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공주(人形姫)의 단골이자 기계화 장르에 조예가 깊은 이치다 유타카 씨의 『메탈 리얼리티』입니다.
이 작품은 karma 씨의 「메탈 드림」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어, 시간축의 차이에 따른 싱크로를 즐길 수 있습니다.
나노머신에 의해 서서히 기계화되어 가는 묘사가 정말 일품입니다.
***
제3화
소형 승용차 한 대가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인터체인지에서 이어지는 구도로를 따라가다 최근에 새로 뚫린 넓은 길로 꺾어 들어갔다. 왕복 4차선의 그 길은 황무지 사이를 가로질러 저 멀리까지 뻗어 있었다. 도로 양옆으로는 펜스가 쳐진 빈터가 끝없이 펼쳐졌고, 곳곳에서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차는 그 구역 중 한 곳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서더니, 주변 건물들에 비해 유독 낡아 보이는 조립식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안경을 쓴 아담한 체구의 젊은 여성과 키가 훤칠한 중년 남성이 내렸다.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히가시후지 국제 학원도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즈오카현 히가시후지 사무소 사무관 야마모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노사카 사이버네틱스의 시노사카 유카입니다.”
“쿠로사키 쇼타로입니다.”
사무실 응접실로 안내받은 두 사람에게 야마모토가 입을 뗐다.
“갑작스럽게 불러내서 정말 죄송합니다. 계약 최종 날인 건으로 약간 문제가 생겨서요…….”
“계약은 이미 끝난 거 아닙니까?”
쿠로사키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이 학원도시는 업계 최첨단 기업을 원하고 있습니다. 계약금을 일시불로 입금하셨으니 자금 면에선 문제가 없겠지만, 최종 날인 조건으로 타사에 없는 독보적인 첨단 기술을 보유했는지 심사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심사를 담당하는 사무관으로서 작년부터 이곳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첨단 기술이라…….”
유카가 중얼거렸다.
“네, 현 차원에서는 이곳을 쓰쿠바나 게이한나를 잇는 연구 도시로 키우고 싶어 합니다. 4월에 개교하는 테이토 공과대학 신캠퍼스를 중심으로 여러 첨단 기업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도시를 목표로 하고 있죠.”
“허, 테이토 공대가……. 저도 거기 출신입니다. 이번 4월 신입사원 중에도 공대생이 내정되어 있는데, 신캠퍼스에 못 간다고 아쉬워하더니 여기가 거기였군요.”
쿠로사키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꺼내 놓았다.
“이게 사업 계획서입니다.”
야마모토는 건네받은 서류를 대충 훑어보았다.
“흐음. 신체 장애인용 의지(義肢) 개발이라. 제가 보기엔 타사보다 앞선 기술은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런 기술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됩니까?”
쿠로사키의 질문에 야마모토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기술만 확실하다면 자금은 저리로 융자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처럼 자력으로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분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며칠 전에도 소형 모터용 감속기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을 가진 회사와 계약했습니다. 겉보기엔 그냥 동네 공장 같았지만, 이 분야에선 확실히 톱이라 융자까지 포함해서 계약했죠.”
“감속기, 말입니까?”
“요즘은 모터 안에 아예 내장되어 나와서 잘 모르시겠지만, 로봇 구동 장치에는 필수입니다. 보통 모터는 고회전 저토크죠. 이걸 로봇 팔 등에 필요한 저회전 고토크로 변환해 주는 기어박스가 바로 감속기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저도 로봇 공학을 전공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감속기가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그게, 기존의 유성 기어 개념을 뒤엎는 방식으로 힘을 분산하더군요. 플라스틱 같은 강도의 부품으로도 엄청난 힘을 견딜 수 있어서 소형 경량화에 딱입니다. 야, 샘플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도 샘플을 보여주시면 심사가 빨리 진행될 텐데…….”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검토를…….”
쿠로사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카가 가로막았다.
“됐어요. 지금 바로 보여드리죠.”
유카가 야마모토 앞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잘 보세요.”
유카는 가볍게 눈을 감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표면 위장 해제. 접속 록 해제. 신경 접속 해제.”
순식간에 유카의 왼손에서 온기가 사라지더니 플라스틱 같은 질감으로 변했다. 유카가 굳어버린 왼손을 오른손으로 잡고 비틀자, ‘카칵’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왼손이 손목에서 툭 빠졌다.
“자, 샘플이에요. 이거 없으면 곤란하니까 꼭 돌려주셔야 해요.”
야마모토는 생생한 질감의 왼손을 받아 들고 넋이 나간 듯 쳐다봤다.
“세상에…… 지금까지 의수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겉모습뿐만이 아닙니다. 아직 연구 단계지만, 잔존 신경과 접속하는 기술을 통해 진짜 팔다리처럼 움직이고 느낄 수 있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쿠로사키가 덧붙였다.
“과연, 이게 실용화된다면 몸이 불편한 분들에게는 정말 복음이겠군요. 문제없습니다. 본 계약을 체결하죠. 아주 좋은 걸 봤습니다.”
유카는 야마모토에게 돌려받은 왼손을 다시 손목에 끼워 넣었다.
“신경 접속 개시. 표면 위장 개시.”
유카의 왼손은 다시 따스한 온기를 되찾았고, 손목의 경계선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현 사무소를 나온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타 조성지 안쪽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잡은 쿠로사키가 조수석의 유카에게 말을 걸었다.
“소장…… 아니, 사장님.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경솔한 짓 좀 하지 마세요.”
“어? 뭐가?”
“그 왼손 말입니다. 굳이 그런 자리에서 보여주지 않아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저 야마모토라는 사무관, 입이 굉장히 가벼워 보였다고요. 아까 모터 이야기처럼 분명 다음 면회자한테 오늘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닐 겁니다. 안 그래도 자금 출처 때문에 의심받기 딱 좋은 판국에.”
“하지만…….”
“우리는 눈에 띄면 안 됩니다. 어디에 스파이가 잠입해 있을지 모른다고요. 홍콩에서 겪었던 그 위험한 일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그건 나도 잘 알고…….”
“그 인식이 안일하다는 겁니다. 그 후 전무의 불미스러운 사건도 그렇고, 뒷수습하는 제 입장도 좀 생각해주십시오.”
“그렇게 불만이면 쿠로사키 씨가 사장 하면 되잖아. 난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어떤 자리든 상관없는데.”
“할 수만 있다면 벌써 했겠죠. 제가 사장이 되면 반드시 쿠로사키 상사의 눈에 띕니다. 극비 프로젝트에 리스크를 짊어질 수는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F-6 블록……. 꽤 안쪽이군요. 여긴 것 같습니다. 첸 씨는 벌써 와 있나 보네요.”
주차장에는 공사 트럭들 사이에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고, 쿠로사키는 그 옆에 차를 세웠다.
“시노사카 씨, 쿠로사키 씨. 오랜만입니다.”
첸이라 불린 중국인이 인사를 건넸다.
“첸 씨, 오랜만이야.”
유카가 반갑게 대답했다.
“별거 없으셨죠? 준비는 어떻게 돼가나요?”
쿠로사키가 물었다.
“예정대로입니다. 그쪽은 어땠습니까?”
“심사는 통과했는데, 아무래도 눈길을 좀 끈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리스크는 나중에 따로 검토하죠.”
“그럼 바로 설비 체크부터…….”
쿠로사키의 말에 첸이 제동을 걸었다.
“그 건 말입니다만, 오늘 설비 체크에는 동행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아이린 아가씨.”
첸이 고급 세단의 뒷문을 열자 한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유카보다 주먹 하나 정도 더 큰 키에 미끈하게 빠진 몸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 유카 일행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롱 아이린(龍愛鈴)입니다.”
“반가워요, 시노사카 유카예요. 롱 씨라면 첸강(健剛) 씨의 손녀분……?”
“네. 시노사카 씨는 저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네요. 딱딱한 말투는 치우고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때요? 전 그냥 아이린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좋아. 그럼 아이린, 나도 유카라고 불러줘.”
“아가씨!” “사장님!”
첸과 쿠로사키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지친 듯 헛웃음을 지었다.
유카와 아이린은 또래 여자들답게 순식간에 말을 텄다.
“그럼 아이린은 지금 도쿄에서 대학원 다니는 거야?”
“응, 공학부에서 경영을 배우고 있어. 논문도 다 썼고 이제 졸업만 기다리면 되는데, 좀 특이한 학교지?”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아. 내가 다니던 대학 공학부에도 경영공학과나 정보경영과 같은 게 있었거든. 역시 기술을 모르면 경영도 못 한다는 소리 아닐까?”
“유카는 대단해. 나랑 비슷한 나이에 기술도 다 알고 사장까지 하고 있잖아.”
“무슨 소리야. 아이린은 백룡 그룹을 이어받아야 하잖아. 나보다 경영을 훨씬 더 잘 알아야지.”
“그렇네.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아이린이 화제를 돌렸다.
“우리 친구도 됐는데, 다음에 도쿄 오면 우리 집에 놀러 올래? 할아버지가 신주쿠에 사주신 맨션이 있거든.”
“겨우 2년 유학인데 맨션을 샀다고? 돈 쓰는 법이 좀 이상한 거 아냐? 뭐, 여기 설비도 그렇지만. 돈이 대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 거야?”
“글쎄, 나도 할아버지 돈 씀씀이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의기투합한 두 여자를 보며 쿠로사키와 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린 아가씨는 항상 저렇습니까?”
“네, 뭐……. 오늘은 특히 더 심하네요.”
“우리 사장님도 만만치 않습니다.”
“서로 피곤하군요.”
“정말입니다. 조금만 더 고분고분했으면 편했을 텐데 말이죠.”
“그러게요. 저 LISA 같은 로봇처럼 말입니다…….”
“‘리사’라고 했지? 분명 실종된 전 소장 이름일 거야. 역시 뭔가 있어.”
주차장 뒤편, 아직 정리되지 않은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야오 미나미는 어제 편집부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왜 취재 허가를 안 내주시는 건데요!”
미나미가 자료 뭉치를 편집장 책상 위에 쾅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조사 많이 한 건 인정하마. 하지만 말이야, 이 사건은 전무 구속이랑 연구소장 사임으로 이미 끝난 일이야.”
살집이 좀 있는 중년의 편집장은 담배를 비벼 끄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요!”
“야오. 우리 잡지 이름이 뭐야?”
“주…… 주간 파인더요.”
“그래. 우린 사진 주간지야. 독자들은 자극적인 사진을 원한다고. 홍콩 취재 실패한 시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한테 끝난 거야. 그렇게 정의로운 기자가 되고 싶으면 7층에 자료나 넘겨주든가.”
건물 7층에는 같은 출판사 소속의 딱딱한 시사 잡지 편집부가 있었다.
“하지만 편집장님!”
“끈질기긴. 정 그렇게 가고 싶으면 딱 일주일 주마. 네가 주장하는 그 범죄라는 증거 사진을 찍어와 봐. 스캔들이 될 만한 걸로.”
“아, 감사합니다!”
“단, 네 독단적인 행동에 편집부는 일절 책임 안 진다. 유급 휴가 줄 테니까 마음대로 해봐. 미리 말해두는데, 죽어도 산재 처리 안 되니까 알아서 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표 써놓고 가.”
“네?”
“사표 말이야. 일주일 지나서 안 돌아오면 그만둔 걸로 처리할 거니까. 회사 차원에서 실종 신고 같은 건 절대 안 해줄 거다.”
“그건 너무…….”
미나미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흥, 그 정도 각오도 없어? 그럼 얌전히 시키는 기사나 마감해.”
“아, 알았어요! 할게요!”
미나미는 입술을 꽉 깨물고 사표를 쓰기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퇴직금 받을 계좌 번호 적는 거 잊지 마라!”
등 뒤로 편집장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미나미는 주차장의 네 사람을 향해 렌즈를 맞추고 셔터를 눌렀다. 곧바로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이번 취재를 위해 준비한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해 보니 유카와 쿠로사키의 프로필은 나왔지만, 나머지 두 명은 불명이었다.
