볼 가치가 있군.”
“쿠로사키 연구소에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제 자유를 보장받는 것, 나쁜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거 놀라운데. 8년 전엔 천진난만하기만 했던 여자가 이제 소장을 상대로 거래를 다 하고.”
“나도 8년 동안 살아남는 법을 배웠거든.”
“그렇겠지. 하지만 내 눈을 속일 정도는 아닌 모양인데. 이거, 미완성이지?”
아카가와의 말에 시라토리의 눈썹이 움찔했다.
“아카가와 군, 그게 무슨 소린가?”
“이 녀석, 아직 자아가 남아 있습니다.”
“역시 고우 군, 예리하네.”
아카가와가 MIKI와 연결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자, 갑자기 MIKI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으윽! 선생님, 절 속이신 거군요!”
시라토리는 프레임에 고정된 MIKI에게 다가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미안해, 미라이 쨩. 다른 사람 손에 널 개조하게 두고 싶지 않았어.”
“언제 날 로봇으로 만든 거예요? 드링크제도 안 마셨는데!”
“신체검사 때야. 네 바륨에 나노머신을 섞었지. 고우 군의 나노머신에 방해받기 싫어서 일부러 드링크제를 눈치채게 유도한 거야.”
“세상에… 선생님만은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소량의 나노머신으로 개조할 때는 시간이 걸려. 그동안 뇌에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되거든. 그래서 네 편인 척 연기한 거야. AKIKO처럼 개조 도중에 혹사당하면 생체 뇌가 망가질 수도 있거든.”
“카자마 씨! 카자마 씨는 어떻게 됐어요?!”
“그러고 보니 쿠로사키 씨, AKIKO는 안 보이던데 지금 어디 있죠?”
“자네 말대로 AKIKO는 검사 결과 인격 데이터에 장애가 발생했네. 사회생활을 시키면 이상한 언동으로 의심받을 위험이 있어서 창부 로봇으로 개조하기로 했지. AKIKO를 쿠로사키 상사에 남겨서 향후 로봇 재료 조달을 맡기려 했는데 계획이 틀어졌어.”
“세상에… 그 카자마 씨가 창부가 되다니….”
“어떤 개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보여주실 수 있나요?”
“어이, 이 녀석한테 남은 자아 문제는 어쩔 거야?”
“나도 그 대답부터 듣고 싶군.”
“AKIKO의 개조는 특수 수리실에서 하고 있겠죠? 제 대답도 그 방에 있어요.”
“아까 도착한 나무 상자 속 로봇 말인가?”
“그걸 보낸 게 너였냐?”
“맞아. 그 로봇이 MIKI를 완성할 열쇠야.”
“좋아. 그럼 그 열쇠라는 걸 확인해볼까.”
“고우 군, MIKI 좀 밀어줄래?”
“내가?”
“응. 난 팔다리를 옮겨야 하거든. 연약한 여자한테 무거운 거 시키지 마.”
“네가 어디가 연약하다는 거야?”
아카가와는 투덜거리면서도 MIKI가 고정된 프레임을 밀어 옆방인 특수 수리실로 이동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창부 로봇이 된 AKIKO를 보여주지. 그 뒤에 넌 완벽한 로봇이 되는 거야.”
“싫어! 하지 마! 로봇 따위 되기 싫어!”
MIKI는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수 수리실에서는 AKIKO 역시 사지가 분리된 채 링 프레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열려 있는 복부 해치에서는 수많은 케이블이 늘어져 있었다.
두개골 커버는 벗겨져 있었고, 전자 소자가 섞인 뇌 위로 기계 팔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전자 부품을 장착하고 있었다.
제어 콘솔에는 SIZUKA가 앉아 끊임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인물이 또 있었다. 메구로였다.
가장 먼저 방에 들어온 것은 쿠로사키였다.
“켄토, 여기 있었냐.”
“네. AKIKO가 개조되고 있길래 구경 중이었어요.”
“AKIKO는 인격 데이터에 장애가 생겼다. 이제 사회생활은 무리라 창부 로봇으로 바꾸는 중이지. 개조 도중에 무리시킨 게 원인인 모양이야.”
“카가 부장이나 사메지마 때문에 무리해서 그런가 보네요.”
그때 MIKI를 고정시킨 프레임을 밀며 아카가와가 들어왔다.
