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man님께서 사이트 부활 축하 선물로 주신 일러스트(『개조 도중』)를 모티브 삼아, 인형 덕후가 짧은 소설 한 편 써봤습니다.
『2002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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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몰라!! 나야, 일이야? 대체 뭐가 더 중요하냐고!!」
밤색 머리칼을 찰랑이며 세련된 제복 차림의 여자가 소리를 빽 질렀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하지만 카오리, 너도 좀처럼 나한테 시간을 안 맞춰 주니까 그렇지.」
점심시간의 오피스 가. 어떻게든 짬을 내서 오랜만에 만난 나가사와 카오리와 고토 켄지는, 식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말다툼부터 시작해 버렸다.
「그치만, 나도 겨우 원하던 비서직을 맡게 된 거란 말이야. 그렇게 쉽게 시간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카오리가 조금은 미안한 기색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 사정도 좀 이해해 달라고. 나도 위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고 있단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일주일에 한 번도 못 만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조금만 더 나한테 맞춰 주면…」
「나도 바쁘다니까! 아, 진짜 됐어!」
카오리는 홱 고개를 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켄지가 나한테 안 맞춰 주는 건 일이 중요해서 그런 거지? 그럼 됐어, 나도 일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녀는 쏘아붙이듯 말을 내뱉었다.
「야, 야…」
「됐어, 당분간 보지 말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카오리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울리며 멀어져 갔다.
「미치겠네 진짜… 저런 면이 귀엽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시간을 좀 두는 게 나으려나…」
혼자 남겨진 켄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오후, 비서실로 돌아온 카오리에게 사장이 말을 걸었다.
「나가사와 양, 오늘 남은 일정은?」
「오늘은 3시부터 신규 진입한 로봇 부품 제작사 사장님인 니나가와 님과 회식 예정입니다.」
「흠, 그 회사 제품은 정밀도가 높아서 업계에서도 유망주로 꼽히지. 부디 실례가 없도록 신경 쓰게.」
「네, 사장님.」
카오리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 후, 카오리의 세심한 응대 덕분에 회식은 원만하게 끝났고, 회사에도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되었다.
「수고했네, 나가사와 양. 이번 성공은 자네 공이 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칭찬을 들은 카오리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하지만 빌딩을 빠져나가는 고급 승용차 안에서 니나가와 겐조와 부하 직원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음, 좋군. 저 아이, 마음에 들었어.」
「하하, 그럼 바로 수배하겠습니다.」
그날 심야, 모든 잡무를 마친 카오리는 홀로 어두운 밤길을 서둘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 오늘도 결국 날을 넘겼네. 그래도 사장님한테 칭찬받았으니까, 내일도 힘내야지!」
카오리는 가슴 높이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때, 카오리의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그림자가 훅 하고 그녀의 입가에 거즈를 들이밀었다.
「읍!! 으읍!!…」
잠시 저항해 보았지만, 마취 기운에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 갔고, 그녀는 몇 명의 남자들에 의해 차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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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니나가와 저택에 커다란 화물이 도착했다.
하인들에게 자기 방까지 옮기게 한 뒤 사람들을 물리고 포장을 뜯는 니나가와.
그러자 그 안에서 초점 없는 눈을 뜬 채, 마치 마네킹처럼 변해버린 카오리가 나타났다.
하이힐을 신고, 회사에서 입던 비서 제복을 그대로 걸친 모습이었다.
미동조차 없는 카오리의 뒷덜미에 기동 키를 꽂고 리모컨을 겨누는 니나가와.
「삐빅-」 하는 기동음과 함께 기계적인 동작으로 일어선 그녀가 억양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안-녕-하-십-니-까-주-인-님-저-는-비-서-로-봇-KAOLI-입-니-다」
니나가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기계적으로 미소 짓는 KAOLI.
「부-디-오-래-토-록-저-를-이-용-해-주-십-시-오」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45도로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니나가와가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후 며칠간, 그녀는 니나가와 저택 전용 비서 로봇으로서 아무 문제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KAOLI는 오후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사무적인 말투로 데이터를 출력한다.
「비-서-로-봇-KAOLI-는-현재-데이터-정리-작업을-실행-중-입-니-다…」
「PM-02:30-부터-MS-물산의-카와사키-켄지-님과-신상품-미팅.