“이 사진만 있으면 사전 조사 때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투자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몰라.”
미나미는 회사로 데이터를 전송하려 했지만, 휴대폰은 서비스 지역 이탈 상태였다.
“아직 개발 중인 공단이라 기지국이 없나 보네. 안테나 뜨는 곳까지 이동해야겠어.”
“아카가와 군은 안 옵니까?”
첸이 물었다.
“시간이랑 장소는 다 알려줬는데……. 뭐, 늘 있는 일이니까요.”
쿠로사키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럼 가시죠.”
첸이 펜스 자물쇠를 열고 부지 안쪽 건물로 향하자 쿠로사키, 유카, 아이린이 뒤를 따랐다.
“지금은 보안을 꺼뒀지만, 평소에는 센서로 자동 경비가 돌아갑니다.”
건물은 넓은 부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3층짜리 빌딩이었다. 정면은 통유리로 된 자동문이었고, 안쪽에는 작은 안내 데스크가 있었다. 첸이 품 안에서 ID 카드를 꺼내 문 옆 센서 패널에 갖다 대자 자동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건물 예쁘네.”
“신체 장애인용 장구를 만드는 곳이라 배리어 프리(Barrier-free)에 신경을 좀 썼습니다. 1층은 로비와 응접실, 회의실이고요. 2층은 사무실, 3층이 연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위층으로 갈수록 보안 등급이 높습니다.”
“보안 관리는 어떻게 하죠?”
쿠로사키가 묻자 첸이 답했다.
“컴퓨터로 집중 관리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풀 오픈 상태입니다.”
일행은 첸의 안내를 받으며 층별로 둘러보았다.
“첸 씨, 내가 부탁한 설비가 하나도 없는데?”
“네, 그게 정상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유카가 의아한 듯 물었다.
“방금 보여드린 곳은 대외적으로 그럴싸한 회사처럼 보이기 위한 위장용입니다.”
“과연, 카무플라주(Camouflage)군요.”
쿠로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진짜 목적지로 안내하죠.”
첸은 일행을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 패널에 ID 카드를 대자, 1층부터 3층까지만 있던 터치패널에 지하 1층과 지하 2층 버튼이 나타났다.
“지하 1층에는 병원 응급실 수준의 설비가 갖춰져 있습니다. 믿을 만한 의사를 수소문 중입니다만…….”
첸의 설명을 유카가 끊었다.
“아,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여고 후배 중에 아주 똑똑한 애가 있거든. 이제 겨우 스물하나인데 월반해서 작년에 의대 졸업하고 의사 면허까지 땄어.”
“비밀 유지가 가능할까요?”
“당연하지. 내가 보증해. 내 몸 상담도 해주고 있으니까 걱정 마.”
“사장님,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들었는데요. 왜 그런 중요한 걸 말씀을 안 하십니까?”
쿠로사키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뭐 어때.”
아이린이 거들었다.
“여자 몸 문제는 여자끼리 이야기하는 게 편하잖아요.”
“아이린 아가씨,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극비라고요.”
첸이 엄하게 말했다.
“아가씨도 비밀을 못 지키시겠다면 이 이상 동행하는 건 곤란합니다.”
지하 2층 문이 열리자마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클린룸입니다. 안전을 위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으면 이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네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문이 닫히자, 바닥에서 강력한 바람이 솟구쳐 올랐다.
“꺄악!”
아이린이 펄럭이는 스커트를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세척용 에어 샤워니까.”
유카가 달랬다. 잠시 후 바람이 멈추자 전방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강철로 된 문은 두께가 상당했다. 문 안쪽은 꽤 넓은 방이었고, 온갖 기계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방 중앙에는 ‘ㄷ’자 모양의 테이블이 있었고, 모니터가 여러 대 달린 콘솔이 놓여 있었다.
“모든 기기는 스탠바이 상태입니다. 체크해 보시죠.”
“저기 유카, 이건 뭐야?”
아이린이 방 안의 기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미세 가공용 매니퓰레이터야. 위험하니까 주변 물건들 함부로 만지면 안 돼.”
“그럼 이건?”
아이린은 테이블 앞에 놓인 지름 1m(100cm), 높이 20cm 정도의 원형대 위로 올라갔다.
“그건…….”
유카가 대답하기도 전에 ‘우웅’ 하는 기계음과 함께 천장에서 원통형 투명 캡슐이 내려왔다. 순식간에 갇혀버린 아이린은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며 캡슐 벽을 두드렸지만,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캡슐 윗부분이 빨강, 파랑, 초록 세 가지 색으로 번쩍였다. 이윽고 그 빛들이 섞여 하얀 고리 모양이 되더니 벽면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주차장에 숨어서 건물을 살피던 미나미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때 묻은 청바지에 경품으로 받은 듯한 로고가 박힌 가죽 점퍼를 걸친 청년이 서 있었다.
“에…… 아, 저기…….”
미나미는 허둥지둥 뒷걸음질 치다 무언가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고,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와 노트북을 떨어뜨렸다.
“누님, 혹시 탐정이야? 아~ 그런 눈에 띄는 카메라로는 안 되지. 몰래 찍으려면 이런 걸 써야지…….”
청년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 안에서 작은 단추 같은 걸 꺼냈다.
“이거 봐, 초소형 카메라. 홍콩제인데 성능은 끝내준다고.”
청년은 의기양양하게 떠들었다.
“그리고 그 휴대폰도 꽝이야. 최신 X-CDMA 방식은 아직 전파 터지는 데가 별로 없거든. 이런 데 올 거면 통신 속도는 느려도 구형을 쓰든가, 아니면 비싸더라도 위성 통신 되는 걸 써야지. 난 당연히 위성용이지만.”
미나미는 청년의 넉살 좋은 말투에 조금씩 경계심을 풀었다.
“너도 여기 조사하는 거야? 난 야오 미나미. 주간 파인더 기자야.”
“주간 파인더? 아, 그 홍콩까지 가서 기사 하나 못 건지고 허탕 쳤다는 거기?”
청년이 비죽거리며 웃었다.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홍콩 간 건 내가 아니라고. 그때 홍콩발 비행기 들어오는 공항이란 공항엔 다 기자를 깔아놨었는데…….”
“헤에, 그렇게까지 했어? 근데 상대가 한 수 위였나 보네.”
“분명 누가 공항에서 놓친 게 틀림없어.”
“안타깝지만 틀렸어. 누님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일반 공항 안 쓰고도 출입국 할 수 있는 사람들이거든. 웬만하면 이제 그만두는 게 어때?”
미나미는 청년의 말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럼 난 이만.”
청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펜스에 달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빈집 털기 전 도둑놈처럼 문 주변을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뭐야, 경비 꺼져 있네? 허술하긴.”
청년은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자, 잠깐만!”
건물 안으로 쑥쑥 들어가는 청년을 쫓아 미나미도 부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직 평탄화 작업이 덜 된 마당은 하이힐을 신은 그녀가 걷기에 너무 험했고, 운동화를 신은 청년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미나미가 건물 정문에 도착했을 때 청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입구 앞에 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동문이 열렸다.
“그러고 보니 경비가 꺼져 있다고 했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미나미는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침입했다.
빛의 고리는 경악한 아이린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듯 천천히, 마치 핥듯이 움직였다. 강력한 광선은 얇은 옷을 투과해 그녀의 보디라인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빛의 움직임에 맞춰 유카 앞의 콘솔에는 와이어 프레임으로 된 인체 영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선이었던 영상은 빛이 아이린의 몸을 왕복할 때마다 점점 정교해졌다. 이윽고 사진처럼 생생한 색이 입혀졌고, 디스플레이 속 영상은 캡슐 안 아이린의 움직임을 한 박자 늦게 따라 했다.
“이 정도면 됐나.”
유카가 콘솔을 조작하자 캡슐 안의 빛이 꺼지고 투명 원통이 위로 올라갔다. 아이린은 넋이 나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위험하니까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이건 그냥 스캐너라 다행이지, 훨씬 위험한 장치도 많단 말이야.”
“미, 미안해…….”
“아이린 아가씨. 아무리 롱 어르신이 전부 보여주라고 하셨어도,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시면 곤란합니다. 계속 이러시면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나저나 이 스캐너 진짜 대단하네.”
유카가 데이터를 디스크에 저장하며 감탄했다.
“이 입체 스캐너는 할리우드에서 배우들 CG 만들려고 개발한 겁니다. 전신을 한 번에 스캔해서 인체 폴리곤 데이터를 순식간에 뽑아내죠. 일본에도 아직 몇 대 없습니다.”
첸이 설명했다.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는데.”
“아뇨, 필요한 건 무조건 최고급으로 준비하라는 게 어르신의 지시였습니다.”
“역시 롱 씨는 좀 이상해. 자, 아이린. 이게 네 몸 스캔한 데이터야. 기념으로 줄게.”
“어…… 고마워.”
아이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유카에게서 디스크를 받았다.
“첸 씨, 부탁했던 그 탱크도 준비됐나요?”
“네, 강화 티타늄 내벽을 다이아몬드 박막으로 코팅한 그거 말씀이죠?”
첸이 가리킨 곳에는 방금 본 스캐너와 비슷한 크기의 은색 탱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탱크 정면에는 투명한 원형 창이 달린 육중한 해치가 있었고, 위아래로 파이프와 케이블이 복잡하게 얽혀 다른 기계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설계도대로 만들긴 했는데,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유카는 그렇게 말하고 방 안의 다른 기계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정말 보안 시스템이 꺼져 있네. 감시 카메라 녹화도 안 되고 있고.”
경비실에 잠입한 미나미는 벽면의 모니터 패널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쓸 만한 거 없나……. 아, 이거면 되겠어.”
책상 서랍 안에는 사진이 붙은 ID 카드 뭉치가 있었다. 미나미는 그중 사진이 없는 빈 카드 하나를 골라 경비실 컴퓨터에 꽂았다.
“카드 활성화하고……. 권한은 무제한으로. 진짜 보안 의식 빵점이네.”
미나미는 급조한 ID 카드를 정장 주머니에 넣고 경비실을 나왔다. 남겨진 카드 뭉치 속에 입구에서 만난 청년의 사진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체크 끝!”
유카가 작업을 멈추며 말했다.
“이제 이 탱크에 나노머신 세팅하고 증식시키면 준비 완료야.”
유카가 탱크로 다가가 해치를 열고 왼손을 집어넣었다.
“저기, 나노머신이 뭐야?”
아이린이 묻자 유카가 소리쳤다.
“안 돼! 떨어져! 위험하니까!”
깜짝 놀란 아이린이 뒷걸음질 쳤다.
“지금부터 한동안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절대 가까이 오면 안 돼.”
유카는 진지한 표정으로 탱크를 마주했다. 팔꿈치까지 탱크 안에 넣은 왼손으로 무언가를 조작하는 듯했다. 유카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지더니 중얼거림이 시작됐다.
“……변환…… 전환…… 방출…….”
“유, 유카?”
“사장님…….”
아이린과 쿠로사키가 불안한 듯 불렀다.
“정신…… 산만하게…… 하지 마…… 중요한…… 대목이니까…….”
유카는 무표정한 상태로 끊어질 듯 말 듯 목소리를 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죠.”
쿠로사키가 말하자 아이린도 입을 다물었다.
30분 정도 흐른 뒤, 유카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폐쇄…… 복원…… 휴우, 됐다. 원재료인 금속이랑 반도체는 충분하네. 이제 전력만 공급하면……. 이제 와도 돼.”
유카는 탱크에서 왼손을 빼고 해치를 닫았다. 전원을 올리자 ‘우우웅’ 하는 묵직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해치 창 너머로 탱크 안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한 거야?”
아이린이 묻자 유카가 되물었다.
“글쎄……. 아이린은 어디까지 들었어?”