“오, 모리시타잖아. 잠깐 못 본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네. 꽤 섹시한 로봇이 됐는걸.”
메구로는 MIKI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아윽! 하지 마, 만지지 마!”
MIKI는 메구로를 노려봤다.
“메구로! 역시 너도 이놈들 한패였구나!”
MIKI의 반응에 메구로는 깜짝 놀랐다.
“너, 아직 자아가 남아 있어?”
“MIKI는 아직 제조 중이거든.”
MIKI의 팔다리를 실은 카트를 밀며 들어온 시라토리가 메구로에게 설명했다.
“시라토리 선생님, 여긴 웬일이세요? 설마 직접 로봇이 되러 오신 건 아니겠죠?”
“아니야. 내가 만든 로봇을 소장님께 팔러 온 거야.”
“선생님이 만든 로봇이라니, MIKI 말이에요? 분명 카토가 로보비탄을 먹였을 텐데.”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막았어. 먼저 내 나노머신을 먹여버렸거든.”
“선생님도 나노머신을 만들 줄 아세요? 쿠로사키 연구소 말고 그런 게 가능하다니 놀랍네요.”
“이 녀석은 예전에 여기서 나랑 공동 연구를 했었어.”
아카가와가 메구로의 의문에 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MIKI를 완성하는 건가요?”
“응. 그러려고 이 방으로 옮겨온 거야. 그나저나 AKIKO 개조는 끝났어?”
SIZUKA가 대답했다.
“AKIKO 개조 완료까지 약 10분 남았습니다.”
MIKI가 개조 중인 AKIKO를 발견했다.
“카… 카자마 씨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창부 로봇용 전자 뇌 부품을 심는 중이다. 쳇, 누구 씨가 이상한 나노머신을 투여하는 바람에 이 녀석이 맛이 가버렸잖아.”
“내가 나노머신 투여한 거, 잘도 알아냈네. 하지만 말해두겠는데, 처음 클리닉에 실려 왔을 때 이미 AKIKO의 생체 뇌는 변조를 일으키고 있었어. 내가 투여한 나노머신으로 겨우 억제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체 뇌 제어가 불안정해지는 건 고우 군 나노머신의 결함이잖아. 8년 전 그 사고도 그 결함 때문이었지?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윽….”
“난 그 결함을 극복했어.”
시라토리는 방구석에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로 다가갔다. MIKI는 그 상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뒷문으로 들어온 트럭에 실려 있던 상자였다.
시라토리가 결속 벨트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완충재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전라의 여성인 듯했다.
시라토리는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 기동 스위치를 눌렀다.
“나오렴.”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미즈노 사키코였다.
“사키 쨩! 사키 쨩까지 로봇으로 만든 거야?!”
“SAKIKO를 로봇으로 만든 건 내가 아니야. 고우 군이지.”
“그럼 이 녀석이 8년 전 그 여고생?”
“맞아. 지하 연구실이 암반으로 막히기 직전에 SAKIKO에게 구멍을 파게 해서 탈출했지. SAKIKO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때부터 계속 함께였어. 이제 떼어놓을 수 없지.”
시라토리는 SAKIKO를 껴안았다.
“그래서 로봇이라는 걸 들키지 않게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SAKIKO의 전자 뇌 시스템을 손봤어.”
“전 신입 사원 때부터 사키 쨩을 봐왔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그렇지? 불안정했던 AKIKO랑은 다르잖아. 그뿐만이 아니야. 다른 로봇에게도 이식할 수 있게 기본 시스템으로 독립시켰지.”
“과연. MIKI를 완벽한 로봇으로 만드는 해답은 그 기본 시스템의 이식이라는 건가.”
“정답이에요, 쿠로사키 씨.”
“그럼 당장 그 기본 시스템을 MIKI에게 인스톨하게.”
“싫어! 하지 마!”
“SAKIKO, 흉부 포트를 사용해서 MIKI에게 기본 시스템을 인스톨해.”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SAKIKO의 양쪽 유두에서 바늘 같은 단자가 튀어나왔다. SAKIKO는 그대로 MIKI에게 다가갔다.
“사키 쨩, 오지 마!”
SAKIKO는 MIKI 앞에 서서 자신의 유두를 MIKI의 유두에 밀착시켰다.
MIKI는 프레임에 고정되어 자유롭지 못한 몸을 비틀며 SAKIKO의 유두를 피하려 애썼다.