PM-05:10-부터-LK-상회의-야마다-켄지-님과-회식……
카와사키-켄지-님… 야마다-켄지-님… 켄지… 님…
삐빅- 인명-검색-일치… 고토-켄지… 23세-남성……」
오전 일정이 없던 니나가와가 평소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늘 곁을 지키던 KAOLI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침실 밖으로 나가자, KAOLI가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발견했다.
「KAOLI, 어디 가려는 거냐?」
「안-녕-하-십-니-까-주-인-님」
고개만 휙 기계적으로 돌리더니, 다시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러니까, 어디 가냐고 묻고 있잖아.」
「니나가와-저택-부지-밖으로-외출-역으로-향합-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저-는-고토-켄지-님께-사죄-할-필요가-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고토가 대체 누구냐?」
「삐빅- 고토-켄지-23세-남성-혈액형-O형…」
사무적으로 그의 데이터를 읊어댄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왜 네가 고토라는 놈한테 사과를 해야 하냐고!」
「저의-과거-기억을-토대로-고토-켄지-님에-대한-저의-행동-및-언행을-사회적-통념에-비추어-본-결과-저에게-과실이-있다고-추측-되었습-니-다-따라서-저-는-고토-켄지-님께-사죄할-필요가-있다고-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남자한테 사과하러 가겠다고, 나한테 허락도 없이 나가려 했던 거냐…」
「예-주-인-님」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밖을 향해 몸을 홱 돌린다.
「……」
니나가와는 아무 말 없이 그 뒷모습을 향해 리모컨을 겨누었다.
「삐빅-」
짧은 소리와 함께 KAOLI는 걷던 자세 그대로 멈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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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 현재-기체-온도-42도-입-니-다-각-기능-이상-없음」
며칠 후, 제조사로 반품된 KAOLI는 재개조를 거쳐 내구 테스트를 받고 있었다.
「조금 더 버틸 수 있겠는데… 근데 도망치는 게 싫으면 그냥 기억을 삭제하면 되는 거 아냐?」
검사 장치를 조작하며 정비사가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말하는 인형'으로 쓰고 싶다나 봐. 그래서 기억은 그대로 남겨두고 싶대.」
「그럼 행동 제한 프로그램을 덮어씌우든가, '밖으로 나가지 마'라고 명령하면 되잖아. 어쨌든 명령에는 절대복종하는 로봇인데.」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걸 곁에 두고, 아주 미세하게 남은 자아 같은 걸 즐기고 싶다나 뭐라나.」
「참 나, '전문가'들의 취향은 역시 다르구만. 뭐, 평소에 적당히 일거리나 입력해 두면 아무 소리 안 할 테니까.」
「그렇지. 가끔 시간이 남아서 기억 메모리 정리할 때나 좀 떼쓰는 정도겠지.」
「그래서 팔다리 다 떼어내고 잠자리 데우는 '다키마쿠라(안고 자는 베개)'로 개조라니, 참 비싼 베개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든 정비사의 눈앞에는, 팔다리가 뿌리째 뽑혀 달마 같은 꼴이 된 KAOLI가 마치 나무 열매처럼 암(arm)에 매달려 있었다…
그때 KAOLI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삐빅- 현재-기체-온도-53도-입-니-다-허용-온도를-3도-초과-했습-니-다-냉각-기능-가동-합-니-다」
무표정하게 말하는 KAOLI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슬슬 한계인가. 좋아, 테스트 종료. 세척해서 포장해.」
전원이 꺼지자 KAOLI의 몸이 급격히 식어 갔다.
정지하기 직전, 한 남자의 얼굴이 뇌내 가상 디스플레이에 투영되었다.
「……고토-켄지……님……저……는……사과……해야……」
초점 없는 눈을 뜬 채, 인형은 완전히 정지했다.
따르르릉… 찰칵…
『아차~ 또 음성 사서함이네… 야, 카오리. 너 사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이제 그만 화 좀 풀어라, 벌써 한 달째라고.
맞다, 이번에 네가 좋아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쏠 테니까, 응?
그걸로 화해한 셈 치자. 그럼 또 전화할게, 다음엔 좀 받아라.』
찰칵, 뚜- 뚜- 뚜-……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