“할아버지 뒤를 이으려면 꼭 필요하다는 것밖에는…….”
“그럼 우리가 뭘 하려는지도 몰라?”
“응, 전혀.”
“그럼 이야기가 길어지겠네. 여기 춥고 의자도 없으니까 위층 응접실로 가자.”
“체크는 다 된 겁니까?”
첸이 확인했다.
“응, 충분해.”
“그럼 올라가시죠.”
첸이 카드를 대자 이중문의 안쪽 문이 열렸다. 방을 나갈 때는 들어올 때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에어 샤워가 진행됐다.
“왜 이렇게까지 엄격하게 하는 거야?”
“프로그램되지 않은 자유 나노머신이 밖으로 나가는 걸 막으려는 거야. 미립자 센서 수치가 한계치 이하로 안 떨어지면 문이 안 열리거든.”
“아까부터 말한 그 나노머신이라는 게 대체 뭔데?”
“분자 크기의 공작 기계야. 꽃가루 알레르기 일으키는 삼나무 꽃가루 정도 크기라고 보면 돼.”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어. 기초 이론만 있고 아직 실용화는 안 됐다고 하던데. 연구하려면 대규모 격리 설비가…… 아, 이게 그거구나?”
“정답! 역시 공대생이네.”
“근데 그게 우리 할아버지랑 무슨 상관이야?”
“작년 여름 일인데…… 아, 문 열린다. 자세한 건 위에서 하자.”
네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상해. 아무리 뒤져도 수상한 게 없다니. 분명 뭔가가 있을 텐데.”
미나미는 1층부터 3층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허탕만 치고 다시 로비로 내려왔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입구에서 본 그 남자도 안 보이고.”
투덜거리며 주위를 살피는데,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미나미는 급히 안내 데스크 뒤로 몸을 숨기고 훔쳐봤다. 엘리베이터에서 찾던 네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미나미를 눈치채지 못한 채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미나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조작 패널에는 아까는 없던 지하 층 버튼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흐음, 이거였구만.”
미나미는 망설임 없이 지하 2층 버튼을 눌렀다.
“늦었네.”
응접실에 들어서자 청자켓을 대충 걸친 청년 하나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벌어진 자켓 사이로 촌스러운 로고가 박힌 티셔츠가 보였다.
“아카가와…… 군.”
“아, 고(Go)라고 불러달라니까. 야, 유카야. 저기 저 예쁜 애는 누구야?”
아카가와는 실실 웃으며 아이린에게 다가갔다.
“난 아카가와 고조. 고라고 불러주면 고맙고. 근데 넌 누구야? 여긴 웬일로…… 앗!”
아카가와가 발이 꼬였는지 아이린 쪽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더니 얼떨결에 뻗은 두 손이 아이린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찰싹!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아이린의 손바닥이 아카가와의 뺨을 후려쳤다.
“아고고고…….”
아카가와가 뺨을 감싸 쥐며 나동그라졌다.
“我嫌称(정말 저질이야)! ××××! ×××××…………!”
아이린은 쓰러진 아카가와를 내려다보며 광둥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아이린 아가씨께서 ‘이 자식 정말 무례하다’고 하십니다. 그 뒤는 아가씨의 명예를 위해 통역하지 않겠습니다. 일본에 계시는 동안 광둥어는 꾹 참고 계셨는데…….”
첸이 난처한 듯 말했다.
“미안해, 아이린. 얘가 좀 덜렁대서…….”
“사장님. 아카가와를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십시오.”
쿠로사키가 유카에게 한마디 하고는 아카가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다 이제 온 거야? 약속 시간 한참 지났잖아!”
“와, 진짜 무섭네. 초면에 따귀라니. 그냥 좀 넘어진 것뿐이라고. 사고야, 사고! 근데 저 예쁜 얼굴에 이런 성깔이라니. 나, 마음에 들었어.”
아카가와가 뺨을 문지르며 낄낄거렸다.
“죄…… 죄송해요, 제가 좀 흥분해서. 하지만 전…… 이 사람 생리적으로 도저히 못 참겠어요.”
아이린이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카가와. 내 질문에 답해.”
“아, 알았어. 여기 오기까지 파란만장했다고. 일단 도쿄역에서 고다마 타려다가 실수로 히카리를 타버리는 바람에 시즈오카에서 미시마까지 다시 되돌아왔는데…….”
아카가와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겨우 여기까지 왔더니만…….”
“그만해.”
쿠로사키가 말을 잘랐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데!”
“그만하라면 그만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쿠로사키의 기분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네, 네~ 쿠로사키 선배님.”
“‘네’는 한 번만 해. 그리고 넌 신입사원이야. 나 부를 땐 부장님이라고 불러.”
응접실에서 아이린은 아카가와를 피하듯 구석 자리에 앉았고, 첸과 쿠로사키도 자리를 잡았다.
“자,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린을 위해서 설명해 줄게.”
유카가 입을 뗐다.
“나랑 쿠로사키 씨가 작년 여름에 아이린 할아버지인 첸강 씨 초대로 홍콩 로봇 쇼에 갔던 건 알지?”
“네, 할아버지께 들었어요.”
“그때 첸강 씨가 부탁하셨어.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이린이 회사를 물려받았을 때를 대비해서 나랑 똑닮은 로봇을 만들어달라’고.”
“로봇요?”
“응.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위장용 로봇.”
“말도 안 돼요. 프로그램을 아무리 잘 짜도 로봇이 어떻게 사람 흉내를 내요?”
“아이린은 LISA를 본 적이 없구나. 일단 이거 좀 봐봐.”
유카가 리모컨을 누르자 TV 화면에 로봇 쇼 영상이 나왔다. 은색 몸체의 로봇이 자기소개를 하고 청중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고 있었다.
“맞아, 저거 보고 나도 진짜 깜짝 놀랐지. 유카 네가 이런 걸 만들 줄이야.”
아카가와가 아는 체를 했다.
“아카가와 군한테도 아직 말 안 했네. 사실 저 로봇…… LISA는 평범한 로봇이 아니야.”
“평범하지 않은 건 딱 봐도 알겠거든?”
“조용히 좀 해!”
쿠로사키가 아카가와를 꾸짖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절대 비밀이야. 알겠지?”
유카가 모두의 얼굴을 살피며 다짐을 받았다.
“사실 LISA는 원래 사람이었어. 내 전 직장 상사였던 리사 선배야.”
“사이보그…… 군요. 그렇다면 인간처럼 움직이는 것도 납득이 가네요.”
“에이, 말도 안 돼. 목이 빠졌을 때도 생명 유지 장치 없이 움직이는 거 내가 똑똑히 봤는데.”
“인간의 뇌를 나노머신으로 컴퓨터화했으니까 생명 유지 장치는 필요 없어. 전원만 있으면 언제까지든 움직이고, 에너지가 떨어지면 그냥 멈출 뿐이야. 다시 충전하면 다시 작동하고.”
“그걸 위한 나노머신이었군요. 하지만 믿기지 않아요.”
“그럴 줄 알았어. 증거를 보여줄게. 첸 씨, 맡겨뒀던 LISA 좀 가져다줄래요?”
“네, 지금은 머리 부분뿐입니다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첸이 방을 나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잠시 후 첸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카트 위에는 영상에서 본 여성형 로봇의 머리가 놓여 있었고, 목 주변의 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양 귀는 짧은 안테나가 달린 금속 커버로 덮여 있었고, 그와 이어진 헤어밴드가 아름다운 금발을 정돈하고 있었다. 목 아래로는 여러 가닥의 케이블이 카트 하단의 노트북과 연결되어 있었고, 유독 굵은 케이블 하나가 전원 장치에 꽂혀 있었다. 유카가 전원을 켜자 헤어밴드의 램프들이 깜빡거리며 로봇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삐빅! 시제품 37호, 식별 코드 LISA, 기동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유카 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모두에게 인사해.”
“쿠로사키 님, 아카가와 님, 첸 님, 오랜만입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난 롱 아이린이라고 해.”
“처음 뵙겠습니다, 롱 아이린 님.”
“그냥 아이린이라고 불러.”
“네, 아이린 님.”
“저기, 당신 정말 유카 선배였어?”
아이린이 묻자 LISA가 답했다.
“선배라는 단어의 정의에 따릅니다. 제 전자 두뇌는 세키구치 리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었던 세키구치 리사를 구성하던 물질은 99.7%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으며, 물질로서의 연속성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로봇처럼 말해? 아까 비디오에선 훨씬 사람 같았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외부 입력에 응답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는 건 긴급 대응 프로그램이 작동할 때뿐입니다.”
“긴급 대응 프로그램 켜봐.”
유카의 명령에 LISA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현재는 긴급 사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긴급 사태란 마스터인 유카 님이 저를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에서 특별한 판단 처리가 필요할 때를 말합니다.”
“마스터인 내가 시키는 거잖아.”
“긴급 대응 프로그램은 시스템 자원을 대량으로 소비하며, 장시간 가동 시 전자 두뇌에 대미지를 줍니다. 자기 보존은 마스터의 명령보다 우선합니다.”
“진짜 사람 뇌가 들어있는 건지 난 도통 못 믿겠는데.”
아카가와가 깐족거렸다.
“그래? 그럼 속을 보여줄게. LISA, 셧다운 해.”
“네, 유카 님. 시제품 37호, 식별명 LISA, 정지합니다.”
LISA가 눈을 감았다.
유카는 LISA의 귀 커버를 벗기고 헤어밴드를 제거했다. 그리고 금발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자 가발처럼 두피째 쑥 벗겨졌다. 드러난 두개골 안에는 둔탁한 회색 금속 덩어리 표면에 금색 배선이 무수히 깔린, 뇌 모형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우와, 대박…….”
아카가와가 탄성을 질렀다.
“정말 인간의 뇌를 기계화한 거네요.”
아이린도 신기한 듯 들여다봤다.
“근데 의식을 프로그램화하는 메커니즘이 아직 불완전해. 뇌 기계화는 딱 두 건뿐인데, LISA는 이 모양이고 다른 한 건은 완전히 실패했거든. 이대로는 첸강 씨의 의식을 제대로 옮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해. 어르신은 그래도 괜찮다고 하시지만…….”
“그럼 실험을 더 많이 해보면 되잖아.”
아카가와가 쉽게 말하자 유카가 쏘아붙였다.
“그게 말이 돼? 선배는 우연한 사고로 이렇게 된 거고, 이런 실험에 자원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실패하면 죽는 거고, 성공해도 로봇이 되는 건데.”
“유카나 아이린 너희라면 로봇이 돼도 괜찮을 것 같은데. 분명 귀여운 로봇이 될 거야…….”
“뭐라고?”
아이린이 살벌하게 노려봤다.
“적당히 좀 해! 우리가 무슨 범죄 조직인 줄 알아?”
쿠로사키가 호통을 쳤다.
“그러게. 진짜 악의 조직이었으면 납치해서 인체 실험이라도 할 텐데 말이야.”
“그러게요.”
유카와 아이린이 맞장구를 쳤다.
“사장님, 입 조심하세요.”
“아가씨도요.”
“대체 뭐야, 이 수상한 기계들은? 이런 게 지하에 숨겨져 있다니. 이거 회사 가져가면 대박 특종감이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온 미나미는 방 안의 기계들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자, 여러분께 보안 카드를 나눠드리겠습니다.”
첸이 일행을 경비실로 안내했다.
“이제 보안을 켤 테니 건물 안에 계실 때는 반드시 몸에 지니고 계십시오.”
첸은 카드 뭉치에서 사진이 박힌 ID 카드를 한 장씩 나눠줬다. 모두가 카드를 받자 첸이 경비 시스템 스위치를 올렸다. 모니터에 건물 평면도가 나타났고, 경비실 위치에 숫자 ‘5’가 깜빡였다.
“이 시스템으로 누가 어디 있는지 전부 관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다섯 명뿐이니까 여기 5라고만…… 응?”