“MIKI의 흉부 단자 위치가 불안정합니다. 위치를 고정하겠습니다.”
SAKIKO는 MIKI의 양쪽 유두를 손가락 끝으로 잡아 휙 잡아당겼다.
“윽…!”
그리고 그대로 바늘 모양의 단자를 MIKI의 유두 속으로 박아 넣었다.
“히익!”
MIKI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혔다.
“기본 시스템 인스톨을 시작합니다.”
“그만해!”
MIKI는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기억과 인격이 덮어씌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냐… 난 로봇이 아냐. 인간이라고!’
MIKI는 자신을 유지하려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노력은 허사였고, 자신이 로봇이 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로봇이 되어버려… 나 자신을 지킬 수 없어.’
포기하려던 찰나, MIKI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지킬 수 없다면 공격하면 돼. 나도 로봇이라면 SAKIKO처럼 데이터를 보낼 수 있을 거야!’
갑자기 SAKIKO가 노이즈 섞인 소리를 냈다.
“지지직… 삐빅….”
“왜 그래, SAKIKO!”
“네… 지직… 유카 님… 삐빅… MIKI로부터 방해 신호가 수신되었습니다.”
“뭐라고?”
아카가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꽤 독한 여자군. 아키라 이상일지도 몰라.”
아키라라는 이름에 MIKI가 반응했다.
“역시… 당신들, 시즈카 씨랑 아키라를 로봇으로 만든 거구나!”
“SIZUKA는 수월하게 로봇이 됐지만, AKIRA는 꽤 애먹었지. 너처럼 말이야. 하지만 결국은 완벽한 로봇이 됐어. 네 그 발악도 헛수고일 거다.”
“헛수고인지 아닌지는 해봐야 아는 거지!”
“어이, 시라토리 유카 씨. 저렇게 나오는데 어쩔 거야?”
“SAKIKO, 힘내! 전송 출력을 높여!”
“그렇게는 안 될걸! 내 동력로 출력이 더 높으니까!”
SAKIKO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지지직, 흉부 포트로부터 허용 용량을 초과하는 신호를 수신했습니다. 전자 뇌의 일부가, 삐빅, 기능 부전에 빠졌습니다. 삐이이-.”
“젠장, 당했네.”
“삐이이-. 저는 미즈노 사키코라고 합니다. 오늘은 고등학교 졸업 전에 사회 견학을 위해 쿠로사키 연구소에 왔습니다.”
“어이, SAKIKO가 이상해졌잖아!”
“망했다, 메모리 할당이 꼬였어. SAKIKO, 전자 뇌 프로텍트를 최고 레벨로 설정해!”
“지직. 알겠습니다. 전자 뇌 데이터 보호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고전하는 모양이군. 옛정을 생각해서 SIZUKA를 빌려줄까?”
“쿠로사키 연구소에 빚지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상관없지만, 한 시간 내로 MIKI가 완성되지 않으면 자네 기술은 미완성으로 판단하겠네. 이번 거래는 백지화되는 걸로 알게.”
“윽… 어쩔 수 없네요. 그럼 SIZUKA를….”
그때 SIZUKA의 목소리가 들렸다.
“AKIKO, 개조 완료되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시라토리가 쿠로사키에게 제안했다.
“쿠로사키 씨, 제안 하나 할게요. MIKI를 써서 AKIKO를 지금 테스트해보는 건 어때요? 제 도움과 AKIKO의 테스트로 빚 없는 걸로 해주세요.”
“우리는 지금 테스트 안 해도 상관없네. AKIKO 사용은 허락하겠지만, 이건 우리가 자네에게 베푸는 호의야.”
“그래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삼촌, MIKI 완성을 서두르는 건 그 뒤에 있을 AKIKO 테스트를 서두르기 위해서잖아요. 같이 하면 시간 단축도 되고 좋죠. 빚 없는 걸로 해요.”
“켄토, 왜 안 해도 될 말을 하느냐. 뭐, 좋다. MIKI를 써서 AKIKO 테스트를 하지. SIZUKA, AKIKO를 조립해라.”
“카자마 씨한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거야?!”
MIKI는 AKIKO가 걱정됐지만,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MIKI의 방해 신호를 경계하며 SAKIKO는 현재 시스템 전송보다 자신의 전자 뇌 보호를 우선시하고 있었지만, MIKI에게 빈틈만 보이면 즉시 시스템을 전송할 기세였다. 두 로봇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그사이 AKIKO는 팔다리가 장착되었고, SIZUKA가 기동 버튼을 누르자 천천히 눈을 떴다.
“AKIKO, 창부 모드로 기동합니다.”
AKIKO는 이전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SIZUKA가 AKIKO에게 지시를 내렸다.
“AKIKO. 지금부터 기능 테스트를 시작한다. 저기 있는 MIKI를 손님이라 가정하고 서비스를 시작해.”
“알겠습니다.”
“하지 마! 카자마 씨, 가까이 오지 마!”
“고객님, 이런 서비스는 처음이신가요? 안심하세요. 저는 여성 고객님께도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런 서비스 필요 없어!”
AKIKO는 MIKI의 뒤에 서서 양손을 뻗어 두 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하아아… 안 돼… 제발….”
MIKI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묘한 쾌감을 가슴에서 느꼈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쾌락에 몸을 맡기세요.”
SAKIKO의 바늘 단자에 꿰뚫린 MIKI의 유두를 AKIKO가 비틀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히이익! 그만해!”
“지직, MIKI의 방해 신호 출력이 저하되었습니다.”
“이제 한 고비 남았네. AKIKO, MIKI를 더 기분 좋게 만들어줘.”
시라토리는 링 프레임을 고정시킨 카트의 핸들을 돌렸다. 그러자 MIKI의 허벅지를 고정하고 있던 로드가 링을 따라 움직이며 좌우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AKIKO가 일하기 편하게 해주는 거야.”
오른발 8시, 왼발 4시 방향으로 벌어지자 시라토리는 핸들을 멈췄다. 가랑이가 훤히 드러난 MIKI의 그곳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고객님, 실례하겠습니다.”
AKIKO는 오른손을 가슴에서 떼어 복부를 훑으며 서혜부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AKIKO는 MIKI의 음렬 사이에 손가락 끝을 집어넣어 앞뒤로 문지르며 감촉을 확인했다.
“싫어! 만지지 마!”
“고객님, 이렇게나 느껴주시니 감사합니다.”
AKIKO는 MIKI의 음렬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우윽…!”
윤활액이 넘쳐흘러 뚝뚝 떨어졌다.
“어머, MIKI는 윤활액이 좀 과하네. 조정 미스인가? 아니면 MIKI가 잘 느끼는 체질인가?”
AKIKO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질척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해! 의식을 집중할 수가 없어…!”
“지직. MIKI의 방해 신호 레벨이 허용 범위까지 저하. 삐빅. 기본 시스템 인스톨을 재개합니다.”
“MIKI, 이제 다 끝난 거나 다름없네.”
“윽… 아직이야…!”
MIKI는 동력로 출력을 끌어올렸다.
“끈질기네. AKIKO, 슬슬 MIKI에게 마무리를 지어줘.”
“알겠습니다. 그럼 고객님, 시작합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AKIKO는 왼손 엄지와 검지를 벌려 양쪽 유두를 압박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는 비공 깊숙이 박아 넣고, 엄지는 돌기를 눌렀다. 곧이어 AKIKO의 손가락에 진동이 가해졌다.
“히갸아아아악!”
MIKI의 몸은 링 프레임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격렬하게 요동쳤다. 분출되는 듯한 쾌감이 MIKI를 덮쳤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틈을 타 유두를 통해 기본 시스템이 쏟아져 들어왔다.
MIKI는 쾌감에 몸을 떨며 헛소리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기본 시스템 인스톨이 완료되었습니다… 아윽… 지금부터 생체 뇌 내 프로그램을 덮어씁니다… 싫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으으윽….”
MIKI는 머릿속이 휘저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구아아악!”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카자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자마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 안 돼… 나도 로봇이 되어버려….’
MIKI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MIKI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AKIKO는 쿠로사키의 지시대로 MIKI를 가게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MIKI의 민감한 부위에 한층 더 강한 진동을 주었다.
“아아아아악!”
MIKI는 가장 높은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카자마 씨… 난 당신의 뒤를 쫓아왔어. 당신처럼 되고 싶었어….’
카자마의 손에 이끌려 똑같은 로봇이 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운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MIKI의 의식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MIKI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차 안이었다. 정장을 입고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무언가 다른 기분이 들었지만, 정확히 무엇이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자신은 본래의 자신이 아니라 가상의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본래의 자신은 마스터의 지시에 따르는 존재였다.