설명하던 첸의 목소리가 굳었다.
“왜 그래?”
“지하 2층에 ID 카드 반응이 있습니다. 시스템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화면 속 지하 2층 평면도에 숫자 ‘1’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첸이 시스템을 조작했다.
“경비를 꺼둔 상태라 상세 정보는 안 나오지만, 일단 이 카드를 무효 처리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이 카드가 사용되면 즉시 경보가 울리게 설정했습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사진도 충분히 찍었으니 들키기 전에 얼른 튀자.”
미나미는 출구 센서에 ID 카드를 갖다 댔다.
“어라? 왜 안 열려?”
들어올 때 열렸던 문이 꿈쩍도 하지 않자 미나미는 몇 번이고 카드를 긁어댔다.
삐이이익!
경보음이 경비실에 울려 퍼졌다.
“역시 카드가 부정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하 2층은 보안상 감시 카메라가 없어서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군요.”
첸이 보고했다.
“큰일이네.”
유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방을 나가려고 시도 중인 것 같습니다.”
“첸 씨, 거기 이중문이었죠? 이런 방법은 어때요?”
“과연…….”
첸이 경비 시스템을 해제했다.
“설마 들켜서 카드 정지당한 건가? 그럼 진짜 좆되는데…….”
미나미가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초록색 램프가 켜지며 묵직한 금속 문이 열렸다.
“후우, 다행이다. 그냥 기분 탓이었나 보네.”
미나미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고, 발밑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들어올 때도 바람 불더니 이건 또 뭐야? 근데 왠지 달콤한 냄새가…….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머리가 멍하네……. 빨리 가야 하는데…….”
미나미는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금만…… 쉬었다가…… 도망…….”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하 1층 의료 설비에서 마취 가스를 끌어오다니, 머리 잘 쓰셨네요.”
쿠로사키가 감탄했다.
“설비 구성을 보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은 것뿐이야.”
“유카는 정말 대단해!”
“슬슬 됐겠지. 침입자가 어떤 낯짝인지 구경이나 하러 가자고.”
쿠로사키가 앞장섰다.
“아마 아까 그 기자 누님일걸? 아이린이랑 키는 비슷한데, 나이는 당연히 아이린이 훨씬 어리지만.”
아카가와가 끼어들었다.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아까 입구에서 대놓고 수상하게 굴길래 봤지. 홍콩에서 우리 쫓아다니던 주간 파인더 기자야.”
아카가와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쿠로사키의 안색이 변했다.
“야! 왜 그런 중요한 걸 진작 말 안 했어!”
“아니, 말하려고 했더니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라며!”
“그거랑 이거랑 같냐! 이 등신아!”
“하지만 단순 절도가 아니라 기자라면 골치 아프겠군요. 대책을 세워야겠습니다.”
첸이 심각하게 말했다.
“저기…….”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만히 있던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무단침입은 나쁜 짓이죠?”
“당연하죠.”
쿠로사키가 답했다.
“나쁜 놈을 잡아서 벌주는 건 정의로운 일이고요?”
“하지만 여긴 법치 국가입니다.”
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 시설도 합법적인 건가요?”
“그건…… 그게…….”
쿠로사키와 첸이 말문이 막혔다.
“유카는 인체 실험하고 싶어 하잖아. 나도 할아버지를 위해서 한 번쯤 봐두고 싶고.”
“어?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뭐, 일리가 있을지도. 잠깐만, 리스크 계산 좀 해볼게.”
유카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아이린, 진짜 무섭네…….”
아카가와가 중얼거리자 아이린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봤다.
지하 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역시 그 누님이네.”
바닥에는 마취 가스에 취한 미나미가 곯아떨어져 있었다.
일행은 잠든 미나미를 스캐너 유리 원통 안에 가둬두고 응접실로 돌아와 회의를 시작했다.
“일단 정체부터 확인해야 해. 쿠로사키 씨, 아무 상관 없는 일반인인 척하고 주간 파인더 편집부에 전화해서 확인 좀 해줘.”
“알겠습니다, 사장님.”
“첸 씨, 홍콩 때처럼 위장 공작 가능할까?”
“번거롭긴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실력 좋은 해커가 필요하겠네요.”
“해킹이라면 나한테 맡겨! 어디 털면 돼?”
아카가와가 자신 있게 나섰다.
“철도 회사 시스템이야. 이 여자가 표를 사서 기차를 탄 걸로 조작해야 해. 그리고 종착역 근처 외진 골목에서 시비가 붙어 도망쳤다고 재일 중국인 시켜서 신고하게 만드는 거지.”
“에이, 뭐야. 식은 죽 먹기네. 시스템 침투할 것도 없이 어차피 신용카드 있을 거 아냐? 그걸로 표 사버리면 끝이지.”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역 감시 카메라나 승무원 증언까지 앞뒤가 맞아야 하니까요.”
“알았어, 좀 생각 좀 해보자. JR 시스템은 좀 빡센데……. 신고텐바역에서 탄 걸로 하면……. 잠깐, 다른 회사랑 직결 운행하는 열차를 쓰면 되겠다. 요즘은 폰으로 전자 티켓도 되니까…….”
아카가와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기,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아이린이 입을 뗐다.
“그 기자, 나랑 키가 비슷하잖아. 머리 길이 정도만 빼면.”
“그렇긴 하지.”
“그럼 내가 대신 기차를 타는 건 어때?”
“아, 아가씨! 그건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사람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애매한데. 역무원이나 승무원이 얼굴 하나하나 다 기억하겠어?”
“하지만 역 감시 카메라 영상이 남습니다.”
“그렇네. 역 보안 시스템은 못 털어?”
“그 정도야 껌이지. 운행 시스템보다 훨씬 허술하거든. 영상 지워버리면 되지?”
아카가와가 묻자 아이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지우면 오히려 수상해하잖아. 그러지 말고 감시 카메라 속 내 얼굴을 그 여자로 바꿔치기하는 거야.”
“그건 무리야. 카메라가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찍고 있는데, 영상 합성용 소스를 그 누님이 원하는 포즈대로 찍어줄 리가 없잖아.”
“바보야? 여기 할리우드 영화급 3D 영상 만드는 시스템이 있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거면 되겠네! 고마워, 아이린!”
유카가 손뼉을 쳤다.
“아이린, 너 진짜 똑똑하다. 난 생각도 못 했는데.”
아카가와가 슬쩍 다가오자 아이린이 쳐냈다.
“가까이 오지 마. 난 유카를 돕는 거지, 널 돕는 게 아니니까.”
“편집부랑 연락됐습니다.”
쿠로사키가 돌아왔다.
“이름은 야오 미나미, 주간 파인더 기자 맞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지금은 프리랜서라네요. 역에서 시비 붙어서 배상해달라고 했더니 자기들이랑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어제 날짜로 사표 냈답니다.”
“그럼 잡지사에서 쫓아올 일은 없겠네.”
유카가 안도했다.
“완전히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대응이 아주 늦어질 건 확실합니다.”
“좋아, 그럼 계획대로 실행하자. 이제 우린 다 한배를 탄 거야.”
“……으음, 잘 잤다. 어라? 여기 어디야?”
잠에서 깬 미나미는 자신이 지하 연구실 유리 원통 속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 너머로 남녀 다섯 명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그때…….”
상황 파악이 되자 미나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했잖아.”
건물 앞에서 만난 청년이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원통 위쪽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너…… 너도 여기 조사하던 거 아니었어?”
“아니? 난 여기 직원 아카가와야. 누님이 혼자 착각한 거지.”
“제발, 살려줘!”
“안타깝지만 그건 안 되겠네.”
“당신들 분명 쿠로사키랑 시노사카…….”
“맞습니다. 당신이 조사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죠.”
쿠로사키가 차갑게 말했다.
“지상 층에서만 멈췄어도 무단침입으로 경찰에 넘기고 끝냈을 텐데,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게 됐습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 기자라고! 내가 사라지면 편집부에서 가만 안 있을 거야!”
“과연 그럴까?”
유카가 비웃듯 말했다.
“방금 편집부에 물어봤는데, 너 어제 사표 냈다며? 이제 남남이라던데?”
“그…… 그건…….”
“그리고 이것 좀 봐.”
유카가 콘솔을 조작하자 스크린에 영상이 떴다. 기차역 플랫폼이었다. 거기엔 미나미가 입고 있던 코트와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신고텐바역 감시 카메라야. 꽤 붐비는 시간이라 누가 플랫폼에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 못 해. 여기에 방금 스캔한 네 영상을 입히면…… 아카가와 군, 부탁해.”
아카가와의 손놀림에 미나미와 체격이 비슷한 여자의 모습이 미나미 본인으로 감쪽같이 변했다.
“역시 최신 스캐너 데이터라 그런지 일반 CG랑은 차원이 다르네.”
“대체…… 대체 나한테 뭘 하려는 거야!”
“이게 기록에 남은 네 마지막 모습이 될 거야. 그리고 아이린…… 아, 얘 이름이야. 아이린이 네 가방에 있던 카드로 신주쿠행 티켓을 샀거든.”
“18시 25분발 특급 ‘슈퍼 아사기리’야.”
아카가와가 덧붙였다. 감시 카메라 속 ‘미나미’는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특급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가 출발하자 영상은 블랙아웃 되었다.
“아이린, 왕복하느라 고생했어.”
유카가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이제 이 여자는 신주쿠에서 실종된 게 되겠네요.”
아이린이 생긋 웃었다.
“우리가 무슨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야. 아이린의 병드신 할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는 거라고. 지금 이상한 기사가 나가면 치명적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유카가 말했다.
“웃기지 마. 그딴 말을 어떻게 믿어!”
미나미가 유리관 안에서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마지막 기회를 줄게. 우리에 대해 기사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할래? 그럼 풀어줄게.”
“싫어! 저널리스트의 자존심을 걸고, 그딴 거래는 죽어도 안 해. 절대로!”
“알았어. 그게 네 뜻이지? 그럼 이제 마음 놓고 실험할 수 있겠네.”
“거래라니, 유카도 참 번거로운 짓을 하시는군요.”
아이린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거들었다.
“거래라는 건 대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나 하는 거예요. 이 여자는 우리에게 민폐를 끼쳤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죠.”
“아이린 말이 맞아. 사실 풀어줬을 때의 리스크랑 실험을 강행했을 때의 리스크를 계산해 봤는데, 방금 결론이 났어. 풀어주는 쪽이 확실히 리스크가 커.”
말을 마친 유카는 벽면 로커를 열어 금속제 벨트 같은 물건을 꺼냈다. 벨트 끝에는 커넥터와 램프가 달린 작은 박스가 버클처럼 붙어 있었다.
“유카, 그건 뭐예요?”
아이린이 물었다.
“이건 예전에 아이린네 할아버지 연구소에 있던 메이파 씨가 개발한 걸 개량한 거야.”
“뭐 하는 물건이죠?”
“인간의 신경과 컴퓨터를 접속하기 위한 인터페이스야. 뇌 내부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려면 꼭 필요하거든. 메이파 씨 건 수술이 필요했지만, 이건 나노머신으로 된 성장형 프로브가 자동으로 신경을 찾아가서 접속하니까 아주 간단해.”
“헤에, 대단한데.”
아카가와가 감탄했다.
“사장님, 언제 이런 걸 만드신 겁니까? 기술은 혼자만 독점하지 말고 공유 좀 해달라고요.”
“미안. 아무튼 절차를 설명할 테니까 협조해 줘.”
“어쩔 수 없군요.”
유카가 패널을 조작하자 미나미를 가두고 있던 유리관이 위로 올라갔다. 도망치려던 미나미의 양팔을 첸과 쿠로사키가 낚아챘고, 미나미는 그대로 바닥에 눌러앉혀졌다.
“아카가와 군, 부탁해.”
“이게 목 뒤에 닿게 하면 되는 거지?”
아카가와는 은색 벨트를 미나미의 목에 감고 끝부분을 버클 모양의 박스에 끼웠다.
“어째 헐렁한데? 사이즈가 안 맞는 거 아냐?”
“됐으니까 스위치나 올려.”
아카가와가 스위치를 켜자, 박스 뒷면에서 수많은 바늘이 튀어나와 미나미의 뒷덜미를 꿰뚫었다.
“꺄악!”
격렬한 통증에 미나미가 비명을 질렀다. 은색 벨트가 서서히 수축하며 미나미의 목을 가볍게 조이듯 박스를 고정시켰다. 박스의 램프가 붉게 점멸을 반복했고, 미나미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싫어, 뭐야, 아파… 아파! 히익, 히이익!”
미나미는 비명을 지르며 두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바닥을 뒹굴며 양손으로 목 뒤의 장치를 떼어내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사장님,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닙니까?”
쿠로사키가 물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조금만 더 있으면.”
잠시 후, 램프의 점멸이 멈추고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아… 통증이 사라졌어? 지금이야!”
미나미가 출구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게 섯거라!” “請等(기다려)!”
쿠로사키와 첸이 당황해서 뒤를 쫓았다.
“괜찮아.”
유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도망치던 미나미의 손이 출구 문고리에 닿으려는 찰나, 파일럿 램프가 초록색으로 변했다.
“아….”
미나미의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중심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유카 말대로군요. 어떻게 된 거죠?”
아이린이 물었다.
“신경 접속이 완료된 거야.”
미나미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했지만, 양다리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거… 이것 때문이지? 이 스위치만 끄면…!”
아직 자유로운 양손으로 목 뒤의 장치를 붙잡고,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껐다. 초록색으로 빛나던 파일럿 램프가 꺼졌다.
“이제 자유….”
말을 맺기도 전에 미나미는 기어가는 듯한 자세로 바닥에 엎어졌다.
“……어째…서….”
“네 목 아래의 운동 신경은 전부 이 장치를 거치도록 재배선됐어. 그러니까 스위치를 끄면 당연히 못 움직이지.”
“아…… 으…….”
미나미가 입만 뻐금거렸다.
“과연. 입은 움직일 수 있어도, 호흡이 불수의근 반사로만 이루어지니까 말을 제대로 못 하는구나.”
유카는 컴퓨터에 메모를 입력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사장님?”
“일단 옷을 벗기고 저기 작업대 위에 눕혀줘.”
“에, 옷을요?”
아카가와가 얼굴을 붉히며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옷을 벗기라고. 옷을 입은 채로는 옷 입은 모양의 로봇이 돼버리잖아.”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아이린이 요청했다.
“이제 나노머신으로 표면 가공을 할 건데, 지금 제어 소프트웨어로는 사람 몸이랑 옷을 구분하는 게 불가능해. 그래서 옷을 입은 채로는 안 돼. 봐, LISA한테 장식 같은 게 달려 있지? 저건 선배가 입고 있던 옷의 흔적이야.”
“아, 저게 그런 거였어?”
아카가와가 감탄했다.
“그 표면 가공, 나도 해보게 해줘요.”
“그래. 난 의식 프로그램화만으로도 벅차니까, 누군가 나노머신 조작을 익혀두지 않으면 아이린네 할아버지를 제대로 된 로봇으로 만들어 드릴 수 없거든. 겉모습은 생몸이랑 다를 바 없으면서도 썩거나 상처 입지 않는 소재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오케이! 이 누님 피부에 딱 맞는 소재라… 뭐가 좋을까나?”
아카가와는 능글맞게 웃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웃음은 좀 삼가 주셨으면 하는데요.”
아이린이 쏘아붙였다.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글쎄, 지금으로선……. 아, 맞다. 첸 씨, 아이린이 노려지고 있다고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 아이린 아가씨가 후계자가 되는 걸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많으니까요.”
“방금 생각난 건데, 아이린의 대역(카게무샤)을 만드는 건 어때? 봐, 마침 체격도 비슷하잖아.”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그럼 스캐너 정밀도를 최대로 높여서 아이린의 정밀 데이터부터 다시 따야겠어. 아이린, 옷 다 벗고 스캐너에 들어가 줄래?”
“좋아요. 재미있어지겠는데요. 하지만 남자들한테 보여주고 싶진 않네요.”
“당연하지. 쿠로사키 씨, 첸 씨, 그리고 아카가와 군도 잠시 나가 있어 줘.”
남자들을 내쫓자 아이린은 옷을 벗고 스캐너 작업대 위에 섰다.
“아, 브래지어랑 팬티도 벗어야 해.”
“그렇겠네요.”
속옷까지 전부 벗어 던지고 태초의 모습이 된 아이린 주변으로 투명한 원통이 내려왔다. 두 번째라 그런지 아이린은 침착했다. 유카가 패널을 조작하자 빛의 고리가 내려와 아이린의 몸을 몇 번이고 왕복했다.
“손 데이터가 부족해. 양손 벌리고 대자로 서봐.”
“알겠어요.”
어깨에서 팔, 그리고 손가락 끝을 향해 면밀한 스캔이 이루어졌다.
“등 쪽도 스캔할 거니까 머리카락 좀 들어 올려줘.”
아이린은 긴 흑발을 양손으로 잡아 올렸다.
“발바닥이랑 가랑이 사이가 아직 남았어. 엉덩이 대고 앉아서 위로 V자로 다리 좀 벌려줄래?”
“체조 선수 같네요.”
아이린은 좁은 캡슐 안에서 어떻게든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거, 상당히 힘드네요. 빨리 좀 해주실래요?”
“미안, 금방 끝나.”
빛의 고리는 다리를 치켜든 아이린의 발끝부터 허벅지로 천천히 내려오며 가랑이 사이를 꼼꼼하게 훑었다.
“음, 저기 털이 방해돼서 데이터가 제대로 안 잡히네.”
“유카, 거기까지 안 해도 돼요! 그런 곳까지 똑같이 만들어지면 기분 나쁘다고요.”
“아… 그것도 그렇네. 미안, 아이린. 이걸로 충분해.”
유카는 정신이 든 듯 대답했다. 아이린이 다리를 내리고 양반다리로 앉자 원통이 올라가며 스캔이 끝났다.
“역시 최고 해상도라 데이터양이 엄청나네. 전보다 1500배는 많아.”
유카의 말에 아이린은 일어나 옷을 입으며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았다.
“피부 잡티까지 생생하게 재현되다니, 좀 싫네요.”
아이린이 옷을 다 입자 남자들이 다시 불려 들어왔고, 미나미는 금속으로 된 침대형 작업대에 눕혀졌다. 목의 장치에 케이블이 연결되고 초록색 램프가 켜졌다.
“너한테 정말 감사하고 있어. 네가 없었으면 실험도 못 해보고 실전에 들어갈 뻔했거든.”
유카가 미나미를 향해 말했다.
“싫어… 하지 마…!”
미나미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했지만, 손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들은 미쳤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해줬네. 지금부터 할 건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는 실험이야.”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잖아. 역시 당신들은 미친 게 분명해.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미나미의 절규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목 아래의 자유를 빼앗긴 채 누워 있는 미나미의 몸을 훑어보며 아이린이 말했다.
“정말 저랑 체격이 거의 똑같네요.”
“키는 5mm 이내, BWH도 3cm 이내 오차야. 이 정도면 로봇으로 만들 때 조금만 변형시키면 문제없어.”
“어떤 식으로 로봇으로 만드는 거죠?”
아이린이 물었다.
“우선 체내에 나노머신을 주입해. 그게 혈관을 타고 온몸에 어느 정도 퍼져서 임계치를 넘으면, 목의 장치를 통해 분자 변환 프로그램을 쏘아 보내는 거지.”
“분자 변환요?”
“응. 인체의 뼈나 세포를 금속이나 플라스틱으로 치환하는 거야. 실제로는 나노머신과 동시에 재료가 될 물질도 같이 주입해.”
“어려워 보이네요.”
“그렇게 어렵지도 않아. 신체 변환은 설계도만 확실하면 거의 문제없거든. 어려운 건 뇌의 전자화야. 혈액이 멈추고 뇌세포가 죽기 전까지 시냅스를 반도체로 바꾸고, 동시에 기억을 데이터뱅크에 저장해서 의식을 프로그램으로 변환해야 하니까.”
“잘 될까요?”
“프로그램을 하나씩 넣어서는 늦어. 처음부터 나노머신에 프로그램을 심어둬야 할 것 같아. 이번엔 그걸 위한 실험이야.”
“내 생각엔 말이야, 나노머신 자체가 자동으로 분석해서 필요한 처리를 하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확실히 아카가와 군 말이 맞아. 그러면 소량만 주입해도 나머지는 자동화되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나노머신을 이만큼 이해하고 있는 나조차도 거기까지 제어하는 건 무리야.”
“그럼 나한테 맡겨줘요.”
“이봐,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쿠로사키가 아카가와를 가로막았다.
“연구 테마라면 좋겠지만, 이번엔 아이린네 할아버지의 앞날이 걸린 문제야. 어설픈 짓을 할 순 없어.”
유카가 부드럽게 거절했다.
“쳇, 알았어요.”
“그것보다 표면 재질이나 생각해 둬. 나노머신 조작 코드는 여기 있으니까, 분자나 결정 구조를 입력해서 프로그램해 줘. 생몸 세포를 남기면 안 돼. 피가 안 통하게 되면 바로 썩어버리니까.”
“알았다니까요. 대학 동기 중에 인공 피부 연구하던 녀석이 있으니까, 그놈 데이터베이스 좀 뒤져볼게요.”
아카가와는 단말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사이에 나노머신을 주입해서 임계 농도까지 올려둘게.”
유카는 그렇게 말하며 투명하고 가느다란 튜브를 탱크에 연결하고, 튜브 끝에 달린 굵은 바늘을 미나미의 왼팔에 링거처럼 꽂았다.
“지금부터 나노머신 주입한다. 위험하니까 떨어져 있어.”
“유카는 괜찮아요?”
아이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난 괜찮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대처법도 알고 있으니까.”
유카는 콘솔을 조작했다. 탱크가 웅웅거리며 소리를 냈고, 수은 같은 액체가 튜브를 타고 천천히 미나미의 팔로 흘러 들어갔다. 신경이 차단된 미나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그 사실이 그녀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모니터링 개시.”
유카는 콘솔을 향해 재빨리 명령어를 입력했다.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미나미의 신체 투시도에서, 바늘이 꽂힌 팔부터 가느다란 선들이 어깨 쪽으로 뻗어 나가더니 이내 심장에 도달했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그 선들은 동맥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고동이 반복될수록 그래픽은 정밀해졌고, 마침내 모세혈관에서 내장까지 아우르는 정교한 투시도가 완성되었다.
“이제 나노머신이 전신에 퍼졌어. 언제든 전환할 수 있어.”
유카가 콘솔을 조작하자 디스플레이에 뇌 그래픽이 나타났다.
“싫어, 하지 마!”
미나미가 소리칠 때마다 화상의 일부가 붉게 점멸했다. 화면에 나타난 무수한 수치를 읽으며 유카가 말했다.
“안 좋네. 정신이 불안정해. 이러면 또 사고가 루프에 빠져버려.”
“그게 무슨 소리죠?”
아이린이 물었다.
“지금까지의 실험 결과로는, 뇌를 컴퓨터로 개조할 때 정신이 최대한 안정되어 있어야 해. 리사 선배는 냉정했으니까 제대로 로봇이 될 수 있었지만, 지난번 실험에선 공포심이 너무 강해서 폭주하는 바람에 프로그램화된 의식을 잡아먹어 버렸거든.”
“할아버님이라면 그 점은 각오하고 계실 테니 괜찮을 거예요.”
“그렇긴 하겠지만, 역시 의식을 확실히 프로그램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이린네 할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으니까….”
“이제 곧 실험대 위에 오를 판인데, 겁 안 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쿠로사키가 한마디 했다.