오른쪽 옆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시라토리가 앉아 있었다. 시라토리는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운전은 미즈노가 하고 있었고, 조수석에는 메구로가 앉아 있었다.
“미라이 쨩, 정신이 들어?”
시라토리가 묻자 MIKI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지금의 미라이는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 기억나?”
“네. 저는 버스 추락 사고 소식을 듣고 쿠로사키 연구소에 가서, 그곳에서 로봇이 된 여직원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미 로봇으로 개조되어 있었고….”
그때 시라토리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자 모리시타는 말을 멈췄다. 입력이 끝나자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는 버스 추락 사고 소식을 듣고 사고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메구로 군과 합류해 쿠로사키 연구소로 갔고, 여직원들을 모델로 한 로봇들을 발견했습니다. 착란 증세를 보인 저는 여직원들이 로봇이 되었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때 걱정이 되어 찾아오신 시라토리 선생님을 만났고, 상담을 받았습니다.”
“좋아. 그럼 앞으로 네가 할 일은?”
“버스 사고로 죽은 친구들의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그다음은?”
“고인이 된 카자마 씨의 후임으로 과장이 됩니다.”
“네 역할은?”
“소체 확보와 임원 섹스 접대입니다.”
다시 시라토리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입력이 끝나자 다시 대답했다.
“공공사업과 관리 및 상급 직책과의 조율입니다.”
시라토리와 미라이의 대화를 듣던 메구로가 말을 걸었다.
“힘들어 보이네요.”
“응. 생각보다 SAKIKO 복구에 시간이 걸렸어. 덕분에 MIKI 튜닝을 차 안에서 하게 됐네. 그래도 집에 도착하기 전엔 끝날 거야.”
“다행이네요. 선생님 나노머신이 쿠로사키 연구소에서 인정받아서.”
“응. 외부 연구원 자리도 얻었고, 이번에 주문 제작 모델 중에 슈퍼 리얼 모델을 추가하기로 해서 그용 나노머신을 개발하게 됐어. 메구로 군 덕분이야. 보답이라도 해야겠네.”
“그럼 저를 MIKI의 마스터로 등록해 주세요.”
“과연. 회사에서는 메구로 군이 미라이의 부하직원이지만, 퇴근 후에는 로봇 모드로 전환해서 MIKI의 마스터가 되겠다는 거네. 하지만 설계자로서 마스터 권한은 양보 못 해. 서브 마스터로 만족할래?”
“에에? 서브 마스터요?”
“대신 SAKIKO의 서브 마스터 권한도 줄게.”
“그래요? 음… 그럼 괜찮을지도.”
“그럼 우선 SAKIKO부터. SAKIKO, 서브 마스터를 등록해.”
“서브 마스터 등록을 시작합니다.”
“어라? 사키 쨩, 로봇 모드였네요?”
“사키 쨩한테 운전 시킬 때는 항상 로봇 모드로 해둬. 그게 안전하니까.”
“헤에, 그렇구나.”
“됐으니까 빨리 등록이나 해.”
“앗, 맞다. 내가 서브 마스터 메구로다.”
“메구로 님을 서브 마스터로 등록했습니다.”
“자, 다음은 MIKI 등록할게.”
시라토리가 키보드를 두드리자, 싱글벙글 웃던 MIKI가 허공을 응시하며 무표정해졌다.
“로봇 모드로 이행합니다.”
“MIKI, 서브 마스터를 등록해.”
“서브 마스터 등록을 시작합니다.”
“내가 서브 마스터 메구로다.”
“메구로 님을 서브 마스터로 등록했습니다.”
“그 모리시타가 내 로봇이 되다니, 기분 묘하네. 오늘부터 MIKI랑 SAKIKO 둘을 데리고 놀 수 있겠어. 즐거움이 늘었는걸요. 근데 선생님, 저를 선생님 마스터로 등록하는 방법은 없나요?”
“사실 비밀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안 가르쳐줄 거야. 직접 찾아봐. 근데 찾기도 전에 메구로 군이 로봇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네?”
“관둘게요.”
두 사람과 두 대의 로봇을 태운 자동차는 제한 속도를 칼같이 지키며, 동트는 고속도로를 달려 도심을 향해 나아갔다.
제8화 끝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