“어쩔 수 없지. 나노머신이 마취 성분을 생성하게 하자.”
유카가 키를 두드렸다.
“싫어… 살려… 줘…… 제… 발…….”
미나미가 조용해지자, 붉게 점멸하던 디스플레이의 뇌 화상이 깊은 청색으로 가라앉았다.
“공포 영화를 보는 것 같네요.”
아이린이 감탄하며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아지는군요.”
쿠로사키가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필요한 실험이라지만….”
첸도 동조했다.
“첸은 저나 할아버님을 위해 수많은 적을 처리해 왔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일로….”
“맞아.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괴롭지 않게 잠들게 해준 거니까.”
아이린과 유카가 입을 모아 말했다.
“저희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쿠로사키와 첸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난 전혀 상관없는데. 쿠로사키 선배랑 첸 씨도 참 나약하시네.”
아카가와가 비아냥거렸다.
“그것보다 프로그램은 다 됐어?”
유카가 물었다.
“물론이지, 완벽해! 압전 세라믹이랑 유기 EL 소자를 조합한 마이크로 셀을 수지로 상호 결합해서, 부드러움과 강도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로운 발색이 가능하게….”
“유기… 뭐라고?”
“유기 EL 소자. 연구실에선 셀 하나하나 만드는 데 손이 너무 많이 가서 넓은 면적은 못 만들었거든.”
아카가와는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뭐, 평범하게 화학 합성으로 만드는 한 어쩔 수 없었지만, 유카의 나노머신만 있으면 세포를 그대로 마이크로 셀로 변환할 수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그래. 확실히 그거라면 잘될지도 모르겠네. 근데 정말 할 수 있어?”
“나한테 맡겨만 달라고. 이 프로그램 좀 봐봐.”
아카가와가 유카에게 콘솔을 양보했다. 유카는 키보드를 두드려 프로그램 리스트를 잠시 훑어보더니 감탄한 듯 말했다.
“오늘 처음 본 나노머신 프로그램을 이렇게까지 짜다니. 좀 다시 봤어.”
“헤헤, 유카한테 인정받으니까 기분 좋은데?”
아카가와는 싱글벙글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내 뇌 개조 프로그램이랑 병합해서 설계도를 입력하기만 하면 돼.”
유카가 콘솔을 조작하자 디스플레이에 아까 스캔한 아이린의 화상이 호출되었고, 미나미의 체내에 퍼진 나노머신에 프로그램이 전송되었다.
“그럼 전환 시작할게.”
유카가 스위치를 올리자 침대 위의 미나미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웅 하는 낮은 기계음과 함께 미나미의 피부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시더니, 이내 양손과 양발 끝부터 점점 인조물 같은 느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가 가슴과 허리에 이르자, 그 형태는 아이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설계도에 맞춰 미묘하게 성형되었다.
“CG를 보는 것 같네요.”
아이린이 말했다.
“이 정도 변화는 얌전한 편이야. 폭주하면 정말 큰일 나거든.”
“폭주요?”
“응.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서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거야. 리사 선배도 폭주에 휘말렸지만, 제대로 로봇이 된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지.”
잠시 후 웅웅거리는 소리가 멈췄고, 목의 링 아래로는 광택이 도는 플라스틱 같은 재질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팔다리의 이음매와 관절에는 틈새가 생겼는데, 마치 싸구려 마네킹 인형 같았다. 이음매는 팔다리뿐만 아니라 몸통에도 나타났다. 가슴 바로 아래에서 좌우로 뻗은 이음매는 옆구리를 지나 골반 쪽으로 향했고, 허리 라인을 따라 다시 정면에서 연결되어 커다란 사각형 덮개 모양을 형성했다.
“이 재질로는 안 되겠어. 한눈에 가짜인 게 티 나잖아.”
유카는 변해버린 미나미의 몸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 좀 지켜보라니까요. 이제부터 마이크로 셀 하나하나에 색을 입힐 거니까. 지금 아이린의 피부 데이터를 써넣고 있어요.”
아카가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잠시 후 미나미의 몸이 발끝부터 살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리에서 허리, 그리고 가슴에서 양팔 끝으로 착색이 진행되자 표면의 이음매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색상 미세 조정을 해야 하니까, 아이린, 팔 좀 나란히 대봐.”
“함부로 부르지 말아 줄래요? 저기 유카, 이 태도 어떻게 좀 안 돼요?”
“미안, 아이린. 그래도 아카가와 군 기술은 확실하니까.”
“유카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네요.”
아이린은 미나미가 누운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팔을 나란히 댔다.
“빨간색을 좀 더 강하게 하고, 전체적으로 명도를 낮추면 되려나.”
아카가와가 조작하자 피부 톤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 정도면 됐나?”
“그렇네요. 확실히 기술만큼은 인정하죠. 제가 가까이서 봐도 제 손이라고 착각할 정도니까요.”
아이린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럼 색을 고정할게.”
아카가와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금 상태는 어때?”
유카가 확인했다.
“목 아래 표면은 완전히 변환 끝났어. 다만, 그게… 일부 데이터가 없어서….”
“일부?”
“그게, 저기… 거시기 부분인데….”
아카가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미나미의 몸을 보니 가랑이 사이의 성기 부분만 음모도 없고 살색도 입혀지지 않은 채 플라스틱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카가와 군, 의외로 순진하네. 거긴 괜찮아. 설계도에 있잖아. 하복부에 배터리를 매립해서 충전용 단자로 쓸 거니까. 거기까지 벗겨질 상황이면 대역으로서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고.”
유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근데 왜 동력로를 내장 안 하고 배터리를 쓰는 건지 난 이해가 안 가는데.”
“그게 문제야. 어려운 부분이지. 동력로를 내장하는 게 효율적인 건 확실해. 하지만 배터리가 유지보수하기엔 압도적으로 편하거든. 동력로는 출력 조절을 제대로 안 하면 위험하잖아. 이 대역은 아이린이랑 같이 홍콩에 갈 거니까, 우리가 없어도 간단한 정비 정도는 할 수 있게 해둬야 해.”
“그런 거였군.”
“그리고 사람들 앞에 나설 거니까 먹고 마시는 것도 해야 하잖아. 위장의 일부는 그런 걸 분해 처리하는 기구로 변환할 거라 동력로 넣을 공간이 없어. 더 작고 고출력이 안정적으로 나오는 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 기술로는 이게 최선이야.”
“체격은 거의 똑같아졌지만, 얼굴이나 헤어스타일이 너무 다른 건 어떡하죠?”
아이린이 물었다.
“역시 그건 나노머신만으론 무리야. 일단 그대로 기계화하고, 얼굴만 따로 다시 만들게 될 거야.”
말을 마친 유카가 미나미의 가슴에 손을 댔다. 가슴은 좌우로 열렸고, 배는 허리 라인의 경첩을 중심으로 열렸다. 가슴과 배 안쪽은 무광 검정 수지로 되어 있었고, 그 표면에는 규칙적인 금색 배선이 그물처럼 쳐져 있었다.
“내부 변환도 순조롭네.”
심장은 규칙적으로 박동하며 수지제 파이프로 변한 혈관에 나노머신을 순환시키는 펌프로 변했다. 불필요해진 폐는 분해되었고, 그 빈 공간에는 몸 구석구석 뻗어 나간 컨트롤 케이블을 묶는 제어 장치가 들어섰다. 폐로 이어지던 기관은 절단되어 인공 성대와 제어 장치가 되었다. 식도 역시 혈관과 같은 수지제 파이프로 변했고, 그 끝에 있는 위장은 음식물을 분해하는 탱크로 바뀌었다. 소장, 대장, 간, 신장 등의 장기는 전부 분해되어 배터리를 수납하기 위한 커다란 공동이 만들어졌다.
“유카, 이제 머리 쪽 개조 들어간다.”
아카가와가 키보드를 유카에게 넘겼다.
“고마워. 지금까지는 순조롭지만,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야.”
유카는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면 및 두개골 변환 개시. 10%… 30%….”
미나미의 얼굴에서 서서히 생기가 사라졌다.
“……50%…… 70%.”
머리카락이 빠지더니 머리통이 매끈해졌다. 얼굴은 부드러움을 잃고 눈을 부릅뜬 채 굳어버렸다.
“……90%…… 95%…… 변환 종료. 문제없어.”
“오케이, 전부 순조로워.”
“다음은 안구랑 시신경 변환이야.”
유카가 미나미의 얼굴에 손을 댔다. 얼굴 앞부분이 마치 탈처럼 벗겨지자 안쪽에서 금속과 세라믹으로 변한 골격이 드러났다. 유카는 미나미의 팔에서 튜브를 빼내어 끝부분의 주사 바늘을 파르르 떨리고 있는 왼쪽 눈에 찔러 넣었다. 안구는 순식간에 걸쭉한 반투명 액체에 뒤덮이더니 경질 플라스틱 구체로 바뀌었다. 수정체는 오토포커스 복합 렌즈로, 홍채는 카메라 조리개처럼 변했다. 망막에는 고밀도 CCD 소자가 형성되었고, 시신경은 그에 연결된 신호 케이블로 변했다. 왼쪽 눈이 끝나자 오른쪽 눈도 마찬가지로 주사 바늘을 찔러 카메라로 변화시켰다.
“이 부분 변환도 체내 나노머신에 맡기고 싶지만, 그게 참 어려워. 리사 선배도 해상도가 낮다고 했으니까, 여기는 별도 처리로 확실히 해둬야 해.”
“확실히 좀 그로테스크하네요. 귀는 괜찮나요?”
“그건 괜찮아. 단순한 진동이랑 음향, 가속도 센서라 인간의 귀 구조를 거의 그대로 쓸 수 있어서 문제없어.”
유카는 얼굴 가죽을 ‘카칵’ 소리가 나게 끼워 맞췄다.
“이제 뇌 개조를 서둘러야 해. 혈액이 멈춘 뒤 나노머신으로 세포를 유지하는 것도 한계니까.”
유카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시냅스 반도체화 시작한다. 아카가와 군은 물리 변환 상태 모니터링해 줘. 난 의식 프로그램화랑 기억 데이터베이스화를 체크할게.”
“라져, 맡겨만 줘. 뇌간 및 운동 신경 변환 완료.”
“기본 인터페이스 프로그램 OK.”
유카와 아카가와는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며 작업을 진행했다.
“소뇌 부분 변환 완료.”
“확장 운동 기능 및 시청각 디바이스 제어 프로그램 OK.”
“대뇌 구피질 변환 완료.”
“조건 반사 및 기본 의식 프로그램화 완료.”
“대뇌 신피질 변환 중.”
“기억 데이터베이스 구축 중.”
“대뇌 신피질 변환 종료.”
“기억 데이터베이스 구축 완료. 자아 의식 프로그램화 완료.”
“전체 변환 프로세스 종료. 이걸로 됐나?”
“아마 괜찮을 거야. 각종 프로그램 동작 체크, 올 그린(All Green).”
유카가 한숨을 돌렸다.
“이제 LISA처럼 명령을 듣는 로봇이 된 건가요?”
아이린이 물었다.
“아직이야. 지금은 의식을 그대로 프로그램화했을 뿐이라, 명령에 따른다는 동작이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거든.”
“그 프로그램은 어떻게 하죠?”
“그건 기동하고 나서 조금씩 조정해 나갈 거야. 나노머신으로 만든 전자 뇌는 하나하나 다 달라서 LISA랑 공통 프로그램을 쓸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럼 기동할게.”
유카가 키보드로 명령어를 입력하고 엔터 키를 쳤다. 로봇은 목 뒤에 케이블을 매단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눈동자를 떴다.
“어떠십니까? 제가 아끼는 블렌드입니다만.”
위층 응접실에서는 쿠로사키가 취미인 중국차를 첸에게 대접하고 있었다.
“상당히 좋군요. 제가 좋아하는 맛입니다. 이 찻잎은 어디서?”
“얼마 전 홍콩에 갔을 때 사 온 겁니다.”
“그랬군요. 어쩐지 제 입에 딱 맞더라니.”
“아카가와는 이 미묘한 맛을 전혀 이해 못 하고, 사장님은 혀로는 맛을 아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 느끼질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쿠로사키가 한숨 섞인 투로 말했다.
“이 맛을 모른다니 안타까운 일이군요. 아이린 아가씨도 어릴 때부터 최고급만 드셔 오셔서 이런 소박한 맛을 잘 이해 못 하시거든요.”
“그랬습니까. 하지만 두 분, 무서울 정도로 죽이 잘 맞더군요.”
“정말이지… 이번 뒷수습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쿠로사키의 말에 첸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도 아카가와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만.”
“심정 이해합니다. 역시 우리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그래서, 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쿠로사키가 물었다.
“어떻게라니요?”
“룽젠강 씨의 후계자 문제 말입니다. 정말 아이린 씨가…?”
“그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차를 마시며 긴장이 풀린 첸이 쿠로사키에게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런 실적도 없는 아이린 아가씨가 후계자가 되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팔괘회 내부도 아이린 아가씨 파와 젠런 님 파로 양분되어 있죠.”
“팔괘회요?”
“그룹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은 간부 조직입니다. 이름 그대로 8인의 합의제인데, 일본으로 치면 상무회가 가장 가깝겠군요. 룽 대인에게 의절당했다고는 해도, 그 후에 차린 사업으로 나름 성공한 젠런 님이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도 많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게다가요?”
“젠런 님은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분입니다. 아직 증거는 없지만, 아이린 아가씨는 몇 번이나 목숨을 위협받았고, 지난번 박람회에 대규모 범죄 조직을 끌어들이거나 회사 연구원이 행방불명된 것도 젠런 님이 관여한 게 아닌가 의심되는 구석이 있어요.”
“연구원이 행방불명이라니, 보통 일이 아니군요. 아직 못 찾았습니까?”
“네, 당신도 만난 적 있는 메이파 씨입니다. 파티에서 헤드헌팅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소식이 뚝 끊겨서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죠.”
“확실히 우리 사장님도 한 번 납치당한 적이 있으니 주의해야겠군요.”
“그런 사정도 있어서 대역 계획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쿠로사키 씨의 차 덕분에 좀 진정이 됐습니다.”
“영광입니다. 아무튼 사장님이나 아이린 씨나 보고 있으면 위태로워 죽겠으니,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죠.”
“그 점 말입니다만… 이건 비밀입니다만, 그 대역이 완성되면 아이린 아가씨는 당분간 몸을 숨기게 할까 생각 중입니다. 전 룽 대인을 모신 지 오래됐으니, 그 로봇을 제가 조종하면 경영자답게 보이게 할 수 있을 테고, 아이린 아가씨의 목숨도 구하고 일석이조죠.”
“하지만 그러면 젠강 씨가 죽기 전에 의식을 로봇으로 옮긴다는 계획은요?”
“물론 진행합니다. 성공하면 제가 조종하는 로봇이 두 대가 될 뿐이죠.”
“실질적으로 회사를 지배하는 건 당신이라는 뜻입니까?”
“그렇죠. 그렇게 되면 그룹은 유카 씨가 아니라 당신을 원조하게 될 겁니다. 백룡(白龍)의 자본이 있다면 쿠로사키 그룹에서 쫓겨난 당신이 복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협력해라?”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죠. 그건 그렇고….”
쿠로사키는 포트에 물을 더 붓고 비어있는 찻잔을 다시 채웠다.
“이 차는 두 번째 우려낸 게 진국이죠.”
“역시 잘 아시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담소를 이어갔다.
“정신이 들어?”
유카가 물었다. 로봇은 ‘치치직’ 하는 가벼운 소리를 내며 초점 없는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이거 좀 이상한데요.”
아이린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게. 의식 프로그램화는 완벽하게 됐고 모니터상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
유카는 콘솔을 조작해 체크하며 말했다.
“아무튼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어. 아카가와 군, 머리 좀 열어줄래?”
“오케이.”
아카가와가 머리 윗부분에 손을 댔다. ‘카칵’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리고, 정수리부터 좌우로 갈라지며 열린 머릿속에는 LISA와 같은 둔탁한 회색 뇌수가 들어 있었다.
“진짜 뇌가 컴퓨터가 됐네. 대단해, 유카!”
“칭찬해도 나오는 거 없어. 전자 뇌에 단자가 있을 테니까 거기 신호 케이블 좀 연결해 줘.”
“쳇… 이 선이면 되지?”
『뀨삐-!』
아카가와가 뇌 단자에 케이블을 꽂자 로봇이 묘한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다.
“섬세한 녀석이니까 조심해.”
“네, 네. 연결 끝났어요.”
“이제 상세 모니터링이 가능하겠네.”
유카는 다시 콘솔로 향했다.
“우선 오른손, 그다음 왼손….”
유카가 키보드를 조작하자 로봇은 가벼운 기계음을 내며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거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을 수행했다.
“구동 부분은 문제없네. 그렇다는 건….”
유카는 콘솔을 보며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갑자기 손을 멈추고 소리쳤다.
“아, 그런 거였구나!”
“어떻게 된 거죠?”
아이린이 물었다.
“의식 프로그램화는 완벽하게 이루어졌어.”
“근데 왜 안 움직이는 거야?”
아카가와가 물었다.
“봐봐, 처리하기 전에 잠들게 했잖아. 그 잠든 상태가 그대로 프로그램이 돼버린 거야. 선배가 제대로 로봇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선배 스스로 ‘난 로봇이 될 거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앞뒤가 맞아.”
“깨울 수는 없나요?”
“깨어 있을 때의 뇌 활동 정보가 없어서 어렵겠어.”
“LISA의 프로그램이 깨어 있을 때의 것이라면 그걸 넣으면 되지 않을까?”
아카가와가 제안했다.
“LISA의 프로그램은 선배의 기억 데이터를 쓰게 되어 있어서, 이 사람 기억 데이터로 제대로 돌아갈지….”
“그런 소리 말고 일단 해봐요. 프로그램이 없으면 팔다리 세세한 동작까지 전부 명령어를 쳐야 하잖아. 난 그런 귀찮은 짓 하기 싫다고.”
“그렇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이린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랑 의견이 같다니 기쁜데!”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난 전혀 안 기뻐요. 실패해도 리스크가 없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는 것뿐이죠.”
“그래, 아이린 말이 맞아. 그럼 리스크를 계산해 볼게.”
유카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계산이라니… 저기, 유카.”
아카가와가 말을 걸었지만 유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둬요. 유카의 집중을 방해하면 안 돼요.”
“쳇, 알았어.”
“알았으면 됐어요.”
“아, 무서워라.”
“뭐라고 했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린과 아카가와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계산이 끝났는지 유카가 눈을 떴다.
“기다리게 했네. 리스크를 계산해 보니 아이린 말대로야. LISA의 프로그램을 넣어보자. 아카가와 군, LISA 머리 응접실에 그대로 뒀지? 가져와 줘. 그리고 쿠로사키 씨랑 첸 씨도 불러오고.”
“알았어, 유카.”
아카가와는 방을 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응접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응접실에서 첸과 차를 마시던 쿠로사키가 물었다.
“유카가 LISA 머리 좀 가져다 달래요.”
아카가와는 LISA의 머리가 놓인 왜건을 밀었다.
“아, 참. 쿠로사키 선배랑 첸 씨도 내려오래요. 유카의 전언이에요.”
“‘유카’가 아니라 사장님이라고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비즈니스 상식이 없는 놈은 고용할 수 없어. 아사쿠라의 부탁이라 해도 말이다.”
“너무해요, 쿠로사키 선배! 아사쿠라 조교수님 말을 믿고 취업 활동도 안 했는데…. 이럴 거면 하이바라 조교수님한테 부탁할 걸 그랬어.”
“보통 취업 활동은 교수님께 부탁하는 거다. 하이바라인지 뭔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교수가 아니라 조교수밖에 상대 안 해준다는 시점에서 네 평가가 그 정도라는 뜻이야. 난 친구인 아사쿠라에게 널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그게 곧장 취업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널 채용할지 말지는 네 행동거지에 달렸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아직도 못 알아먹겠냐?”
“네, 네. 알았다니까요.”
LISA의 머리를 실은 왜건을 밀며 아카가와가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유카. 쿠로사키 선배가 잔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선배랑 첸 씨는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먼저 진행하래.”
“알았어. 그럼 시작해 볼까. 아카가와 군, LISA의 전자 뇌도 연결해 줘.”
“오케이.”
“내 선배니까 조심해서 다뤄.”
“알고 있다니까.”
아카가와가 케이블을 연결하고 스위치를 켰다.
“삐빅! 시작기 37호, 식별 코드 LISA, 기동했습니다. 유카 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선배, 부탁이 있어. 새로운 로봇을 만들었는데 제대로 안 움직여. 그래서 선배의 프로그램을 전송해 보고 싶어.”
“제 프로그램은 범용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전자 두뇌에서는 가동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건 알지만, 지금 이대로는 아이린의 대역 로봇을 움직일 수가 없어. 밑져야 본전이니까 선배 프로그램을 넣어보고 싶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 효과적인 수단이 생각됩니다. 저는 세키구치 리사가 자기 자신을 해석하여 작성한 프로그램입니다. 그 절차 또한 세키구치 리사의 메모리에 존재합니다. 그 절차에 따라 해당 로봇의 전자 두뇌를 해석하고, 커스터마이징하며 전송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 역시 선배야! 해줄 수 있어?”
“네, 유카 님.”
“리사 씨는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요.”
아이린이 말했다.
“아이린 님,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키구치 리사의 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입니다.”
“미안해요, 정정할게요. LISA 씨는 정말 대단한 프로그램이네요.”
“제 프로그램이 타 프로그램에 비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긴급 대응 프로그램은 저의 32배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시작기 42호는 저의 128배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시작기 46호는 저의 1024배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짧은 시간밖에 못 움직이거나 계속 잠만 자는 게 아니라, 당신은 제대로 움직이고 있잖아요.”
“제가 동작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지적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발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안 돼, 아이린. LISA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대화에는 아주 약해.”
“프로그램 인스톨 개시.”
유카가 콘솔을 조작했다.
“프로그램 인스톨을 시작합니다.”
LISA가 말하며 전송을 시작했다.
“시작기 46호의 전자 뇌를 해석 중입니다……. 전자 뇌 해석 종료. 입출력 디바이스를 체크합니다.”
LISA의 목소리에 맞춰 로봇이 눈을 깜빡이고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
“시각 인터페이스 제어 가능합니다. 음성 인터페이스를 체크합니다.”
LISA의 말이 끝나자 로봇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삐빅, 음성 인터페이스 테스트 중입니다. 아- 아- 아에이오우… 가나다라마바사….”
“음성 인터페이스 제어 가능합니다. 구동 장치를 체크합니다.”
LISA가 말하자 로봇이 침대 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이어 양손을 앞으로 뻗어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구동 장치 제어 가능합니다. 메인 프로그램을 링크합니다.”
로봇은 다시 누워 양팔을 몸 옆에 나란히 붙이더니, 잠들 듯 눈을 감았다. 10분 정도 지나자 LISA가 입을 열었다.
“전송 완료했습니다. 전송 케이블을 뽑고 재기동해 주십시오.”
“선배, 고마워. 이제 쉬어.”
“네, 유카 님. 시작기 37호, 식별명 LISA, 정지합니다.”
LISA는 눈을 감고 조용해졌다.
“아카가와 군, 케이블 뽑아줘.”
“오케이.”
아카가와가 케이블을 뽑고 머리 덮개를 닫자, 로봇이 가벼운 웅 소리를 내며 재기동했다.
“삐빅! 시작기 46호, 식별 코드 MINAMI, 기동했습니다. 유카 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내가 누군지 알겠어?”
“네, 유카 님. 제 프로그램에는 유카 님이 마스터로 초기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래, 알았어. 선배가 그렇게 해줬구나. 근데 MINAMI라는 이름은 좀 곤란한데.”
“저는 야오 미나미의 기억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 식별명이 MINAMI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 그럼 여기 온 이유 같은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겠네?”
“야오 미나미는 주간 파인더의 기자였습니다. 야오 미나미는 시노사카 사이버네틱스사의 활동 내용에 의문을 품고 취재 허가를 편집장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독단으로 잠입했다가 당신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럼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편집부 아무도 모르는 거네?”
유카가 확인했다.
“네, 유카 님. 야오 미나미는 기사를 송고하기 전에 붙잡혔으므로 이곳의 정보는 어디에도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MINAMI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아이린이 말했다.
“정말이야. 이곳의 비밀도 지켜진 셈이니까.”
유카는 아이린에게 대답하고 로봇을 향해 말했다.
“그럼 넌 이제부터 아이린의 대역을 맡아줘야겠어. 지금부터 네 식별명은 ARX-046이야. 아이린의 이름에서 A와 R, X는 시작기(Prototype)라는 뜻이고, 046은 일련번호야. 알겠지?”
“네, 유카 님. 지금부터 제 식별명을 ARX-046으로 인식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네 마스터를 변경할게. 새로운 마스터는 여기 있는 아이린이야. 아이린, 로봇 앞에서 자기 이름을 말해줘.”
“저는 룽 아이린이에요.”
“음성 등록 완료했습니다. 아이린 님을 새로운 마스터로 등록하고, 유카 님의 권한을 서브 마스터로 변경했습니다.”
“음, 느낌 좋은데.”
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스터로 해줄 거야?”
아카가와가 물었다.
“글쎄. 그럼 서브 마스터를 추가해 볼까? 아이린, 아카가와 군을 서브 마스터로 등록하라고 로봇한테 명령해 줘.”
“싫어요. 저랑 똑같이 생긴 로봇이 이 남자한테 명령받는 건 용납 못 해요.”
“너무해!”
“아쉽게 됐네, 아카가와 군. 나한텐 이제 서브 마스터를 추가할 권한이 없으니까, 마스터가 되고 싶으면 아이린한테 인정받도록 해봐.”
“저기 유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음, 우선 당분간 아이린이랑 같이 생활하면서 행동 패턴을 익히게 해야 해. 일단 아무거나 명령해 봐.”
“ARX-046, 일어나세요.”
아이린이 명령했다.
“네, 아이린 님.”
ARX-046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나의 대역이에요.”
“저는 아이린 님의 대역입니다.”
“대역이 뭔지 알고 있나요?”
“제 목적은 아이린 님을 대신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럼 마스터랑 서브 마스터 이외의 사람들 앞에서는 나인 것처럼 행동하세요.”
“네, 아이린 님. 저는 아이린 님으로서 행동하겠습니다.”
ARX-046은 아이린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테스트해 볼까?”
유카가 제안했다.
“아카가와 군, ARX-046한테 이름 좀 물어봐.”
“알았어. 야, 네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은 룽 아이린 님입니다.”
“자기 이름에 ‘님’을 붙이면 어떡해요! 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룽 아이린이에요’라고. 알겠어요?”
“네, 아이린 님.”
“자, 아카가와 군. 한 번 더.”
“응. 네 이름이 뭐야?”
“룽 아이린이에요.”
“내 이름은 아카가와 고조. 고라고 불러줘. 아이린이라고 불러도 될까?”
“네, 고 님.”
“기다려요, ARX-046! 난 이런 무례한 남자한테 살갑게 대답 안 해요.”
“네, 아이린 님. 무례한 남자에게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휴우…. 저기 유카, 이거 꽤 힘든 일이겠는데요.”
“그러게. 아이린의 사고 패턴을 제대로 흉내 내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어.”
“그리고 이 딱딱한 말투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응, 확실히 별로네. 그럼 일단 인컴으로 아이린의 말을 그대로 로봇 스피커로 내보낼 수 있게 할게. 그 발음이랑 억양을 메모리에 축적해 나가면 점점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될 거야.”
“성공한 모양이군요.”
위층에서 내려온 쿠로사키가 말했다.
“응, 예상보다 훨씬 잘 됐어.”
유카가 대답했다.
“역시 시노사카 씨답군요.”
“첸, 이 로봇한테 씌울 나랑 똑같은 가발이랑… 옷도 몇 벌 준비해 줘요.”
“아이린 아가씨, 벌써 한밤중입니다. 지금 당장 수소문하면 입수처가 한정될뿐더러, 심야에 이곳 연구소로 물건이 반입되는 걸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돌아가서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알겠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그러고 보니 졸음이 쏟아지네요.”
“이렇게 오래 머물 계획이 아니었기에 호텔 예약이 안 되어 있습니다. 역 앞 호텔도 만실이라 아가씨께 어울리는 숙소를 찾으려면 누마즈나 미시마까지는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자면 안 될까요?”
아이린이 물었다.
“가면실이 있긴 합니다만, 2인용 간이침대가 있을 뿐입니다.”
“난 아무 데서나 잘 수 있으니까 여기서 잘게.”
유카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까지 로봇이 누워 있던 작업대를 가리켰다.
“침대는 아이린이랑 첸 씨가 쓰고, 쿠로사키 씨랑 아카가와 군이 응접실 소파에서 자면 되겠네.”
“유카랑 같이 있으면 저도 여기서 자도….”
“사장님!”
“아이린 아가씨!”
쿠로사키와 첸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쿠로사키가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사장님을 이런 곳에서 주무시게 할 순 없습니다. 리더로서 자각이 없는 겁니까?”
“아이린 아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쿠로사키 씨가 하신 말씀 그대로 돌려드리죠.”
“그럼 내가 여기서 잘게요!”
아카가와가 끼어들었다.
“유카랑 아이린이 침대에서 자고, 쿠로사키 선배랑 첸 씨가 응접실에서 자면 딱이잖아.”
“안 돼.”
쿠로사키가 단호하게 잘랐다.
“너 같은 놈을 기밀투성이인 이곳에 혼자 둘 순 없다. 넌 응접실 바닥에서 자.”
“그렇게 결정됐군요.”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 아가씨와 유카 씨는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저희는 응접실에서 자겠습니다.”
“너무해….”
아카가와는 혼자 처량한 소리를 냈다.
“그럼 아이린, 로봇 정지시켜.”
“알겠어요. ARX-046, 정지하세요.”
“네, 아이린 님. ARX-046, 정지합니다.”
ARX-046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고, 차렷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럼 이제 자러 가자.”
일행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연구실을 나섰다. 유카와 아이린은 샤워실로 향했다. 로커에는 병원에서 쓰는 것 같은 프리 사이즈의 심플한 파자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몸을 씻고 파자마로 갈아입은 뒤 가면실 침대에 누웠다.
“저기 유카, 앞으로 저 로봇을 어떻게 교육하면 좋을까요?”
“음, 역시 아이린이랑 같이 생활하는 게 제일 빠를 거야.”
“같이 생활이라…. 대학 같은 데도 같이 가면 재밌겠네요. 내 쌍둥이 동생이라고 속이고…. 다들 깜짝 놀라겠죠?”
아이린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쪽은 첸 씨가 유학 수속 같은 걸 다 알아서 해주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일상 대화 정도는 들통나지 않게 해둬야 해.”
“그렇겠네요. 우선 제 방에서 훈련시켜야겠어요.”
“그럼 나도 가끔 보러 갈게.”
“제 맨션은 오토락이니까, 전자 도어락에 유카 지문을 등록해 둘게요. 그럼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잖아요.”
“그게 말이지, 내 지문은 얇아서 기계가 잘 못 읽어. 물론 대역 로봇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둬야 할 거야.”
“그렇다면 관리 회사에 말해서 열쇠를 바꾸게 할게요.”
“그렇게 간단히 돼? 맨션이잖아.”
“‘제’ 맨션인걸요. 할아버님이 사주셨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다른 집은 다른 사람 소유잖아. 오토락을 바꾼다는 건 주민 전체한테 영향이 가는 거 아니야?”
“다른 집요? 아… 그런 뜻이었군요. 유카는 제가 맨션 호실 하나를 샀다고 생각했나 보네요. 아니에요. 할아버님이 사주신 건 맨션 건물 ‘한 동’이에요. 제가 건물주라 제 방 말고는 전부 세를 주고 있죠.”
“뭐… 맨션 전체를? 그걸 아이린 한 명을 위해서?”
“그러니까 할아버님 돈 씀씀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요.”
“방 한 칸이라도 유학 때문에 사는 건 이상해. 근데 아예 차원이 달랐네. 이런 거대 연구 시설에 어떻게 투자를 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납득이 가네.”
“이래 봬도 회사는 이익을 내고 있고, 월급도 홍콩에선 톱클래스라 사원들도 주주들도 불만이 전혀 없어요. 이런 경영을 해오신 할아버님의 뒤를 제가 이을 수 있을까요?”
“괜찮아. 아이린이라면 분명 잘해낼 거야.”
“고마워요, 유카. 하지만 전 경영공학을 공부하고는 있지만, 할아버님이랑 다르게 숫자에 약하거든요.”
“걱정 마. 그런 건 계산 잘하는 로봇한테 시키면 돼. 나도 LISA한테 경영 판단을 몇 번이나 시켜봤는데,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
“그렇겠네요. 하지만 LISA는 우수한 선배였잖아요. 저 미나미라는 기자는 아무리 봐도 우수해 보이진 않던데. 앞뒤 안 가리고 사고 칠 타입이죠.”
“그것도 그렇네. 우수했으면 붙잡혀서 로봇이 될 일도 없었겠지.”
“확실히 그래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킥킥 웃었다.
“그럼 난 이제 잘게. 잘 자, 아이린.”
유카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자마자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잘 자요, 유카. 어머, 벌써 잠들었네.”
아이린도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정문 현관에 대기 중인 리무진 운전석에서 첸이 말했다.
“유카, 꼭 제 맨션에 놀러 와야 해요!”
뒷좌석에서 아이린이 소리쳤다. 아이린 옆에는 대역 로봇인 ARX-046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최대한 빨리 갈게. 인컴이랑 로봇용 아이린 얼굴도 전해줘야 하니까.”
“나도 가도 돼?”
“당신은 안 불렀거든요.”
“너무해!”
“이봐 아카가와, 적당히 좀 해라.”
“그럼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다들 건강하십시오. 다음 회의 일정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첸이 리무진을 출발시켰다. 뒷유리에 두 개의 실루엣을 남긴 리무진은 조용히 멀어져 갔다.
“우리도 가죠. 벌써 인테리어 업자가 와 있습니다.”
쿠로사키는 주차장에 세워진 트럭을 가리키며 타고 온 차를 향해 걸어갔다.
“잠깐만! LISA를 잊고 왔어.”
유카가 건물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기다리십시오, 사장님. 지금 지하로 들어가면 인테리어 업자에게 구조가 들통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을 기다리셨는데, 몇 주만 더 참으십시오. 홍콩에서 바디가 도착하는 것도 그쯤일 겁니다.”
“그래, 알았어. LISA도 머리만 있는 것보단 몸이 있는 게 낫겠지.”
“그럼 가자, 유카!”
“넌 전철 타고 가.”
“에엑, 왜 나만요!”
“너 전철 좋아하잖아. 올 때도 굳이 혼자 신칸센 타고 오더니. 아까 신주쿠행 시간표 찾아볼 때도 그렇게 좋아 죽더만.”
“그건….”
“다음 회의 늦지 마라.”
말을 마친 쿠로사키가 차를 출발시켰다.
“쿠로사키 선배-! 유카-!”
차는 아카가와를 남겨둔 채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무해…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아카가와는 역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터덜터덜 내려가기 시작했다.
【끝】
